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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1945년 중소교섭과 미국의 개입

        정형아 한국중앙사학회 2009 중앙사론 Vol.29 No.-

        Roosevelt, Churchill and Stalin decided the secret agreement about participation in the Pacific war at Yalta. This paper considered the intervention of the United States about the Sino-Soviet Negotiation based on that agreement. The United States intend to put an end to the Pacific war as soon as possible through Soviet Armys participation, and the Soviet Union wanted to acquire some privileges in Manchuria. They talked the details about this at Yalta, but kept secret to Chiang Kai-Shek until June 15. The United States urged Chinese Government negotiate with Stalin in Moscow, therefore T. V. Soong who was representative of Chinese Government had conferences with Stalin. The nature of the conference was informed to the United States by Ambassador to the Soviet Union Harriman every time finished the conference.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ok a policy of noninvolvement in the Sino-Soviet Negotiation, during the First round of the Moscow talks. But when the Soviet Union demanded some right in Dairen that would be threat the open-door policy, the United States intervened and called upon the soviet Union not to put inordinate demands. We can understand this attitude of the United States was on the basis of the profit of their own country.

      • KCI등재후보
      • KCI등재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의 외교활동에 대한 재고찰

        정형아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13 탐라문화 Vol.0 No.44

        본 논문의 주제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의 외교성과이고, 그 토론 대상은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으로 제한한다. 태평양전쟁발발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서 국민정부가 제일 중요시 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국가 이익의 층면에서 보면 태평양전쟁시기 국민정부의 외교활동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립되는 평가가 있어왔다. 하나는 국민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쟁취하고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정부가 외교성과로서 가장 자랑하는 중국이 ‘대국지위’를 얻었다는 것은 허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이다. 사실 국민정부의 외교성과는 자주 폄하되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얄타회담과 중소담판의 결과가 중국의 국가이익을 저해했기 때문이며, 또한 이 두 회의 과정에서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보인 태도에는 많은 의문점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 의문점이란 장제스가 비록 미소양국이 얄타밀약을 통해 중국의 이익에 손상을 주었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중국은 그 밀약을 이행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미소양국의 약속을 중국이 이행하였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장제스가 중공세력의 확장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소련에게 이익을 양보하여 소련이 중공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국내의 문제를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외교활동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국민정부의 외교환경 속에서 국민정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준 요인을 찾아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국민정부의 외교성과 중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부분인, 미국으로부터의 원조획득, 불평등조약폐지, 대국지위의 획득을 중심으로 외교성과와 그 배경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진주만공습 이후 중일전쟁이 세계대전 중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중국의 전략적 지위가 바뀌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이 주도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은 미국이 그린 전시와 전후의 청사진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서 미국의 주도에 의해 외교적 성과를 올릴 수 있었고, 결국은 미국의 구상에 부응하면서 자국의 국익에 손해를 입히는 상황에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一代男』の創作意圖 : 卷一の二と卷一の三を中心に 「卷一の二」와「卷一の三」을 中心으로

        鄭灐 단국대학교 1998 論文集 Vol.33 No.-

        본고에서는 前稿, 「西鶴好色物의 創作意圖(1)」­『好色一代男』의 주제와 戱作意識을 중심으로­의 후속 연구로서 「卷一の二」와 「卷一の三」에 있어서의 작자의 창작 의도를 고찰했다. 「卷一の二」의 작품 서두에서는 「卷一の一」의 『桐곤』의 雅的 표현 구조를 일부에 잔존시키면서, 주인공의 언설과 행위의 묘사는 『太平記』의 패러디를 행하기 위한 비속적인 취향과 표현 구조로 전환된다. 작자는 『源氏物語』에서 『太平記』로 이중 번안을 시도함으로써 『源氏物語』의 이른바 「みやび」의 내실과 「世之介」로 상징되는 「好色性」과의 낙차를 형상화하는 「性」이라는 원리적 주제로의 의식을 밝히는 계기로 삼고 있다. 또한 「卷一の三」에서는 「卷一の二」의 서두부 이후의 주인공에 대한 비속적 표현의 전환이 정착되어, 유형적 「世之介」像이 제시된다. 그리고 『伊勢物語』의 패러디가 집중되면서 「世之介」의 독자적 표현 구조와 작품 세계가 확립되는 것이다. 『伊勢物語』의 「男」의 「みやび」의 내실을 「世之介」의 언설과 행동과의 대비를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희작 의식과 주제성을 둘러싼 작자의 창작 의도의 일단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 KCI등재
      • KCI등재

        6ㆍ25전쟁 전후 중화민국과 미국의 협력관계변화

        정형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18 중국근현대사연구 Vol.79 No.-

        如同太平洋战争,韩战这一场战争对蒋介石领导的中华民国政府的国内形势和国际地位产生了重大影响。在这两场战争中,美国根据世界政治舞台上的领先地位以及战略上的构想,引领了与中华民国政府的关系。在太平洋战争爆发以后,美国替苏联成为中华民国的最大援助国,同时也成为最重要同盟国。中华民国不仅战时而且战后也靠美国的援助而进行国共内战。可蒋介石军队越来越失利而终于失去了大陆。因此美国对蒋介石和国民政府逐渐心存怀疑。一九四九年美国终于发表了中美关系白皮书并采取对华脱身政策,而两国关系就急速冷却。 美国正在进行对华脱身政策中,美国国内的一些人,包括美国军方关注台湾的战略性价值。所以起初他们要把台湾与蒋介石分离,然后将台湾与中国分开来,最后这两个计划都未能成。虽然美国采取对华脱身政策,但一次也没有与蒋介石政权完全断绝,而在最少限度维持经济和外交关系。在国共内战期间,也在迁台以后,蒋介石最需要的是军事上的合作。可是美国宣布他们只能以经济和外交的措施支持国民政府。 到韩战爆发之前,美国与国民政府真正以最少限度持续了合作关系。在中华人民共和国成立以后,美国对在联合国会议上最热门的议题-中国代表权转换,持有消极态度。这是因为美国考虑到与新中国的关系改善。随着一九五〇年二月新中国与苏联缔结同盟条约,并四月以后为了达成台湾解放的目标,而在台海两岸造成紧张关系,在美国内部支持蒋介石政府的呼声逐渐提高了。实际上在给蒋介石政权负面性的国务院内,也出现了这种呼声。然后韩国战争成为美国转换对台政策的名分和专机。 韩战爆发以后,虽然美国的论调表示要在海峡两岸之间维持中立态度。但是美国在联合国施压而不让他们谈论中国代表权问题,并且逐渐扩张对台军援等,美台关系逐渐出现了变化。确实韩战对美国的脱身政策或中立态度起了作用,而使美国扩大对台合作。从这个意义上可以说,韩战必定是美台关系转折的关键事件。 不仅如此,韩战对中华民国的国际地位也发挥了重要影响。新中国成立后,苏联在联合国安理会一直主张中华民国代表不适代表中国人民,因而要退出。中华民国面临的这种国际地位的危机,在韩战爆发以后,美国施压而无法讨论,因此到一九七一年的二十年间中华民国保持了安理会常任理事国的地位,并在国际社会代表中国人民发言。从此而来,韩战导致了冷却的美台关系发生变化。

      • KCI등재

        遷徙與定居, 共同體的再形成 - 以釜山華僑與在日濟州人爲中心

        정형아,정창원 한국문화융합학회 2018 문화와 융합 Vol.40 No.7

        In regard of studies on commons, I have kept asking, ‘how can the research topic, commons, be approached in the area of research on history?’ The awareness of the issue raised the necessity of conducting a study on commons in line with the understanding of Jeju in its various historic and cultural context. Among several research topics based on the awareness of the issue, the one that attracted my attention was migration and settlement issues seen in the history of East Asia. Migration beyond nationality and settlement in foreign countries strengthen not only ethnic and community identities, but also new personal and cultural identities beyond nationality. In other words, commons that have maintained communities were expected to be traced by exploring various causal relationships regarding how communities were maintained and recreated in new settlements in the process of migration and settlement that each ethnic group had experienced. Unlike overseas Chinese that have formed strong migrant communities from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the power and range of overseas Korean communities are relatively weaker than them. These strong overseas Chinese communities are scattered in numerous regions around the world, but overseas Chinese communities in Korea have not been grown as a relatively strong migrant community in Korean society. Unlike the overseas Chinese that are discussed in this study, in particular, overseas Chinese in Busan, people from Jeju Island who reside in Osaka, Japan, compared to other overseas Korean communities, have formed and maintained a relatively strong migrant community, which is worthy of notice. Recent migrations across borders have multipolarized and decentralized existing relations between centers and surroundings, while surroundings themselves have created internal differences. In the process where regions and the world meet face to face, transversal and hybrid cultural phenomena have been created in various new forms. For this reason, issues associated with migrations are not confined to movements between spaces, but they are the results of the combination of various internal and external networks such as system, politics, society, culture and network. In particular, commons that migrant communities can commonly embrace inevitably lie in the process of forming communities and identities. 필자들은 커먼즈(Commons)의 연구와 관련하여 줄곧 ‘공동자원이라는 연구주제에 대해 역사연구라는 영역에서는 어떤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제주지역이 가지는 다양한 역사문화적 맥락의 이해를 동반하는 공동자원 연구의 진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 연구주제들 중,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는 바로 동아시아 역사 속에 보이는 이민과 정착 문제였다. 국적을 뛰어넘은 이동과 해외 정착은 종족정체성과 지역사회정체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분정체성과 함께 국적을 초월한 문화정체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각 족군(族群)들이 거쳐 온 이주와 정주의 과정들 속에서 새로운 정착지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인과론적 탐색을 통해 공동체의 유지를 가능하게 하였던 커먼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강한 이주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화교이주공동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인의 해외이주공동체는 상대적으로 그 세력과 범위가 화교의 이주공동체에 비해 미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수많은 지역에 산재한 강력한 화교이주공동체들 중, 유독 한국화교 공동체는 한국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이주공동체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화교, 특히 부산지역의 화교와는 다르게 재외한국인 이주공동체 중, 오사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일제주인(在日濟州人)사회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이주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로 인해 기존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구도는 다극화되고 분산되는 한편, 주변부는 그 자체로 내적 차이를 발생시켰다. 지역과 세계가 직접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횡단적이며 혼종적인 문화현상을 만들어 내었다. 때문에 이주 문제는 공간이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 사회, 문화, 네트워크 등 다양한 내외적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공동체와 정체성의 형성에는 이주 집단이 공통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커먼즈적 요소가 자리할 수밖에 없다.

      • 西鶴小說の創作原理

        鄭灐 단국대학교 1996 論文集 Vol.30 No.-

        作品이 지니는 문예성, 작품연구의 성과 등을 감안해, 일본고전산문작품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른다면 아마도 11세기초의 『源氏物語』와 17세기후반의 井原西鶴의 一連의 소설들이 될 것이다. 위 작품들에 대한 일본에서의 적극적인 연구와 평가는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歐美의 연구자들에게도 크게 평가받고 있는 점을 보면, 비록 그들이 근대소설적 시각으로 위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 작품들이 지니는 문학으로서의 보편적가치는 상당부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일본서사문학의 하위쟝르인 浮世草子의 창작원리, 즉 井原西鶴小說의 창작원리를 究明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西歐敍事文學의 전개과정(로망, 노블로의 이행)보다는 동아시아한자문학권의 소설사양상을 염두에 두고, 주로 작가의 문예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창작원리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物語의 전개양상과 浮世草子와의 관련성, 『源氏物語』의 物語虛構論의 西鶴의 文藝觀, 當代의 중심문학관이었던 宋學이래의 권선징악적 문학관과 西鶴小說의 서문 및 발문 등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慰み草」 혹은 「轉合書」로서의 小說의 의미 등의 검토를 통하여 西鶴小說의 創作原理를 究明하고자 한다.

      • KCI등재

        중화민국정부의 소련제소안 의결과 미국의 영향(1949-1952)

        정형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17 중국근현대사연구 Vol.75 No.-

        1924年的第一次中蘇合作因蔣介石的反共活動而破裂。1929年,中國與蘇聯斷交。1931年九一八事變爆發後,國民政府與蘇聯恢復外交關係。1937年中日戰爭全面爆發後簽訂的『中蘇互不侵犯條約』標誌着第二次中蘇合作的開始。但兩國的合作關係在太平洋戰爭期間美國主導的戰時體制下有所疏遠,根據雅爾達會議上羅斯福、斯大林、邱吉爾簽訂的秘密協定,中蘇談判於1945年在莫斯科舉行,並簽訂了『中蘇友好同盟條約』。從此開始中蘇兩國的“友好同盟”關係重新建立。可是兩國的“友好同盟”在1952年的國際政治舞台上再次破裂。 1945年雅爾達會議召開後,“雅爾達體系”形成。所謂雅爾達體系,指為了制定戰後世界新秩序而改變以美英中蘇四國為中心的戰時同盟體系。雅爾達體系形成後,世界秩序的主角是美國和蘇聯。羅斯福逝世後,新上任的美國總統杜魯門也要恪守雅爾達體系。1945年夏季的中蘇談判就是雅爾達體系形成的第一關。二戰結束之後中國面臨的國內外形勢使蔣介石政府不得不在軍事和外交上繼續以來美國。從1946年初開始,美國擔心蘇聯勢力的擴張,著手調整外交政策,提出“杜魯門主義”,而美蘇冷戰局面逐漸形成。但至少在東北亞地區,美蘇兩國仍然避免破壞雅爾達體系而形成對立。 在這種情況之下,1949年中華民國外交部向聯合國控訴蘇聯違約,試圖爭取國際社會的支持,抑制蘇聯勢力的擴張,並阻止中共政權獲得國際社會的承認。他們首先尋求美國的支持,但美國的態度頗為冷淡,導致“控蘇案”從準備階段開始就一波三折。韓國戰爭爆發後,中共的參戰引起了國際關係的變化,也影響了“控蘇案”的處理。美國將中共定義為侵略者,將蘇聯看做戰後世界新秩序的競爭對手而非合作夥伴。中華民國的“控蘇案”逐漸獲得支持,最終獲得通過。 雅爾達密約-中蘇友好同盟條約-控蘇案這一系列的過程中,如果說中蘇關係的關鍵詞是“友好同盟”,那麼美國對戰後世界新秩序的構想與雅爾達體系的形成和瓦解,對“友好同盟”的形成和破裂起到了關鍵作用。

      • KCI등재후보

        국공양당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1941-1944)

        정형아 한국중앙사학회 2010 중앙사론 Vol.0 No.31

        This paper focuses on the United States intervention on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in 1941, external foreign propaganda between KMT and CCP in the beginning of 1940s and the KMT-CCP Negotiation in 1944 led by Hurley and the responses from KMT and CCP along with the transformation of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two parties and foreign intervention. The incidents above may appear irrelevant, but all lie in the same frame. One thing worth mentioning about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is the role of international pressure in its resolution. Some Chinese scholars propose the influence of international pressure in easing the KMT’s anticommunist policies, but the effectiveness of such pressure leave rooms for questions. For example, according to materials that was exposed up to now, it's not easy to explain that the United States carried out a aggressive attitude in intervening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However, it seems KMT was not able to entirely reject the U. S advice due to its needs of economical aid. Thus, KMT attempted in reducing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from a political and ideological collision to merely an internal disciplinary crisis. The identical logic follows for KMT’s relationship with the Soviet Union as the former was reluctant in stimulating the latter with ideological conflicts thus placing its financial assistance in jeopardy. In 1944, the United States obtained a central role in convincing the reconciliation between KMT and CCP. Desperate in warding off the Japanese, the United States urged KMT for a negotiation with CCP for an agreement between the two. However, the different stances of KMT and CCP in the concept of ‘coalition’ and ‘unification’ resulted in the difficulty in reaching an agreement. TheU.S understanding in the rooted conflict between the two parties was much too vague. Surely an agreement between the two parties would have been significant in bringing the U.S a victory in the Pacific War, which highlights the crucial relationship between domestic and foreign policies. However, the negotiation between KMT and CCP ended a failure and re-invoked a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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