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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공화국기(1948~1960) 육군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형성

          윤시원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was established by the 1949 military service law. In the process of institutional stabilization of the draft system, the establishment of a reserve manpower mobilization system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During the period of the first Republic of Korea, the Ministry of Defense suffered trial and error over the years to form a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The first stage is the formation of the National Gurad. The National Guard was essentially the type volunteer military system borrowed by the US National Guard system. As a result, the Military Service Act was declared in 1949, and conscription was introduced systematically. In the long term, if the reserves were discharged through conscription, the National Guard that recruited civilians had no basis for existence. In addition, it was difficult to keep the National Guard forces smoothly due to the lack of material base in the early days of the military. Due to the lack of manpower to train and the equipment necessary for training, the military functions of National Guard were limited. Because of this, the National Guard was disbanded in 1950. The ROK Ministry of Defense attempted to reestablish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after the interven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army during Korean War. The Ministry of Defense mobilized the 2nd grade to form the National Defense Forces and foster them as reserve forces. The National Defense Forces based upon the characteristics of conscription system. However, the National Defense Forces dismantled in a short period of time without sufficient preparation, causing a lot of controversy. Since then, the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has been transformed into labor divisions. The Department of Defense organized a Citizen Armed Forces in 1953, learning from the failure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In 1955, however, the Army organized 10 reserve divisions and the Citizen Armed Forces lost its ground for existence. The Ministry of Defense has unified reserve power mobilization into the command system of itself through the Reserve Division. The Citizen Armed Forces dismantled naturally as an efficient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was established. The establishment of the Army's reserve division was an opportunity to complete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within the framework of the draft system. Personnel trained in military service as active duty soldiers were able to be regularly called up into the reserve division to receive military education after they returned to society. As a result,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could be completed.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안정화 되는 과정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확립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1공화국 시기 국방부는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수년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48년부터 추진된 호국군 편성이다. 호국군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주방위군 제도의 영향을 받은 모병제 성격의 제도였다. 이 때문에 1949년 병역법이 선포되고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도입되자 모병제에 기반한 호국군은 모순적인 존재가 되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징병제를 통해 예비역이 배출되면 민간인을 모병 대상으로 한 호국군은 존립할 근거가 없었다. 또한 건군 초기 부족한 물질적 기반 때문에 호국군을 원활히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인력과 훈련에 필요한 장비 부족 때문에 호국군의 군사적 기능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호국군은 1950년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 계기는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국방부는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이를 예비전력으로 육성하려 했다. 병역법에 규정된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한 것에서 나타나듯 국민방위군은 본격적으로 징병제의 성격을 가진 예비전력 동원체제였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충분한 준비 없이 단기간에 급조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호국군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에 필요한 물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단기간내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국민방위군의 조직은 노무사단 등으로 전환되었다. 국방부는 국민방위군의 실패를 교훈 삼아 1953년 민병대를 조직했다. 민병대의 운용방식은 호국군에 가까웠으나 동원 방식에 있어서는 징병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육군이 예비사단을 편성하면서 민병대는 존립할 근거를 잃었다. 국방부는 예비사단을 통해 예비전력 동원을 국방부의 지휘계통으로 일원화 시켰다. 효율적인 예비전력 동원체제가 수립되면서 민병대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육군의 예비사단 창설은 징병제의 틀 안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완성하는 계기였다. 징병을 통해 현역병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인력은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예비사단에 동원되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서 한국의 징병제는 징집 및 소집 체제를 완전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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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윤치호의 군사문제에 관한 이해

          강명숙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6

          When we studied about the questionable figure Yun Chi-ho who was social reformer in late Joseon dynasty, it is said that Yun had been more concerned about the modernization than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Therefore his thoughts had been considered as pro-japanese tendency from the start. Finally Yun became one of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1938, when he was 74 years old, related the 'Hung-up Club Accident'. However, Yun insisted that modernization could not promote without preventing the aggressions of imperial countries. His career background was related deeply to military field, thanks to his family, especially his father’s assignments, which were the officer of Bulgigun(kind of Government militaty forces) and minister of National Defence. As Yun stressed on the military power of the country so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independence and modernization of the country. Chosun Dynasty had promo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for strengthening the king's security above all. But the reformations were not successful. There were three major reasons for that as belowFirstly, the military fields had been neglected for a long time as compared with the civilian service field by the confucian principle in Joseon dynasty. Therefore there had been not good military experts due to the social trends and thoughts in Joseon. Secondly, the surrounding foreign countries such as Japan, Quing, and America initia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The influence of these countries on the military systems had been frequently changed, therefore the reformations of Joseon would stop at those times. As a result, troops could not get the modern power. Thirdly, soldiers were indisciplined and corrupt to make money. For those reasons, the military reformations of Joseon were failure. The international opinion about Korea was belgian neutrality in order to keep the korean independence. On the contrary, the military reformation of Japan had been successful. Japanese society had respected martialism traditionally, so it was natural for Japan to adopt western military systems flexibly from early times. Therefore Japan had strong modern troops. Japan got the victory in Sino-Japanese War and reformed Korea on the face of it. Actually, Japan invaded and plundered the Korean peninsula. Korea wanted to use Russian powers to eliminate the japanese control. Russia and Japan competed bitterly in Korea. Finally, Japan won in Russo-Japanese War. Japan should dominate over the Korea. During the two wars, Yun would make comparisons and analyses between China and Japan, Russia and Japan in the military powers and fighting efficiencies. Yun watched and appreciated the battles and war situations in crucial times. Yun concluded that Japan should dominate over Korea. He gave up the official public services and looked for other reformations with people. 윤치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윤치호가 국가의 독립보다 근대화를 우선시하여 문명국 지배하의 근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치호의 개화론은 친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내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문명이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하고, 조선의 국정개혁도 군사개혁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립이 근대화의 기본 조건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무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윤웅렬은 별기군의 훈련 책임자였기에 윤치호의 유학은 군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윤웅렬이 절도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내 조선의 군사개혁을 개인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도 있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군사개혁은 국왕의 안위를 위해 최우선 추진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치호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았다. 먼저 조선왕조의 유교적 문치주의가 상무정신을 말살하여 군대양성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다음은 근대 군사력에 대한 전문가가 집단이 없어 외세의 주도로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였는데 국제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주도 세력의 변화로 군사제도가 제대로 안착되지 못했다. 군대조직은 만들어졌으나 인적 물적 자원만 소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외세와 연관된 조직들의 난립으로 국가적 군대로도 거듭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관료들의 부패와 맞물려 군인들의 기강도 해이해져 군대는 새로운 부패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결국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은 근대적 군대양성에 실패하여 국제사회에서 벨기에 형 중립화(=보호국화)의 추진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사들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어 상무정신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었다. 그 결과 지역의 번주들이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실험하여 종국에는 일본의 군사제도를 형성하였다. 세계 최고의 영국 해군과 독일 육군의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만들었고 근대적 무기와 작전으로 무장했다고 보았다. 일본의 근대적 군사력은 양무운동으로 유사(類似) 근대화된 청군에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에서도 지리적 약점과 보급선의 문제로 소극적인 러시아 군대를 적극 공격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제국주의 시대 제3세계는 외세의 침입을 방어해야 독립도 근대화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관료들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근대적 개혁을 새로운 수탈통로로 만들었다. 조선은 독립의 첫 번째 조건인 군대양성에 실패했고 국제사회는 중립화(벨기에형)라는 사기(詐欺)적 방법으로 독립의 후원자(보호국화)를 결정하려 하였다. 일본은 국제여론을 등에 업고 조선 침략을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다. 윤치호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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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전쟁시기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과 군사사적 특징

          김경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임진전쟁에서 조선군의 연전연패는 일본군이 한양, 평양까지 점령하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평양에서 의주의 선조를 압박하던 일본군은 후방지역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에 의해 전술적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본 글은 이러한 기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 및 임진전쟁에서 차지하는 군사사적 특징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영천성전투, 영천전투 등의 용어와 달리 영천성을 수복한 전투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임진전쟁 초기 전황속에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을 조선군, 일본군, 의병 등으로 살펴보고 군사사적 성과를 정리한다. 추가하여 임진전쟁의 관점에서 영천성수복전투가 향후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 및 활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전쟁의 발발이후 영천지역에 진주한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남기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영천지역의 의병은 주변 지역의 의병과 연합하여 창의정용군을 결성하고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루었다. 의병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상호 연합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혹여 연합하더라도 지휘체계의 분란으로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천수복전투에 임한 창의정용군은 지역적 분란을 극복하고 국가위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단결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영천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주변 지역에서 이에 호응하여 다양한 지역의 의병이 참여했으며, 상호 이익관계를 따지지 않고 일본군을 축출해야 한다는 시대상황에 동의했다. 또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의병장이 창의정용군을 지휘하여 전근대 가장 어려운 전투였던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연합하여 최정예의 일본군을 대상으로 싸워 이긴 전투이며, 군사장비가 거의 없는 의병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투이며,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공성전을 열악한 의병이 이긴 전투였다. 영천성수복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경상도의 주요 전략적 군사경로를 상실하고 경주지역으로 후퇴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이후 조선이 명나라의 구원군을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영천성수복전투는 단순히 전쟁사적, 전투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군사외교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론적으로 영천지역의 창의정용군은 전쟁 초기에 가장 뛰어난 의병부대였으며, 영천성수복전투는 열악한 의병부대가 정예 일본군을 대상으로 공성전이란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루어 전쟁의 전체 전황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 전투였으며, 군사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으며, 국제전쟁으로서 임진전쟁이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투였다. 향후 임진전쟁 연구에 있어 영천성수복전투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여 전쟁사적 의미를 규명해야 하며, 임진전쟁 당시에 영천성수복전투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정리해야 영천성수복전투의 진정한 군사사적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During the Imjin War, the Joseon army's losing streak was caused by Japanese troops occupying both Hanyang(漢陽) and Pyongyang(平壤). The Japanese forces, which had pushed Pyugyang to press king Sŏnjo(宣祖) fled to Uiju(義州), were forced to make tactical changes due to community-center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義兵) in the rear. Based on these previous research results, this article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永川城收復戰鬪) and the military historical features of the Imjin War. This paper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n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as Joseon, Japanese, and volunteer soldiers from the standpoint of the battle that re-seizured Yeongcheonseong(永川城戰鬪), unlike terms such as Yeongcheon Battle(永川戰鬪) and to summarize the military history of the battle. In addition, we will look at how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recognized, evaluated and utilized in the future from the Imjin War perspective.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the Japanese troops in the Yeongcheon region advanced north, leaving some part of troops behi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Yeongcheon region joined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surrounding regions to form Changuijeongyong-army(倡義精勇軍) and continued fighting with the Japanese army.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rarely associated with each other to reflect local characteristics. Even i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united, they could not fight efficiently due to the disruption of the command system. Nevertheless, Changuijeongyong- army, which join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united and prepared for battle to overcome regional turmoil and overcome the crisis. In response to the outbreak of the military service in Yeongcheon, in response to the rising from the surrounding area, various military veterans participated and agreed to the era of ousting Japanese troops without regard for mutual interests. In addition, an army leader(義兵將) with excellent military capabilities successfully commanded Changuijeongyong- army, which successfully ran a siege warfare ,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pre-modern time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s a battle fought against the best Japanese troops by alli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not regular troops, a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ith little military equipment . It was a battle that defeated a Japanese army, and a battle that defeated the Siege warfare, which was possible only with the overwhelming strength and experience of a poor soldier,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hen the Japanese defeat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they lost the main strategic military route in Gyeongsang-do(慶尙道) and retreated to Gyeongju(慶州).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later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Joseon demanded the Ming Dynasty. In other word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a very important battle not only in terms of war and combat history, but also in terms of military diplomacy. In conclusion, the Changuijeongyong- army in Yeongcheon was the best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an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on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Siege warfare against the elite Japanese army armed with a fowling piece by the poor Changuijeongyong-army with limited military equipments. The battle was a turning point that greatly changed the overall situation of the war. This battle was of great military and diplomatic significance, leading to the involvement of Ming Dynasty’s armed forces in Imjin War, and it was the best feature of the Imjin war as an internationa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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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 경험과 그 영향

          김도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5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experiences of the early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went to study in West Germany in the 1960s and the impact of their experiences on the Korean military. Under the agreement between Korea and Germany in 1964, from 1965, the 2 cadets of Korea military academy sent to West German Army Academy as a status of military cadet, and at the same time, officers attended the West German Command and Staff college. Looking at the related research papers, there is only research on the study of Korean military to the United States. In the situation where there was little literature on Korean military's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this article revealed the specific types and experiences of military study in West Germany by analyzing the oral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military collected by the Contemporary Korean Oral History Research Group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yujanggak Korean Studies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early days, 10 ROK military officers were dispatched to three locations, including a military academy, a commanding and staff college, and a general university in West Germany. Furthermore, this article revealed how ROK military West German students tried to apply the German military system within the Korean military since the 1980s, when military officers or officers at the level of military officers experienced military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and promoted up to become a Korean military general. For example, the German mission-based tactics were included as an FM(Field Manual) and the German decree on military service were not only translated and but applied to some ROKA units. Not only did some of the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had experienced studying in West Germany studied American military at the same time, they were also able to confirm som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American military system and German one. It is expected that the concrete situation of West German military study by the Korean military will be restored through the voices of experienced peoples, as well as fill the gap of history in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Germany 본고는 1960년대 서독으로 군사유학을 갔던 초창기 한국군 장교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이 한국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4년 한국과 독일 간 협정에 따라 1965년 한국군은 처음으로 서독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2명을 파겼했으며, 이후 한국군의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도 서독 지휘참모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동안 한국군의 해외 군사유학에 관련한 연구는 미국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본고는 처음으로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의 양상과 실태를 밝히고자 했다. 특히 본고는 한국군의 서독 군사유학 관련한 문헌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단이 수집한 한국군 관련 구술자료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서독 군사유학의 유형 및 경험을 밝힐 수 있었다. 초창기 한국군 장교들의 서독 군사유학은 육군사관학교·지휘참모대학·일반대학 등 세 곳에 10명 남짓 파견되는 형태를 보였다. 특히 한국군의 사관생도이거나 위관급 수준의 장교들이 초기 서독 군사유학을 경험한 후, 1980년 전후부터 한국군 내에서 장성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군 내에 독일식 군사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했다. 특히 독일식 임무형 전술이 교범 내용으로 중요하게 포함되거나 독일군의 복무규율이 그대로 번역되어 한국군 일부 부대에서 적용되는 사례 등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독일 군사유학을 경험한 한국군 장교들 중 일부는 미국 군사유학도 동시에 했다. 따라서 미국과 서독의 군사유학을 모두 경험한 인물들은 미국식 시스템과 독일식 시스템의 비교 및 평가하는 구술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본 연구는 기존에 전혀 밝혀지지 못했던 한국군의 초창기 독일 군사유학의 구체적인 실태를 실제 경험한 구술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복원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차원의 한독관계사의 양상을 밝힘으로써 기존 한독관계사 연구의 공백도 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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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군사전략의 역사적 고찰

          이상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Military strategy is a sort of military action plan and a way of action for the creation and operation of military means to effectively support the achievement of national interests and national goals. Therefore, the impact on South Korea's security is enormous, depending on the military strategy what the North Korea chooses. This military strategy consists of three elements such as military objectives, military strategic concepts, and military resources. North Korea's consistent military objectives has been to communize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on the 9th of September in 1948. To achieve this military objectives,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adopted by North Korea is an offensive strategy.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develop military resources to realize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called offensive strategy, and is now believed to be in the final stage of developing nuclear weapons. South Korea should know exactly that the North Korea's military strategy lies in communizing the entire Korean Peninsula. It also calls for an integrated countermeasure to prepare for North Korea's military threats and strengthening South Korea's national security. 군사전략은 국가이익과 국가목표 달성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적 수단을 조성 및 운용하기 위한 군사행동 계획이자 행동방책이다. 따라서 북한이 어떤 군사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이러한 군사전략은 군사목표, 군사전략개념, 군사자원의 3요소로 구성된다. 북한이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군사목표는 한반도의 공산화이다. 이러한 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채택한 군사전략개념은 공세전략이다. 북한은 공세전략이라는 군사전략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자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고 있으며, 현재는 핵무기 개발이 완성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전략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데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한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비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통합적인 대응책 마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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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장제스 정부의 군사적 위기, 협력모색, 그리고 좌절(1949-1950)

          정형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6·25전쟁 발발 이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친미를 표방하며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당면한 문제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양국이 바라는 군사적 지원에 대해 방관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양국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를 당시 양국의 군사적 위기로 간주하였다. 특히 고조되어가는 양국의 위기의식을 최절정에 이르게 한 사건은 ‘주한미군철수’와 ‘중미관계백서’발표였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자유진영의 리더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유진영 국가를 지지하고 지원할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이익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미국은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정부는 대체로 이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동아시아에서 이념대립을 고조시킬 수 있다며 우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북대서양조약과 같은 반공동맹을 주장했던 퀴리노가 미국의 회유에 의해 생각을 철회하고 반공동맹을 경제, 문화적 관계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장제스는 미국을 설득하여 계속적인 군사지원을 획득하려 하였다. 그 첫 번째 방법으로 태평양동맹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 진해회담을 추진하였다. 한중양국의 결연한 의지가 미국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변화가 그다지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 한중양국은 차선책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양국 상호간의 군사협력이었다. 한국은 미국에게서 얻은 경제원조로 미국의 무기를 구입하려는 시도를 꾀하였지만, 그것이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치자 대만에서 군수물자를 구매할 구상을 하였고 구체적인 구매내역을 보냈다. 한편 대만은 제주도를 대륙에 반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로 구상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한국정부는 근본적인 논의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였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상호 군사협력 모색은 미국의 원조가 막혀 있을 때 그 차선책으로 모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장제스가 생각하는 상호협력은 다른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게서 무기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부담스러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퀴리노의 반공동맹이 변질되어 경제, 문화적 관계로 국한된다 하더라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친밀도에서 퀴리노의 역할이 장제스보다 더 확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은 동맹에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을 제외시키자는 주장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표방한 반공동맹은 냉전시기에 표출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동맹을 맺는데 있어 기반되어야 할 것은 각각의 정권이 기반을 갖추고 영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질서 속에서 중국과 한국은 순망치한의 관계로 서로 의지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전후로 장제스정부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약한 정권이었다. 또한 한중양국 모두가 의지해야 할 최우선의 배경은 바로 미국이었고, 미국에 의해 그들의 관계도 변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태도에 따라 한중양국은 우방이었으나 불가분의 우방은 아닐 수 있었다. 미국도 자신의 이익과 안정보장을 염두에 둔 국제관계를 전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6·25전쟁이 발발... Before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claimed to be pro-American and tried to address pending issues, counting on aid from the United States. The U.S., however, assumed an indifferent and passive attitude toward military assistance that the two countries wanted to receive. The two governments regarded the similar attitude of the U.S. government as a military crisis in both countries. In particular, at the peak of the sense of crisis in the two countries were the announcements of the “withdrawal of the U.S. troops in Korea” and the “White Paper on the republic of China(Taiwan)-US Relations.” In the Cold War, the U.S. played a role as a leader of the free world, but that did not mean the nation could unconditionally support and assist others in the free world, ignoring its own national interests. The U.S. was not able to give a positive answer to the question about whether the influence of Korea and Taiwan in East Asia on the U.S. interests could be undeniable or not. Moreover, the U.S. government was concerned about a possibility that its military assistance to the two countries could heighten ideological conflicts in East Asia. For this reason, Elpidio Quirino who insisted on forming an anticommunist alliance like the North Atlantic Treaty withdrew his stance by the conciliation of the U.S., and changed into the anticommunist alliance in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Back then,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 tried to persuade the U.S. to continue to provide military assistance for the two nations. One of their attempts was the Jinhae Meeting held to carry on discussions on the Pacific Alliance. The two leaders seemed to think that their determined attitude would press Washington. However, as the U.S. did not show a positive change in its stance, the two countries had to have an alternative plan in mind, which was military cooperation between the two nations. Korea attempted to purchase arms from the U.S. with the economic aid that Korea received from Washington, but reached a deadlock several times. Korea planned to purchase war supplies from Taiwan and sent a detailed list to Taiwan. Meanwhile, Taiwan planned to set up a military base in Jeju Island to launch counterattack mainland China.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denied its involvement in Chiang’s plan, saying there was no discussion about it at all between the two nations.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s attempt to seek military cooperation was considered as an alternative plan in case aid from the U.S. would be seized, but the bilateral cooperation that the two leaders envisioned was different. Later, Rhee was able to receive arms aid from the U.S., and thus to reject Chiang’s burdensome proposal. Moreover, Rhee made clear that he would follow Quirino’s anticommunist alliance even if the alliance was degenerated and was limited 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He came to think that the role of Quirino in its relation with the United States was stronger than that of Chiang. Rhee even said that he could accept the suggestion to exclude Chiang’s Kuomintang of China from the alliance. The anticommunist alliance that they claimed to support was the most commonly observed form during the Cold War. What mattered in forming an alliance was whether each government had a solid and lasting foundation. The rel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China and Korea in the traditional order was intimately interdependent, and they had to count on each other. Around the time of the Korean War, however, Chiang’s government was weak like a candle flickering in the wind. In addition, the background that both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had to prioritize was the U.S., and the two nations’ relation could be affected by the U.S.. For this reason,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were allied due to the attitude of the U.S., but the alliance was not insepara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U.S. that had to m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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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 본 북한 『군 엘리트』의 위상 변화 - 당 정치국과 당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

          이흥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3

          North Korea considers Kim Il-sung's armed struggle against imperial Japan as a historical context and seeks the root of the Baekdu bloodline, which it claims is the main line of descent of hereditary succession, in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As these anti-Japanese armed struggles are rooted in the military atmosphere, the People's Army is the historical enemy of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and the military elite is a key force in the defense of the regime and an important supporter of the third generation. However, since Kim Jong Un took power, the research has put a position on the possibility that a reduction in the value of conventional forces due to the reemergence and upgrading of nuclear missiles could lead to a weakening of the military's status, which could serve as a potential source of tension threatening the stability of the regime. Therefore, this paper starts from this sense of issue and looks at the proportion of military elite in the Party Political Bureau,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Party, the National Defense Commission and the President's podium, which can be viewed as the nucleus of North Korean power, while paying attention to the characteristics of North Korea's hereditary succession and the regime.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military elite of Kim Il Sung's reign grew from a former member of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to a core elite from the main posts of the ruling party, the government and the military after the fourth party congress in 1961, but its position has weakened since it was purged in 1969 due to military adventurism. Second, the military elite advanced as the party's functions were shaped by military-first politics. Third, as the party normalized its function after Kim Jong Un took power, it carried out a forced generational shift to the military and focused on developing nuclear and missile capabilities. On the other hand, the ratio of the military elite to the party's central committee and the party's political and domestic affairs was the highest In conclusion, the status of the military elite has been maintained even after Kim Jong Un took power. Starting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Bbal-chi-san" the military elite has been trained as a privileged class in educational institutions such as Mangyongdae Revolutionary Academy, holding a certain portion of its shares in the main posts of the ruling party, the government and the military.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역사적 맥락으로 간주하고 세습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백두혈통의 뿌리를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다.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은 군사적 기풍에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적통이며, 군 엘리트는 체제 보위의 핵심세력으로 3대 세습의 중요한 지원세력이다. 김정은이 집권 한 이후 당국가체제로 정상화하면서 핵미사일 능력을 고도화 하였다. 이에 따라 역설적으로 재래식 전력의 중요성이 낮아지면서 군부의 위상이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체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잠재적 긴장요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 시각이 본 연구의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북한이 세습승계와 당국가체제라는 특성에 주목하면서, 군 엘리트의 위상 변화를 북한 권력의 중핵으로 볼 수 있는 당 정치국과 당 중앙위원회, 국방위원회와 주석단 에서 차지하는 군 엘리트의 비율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집권했던 시기에 군 엘리트는 빨치산 출신을 기반으로 1961년 제4차 당 대회 이후 당정군 주요직위에서 핵심엘리트로 성장했으나, 1969년 군사모험주의로 숙청 된 이후 입지가 약해졌다. 김정일 시대는 선군정치로 당 기능이 형해화되면서 군 엘리트가 약진했다. 김정은이 집권 한 이후 군부에 대한 강제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하였으나 군 엘리트가 차지하는 당 중앙위원회와 당 정치국내 비율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군 엘리트의 위상은 김정은 집권이후에도 지속 유지되고 있다. 군 엘리트는 빨치산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출발하여 만경대혁명학원 등 교육기관에서 특권층으로 양성되면서 당정군 주요직위에 겸직되어 일정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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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기 노무단의 구성과 활동

          나상철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5

          본 논문은 한국전쟁 중 동원된 노무인력의 형태와 운용 실태를 전반적으로 파악하면서, 특히 미 제8군 예하의 한국노무단(KSC, Korean Service Corps)의 구성과 운영을 중점적으로 분석한 연구이다. 이것은 예비병력이 KSC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는 것에서 출발해, 민족상잔 비극의 중심에 존재했던 진중 노무자에 대한 당대의 다양한 인식을 살펴 KSC의 군사사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개전 초, 미군의 참전에도 고전을 면치 못한 전쟁 국면은 낙동강까지 전선을 후퇴시켰고 폭발적인 소요에도 불구하고 각종 인력 동원은 법제의 공백으로 체계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이 북진하자 노무인력 동원 범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기 동원한 노무자는 빈번히 부대를 이탈했고, 언어장벽과 업무 효율 등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 노무인력의 조직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남하하여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고착되자 미군은 노무인력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한국노무단이 창설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KSC의 창설은 단지 미 제8군의 필요에 따른 일방적 정책 구현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예비병력과 비전투병력의 총 결집을 통한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을 기도하였고,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을 창설하였으나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태’로 국민방위군은 반년 만에 해체된다. 그리고 미 제8군과 마찬가지로 노무인력의 체계적인 동원의 필요성을 전쟁 기간 내내 몸소 겪은 국군은 예비인 제5군단을 창설한다. 이것은 국민방위군 소속이었던 인원들을 다시 흡수하여 5개의 사단 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미 양국의 필요가 합치되어 제5군단을 모체로 KSC가 창설되었고 그것은 작전지속지원을 위한 ‘근무 부대’로서 운영된다. This paper takes an overall look at the form and operation of the labor force mobilized during the Korean War, with a particular focus on the Korean Service Corps(KSC) under the Eighth U.S. Army. Despite the UN Forces’ particip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war, the front line ended up being pushed down to the Nakdong River. Attempting to overcome this crisis,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appealed to the whole nation for voluntary assistance in the war effort. However, due to the lack of legal basis for the mobilization of reserve forces and laborers and the declaration of emergency martial law leading to men being conscripted on the streets, systematic mobilization was unable to be implemented. About one month after the war broke out, the "Special Measures Ordinance on Punishment" was enforced, laying down the legal basis for conscription and mobilization. However, due to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refugees and floating population, systematic mobilization could still not be carried out as administrative procedures were difficult to implement. The range of the Eighth U.S. Army’s labor mobilization expanded across the country as the Incheon landing cleared the frontline and the military advanced northward. However, some of the refugees who were mobilized during the Nakdong River battle went missing while following the U.S. military northward. Moreover, problems such as the language barrier and the work efficiency of the Korean labor force were continuously made apparent, raising the need to organize the workforce. As the front lines again moved southward with the entry of the Chinese military and the conflict turning into a war of attrition along the present-day demarcation line, the organization of the workforce was stepped up, resulting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SC. The creation of the KSC was not just in accordance with the needs of the Eighth U.S. Army. The Korean government attempted to create a national all-out war system by combining the reserve and non-combat forces. It established the "National Defense Corps" in December 1950, but due to the so-called "National Defense Corps issue," the National Defense Corps was disbanded after half a year. The Korean Army, feeling the need for the systematic mobilization of the labor force throughout the war just like the Eighth U.S. Army, established the Fifth Corps, a reserve unit. It aimed to reabsorb personnel from the National Defense Corps to secure troops enough for five divisions. Meeting both the needs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e KSC was established with the Fifth Corps as its parent institution. Since the armistice agreement, all labor organizations have been gradually dismantled, with some remaining as the current KSC. Despite its distinctiveness, the KSC was termed the 'vacuum of Korean War research' because it had not received attention in either history or military studies at home or abroad. Therefore, this research’s significance lies in finding historical significance by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those who existed at the center of Korea’s national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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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전투 간 국군 제9사단의 화력운용 고찰 - 포병운용을 중심으로 -

          조남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7

          The study attempts to research the Fire employment of the Battle of White Horse Hill, in which the 9th ROK Infantry Division won against the 38th Corps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in October 1952. Although many studies have been conducted officially and academically on the battle, however most of them are the study of analyzing the battle centered on maneuvers, whereas the role of firepower had been accepted less interests, in some cases, to extent of the just amount of ammunition that used during the battle. Even the numbers of artillery units participating are different based on studies. In this regard, this study analyzes the strength of firepower mobilized, operational plans, command and control systems, and actual performance of those units, based on primary historical records, like combat situation reports(sitreps) from the 9th ID, special reports from the Ⅸ U.S. Army Corps, reports from the U.S. Military Advisory Group, and testimonies from veterans. According to the study, the 9th ID put more firepower assets into the battle than previously known. even though the 9th ID operated the division-level fire support control center for the first time in the ROK Army, it smoothly commanded and controlled huge amount of firepower assets through flexible measures and pre-preparation. Although there were also negative incidents such as misfires during the battle, they carried out the battle in a variety of ways in the joint operation with the U.S. military. The effectiveness and efficiency of these fire employment was well illustrated by the 9th ID's success to dispel incoming Chinese troops through the front lines by rapid fire employment. In conclusion, by using firepower effectively and efficiently, the 9th ID was able to win the Chinese troops three times more than themselves. 이 연구는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3배가 넘는 중국군 제38군에 맞서 싸워 이긴 백마고지 전투를 다룬다. 비록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은 기동을 중심으로 전투를 분석하고 있으며 화력에 대한 부분은 누락되거나 다루더라도 사용한 탄약량을 바탕으로 한 분석 정도만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참가한 포병의 수도 연구마다 제각각인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연구는 국군 제9사단의 전투상보, 미 제9군단의 특별보고서와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서, 참전용사들의 증언 등 1차 사료를 중점적으로 백마고지 전투에 어느 정도의 화력자산들이 운용되었는지, 어떠한 계획을 세웠는지, 어떠한 지휘체계를 가졌으며 이러한 것들이 전투의 결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국군 제9사단은 더 많은 규모의 화력자산들을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9사단은 융통성 있는 조치와 사전준비를 통해서 국군 최초로 사단급 화력지원통제소를 운용했음에도 대규모 화력자산들을 원활하게 지휘통제했다. 또한 비록 전투 중 오폭등과 같이 부정적인 사건들도 있었지만 미군과의 연합작전에 있어서도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력운용의 효과성과 효율성은 중국군이 전선을 뚫고 밀어붙이는 급박한 상황들을 신속한 화력운용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들에서 잘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화력운용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3배가 넘는 중국군을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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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의 클라우제비츠와 머핸 찾기: 전간기 영국공군참모대학의 군사사 교육

          이상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3

          Great Britain established the Royal Air Force as an independent service of armed force like Army and Navy during the first world wa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history. Since the foundation of new organization was based on the wartime need, it was hardly suppressed by high pressures of reduction in defense budget and manpower during the inter-war period. The Air Force Staff College(Andover) was built in this mood and from the start it maintained the aim not just to develop the administrative skills of officers but also to forster potential leaders. For this purpose, military history was a major tool. Andover’s curriculum covered the variety of military histories even from the ancient one to the First World War in spite of the shortness of newly founded Air Force’s history. The first commandant, Air commodore Brooke-Popham, played a serious role in this process, because he thought the broad approaches on military history was highly important for the future commanders.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although both were histories without aircraft, were actively handled in the class. Especially to find the potential roles of the Air Force, sometimes the existence of aircraft was conceived in some campaigns with great details. Several ‘Great Men’ in military history were regarded as important figures in the Leadership class. In this as well, the Air Force case was not yet noticeable, so Garibaldi, Napoleon, even Nelson were accepted as role models and studied by officer-students. Also lecturers and students seriously considered military history to find ‘principles of war’, while given the newness of Air Force, they never neglected other forces’ principles. Particularly the Seven Years War was suggested as the best example for ‘Higher Direction War’ studying. Although these subjects were never fully maintained throughout the inter-war period, the newly established armed force was never shamed to refer to the other services’ histories.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와중에 세계 최초로 공군을 독립적인 군종으로 창설했다. 전쟁의 필요에 의해 창설된 공군은 전쟁 직후 국방예산과 인력의 감축 압박 속에서 공군참모대학을 창설했다. 공군참모대학은 설립 당시부터 단순히 행정업무에 능통한 참모장교가 아닌 미래의 지휘관을 교육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교육과정에서 군사사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비록 공군의 역사는 짧지만, 공군참모대학은 고대 전쟁사부터 1차대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군사사를 교육과정에서 다루었고 여기에는 초대 대학장인 브룩-팝험 준장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는 4년간의 보임기간 동안 공군참모대학의 기틀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장교교육에서 군사사를 중요시하는 그의 관점을 교육과정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공군참모대학의 교관들은 항공기가 등장하지 않았던 미국남북전쟁, 러일전쟁 등을 심도 깊게 다루었으며, 특히 몇몇 전역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항공기의 존재를 가정하여 공군의 잠재적인 역할을 탐구하기도 했다. 군사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은 리더십 교육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공군의 사례는 아직까지 찾기 어려운 실정이었으므로, 이탈리아의 가리발디, 프랑스의 나폴레옹, 영국의 넬슨 등 국적과 군종을 가리지 않고 폭넓은 ‘역사적 인물’들이 다루어졌다. 또한 다양한 전쟁의 사례를 통하여 ‘전쟁의 원칙’ 도출에 집중했다. 다만 공군의 경우 그 역사가 짧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여 타군의 사례를 충분히 살펴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전장 공간의 변화에 따라 원칙이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고민하였다. 특히 7년전쟁은 전쟁 최고지휘부의 전쟁지도방침에 대한 좋은 사례로 제시되었다. 비록 이러한 교육과정이 전간기 20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새롭게 창설된 공군이 자군의 직접적인 사례가 아닐지라도 군사사에 대한 폭넓은 접근을 장교 보수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당기간 지속했다는 점은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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