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몽골지역 흉노시대 분묘 연구

          양시은(Yang, Si-Eun),G 에렉젠(Eregzen Gelegdoli) 중앙문화재연구원 2017 중앙고고연구 Vol.0 No.22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 논문에서는 2(X)(년 이후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봉콜지역 흉노시대 분묘에 대한조사 현황을살펴보고 흉노무덩의구조와편년을비롯한분묘관련연구성과를검토하였다. 봉콜 전역에서는 대략 기원전 1세기 전 중반부터 기원후 1세기에 해당하는 적석목곽이 기본 구조인흉노무덩이 발견된다 각무덩군간의거리가상당하지만,봉골전역의흉노무덩은지상에노출된 외부 형태와 지하의 매장주체부 구조가 거의 유사하다 대형 흉노무덩의 경우 칠마차 칠목관과 급은제 목관 장식, 비 단을 비 롯한 각종 직물, 급은제 장신구, 동복과 각종 청동 용기, 동경, 급은제 pj- 규 장식을 비롯한여러 벌의 마구류, 각종 생활용기(대형 용, 호, 동잔, 성발) 풍 부장유울에서 거의 통일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형 흉노 무덩 역시 대형 무덩에 비해 소략하기는 하기만 각종 장신구 마구 토기(심발 호) 동 일관된 부장 양상이 확인된다 봉골 전역에 걸쳐 흉노시대 분묘의 구조와부장품의 구성이 동일하다는 점은 당시 무덩의 조성에 중앙의 강력한통제가있었음을시사한다 흉노 무덩은 외부 적석 구조에 따라 원형(고리형)과 방형으로 나면다 원형은 묘도가 없는데 비해, 방형은 일부 유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덩에서 묘도를 갖추고 있다 초대형을 제외한 대부분의 흉노무덩에서는 별도의 봉분을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대형 또는초대형 무덩은 ‘뀐자형의 테두리를 띠라석축벽이부가되어약간의 봉분구조를갖추고있다 매장주체부는목관이나목곽의사용。1 일반적인데 2중목곽은 대형의 ‘뀐’자형 평연 구조를 갖춘 흉노 무덩에서 주로 확인된다 특히 배장묘 를 갖춘 2중목곽의 초대형 무덩은 규모 부장품의 동급과수량 변에서도 다른무덩과는 뚜렷한 써를보이고있는 바 최고계층의묘제로사용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This paper reviews the recent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n Xiongnu tombs in Mongolia that took place since 2000, and examines the research on the structure and chronology ofXiongno tombs. In the 21th century, manyXiongnu tombs, dated from 1st century BCE to 1st century CE, were discovered and excavated in Mongolia. Despite the considerable distance between the burial groups, the Xiongnu tombs throughout Mongolia are similar in the appearance on the ground and the internal structures. In case oflarge Xiongnu tombs, coffìn walls were covered with felt rug or silk, and decorated with gold or silver ornaments. Inside or outside the coffìn, ritual grave goods of similar composition are found that include animal bones, pottery, ornaments, horse equipment, bronze mirrors, lacquer wares, bronze cooking pots, jade decorations and various weapons. The small Xiongnu tombs are also relativε, ly simple compared to large tombs, but various grave goods such as jewelry, harnesses, and earthenware can be found. The fact that the tomb structure and the composition of grave goods are the same throughout Mongolia indicates a strong central control of the tomb composition during the Xiongnu era Most Xiongnu tombs have two types of surface stone structure: square and roughly circular. The circ ar tombs do not have dromos, whereas the square tombs mostly have a long rectangular dromos or entry chamber on the south side. In most of the Xiongnu tombs the mound cannot be identifìed, but large or extra-large tombs have a mound structure with a stone wall along the outline. Inside the large tomb there is usually a single or a double (exterior and interior) wooden chamber holding the coffìn at the bottom of a burial pit. In particular, extra-large tombs with -shaped outline, which have many satellite burials near the main tomb, are remarkably different in size of structure and quantity of grave goods from the others. Such tombs are thought to have belonged t。e aristocratic cl잉s of the Xiongnu.

        • KCI등재

          일제강점기 고구려 발해 유적조사와 그 의미

          양시은(YANG Si-eun)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8 No.-

          일제강점기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에서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고고학 조사가 행해졌다. 고구려와 발해 유적 조사 또한 조선인 연구자들이 배제된 채,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고구려 유적들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벽화분을 중심으로, 일부 대형 적석총과 도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고적조사는 일반적으로 박물관협의회에 고적위원회가 설치되어 「古蹟 및 遺物保存規則」이 공포된 1916년과 조선고적연구회가 설치된 1931년을 기준으로, 1916년 이전을 고적조사 1기, 1916-1930년까지를 고적조사 2기, 그리고 1931년부터 해방까지를 고적조사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발해는 고분 중심의 고구려와는 달리 도성 유적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과는 달리,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된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白鳥庫吉, 鳥山喜一, 鳥居龍藏 등과 같은 일본 관학자들에 의한 답사를 통한 연구만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된 당시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유적 조사는 순수한 학술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일본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여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경우 중요 유물 수습 및 벽화 고분 발견이 중시되었으며, 대체로 단기간에 이루어진 조사가 대부분이었다. 발해 역시 도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대적인 조사라기보다는 간략한 시굴조사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발해 유적에 비해 월등히 많은 유적이 발굴 조사된 고구려의 경우에도 조사된 유적 수에 비해 제대로 된 보고서는 거의 없었는데, 그나마도 소략한 내용과 함께 도면과 사진만을 일부 제시하고 마무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일부 보고서의 경우 국제사회의 홍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자세한 영문 요약문이 첨부된 것도 있어 기존의 보고서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눈에 띈다. 한편,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많은 수의 고구려와 발해 유물이 소장되어있는데, 그 중 일부는 경성제국대학 시절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들에 의해 수집된 것들이다. 이번 논문에서는 이들 자료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밝힐 수 있었는데, 이후 관련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고구려와 발해 유물은 당시 일본 연구자들 특히 경성제국대학연구자들의 고구려 및 발해 유적조사 현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a study on the research of Koguryo(高句麗) and Balhae(渤海) sites was made a monopoly by Japanese researcher. At that time, Koguryo was recognized as belonging to the both Joseon and Manchulia history, but Balhae was often recognized as belonging to Manchulia history. We classify 3 research stages about Koguryo investigations. That stages is devided by Sekino Tadashi(關野貞) team(~1915), the committee for Korean history(1916~1930), the Joseon Historical Spot Research Institute and the Manchu State(1931~1945). And then, we classify 2 research stages about Balhae investigations by establishment of Manchu State(before and after). Most of the Koguryo investigations were executed to find precious artifacts and mural paintings in the short period, and Most of the Balhae investigations were executed to made a clear to the capital city. But we can find many serious problems in most reports. So, we can conclude the research of Koguryo and Balhae sites done by Japanese government were executed as verification for contriving colonial historiography or political situation. Especially, I introduced Koguryo & Balhae collection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in this paper. That collections was collected and donated by the professor of Keijo Imperial University(京城帝國大學)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at data is able to be help to examine thoroughly situations of the research of Koguryo and Balhae sites.

        • KCI등재

          고려시대 전기 서북한지역의 관방체계

          양시은 ( Yang Si-eun ) 한국중세사학회 2021 한국중세사연구 Vol.0 No.64

          This paper examines the distribution status of Goryeo fortresses in the northwestern region and the changes in the military defense system from regional base defense to a defense using the great walls installed along the border. Goryeo established an administrative unit for securing military strongholds and local governance by expanding the territory of the North and establishing the Ju-Jin(州鎭) fortresses. The defense strategy of Goryeo, based on the records of invasion of the Khitan, was basically the defense of the stronghold of the region, which was built on major traffic routes to the capital, Gaegyeong(開京). Since Koguryo had already pioneered that routes, many of the Goryeo fortresses, except around the Yalu River, were renovated and used. Although the mountain fortress has the advantage of being easy to defend itself, Khitan was able to advance to the capital without occupying the fortress. The three invasions of Khitan eventually ended with a great victory of the Goryeo army, led by Kang Gam-Chan, but it was an opportunity to awaken the importance of the border. So, Goryeo built a great wall from the Yalu River in the west to Jungpyong-gun in the east in order to strengthen the border and prevent the invasion of enemies. With the construction of a great wall, the defense system in the northern territory has been changed from the regional stronghold defense to the borderline defense using the walls.

        • 해남반도 마한산성의 재인식

          양시은(Yang, Si-eun)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8 중원문화연구 Vol.26 No.-

          본 논문은 해남반도 마한산성의 현황을 고고학적으로 검토해본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우선 원삼국시대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해남지역의 고대 산성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해남지역에서는 마한 시기의 성곽이라고 할 만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한 초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옥녀봉토성이 거론되고 있으나, 현지 조사에서도 토성이라고 할 만한 분명한 증거는 확보할 수 없었다. 토성벽의 인위적인 조성 흔적이 발굴조사를 통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현 시점에서 무리하게 마한의 토성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영남지역에서는 4세기 이후에나 토성이 조영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목책이나 환호 등으로 방어가 이루어진 취락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해남반도 역시 유사한 시기의 고지성 취락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은데, 보성 조성리와 장흥 지천리의 환호유적의 사례를 보더라도, 옥녀봉토성은 방어시설을 갖춘 고지성 취락유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향후 옥녀봉토성에 대한 앞으로의 발굴조사는 해남반도에 존재하였던 마한 정치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paper is an archaeological review of the distribution pattern of Mahan fortress in the Haenam-gun of Jeollanamdo. As a result, there were no site in Haenam that could be regarded as fortress in the Mahan period. The Oknyeobong Site is mentioned as an important remains to show the early Mahan, but there was no clear evidence to be called fortress by survey. Unless the traces of the artificial construction of wall are clearly revealed through excavation, it is difficult to judge them as Mahan"s fortress at this point. Meanwhile, earthenwalls began to be observed in the Gyeongsang area after the 4th century, and prior to that, the remains of the ancient village, which were defended by wooden fences and trenchs, have been identified.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the site of the fortified settlement will be identified, even if the cases of the sites of Cho Seong-ri Site in Boseong and Jicheon-ri Site in Jangheung are seen, Oknyeobong Site is likely to have been high-altitude settlement sites equipped with defense facilities. The future excavation of the Oknyobong Fortress is expected to be of great help to understand the shape of Mahan politicians who existed in the Haenam.

        • KCI등재

          최근 북한 고고학계의 고구려 연구 동향

          양시은(Yang, Si-Eun) 고구려발해학회 2016 고구려발해연구 Vol.56 No.-

          본 연구는 2000년도 이후 『조선고고연구』에 수록된 논문과 발굴보고 등을 검토하여 최근 북한 고고학계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 동향을 파악해본 것이다. 2000년 1호부터 2016년 2호까지의 『조선고고연구』에는 고구려 관련 원고가 전체의 30%(869편 중 258편)에 달하고 있어 북한 고고학계에서 고구려 고고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고고 자료나 참고문헌이 소개된 원고는 모두 28편인데, 주로 2000년대 후반에 해당한다. 다만 참고문헌이 매우 한정적인 현상은 입수 경로와 관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저자에 대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78명 이상의 북한 연구자가 고구려 고고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는 적석총, 벽화, 피장자 문제 등을 포함한 고구려 고분 분야가 41.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방어체계와 도성 분야를 포함한 성곽 관련 논문이 20.2%, 기와나 무기, 마구, 토기 등과 같은 유물 관련 논문이 16.7%, 다른 국가나 후대 문화와의 관련성을 다룬 교류 주제의 논문이 10.9%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근래 북한 고고학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고구려 고분임을 시사한다. 고분과 관련한 최근의 주요 연구 성과는 태성리 3호분을 미천왕릉으로 비정한 것과 옥도리 벽화분과 송죽리 벽화분을 각각 황룡산성과 대현산성의 성주의 무덤으로 파악한 것 등이 있다. 그 외 4세기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이 평양에 존재한다는 여러 연구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보고된 평양 지역의 낙랑 고분(목곽묘, 전실분 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성곽에 대해서는 평양 일대의 고구려 성곽 유적 아래에서 고조선 시기의 토축 성벽이 발견되었다는 여러 보고가 있는데, 고고학적인 근거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아 문제가 있다. 또 장수산성을 남평양으로 비정하는 연구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남한의 고구려 성과성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나 토기를 대상으로 한 연구도 있다. 이상에서 검토한 북한 고고학계에서의 고구려 연구의 특징은, 첫 번째로 기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주장에 대한 내부의 반박 논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두 번째로는 주체적 입장에서 벗어나는 고고학적인 사고가 용인되지 않는다는 점, 세 번째로 한민족의 우수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 네 번째로는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자체적인 문화발전을 강조한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The aim of this study is a review on the recent trend of studies of Koguryo in North Korea by Chosun Archaeology Studies(朝鮮考古硏究). The proportion of Koguryo areas in the North Korean archaeology communities were found to be significant by results on analysis of Chosun Archaeology Studies, which is the journal by Institute of Archaeology in North Korea Social Sciences Academy, from 2000 to 2016. And it was confirmed that at least 78 researcher engaged in archaeological field of Koguryo. With respect to the expertise of articles, the Goguryeo tombs were found to occupy the largest proportion, and fortress, artifacts and cultural relationship were found to be significant too. Also the Koguryo articles cited the South Korean archaeological data or bibliography were found to be mainly concentrated in the late 2000s. And many articles based on the Juche ideology appear to propose unreasonable interpretations in Koguryo archaeology, so the interpretations of some critical issues diverged from those of South Korean or another country Researcher. It is highly possible that such differences in the historical perspective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 researcher might cause an serious obstacle to examine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Korean peninsula.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make an effort to promote the various academic exchange programs including a joint research, excavation, and so on.

        • KCI등재

          고구려 성의 기원에 대한 일고찰

          양시은(YANG, Si-eun) 고구려발해학회 2013 고구려발해연구 Vol.47 No.-

          고구려는 산이 많고 계곡이 깊은 지형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官司가 설치된 중대형 포곡식산성을 기반으로 지방을 통치하는 독특한 체제를 운용하였다. 이는 秦·漢代 이후 판축공법을 이용한 평지 토성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郡縣제도를 운용했던 중국의 고대 중원 왕조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고구려는 초기 도읍지인 桓仁지역 외곽의 新賓과 通化지역 등에서 일찍부터 漢의 평지 토성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과는 달리 험준한 산 정상부에 석성을 축조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고구려성을 遼西나 吉林지역의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취락 방어 유적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시간적인 괴리가 크고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볼 근거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계통론적인 접근으로는 고구려 성의 등장 배경을 설명할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고구려가 발원한 渾江 및 鴨綠江 중류 지역이 대부분 산악지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국가성립기 고구려는 漢과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평지 토성이 아닌 방어가 보다 용이한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른 시기의 고구려 산성은 대체로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부 위에 입지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축성 재료가 돌이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평지 토성이 아닌 석축 산성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This research aims to clarify the origin of Koguryo fortress. Koguryo developed unique defense systems. Above all, Koguryo was a country of depe valleys and highly mountainous landscapes. Accordingly, mountain fortresses constructed by making the best use of such topographical features played a central role in Koguryo defense systems. In addition, mid- to large-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were built for administrative purposes in local areas. These defense systems are clearly distinguished from the Gun-hyeon(郡縣) commandery systems in the ancient China. Under the Gun-hyeon systems earthen-walled fortresses built by piling up clay on the plain ground were used as an administrative center since the Jin(秦) and Han(漢) dynasties. Koguryo people were aware that earthen-walled fortresses were built on the plain ground in the Han dynasty, through their exposure to earthen-walled fortresses in such regions as Xinjin(新賓) and Tonghua(通化) near Hengren(桓仁) County or the first capital of Koguryo. Differently from them, however, Koguryo people built stone fortresses on the top of a steep mountain. In previous studies, Koguryo fortresses were often thought to have originated from prehistoric fortified settlements in Liaoxi(遼西) or Jilin(吉林). This view has a problem in that it is not supported by any concrete evidence, and that there is a great temporal gap between Koguryo fortresses and those prehistoric fortified settlements. To explain the emergence of Koguryo fortresses, instead, we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middle reaches of the Hun(渾江) and Amnok(鴨綠江) Rivers are mountainous areas. When Koguryo first emerged as a state, Koguryo was not strong enough to defend itself from the Han dynasty. It would be to overcome this weakness that Koguryo people built mountain fortresses which were more effective for defense than earthen-walled fortresses on the plain ground. By extension, mountain fortresses built with stones seem to have emerged early in time because stones were the most common raw materials that could be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a fortress on the top of a steep mountain.

        • KCI등재

          중국의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활용

          양시은(Yang, Si-Eun) 고구려발해학회 2017 고구려발해연구 Vol.59 No.-

          본 논문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소재의 고구려 세계문화유산의 활용 현황과 관련 정책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집안시는 2004년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유적의 꾸준한 정비와 복원 작업을 통해 고구려 역사문화 관광도시로 거듭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집안시 고구려 세계문화유산의 유적 보호 및 정비 작업은 중앙 정부의 기본 정책을 기본으로 하여 지방 정부와 관련 기관이 함께 진행하고 있는데, 집안시에서 계속되고 있는 유적의 발굴조사 사업과 대대적인 정비작업, 안내판의 개선을 포함한 유적지의 관광지 정비 사업과 도로 정비 및 주변 환경 개선 작업 등은 모두 집안 고구려 역사도시 건설과 맞물려 추진되었다. 즉, 고구려 유적의 우수한 문화적 가치를 활용하여 관광 산업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공통된 목적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최근 중국 공산당에서 제시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3차 5개년규획(계획)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최근 집안시에서는 ‘국가 4A급 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는 고구려 유적을 중국 내 최고 등급인 ‘국가 5A급 관광지’로 지정받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유적에 무선인터넷망을 설치함으로써 편리성을 증대시키고,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하여 관광객의 관심을 유도하는 등의 노력 외에도 현지의 문화유산 해설사를 집중적으로 교육 및 훈련 시킴으로써 중국 당국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안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 등을 기울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This thesis is a study on the current utilization of Koguryo world heritage in Jian and related the Chinese government’s policies. Since it was listed as a World Heritage Site in 2004, Jian city of Jilin province in China has been transformed into a historical and cultural city of Koguryo through steady maintenance and restoration of Koguryo remains. Actually, the preservation and maintenance of the remains of the Koguryo world heritage is the result of efforts of the local governments and relevant organizations under the basic policy of the Chinese central government. The excavation of important sites as like Wandu mountain fortress, the major urban maintenance projects, the improvement of tourist attractions including the improvement of the guide signs, and the road maintenance and improvement of the surrounding environment of Jian City are all being carried out in conjunction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city of Koguryo. This is the result of the revitalization of the tourism industry utilizing the excellent cultural values of the remains of the Koguryo, and thus the development of the region, Jian city, and the common goal of building the middle class society. This is evident in the recent national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plan presented by the China’s 13th Five-Year Plan(2016~2020). In recent years, the Jian city government has been working on the designation of the Koguryo remains designated as the `National 4A Tourist Area` as the `National 5A Tourist Area`. The government installs a wireless internet network in its remains, introduces storytelling techniques to create places with stories, and most of all, the utmost attention is paid to improving the capacity of cultural heritage commentators.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