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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녕 여초리 B지구 1호 토기요지에 대한 고고지자기 측정

            박창고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8 고고학지 Vol.9 No.-

            유적에 대한 연대측정을 몇 가지 방법으로 실시할 수 있다. 그중에서 고고지자기법(考古地磁氣法)이 가장 간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보다 경제적이고 가장 신속하다. 그러나 고고지자기법은 한 지역에서 많은 자료가 수집되어 그 지역에 대한 비쌍극자(非雙極子)자장의 Paleo-secular variation curve (고영년변화곡선(古永年變化曲線); 이후“PSV곡선”으로 표기함)가 작성되기 전에는 정확한 연대측정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14곳(본 연구 포함)의 요지(窯址)에 대한 고고지자기 측정이 실시됐다. 그중 8곳은 측정 결과 신뢰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나머지 6곳 중 3곳은 신뢰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3곳은 실내 실험이 끝났으나 보고서 작성 중이다. 이 글은 한국에서의 선행된 고고지자기측정 소개와 함께 1993년 12월 23일 경상남도 창녕군 여초리 B지구 1호 토기요지에서 채취한 총 33개의 시료를 대상으로 고고지자기 방향을 측정한 연구 결과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시대 전시 변천 연구

            양성혁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9 고고학지 Vol.25 No.-

            국립중앙박물관은 1945년 개관 이래, 모두 6번에 걸쳐 이전을 하였다.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잦은 이전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이전할 때마다 전시 주제 및 구성 등 전시 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전에 따른 전시 변화는 당대의 학문적 성과와 물질문화에 대한 인식 등을 고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본 글은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시대 전시의 변천에 대한 연구로 전시의 변천 과정 속에서 당대의 신석기시대에 대한 인식 변화, 그리고 학문적 성과에 대한 대중 전달 방식의 변화 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석기시대 전시는 학계의 연구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는 일제가 구축한 금석병용기설을 극복하고 신석기시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 이후 학계의 연구 결과를 적극 반영하여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끝을 기원전 8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로 조정하였다. 전시 주제 및 구성에 있어서도 토기 중심의 지역별 비교 전시에서 벗어나 점차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에 초점을 맞춰 나갔다. 여러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된 현재의 일반 대중은 기존 당대 학계의 연구 성과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전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대중고고학에 주목하였다. 고고학 조사를 통해 획득된 유물이 대중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박물관 전시실이라는 점에서 박물관 전시실은 고고학과 대중의 최접점이다. 고고학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고 고고학의 저변 확대를 모색한다면, 고고학 자료가 일반 대중과 직접 만나는 박물관이 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반 대중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에 대한 ‘니즈(Needs)' 분석과 최근의 발달된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과 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이 융합된 첨단 전시기법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하였다. Since it was first established in 1945,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has moved six times. Although this frequent change of location has resulted in numerous problems in terms of the preservation of cultural heritage, it has also presented opportunities to change the themes and compositions of the Museum's exhibitions. Based on an examination of this changing nature of exhibitions, it may be possible to trace academic accomplishments and perceptions towards material culture. This article analyzes the changing nature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s exhibitions on the Neolithic Period in order approach how perceptions of the Neolithic Period, as well as the way in which associated academic achievements were presented to the public, changed over time. The Neolithic exhibitions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can be judged to have evolved in association with developments in research undertaken by the academic community. Up until the 1970s, the main focus had been to overcome the concept of the ‘Chalcolithic Period', which had been proposed by the Japanese during the period of occupation, and establish the concept of the ‘Neolithic Period'. Subsequent developments involved defining the beginning and end dates of the Neolithic Period to 8000 BCE and 1000 BCE, respectively, in accordance with new research findings. Changes in theme and composition are represented by the replacement of pottery-focused exhibitions presenting regional comparisons with exhibitions exploring Neolithic ways of life. Members of the general public have access to various kinds of data and are now capable of critically approaching exhibitions that present academic research findings to a wider audience. The author argues for the need to acknowledge such a trend and focus on ‘public archaeology'. The museum, where the public can directly observe artifacts acquired through archaeological excavations, can be regarded as the key contact point between archaeology and the public. Change has to take place at the museum, where the general public meets archaeological material, in order for archaeological to become a sustainable discipline with a broad basis. In order to do so, attempts must be made to analyze the public's needs in relation to museum exhibitions, and to adopt new cutting-edge methods of display which converge information technology and culture technology.

          • 한국 신석기시대 연구의 최근 성과와 과제

            안승모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5 고고학지 Vol.21 No.-

            본고는 2012년부터 최근 4년간의 한국 신석기시대 연구 성과를 요약하며, 특히 한국신석기학회 주도의 학술대회, 발굴보고서, 단행본, 개별 논문을 취합하여 신석기시대 연구자의 기초자료로 제공하고자 작성되었다. 발굴보고서는 50여권 이상이 간행되었는데 이 중 학술적 중요성이 특히 높다고 생각되는 유적 7곳을 선정하여 조사 성과를 소개하였다. 가장 이른 토기와 마을의 흔적이 찾아진 신석기시대 초창기의 제주도 고산리 유적, 매장 및 의례와 관련된 증거가 찾아진 조기~전기의 울진 죽변, 울산 처용리, 부산 장항 유적, 골제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발견된 전기의 울산 황성동 유적, 신석기시대 경작유구가 최초로 보고된 중기의 고성 문암리 유적, 중서부 도서에서 후기 취락 양상을 대표하는 인천 중산동 유적, 덮개형 소성가마가 확인된 후기의 김천 지좌리 유적이 그 대상이다. 발굴된 유적에서는 대부분 지형분석, 동식물 유체 분석을 포함한 고환경분석도 실시되었다. 논문은 주로 편년, 취락 구조와 거주 전략, 농경을 주제로 하였으며 탈과정주의적, 인지과정주의적 연구는 여전히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끝으로 누적된 탄소연대 자료를 이용하여 취락과 인구의 장기적 변동을 분석한 필자의 논문도 소개하였다. This paper tries to summarize recent progress in Korean Neolithic studies by consulting symposium by Korean Neolithic Societies, excavation reports, academic books and articles. More than fifty excavation reports has been published since 2012, among them most important seven sites are introduced in the paper including the Gosan-ri site in Jeju with the earliest pottery and settlements during the 8th millennium BC, the Jukbyun site in Uljin, the Cheoyong-ri site in Ulsan, the Janghang site in Busan, all with ritual or burial features during the 6th and 5th millennium BC, the Hwangsung-dong site in Ulsan with whale remains embedded with bone points which could be results of whale hunting during the 5th millennium BC, the Munam-ri site in Goseong with arable fields during the late 4th millennium BC, the Jungsan-dong site in Incheon with scattered settlements in islands during the 3rd millennium BC, the Jijwa-ri site in Gimcheon with new type of tunnel kiln during the 3rd millennium BC. Paleoenvironmental analysis including paleo-topography reconstruction, plant and animal remains analysis has been practiced in most sites mentioned above. Articles in archaeology journals mainly deal with the traditional topics such as chronology, typology, settlement structures, residential strategy, and agriculture. Post-processual or cognitive-processual approach, however, is still quite rare in Korean Neolithic studies. Finally author's ongoing study for long-term fluctuation of settlements and population based on cumulative radiocarbon data is introduced.

          • 1950년대 국립박물관 관시(館是)에 대한 고찰

            장상훈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6 동원학술논문집 Vol.17 No.-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하여 1945년 12월 3일 개관한 국립박물관은 국립 문화기관으로서 신생 독립국가의 문화 정체성을 확보하고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전개했다. 이 글에서는 국립박물관이 1950년대에 제정한 관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제정 배경과 경과를 살핌으로써 개관 초기 국립박물관의 과제 인식과 지향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1950년대의 국립박물관 관시는 1945년 개관 이래 축적했던 국립박물관의 사업성과를 토대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으로서 그 임무를 정확히 규정함으로써, 한국전쟁이라는 참화를 딛고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립박물관의 역할과 비전을 천명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자주적인 한국 고고학·미술 연구, 대중 계몽, 문화 창달 등 세 가지 목표는 광복 직후의 국립박물관이 식민지배하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규정한 한국 문화의 식민지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독립국가의 정체성을 자주적으로 모색하는 동시에 일제하 박물관의 권위주의적 운영을 타파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었다.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established its museum mission in the 1950s to serve as the national museum of the newborn country of the Republic of Korea, based on the operational achievements of the museum since its foundation in 1945, and to declare the role and vision of a national museum at a time when the Korean people had to overcome the ravages of the Korean War and rebuild their country. The three goals stated in the mission, consisting of independent research in Korean archeology and arts; enlightenment of the public; and promotion of cultures, were established for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independence in order to reject the colonized identity of Korean culture as previously propagated under colonial rule by the Museum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while independently pursuing Korea's own identity as a sovereign nation and at the same time, breaking down the authoritarian operation of museums under Japanese rule, thereby serving to enlighten the public and contribute to the nation's cultural development. The establishment of the mission and the suggestion of goals and tasks for the national museum are assessed as an attempt to compartmentalize and realize the issues set forward by Director-General Kim Jae-won in a comment made in February 1947, “The museum is determined to move forward in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field at the very least.” The mission was finally included in the Current State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written in January 1962, and does not seem to appear in official documents since then.

          • 박물관을 위한 기증·기부의 활성화 방안 :  

            최선주,김행주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0 동원학술논문집 Vol.11 No.-

            이 글에서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기부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주요 국가의 박물관에 대한 기부현황 및 관련 제도들을 함께 비교하였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기부규모는 약 3.4배의 성장이 있었고, 이 중 개인기부의 비중은 2000년을 기준으로 대폭 증가하여, 법인 중심의 기부문화가 개인 중심의 기부문화로 바뀌어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간기부의 활성화는 정부와 민간, 소득계층 간 파트너십 형성을 통해 사회통합을 유도하는데 기여하고 양극화 해소 및 계층 간 위화감 완화에 기여하여 공동체 의식의 확대에 공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부의 내용을 보면 개인 기부의 80%는 종교단체의 헌금이다. 2005년 우리나라 기부현황 중 박물관·미술관을 포함한 문화예술단체는 겨우 1.5% 미만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기증 및 기부자들이 쉽게 기증과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보완을 통해 기증·기부문화를 활성화하고 박물관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기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To coincide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Korean museums, this paper examines how donations of cultural relics have been made to museums, and on what basis contributions and donations should be established. This study compares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with other major foreign museums in terms of the current state of donation and related policies. It also investigates what efforts are needed to garner donations and how "contribution culture" should be developed for encouraging donations. In the last decade, general donation in the Korean society increased 3.4 times, and it is worthy to note that individual donation increased greatly, compared to 2000. This confirmed a tendency that donations have transformed from corporation-centered to individual-centered. In order to increase donations of relics to museums, a "movement of donation" is needed, and so is a reliable evaluation system for the relics, as well as amendment of law and policy.

          • 탄소·질소동위원소를 이용한 선사인의 식생활 연구

            안덕임 요네다 미노루(米田 穰), 아카자와 다케루(赤澤 威)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4 고고학지 Vol.6 No.-

            탄소·질소안정동위원소 식성분석은 유적에서 출토된 고인골(古人骨)의 조직단백질(콜라겐)을 구성하는 주원소인 탄소와 질소동위원소량을 측정하여 그 값에서 피장자의 생전의 식생활을 복원하는 방법이다. 본 고에서는 탄소·질소동위원소분석의 이론적 배경과 방법 및 몇몇 외국의 고고학적인 사례연구를 소개하고 아울러 안면도 고남리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분석결과를 자료로써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이 동위원소분석법에 따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향후 활발한 연구를 통한 자료의 축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그 일차적인 시도로서 1988년도에 조사된 안면도 고남리패총 1차 조사 시 1호 패총에서 발견된 왼쪽 위팔뼈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기초자료 부족으로 분석결과에 대해 정확한 해석을 하는 것이 어려우나 인근 일본 자료를 이용하여 해석해보면 고남리인은 C3식물·C4식물·육상초식동물 등의 육지자원과 바다짐승·어패류 등의 수산자원을 모두 이용하였으며 이 가운데 C4식물(조)의 비중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당시인의 생업경제는 농경에 기반을 두고 수렵·어로 등에 부수적으로 종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잠정적이며 자료축적을 통해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몽골 고고학연구

            데·체벤도르지,이평래,옮김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7 고고학지 Vol.8 No.-

            몽골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아시아 대륙의 중심이다. 그 때문에 구석기시대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수 만년에 걸쳐 축적된 풍부한 고고학 자료가 남아있다. 이런 몽골 지역에서 고고학연구의 시작은 러시아 학자 야드린체프가 오르홍 강 유역에서 판독되지 않은 돌궐비문(突厥碑文)을 발견하고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도시 터의 답사와 이에 대한 학술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과 러시아 학자들이 몽골로 들어와 조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유적·유물을 발견했다. 1921년에는 오늘날 몽골과학아카데미의 전신(前身)인 자료연구소 산하 역사연구실이 신설되었으며 1922년부터 몽골학자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소련학자들의 도움으로 고고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글은 몽골에서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몽골 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유적과 함께 소개하였다.

          • 백제 사비시기 소조상의 전개과정

            이병호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3 동원학술논문집 Vol.14 No.-

            소조상(塑造像)은 흙을 재료로 하여 만든 조각이다. 점토는 다른 재료에 비해 구하기가 쉽고, 돌이나 금속보다 다루기가 쉬워 일찍부터 조각의 소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흙은 내구성이 약하고 화재나 풍우 등 재해에 약하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소조상 가운데 완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경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부여와 익산 지역에서 다수의 소조상 편이 출토되었고, 웅진시기 이전으로 소급되는 사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백제고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의 대부분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별 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백제의 소조상들은 고고학 발굴이나 지표조사, 발견품으로 수집되었는데 소조상이 미술사의 연구대상이라는 인식 때문에 고고학 분야에서는 등한시되었다. 백제 소조상 발굴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 정림사지 출토품의 경우, 이것을 ‘도용(陶俑)'으로 명명하여 분묘에 부장하는 명기로 잘못 인식시켜 이 분야 연구를 지연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백제고지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의 출토위치나 중국과 일본의 소조상 출토 사례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그것이 원래 목탑을 장엄하던 탑내소상(塔內塑像)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연구에서는 백제고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의 계통이 중국 남조와 백제의 직접적인 문물교류의 결과로 파악하면서, 남조-백제-왜로 연결되는 고대 동아시아 불교사 및 불교미술의 전파루트를 증명하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본고는 그동안 소조상을 검토하면서 자주 거론되었던 백제고지 출토 소조상들의 전개과정과 특징을 정리하고 이를 소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 낙랑문화와 주변지역과의 관련

            왕페이신(王培新)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9 고고학지 Vol.- No.특집호

            다호리 등의 한국 남부 원삼국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성과와 문헌기록을 참고해보면 낙랑군과 삼한지역의 교류는 상층 사회의 정치·문화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민간의 생산 기술 교류도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호리유적과 유사한 낙동강유역의 원삼국시대 조기 유적들을 보면 보편적으로 와질토기가 출현하며 철기가 다량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형 무덤에는 한식거울 등 중국계 유물이 부장되어 있다. 동경은 한문화 중 생활용품에 속하는 것이지만 한반도 남부에서 한대 동경이 출토되는 상황, 청동기의 예기화, 방제경의 제작 등의 요소를 고려해보면 한식 동경이 삼한지역에 전래된 이후 원래의 용도에서 변화되어 예기(禮器)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성격론 : 2차 보고분을 중심으로

            이용현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5 고고학지 Vol.14 No.-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성산산성(사적 제67호)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 매년 조사발굴을 실시하였으며 또 2000년부터 현재까지 한 차례씩 기획 발굴조사를 실시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약 120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출토된 한국 고대의 목간 250여점의 약 반을 점하는 것으로 단일 유적의 동일 유구에서는 가장 많은 출토 점수이다. 또 6세기에서 8세기의 연대폭을 갖는 한국의 목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같은 점에서 성산산성 목간은 매우 중요하다. 1998년 제1차 보고서에 의하면 수습된 목간은 모두 27점인데 이 가운데 묵서(墨書)가 확인된 것은 23점이었다. 동 연구소는 2000년부터 2002년에 걸쳐 매년 한 차례씩 3개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또 다시 90여 점의 목간이 추가로 출토되었다. 2004년에 발간된 2차 보고서에 의하면, 새로 발견된 목간의 수는 묵서가 없는 것까지 포함하여 94점이라고 한다. 이 중 묵서가 확인된 것은 69점이다. 필자는 이미 1차 및 2차 보고분에 대해 사견을 개략적으로 표명한 적이 있다. 2차 보고서의 발간으로 1차 보고분에만 국한되었던 기존의 논의도 1차 보고분과 2차 보고분 합해 재론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 자료와 용례를 통해 6세기 신라사회의 문자생활과 국가 운영의 실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성격에 대해 논하였다. Over the course of 5 years between 2000 and 2004, a total of 90 wooden tablets were recovered from the Seongsan mountain fortress in Haman county, South Gyeongsang province. The region of Haman county belonged to the Gaya territory in ancient time and was subsumed within the Silla territory in the mid-sixth century A.D. The Seongsan mountain fortress was presumably constructed right after the region was incorporated into Silla. Up until 1999, 27 wooden tablets had been excavated. Different hypotheses on the use of these tablets, such as personal identification, register, or as baggage tags, were proposed. The 90 wooden tablets recovered after the year 2000 provide information that was not delivered by the previous 27 pieces. Most of all, one tablet has three consecutive letters, "Pae(稗)," "Ⅱ(二)," "Seok(石)." The previous argument that "Pae" or "Pae Ⅱ" represents a position in government service is no longer supportable. It seems equally difficult to support the hypothesis that these wooden tablets were used as personal identification or register. Rather, these tablets seem to have been used as baggage ta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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