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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연의<SUB>洪範衍義</SUB>』와 제왕학<SUB>帝王學</SUB>

        정재훈(鄭在薰) 한국국학진흥원 2018 국학연구 Vol.0 No.35

        본 논문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휘일李徽逸과 이현일李玄逸 형제가 지은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제왕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이다. 『홍범연의』는 종래 영남남인의 경세서로서 주목되었다. 『서경』에 수록된 홍범의 내용은 모두 65자에 불과하지만 이휘일과 이현일 형제에 의해 44만 여글자의 방대한 분량으로 완성된 28권의 『홍범연의』는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제시한 새로운 정치사상서로 볼 수 있다. 『홍범연의』의 구성과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 책은 최고의 정치원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제왕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용가운데 제왕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권23~24의 「황극」편과 권25 「삼덕」편뿐만이 아니라 전 권에 걸쳐서 제왕이 지켜야할 원칙과 구체적인 행위, 역사적인 사례 등을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조-효종-현종을 거치면서 조선중기의 심화된 붕당정치는 때로 갈등이 심화되면서 붕당간 다툼인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게 되었다. 상호비판과 공존을 전제로 하였던 붕당정치가 흔들리게 되자, 붕당정치의 전제가 되었던 제왕학에도 일정한 변화가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숙종대에 정쟁의 극심한 형태인 환국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현일이 『홍범연의』의 초본을 1686년 완성한 것은 이러한 흐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현일은 『홍범연의』를 통해서 종래 성리학적 제왕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책에서 주목한 제왕의 상은 성리학적 제왕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성리학 성립 이전에 원칙적으로 제시되었던 강력한 군주였다. 성리학 발흥 이전에 고전 유교의 세계에서 제시된 성왕聖王과 이를 보좌하는 유신儒臣으로서의 재상으로 대표되는 신하의 결합을 이상적인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는 17세기 후반의 정치현실에서 새로운 정치의 중심으로서 국왕의 존재를 지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박세채朴世采에 의해 ‘황극탕평皇極蕩平'이 제시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론은 결국 숙종肅宗을 거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대에 현실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홍범연의』는 이 책이 저술된 이후 진행된 탕평蕩平으로 대표되는 정치질서의 이론적인 틀을 선구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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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 태사묘<SUP>太師廟</SUP>의 변화

        정재훈(鄭在薰)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9

        현재 안동에 있는 태사묘는 안동의 대표적 인물인 김선평 · 권행 · 장길을 모신 사묘이다. 삼공신의 사당은 대체로 고려시대부터 대체로 안동의 향리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읍사에서 이들을 모신 것으로서 주로 권씨 출신의 향리들이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지방민들에게 지역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성황사에 모셔져서 제사의 대상이 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부사府司에 모셔졌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조선 초기에는 관련 기록이 거의 없지만 16세기 중반 부계친족의식이 강화되면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관인들에 의해 ‘태사묘'는 새롭게 주목되었다. 중종 때에 안동부사로 부임한 외손인 김광철이 삼공신묘를 새롭게 별도의 건물로 만들거나 친손들이 제사의례를 『주자가례』의 형식과 유사하게 정비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제사의 주체도 향리에서 사족으로 바뀌며, 명칭도 삼공신묘에서 태사묘로 바뀐 것은 가문의 시조로서 삼공신이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제향시의 위차논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The Taesa-myo shrine, now in the Andong area, is a sacred facility which enshrines the tablets of Kim Seon-pyeong, Gweon Haeng and Jang Gil, all representative historical figures of the Andong area. Commemoration of these ‘Three Meritorious Vassals' had been overseen by the Andong area's local Hyang'ri clerks since the Goryeo period, when these historical figures would have been enshrined at a place arranged where those Hyang'ri clerks would have worked (namely the “Eubsa” offices). It is also believed that those enshrining places would have been dominantly managed by the local figures from the Gweon house. In the Goryeo period, mythic figures who were regarded as local guardians used to be enshrined in the Seong' hwang-sa local shrines, so the local Bu-sa(府司) offices could have overseen the enshrinement of these three vassals from a similar sentiment and spirit. There is virtually no record of how things were done regarding the three figures and their enshrinement in the early years of Choson, but in the mid-16th century, as the society's consciousness of paternal kindred continued to intensify, the shrine for these figures came to be newly recognized by the local officials in the area.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Kim Gwang-cheol, who was the maternal descendant of the house and also assigned to the post of Andong's area prefect, newly constructed the “Three Meritorious Vassals Shrine” as a separate building, while paternal descendants of the house chose to modify the ritual protocols observed for memorial services at the shrine, to have them become more similar to the protocols described in Juja Ga'rye. Later these ‘Three Meritorious Vassals' were newly established as the founders of the Andong Gweon house, as the force behind these memorial services shifted form local Hyang'ri clerks to influential Sajok figures, and as the name of the Shrine (originally “Samgongshin-myo,” The Three Meritorious Vassels' Shrine) changed to “Taesa-myo.” However, such changes also led to potential controversies regarding issues of order and hierarchy in ritual ceremonies.

      • KCI등재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학문과 『도동편道東編』

        정재훈(鄭在薰) 한국국학진흥원 2013 국학연구 Vol.0 No.23

        이 글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학문과 그의 대표적 저술인 『도동편道東編』에 대해서 살펴본 글이다. 그는 일생을 학문에 몰두한 남인의 산림학자이다. 그는 연안 이씨의 명문가로서 이조판서와 예조참판를 역임한 조·부의 자제로서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상주로 이주하여 이후 학문에 몰두함으로써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외가인 이수광의 영향, 처가에서 유래한 이황·유성룡의 영향 등을 받으며, 성리학·예학 뿐만 아니라 문학과 서예 등에 걸쳐 다방면에서 깊이 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의 삶과 학문을 살펴보면 이만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학문과 영남의 학문을 잇거나 종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또 성리학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하면서도 이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의 조선의 현실은 학문적?정치적 대립이 극심하였음을 고려해 볼 때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독특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학문 가운데서도 『도동편』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명나라때 성리학설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典』의 형식을 빌어서 그 내용은 온전히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학설로 만든 조선판 『성리대전』이다. 『성리대전』은 명에서 국가적 힘을 기울여 만든 거질의 책이다. 그에 비교하면 『도동편』은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 양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중반 이후 본격화된 주자성리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성과를 요령있게 요약함으로써 이만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이후 개인이 이루어낸 성리학 관련 저서로는 가장 방대하고도 주체적인 성격의 이 저술이야말로 18세기 조선이 성취해 낸 학문적 기념비에 해당한다. 이후 18세기에 등장한, 조선의 현실에 근거한 학문은 이러한 저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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