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남병철(南秉哲) 회인시(懷人詩) 연구

          한영규 ( Young Gyu Han ) 한국한문교육학회 2008 한문교육연구 Vol.31 No.-

          南秉哲(1817~1863)은 경화세족 출신의 고관이면서 동시에 정약용, 박규수, 최한기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천문과 역산 분야에 독보적인 식견을 탁월한 과학 저술을 남겼고, 종래의 화이론적 세계관에 속박되지 않는 지평에서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남병철은 문과에 급제한 이후 26세 때까지 외가의 별서 玉壺精舍에서 열린 白蓮社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시를 지었다. 이러한 시사 활동을 통해 그는 당색·계층·적서·장유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당대의 명사들과 광범하게 교유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외조부 김조순 대부터 이어져 온 경화세족의 문화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남병철은 "경세제민과 무관한 글은 지을 것이 못된다"라는 顧炎武의 견해에 공감하여, 시 창작을 폐하고 士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데, 그 전환의 시점은 1842년 여름 무렵으로 추정된다. 남병철의 회인시는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에 창작된 것으로 공경, 사대부로부터 서얼, 중인층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어 시로 쓴 당대 명사의 인물지라는 성격을 지녔다. 특히 김정희파의 속하는 중인층과 정약용가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남병철은 회인시에서 대상 인물과 맺은 감회를 표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명사들의 빼어난 점을 품평하는 `論詩`의 방식을 취하였다. 남병철은 긍정적이며 여유로운 태도로 명사들의 인격미를 淡雅하게 그려냈는바, 그 결과 서얼층과 중인층의 경우 불우한 측면이 약화되고 명사로의 풍모가 주로 부각되었다. 남병철은 청조 학예에서 계발 받은 학식을 기반으로, 그 정곡에 해당하는 비유를 찾아내어 인물을 품평한 결과, 19세기 조선 명사의 인격미를 고양시키고 한층 넓은 지평에서 해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즉 학적 지식에 기반한 인물 품평이었다. 이 점 19세기의 다른 회인시에 견주어 남병철 시가 지닌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Nam Byeong-cheol was a high official from an influential family in Seoul, and is counted as a realist representing the 19th century together with Jeong Yak-yong, Park Gyu-su and Choi Han-gi. He had matchless knowledge of astronomy and almanac, and left scientific writings such as Chubosokhae, and recognized the West and Western science objectively from the horizon not bound to the traditional world view of the Sino-barbarian theory. The present study explored Nam Byeong-cheol as a poet, taking note of the fact that he was absorbed in poets` club activities and poem writing during his 20s before he began his life as a realist and a scientist. Since he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until 1842, Nam Byeong-cheol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Baekryeonsa meeting at Okhojeongsa, a villa of his mother`s family, and wrote poems enthusiastically. Through the poets` club activities, he associated with prominent figures in those days regardless of political party, class, legitimacy, and age. The 32 longing poems analyzed intensively in this paper were the products of these associations, and they are descriptions of prominent figures in those days written in poetic form. From the position of emphasizing the aesthetics of literature and arts, he captured human images of various characters including official literati, poets, painters, doctors, astronomers, and annotators. Different from traditional longing poems expressing feelings between the poet and the subject of the poem, Nam Byeong-cheol`s poems have the characteristic of `discourse poem,` appreciating prominent figures` excellences. That is, they tried to comment individual figures` characteristics through suggestive expression. Nam Byeong-cheol described prominent figures plainly in a positive and serious attitude. As a result, the unfortunate aspect of concubines` children and middle-class people was weakened, and the features of prominent figures were spotlighted. Particularly based on his extensive knowledge, Nam Byeong-cheol compared the subject figures with famous people in China, and through this, he elevated the personal beauty of prominent figures in the Chosun Dynasty to the highest horizon. That is, based on new knowledge and sense that he acquired from the science and art of the Qing Dynasty, he appreciated the diverse personal beauties of prominent figures of the Chosun Dynasty in the 19th century.

        • KCI등재

          19세기 여항 문단과 의관(醫官) 홍현보(洪顯普)

          한영규 ( Young Gyu Han ) 東方漢文學會 2009 東方漢文學 Vol.0 No.38

          이 글은 추사파 중인층 가운데 醫官 洪顯普(1815~1896 이후)를 특별히 주목하고, 새로 알려진 그의 『海初詩稿』와 『海初文稿』를 통해 19세기 여항 문단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탐색하였다. 홍현보는 의관이면서 동시에 19세기의 유력한 여항 문인으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중인이었다. 그는 기술직 중인을 대대로 세습하던 가문의 후예로 젊은 시절 추사 문하에 입문하여, 추사와 기거를 같이 하며 주치의이자 記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완당척독』을 읽고 쓴 글에서 그가 추사의 학예에 대해 정확한 식견을 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을 공유하며 추사의 훈도를 받은 결과였다. 홍현보는 추사에 이어 당대 천문·역산 분야의 석학 남병철 형제와 긴밀하게 교유하였다. 그는 문한에 대한 소양과 학식을 인정받아, 남병길 명의의 서문을 대신 짓기도 하였다. 홍현보는 여항 시집을 편집하는 등 여항의 문화의 현양에도 큰 기여하였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출판과 정리를 통해 여항문화를 제도적으로 공인시키는 일이었다. 홍현보는 온건하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이전의 여항 문화를 평가하였다. 이런 균형감은 의과로 발신한 이래 내의·어의를 거쳐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여 지위나 관품이 높았던 그의 현실적 처지의 투영이기도 하였다. 홍현보를 "추사 문하의 제일인"이라 칭한 김석준의 평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럴만한 근거를 지녔다. 특히 홍현보가 추사와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남병철 형제를 왕래하며, 당대의 세 거장을 연이어 시종한 일은 이상적·조희룡 등에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이력이었다. 홍현보는 19세기 중인층과 경화세족이 관계맺는 특별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The middle class grew and their social and cultural status was enhanced in the 19th century and, as a result, a very close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between the middle class and the gentry class living in Seoul. Chusa Kim Jeong-hee was a representative figure who maintained a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the middle class. Paying attention to Medical Officer Hong Hyeon-bo (1815~1896) among middle class people in the Chusa School, this study analyzed Haechosigo and Haechomungo Hong Hyeon-bo`s garlands found recently. According to the results of examining Hong Hyeon-bo`s garlands, he was Chusa`s student, attending physician and clerk who dwelled at Chusa`s house when he was young. Consequently, Hong Hyeon-bo had more accurate knowledge of Chusa`s character and academic tendency than anyone else. After his association with Kim Jeong-hee, Hong Hyeon-bo worked as the family clerk of the Nam family from Euiryeong, attending on Nam Byeong-cheol and writing on behalf of Nam Byeong-gil. Hong Hyeon-bo also played the role of a mediator between the gentry class living in Seoul and the middle class by making efforts to collect and publish middle class people`s literary achievements. For these reasons, Hong Hyeon-bo is considered "Number one among Chusa`s disciples."

        • KCI등재

          19세기 경화사족의 학예(學藝) 취향과 만명사조(晩明思潮)

          한영규 ( Young Gyu Han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人文科學 Vol.0 No.48

          명나라 말기는 중국사상사와 문예사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현대 중국의 미학자 成復旺은 중국의 사상 조류를 유가·도가·불가·굴원으로 나누고 여기에 다시 晩明思潮를 포함시켜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張法은 굴원을 유가에 포함시키고 불교를 도가에 귀속시키면서, 중국의 사상을 유가·도가·만명사조의 세 줄기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만명사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한국한문학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조선후기 한문학과 명말 公安派와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관점을 보다 확장시켜, 만명사조가 19세기 조선의 학예에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고 있었는지를 탐색하였다. 『세설신어』는 위진 시기에 출현했지만, 만명 문예가 특별히 부각시키고 재해석을 시도한 문헌으로서 만명사조의 先聲이라 할 만하다. 진계유는 이탁오·원굉도·탕현조·서위·풍몽룡 등과 함께 명말사조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세설신어』와 진계유의 저술이라는 두 지표어를 중심으로 탐색한 결과, 홍석주·홍길주·이유원·정원용 같은 19세기 경화사족과 장혼·조희룡·이규경 등 경화사족 문화권의 문인들이 만명사조를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소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명사조는 허균·신흠 이래, 18세기의 박지원·이옥 그리고 19세기의 홍길주·조희룡을 거쳐 20세기 초의 황현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를 관통하며 학술·문예 방면에서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후기의 학예 지형도에서 만명사조는 청대 고증학이나 西學에 비견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소품문에 반대했던 정조의 사망, 그리고 서학을 금압한 세도정치기의 조건 속에서 19세기 경화사족은 진계유유형의 만명사조를 매우 심도 있게 수용하고, 향유하였다. The late Ming Dynasty is a very remarkable period in the history of Chinese thoughts and arts and sciences. Contemporary Chinese aesthetician Cheng Fu-wang divided the streams of Chinese thoughts into Confucianism, Taoism, Buddhism and Qu Yuan, and added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as another stream, identifying five mainstreams. Including Qu Yuan in Confucianism and Buddhism in Taoism, Chang Fa viewed Chinese thoughts as three lines, namely, Confucianism, Taoism and the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New interests in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are found also in research on Chinese literature in Korea. Recently, research is being conducted actively on the relation between Chinese literatu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and the Gongan School in the late Ming Dynasty. Expanding the viewpoint further, this study examined how the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were understood and received in Korean arts and sciences during the 19th century. Shishuoshinyu appeared in the period of Wei-Jin, but was spotlighted and reinterpreted during the late Ming Dynasty, and is considered the prelude of thoughts in the late Ming Dynasty. Along with Lee Tak-oh, Won Goeing-do, Tang Hyeon-jo, Seo Wi, Pung Mong-ryong, etc., Jin Gye-yu is a literary man representing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From the results of search using two keywords ``Shishuoshinyu`` and ``Jin Gye-yu`s writings,`` we found that noble families in Seoul in the 19th century such as Hong Seok-ju, Hong Gil-ju, Lee Yu-won and Jeong Won-yong, and literati like Jang Hon, Jo Hee-ryong and Lee Gyu-gyeong who associated with such families digested the thoughtsof the late Ming Dynasty from a large variety of angles.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penetrated through the late Chosun Dynasty from Heo Gyun and Shin Heum to Park Ji-won and Lee Ok in the 18th century, Hong Gil-ju and Jo Hee-ryong in the 19th century, and Hwang Hyeon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influenced their arts and sciences. In the arts and sciences of the late Chosun Dynasty,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were important elements comparable with evidential studies and Western learning in the Qing Dynasty. During the 19th century characterized by the death of King Jeongjo who opposed So-pum-mun(miscellaneous writings) and the suppression of Western learning under Sedo politics (politics dominated by a few influential clans), noble families in Seoul received and enjoyed the thoughts of the late Ming Dynasty like Jin Gye-yu`s very deeply.

        • KCI등재
        • KCI등재

          『송천필담』의 明代 淸言 수용 양상

          한영규(Han Young-gyu)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한국학 Vol.33 No.3

          이 논문은 심재의 『송천필담』이 명대의 청언을 본격적으로 인용하고 활용한 최초의 필기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 수용상의 특징과 의의를 밝히려는 의도 속에서 서술되었다. 『송천필담』의 청언 수용은 17세기 허균의 ??한정록??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다. 특히 『소창청기』 등 만명 청언의 취향에 공명하고 이를 대거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심재는 청언류 문헌을 활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의론적 지향을 지녔다. 또 이전에 누구도 주목한 바 없었던 ??필주??, 『청서필담』을 특별히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허균의 취향과는 일정하게 다른 지점을 향하였다. 또한 그가 『세설신어』체청언을 인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러한 풍격의 청언ㆍ청담을 채록하거나 스스로 창작한 것은 『송천필담』이 이룩한 매우 획기적인 면모였다. 따라서 『송천필담』은 그 성격상 야담, 패설, 시화 등등의 여러 면모를지녔지만 무엇보다 인물 품평형 필기라는 특성을 지녔다. 심재가 세설체 청언과 아울러 『청서필담』등 처세훈체의 청언을 주목한 점 역시 『송천필담』만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송천필담』에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그 풍도(風度)의 고상함을 품평하는 세설체 청언과 사인으로서 삶의 원칙을 추구하는 처세훈체의 아포리즘이 공존하게 되었다. 요컨대 심재는 진인적(晉人的) 풍도와 송인적(宋人的) 사의식의 두 방향에서 명대의 청언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취향의 공존은 그의 심미 지향을 여실히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탈세간적 취향에 공명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사인(士人)으로서의 세교(世敎)의 측면을 긍정하였다. 즉 사인의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탈속적 취(趣)를 추구하였다. 요컨대 『송천필담』은 18세기 사인(士人) 관망자의 평생에 걸친 견문과 의견 그리고 취향의 집성태였다고 할 수 있다. Taking note of the fact that Simjae’s Songcheonpildam is the first writing that actively quoted and utilized cheongeons (philosophical discourses) from the Ming Dynasty, this study purposed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of its acceptance of cheongeons. Songcheonpildam’s acceptance of cheongeons is similar to that in Heogyun’s Hanjeongrok written in the 17<SUP>th</SUP> century. This is true particularly in that they sympathized with Manmyeong’s cheongeons and quoted them extensively. However, Simjae showed an argumentative tendency that revealed his opinions using cheongeon?style literature. Furthermore, his line aimed at a somewhat different direction from Heogyun’s taste in that he spotlighted Pilju and Cheongseopildam, which had never been noticed by anybody until that time. Going further from quoting Seseolsineo?style cheongeons, he collected or created cheongeons and cheongdams of such a style, and this makes Songcheonpildam very distinctive. Accordingly, although Songcheonpildam has various aspects including informal history, folktale, and illustrated poems, its most conspicuous characteristic is that it is writing for evaluating people. Another unique characteristic of Songcheonpildam is that Simjae paid attention not only to evaluation?style cheongeons but also edification?style ones including Cheongseopildam. As a result, Songcheonpildam has both evaluation?style cheongeons, which put a person at the center and assess his bearing, and edification?style aphorisms that pursue rules of life as an individual. The coexistence of the two tendencies represents his aesthetic pursuit. On the one hand, he sympathized with unworldly tastes and, on the other hand, approved the aspect of association with the world as a private citizen. That is, he pursued unworldly tastes actively as much as he did not deviate from his identity as a private citizen. This is a unique aesthetic sense of an 18<SUP>th</SUP>?century citizen who failed to rise in an official rank in the 18<SUP>th</SUP> century.

        • KCI등재

          특집 : 근대문학과 "번역/번안"의 문제 ; 20세기 전반기, 이언진 문학의 호명 양상

          한영규 ( Young Gyu Han ) 반교어문학회 2011 泮橋語文硏究 Vol.0 No.31

          이 논문은 근대전환기에 과거의 한문전통이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18세기 시인 이언진에 주목하였다. 이언진은 18세기 중인문학이 산출한 대표적 작가이고, 19세기에는 이상적·김석준 등의 역관이 그의 문학을 계승하고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왕성하였다. 또한 최근 들어 이언진 시의 독창성이 현재적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근대전환기에 이언진을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는 지금까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이언진의 작품은 20세기 전반기에 두 가지 층위에서 호명되었다. 우선, 근대 계몽기 신문·잡지에서 이언진의 시가 수차례 호명된 사례가 확인된다. 『황성신문』 『대한협회회보』 『서북학회월보』의 편집자는 이언진의 시를 소개하면서, 그가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쓴 시를 선발하였다. 이언진이 18세기 일본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근대계몽의 시선으로 그의 시를 호명한 것이다. 다음으로, 1910년대에 최남선에 의해 이언진의 작품이 주요 민족 고전의 하나로 호명되었다. 최남선은 이언진의 『송목관집』을 조선광문회를 통해 출판을 시도하였고, 또한 『청춘』에 이언진의 시를 게재하는 한편 『시문독본』에서 이언진의 척독을 특별히 부각시켰다. 그러나 최남선은 식민지라는 현실 조건으로 인해 이언진 호명에서 매우 현실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춘』에 박지원의 「방격각 외전」을 모두 번역해 게재하면서도, 이언진의 전기인 「우상전」의 번역·게재는 끝내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그것은 박지원의 「우상전」에 이언진이 18세기 일본을 폄하하는 시가 여러 편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한문전통의 근대적 호명 양상은 매우 다층적으로 면모를 보였으나, 거시적으로 보아 문예적 성향에서 차츰 학문적 성향을 중시하는 쪽으로 그 축이 이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근대계몽기에 다양하게 호명되던 한문전통은 1910년대 이후 전범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This study explored Lee Eon-jin, a poet in the 18th century, in order to understand how the past tradition of Chinese literature was evaluated in the transitional period of the modern times. Lee Eon-jin is a representative writer of the middle-class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and there were many efforts to inherit and reevaluate his literature by interpreters such as Lee Sang-jeok and Kim Seok-joon in the 19th century. Recently, moreover, Park Hee-byeong reinterpreted the originality of Lee Eon-jin`s poetry from a contemporary viewpoint. However, it has not been studied how Lee Eon-jin was understood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In the early 20th century, Lee Eon-jin`s works were citied largely in two groups. First, Lee Eon-jin`s poems were cited several times in newspapers and magazines during the modern enlightenment period. In introducing Lee Eon-jin`s poetry, the editors of Hwangseong Sinmun, The Bulletin of the Korean Association and The Monthly Bulletin of the Seobuk Academic Society selected poems that he wrote in Japan as a member of a delegation. They spotlighted Lee Eon-jin who won win literary fame in Japan in the 18th century, and cited his poems from the viewpoint of modern enlightenment at the time having Japanese colonial rule ahead. Next, Lee Eon-jin`s works were cited by Choi Nam-seon in the 1910s as a core of national classics. Choi Nam-seon attempted to publish Lee Eon-jin`s Songmokgwanjip through Chosun Gwangmunhoe. He inserted Lee Eon-jin`s poems in The Youth, and brought Lee Eon-jin`s epistolary literature into relief. In the colonized situation, however, Choi Nam-seon showed a limitation in citing Lee Eon-jin. He translated the whole of Park Ji-won`s Banggyeonggak Ojeon and published it in The Youth, but failed to translate and publish Lee Eon-jin`s biography Usangjeon. It is probably because Park Ji-won`s Usangjeon contained a number of Lee Eon-jin`s poems despising Japan in the 18th century.

        • KCI등재
        • KCI등재후보
        • KCI등재
        • KCI등재

          투고논문 : 19세기 문인 신광현(申匡絢)의 『위항쇄문(委巷쇄聞)』 편찬의식

          한영규 ( Young Gyu Han ) 동방한문학회 2012 東方漢文學 Vol.0 No.50

          이 논문은 19세기 여항문인 신광현의 시문집인 『생림경장』의 발굴을 계기로, 그동안 별반 알려지 않았던 그의 행적을 밝히고 이어 그가 남긴 『위항쇄문』의 저술 의도와 글쓰기 방식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탐색하였다. 신광현은 김희령이 주관한 西園詩社의 주요 멤버로서 박윤묵 등과 활발하게 시를 창작한 여항의 문인이지만, 중인?서리의 직임을 세습하는 가문 출신이 아니라 한미한 사족으로서 여항문화권에 편입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독실한 훈도로 문한에 대한 남다른 능력을 갖춘 이래 이정리, 조만영 등 당대의 유력자에게 나아가 책실이나 비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추천으로 교서관에 임명되는 등 그 이력에서 예외적인 여항문인의 면모를 띠었다. 신광현의 『위항쇄문』은 현전하지 않으나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10편의 작품과 새로 알려진 서문 등을 살펴본 결과, 그 편찬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서울의 중인서리층 인물이 아닌 향촌의 효자 열녀를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중인서리의 계층의식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둘째, 효자 열녀의 내면적 ``良知``가 발현되는 특정 장면만을 포착하여, 그 순후함을 생동감있는 문장으로 형상화하였다. 셋째, 개별자의 전형적 행실을 문학적으로 專有하는 과정에서 그 문장 표현은 詭誕 愰惚의 방법을 활용하여 정서적 공감을 높이려 하였다. 또 『희조일사』와 같은 ``雅馴``한 글쓰기를 반대하며 鄙俚한 문장을 추구하였다. 신광현의 『위항쇄문』은 19세기의 예외적 여항인이 개척한 또 하나의 글쓰기 방식으로서, 여항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As Saengrimgyeongjang, a poem collection of middle-class literati Shin Gwang-hyeon in the 19th century, was discovered and it revealed the literary man`s life that has been known little until now, this study purposed to explore the intention of writing his book Wihangsoemun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writing style. The editorship of Wihangsoemun is largely divided into three aspects. First, it focused mainly on local filial sons and chaste women rather than middle-class officials in Seoul. As a result, the class consciousness of middle-class officials was weakened considerably. Second, the book captured specific scenes expressing the inner ``sunny spots`` of filial sons and chaste women and configured the warm-heartedness in realistic sentences. Third, in the literary appropriation of individuals` exemplary conducts, the expression of sentences tried to enhance emotional sympathy using the method of fantasy and ecstasy. What is more, the writing pursued common sentences, opposing elegant writing as in Hijoilsa. Shin Gwang-hyeon`s Wihangsoemun, which is another writing style developed by exceptional middle-class people in the 19th century, is considered to have made some contribution to extending the realm of middle-class literature.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