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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澤榮 한시를 바라보는 동시대인의 세 가지 시선

        한영규 국제어문학회 2018 국제어문 Vol.0 No.79

        Changgang Kim Taekyoung is a person who should pay attention to the final aspect of Korean Chinese literature. The poems and sentences of Changgang were important criticisms as an example to his later generations, Jo Keung-sup, Byeon Young-man, Lee khi. The younger generations of the Changgang greeted the new environment of colonial modernity and criticized the Chinese literary achievements from the traditional viewpoint and calculated their Chinese literary works. Hanshi of the Changgang was greatly appreciated by his three generations. Jo Keung-sup praised the implication of the Tang poetry like “少林道中”(1886, 七言絶句). It is a tendency to appreciate the classical aesthetics of his Hanshi. Secondly, Byeon Young-man praised the feature-length poems “嗚乎賦”. Third, in the poetry collection at that time, he praised like “矗石樓”(七 言律詩). 창강 김택영은 한국한문학의 마지막 양상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어야 할 인물이다. 창강의 시와 문장은 그의 후배 세대인 조긍섭⋅변영만⋅이기 등에게 하나의 모범으로서 중요한 비평 대상이었다. 창강의 후배세대는 식민지 근대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여, 當代的 시각에서 한문학 성과를 비평하고 자신들의 한문학 작품을 산출했다. 창강의 한시는 그의 후배세대에 의해 크게 세 가지 시선으로 평가되었다. 첫째, 창강의 후배 조긍섭은 「少林道中」(1886, 7언절구) 같은唐詩風의 함축적 전아함을 높이 평가했다. 창강의 한시가 지니고 있는 고전적 심미성을 높이 인정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변영만은 「滄江子傳」을 통해 김택영의 한시 가운데 「嗚乎賦」 등의 長篇의 歌行體 시를 호평하였다. 이들 시가‘구성이 우뚝우뚝하고 풍치가 세상에 뛰어나다’라고 표현했다. 변영만은 창강 시의 애국적 주제의식과 그것의 격정적 표현을 다른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이는 조긍섭이 높이 평가한 창강 시의 고전적 심미성과는 다른 방향이라 할수 있다. 셋째, 『조야시선』 『팔가정화』 『대동풍아』 『동시천련운선』등의 시선집은 각각의 편집 의도가 달라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朝渡臨津」 「矗石樓」 같은 7언율시가 높이 평가된 공통점이 있다. 즉 모범적인 學詩의 대상이자 완성도 높은 감상물로서 창강의 7언율시가 당대의 시선집에서 높이 평가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KCI등재

        19세기 시인 이황중(李黃中) 연구

        한영규 국제어문학회 2020 국제어문 Vol.0 No.85

        Lee Hwang-jung was highly recognized as one of the most famous poets of the 19th century. But after modern times, they became completely forgotten. This paper reaffirmed the poetical reputation and poetic achievement of Lee Hwang-jung, and examined the features of his poems. The writers who highly value Lee Hwang-jung’s poems are largely classified into three layers. First, the writers who were active in the mid-19th century and the late 19th century, either directly or indirectly, were Kim Jeong-hui, Lee Si-won, Lee Sang-su, and Jeong Man-jo. They highly appreciated the extraordinary human aspect and unusual poetry of Lee Hwang-jung. Second, the Chinese writer, Bu Bo-sam, compiled a collection of “Chukgjojeongajib” in 1857, highlighting the poetic achievements of Lee Hwang-jung. Bu Bo-sam was also regarded as one of the leading poets of the Joseon Dynasty. Third, after Lee Hwang-jung’s death, Kim Taek-young made a precise selection of his poems in exile China and made him widely known to the world. Among these three levels of criticism, Kim Taek-young’s collection of poems was the most serious reevaluation of the poet Lee Hwang-jung. It is also considered to have a certain meaning in Korea’s classical literature. However, Lee Hwang-jung’s status as a poet was first forgotten in modern times. As we saw earlier, Lee’s poems were considered excellent enough to match the achievements of Tang’s poems. In other words, Lee’s poems correspond to a point of diversity shown by 19th-century literature, and should therefore be reevaluated anew. Also, the feeling of sorrow and the aesthetic of pain achieved by his poems is considered one of the values to be savored by the new name today. 이황중은 이규보의 후손이자 19세기의 시인으로서 그의 생존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근대 이후 한시의 종언과 더불어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글은 잊혀진 문학사의 한 지점을 새롭게 주목한다는 의도에서, 19세기 시인이황중에 대한 과거의 비평 양상을 고찰해 보고, 아울러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을탐색하였다. 이황중의 시를 비중있게 평가한 문인들은 크게 세 층위로 분류된다. 첫째, 그와 직간접으로 교유한 동시대의 문인들로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김정희ㆍ이시원ㆍ이상수ㆍ정만조 등이다. 이들은 이황중의 외골수의 인간 면모와 기이한시편을 높이 인정했다. 그와 동시에 이황중이 고집한 편향적인 시형식과 시적지향 및 창작 스타일에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둘째, 동시대 중국의문인 부보삼(符葆森)은 1857년 국조정아집(國朝正雅集)을 편찬하며, 이황중의 시적 성취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부보삼은 특히 이황중의 율시에서 보여준 비애의 서정과 정밀한 대우(對偶)를 높이 인정했다. 셋째, 이황중 사후, 후배시인 김택영과 이기(李琦)는시선집을 편찬을 통해 이황중을 높이 평가했다. 이기는 조야시선에서 이황중의 시를 대거 수록하여, 그의 시인적 위상을 높였다. 김택영은 1919년 망명지중국에서 이감산시선을 정선(精選)하여 출간하면서, 그의 시를 문학사적 지평에서 평가했다. 이 선집에서 김택영은 이황중 시의 ‘고고(高古)’하고 ‘침착(沉 著)’한 특성을 당시(唐詩)에 견줄 만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지나친 ‘유고(幽苦)’함에는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 층위의 비평 가운데 김택영의 시선집 편찬이야말로 시인 이황중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재평가로서, 문학사적 의미를 띤다고 평가된다. 이황중은 생존 당시 중국은 물론 사후인 1919년 무렵까지 여러 층위에서 명가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뚜렷한 위상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러나 근대전환기를맞이하여 그는 다른 시인에 비하여 가장 먼저 잊혀졌다. 이황중이 추구한 선(仙)과 기(奇)의 시적 지향, 시창작 스타일에서의 유(幽)와 고(苦)의 추구 등은20세기 이후 한국학의 전개에 비추어, 소구력이 가장 낮은 부면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즉 이황중 시에 그동안 현재적 의의를 부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보삼의 비평과 김택영의 기획 출판에서 확인되듯, 이황중의 대표작은당시(唐詩)의 성취에 비견된다고 평가된다. 즉 이황중의 시는 19세기 문학이 보여준 다양성의 한 지점이라는 면에서 재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그의 시가 성취한 비애의 정서와 ‘고(苦)’의 미감은 오늘날 새롭게 호명하여 음미할 가치의 하나라고 평가된다.

      • KCI등재

        유한요소해석을 이용한 차대차 측면충돌에 대한 연구

        한영규,백세룡,윤준규,임종한 한국인터넷방송통신학회 2015 한국인터넷방송통신학회 논문지 Vol.15 No.3

        차대차의 측면충돌에서 충돌부위에 따라 차체의 변형정도는 크게 달라진다. 충돌로 인하여 차체에 변형이 일 어나는 경우에 속도에너지가 변형에너지로 전달되어 거동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교통사고분석에서는 충돌 후 차량의 거동을 운동량 보존법칙으로 분석하며 차체의 변형에 따른 에너지 흡수량은 반발계수를 입력하여 그 오차를 보정할 수 있으나 측면충돌에 대한 연구결과는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전방충돌과 후방추돌에 대한 연구결과를 참고해서 반발계수 를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차체의 구조와 각 부품의 재질을 적용한 유한요소 차량모델을 외연적 유한 요소법으로 해석하였으며, 그 결과를 분석하여 측면충돌에서 차량의 접촉부위에 따른 반발계수와 충돌감지시간을 도출 하였다. 최종적으로 산출된 반발계수와 충돌감지시간을 적용하여 운동량보존법칙에 의해 얻어진 해석결과를 실제 차량 의 충돌결과와 비교하였다. 그 결과로 유한요소해석 모델을 이용하여 도출한 초기 입력값을 적용했을 때 기존의 분석 기법보다 해석의 신뢰도가 높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The deformed degree of car body varies largely with the collision part from side collision of car-to-car. In case of deformation of car body caused by collision, the movement is different as speed energy changes to strain energy. Generally, in the analysis of traffic accident, the movement of car after the collision is analyzed by law of conservation of motion and the error of energy absorption rate along the deformation of car body can be calibrated by inputting coefficient of restitution, but it is current situation that coefficient of restitution applied by referring to the research results of forward collision and backward collision because the research results of side collision is rare. Vehicle model of finite element method applied by structure of car body and materials of each component was analyzed by explicit finite element method, and coefficient of restitution and collision detection time along contact part of side collision was drawn by analyzing the results. Analysis result acquired through the law of conservation momentum by applying finally-computed coefficient of restitution and crash detection time compared to collision result of actual vehicle. As a result, the reliability of analysis was higher than the existing analysis method were acquired when applying the drawn initial input value that used finite element method analysis 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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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품문 글쓰기와 ‘林園經濟’ -李鈺의 『白雲筆』을 중심으로-

        한영규 우리한문학회 2008 漢文學報 Vol.18 No.-

        이옥(1760~1815)은 20대 초반의 5년간, 그리고 1796년 이래 생을 마치기까지 경기도 남양에 살면서 농사로 가사를 꾸리고 채소를 심고 화초를 키웠다. 독서하고 글쓰는 士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나름의 林園經濟를 남양에 구현하고 있었다. 즉 농작물을 경작했으며, 그것으로 생계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옥은 임원경제를 실천하면서 실용성과 심미성의 두 측면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다만 실용성을 보다 중시하고 심미성을 부차화시킨 서유구型이기보다는 심미성을 실용성보다 중시한 허균型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임원경제’류 문헌들의 구상과 이옥이 실현한 임원경제의 실제와는 많은 차별점이 존재한다. 4종의 ‘임원경제’류 문헌은 그 내용이 대체로 자기 진술이 아니라, 역대 전적에서 뽑아 편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옥이 지은 『백운필』 164칙은 모두 작자 자신이 실제 생활에서 느낀 바의 기록으로 채워졌다. 또한 『산림경제』 『증보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 3종은 그 언술들이 지향하는 바가 대체로 유가적 자장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옥의 문장은 그 外圍線이 유가적 규범성을 벗어나기도 하였다. 18, 19세기의 소품문은 城市라는 분위기 속에서 배태된 것이 거개이다. 그런 맥락에서 소품문을 도회지 문학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이옥의 경우, 그의 소품 문장은 서울과 남양 두 곳에서 발원하여, 도시적인 성향과 林園的인 성향이 공존하였다. 18, 19세기 소품문 글쓰기의 전반적 경향성에서 보자면 이런 특성은 매우 예외적이었다. 이옥 문장의 특성은 그동안 일탈과 실험성, 모호함, 희작성 등이라고 지적되어 왔다. 남양 생활 이후 『백운필』에 보이는 문장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다소 줄어들어, 그 文辭가 이전보다 평순해지고 열정과 기백이 쇠잔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백운필』은 조선후기 산문사에서 흔치않은 雜錄小品集의 하나이고, 晩明의 잡록 등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특유의 빛깔을 지녔다. 그 규모나 내용에서가 아니라 예외적인 개별자 이옥의 호흡이 독특하게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During 5 years in his twenties, and until his death since 1796, Lee Ok lived in Namyang, Gyeonggi-do supporting his family with farming, planting vegetables, and cultivating flowers. Being a Sa ‘noble man,’ who read books and writing essays, he realized his own Rim Won Gyeong Je ‘economy in fields and gardens’ in Namyang. That is to say, he cultivated crops, with whichhe created the basis of his life. While he fulfilled Rim Won Gyeon Je, he pursued both the practicality and the aestheticity simultaneously. However, he is closer to the type of Heo Gyun, who took the aestheticity to be more important than the practicality, than the types of Seo Yu-gu, who more valued the practicality while collateralized the aestheticity. The majority of the Xia Pin Wens ‘short composition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were given birth in the atmosphere of city. In this respect, it has often been said that Xia Pin Wen is a kind of municipal literature. However, in the case of Lee Ok, his Xia Pin compositions have both municipal and rural properties as they originated from the two places of Seoul and Namya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whole tendency of Xia Pin Wen writing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is feature of Lee’s works was very exceptional. The characteristics of Lee’s writing so far have been said to include deviation, experimentality, vagueness, and amusement. With somereduction of such characteristics to a degree, one can feel from his writings in Bae Un Pilthat the expressions are more calm than the previous ones and the passion and spirit are weakened. Though it is not clear whether this is due to the fields and gardens in Namyang or to his entrance into late years, it seems obvious that Baek Ul Pilis somewhat distant from his writings at his prime. However, Baek Un Pil is one of the Jap Rok Xia Pin Wens that are rare in the history of the late Joseon’s prose, and has unique colors that parallel Man Myeong’s Jap Rok. This is so not from its size or contents, but from the fact that it uniquely contains the breath of an exceptional individual Lee Ok.

      • 식민지시기에 편찬된 한시선집의 양상과 그 특징

        한영규 대동한문학회 2016 대동한문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2016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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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여항문인 조희룡의 유배와 신안 임자도

        한영규 국제어문학회 2013 국제어문 Vol.59 No.-

        Cho Hee Ryong (1789-1866) who edited 'Hosanoeki(壺山外記)'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19th Century Middle-class Literati. This study explored what meaning the exile life of about two years from year 1851 in Imjadohad for his literature and art based on several materials newly found. Also, this study tried to interpret the fame project of Cho Hee Ryong’s exile place that has been promoted by Shinan-gun, Jeonnam province since year 2004 in an aspect of academic viewpoints. One of the biggest events for Cho Hee Ryong’s experience in Imjado was the social keen intercourse with an ex admiral, Kim Geon (金鍵 1798-1869) who had been exiled, precedent to Cho Hee Ryong’s exile. It is found that Kim Geon used to be known as only admiral Kim which had no specific indication for a specific person, but that according to "Ilseongrok," he had been exiled there in July 1849 after the death of King Heonjong and left Imjado April 1852. Cho Hee Ryong associated keenly with the ex ex admiral, Kim Geon for 10 months. In the mean time, the two people are classified into a group of Chusa Kim Jeong Hee’s literati, and they were in common with conviction of exile due to their opposition to maternal relatives, Andong Kim’s political influence. Imjado for them was a Wonakji (a remote evil place) and functioned as a new cultural space to meet a political and cultural companion to share social intercourse as well at the same time. The fact that Cho Hee Ryong created various poetry and literary works and paintings including "Hwaguamnanmuk" etc., offers the evidence that his exile place experience played a role of cultural vital energy. The 19th century Imjado’s economic and cultural abundance was also a new experience to Cho Hee Ryong. It is related to the recent study results from which his exile in Imjado eventually contributed to qualitatively rapid progress of his poetry and literary works and paintings toward ‘rapid beauty’ and ‘dynamic beauty.’Shinan-gun, Jeonnam province directed their attention to a plan of turning Imjado to a tourism source as Cho Hee Ryong exile place, and followed by putting up ‘a memorial of Cho Hee Ryong’ in year 2004, they recently developed ‘Cho Hee Ryong Road’ as well. Above all, in a point that the place Imjado gets awakened as a mediator of Cho Hee Ryong’s literary and artistic ‘traces,’ it could be a very remarkable issue with regard to the middle-class literati in late Joseon dynasty. However, it is believed that if the placeness of Imjado is permanently to be meaningful, stimulative terms such as ‘holy place of Joseon literati paintings’ etc. should be abstained and refined. 중인서리층의 전기 작품집 『壺山外記』를 편찬한 又峰 趙熙龍(1789~1866)은 19세기의 대표적 여항문인이다. 이 논문은 새 자료를 동원하여, 1851년부터 약 2년간의 임자도 유배 생활이 조희룡의 문학 예술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았다. 또한 전남 신안군이 2004년부터 추진 중인 조희룡 유배지 현양 사업의 현황을 학술적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은 먼저 유배와 있던 전임 통제사 金鍵(1798~1869)과 긴밀하게 교유한 일이었다. 그동안 김통제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일성록』을 통해 김건이 헌종 사후인 1849년 7월에 유배되어 1852년 4월에 임자도를 떠났음이 확인되었다. 조희룡은 10개월 동안 전임 통제사 김건과 어울리며 깊은 교분을 나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분류되며, 정치적으로 안동김씨 외척 세도를 반대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공통성을 지녔다. 임자도는 이들에게 遠惡地이기도 했으나, 정치적 동지를 만나 교유하는 새로운 문화적 공간으로도 작용하였다.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화구암난묵』 등의 여러 시문 서화를 창작한 것은 그에게 유배 경험이 문화적 활력소로 기능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세기 임자도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도 조희룡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임자도 유배를 계기로 조희룡의 시문 서화가 ‘번화미’ ‘격동미’의 방향으로 질적 비약을 이룩했다는 최근의 연구결과와 상통된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최태문 등 여러 식자와 교유했으며 또 홍재욱 같은 제자를 배출하는 등 문인서화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장시키는 생활을 지속하였다. 조희룡과 임자도의 인연은 해배 이후에도 이어졌다. 1862년 임자도에 유배된 金櫺은 섬에 남아있던 조희룡의 시문을 접하고 그에게 경도된 심정을 「艱貞日錄」에 남기고, 서울로 글씨를 부탁하는 편지를 조희룡에게 부치기도 했다. 전남 신안군은 조희룡의 유배지로서 임자도를 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에 착목하여, 2004년 ‘조희룡 기념비’를 세운 이래 최근에는 ‘조희룡길’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임자도가 조희룡의 문예적 흔적을 매개로 다시 환기된다는 점은 조선후기 여항문예와 관련지어 매우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다만 신안 임자도의 장소성이 보다 항구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조선문인화의 聖所’와 같은 표현이 학술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KCI등재

        기획논문: 중인층 傳記集 ??壺山外記??의 성격과 위상 /논평:임유경

        한영규 한국고전문학회 2006 古典文學硏究 Vol.29 No.-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Hosanoegi, the first biography collection for the middle class that appeared toward 1854. Jo Hui-ryong got into action as a non-professional painter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in the 19th century. This was a rare case with the middle class. He occupied a leading position in the middle class cultural world in 1844-1849. Jo Hui-ryong wrote biographies of people from the middle class who had made outstanding contributions or had courteous elegance, and then collected them to complete Hosanoegi. The basic purpose of this book is as follows. He thought that people with talents but without social fame were essentially not different from those with established social fame. This viewpoint, which can be called an ‘individual detection,’ is a new sensibility that a leading feature in the middle class came to have at that time. He stressed his intimacy with those who were the objects of his biographical works. As a result, the sentences in his biographical works are not stereotyped but predicated vividly. There have appeared 5 biography collections after Hosanoegi, which were not written by him but collected and edited from other literature. 이 글은 1854년경 가장 먼저 출현한 중인층 전기 작품집 호산외기를 대상으로 삼아, 그 특징적 성격과 여타의 전기집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검토하였다. 조희룡은 중인층으로서는 드물게 비직업적 문인화가로 활동하였고, 헌종 말기를 전후하여 여항문화권의 지도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의 사유는 노장적 불가적 道禪的 특성과 연관을 가지면서도, 특정의 이념성에는 귀속되지 않는 독특한 잡박성을 지녔다. 이러한 경향성은 문학론에서 ‘나’를 第一義的으로 강조하는 性靈論으로 이어졌다. 조희룡은 중인층 가운데 그 행적이 빼어나거나 그윽한[奇ㆍ幽] 운치를 주는 인물을 호산외기에 입전하였다. 그리하여 최북 등 이미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는 물론이고, 무명의 소수자를 포착하여 형상화하였다. 호산은 이름난 봉우리와 一邱一壑 가운데 빼어난 것 사이에는 본질적 차별이 있지 않다는 齊物的 인식을 지녔고, 그것을 중인층의 인물 이해로 연결시켰다. ‘개인의 발견’이라 할 이 관점은 당시 여항문화권의 지도적 인사가 획득한 새로운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감성을 바탕으로 호산외기에서 입전 인물과 ‘나와의 관련성’을 중심에 놓고 서술하여,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창조하였다. 호산은 「김홍도전」에서 보듯 대상 인물의 특징적 일화를 간취하여 새롭고 빼어난 韻味를 드러내려 하였다. 이 점은 短題小品의 문예적 문장을 쓰겠다는 그 자신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품문의 출현은 個我의 심령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19세기 시정인의 심미 취향과도 밀접히 연결된다고 하겠다. 호산외기의 인물 기록은 그 이후에 편찬된 중인층 관련 전기집에 대폭 수용되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후의 전기집은 의미있는 창작보다는 기록을 집성하는 방향으로 치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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