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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田地域 朝鮮時代 竪穴住居址에 대한 一硏究

          吳焌赫 중앙문화재연구원 2008 중앙고고연구 Vol.0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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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락은 전통적 생활공동체의 최소단위로 국가의 지배체계가 미치는 말단의 행정단위이다. 촌락 내에는 양반·상민·천민 등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거주하며, 家垈의 크기와 집의 間數, 장식 등을 나라에서 계급별로 한정하는 강한 家舍規制의 체계 내에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조사·보고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家舍規制에서 제외된 주거형태로 동시기의 기와집이나 초가집과 같은 일반적인 거주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수혈주거는 家舍規制에서 다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역사에서 배재되어 있었으나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평면형태나 구조에서 규칙성이나 규격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이전시기에 비해 복잡해진 사회상을 고려한다면 주거지의 내부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상부구조를 이루는 주혈은 확인되지 않거나 정형성을 띠고 있지 않으며,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아궁이는 난방과 취사에 부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수혈주거지로서의 구조적 취약성은 상면에서 온돌이 확인된 타지역의 주거지 사례를 통해 독립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상면의 온돌과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평지에서 확인된 수혈주거지와 대전지역과 같이 구릉지에서 확인되는 수혈주거지의 아궁이 형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상면으로 열전달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구조로 판단되며, 지형적인 요인으로 인해 평지에 입지한 수혈주거지 상면의 온돌구조가 양호하게 잔존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구릉지의 사면에서 확인된 대전지역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중 아궁이 시설만 확인되는 경우 문헌에서 보이는 온돌구조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잔존상태는 상부 고래부가 유실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A village is a minimal unit of traditional residential community, and it is also a terminal administrative unit controlledby central government. During the Joseon Period, noblemen, commoners, and the humble resided altogether within the village, but there was rigid regulation to limit size of residence to the social class. Unlike other contemporary houses such as thatched cottages and tile-roofed houses under regulation of house size, semi-subterranean houses of the Joseon Period, archaeologically investigated and reported, seem to be out of the size regulation. Even though semi-subterranean houses were not a matter of concern and even out of the house regulation during the Joseon Period, they seem to have been useful enough in actual life to be distributed in the whole peninsular during the period. They do not display any regularity or standard in structure and shape of plan and considering social complexity of that period, inner space of the houses seems to be too small. Also, postholes to support upper structure are not identified or donot display regularity, and fireplaces, commonly identified, have inappropriate structure for heating and cooking. Considering houses equipped with the ondol (Korean underfloor heating system) above the fireplace reported from other regions, the fireplace of the houses in Daejeon region seems to have been used with the ondol facility rather than independently. Semi- subterraneanhouses constructed in the flat and hillside display some differences in the structure and formof fireplace, and these differences may be related to effective delivery of heat. Topographically, the ondolfacility of the house constructed in the flat seems to be preserved well. The fireplaces identified from the house in the hillside without the ondol may be understood as a part of the ondol facility of which the upper structure was already mi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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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一新羅時代 竪穴住居址 硏究 -京畿 南部地域을 中心으로-

          李尙馥 중앙문화재연구원 2008 중앙고고연구 Vol.0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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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남부지역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는 삼국시대보다 발전된 구들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고는 이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의 특징과 그 부속시설의 형태를 대상으로 그 변화에 따른 편년을 살펴보았다.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으로 대별되는데, 방형의 주거지에서 는 ㄱ자형 구들시설, 장방형 주거지에서는 T자형 구들시설이 주로 조성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T자형 구들시설은 연도부가 있는 고래의 길이가 반대쪽 고래의 길이보다 더 길게 축조되며, ㄱ자형 구들시설은 벽면의 ⅔는 구들시설을 조성한 후 나머지 공간은 출입시설, 저장(수납)공간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ㄱ자형 구들시설에서 T자형 구들시설로의 변화는 화성 봉담 수영리유적의 주거지와 와요지, 그리고 청주 비하동유적 출토 연질완을 중심으로 검토한 결과 8세기 중반 이후에 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변화원인은 삼국통일 시점에 고구려 유민들의 유입에 의해 ㄱ자형 구들시설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후 경제적 기반의 확충과 지방제도의 완비가 이루어지면서 주거지의 대형화에 수반된 장방형주거지에서의 T자형 구들시설의 출현이다. Semi-subterranean houses of Unified Silla Period investigated in the southern part of Gyeonggi Province are equipped with more advanced gudeul(Korean floor heater) than that of semi-subterranean houses of Three Kingdoms Period.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characteristics of Semi-subterranean houses of Unified Silla Period, and to attempt relative dating of the houses based on the changes of the accessory facilities. Plan forms of the houses can be divided into square shaped and rectangular shaped ones, and while square houses tend to be equipped with ‘ㄱ’shaped floor heater, rectangular houses tend to be equipped with ‘T’ shaped floor heater. In case of T-shapedfloor heater, the length of heating system with flue part is longer than that of heating system in the other side. On the other hand, in case of ㄱ-shaped floor heater, two thirds of the wall seem to be allotted for the floor heater, and remaining space for entrance and/or storage facility. Considering houses and roof-tile kilns at Suyeong-ri site in Hwaseong and soft-fired bowls from Biha-dong site in Cheongju, transition from ㄱ-shaped floor heater to T-shaped floor heater might occur no earlier than middle of the 8th centuryAD. This transition was partially influenced by influx of Kogureyo population with the emergence of Unified Silla. In addition, expansion of economic base and completion of local administrative system brought about the appearance of T-shaped floor heater accompanied by larger rectangular ho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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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州 松節洞 多重溝狀遺構 性格의 試論

          李文炯 중앙문화재연구원 2008 중앙고고연구 Vol.0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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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송절동과 봉명동지역 일대는 無心川邊으로 충적평야와 낮은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원삼국~백제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매장유적이 보고된 지역으로 봉명동유적(Ⅳ지구)의 대규모 토광묘는 원삼국시대의 표식적인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분묘를 조성한 집단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생활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일부 한정된 지역에서 구상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연접한 송절동지역 일대에서 기존 봉명동유적(Ⅳ지구)에서 보고된 다중구상유구와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구상유구가 조사되었다. 보고된 유적을 중심으로 다중구상유구의 범위를 추정해보면 명심산에서 분기한 북쪽 능선을 따라 봉명동-송절동지역까지 연결된 하나의 단일 유구로 판단된다. 송절동 다중구상유구는 능선의 방향을 따라 ‘―’자상의 선상 배치로 3중으로 축조되었으며, 방어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축조시기는 중복된 유구를 토대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축조되어 원삼국~백제시대 이전 혹은 거의 동시기에 폐기된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서 소토 등이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폐기로 판단된다. 이러한 다중구상유구의 폐기는 송절동 일대의 주거집단 간의 통합에 따른 방어 기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 통합에 따른 생활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송절동일대 지역은 백제의 본격적인 세력확장과 더불어 기존 지역 주거 집단의 통합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판단된다. A number of archaeological sites dated to prehistoric and historic periods have been reported in the Songjeol-dong and Bongmyeong-dong in Cheongju where alluvial plains and low hills are developedalong the Musim River Valley. In particular, many burials dated to Proto-Three Kingdoms and Baekje periods have been unearthed at Bongmyeong site (District IV), and large pit burials at this site have been regarded as typical ones of the Proto Three Kingdoms Period. Up to now, however, residential sites directly related to the population to construct these burials are not been discovered except a few ditches. Recently, a ditch was found at Songjeol-dong near the Bongmyeong-dong site, and there is quite a possibility that the ditch at Songjeol-dong can be connected to a multi-connected ditch previously found at the Bongmyeong-dong site. According to inference for the range of the multi-connected ditch based on available data, the ditch can be a single feature connected from Bongmyeong-dong to Songjeol-dong along a northern ridge branched from Mt. Myeongsim. According to writer’s interpretation, the multi-connected ditch might be trebly constructed in linear pattern along the direction of the ridge as a defense facility. Based on overlapped features with this ditch, this ditch is considered to be constructed not earlier than Bronze Age and destroyed at one time period between Proto Three Kingdomsand Baekje periods gradually or simultaneously. Fired clay found inside the ditch may imply intentional abandonment. The intentional abandonment of the ditch may also suggest that unificationof residential groups around Songjeol-dong made the function of defense unnecessary and that the unification asked to extend residential space. In conclusion, the ditch around Songjeol-dong may be archaeological data to suggest political expansion of the Baekjealong with unification process of preexisting groups in th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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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지역 토기가마 구조의 변화양상에 대하여

          이지균 중앙문화재연구원 2007 중앙고고연구 Vol.0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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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지역의 토기가마를 소성부의 위치, 소성부의 경사형태, 연소부의 위치, 화구부의 적석 유무 등의 기준으로 가마구조의 형식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가마 구조의 변천과정을 3기로 나누었다. 1기의 가마는 4세기~5세기 초에 걸쳐서 사용되었으며 소위 영남공통양식의 토기를 생산하였다. 가마의 구조적인 특징은 지하식과 반지하식이 혼축되고 가마의 분포는 단독으로 조성된 경우 또는 2~4기가 소규모로 군집되어 있다. 2기의 가마는 5세기대에 걸쳐 신라양식의 토기를 생산하였으며 가마의 구조적인 특징은 일부 지하식이 잔존하지만 대부분 반지하식이 구축되었고 가마의 분포는 1~10기 단위로 군집되어 있으며, 이전에 비해서 어느 정도 대량생산체계를 갖추어 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3기의 가마는 경주와 대구에서 대규모의 유적이 조사되었으며 6세기~7세기 중엽에 걸쳐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대규모의 생산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추고 다양한 기종의 유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며 토기가마의 조업이 국가적으로 운영되는 시기이다. 가마의 분포는 수십기의 가마가 군집하고 있으며, 화구의 개폐가 용이한 화구적석요도 이 시기에 대부분 확인된다. Considering all the factors, the kiln of the first term was used for 4~5 th century, manufacturing the so - called earthenware of Kimhae, Busan and Haman Type. And the produced remains were used for an underground receptacle of a coffin with a red stone, for the interment of belongings with a corpse of an underground receptacle of a coffin or for the palace. The feature of the kiln lies in the mixed- construction with the basement type and the semi-basement type, and the inclination shape in a plasticfired part can be seen in the kilns in the remains A of Changnyung Yeocho-ri and the Woogeo-ri Remains in case of type ⅱ, and in the East and in the West of Kyungsang Province, the type ⅰhas the inclination of a straight line type. And the distribution of a kiln shows the case of the make-up independently and the grouping of 2~4 kilns on a small scale. The kiln of the second term was used in the 5th century and made the earthenware in Shilla Style,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kiln structure remains in a basement type partially but most of them were constructed in a semi-basement type, and as the earthenware platform is being excavated, it can be said the mass production system is fitted out comparing to the first term in some degree. Most kilns of the third term were examined around Sonkogdong, the Mulcholro Historical Site, Uksoodong of Dagu and Oksandong Historical Site of Kyungsan, and the remains on a small scale were investigatedin the South of Kyungsang Province. The period of its operation is in concord with the mid of 6~7th century, manufacturing various kinds of remains in bulk. Especially, in the dwelling remains inside the king’s palace in Shilla, the remains of the Mulcholro Historical Site of Sonkogdong are frequently excavated so this can prove that the operation in a kiln was carried out by a state-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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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지역 흉노시대 분묘 연구

          양시은(Yang, Si-Eun),G 에렉젠(Eregzen Gelegdoli) 중앙문화재연구원 2017 중앙고고연구 Vol.0 No.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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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에서는 2(X)(년 이후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봉콜지역 흉노시대 분묘에 대한조사 현황을살펴보고 흉노무덩의구조와편년을비롯한분묘관련연구성과를검토하였다. 봉콜 전역에서는 대략 기원전 1세기 전 중반부터 기원후 1세기에 해당하는 적석목곽이 기본 구조인흉노무덩이 발견된다 각무덩군간의거리가상당하지만,봉골전역의흉노무덩은지상에노출된 외부 형태와 지하의 매장주체부 구조가 거의 유사하다 대형 흉노무덩의 경우 칠마차 칠목관과 급은제 목관 장식, 비 단을 비 롯한 각종 직물, 급은제 장신구, 동복과 각종 청동 용기, 동경, 급은제 pj- 규 장식을 비롯한여러 벌의 마구류, 각종 생활용기(대형 용, 호, 동잔, 성발) 풍 부장유울에서 거의 통일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형 흉노 무덩 역시 대형 무덩에 비해 소략하기는 하기만 각종 장신구 마구 토기(심발 호) 동 일관된 부장 양상이 확인된다 봉골 전역에 걸쳐 흉노시대 분묘의 구조와부장품의 구성이 동일하다는 점은 당시 무덩의 조성에 중앙의 강력한통제가있었음을시사한다 흉노 무덩은 외부 적석 구조에 따라 원형(고리형)과 방형으로 나면다 원형은 묘도가 없는데 비해, 방형은 일부 유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덩에서 묘도를 갖추고 있다 초대형을 제외한 대부분의 흉노무덩에서는 별도의 봉분을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대형 또는초대형 무덩은 ‘뀐자형의 테두리를 띠라석축벽이부가되어약간의 봉분구조를갖추고있다 매장주체부는목관이나목곽의사용。1 일반적인데 2중목곽은 대형의 ‘뀐’자형 평연 구조를 갖춘 흉노 무덩에서 주로 확인된다 특히 배장묘 를 갖춘 2중목곽의 초대형 무덩은 규모 부장품의 동급과수량 변에서도 다른무덩과는 뚜렷한 써를보이고있는 바 최고계층의묘제로사용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This paper reviews the recent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n Xiongnu tombs in Mongolia that took place since 2000, and examines the research on the structure and chronology ofXiongno tombs. In the 21th century, manyXiongnu tombs, dated from 1st century BCE to 1st century CE, were discovered and excavated in Mongolia. Despite the considerable distance between the burial groups, the Xiongnu tombs throughout Mongolia are similar in the appearance on the ground and the internal structures. In case oflarge Xiongnu tombs, coffìn walls were covered with felt rug or silk, and decorated with gold or silver ornaments. Inside or outside the coffìn, ritual grave goods of similar composition are found that include animal bones, pottery, ornaments, horse equipment, bronze mirrors, lacquer wares, bronze cooking pots, jade decorations and various weapons. The small Xiongnu tombs are also relativε, ly simple compared to large tombs, but various grave goods such as jewelry, harnesses, and earthenware can be found. The fact that the tomb structure and the composition of grave goods are the same throughout Mongolia indicates a strong central control of the tomb composition during the Xiongnu era Most Xiongnu tombs have two types of surface stone structure: square and roughly circular. The circ ar tombs do not have dromos, whereas the square tombs mostly have a long rectangular dromos or entry chamber on the south side. In most of the Xiongnu tombs the mound cannot be identifìed, but large or extra-large tombs have a mound structure with a stone wall along the outline. Inside the large tomb there is usually a single or a double (exterior and interior) wooden chamber holding the coffìn at the bottom of a burial pit. In particular, extra-large tombs with -shaped outline, which have many satellite burials near the main tomb, are remarkably different in size of structure and quantity of grave goods from the others. Such tombs are thought to have belonged t。e aristocratic cl잉s of the Xiong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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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적석목곽분 기원 연구의 방향

          최병현(Choi Byung Hyun) 중앙문화재연구원 2016 중앙고고연구 Vol.0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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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낙동강 이동지방을 지배하는 마립간시기, 즉 신라 전기에 수도 경주의 중심고분군에 출현한 적석목곽분은 지상적석식과 상부적석식의 두 유형이 큰 시차 없이 출현하여 각각 신라 중앙의 왕실과 귀족집단의 묘제로 조영되었다. 그러한 적석목곽분의 구조 가운데 묘곽의 형식이나 상부적석식의 묘광 내 목곽과 사방적석 등은 신라 조기 점토충전목곽묘와 석재충전목곽묘의 구조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여, 그 기본적인 계승관계가 인정된다. 그러나 지상적석식 초기 대형분의 복잡한 내부구조와 거대 고총으로의 출현, 상부적석식에서 묘광 위의 상부적석과 호석으로 보호된 원형 고대봉토의 출현은 전시기 석재충전목곽묘로부터의 자생적인 진화·발전으로 보기 어렵다. 월성북고분군에서 고총 적석목곽분의 출현은 신라 조기 석재충전목곽묘로부터의 점진적인 변화·발전과정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신라 전기양식토기가 성립하는 4세기 중엽쯤의 돌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사로국시기에도 외부 세계와 접해왔고, 고대국가로 성립하면서 중국에 견사하는 등 외부 세계와 접촉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마립간시기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여 왕실 무덤부터 고총화한 데에는 외부로부터 받은 자극이나 충격도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이 신라 적석목곽분의 출현과 관련하여 아직 필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의 주장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학계에 제시된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이나 계통론은 사실 모두 쉽게 입증되기 어려운 가설들일 뿐이다. 1990년대 초 울산 중산리유적의 발굴조사를 계기로 신라 적석목곽분의 목곽묘 자체발전설이 제기된 이후 이를 입증해 보려는 많은 노력이 있어 왔지만 별다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목곽묘와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왜곡하거나 확대·과장한 해석들이 난무하였다. 가설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더욱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료를 왜곡하거나 확대·과장하는 해석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미래의 새로운 자료 출현을 기다리는 것이 온당하다 During the Maripgan period, also known as the Early Silla phase, when the Silla state controlled the region east of the Nakdong River,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s were constructed in the central burial grounds of the Gyeongju region, the capital of Silla. These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s comprise two subtypes that appear almost simultaneously: the subtype with an above-ground burial chamber and the subtype with a subterranean burial chamber. They were used as the burials of the royalty and the aristocracy of the Silla center, respectively. Some architectural elements of the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s, such as the burial chamber structure or the use of wooden panels or the packing of stones (in the case of the subtype with the subterranean burial chamber), can be understood as having been inherited from the wooden chamber tomb embellished with packed stones or packed clay of the Incipient Silla phase. As such, a continuity of traditions can be proposed. However, there are also elements that cannot be regarded as having developed from these earlier types of tombs. They are 1) the complicated internal structure of the early, large-scale, wooden chamber tombs that had burial chambers located above ground; 2) the construction of the enormous ‘high mounds’; 3) the addition of stones on top of the wooden burial chamber structure (in the case of the wooden chamber tomb with a subterranean burial chamber); and 4) the use of a circular earthen mound surrounded by a circle of protective stones. As such, the appearance of stone chamber tombs with stone ‘high mounds’ at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s can be regarded as a phenomenon that appeared abruptly around the mid-4th century, when the Early Silla pottery style came to be established, rather than as the result of a gradual development from the wooden chamber embellished with stone packing of the Incipient Silla phase. Even during the Saroguk phase, Silla established links with the outside world; with its formation as an ancient state, Silla continued to maintain these links, for example sending envoys to China. During the Maripgan period, which witnessed the rapid development of the Silla state,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s emerged and those used as royal tombs came to be embellished with ‘high mounds’. It may be that this change was generated by foreign influences. The author’s basic understanding of the process by which the Silla wooden chamber tomb with stone mound originated, as outlined above, is admittedly based on assumptions that are not easily proven – this is the same for other theories regarding the origins and lineage of this tomb type. Following the excavation of the Jungsan-ri site, in Ulsan, in the early 1990s, some researchers have come to propose that the wooden chamber tomb with stone mound developed indigenously from the wooden chamber tomb. However, although much effort has come to be invested, this has yet to be proven. In the meantime, interpretations based on distortions or exaggeration of the structure of wooden chamber tombs or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s have been rife. As such, it can be argued that efforts to prove the proposed theories regarding these tombs must be based on facts, and that a distortion or exaggeration of these facts should be discouraged. A better strategy may be to sit back and wait for the future discovery of new archaeological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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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횡혈식석실묘의 지역성과 위계 연구 - 관대를 중심으로 -

          이동규 중앙문화재연구원 2015 중앙고고연구 Vol.0 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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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묘제의 특성상 고분의 내부로 출입하기 용이하여 매장 관념이 비교적 잘 드러나는 횡혈 식석실묘의 내부구조는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현재 연구사례는 많지 않다. 관대는 내부의 여러 구조들 중에서 피장자와 가장 가깝고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관대 의 속성을 추출한 다음 현실 구조와의 상관관계를 검토하여 지역성과 위계를 분석하였다. 관대의 속성으로는 재질·개수·위치가 추출되었으며, 관대 속성들의 분석결과 몇 가지의 결 과를 얻었다. 첫째, 관대의 규모를 통해 1인의 점유면적 및 지역적 양상을 검토하여 1인용과 2인 용 관대의 기준 너비를 파악하였고, 지역별로 관대 규모의 차이를 확인하였다. 둘째, 관대 높이와 재질을 검토한 결과 비슷한 재질들에 의해 3개 그룹으로 나뉘며 그룹별로 높이 차이가 있음이 확 인되었다. 또한 관대 재질별로 제작되는 관대의 규모가 달라지는데 특히 2B·2C형일 때 2인용 을 제작하는 빈도가 높았다. 마지막으로 지역별 관대 형식이 다르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셋째, 관 대의 개수와 지역성의 검토 결과 지방보다 중앙에서 관대가 시설된 수의 비율이 높았으며, 관대 위치별 제원 차이를 검토한 결과 최상위 위계일수록 좌·우측 관대의 크기 차이가 확인되고 좌측 관대가 더 큰 경향성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관대와 현실·연도·천장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첫째, 현실 규모에 따라 관대 의 형식이 분류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둘째, 권역의 중심(평양, 집안)에서 중앙연도일 때 관대의 시설 비율이 높았고, 반대로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편재연도일 때 시설 비율이 높았다. 셋째, 천장 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평행삼각고임 등의 높은 천장일 때 관대가 시설되었으며, 같은 고분군 내 에서는 천장과 관대가 비슷한 패턴으로 시설되었다. 마지막으로 관대의 재질과 위치·개수로 횡혈식석실묘의 지역성과 위계를 중앙과 지방, 권역 별로 각각의 특징을 구분한 결과 상위 위계의 조건을 가질수록 지방보다는 중앙, 특히 집안과 평 양에서 축조된 횡혈식석실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조건이 중앙과 지방을 구분하는 지역성의 조건도 함께 충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Goguryeo tombs of the later period may be classified as horizontally-prepared stone chamber tombs. Among others, the inner structure of horizontally-prepared burial tombs, which given their characteristics show relatively well the concept of burial with their allowance of easy access to inside the tomb, may have a great academic value; however, this is rarely the case at the present. Since the coffin platform has the nearest and closest relationship with the buried person among the various inner structures, the paper extracted the attributes of the coffin platform itself, and analyzed locality and hierarchy by reviewing a correlation with the main chamber structure. As attributes of a coffin platform, materials, number, and location were determined. Also,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attributes of coffin platforms, the paper obtained the following several results. First, through the size of a coffin platform, the paper reviewed the area occupied by one person and regional patterns; thus, it identified the standard width of a coffin platform for one person and two persons and confirmed any difference in the coffin platform size by region. Second,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height and materials of a coffin platform, it was found that they could be largely classified into three groups, and the groups were formed in accordance with similar materials.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as a difference in height according to group. In looking into the materials of a coffin platform and locality of a coffin platform for one person and two persons, the coffin platform size was different in accordance with the materials used for manufacture of the coffin platform. The frequency of a coffin platform manufactured for two persons in case of 2B·2C types was high. Also, it was confirmed that the type of coffin installed by region was different. Third,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number of coffin platforms and locality, the percentage of the number of coffin platforms was higher in the central region than in local regions. As a result of reviewing any difference in size according to the location of coffin platforms, there was more difference between the left and right coffin platform as the hierarchy increased, and the tendency for the left coffin platform to become bigger was confirmed. Next,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correlation with the main chamber structure, first, in case the main chamber size is large and square-shaped or in case the main chamber size is small and rectangular, the form of the coffin platform was relatively clearly classified. Second,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ffin platform and tomb entranceway, there was a high percentage of tombs in Pyungyang and Jiban with central tomb entranceways installed, and the farther from the center, the higher the percentage of lopsided tomb entranceways. In addi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as a tendency for the tomb entranceway to be installed so that the coffin platform could not be seen from the entranceway. Third, in examining the relationship with the ceiling, in case the ceiling was high rather than a flat ceiling, a coffin platform was installed. In case of a space inside the same tombs, for mutually similar ceilings, the same form of coffin platform was installed. Finally, one certain attribute cannot be an absolute standard that classifies locality and hierarchy. Also, in reviewing comprehensively all the factors of a coffin platform and the components of horizontally-prepared stone chamber tombs, a classification of locality and hierarchy appears clearly.

        • KCI등재

          百濟 初期 橫穴式石室墳의 檢討

          이문형(Lee Moon Hyoung)(李文炯) 중앙문화재연구원 2005 중앙고고연구 Vol.0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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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시대의 초기 횡혈식석실분은 크게 초기유형(도입기)과 웅진유형(정착기)으로 구분 가능하다. 초기유형의 횡혈식석실분으로는 청원 부강리 공주 분강저석리와 군산 산월리를 들 수 있다. 이들 횡혈식석실분의 특징은 동일 지역 내 평면 방형의 형태에 다양한 연도를 꼽을 수 있으며, 출토유물에 있어서는 마구류가 부장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 석실분의 피장자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성장한 재지세력으로 그 시기는 5세기 초에서 중엽으로 판단된다. 웅진유형의 석실분으로는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복암리를 들 수 있다. 이들 세력은 웅진천도와 더불어 기존 체제를 그대로 상속받았거나, 새로운 편재체제에 수용된 세력으로 금동제품과 중국제자기 등 최고 위신제 성격의 유물이 부장되고 있다. 이들은 출토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보아 자치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중앙으로부터 직·간접적인 통제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되며 그 축조 시기는 5세기 중엽에서 후엽으로 판단된다. Horizontal digging stone chamber tomb is largely divided into two groups, early pattern(introduction period) and Ung-jin pattern(fixing period). We can find the example of an early pattern of stone grave, in Bugang-ri, Cheong-won and Bungang-Jeoseok-ri, Gong-ju and Sanwall-ri, Gun-san. The characteristic of these graves is that it shows the various period in the pattern of the plane direction within the same province and that it is the fact that in the remains, horse equipments were not buried. People buried in these stone graves are the control power groups who grow centering around the traffic roads. The period of it is judged from early 5th century to midterm. We can also state the graves of Ung-jin pattern, for example, those of Beopcheon-ri Won-ju, Suchon-ri Gong-ju, Ipjeom-ri Ik-san, Bockam-ri Na-ju. These power is the group who inherited the already established system with the transfer of the capital or who is accommodated in a newly organized system. In their graves best quality of remains are buried such as the golden goods and chinese ware etc.. These power group played the right of self-government and simultaneousely was controlled by the center and the construction time of it is from mid-5th century to latter period.

        • KCI등재

          5 世紀 漢城期 百濟와 加耶 關係

          金奎運(Kim, Gyu-un) 중앙문화재연구원 2011 중앙고고연구 Vol.0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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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백제와 가야 관계에 대한 연구는 『日本書紀』 등의 문헌과 고고자료를 분석한 4세기와 6세기 전중반의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5 세기대의 백제와 가야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극히 일부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5세기대의 한성기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고고자료를 분석해 그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대가야권역에서 출토되는 백제계 유물은 주로 금공품으로, 이를 통해 정치적인 교섭을 행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소가야권역에서 출토되는 백제계 유물은 대부분 토기이고, 백제권역에서 출토되는 가야계 유물 역시 대부분 소가 야양식 토기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토기들은 모두 백제의 남부지역 진출루트 또는 소가야와의 교섭 루트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백제와 소가야의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백제와 소가야와의 교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남해안을 이용하면서 왜와 교섭을 행하였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의 지배지역이 아닌 고흥지역에서 길두리 안동고분과 같은 무덤이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내륙 교 섭로와 남해안의 항로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안동고분의 피장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하였고, 동시에 고창 봉덕리고분과 같이 백제 중앙의 간접지배를 받으면서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백제가 475년 한성함락으로 인해 약해지면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소가야도 쇠퇴하게 된다. 이를 틈타 대가야가 호남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임나사현 등을 대가야권역으로 포섭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았다. Past studies on relationship of Baekje and Gaya was mostly to analyze 4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6th century archeological materials and historical documents like ‘Nihonsoki’. Thus,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of 5th century Baekje and Gaya through archeological materials. Therethrough, Gaya style artifacts excavated in Baekje territory is mostly Sogaya style pottery. This Sogaya style pottery was appeared on route which was expanding south of Baekje and negotiation. meanwhile, Baekje style prestige goods excavated in Gaya territory refer to Daegaya. But Beakje is closely connected with Sogaya, because Baekje style pottery was excavated in Sogaya territory. These phenomenon doesn't mean negotiation between Beakje and Sogaya simply, its mean that Beakje had negotiated with Sogaya, and Nam River basin. Because for expanding their territory to the south, securing the negotiation route to Japan. this phenomenon was proved by sudden appearing of Gilduri group of tombs in Goheung where is not the territory of Baekje. Because Baekje's capital ‘Hanseoung’ had be taken by Goguryeo at 475 AD. Beakje's national power was Declined. So Sogaya closely related to Baekje was declined too. On this occasion, Daegaya enlarged its territory to eastern part of Honam province, so too Imnas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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