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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정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9 고고학지 Vol.- No.특집호
다호리 유적은 1988년 초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하여 1988년도 제 1~3차 조사,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조사가 이루어져 모두 7차례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1997년에는 이 유적을 관통하는 도로의 확장공사 때문에 기존도로의 하부와 다호리의 동쪽에 인접한 해발 약 20m의 구릉지를 구제발굴하였다. 이 구제발굴에서는 다호리 1호분에 인접한 도로변에서 1기의 원삼국기 토광목관묘가 조사되었으며, 구릉지에서는 가야시대의 무덤이 다수 발굴되었다. 다호리유적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 또는 한 사회와 현재까지 공백기로 남아 있는 삼한, 즉 원삼국기 초기로의 전이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발굴을 통해 이 시기 주요 묘제가 목관묘임이 밝혀졌으며 거의 원형을 잃지 않은 구유형 목관과 함께 당시까지 거의 출토된 바가 없던 각종 칠기류 및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식동검의 옻칠된 손잡이와 칼집 등 각종 부속구가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실로 우리 학계에서 고대하던 물질적 자료들이 확인됨으로써 당시의 문화상을 밝히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80년대 고고학적 발굴 중 가장 큰 성과를 얻은 유적의 하나로 문헌사적으로도 불분명하였던 기원전·후의 역사에 서광을 비춰줄 것으로 기대된다.
송의정,김재현,박영만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2 고고학지 Vol.13 No.-
영암 만수리 1·2호분의 발굴조사는 1981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영산강유적 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당시의 호남지역 고고학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옹관고분의 조사와 함께 목관 또는 목곽을 매장 주체부로 하는 토광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로서 상당한 도전적인 발굴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인골에 대해서는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서 응급 보존처리하였고,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최몽룡 교수의 감정에 의해 성별 및 연령추정을 하였는데, 남아있는 두개골 및 치아 등의 특징으로 보아 12~21세 사이의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이 인골은 어떤 보존처리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국립광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인골 조직을 통해 DNA분석과 같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국립광주박물관에서도 이의 가능성 타진과 함께 인골의 정밀감정 및 보존처리를 시행하게 되었다. 현재 이 인골은 광1381로 등록되어있으며, 발굴 후 거의 21년이 지난 2002년 11월에야 비로소 DNA분석은 불가능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밀감정 및 보존처리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 글은 그에 대한 간략한 보고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