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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일제강점기 고구려 발해 유적조사와 그 의미

        양시은(YANG Si-eun)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8 No.-

        일제강점기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에서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고고학 조사가 행해졌다. 고구려와 발해 유적 조사 또한 조선인 연구자들이 배제된 채,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고구려 유적들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벽화분을 중심으로, 일부 대형 적석총과 도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고적조사는 일반적으로 박물관협의회에 고적위원회가 설치되어 「古蹟 및 遺物保存規則」이 공포된 1916년과 조선고적연구회가 설치된 1931년을 기준으로, 1916년 이전을 고적조사 1기, 1916-1930년까지를 고적조사 2기, 그리고 1931년부터 해방까지를 고적조사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발해는 고분 중심의 고구려와는 달리 도성 유적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과는 달리,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된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白鳥庫吉, 鳥山喜一, 鳥居龍藏 등과 같은 일본 관학자들에 의한 답사를 통한 연구만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된 당시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유적 조사는 순수한 학술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일본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여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경우 중요 유물 수습 및 벽화 고분 발견이 중시되었으며, 대체로 단기간에 이루어진 조사가 대부분이었다. 발해 역시 도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대적인 조사라기보다는 간략한 시굴조사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발해 유적에 비해 월등히 많은 유적이 발굴 조사된 고구려의 경우에도 조사된 유적 수에 비해 제대로 된 보고서는 거의 없었는데, 그나마도 소략한 내용과 함께 도면과 사진만을 일부 제시하고 마무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일부 보고서의 경우 국제사회의 홍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자세한 영문 요약문이 첨부된 것도 있어 기존의 보고서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눈에 띈다. 한편,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많은 수의 고구려와 발해 유물이 소장되어있는데, 그 중 일부는 경성제국대학 시절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들에 의해 수집된 것들이다. 이번 논문에서는 이들 자료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밝힐 수 있었는데, 이후 관련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고구려와 발해 유물은 당시 일본 연구자들 특히 경성제국대학연구자들의 고구려 및 발해 유적조사 현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a study on the research of Koguryo(高句麗) and Balhae(渤海) sites was made a monopoly by Japanese researcher. At that time, Koguryo was recognized as belonging to the both Joseon and Manchulia history, but Balhae was often recognized as belonging to Manchulia history. We classify 3 research stages about Koguryo investigations. That stages is devided by Sekino Tadashi(關野貞) team(~1915), the committee for Korean history(1916~1930), the Joseon Historical Spot Research Institute and the Manchu State(1931~1945). And then, we classify 2 research stages about Balhae investigations by establishment of Manchu State(before and after). Most of the Koguryo investigations were executed to find precious artifacts and mural paintings in the short period, and Most of the Balhae investigations were executed to made a clear to the capital city. But we can find many serious problems in most reports. So, we can conclude the research of Koguryo and Balhae sites done by Japanese government were executed as verification for contriving colonial historiography or political situation. Especially, I introduced Koguryo & Balhae collection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in this paper. That collections was collected and donated by the professor of Keijo Imperial University(京城帝國大學)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at data is able to be help to examine thoroughly situations of the research of Koguryo and Balhae sites.

      • KCI등재

        北方故土意識의 推移에 관한 고찰 Ⅰ

        구난희(KU Nan-hee) 고구려발해학회 2012 고구려발해연구 Vol.42 No.-

        발해의 귀속 문제는 발해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발해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역사 전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논쟁의 접점을 이루고 있다. 중국은 肅愼, ?婁, 勿吉, 靺鞨을 滿族의 선조로 규정하고 渤海建國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발해를 거쳐 女眞으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어 古朝鮮-高句麗-渤海로 이어지는 한국의 고대 북방 이해와는 확연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 글은 발해 귀속 논리의 저변을 형성할 수 있는 ‘북방 고토 의식’에 초점을 두고 그것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검토하였다. 우선 논의의 전제로 발해 귀속 논리를 중국의 영토계승적 관점과 한국의 역사계승적 관점으로 대별하고, 전자를 보완하는 논리로서 종족계승과 후자를 보완하는 논리로서 고토계승의 논리가 융합되어 있음을 입론화하였다. 아울러 북방 고토 의식이 역사계승의 관점을 확대하는 순방향적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성격의 논리가 시기별로 어떻게 작동하면서 북방 고토 의식을 변화시켜 왔는가를 주요 사서에 기술된 고조선, 고구려, 발해 관련 기술을 통해 검토하였다. 발해 멸망 이후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북방 고토 의식은 소극적이었다. 고토계승은 당대의 영역 내에서만 한정되고 고대 북방의 역사는 탈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발해 고토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한국사로서가 아닌 한국사 흐름에 영향을 미친 인근국 내지는 고구려의 고토가 있었던 지역의 역사라는 애매한 지점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16세기에 이르면 북방 고토 의식은 새로운 양상을 맞이한다. 韓百謙이 東國地理志에서 언급한 이른바 ‘南自南北自北’ 인식의 영향으로 고구려사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부수한 발해를 재조명해 나가기 시작한다. 고토계승은 당대 영역을 넘어서 확장되었지만 발해를 역사계승의 맥락에 연계시키지는 않았다.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의 평가와 달리 李種徽의 東史또한 이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高句麗와 渤海모두 本紀가 아닌 世家에서 처리하고 있으며 箕子로부터 高句麗, 渤海로의 연계가 分節的계승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미완의 역사계승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는 1712년 정계에 대한 비판에 따른 先春領說, 分界江說등이 부각되고 韓致奫·韓鎭書에 이르는 지리고증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다양한 북방 고토 의식이 형성되어 나갔다. 특히 廢四郡復置등 현실 문제에 적극적이었으나 북방 고대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丁若鏞과 현실 문제에는 소극적이지만 고대북방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견지한 金正浩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북방고토의 확대라는 관념적 역사계승 의식과, 청과의 긴장 속에서 실지 회복이라는 영토 의식을 양 축으로 하는 스팩트럼 속에서 제각각 자신의 입론 지점을 찾아 다양한 논의를 재조정하고 있었다. The question of title to Balhae is not only the matter of Balhae history, but also the point in dispute about how a series of history developments are understood related to Balhae as a focus. China provides that Suksin(肅愼), Uproo(?婁), Mulgil(勿吉) and Margal(靺鞨) are ancestors of Manchu and insists that Balhae foundation secured the control over this area and Balhae led to Jurchen(女眞); it is because this is in considerable contrast to the understanding of Korea’s ancient northern nations, which are Gojoseon(古朝鮮)-Goguryeo(高句麗)-Balhae(渤海). This article has examined how the northern navive land awareness has formed as the base of Balhae reversion logic. First of all, Balhae reversion logic is divided into China’s territory succession view and Korea’s history succession view as a premise of argument and the logic has been argued in that the tribe succession as a complement of the former and the native land succession logic as a complement of the latter are combined. In addition, under the problem awareness that the northern native land awareness had not proceeded in a proactive way, it researched how a wide variety of logic had worked from each period and changed the northern native land awareness through the description related to Gojoseon, Goguryeo and Balhae stated in main history books. In the 16th century, the interest in the ancient northern-district made the history of Goguryeo be actively recognized under the influence of so-called ‘the south from the south, the north from the north(南自南北自北)’, which was addressed in Dong-kuk Chiriji(東國地理志) written by Han Baeg-gyom(韓百謙) and collaterally Balhae started to be recounted. The native land succession was extended into the one above the district of the day but Balhae was not connected to the context of the history succession. This article has grasped that LEE Jong-Whi(李種徽)’s Dongsa(東史)was on this side in contrary to previous researches. Both Goguryeo and Balhae were covered in a distinguished family history(世紀) not in dynastic annals(本紀). This is because the succession is still considered as imperfect in that the connection from Gija(箕子), Goguryeo to Balhae is segmented succession. From the mid of 18th century to 19th century, Seonchunryungseaol(先春領說) and Bungaegalseol(分界江說) were emphasized according to the criticism of political circles from the mid 18th century to 19th century in 1712 and as the results of historical investigation of geography from Han CHI-yun(韓致奫)·HAN jin-seo(韓鎭書) were accumulated, various northern-district awareness was formed. Especially, JEONG Yakyong(丁若鏞), who were positive in realistic matters such as the restoration of abolishing four districts of north provinces but passive in the ancient native land-district awareness, was opposed to KIM Jeong-ho(金正浩), who was passive in realistic matters but positive in the ancient northern-district. At that time, in the spectrum ranging from idealogical history succession awareness, the extension of northern native land to realistic native land succession awareness, the recovery of lost land in tension with Qing dynasty, each one was readjusting various debates, finding out his own argumentation point.

      • KCI등재

        高句麗와 渤海의 城郭운용방식에 대한 기초적 검토

        李成制(LEE Seong-je) 고구려발해학회 2009 고구려발해연구 Vol.34 No.-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山城을 위주로 성곽을 운용하였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와 달리 延邊지역에는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많은 수의 고구려 시기 平地城이 남아 있다. 이것은 이 지역 소재성곽의 이해와 관련하여 산성과 함께 평지성이 분포하고 있는 특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편 대개의 성곽은 후대의 沿用이 거듭되면서 初築의 시기를 확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연변지역 소재의 성곽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당 수의 성곽들은 渤海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발해시기에 들어서 많은 성곽이 들어서야 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방어력의 강화 측면에서나 발해에 적대하는 세력과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그러하였다. 현재의 연변 지역의 성곽 분포는 발해시기에 갑자기 조밀해진 결과라기 보다는 이전시대인 고구려시기에 주요 거점마다 성곽이 들어서 있던 것을 반영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한편 연변 지역 소재 고구려 성의 분포와 그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개별 성곽의 축조시기를 판별하는 대신 交通路와 성곽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특히 柵城이 이 지역의 통치 거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책성과 國內城을 잇는 교통로가 있어, 그 경로 상에 축조된 여러 성을 징검다리로삼아 국내성과 연결될 수 있었고, 유사시의 지원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중심지와 연변지역을 연결하는‘沃沮方面路’의 경로를 검토한 결과, 현재의 集安에서 臨江을 거쳐 撫松의 산간지대를 경유하여 安圖에 이르고 여기에서 布??哈通河의 연안로를 따라 西進하는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발해시기에 운용된‘鴨綠道’나 현재 연변지역의 東西를 연결하는 國道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또한 무송에서 안도로 들어서는 지점에 위치한 東淸古城址는‘옥저방면로’가 국내성과 책성을 잇는 幹線이었다는 점과 이 경로 상의 요지에 성곽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는 실례였다. 이로써 고구려시기 연변지역에는‘옥저방면로’가 개설되었고, 그 경로의 연결과 유지를 위해 성곽들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延邊長城은 이 지역에 조성된 최대 방어시설로서, 고구려가 세웠다는 주장이 있어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 조성설의 주장처럼 장성이 북쪽을 지향한다면, 방어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지향방향이 북쪽이 아닌 남쪽임을 밝혔다. 이로써 축조 연대 역시 고구려시기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연변지역에 있어서 고구려 성의 운용은 기본적으로 평지성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이는 原고구려지역이라는 정치·군사상의 중심지에 축조된 고구려성에 비해, 이 지역의 고구려성은 지역 지배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에 보다 충실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던 연변지역 특유의 성곽 운용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은 평상시의 거주성과 주민의 入居를 전제로 한 대형산성의 축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연변지역에도 대형산성의 축조와 평지성과의 결합이라는 중후기 고구려 성곽의 보편적인 운용방식이 적용되었을 것인데, 변화의 배경과 시기를 확정하는 것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豆滿江북안의 朝東山城은 강 남안의 雲頭山城과 함께 옛 옥저지역의 북과 남을 연결하는 結節點에 세워진 고구려성이었다. 이러한 조동산성의 입지와 雲頭山城과의 조응관계로 보아 고구려시기 연변지역과 咸鏡道東海岸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이 경로는 국내성에서 책성을 잇는 교통로가 먼저 개설되었고, 그 뒤를 이어 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동해안에 이르는 경로가 추가되었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이렇게 볼 때 책성은 고구려시기 연변지역의 최대 거점이자 두만강 이남의 함경도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서도 기능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연변지역 소재 고구려성의 역할도 함경도 동해안과의 연계선 확보라는 측면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In general, it has been believed that Koguryeo fortresses were built mostly on hills; however, in Yeonbyeon(Yanbian) there exist the remains of many Koguryeo fortresses built on flatland. Accordingly, one must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both types of Yeonbyeonfortresses, hill and flatland, to fully understand their functions. Most fortresses, including those in Yeonbyeon, were repeatedly rebuilt, making it difficult to determine when they were first constructed. Many Yeonbyeon fortresses are thought to have been built during Balhae, yet there is little evidence to show why Balhae should build so many. Fortress construction presumes a need to reinforce defense against hostile powers, thus Yeonbyeon fortresses at major points are not necessarily a product of flourishing construction during Balhae, but rather a reflection of Koguryeo times. To better understand the distribut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Koguryeo fortresses in Yeonbyeon, this paper focuses on traffic routes rather than construction periods. In particular, Chaekseong (Shancheng) was able to grow as a governing center with a route to the Guknaeseong. Along this route, other fortresses were constructed linking the tworegion and provided support in emergencies. A major road, henceforth described as ‘the route toward Okjeo,’which links the center of Koguryeo and Yeonbyeon, passes through the present Jian and Linjiang, the mountain areas of Fusong and Antu, and the coast of Buerhatonghe to the west. This finding is supported by the Abrok route used during Balhae and the present state road linking the east and west of Yeonbyeon. The site of the Dongqing fortress located in the area entering Antu from Fusong shows ‘the route toward Okjeo’was an arterial road linking the Guknae Fortress and Chaekseong, and fortresses were constructed at strategic points along the this route. Therefore, ‘the route toward Okjeo’was constructed in Yeonbyeon during Koguryeo Kingdom and had many fortresses to link and to maintain the route. This paper also examines the Yeonbyeonjangseong (Yanbianchangcheng), the largest defense facility in this area, which some argue was built by the Koguryeo Kingdomto face north. By facing north, the fortress could not have defended the area, and one must presume it faced the south and was not of Koguryeo Kingdom construction. On the other hand, the Koguryeo Kingdom’s fortresses in Yeonbyeon were confined mostly to flatland.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Koguryeo’s fortresses in Yeonbyeonfunctioned to rule internally, while other fortresses in central area of Koguryeo were constructed for political and military purposes. This fortress style in Yeonbyeon later changed with the advent of grand hill structures for residential purposes during peaceful times. Thereby, the general operating system of fortresses during the mid and late Koguryeo Kingdom applied in Yeonbyeon, that is, the combination of hill and flatland fortresses. This paper omits examination of the circumstances and dates of these changes. Along with Undusanseong, in the Duman River’s southern basin, Jodongsanseong in the northern basin was the Koguryeo fortress constructed to link the north and south of ancient Okjeo. Such a location of Jodongsanseong and its correspondence with Undusanseong during the Koguryeo Kingdomdemonstrates the existence of a traffic route linking Yeonbyeon to the east coast of present Hamgyeong Province. Along this route, with the Duman River between, the part linking Guknae Fortress and Chaekseong was constructed first, and the part linking Chaekseong to the east coast of Hamgyeong Province via the Duman River was built later. Therefore, one can assume that Chaekseong during the Koguryeo Kingdom functioned not only as a strong point in Yeonbyeon but also as an outpost to advance toward the east coast of Hamgeyong Province. Accordingly, one should consider that Koguryeo fortresses in Yeonbyeon were aimed at securing the

      • KCI등재

        발해 연화문 와당의 고구려 계승성 검토

        김희찬(KIM Hee-chan)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6 No.-

        본 논문에서는 발해 연화문 와당을 대상으로 연화의 형태, 간식문, 부가문양대, 자방, 주연부 그리고 복합문 등의 개별 문양소들을 분석하고, 이를 고구려 와당과 비교하여 그 계통과 고구려 계승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고구려 연화문 와당은 5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4+4형의 양각형 연화와 선각형 연화를 교대로 배치시킨 연화+연화문 와당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연화+연화문 와당의 선각형 연봉오리 연화와 측면연화가 발해 연화문 와당의 중심문양으로 등장하고 있었으며, 발해 연화문 와당의 간식문, 주연부, 자방 등도 연화+연화문 와당의 문양 배치와 기본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평양지역에서 출토되는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 와당의 부가문양대도 발해 와당의 중요한 문양대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 연화문 와당이 고구려 연화+연화문 와당의 선각형 연봉오리 연화, 측면연화와 더불어 사잇문, 주연부, 자방부 그리고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 와당의 연주문 형태의 부가문양대라는 형태요소를 각기 수용하여 이것을 발해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독창적인 와당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발해 연화문 와당이 5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평양지역에서만 유행하고 있었던 고구려 연화+연화문 와당의 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것은 발해의 문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평양지역의 계통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As the individual elements of design are creative in comparison with neighboring regions, the origin or lineage of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is very obscure. In this thesis I reviewed on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through analyzing the individual elements of design like the shape of lotus flower, interval design, supplement designs, ovary and composite designs. Then I examined that how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succeeded the characteristics of Koguryo roof-end tiles. The roof-end tiles of Koguryo are very creative. When the roof-end tiles of Koguryo transformed from roof-end tiles with clouds design to lotus design, they took lotus bud design as a alternative to lotus petal design which was common in East Asia. As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bud design express lotus flower independently, they would influence not only lotus flower but also the other design elements. In the divergence process of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these characteristics of modes were inherited. As a result, the roof-end tiles with the combination of lotus and other designs which alternatively arranged two design elements of lotus + lotus design showed up. For th e roof-end tiles with lotus + lotus design set the same design elementson a side of roof-end tiles, we don’t have to distinguish between central design and composite design. While the lotus design in central design maintains the mode of carved-in-relief lotus bud traditionally, the lotus design in composite design takes the mode of carved-in-line lotus bud or side faced lotus flower to reveal the nature of the roof-end tiles with composite design. And yet the mode of carved-in-line lotus bud and side faced lotus flower which is the characteristics of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 lotus design continues to the roof-end tiles of Balhae. In my opinion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also expresses lotus buds as a alternative to lotus petals. In addition to the lotus buds, interval designs, ovary which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 lotus design continue to the roofend tiles of Balhae. Besides, supplement designs like lotus pearl design which has non dividing line and excavated in Pyungyang area also succeeded in the roof-end tiles of Balhae. So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succeeded the modes of lotus + lotus design of Koguryo roof-end tiles and created new modes of roof-end tiles on it. From the fact that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succeeded the modes lotus + lotus design of Koguryo roof-end tiles, I conclude that the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of Balhae succeeded the modes of Pyungyang area.

      • KCI등재

        渤海 鹽州城의 최근 발굴성과와 분석

        김은국(Kim eun kuk) 고구려발해학회 2017 고구려발해연구 Vol.58 No.-

        염주(鹽州) 발해성은 문헌으로 확인되는 러시아내 발해성 중 가장 온전한 유적이다. 염주는 발해가 설치한 62개 주(州) 중의 하나로 동해를 통해 신라와 일본과 교류하였던 곳이고 발해의 내륙 곳곳을 거쳐 당, 서역 등과 통하는 교두보였다. 발해는 건국 직후 동해를 통한 해양과 대륙을 함께 경영하기 위해서 현재의 琿瑃 지방으로부터 동해안에 걸쳐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와 그 산하에 4개 주를 설치하였다. 염주는 그 중의 하나로 발해가 신라와 일본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관문 역할을 한 성이다. 또 이곳에는 대륙으로부터 당나라는 물론, 서역 등의 문화가 집결하여 신라와 일본 등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국제 항구이기도 하였다. 1990년대 들어 연해주 발해유적은 중국과 북한 내의 경우와 달리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과 공동발굴이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최근의 염주성 공동발굴 결과는 발해 조기 문화층과 고구려시기의 층위와 유물의 단초를 확인한데 이어 새로운 염주성 발굴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특히 2011년 이후의 발굴을 통해서 염주성 내 계획된 구획 시설이 계속 이어짐을 확인하였고, 고구려 문화의 계승성은 물론 신라· 서역 등 주변국과의 다양한 교류 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을 속속 출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발해 조기 문화층’과 고구려시기의 층위와 유물의 단초를 확인하여 새로운 염주성 발굴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미 필자는 염주성 발굴을 시기별로 3단계로 나누면 1단계는 1980년부터 1992년 이전까지 러시아 측의 발굴과 1992년 이후 2006년의 한-러 공동 발굴 시작 기간이다. 이 시기는 러시아 측의 주도 하에 한국 측이 참여하는 시기이다. 2단계는 2007년부터 2010년으로 이 시기는 한국 측이 정식 발굴단을 구성하여 러시아 측과 명실 공히 공동발굴을 전개시킨 과정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2011년 이후 현재의 3단계는 이전의 한러양측 발굴 기반 위에 심화와 확장의 이원적인 발굴을 통해 양과 질에서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를 거두었던 기간이다. 2011년부터 이어지는 염주성 발굴조사는 발해 지방성의 도시구획의 단초를 찾고 관청 혹은 창고시설과 관련되었을 대형건물터와 석축기단 건축물터 등을 확인함으로써 발해 유적조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전환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지구물리학적 조사와 그 반영이다. 그간 염주성 발굴의 획기적인 성과는 심화 발굴과 확장 발굴의 이원화를 통해서 결실을 거두었다. 심화 발굴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지구물리학 측정 방법을 통한 지층과 유물의 분포 파악을 발굴을 통해 입증하는 과정의 결과였다. 이 측정은 러시아 학자 Bessonova E.A가 염주성 내에서 분석해 온 것이다. 이 측정을 통해 염주성은 성내 북동부에 타원형 모습의 내성을 상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쏘노바는 이 성이 고구려 시대의 축성일 것으로 추정하였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2011년부터 2015년도에 걸쳐 조사된 도로 유구는 바로 이 측정에 대한 검증 성격을 지니는 발굴의 성과였다. 아직 내성을 뒷받침하는 발굴 결과가 나오지는 못하였지만 그간의 염주성 발굴 성과는 2015년 발굴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그 가장 으뜸은 염주성 발굴 사상 처음으로 노출한 발해 전체 시기의 발해토층을 통해 염주성의 고고학적 역사와 발해문화의 고구려 계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특히 토층에서 수습한 20 여점의 목탄을 분석한 결과는 염주성의 사용 연대를 발해 이전의 고구려 시기부터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다. 이는 앞으로 고구려 동해안 및 연해주 지역 경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 본다. 다음으로 발해유적 발굴 사상 처음으로 출토한 청동 낙타상은 낙타뼈와 함께 발해가 염주성으로 통해 서역과의 교류를 전개하였음을 확인한 점, 또 저장시설 군이 염주성에서 발견됨으로써 염주성내 공동 저장시설 공간을 설치하고 생활하였던 점, 그리고 편병 한 점은 발해와 신라가 염주성을 통해 해양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하는 점, 넷째 동서 교차 도로에 이어지는 동서 도로를 확인함으로써 염주성이 상경성과 같이 도시구획을 지닌 도성임을 재확인한 점, 다섯째 확장발굴의 결과 이제는 염주성 행정중심 관청터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 등이다. 이후 염주성 발굴 방향은 내성의 확인과 함께 북부 중심 지역으로 집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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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靺鞨 7部의 實體와 渤海와의 關係

        권은주 고구려발해학회 2009 고구려발해연구 Vol.35 No.-

        靺鞨 7部의 출현은 勿吉을 포함하여 高句麗가 주변 여러 집단을 일곱 개의 地域單位로 구분하여 인식한 것과 관련이 있다. 渤海時代의 말갈은 고구려 멸망 전후 말갈 7부가 지역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점차 상실해가며 다시 재편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말갈은 점차 발해라는 국가테두리 안에 편입되어 발해민이 되었다. 이들 중 말갈로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며 활동했던 집단에는 鐵利, 拂涅, 越喜, 黑水, 虞婁部등이 있다. 발해는 振國(震國) 초기부터 靺鞨諸部와 연합을 이루며, 唐에 대항하여 성장하였다.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713년 당이 大祚榮을 渤海郡王에 冊封하기 위해 崔忻을 ‘宣勞靺羯使’로 파견한 사실이다. 이때 당은 거란과 돌궐을 견제하기 위해 진국 중심의 연합세력인 말갈제부를 함께 끌어들이려고, 崔忻을 ‘冊封使’가 아닌 ‘宣勞靺羯使’로 파견했다. 발해는 이러한 세력재편과 관련하여 8세기 중엽까지 당에 의해 靺鞨, 東藩靺鞨, 渤海靺鞨이라고 불려졌다. 공교롭게도 철리·불열·월희의 당 조공 단절과 함께 渤海靺鞨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이후 발해는 흑수 및 말갈제부의 대외활동을 철저히 통제해 나가면서 점차적으로 발해로 통합해 나갔다. 결국 740년과 741년 이후에는 철리·불열·월희의, 752년 이후에는 흑수의 對唐조공을 완전히 차단하면서 복속을 일단락 시키게 된다. 文王代에 말갈제부에 대한 복속이 일단락되면서, 발해는 上京遷都후 발해내지 뿐 아니라 복속지역 전역에 걸쳐 지방제도를 일원화시켜 나갔다. 늦어도 9세기 초가 되면 5京15府62州100여개의 縣으로정비된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재편은 말갈집단에 대한 편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에 대한 간접지배를 직접지배로 전환하면서 對日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首領層을 65개 정도의 집단으로 재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集團徙民과 말갈자체의 분화가 동시에 이뤄졌다. 9세기말 이후 新羅및 後唐과 교섭했던 黑水國과 寶露國등의 활동은 발해 남쪽 변경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집단들의 활동으로 이해된다. 발해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말갈세력으로는 達靼과 女眞을 들 수 있다. 달단과 여진은 본래 흑수말갈로 발해에 役屬되었다가 奚와 契丹의 공격을 받고 흩어져 하나는 여진이, 하나는 달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화는 집단 이주와 함께 흑수말갈 역시 지역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상실해 갔음을 보여준다. 말갈 7부의 출현이 고구려의 지역집단 구분인식과 함께 출발했다는 점에서, 고구려멸망 후부터 발해시기에 걸쳐 말갈의 해체와 재편성에 따른 지역 집단적 성격의 상실은, 말갈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이 거란에 의해 東北諸種族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인식되면서, 여진으로 대체되었다. 발해와 말갈 관계의 최종 향방을 보자면, 발해의 말갈지배는 그 시기가 짧았 기 때문에, 사회발전이 고르지 못한 세력들 간에 각자의 정체성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발해 멸망 이후 渤海遺民과 女眞으로 구분되어 인식되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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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교류를 통해 본 고구려와 발해의 해양문화

        윤재운 고구려발해학회 2008 고구려발해연구 Vol.32 No.-

        Koguryo and Balhae make active exchange with neighbored people, region and state through Balhae(sea), Yellow Sea and East Sea. In this article, the emphasis is on studying the exchange, route and worship of Sea Deities by East Sea. Because related date about East Sea exchange is more than Balhae(sea), Yellow Sea. Firstly, Balhae is similar to Koguryo in formation, leading part and route of East Sea trade. Formation of East Sea trade is a tributary system between private trade and official trade. There is the objective of tributary system that is obtainments through public channel which is consistent goods dealed of only China government. It is able to in a tributary system and award because of guarantying economic interest. Leading part of East Sea trade is a diplomatic mission, Suryeong(首領) and merchant. Nextly, the two countries are related each other in worship of Sea Deities. It is proved in that Koguryo’s Succession of Balhae’Buddhism, shamanism related sea tradition and religious service for sea god. Consequently, Balhae is in succession to Koguryo’s ocean culture. 고구려와 발해는 서쪽으로부터 발해와 황해, 그리고 동쪽의 동해를 통해 주변 제민족ㆍ지역ㆍ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해왔다. 본고에서는 해양문화 가운데서도 동해를 통한 교역, 교류 루트, 해양신앙의 면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발해는 발해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기도 했으나, 관련 기록이 동해해역권에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교역면에 대해서는 교역의 형태, 교역의 주체 등에서 유사성을 찾아 볼 수가 있었다. 즉 외교사절단에 의해 이루어진 공무역, 지방세력과 민간상인 등에 이루어 진 사무역 등은 일본에서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거의 유사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교역의 주체면에서도 고구려의 경우에는 민간상인의 존재양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외의 경우 외교사절단이나 지방세력 등의 존재는 인정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동해를 통한 교류루트도 발해가 고구려의 항로를 그대로 유지ㆍ계승했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울러 해양신앙면에서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와 샤머니즘계열의 해양전승 및 해신에 대한 제사 등에서 두 나라사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해양문화측면에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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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2~475년 백제 · 고구려의 對북위 외교전과 한성 함락

        위가야(Wee, Kaya) 고구려발해학회 2020 고구려발해연구 Vol.66 No.-

        이 글은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사건의 배경을 정리한 것이다. 이를 위해 472년에서 475년 사이에 백제와 고구려가 북위를 상대로 진행한 외교전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472년 8월 백제는 북위를 상대로 청병 외교를 진행하였다. 이 외교전에 대해서 기존의 견해에서는 대체로 對고구려전에서 수세에 몰린 백제가 북위에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파악해 왔지만, 백제와 북위 사이에서 오고 간 표문과 조성의 내용을 분석하면 실제로 이 시기 백제가 북위를 공격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청병 외교를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북위에 보내는 표문에서 고구려가 북위를 적대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지금이 고구려를 공격할 적기임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알렸다. 또한 故事를 활용해 북위를 자극하면서 백제 자신은 고구려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신종할 의사를 전달 했는데, 이는 북위의 고구려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백제의 외교적 전술로 파악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북위가 백제의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만 파악했다. 하지만 북위가 백제에 보낸 조서 내용을 분석하면 백제의 청병 이후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표문을 통해 고발한 사신 파견 방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시도했다. 북위는 고구려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자 그 해명을 받아들여 백제의 청병 요청을 거절하였지만, 조서를 통해 조건부로 고구려 공격에 나설 수 있음을 언명하기도 하였다. 이때 북위는 백제로 귀환하는 사신을 고구려를 경유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북위에 대한 태도를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구려는 사신의 통과를 가로막았고 북위와 백제의 사신은 다시 북위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북위가 백제에 내린 조서에서 언명한 고구려 공격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셈이었지만, 이후 북위의 사신이 백제에 파견되지 못하여 양국의 연계를 통한 합공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백제는 북위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위를 설득하기 위한 다른 수단으로 물길과의 연계를 시도하였고, 이는 물길의 사신을 통해 북위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물길의 사신이 도착한 것은 고구려가 한성 공격에 나선 한 달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백제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의 對북위 교섭 시도를 확인한 후 우선 양자의 연계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위 사신의 백제 파견과 백제 사신의 귀환을 가로막은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와 동시에 북위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것은 과거 핑계를 대며 거절했던 북위와의 통혼 재개 제안이었다. 다만 고구려는 통혼 제안을 통해 북위에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고 실제로 통혼을 성사시킬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북위는 실제로 통혼을 진행하려 했고, 이를 위한 사신의 파견 과정에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다시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의 연계로 인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 했고, 그것은 수도 강습을 통한 백제의 완전한 제압이었다.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 것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해야 실상에 부합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This article aims at analyzing the aspects of diplomatic war of Baekje and Goguryeo from 472 to 475 against the Northern Wei, and the background of the fall of Baekje’s capital Hanseong(漢城) by Goguryeo. A summary of analysis is as follows. In 472, Baekje conducted diplomacy requesting reinforcements to the Northern Wei. This article confirmed that this diplomacy was carried out as part of a plan to attack Goguryeo unlike existing understanding by analyzing the contents of the diplomatic documents and the activities of Baekje at the time. The Northern Wei first refused the request, but notified Baekje that they could conditionally go on a conquest of Goguryeo. However, the contents of the report of the Northern Wei were not delivered to Baekje the envoy’s return to Baekje was blocked by Goguryeo. Baekje attempted to connect with Mulgil(勿吉) as another means to persuade the Northern Wei. The envoy of Mulgil arrived in the Northern Wei and announced the connection with Baekje, but this too failed. The reason was that Goguryeo raided Hanseong and captured it at that point. After confirming that Baekje was negotiating with the Northern Wei, Goguryeo tried to block the connection between the two. Goguryeo also proposed resuming a royal marriage to improve relations with the Northern Wei. This proposal was only to convey that Goguryeo had no intention of being hostile to the Northern Wei, and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hat there was a willingness to practice the royalmarriage. Northern Wei, on the other hand, tried to proceed it in practice. Goguryeo refused it by making excuses, and prepareda way to resolve the situation more fundamentally. The way was to completely suppress Baekje. This was the reason why Goguryeo raided Hanseong, the capital of Baekje in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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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유적 출토 말갈 패식 대장식구에 대한 검토와 그 의미

        정윤희(JEONG, Yoon-hee) 고구려발해학회 2021 고구려발해연구 Vol.69 No.-

        발해의 사회 연구에서 주요 논점 중 하나는 말갈 세력의 동향이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그 중 고고유물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기층문화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말갈관 등 일용재(日用財)인 토기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졌으나, 지역 사회 내 유력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데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복식품 중 이른바 ‘말갈 패식(靺鞨 牌飾)’에 주목하였다. 이는 대장식구(帶裝飾具)의 일종으로, 재지의 말갈족이 소지자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위신재(威信財)로 이해된다. 발해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며 발해 경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해 지방사회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나, 다만, 계보 문제에 치우쳐져 있던 탓에 이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발해 유적 출토품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형식별·지역별 특징을 바탕으로, 활용 방식과 함의에 대해 추론해보았다. 먼저, 복합적인 문양들이 하나의 틀을 이루는 장식구이기 때문에 상응하는 형태적 속성에 따라 Ⅰ형식과 Ⅱ형식으로 대별하였다. 이러한 개별 과판의 형식별 특징을 바탕으로 과판 조합 관계에 대해 예찰한 결과, 사용규범 및 지역별 편중성의 차이가 간취되었다. 두 번째로, 지역별 분포 양상을 비교하여, 지역 간 유력세력의 교류 관계를 확인하였다. Ⅰ형식은 동경, 남경지역을 제외한 5경지역과 그 외 지방 전역에 널리 분포한다. Ⅱ형식은 길림지역, 연해주 남부·동부·북부 지역에만 집중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Ⅰ형식은 상경지역 및 연해주 북부지역에서 단독 혹은 다량으로 조합되는 출토 사례가 확인되는 반면, Ⅱ형식은 연해주 동부지역 모나스트리카-3고분군과 같이 단위 고분군 내 1점씩 단독으로 부장되거나, 길림지역에서 Ⅰ형식과 조합되는 등 지역별 선호도의 편중성이 간취된다. 세 번째로, 사회적 역량을 표지하는 재질과 출토 맥락을 통해 활용 양상을 비교해보고, 그 의미에 대해 추론해보았다. 재질 중 현저하게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은 청동제품이며, 철제와 은동 재질도 확인되었다, 그 중 청동제 패식의 출토맥락을 비교해본 결과, 부장품의 수량과 묘제에서 차등성이 뚜렷한 경우일지라도 패식 재질 및 형식이 동일한 사례들이 들이 대다수이다. 즉, 피장자의 경제적 배경이 비교우위인 경우에도, 동등한 수준의 위신재를 사용한 점을 통해 차등성보다는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네 번째로, 발해 사회 내 패식 과판 소지자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일 분묘 내에서 공존하는 것은 발해 중앙 지역, 다른 분묘 간 공존하는 것은 지방의 주요 대단위 고분군에 집중됨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지역 내 정치체 집단의 해체가 아닌 누대에 걸친 토착 세력의 성격 변화를 추정해볼 수 있으며, 지역 사회 내 유력세력의 의존·편승 기반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보충자료로 참고가 된다. In this paper, attention was paid to the "Amur(Mohe) type plaques" a prestigious product that symbolizes the holder"s political prestige. This is a kind of belt decoration, which appears throughout the entire period of Balhae, and since it is intensively distributed in the Balhae region, it has an inseparable relationship with the Balhae society, but there is a limit to lack of research on this. Therefore, in this paper, we basically reviewe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type and region, and inferred their meaning. First, the type classification was roughly divided into pattern Ⅰ and type Ⅱ according to the corresponding pattern design, and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mbination of the family members through attribute review and characteristics of each type, differences in the norms of use and regional bias are captured. Second, by comparing the distribution patterns of each regi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fluential forces between regions was confirmed. Pavilion type Ⅰ is a bias in preferences by region, such as a large number of combined cases in In particular, examples excavated in the central region also refer to the existence of Sokmalmalgal, who participated in the founding process of Balhae. Third, we compared the usage patterns through material and excavation context, which is a proxy material that marks the hierarchy, and inferred its meaning. In other words, despite the high background of the victim"s economic and social status, it can be seen that the same prestige was used to highlight homogeneity rather than difference. Fourth, the case of coexistence with the Dangsik large family was reviewed in relation to the character of the ruling overseer in the Balhae society.As a result, the case of coexistence with Dangsik"s large family is characterized by being concentrated in the main base area of Malgal and the central area of the pre-mid Balhae period. From this perspective, it is possible to estimate the change in the character of the indigenous forces over time, not the dissolution of political groups in the region. In other words, it serves as a reference as supplementary data that can gauge the change in the basis of dependence and transfer of influential forces in th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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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전덕재 고구려발해학회 2019 고구려발해연구 Vol.65 No.-

        This paper examines the reading and interpretation of Chungju-Goguryeo Stele, the covenant between King Jangsu of Goguryeo and King Nulji of Silla in May of 449, and the timing of Goguryeo's advancement into the Chungju area. Goguryeo advanced into the Chungju area between the first half and the middle of the fifth century through the Yeongseo area of Gangwon-do and called it Mieulseong. In between the late 430s and the mid-440s, Goguryeo then crossed the Sobaek Mountains, occupied the northern part of Gyeongbuk Province, and reorganized it into its territory. Furthermore, Goguryeo reorganized the East Sea Coastal Area from Cheongha-Myeon, Buk-gu, Pohang-si, Gyeongbuk to Gangneung into its territory in around 400. But sometime before May 449, Silla occupied these areas by driving out Goguryeo Military which made the King Jangsu of Goguryeo to show off his military power with his soldiers in May 449 in Chungju area. The King Nulji of Silla apologized and pledged his continued loyalty to the King of Goguryeo. In July 450, Goguryeo invaded Silla’s western territories in retaliation for killing one of its generals and retreated only after Silla sent its envoys and apologized. Furthermore, Silla and Goguryeo held grudges against each other after Silla drove Goguryeo’s military troops out of its country, which made Silla to strenghen its bond with Baekje to actively deal with Goguryeo’s southward expansion. 본 논고는 충주고구려비의 판독과 해석, 449년 5월에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 눌지왕이 회맹한 사실, 고구려의 충주지역 진출 시기 등에 대해 살핀 것이다. 고구려는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 5세기 전반에서 중반 사이에 충주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을 未乙城이라고 불렀다. 이어 고구려는 430년대 후반에서 440년대 중반 사이에 소백산맥을 넘어 경북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영역으로 편제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400년 무렵에 오늘날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강릉까지의 동해안지역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제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449 년 5월 이전 어느 시기에 고구려군을 구축하고 경북 포항시 청하면에서 강원도 강릉시에 이르는 동해안지역을 차지하자, 고구려 장수왕이 449년 5월에 군사를 이끌고 충주지역에 나아가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신라 눌지왕이 충주지역에 직접 나아가 동해안지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사죄하고, 앞으로 고구려왕에게 계속해서 충성하겠다고 誓約하였다. 450년 7월에 신라가 고구려의 邊將을 살해한 것에 대해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西邊을 침략하자, 이에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과하매, 고구려군이 물러났다. 신라가 450년대 전반에 자국 내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몰아내면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원한이 생겼고, 이때부터 신라는 백제와의 연대를 한층 강화하고 고구려의 남진에 적극 대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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