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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현주(洪顯周)와 청(淸) 문단의 신교(神交)와 그 의미

          林映吉 ( Yim Young-gil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7

          이 논문은 洪顯周(1793~1865)가 청 문사들과 서신을 통해 교유한 경위와 그것이 19세기 한중 문인 교류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홍현주는 正祖의 부마로, 중국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1812년 서장관 申緯가 홍현주를 북경 문단에 소개한 이래로 오랜 기간 청 문사들과 서신 왕래를 지속하며 교제를 이어갔다. 홍현주는 중국으로 가는 사행편을 적극 활용하여 신위와 동일한 인맥을 공유하는 한편, 『豐山世稿』와『永嘉三怡集』, 그리고 자신의 시집인 『海居齋詩鈔』와 「淸潭別業圖」 등의 그림을 중국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신위의 중국 내 인맥과 차별되는 대청 교류망을 구축하였다. 홍현주는 김정희와 신위를 매개로 하여 翁樹崑ㆍ吳嵩梁ㆍ蔣詩ㆍ陳文述ㆍ張深 등 翁方綱 문하의 동인들과 神交를 맺었으며, 權永佐ㆍ許櫟ㆍ鄭元容ㆍ姜溍 등을 매개로 하여 陶澍와 卓秉恬 등 1802년(嘉慶 7) 진사 동방생과 신교를 맺음으로써 조선과 청 양국의 문학 교류에 직ㆍ간접으로 참여한 구성원을 다양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홍현주의 교유 활동은 秋史 金正喜로 대표되는 19세기 전반기 한중 문인 교유의 주요 흐름과 합치하면서도 한중 교류망의 군소 지류가 형성되고 확장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details of epistolary communications of Hong Hyeon-ju(洪顯周) with Qing litterateurs, and its meaning in the history of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Qing in the 19th century. Hong Hyeon-ju was a son-in law of the king Jeongjo(正祖) and had never been to China, but since Shin Wi(申緯) of Seojanggwan introduced Hong Hyeon-ju to the Beijing literary in 1812, he continued to communicate with the Qing litterateurs for a long time. Hong Hyeon-ju actively utilized the delegation trips to China to share the same personal connections with Shin Wi, while he spread his 『Pungsan-sego(豐山世稿)』 and 『Yeonggasamyi-jip(永嘉三怡集)』, as well as his collections of poems 『Haegeojae-Sicho(海居齋詩鈔)』 and his painting 「Cheongdambyeoleopdo(淸潭別業圖)」 to China, forming an exchange network in China that was differentiated from Shin Wi's personal connections. Hong Hyeon-ju formed an epistolary communications with Wu Songliang (吳嵩梁), Jiang Shi(蔣詩), Chen Wenshu(陳文述), Zhang Shen(張深), who were members of a literary coterie under Weng Fanggang(翁方綱), through Kim Jeong-hui(金正喜) and Shin Wi. In addition, by forming a epistolary communications with Tao Zhu(陶澍), Zhuo Bingtian(卓秉恬) who were fellows of JinSa in 1802 through Gwon Yeong-jwa(權永佐), Heo Ryeok(許櫟), Jeong Won-yong(鄭元容) and Gang Jin(姜溍), Hong Hyeon-ju contributed to diversifying the number of members who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literary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Qing. Hong Hyeon-ju's activities have important meaning in that they played a certain role in the formation and expansion of minor branches of the Joseon-Qing literary exchange network while being consistent with the main flow of the Joseon-Qing literary exchange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which is represented by Kim Jeong-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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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을 향해 세운 절의 - 조선 후기 광해조(光海朝) 절신(節臣)의 사적(史的) 형상화 양상 -

          鄭用健 ( Chung¸ Yong-gu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8

          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사회에서 ‘광해조 절신’으로 기억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사적 형상화 양상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관을 표방하며 세워진 나라였던만큼 건국 초기부터 유가 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忠’을 강조하였고, 군신 간의 의리를 중시한 역대 인물을 지속적으로 기억·현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節臣’에 대한 관심은 ‘昏君’이라 일컬어진 光海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본 고에서는 그러한 ‘광해조 절신’의 존재 양상을 ‘柳夢寅과 北人系 인물’, ‘金坽’, ‘金興國’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은 北人, 南人(金坽), 西人(金興國) 등 각기 다른 당파 출신으로 仁祖反正 당시에도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의리를 지킨 방식 역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들을 절신으로 높이고자 한 주체와 그 시기 및 방법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변별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각 인물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절신 현양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 역시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먼저, 이들에 대한 추숭 작업이 시기적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각 인물들은 대체로 17세기 이래 절신으로서의 점진적인 기억 과정을 거쳐 문인 사회에서 ‘광해군을 위한 충신’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노력이 최종적인 완성을 보았다. 다음으로, 이들의 절신 현양에는 정보의 추가·삭제·윤색 등 일정한 조탁의 과정이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김흥국은 18세기까지만 해도 광해군에 대한 절행의 내용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절신 서사를 부여받았거니와, 유몽인과 김령이 역사적으로 기억되어 온 과정을 추적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특정한 일화와 사건이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제외되면서 보다 완정한 절신으로서의 모습이 조형되어 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유몽인과 북인계, 김령, 김흥국 등은 그들이 가진 서로 다른 배경과 행적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사적 형상화 과정을 거친 끝에 19세기에 이르러 ‘광해조 절신’이라는 담론장 안에 느슨하게나마 포섭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군주의 明暗 여부에도 불구하고 신하로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광해군의 遺臣으로 후대적 인정을 받았으며, 나아가 절의의 상징 ‘伯夷’를 비롯하여 ‘吉再·死六臣·金時習·燕山朝節臣’ 등 동방 절신과도 그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유가 이념의 진작과 확립을 위해 조선만의 伯夷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조선 문사들의 의식 활동은, 이처럼 광해군 때의 신하들을 대상으로도 분명한 성취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고의 논의를 통해, 그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광해조 절신에 대한 이해의 증진은 물론, 鄭夢周·吉再·死六臣·金時習 등 일부 인물만을 대상으로 언급되었던 ‘조선조 절신 서사’의 발굴과 확충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aspects of the characters who were remembered as ‘Gwanghaegun(光海君)'s Loyalist’ and their historic imagery in the literary societ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s Joseon was founded with Confucianism, it emphasized ‘loyalty’ and continuously honored the historical figures who showed loyalty. This interest in loyalist was also applied to Gwanghaegun called tyrant. This thesis especially paid attention to the three categories of Gwanghaegun's Loyalist: ‘Yu Mong-in(柳夢寅) and buk-in(北人)’, ‘Kim Ryeong(金坽)’ and ‘Kim Heung-guk(金興國)’. They were in different situations at the time of the rebellion of Injo(仁祖反正) due to their different party colors. Not only that, they each had their own distinctive aspects in terms of the subjects who wanted to raise them, timing and methods. In spite of the aspect of the commemoration made independently according to the figures, there were also certain commonalities that penetrated them. First, in terms of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commemoration work on them was complet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Second, the commemoration was accompanied by a certain process of arranging, such as adding, deleting, and embellishing information. In this way, despite their different backgrounds and activities, the three men showed a pattern of being loosely included in the discourse of Gwanghaegun's Loyalist in the 19th century after going through a gradual commemoration process. Not only they received recognition from posterity as the loyalists of Gwanghaegun, but also stood shoulder to shoulder with the symbols of loyalist such as Jeong Mong-ju(鄭夢周), Gil Jae(吉再), Sayuksin(死六臣), Kim Si-seup(金時習) and Yeonsangun's loyalists(燕山朝節臣). For the promo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Confucian ideology, the activities of the Joseon scholars who worked tirelessly to find Joseon's Baek Yi(伯夷) were able to achieve clear results even for the subjects of Gwanghaegun. Through the discussion of this thesis, it is hoped that not only the understanding of Gwanghaegun's loyalist can be improved, but also the ‘Epic of the Joseon's loyalist’, which was mentioned only for a few people such as Jeong Mong-ju, Gil Jae, Sayuksin and Kim Si-seup can be discovered and expa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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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대시학문헌종술(韓國歷代詩學文獻綜述)

          장백위 동방한문학회 1999 東方漢文學 Vol.0 No.16

          고대 동국인은 독서를 즐겼으며, 그 책들은 한서적이 많았던지라 역사상 한시학이 널리 발달되어 왔다. 淸代 王士禎은 "과연 시를 알고 읊을 수 있는 동국인"이 라며 감탄했었다. 크게 보아 시학은 창작과 평론으로 나된다. 본문은 한국 역대 시학 문헌을 종합 서술하되 평론 방면에 치중하였다. 관련된 문헌을 6가지로 나누어 간술하면 아래와 같다. Ⅰ. 詩 話 시화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 형성기를 鍾嶸의 《詩品》으로, 심지어 더 거슬러 을라가《詩經》중의 몇 구절에서 잡을 수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시화의 성립은 歐陽修의《六一詩話》의 출현을 그 시점으로 본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최초의 시화가 생겨났으며 지금 능히 알아 볼 수 있는 것으로 4가지 종류가 있다. 구양수가 시화를 쓴 목적을 "재료에 따라 한담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태도는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가짐이었다. 고려시대의 시화는 그 책 이름으로 보아 이 전통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국시화의 기본 창작 태도가 되었고, 체제상 필기·잡설에 더욱 가까우니, 다시 말해 진정 시화로 불릴 만한 저작은 겨우 40종뿐이다. 조선시대 徐居正의 《東人詩話》두 권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화"라 이름 지은 저작이다. "동인"이 시화라 하여 동인 시를 동인이 논한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작자의 동방시학(문학)에 대한 자각의식을 나타내었음이다. 동국 시와 중국 시의 아름다움을 서로 겨루어 보려는 것 역시 이후 시화 작자의 저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시학이 극히 발달한 시대로 洪萬宗이 엮은《詩話叢林》 4권은 최초의 한국 역대 시화 選編이라 할 수 있다. 단, 홍씨의 편록 안목이 너무 좁아 본국 시가 평론 부분만 취했으니 많은 양의 중국 시인·작품의 평론, 중한 시가 비교 평론 부분은 모두 절록되었다. 현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가치에 적잖은 손상을 입혔다. 趙鍾業 교수가 편찬한《韓國詩話叢編》 17권은 지금까지 가장 완비된 한국시화재료집이다. 조 교수의 시화편찬은 광의의 시화 정의에 착안하였다 광의의 표준으로 따져 본다면 이 책에도 보충할 점들이 더 있다고 본다. 한국시화의 내용은 이론 비평과 실제 비평의 두 종류로 나뉜다. 이론 비평의 각도에서 보면 시의 기본 관념은 물론이고 시의 체제와 작법, 시의 미학 취미 등 모두 중국 전통 시학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비평의 각도로 보면 또 그 비평 대상을 근거로 한국 비평, 중국 비평, 한중점유 비평 3가지로 나눈다. 이런 문헌들은 모두 한국시학 연구, 중국시학 그리고 중한시학비교 연구에 아주 중요한 참고 자료이다. Ⅱ. 文 集 한국 역대 문집의 수량은 아주 많은데 序跋, 尺牘, 雜說, 專論, 論詩詩 등 체제에 시학 문헌이 대량 포함되어 있다. 모든 문헌 중 문집이 차지하는 위치야말로 가장 중시할 가치가 있다. 위에서 말한 시화도 사실 문집에서 떼 내어 나온 것이 적지 않다. 서발은 문체로 말하자면 작자의 의도를 끌어내어 그것으로 전체를 볼 수 있는 작용을 한다. 만약 서발의 대상이 시학과 관계가 있다면 그 중에는 평론의 내용이 꼭 포함되어 있다. 척독, 잡설, 전론, 논시시의 자료들은 아직 체계 있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문집 중의 논시시(시를 시로 논함)는 중요한 시학 문집이다. 중국의 논시시와 비교하면 한국의 논시시는 詩體상으로 보아 절귀 위주가 아니라 고언율시 절귀 형태가 공존한다. 한국 역대 문집 중 논시시의 수량은 많은데 "論詩" "學詩"로 제목을 붙인 것 외에 "누구누구의 시를 읽고"라고 제목이 붙여진 것도 연구자들이 마땅히 중시해야 할 것이다. 문집 중의 잡설, 전론들에는 가끔 강렬한 이론 색채를 띤 것도 있는데 시화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Ⅲ. 筆 記 필기와 시화는 문체상으로 보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다. 만약 중국시화를 章學誠의 의견에 따라 "論詩而及事"와 "論詩而及辭"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한국시화의 대다수는 전자에 속한다. 따라서 체제상 시화와 필기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다. 한국의 필기는 아주 풍부한데 어떤 것은 문집 중에 산재하거나 혹은 彙編된 것도 있는데 주로《稗林》과《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시학 문헌상 필기의 중요성은 이미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으나 전체를 망라한 문헌 요구상으로 볼 때 아직 더 많은 작업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다. Ⅳ. 選 本 선본은 중요한 문학 史料이다. 한국 최초의 선본은 崔瀣의《東人文》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책은 이미 소실되었으나《東文選》에 그 서문이 보존되어 있다. 그 選編 동기를 들자면 첫째 한국은 고래로 중화풍을 흠모하여 이미 문장이 찬란하였음이고 둘째로 중국 문사와 교제할 때 "동인 문자를 보고자 하는 이가 있었으나 여태 책으로 만들어 내어 보인 적이 없었으니 부끄러움을 느껴 돌아와 이런 류의 책을 지을 뜻을 가졌다"하였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이것은 "집성된 책" 한 부이다. 이 후의 선본들 즉《靑邱風雅》, 《東文選》역시 이런 기능을 갖추고 있다. 중국 선본의 기원과 작용은《隋書·經籍誌》의 기재에 의하면 비평의 기능을 갖추었으니 이 점이 중한선본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한국선본의 편선초에는 모두 문헌 보조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신라, 고려조 시학 연구의 기본 재료가 된다. 한국 고대 선본을 선별 대상으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한국시선, 중국시선, 중한시 겸선초이다. 조선시대 어떤 선본들은 문헌 輯存의식이 강하지 않아 종종 일정한 선편 취지를 드러낸다. 御旨를 받들어 만든 《杜陸千選》, 민간에서 유행된《百聯抄》등의 선본에서 시풍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다. 선본 중의 비평어·주석들 역시 주의를 기울일 만한 시학 재료이다. 한국 최초의 비평어 선본으로는《三韓詩龜鑒》을 들 수 있다. 《靑邱風雅》의 주석 중에는 가끔 중국 시인의 시귀가 있으니 당시 중국시 학의 전래 상황을 잘 짐작할 수 있다. 주석 이외에도 평론을 가한 것도 있다. 평론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李稙의 《纂注杜詩澤風堂批解》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는 師古, 王洙, 崔夢弼, 趙次公, 劉辰翁들의 비평 주석을 집록한 외에 가끔 자기의 평론도 더하였다. 또 자기의 견해를 밝히거나 앞사람들의 의견을 검토하는 등 정독하는 정신을 나타내었다. 이 비평에 나타난 시학 관념은 주자나 명대 전후 7자를 계승한 듯하니 그것은 그의 학문 근원과 처한 시대 상황과 관계가 있는 듯 하다. Ⅴ. 類 書 류서는 백과전서의 성질을 띠고 있으나 가끔 시학 내용을 포함한 것도 있다. 중국의 류서는 魏 文帝 시의《皇覽》을 시조로 그 찬술이 끊이지 않고 卷帙 수가 방대해졌다. 현존하는 한국의 류서는 모두 조선시대에 생겼으며 그 중 시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李 光의《芝峰類說》, 李瀷의《星湖僿說》, 安鼎福의 《星湖僿說類選》, 權文海의《大東韻府群玉》, 李裕先의 《林下筆記》등이 있다. 한국류서는 모두 개인 저술인지라 일반적으로 중국의 《太平脚覽》, 《冊府元龜》, 《永樂大典》, 《古今圖書集成》들과 같은 방대한 규모의 권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학 저술 중 류서에 관한 관심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류서 중의 문헌은 더욱 발굴해 낼 것이 많으니 두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볼 때, 집을 하였으되 다하지 못한 것, 또 여태 이용되지 못한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류서는 재료를 집록했을 뿐 작자 본인의 판단이 적은 것이 중국 류서의 통례이다. 허나 한국의 류서에서는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들면서 작자의 고증과 견해를 더한 경우가 있다. 시학문헌학의 각도에서 볼 때 이것은 재료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작자 본인의 시학관을 드러낸 점이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Ⅵ. 行 紀 중한 양국은 역대로 使者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파견된 사자는 기행 중 "朝天錄" 혹은 "燕行錄"이란 이름으로 견문을 기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 전장제도, 사회습속, 사상, 학술 등 여러 방면으로 언급하였다. 문체상으로 보아 연행록은 운문과 산문으로 나뉜다. 현존 복사 출판된 연행록은 산문체가 많으며 작자 미상의《계산기정》, 李宜顯의《陶谷集·紀行詩》, 李時秀의《續北征詩》등은 모두 시체이다. 각종 문자 중에 흩어져서 보이는 "조천록", 柳得恭의《熱河紀行詩注》 는 운문과 산문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조선 사자는 중국에 와서 중원의 문인 학자들과 교류하며 "필담으로 화답하고 서찰로 소식을 전하였다." 특히 건륭조의 연행록 중에 이런 류의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비교 시학의 연구에서는 매개체의 작용을 아주 중시하는데 이런 문헌들은 바로 가장 생동감 넘치는 문학 교류 생활 기록이라 하겠다. 기행문 중의 시학 재료는 비록 몇몇 학자들이 주의를 기울였으나 아직 연구가 미흡하다. 예로《韓國詩話叢編》제 11권에 수록된 朴趾源의《楊梅詩話》는 바로《熱河日記》에서 나왔다. 그러나 《熱河日記》중의 시학 재료들은 "시화"라고 표제하지 않았으며, 제4권의《避署錄》에도 상당히 풍부한 재료들이있다. 또 박장암이 집찬한《縞紵集》의 범례에서 말하기를 "이 책은 《巾衍集》에서 시작되어《貞藝稿略》에서 끝난다. 옆으로 아래로 緯經을 이루며, 시화라 할 수도 있고 제목들 모음이라 할 수도 있다"하였다. 또 《湛軒燕記》중의〈乾淨筆談〉, 洪大容과 嚴誠, 潘庭筠들의 담화에서 시학에 관해 언급한 것이 많다. 이러한 필담의 재료를 조선인들이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한국 역대 연행록의 문헌적 가치는《비단 시학 방면뿐만 아니라》학술계의 큰관심과 중시를 일으켜야 마땅할 것이다. 이상 열거한 시화, 문집, 필기, 선본, 류서, 기행문 등 여섯 가지 서적을 통해 한국 역대 시학 문헌을 종합 서술하였다. 그 밖의 史書, 碑刻 등의 문헌중 시학 재료들은 너무 자질구레하여 여기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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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주제: 한국한문학(韓國漢文學)의 쟁점(爭點) 1 :동아시아 문화권의 전통과 한국 한문소설의 쟁점

          申相弼 ( Sang Phil Shin ) 동방한문학회 2013 東方漢文學 Vol.0 No.57

          본고는 전근대 한문소설의 다기한 쟁점 사안을 史的으로 점검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한문소설사에서 주목할 성과를 보여준 羅末麗初, 17세기, 19세기의 세 시기에 집중함과 동시에 각 시대의 논점을 한중 소설의 관계와 연계하여 살펴보았다. 이는 시기별로 논점을 구분하면서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한국 한문소설사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쟁점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초기 소설사의 경우 전기 양식의 단선 구도에서 전설, 설화, 志怪 등 다양한 양식으로 확장시켜 접근하였고, 소설의 시대로 불린 17세기의 문제는 그 근원적 서사의 동력과 양식적 전환의 계기를 전란과 함께 16세기를 포함시켜 이해할 필요성이 있음으로 제기했으며, 조선후기의 경우 한문장편소설이 지닌영웅군담이라는 성격으로부터 서사 문학의 통속성을 통해 작자와 독자가 이룬 사회문화적 소통의 방법론을 쟁점화해야 함을 언급하였다. 이와 함께 한중 소설의 소재적 연관 관계를 비교문화적 연구 차원을 넘어서 방법론적 측면에서 논의할 필요성이 있음을 제기하였다. 이는 중국 소설과의 상호비교를 통해 한국 한문소설의 객관적 지위를 확인함으로써 한국 한문소설의 자료적 한계를 넘어섬과 동시에 논의구도를 확장시켜 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examining the various issues in pre-modern Chinese character novel through the history. The three periods of end-Shilla & early-Goryeo, 17th century and 19th century were focused because they produced conspicuous achievement in the history of Chinese character novel in Korea. The issues in each period were explored in association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novels in Chinese character and Chinese novels. This was to consider the making of universality and identity of the Chinese character novel history in Korea into an issue by shedding new light on them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culture area while differentiating the issues by period. In the early period, Chinese character novels in Korea had single-line structure in the form of biography and they were in the various forms of legend, tale and ghost story. It is suggested in this study that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Chinese character novels of 17th century (which is called the ‘period of novel’) together with war and 16th century in consideration of the driving power of underlying narration and the switch in style. For the late Joseon period, it is mentioned that the issue should be the methodology of communication between authors and readersin within society and culture in view of the heroic martial novel character of full-length Chinese character novel at this time and the conventionality of epic literature. In addition, it is suggested that it is required to approach the discussion on the relationship of subject between Korean novels and Chinese novels from the aspect of methodology beyond the study on the level of cross-cultural study. This is a suggestion to overcome the limitation in data of Korean Chinese character novel by confirming the objective position of Korean Chinese character novel and comparing it with Chinese novel while expanding the scope of discussion on Korean Chinese character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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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역관 아전 계층의 사회와 문화 -필기,야담 자료를 중심으로-

          신상필 ( Sang Phil Shin ) 동방한문학회 2011 東方漢文學 Vol.0 No.46

          본고는 정치가이자 문인이며 학자였던 조선조 사대부들이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기억할 만한, 그리고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일화와 사회제도를 수록한 필기의 기록 문학적 성격에 주목하였다. 이와 함께 상층 문화와 생활에서 시야를 넓혀 기층 백성들의 생활과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조선중기 이후 서사적 성향이 강화된 야담도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 필기와 야담집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통해 구전되면서 ``문학적 진실성과 사회적 현실성``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이때 필자는 근원사실로부터 구체화된 이야기들이 조선조 사회를 살아 간 민인들의 현실 감각의 반영태이며, 민간의 설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자료 역시 사회적 여건과 정황이 개입됨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만 기록, 혹은 이야기 문학에 담긴 사회적·현실적 실상과 그 반영태를 어떻게 보다 정밀하게 해석하여 유의미한 자료로 구성하는가에 관건이 달려있다. 이에 그 하나의 시도로 中人 계층에 주목해 보았다. 특히 역관과 함께 아전 계층이 그 주요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 행정의 실질적 사무를 담당한 주체로서 법전을 통해 사회적 존재 양태를 재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문법상의 아전들의 존재 양식과 달리 사회 현실에서 구체화된 이들의 모습과 관습법적 생활 방식의 구체적 면모는 아직도 확인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점에서 필기와 야담집은 법적 테두리 안에 규정된 중인들의 보다 실질적인 생활 관습과 면모를 말해주는 의미있는 자료들이다. 본고는 이들 계층에 대한 매우 단편적이거나 사소한 정보에 접근해 보았다. 하지만 이는 문학적 자료를 역사와 사회적 측면에서 읽어 봄으로써 사회제도의 실질적, 혹은 관습적 작동 과정을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의 첫걸음이며, 이후 다양한 방면으로 확대되길 기대한다. The present study paid attention to the nature of documentary literature of Pilgi that Sadaebu who were politicians, men of letters and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recorded social institutions and anecdotes which were worthy of being remembered and necessary to be remembered around their lives. Additionally, we were also focusing on Yadam in which an epic tendency was strengthened after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through having an interest in ordinary people`s lives and social change broadening their mental vision beyond the culture and life of the upper classes. While basically these Pilgi and Yadam books were handed down by tradition through a variety of classes of society it is certain that they came to reflect ``the literary truth and social realities.`` At this time the author of this paper is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stories embodied from original facts are reflections of a sense of reality by people who lived in society of the Joseon Dynasty, and that social conditions and circumstances were involved also in materials in which the folk`s narrative imagination was added. But the question is how to compose them as significant data interpreting the reflections and the social and actual state contained in records or narrative literature in more detail. As a result, we took note of the middle class as an attempt. Especially, official aides as well as interpreters are the object of main attention. They can reorganize social existence features through a code as main agents responsible for practical work in the central and local administration. However, in comparison with the way official aides existed according to the written law the actual features embodied in social reality and concrete aspects of their lifestyle according to the common law should be found out still in many parts. In this respect Pilgi and Yadam books are significant materials of indicating more practical customs and features of their lives in relation to the people from the middle class defined within the legal limit. The current paper approached very fragmentary or minor information on the class. Nevertheless, this is the first step of an attempt to reconstitute the practical or conventional mechanism of social systems by reading literary materials from the perspective of history and society, and we expect it to be expanded to a variety of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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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선신(金善臣)의 생애(生涯)와 그의 저작(著作)에 관한 일고(一考)

          신로사 ( Ro Sa Shin ) 동방한문학회 2008 東方漢文學 Vol.0 No.36

          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김선신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이다. 김선신은 해외 경험이 드물었던 19세기 초 중국과 일본을 모두 경험하였고, 나아가 양국의 문인들과 학문적, 문학적으로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선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김선신의 생애와 저작을 고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김선신은 1805년 瀋陽에 다녀왔는데, 연행을 다녀온 형 김선민과 벗 이의성을 통해 유득공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1811년에는 文才를 인정받아 통신사의 正使 書記가 되었다. 대마도에 가서 저명한 일본 학자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고 序文을 써주는 등 교류를 하였다. 古賀精里와는 같은 주자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宋學·漢學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822년에는 金魯敬의 군관으로 그의 아들이자 벗인 金命喜와 함께 燕行에 참가하여, 이들과 함께 吳崇梁·曹江·葉志詵·李璋煜 등 중국 문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김선신은 연행이후에도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선신이 이들 중국문인들과 漢學·宋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김선신의 경우를 통해서 한·중·일 삼국 문인들의 知的·學問的 교류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국내 문인들 중에서는 김정희 김명희 형제 그리고 김려와 김선 형제와 매우 절친했다. 이외에 신재식, 이명오, 조면호 등의 인물과도 교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를 일본에 소개하거나 김정희에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등 김선신이 당대의 문인들과 일정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김선신이 남긴 작품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통해서 1811년 통신사와 당시 문인 교류를 알 수 있다. 『청산도유록』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博對馬島賦」는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 문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졌다. 김선신에 대한 연구는 조선문인들 사이의 교류뿐만 아니라, 그 당시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 문인들 사이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biography and works of Gim Seonsin, a literatus who lived in Joseon. Gim Seonsin went to China and Japan in early nineteen-century, furthermore he made an exchange with literati of China and Japan about scholarship and literature. At this present, Gim Seonsin is little-known. The paper principally traces Gim Seonsin`s biography, this is basic research for the diplomatic mission (Tongsinsa) which Joseon sent to Japan in 1811. Gim Seonsin`s family was very poor and lowly, Gim Seonmin who is Gim Seonsin`s older brother and his father were Jinsa. Especially, Gim Seonmin went to China a year ago than Gim Seonsin. Gim Seonsin maybe gained from information of China. Gim Seonmin was very inportant to Gim Seonsin, because Gim Seonmin collected Gim Seonsin`s works. The important thing of Gim Seonsin`s life was the network it was the relationship between other literatus. Gim Seonsin was closed to Gim Jeonghui, Gim Myeonghui brothers, Gim Ryeo, Gim Seon brothers, and Sin Jaesik, I Myeongo, Jo Myeonho. The academic world of Korea, however, overlooked the relationships between Gim Seonsin and them. Cheongsandoyurok which is the work about the 1811`s Tongsinsa, it were read by Chinese as well as Korean. This was also evaluated with a literary work. It is necessary to the research into Tongsinsa in 1811 and the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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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의식(意識)의 변천(變遷)에 관한 고찰(考察)

          원주용 ( Ju Yong Won ) 동방한문학회 2008 東方漢文學 Vol.0 No.36

          雙梅堂 李詹(1345~1405)이 생존했던 시기는 高麗에서 朝鮮建國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인 麗末鮮初로, 주지하듯이 종래의 불교를 배척하고 性理學을 도입하여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따라 유교국가를 건설해 가는 思想的인 점에서나 歷史的인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기이다. 왕조의 교체에 따른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의 出處에 대한 심각한 苦惱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말선초에 관한 연구는 일정정도 성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나, 대부분 고려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 사람이나 새왕조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여 업적을 이룬 인물들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新興士大夫로서 왕조교체기에 자신의 出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이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이 글은 이들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雙梅堂의 작품을 통해 그 일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雙梅堂은 14세기 말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이인임 등 집권파와 투쟁하기도 하고 신왕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까지 역임했다. 쌍매당의 文에 나타난 의식은 儒者로서 義·孝·忠·直 등 儒家的 德目을 함양하였으나, 왕권의 쇠약과 臣權의 강화 등 당시의 時政에 대한 懷疑를 품게 됨과 동시에 여러 차례의 귀양으로 점차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일으켜, 처한 현실에 대응하여 살고자 하는 `隨遇而安`의 자세로 의식이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쌍매당의 변화된 의식에 대해 지금까지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해 왔었다. 결론적인 측면에만 논점을 두어 쌍매당이 두 왕조를 섬긴 것을 두고 과연 "이중성을 지녔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麗末에 벼슬했다가 개국한 조선에 벼슬한 이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이중성을 지닌 자로 치부해버려야 하는 것인가? 쌍매당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된 과정을 통해 여말선초 혼란한 政局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면서 신흥사대부로서 出處에 대해 얼마나 고뇌했어야 했는지 당시 지식인의 의식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The time Ssangmaedang leechum lived is Yeomalsuncho, which was historical turning period from Goryeo to Chosun. That is important period in historical and ideal side in that people constructed Confucianism country following Sung Confucianism and excluded Buddhism. As a dynasty`s change, historical turning point came and intellectuals had serious worry about their government position and retirement. Even though study of yeomalsuncho obtains kind of good results, the results almost zoom in on people who had great achievement as took an active part in construction of Chosun or kept fidelity for Goryeo. But study about Sinheung sadaebu is unexhausted. They considered their government position and retirement very seriously at turning period. We will study about them through Ssangmaednag`s work in this prose. Consciousness in Ssandmaedang`s prose have Yuga`s virtue, but it seems to change into Su-oo-lee-an`s virtue which tells people respond to reality of their`s life. Because he was banished many time, so he finally had complications on his belief and had doubt on politics of that time when king`s right decreases but retainer`s right strengthens. People think Ssangmaedang`s changed virtue is negative as yet, but now, can you judge Ssangmaedang who served two dynasty has dualism and he didn`t think about change of the time? As Sinheung sadaebu lived in Yeomalsuncho underwent confusion politics, they considered their government position and retirement seriously. I want you reconsider about them those who lived that time through Ssangmaednag`s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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