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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병철(南秉哲) 회인시(懷人詩) 연구

          한영규 ( Young Gyu Han ) 한국한문교육학회 2008 한문교육연구 Vol.31 No.-

          南秉哲(1817~1863)은 경화세족 출신의 고관이면서 동시에 정약용, 박규수, 최한기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천문과 역산 분야에 독보적인 식견을 탁월한 과학 저술을 남겼고, 종래의 화이론적 세계관에 속박되지 않는 지평에서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남병철은 문과에 급제한 이후 26세 때까지 외가의 별서 玉壺精舍에서 열린 白蓮社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시를 지었다. 이러한 시사 활동을 통해 그는 당색·계층·적서·장유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당대의 명사들과 광범하게 교유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외조부 김조순 대부터 이어져 온 경화세족의 문화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남병철은 "경세제민과 무관한 글은 지을 것이 못된다"라는 顧炎武의 견해에 공감하여, 시 창작을 폐하고 士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데, 그 전환의 시점은 1842년 여름 무렵으로 추정된다. 남병철의 회인시는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에 창작된 것으로 공경, 사대부로부터 서얼, 중인층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어 시로 쓴 당대 명사의 인물지라는 성격을 지녔다. 특히 김정희파의 속하는 중인층과 정약용가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남병철은 회인시에서 대상 인물과 맺은 감회를 표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명사들의 빼어난 점을 품평하는 `論詩`의 방식을 취하였다. 남병철은 긍정적이며 여유로운 태도로 명사들의 인격미를 淡雅하게 그려냈는바, 그 결과 서얼층과 중인층의 경우 불우한 측면이 약화되고 명사로의 풍모가 주로 부각되었다. 남병철은 청조 학예에서 계발 받은 학식을 기반으로, 그 정곡에 해당하는 비유를 찾아내어 인물을 품평한 결과, 19세기 조선 명사의 인격미를 고양시키고 한층 넓은 지평에서 해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즉 학적 지식에 기반한 인물 품평이었다. 이 점 19세기의 다른 회인시에 견주어 남병철 시가 지닌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Nam Byeong-cheol was a high official from an influential family in Seoul, and is counted as a realist representing the 19th century together with Jeong Yak-yong, Park Gyu-su and Choi Han-gi. He had matchless knowledge of astronomy and almanac, and left scientific writings such as Chubosokhae, and recognized the West and Western science objectively from the horizon not bound to the traditional world view of the Sino-barbarian theory. The present study explored Nam Byeong-cheol as a poet, taking note of the fact that he was absorbed in poets` club activities and poem writing during his 20s before he began his life as a realist and a scientist. Since he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until 1842, Nam Byeong-cheol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Baekryeonsa meeting at Okhojeongsa, a villa of his mother`s family, and wrote poems enthusiastically. Through the poets` club activities, he associated with prominent figures in those days regardless of political party, class, legitimacy, and age. The 32 longing poems analyzed intensively in this paper were the products of these associations, and they are descriptions of prominent figures in those days written in poetic form. From the position of emphasizing the aesthetics of literature and arts, he captured human images of various characters including official literati, poets, painters, doctors, astronomers, and annotators. Different from traditional longing poems expressing feelings between the poet and the subject of the poem, Nam Byeong-cheol`s poems have the characteristic of `discourse poem,` appreciating prominent figures` excellences. That is, they tried to comment individual figures` characteristics through suggestive expression. Nam Byeong-cheol described prominent figures plainly in a positive and serious attitude. As a result, the unfortunate aspect of concubines` children and middle-class people was weakened, and the features of prominent figures were spotlighted. Particularly based on his extensive knowledge, Nam Byeong-cheol compared the subject figures with famous people in China, and through this, he elevated the personal beauty of prominent figures in the Chosun Dynasty to the highest horizon. That is, based on new knowledge and sense that he acquired from the science and art of the Qing Dynasty, he appreciated the diverse personal beauties of prominent figures of the Chosun Dynasty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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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여항 문단과 의관(醫官) 홍현보(洪顯普)

          한영규 ( Young Gyu Han ) 東方漢文學會 2009 東方漢文學 Vol.0 No.38

          이 글은 추사파 중인층 가운데 醫官 洪顯普(1815~1896 이후)를 특별히 주목하고, 새로 알려진 그의 『海初詩稿』와 『海初文稿』를 통해 19세기 여항 문단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탐색하였다. 홍현보는 의관이면서 동시에 19세기의 유력한 여항 문인으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중인이었다. 그는 기술직 중인을 대대로 세습하던 가문의 후예로 젊은 시절 추사 문하에 입문하여, 추사와 기거를 같이 하며 주치의이자 記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완당척독』을 읽고 쓴 글에서 그가 추사의 학예에 대해 정확한 식견을 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을 공유하며 추사의 훈도를 받은 결과였다. 홍현보는 추사에 이어 당대 천문·역산 분야의 석학 남병철 형제와 긴밀하게 교유하였다. 그는 문한에 대한 소양과 학식을 인정받아, 남병길 명의의 서문을 대신 짓기도 하였다. 홍현보는 여항 시집을 편집하는 등 여항의 문화의 현양에도 큰 기여하였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출판과 정리를 통해 여항문화를 제도적으로 공인시키는 일이었다. 홍현보는 온건하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이전의 여항 문화를 평가하였다. 이런 균형감은 의과로 발신한 이래 내의·어의를 거쳐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여 지위나 관품이 높았던 그의 현실적 처지의 투영이기도 하였다. 홍현보를 "추사 문하의 제일인"이라 칭한 김석준의 평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럴만한 근거를 지녔다. 특히 홍현보가 추사와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남병철 형제를 왕래하며, 당대의 세 거장을 연이어 시종한 일은 이상적·조희룡 등에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이력이었다. 홍현보는 19세기 중인층과 경화세족이 관계맺는 특별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The middle class grew and their social and cultural status was enhanced in the 19th century and, as a result, a very close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between the middle class and the gentry class living in Seoul. Chusa Kim Jeong-hee was a representative figure who maintained a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the middle class. Paying attention to Medical Officer Hong Hyeon-bo (1815~1896) among middle class people in the Chusa School, this study analyzed Haechosigo and Haechomungo Hong Hyeon-bo`s garlands found recently. According to the results of examining Hong Hyeon-bo`s garlands, he was Chusa`s student, attending physician and clerk who dwelled at Chusa`s house when he was young. Consequently, Hong Hyeon-bo had more accurate knowledge of Chusa`s character and academic tendency than anyone else. After his association with Kim Jeong-hee, Hong Hyeon-bo worked as the family clerk of the Nam family from Euiryeong, attending on Nam Byeong-cheol and writing on behalf of Nam Byeong-gil. Hong Hyeon-bo also played the role of a mediator between the gentry class living in Seoul and the middle class by making efforts to collect and publish middle class people`s literary achievements. For these reasons, Hong Hyeon-bo is considered "Number one among Chusa`s disci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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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경화사족의 학예(學藝) 취향과 만명사조(晩明思潮)

          한영규 ( Young Gyu Han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人文科學 Vol.0 No.48

          명나라 말기는 중국사상사와 문예사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현대 중국의 미학자 成復旺은 중국의 사상 조류를 유가·도가·불가·굴원으로 나누고 여기에 다시 晩明思潮를 포함시켜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張法은 굴원을 유가에 포함시키고 불교를 도가에 귀속시키면서, 중국의 사상을 유가·도가·만명사조의 세 줄기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만명사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한국한문학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조선후기 한문학과 명말 公安派와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관점을 보다 확장시켜, 만명사조가 19세기 조선의 학예에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고 있었는지를 탐색하였다. 『세설신어』는 위진 시기에 출현했지만, 만명 문예가 특별히 부각시키고 재해석을 시도한 문헌으로서 만명사조의 先聲이라 할 만하다. 진계유는 이탁오·원굉도·탕현조·서위·풍몽룡 등과 함께 명말사조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세설신어』와 진계유의 저술이라는 두 지표어를 중심으로 탐색한 결과, 홍석주·홍길주·이유원·정원용 같은 19세기 경화사족과 장혼·조희룡·이규경 등 경화사족 문화권의 문인들이 만명사조를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소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명사조는 허균·신흠 이래, 18세기의 박지원·이옥 그리고 19세기의 홍길주·조희룡을 거쳐 20세기 초의 황현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를 관통하며 학술·문예 방면에서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후기의 학예 지형도에서 만명사조는 청대 고증학이나 西學에 비견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소품문에 반대했던 정조의 사망, 그리고 서학을 금압한 세도정치기의 조건 속에서 19세기 경화사족은 진계유유형의 만명사조를 매우 심도 있게 수용하고, 향유하였다. The late Ming Dynasty is a very remarkable period in the history of Chinese thoughts and arts and sciences. Contemporary Chinese aesthetician Cheng Fu-wang divided the streams of Chinese thoughts into Confucianism, Taoism, Buddhism and Qu Yuan, and added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as another stream, identifying five mainstreams. Including Qu Yuan in Confucianism and Buddhism in Taoism, Chang Fa viewed Chinese thoughts as three lines, namely, Confucianism, Taoism and the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New interests in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are found also in research on Chinese literature in Korea. Recently, research is being conducted actively on the relation between Chinese literatu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and the Gongan School in the late Ming Dynasty. Expanding the viewpoint further, this study examined how the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were understood and received in Korean arts and sciences during the 19th century. Shishuoshinyu appeared in the period of Wei-Jin, but was spotlighted and reinterpreted during the late Ming Dynasty, and is considered the prelude of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Along with Lee Tak-oh, Won Goeing-do, Tang Hyeon-jo, Seo Wi, Pung Mong-ryong, etc., Jin Gye-yu is a literary man representing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From the results of search using two keywords ``Shishuoshinyu`` and ``Jin Gye-yu`s writings,`` we found that noble families in Seoul in the 19th century such as Hong Seok-ju, Hong Gil-ju, Lee Yu-won and Jeong Won-yong, and literati like Jang Hon, Jo Hee-ryong and Lee Gyu-gyeong who associated with such families digested the thoughtsof the late Ming Dynasty from a large variety of angles.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penetrated through the late Chosun Dynasty from Heo Gyun and Shin Heum to Park Ji-won and Lee Ok in the 18th century, Hong Gil-ju and Jo Hee-ryong in the 19th century, and Hwang Hyeon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influenced their arts and sciences. In the arts and sciences of the late Chosun Dynasty,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were important elements comparable with evidential studies and Western learning in the Qing Dynasty. During the 19th century characterized by the death of King Jeongjo who opposed So-pum-mun(miscellaneous writings) and the suppression of Western learning under Sedo politics (politics dominated by a few influential clans), noble families in Seoul received and enjoyed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like Jin Gye-yu`s very de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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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한문문장가 계보의 일단

          한영규(Han, Young-gyu) 대동한문학회 2010 大東漢文學 Vol.3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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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근대 문명이 내면화되면서 한학과 한문학은 타자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창작된 한시, 한문문장은 여전히 문학사와 연구자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식민지근대 내부에서 여전히 자기의 생존공간을 지닌 채 활발히 한문문장을 산출하는 문사가 존재했다. 이 논문은 1920년대 후반 무렵 편집된 『五家文抄』라는 선집을 발굴 소개하고 그 특징적 면모를 기술한 것이다. 이 선집의 가장 큰 특징은 편자 변영만의 문장 취향을 私的인 층위에서 계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변영만의 스승 이남규의 節義的 성향의 산문이 다수 선발되고, 편자 자신의 문장과 후배 성순영의 글이 중심적으로 편제되었다. 金澤榮의 『麗韓九家文抄』가 고려.조선의 왕조 시대를 통관하는 一國的 층위의 체계적 문장 선집이라면, 『오가문초』는 근대적 규범이 내면화되는 시기에 출현한 개인 취향의 문장 선집이라는 성격을 지녔다. 『오가문초』에 실린 문장들은 모두 식민지근대 문명을 비판하거나 보이콧의 자세를 견지한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선집은 이 시기 한문문장가의 근대 대응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가장 많은 편수가 실린 변영만의 글은 한문문장가의 근대 대응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墨子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서 儒家의 아비투스를 해체하려 하였고, <共産論>이라는 글을 통해 共生的 사회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였다. 또한 <勿協說> <書感示友>와 같은 문장으로 근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 대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오가문초』는 지조와 절의의 자세를 부각시키고 근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한문문장 선집으로서의 뚜렷한 정체성과 의의를 지녔다. With the internalization of the colonial modern civilization, Chinese classics and Chinese literature were otherized. As a result, Chinese poems and texts created during that period still remain in the outside of literature history and researchers' interest. Even in the modern times under the colonial rule, however, there were writers who maintained their own space of survival and creating Chinese texts. This study purposed to explore and introduce an anthology entitled Ogamuncho compiled around the late 1920s and to describe its characteristics. When and who compiled Ogamuncho are unknown, but it is believed to have been compiled by Byeon Yeong-man (1889∼1954) in the late 1920s. This collection includes 60 Chinese writings by Lee Nam-gyu (1855∼1907), Lee Yeon-gyu (1882∼1949), Byeon Yeong-man, Cho Geung-seop (1873∼1933), and Seong Soon-yeong (1896∼1970). The biggest characteristic of this anthology is the genealogy of compiler Byeon Yeong-man's writing style built based on his personal lineage. As a result, many of works in the collection are from Byeon Yeong-man's teacher Lee Namgyu, and a large portion are also the writings of his and his student Seong Soonyeong. If Kim Taek-yeong's Yeohangugamuncho is a systematic literary anthology of national lineage penetrating through the dynasties of Koryo and Chosun, Ogamuncho is a writing collection reflecting personal tastes that emerged during the period when modern norms were being internalized. All the writers included in Ogamuncho assumed the position of criticizing or boycotting the colonial modern civilization, and in this sense, the anthology shows an aspect of how Chinese writers in those days responded to modernism. In particular, Byeon Yeong-man's writings, which are largest in number, demonstrate clearly the pattern of Chinese writers' coping with modernism. He dismantled Confucian habitus by interpreting Micius in a new way, and attempted reflection on symbiotic society through a writing entitled Gongsanron. What is more, he criticized modernism and looked for new alternative civilization through articles such as Mulhyeopseol and Seogamsiu. In brief, Ogamuncho has a distinct identity and meaning as a Chinese writing anthology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that it emphasized the attitude of fidelity and constancy and reflected on modern civilization cri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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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한시 작가로서의 崔益翰 -연작체 만시 哭兒二十五絶을 중심으로

          한영규 ( Young Gyu Han ) 반교어문학회 2012 泮橋語文硏究 Vol.0 No.33

          이 논문은 그동안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국학자로 평가 받아온 최익한(1897~1957이후)을 식민지시기 한시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그는 그동안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와 더불어 식민지시기를 대표하는 논객이자 문필가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의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저술은 남북한 학계에서 실학 연구의 고전적 노작으로 손꼽힌다. 최익한을 비롯한 네 사람은 모두한문을 제1의 문어로 지녔던 이들로서, 신문·잡지 등 근대매체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국문으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즉 전통적 한학소양을 담지한 채, 국문으로 근대적 문필 활동도 아울러 전개했던 통섭적 지식인들이었다. 최익한은 면우 곽종석의 고제로서 후일 일본 유학을 거치며 사회주의 운동가로 전환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한문 전통에 대해, 그 역사적 한계성을 지적하면서도 또 동시에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녔다. 그가 이룩한 실학파와 정다산 연구 결과는 이러한 자세의 산물이었다. 즉 그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먼저 전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지녔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옥사한 장남 최재소를 읊은 연작체의 곡아(哭兒) 시를 새롭게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최익한은 이 한시에서 자식을 잃은아비로서의 개인적 슬픔을 곡진하게 토론하여 한 편의 애도시로서 높은 성취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애도의 정감은 개인적 차원의 슬픔을 표현하는 차원을 넘어, 피압박 식민지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울분과 독립에의 열망을 매우 전중(典重)하게 형상화하는 지평으로 나아갔다. 즉 이 곡아 시 25수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적 서정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시기 한문학의 주요 성과라 할만하다. 요컨대 최익한의 만시는 1930년대의 한시가 식민지 현실에 대응하며 서정 장르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표징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Choe Ik-hwan (1897~1957) as a chief representative Chinese classic poet in the colonial period though he has so far been considered as a scholar in Korean studies who was engaged in the socialist philosophy. He has thus far been recognized as a representative controversialist and author in parallel with Hong Myeong-hi, Byeon Yeong-man, and Jeong In-bo. In particular, one of his writings, The Silhak School and Jeong Dasan, distinguishes itself as a classical contribution to the study in Silhak in both South and North Korea. Choe Ik-hwan, as well as the other three figures, was a person who had Chinese Classic as his first written language, and they were similar in thatthey left many writings in Korean as they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modern media like newspapers and magazines. In other words, they were interdisciplinary intellectuals who were engaged in modern authoring activities in Korean while maintaining their merits in traditional Chinese classics. This paper pays novel attention to and intensively analyzes his poem, Gok-A ``A Crying Child,`` in which he sang his eldest son who had died in prison. Choe had a remarkable achievement in this work as a mourning poem by sincerely expressing his personal grief as a father who had lost his son. However, this sentiment of mourning proceeded to such a horizon that it very canonically illustrated a repressed colonial intellectual`s resentment and desire for independence. In other words, this poem, Gok-Aconsisting of 25 sections, is a representative national lyric in the 1930`s, and at the same time can be evaluated as a poetic work that can represent the Chinese classics in the colonial period. In sum, Choe`s mourning poem is an important token that says Chinese classic poetry played a role as a lyric genre that coped with the colonial realities in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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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녹형(雜錄型) 인물지 『진벌휘고속편(震閥彙攷續編)』 연구

          한영규 ( Han Young-gyu ) 한민족문화학회 2016 한민족문화연구 Vol.55 No.-

          이 논문에서는 『震閥彙攷續編』라는 신발굴 자료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진벌휘고속편』은 19세기 후반에 편집된 것으로, 역대 인물을 50개 편목의 주제로 분류하고 배치하여 방대한 인물 기록을 집성했다는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잡록형 인물지이다. 그 편성에 있어서는 충신, 공신, 효자, 열녀 등 기존의 일반적 윤리에 따른 편목도 일부 포함했지만, 편자가 보다 강조한 편목은 名畵, 音律, 卜筮, 창기, 궁녀 등 기존의 正史나 주류적 인물지에서 주목하지 않은 마이너리티 인물들이었다. 상층의 역사 인물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면서도 그 무게의 중심은 기층의 인물에 더 비중이 두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벌휘고속편』의 인물기록은 기존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크게 세 가지 흐름을 수용하였다. 첫째, 『잠곡수필』, 『어우야담』 등의 야승ㆍ필기ㆍ잡록류 문헌에 보이는 흥미로운 인물 기록을 집중적으로 수용했다. 주로 18세기 이전의 인물 기록은 이들 문헌에 의존하였다. 둘째, 중인층 문인이 시정의 기이한 인물을 입전했던 『호산외기』와 이덕무ㆍ성대중 등의 기록을 흡수하였다. 셋째, 야담에서 취재한 이야기를 문식을 가해 꾸민 『청구야담』류의 단형한문서사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야담 기록의 수용은 『이향견문록』 등 이전의 인물 기록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양상이다. 『진벌휘고속편』은 이 세 가지 흐름의 인물 기록을 집성하고 또 편자 자신이 재구성한 일부 항목을 더하여,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혼종형의 특이한 인물지를 편성해 놓았다. Giving the world a novel document, Jin Beol Hwi Go Sokpyeon from the Library of Tokyo University in Japan, this paper concentrates on its analysis. Edited in the late 19th century, Jin Beol Hwi Go Sokpyeon is a highly notable miscellany type book of figures as it classifies and arranges historical figures in 50 items of themes, and collects a huge amount of records. Though it contains itemslike loyal subjects, vassals of merit, dutiful sons, faithful wives etc. based on the established general, the figures that the editor put focus on include minorities like painters and calligraphers, musicians, shamans and astrologers, kisaengs, court ladies etc., which had not been paid attention to in the established history. It extensively includes upper class figures in history, but its central focus is put more on figures from the common class. Records of figures in Jin Beol Hwi Go Sokpyeon quote the existing literature and accommodate three kinds of information in general. First, it intensively accommodated records of interesting figures seen in the Yaseung, Pilgi, Japrok kinds of literature like Jam Gok Supil, Eo-U-Yadam etc. Second, it intensively brought records by Lee Deok-mu, Seong Dae-jung etc., as well as Ho San Oe Gi, in which a middle class literary man delivers stories about weird persons in towns. Third, it aggressively introduced Classic Chinese narrative collections like Cheong Gu Ya Dam that added literary modifications to collected oral stories. This accommodation of oral stories is a novel phenomenon that had been hardly seen from past records of figures like Ihyang Gyeonmunrok. Jin Beol Hwi Go Sokpyeon collected these three kinds of person information, added the editor’s own descriptions, and then published a unique hybrid book of figures that had never appeared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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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벌휘고속편』의 인물 기담록(奇譚錄)으로서의 성격

          韓榮奎 ( Han Young-gyu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0 No.111

          최근에 새로 발견된 『震閥彙攷續編』이라는 문헌은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등 19세기의 인물 기록 모음집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면모를 지녔다. 『진벌휘고속편』에는 1천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상층의 인물부터 중인층과 서얼층, 그리고 여성과 기층민이 포괄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필기·야담·유서 등의 방대한 문헌을 활용하여 다양한 계층의 다채로운 인물을 망라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인물 집성이라 칭할 만하다. 그러나 『진벌휘고속편』은 편자, 편찬시기, 편찬의 의도와 세부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은 데다, 실제의 인물 편성도 체계적이지 못한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진벌휘고속편』은 『진휘속고』의 통합 재구성본으로서 이전의 인물지와 구분되는 새로운 특성을 지녔다. 첫째, 계층적·시대적 국한성을 넘어서는 통합적이며 통사적인 인물 기록 집성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편성이 정교하거나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진벌휘고속편』은 우리나라 역대 인물들을 일국적 시야에서 分門하고 그에 따라 類聚한 결과물이다. 중인층 중심의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서얼 만을 대상으로 한 『규사』 등과는 현격히 다른 측면이다. 그 점에서 『진벌휘고속편』은 저본 『진휘속고』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재편성 과정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일국적 규모의 인물 편성을 보여준다. 둘째, 외형적으로 상하층 통합적이면서도 실제 내용에서는 서얼·중인·여성·常賤 등에 특별히 비중을 두어 인물을 편차했다는 점이다. 이는 역동적 민간 기원의 기담의 중시라는 조선 왕조 해체기의 시대성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셋째, 정사 및 관찬서 뿐 아니라 필기·야담·한문단편소설 등을 대거 활용하여 비역사적 성격의 인물들까지 포용하고, 이를 통해 민간 인물 奇譚의 흥미성을 보다 강조했다는 점이다. 인물 집성에 있어서 『진벌휘고속편』 편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탈계층적 면모는 미증유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1918년에 편집된 『일사유사』가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와 분류 체계에 매몰되어 장지연 당대의 시대성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점과 비교할 때, 『진벌휘고속편』은 왕조 해체기 민간의 역동성이라는 시대상의 한 부면을 담아냈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진벌』에는 1871년 이후부터 애국계몽기 사이의 왕조 해체기의 시대 의식이 담겼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선행 연구에서 지적한 바 『진벌』이 “당대 이념과 가치, 당대의 질서 안이 아닌 밖의 인물 정보를 담아내려는 자체는 시대적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은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즉 『진벌』이 집성한 민간 인물 기담의 역동성은 19세기의 시정성과 연결되면서도, 보다 일국적이고 계층통합적인 시각을 보인다는 점에서 거리가 있다. 『진벌』에는 왕조적 시대 의식보다는 조선 왕조 해체기 또는 근대 전환기의 시대 의식이 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거기에 인물 기담록으로서의 흥미성을 중시하는 편집 의도를 지녔기 때문에, 필기·야담·한문단편 등의 다양한 장르가 포용되고, 계층적으로 상층의 인물보다는 서얼·중서층·여성 및 기층의 인물에 비중이 보다 두어졌던 것이다. This paper is a comprehensive study of the character of the newly discovered book Jin Beol Hwi Go Sokpyeon. Jin Beol contains a vast record of more than 1,000 people, ranging from the upper to the middle, to the women and the lower class. This book is a unique collection of people's records in that it encompasses a wide range of diverse characters from various walks of life, using a vast collection of existing literature. The book does not clearly state the editor, the timing of the compilation, and the intent of the editing. However, Jin Beol has important characteristics compared to the existing person record in three ways First, in that the characters in this book are not limited to a particular class, nor are they confined to a particular era, it has an integrated character. Second, although the upper and lower classes were gathered in appearance, the actual contents gave a higher weight to the middle class, women and the lower class. Third, this book selected non-historical characters by utilizing not only political history and official praise books, but also Yadam and Chinese short stories. And it highlighted the interesting stories of these characters. The interest in such a de-hierarchical and de-historical figure is a new aspect that has never been seen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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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천필담』의 明代 淸言 수용 양상

          한영규(Han Young-gyu)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한국학 Vol.33 No.3

          이 논문은 심재의 『송천필담』이 명대의 청언을 본격적으로 인용하고 활용한 최초의 필기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 수용상의 특징과 의의를 밝히려는 의도 속에서 서술되었다. 『송천필담』의 청언 수용은 17세기 허균의 ??한정록??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다. 특히 『소창청기』 등 만명 청언의 취향에 공명하고 이를 대거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심재는 청언류 문헌을 활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의론적 지향을 지녔다. 또 이전에 누구도 주목한 바 없었던 ??필주??, 『청서필담』을 특별히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허균의 취향과는 일정하게 다른 지점을 향하였다. 또한 그가 『세설신어』체청언을 인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러한 풍격의 청언ㆍ청담을 채록하거나 스스로 창작한 것은 『송천필담』이 이룩한 매우 획기적인 면모였다. 따라서 『송천필담』은 그 성격상 야담, 패설, 시화 등등의 여러 면모를지녔지만 무엇보다 인물 품평형 필기라는 특성을 지녔다. 심재가 세설체 청언과 아울러 『청서필담』등 처세훈체의 청언을 주목한 점 역시 『송천필담』만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송천필담』에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그 풍도(風度)의 고상함을 품평하는 세설체 청언과 사인으로서 삶의 원칙을 추구하는 처세훈체의 아포리즘이 공존하게 되었다. 요컨대 심재는 진인적(晉人的) 풍도와 송인적(宋人的) 사의식의 두 방향에서 명대의 청언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취향의 공존은 그의 심미 지향을 여실히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탈세간적 취향에 공명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사인(士人)으로서의 세교(世敎)의 측면을 긍정하였다. 즉 사인의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탈속적 취(趣)를 추구하였다. 요컨대 『송천필담』은 18세기 사인(士人) 관망자의 평생에 걸친 견문과 의견 그리고 취향의 집성태였다고 할 수 있다. Taking note of the fact that Simjae’s Songcheonpildam is the first writing that actively quoted and utilized cheongeons (philosophical discourses) from the Ming Dynasty, this study purposed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of its acceptance of cheongeons. Songcheonpildam’s acceptance of cheongeons is similar to that in Heogyun’s Hanjeongrok written in the 17<SUP>th</SUP> century. This is true particularly in that they sympathized with Manmyeong’s cheongeons and quoted them extensively. However, Simjae showed an argumentative tendency that revealed his opinions using cheongeon?style literature. Furthermore, his line aimed at a somewhat different direction from Heogyun’s taste in that he spotlighted Pilju and Cheongseopildam, which had never been noticed by anybody until that time. Going further from quoting Seseolsineo?style cheongeons, he collected or created cheongeons and cheongdams of such a style, and this makes Songcheonpildam very distinctive. Accordingly, although Songcheonpildam has various aspects including informal history, folktale, and illustrated poems, its most conspicuous characteristic is that it is writing for evaluating people. Another unique characteristic of Songcheonpildam is that Simjae paid attention not only to evaluation?style cheongeons but also edification?style ones including Cheongseopildam. As a result, Songcheonpildam has both evaluation?style cheongeons, which put a person at the center and assess his bearing, and edification?style aphorisms that pursue rules of life as an individual. The coexistence of the two tendencies represents his aesthetic pursuit. On the one hand, he sympathized with unworldly tastes and, on the other hand, approved the aspect of association with the world as a private citizen. That is, he pursued unworldly tastes actively as much as he did not deviate from his identity as a private citizen. This is a unique aesthetic sense of an 18<SUP>th</SUP>?century citizen who failed to rise in an official rank in the 18<SUP>th</SUP> century.

        • KCI등재

          한역(漢譯) 속담집 『채파유의(采?遺意)』의 특성과 위상

          한영규 ( Han Young-gyu ) 국제어문학회 ( 구 국제어문학연구회 ) 2014 국제어문 Vol.62 No.-

          이 논문은 최근에 알려진 한역 속담집 『采?遺意』(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를 분석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다산 편찬설을 검토하고, 아울러 이 속담 한역의 특성을 탐색하여 속담집으로서의 위상을 살폈다. 『채파유의』의 편자는 속담의 가치와 그 수집에 큰 의의를 부여하여, 민간의 속담을 수집하고 이를 4언2구의 시 형식으로 바꾸어 종국에는 『시경』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적극적인 편찬의식을 지녔다. 『채파유의』는 속담집으로서 크게 세 가지 특성을 지녔다. 첫째, 『채파유의』는 조선후기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로 속담의 정수를 채록하여 집대성한 특이한 문헌이다. 둘째, 세태·풍속의 다면성을 적극적으로 채집하여, 당시의 풍속을 생동감 있는 언어로 한역하였다. 셋째, 그 과정에서 官을 비판하는 민의 육성을 포착하여 과감하게 옮겨 놓았다. 그 표현의 적나라함과 과격함은 그 이전의 속담집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채파유의』는 당시의 속담을 방대하게 집성하면서도, 교화적 시선의 개입 없이 인정세태의 다기한 면모를 여실히 담아낸 속담집이다. 그 결과 `금강산도 식후경` `개천에서 용 난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른다`처럼 가장 한국적 정체성을 지닌 속담이 『채파유의』에 문자로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이전 속담집에서 볼 수 없었던 비속한 표현도 광범하게 실리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민요 취향이 대두하고 민간풍속에 관심을 가지는 문인이 여럿 나타났지만, 『채파유의』의 편자 만큼 民의 일상언어에 절대적 의의를 부여하고, 이를 자신의 과업으로 일관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채파유의』의 편자를 다산 정약용으로 보고 이 속담집을 1792년에 편찬한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런 논의의 결과로 『채파유의』는 『이담속찬』의 초고본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담속찬』과 『채파유의』는 그 편찬의 시각이나 내용 면에서 동일한 편자의 책이 되기 어려우므로, 현재의 상태에서 필자 문제는 확정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편찬 시기는 기존 속담집과의 대비적 고찰을 통해 볼 때, 1852년으로 추론된다. This study is an intensive analysis of Chaepayueui (采?遺意), recently excavated literature. Chaepayueui translated orally transmitted Korean proverbs into Chinese, and there are two versions, one owned by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the other owned by Yonsei University. This study focused on the version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Attaching high significance to the value and collection of proverbs, the compiler of Chaepayueui collected a large number of proverbs circulating among the folks and translated them into Chinese in the form of couplet with four words each line as found in The Book of Odes (詩經). The compiler of Chaepayueui had a very clear sense of purpose for his work, which was that collecting Korean proverbs and translating them into Chinese was inheriting the good intention of The Book of Odes. This study attempted to explain first who the compiler was and then when the book was compiled. What has been presumed in previous studies is that the book was compiled by Yak-yong Jeong (丁若鏞) in 1972. This study, however,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Chaepayueui might be compiled in 1852 after the death of Yak-yong Jeong, and not by Yak-yong Jeong but by one of those around Yak-yong Jeong. Next, this study analyzed all the proverbs contained in Chaepayueui, and identified three characteristics of this proverb collection as follows. First, Chaepayueui is the most extensive proverb collection in Korean history, and it contains a large number of new proverbs not found in previous proverb collections. Second, the book collected various colors of proverbs reflecting the social conditions in those days from an open perspective. In particular, vulgar sayings occupy a large part of the collection. Third, the collection includes unreservedly many proverbs criticizing the ruling class and government officials in those days. The straightforwardness and radicality of the expressions were unprecedented in previous proverb 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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