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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수(申光洙)의 「탐라록(耽羅錄)」에 나타난 제주에 대한 인식과 정서

          박용만 ( Park Yong-man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21 탐라문화 Vol.- No.66

          조선시대 제주는 신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다가갈 수 없었던 육지인 들에게 제주는 관념적 공간이었지만 실제 제주를 경험한 지식인에게 제주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의 공간이었다. 1764년 서울에서 파견되었다가 풍랑에 발이 묶여 45일간 제주에 머물렀던 申光洙에게 제주는 ‘갇힌 공간’이었다. 신광수가 제주에 체류하며 남긴 「耽羅錄」에는 모두 49편의 시가 신광수와 李瀷의 서문과 함께 실려 있다. 원래 신광수와 함께 간 이익, 박수희가 창화한 것이지만 신광수의 문집에는 다른 두 사람의 시는 없고 두 편의 서문과 본인의 시만 수록하였다. 신광수는 육지로 돌아온 이후 제주에서 기록한 창화록을 주위 지식인에게 보여 睦萬中, 丁範祖, 李玄煥의 서문을 받았다. 이외에도 蔡濟恭은 그에 대한 묘지명에서 이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신광수와 육지 벗들의 서문에는 제주를 바라보는 인식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제주는 육지인들에게 신선이 사는 동경의 공간인 동시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가기 싫은 공간의 이중성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신광수에게 제주는 絶島이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孤立無援의 공간이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갇힌 공간’이었다. 개성주의 문학사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18세기 문학은 현실과 괴리된 관념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주위의 지식인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제주의 경험을 기록한 「탐라록」은 신광수의 제주 인식은 18세기 문학을 바라보는 중요한 기록이 된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Jeju(濟州) was a place where myths lived. Jeju was an ideological space for landlords who could not approach, but for intellectuals who actually experienced Jeju, Jeju was a real space where they had to risk their lives. Jeju was a “confined space” for Shin Kwang-soo(申光洙), who was dispatched from Seoul in 1764 and stayed in Jeju for 45 days after being trapped in a storm. In the ‘Tamna-Rok(耽羅錄)’ left by Shin Kwang-soo while staying in Jeju, there are 49 poems along with the forewords of Shin Kwang-soo and Lee Ik(李瀷). Originally, it was created by Lee Ik, Park Soo-hee, who went with Shin Kwang-soo, but in Shin Kwang-soo's writings, there were no other poems, only two prefaces and his own poems. After returning to the mainland, Shin Kwang-soo showed the changhwa-rok(唱和錄) recorded in Jeju to the surrounding intellectuals and received the forewords of Mok Man-jung(睦萬中), Jeong Man-jo(丁範祖), and Lee Hyun-hwan(李玄煥). In addition, Chai Je-gong(蔡濟恭)'s name of the grave for him recorded this in detail. However,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Shin Kwang-soo and his friends on land in their preface to seeing Jeju. In the land, the duality of the space where Shinseon(神仙) lives in, and the space that they don't want to go to, which can lead to death, appears. On the other hand, for Shin Kwang-soo, Jeju was both a remote island and a space of an isolated employee that had nothing to do with his will. It was a "confined space" that could not escape even if it wanted to escape.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in which individualistic literary thoughts were firmly established, was no longer allowed to have an idea apart from reality. Shin Kwang-soo's perception of Jeju, which “Tamna-rok”, about the experience of Jeju, which was difficult for even the surrounding intellectuals, to understand properly becomes an important record for viewing 18th century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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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풍(唐風) 수용기 정용(鄭鎔)의 한시(漢詩)에 대한 고찰 -시선집(詩選集)에 수록된 작품을 중심으로

          박용만 ( Park Yong-man ) 한국한시학회 2016 韓國漢詩硏究 Vol.24 No.-

          조선중기 盛唐詩를 수용한 三唐詩의 등장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문학사에서 새로운 풍조의 유행은 몇몇 작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당시 활동했던 많은 시인들이 교유하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典範의 논리와 방향성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三唐詩人을 제외하면 이 시기에 활동했던 여러 시인들에 대한 논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鄭鎔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으로 삼당시인이 활동했던 시기에 참여한 인물이다. 靖國功臣으로 海平府院君에 봉해진 鄭眉壽의 후손으로 화려한 가문의 배경과 경제적 풍요에도 출사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시작에 전념하였다.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許筠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國朝詩刪』에 6수를 선발하여 넣고 『鶴山樵談』과 『惺所覆?藁』에도 그에 대한 詩話를 수록했을 만큼 당시 상당한 비중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唐風을 수용하여 정회를 표출하였다. 때로는 미숙한 작품이 보이기도 하지만, 절구 형식을 선호하여 주로 주위 경물과 심사를 소박하게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시화에 실린 일부 방대하고 현란한 의경의 작품을 허균은 詩魔가 들어 지은 것으로 소개하였다. 소박한 의경의 다른 작품과 연관성이 떨어지지만 정용의 입을 통해 지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중기 당풍의 정착과 유행의 관점에서 정용의 담백하면서 소박한 한시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알려지지 않은 많은 시인들의 다양한 시풍을 논의하는 것은 당풍의 수용을 폭넓게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The appearance of Chinese poems of the Tang Dynasty style by three poets in the Joseon Dynasty(三唐詩) that accepted the Tang poetry during its flourishing period(盛唐詩) became the turning point of Korean literary history. Trends of new tendencies in literary history cannot be done by several writers` efforts and model(典範)`s logic and directivity get to settle in the process that many poets who are active then associate with each other and participate. However, except the three poets who wrote the Tang Dynasty`s Chinese poem styles, discussion on several poets who were active in this period are desperately lacking. Joeng Yong(鄭鎔) is the figure who participated in the period that the three poets who wrote the Tang Dynasty`s Chinese poem styles were active as the poet who has never been known to us in the meanwhile. He devoted himself to writing his poems by communing with nature without entering government service despite the background of his distinguished family and economic affluence as the descendant of Jeong Mi-su(鄭眉壽) who was raised to Haepyeongbuwongun(海平府院君) as Jeonggukgongsin(靖國功臣). He did not leave many works of art. However, he can be evaluated to account for a considerable proportion of the period as Heo Gyun put his 6 poems in Gukjosisan(國朝詩刪) and included stores about his poems in Haksanchodam(鶴山樵談) and Seongsobugo(惺所覆?藁) by thinking highly of him. He expressed his thoughts by accepting the Tang Dynasty`s Chinese poem styles. Sometimes, he shows unpracticed works of art. However, his works of art usually feature simple expressions of the scenery of the seasons around him and his mind and thought as he gave preference to quatrain forms. Heo Gyun introduced his partial works of art about the vast and ornate scenery written by him because of a kind of spells that he felt a disposition to do them(詩魔) to people. It is clear that they were written by Jeong, Yong`s mouth even though they are not linked to his other works of art about the simple scenery. Jeong, Yong`s light and simple Chinese poems can somewhat be meaningful from an angle that the Tang Dynasty`s Chinese poem styles settled and were popular in the middle of the Jonseon Dynasty. In addition, discussion on various poetical styles by many poets who were not known then will be a clue to understand acceptance of the Tang Dynasty`s Chinese poem styles wid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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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僖의 문학사상과 시세계에 대한 고찰

          朴用萬(Park, Yong-man) 진단학회 2013 진단학보 Vol.- No.118

          그 동안 柳僖(1773~1837)에 관한 연구는 국어학, 과학, 경학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의 종합저술인 『文通』이 그 이름만 전하고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워 보다 진전된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0여 년 전 『문통』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으나, 방대한 양으로 인해 종합적인 접근은 한계가 있었다. 유희는 少論系 인사들과 가까이 교유했는데 특히 江華學派 인물들과 가까웠다. 그럼에도 사상적으로 陽明學보다 朱子學的 측면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어머니 師朱堂 李氏의 영향으로 보인다. 많은 저술을 남기고 당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도 당대 학술과 문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집안의 가계와 그의 개인적 성향이 결합된 결과였다. 『문통』에는 苦心人 또는 寒士로서 유희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한사로서의 사회적 위상과 고심인의 성향은 그의 詩文에도 투영되어 정신을 강조하고 세밀한 창작론을 내세웠다. 특히 議論을 중시한 宋詩의 가치에 다시 주목하여 世道와 연관지으려 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江西詩派를 중시하여 근체시의 詩統을 杜甫에서 강서시파로 정통을 삼고, 송시를 좋아했던 우리나라 시인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유희만의 문학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한사의 답답한 심회를 풀어내기도 하였고, 樂府詩를 통하여 자신의 정신을 완곡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 확립된 일상의 소소한 사물을 주목하여 관찰하고 형상화하는데 장처가 있었다. Thus far, studies on Yu Hui(柳僖, 1773~1837) have been discussed, focusing on Korean linguistics, science and Chinese classics. However, the discussion hasn"t advanced any further, since his comprehensive writing, Muntong(文通) only left its name, and it was hard to find the substance. Though the research on his literature started after Muntong was reported to the academic world 10 years ago, there"s been a limitation in overall approach, due to a vast amount of his works. Yu Hui associated with members of the Soron Party and especially, was close to people in the Kanghwa-School. Nevertheless, he showed an aspect of neo-Confucianism, rather than Yangming, and this seems to be influenced by his mother, Saju-dang Mrs. Lee(師朱堂 李氏). He failed in taking the lead in academia and literature of the time, even though he left many writings and associated with progressive intellectuals. This arose from the combination of his family line alienated from realistic politics and his personal tendency. Muntong displays amusement well as a man in deep agony, or a destitute scholar. The social status as a destitute scholar and tendency of man in deep agony were projected onto his poetry and literature as well to stress the spirit and to insist a detailed creation theory. In particular, it is remarkable that he paid attention to the value of Song poetry(宋詩) which laid emphasis on argument, again and tried to connect it with the duty of the world. Moreover, Yu Hui"s own literary characteristic is that he established legitimacy by moving the poetic line of classical Chinese verse into Jiangxishipa(江西詩派) that he valued, from Dubo(杜甫), and highly rated Korean poets who liked Song Poetry. His poems expressed destitute scholar"s uneasy feelings, or he revealed his spirit euphemistically through Akbu poetry. On the other hand, he had a strong point of observing and embodying trivial things in daily life established after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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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이잠(李潛) 부자의 서당운영과 강학활동

          박용만 ( Park Yong-man ) 한국고문서학회 2021 古文書硏究 Vol.58 No.-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된 이후 16세기는 성리학을 온전히 이해하여 정착하는 시기였다. 공적인 조직성을 지닌 교육기관을 통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서당의 교육활동 역시 활발하였다. 청주지역에서는 16세기에 이르러 특정 학문을 중심으로 사승관계가 이루어지면서 학맥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나타난다. 李潛과 李得胤 부자가 운영한 서당도 그중 하나의 사례이다. 이잠과 이득윤 부자는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李鯤의 후손으로, 청주지역에 서당을 열어 인근의 학인들을 가르쳤다. 『家乘』에는 이잠과 이득윤 부자의 강학활동을 보여주는 자료와 함께 당시 門人錄이 수록되어 있다. 이잠의 문인들을 머물며 배운 71명과 오가며 배운 22명 등 모두 93명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그는 제자들의 자질에 따라 교육법을 달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 팔씨름과 씨름과 같은 놀이나 달리기와 높이뛰기와 같은 일도 또한 더러 시험하여 그 재주를 양성하는 全人敎育을 지향하였다. 이득윤의 문인은 23명으로 이중 문과 6인, 진사 4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는 청주의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중앙에서 활동하던 현달한 인물들이 많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잠 부자의 문인록은 현재 16세기 문인록이 많이 남아 있지 상황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한 자료이며, 기존의 청주지역 강학활동과 학맥의 계승양상을 보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Since the introduction of neo-confucianism at the end of Goryeo, the 16th century was a time when neo-confucianism was fully understood and established. Not only was it conducted by an educational institution with a public system, but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 privately operated Seodang were also active. In the Cheongju region, a group called scholarly lineage(學脈) emerged in the 16th century by building a teacher-student relationship centering on a specific discipline. Seodang, operated by Lee Jam(李潛) and Lee Deuk-yoon(李得胤), who were father and son, is another example. Lee Jam and Lee Deuk-yoon, the descendants of Lee Gon(李鯤), who died due to Gapjasahwa, opened a Seodang in Cheongju region and taught nearby scholars. In 『Gaseung(家乘)』, the Record of disciples(門人錄) at the time is included with materials showing the educational activities by Lee Jam and Lee Deuk-yoon. In this study, 93 disciples of Lee Jam, including 71 who learned while staying and 22 who learned while visiting, were classified, and recorded. In particular, it is his characteristic that he used different teaching metho ds according to the qualities of his disciples. He aimed at a whole-person education(全人敎育) to cultivate the talents by testing the Confucian Scripture and history books as well as games such as arm wrestling and Korean wrestling, run and high jump. Lee Deuk-yoon’s 23 disciples were fewer than those of Lee Jam, but many of them were active in the center beyond the regional limits of Cheongju. The Record of disciples of Lee Jam and his son is remarkable considering the situation as there are not many records of disciples in the 16th century, and it can help a lot in supplementing the existing educational activities in Cheongju region and the succession pattern of scholarly line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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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 내러티브 : 『도깨비 집에서 길을 잃고』

          박용만(Park Yong-Man) 신영어영문학회 2000 신영어영문학 Vol.15 No.-

          This study is to examine different views on the theory of self-reflexive novels and evaluate Lost in the Funhouse by John Barth based on some aspects of his view on postmodernism. Lost in the Funhouse consists of fourteen stories, which is a series of stories rather than a collection. It is one of his most experimental novels, in that he uses a special device. The structure of Lost in the Funhouse is cyclic, a fitting shape for a narrative concerned with regressions to origins. This novel is clearly a product of the self-conscious artist who is aware of “exhausted possibilities” in his art, but it is an experiment in format as much as in form, for Barth meant the stories to be recorded and played as well as read, as suggested by its subtitle: Fiction for print, Tape, Live Voice. In this novel, form becomes meaning. There is no distinguishing line between form and content, nor is there any distinguishing line between reality and fictitious world. In spite of this, however, this approach does not present chaotic or negative view of things. Rather, it provides a free stance for an ever interacting principle of life and cosmos in the relative world. Unlike some postmodern critics, Barth's postmodern perspective has nothing to do with an extreme line as his theory of logarithmic spiral indicates. His vision is even more extensive and transcendental. In this sense Barth, as a postmodern critic and self-conscious novelist, draws more attention than that he has thus far rece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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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수도 원격 검침 데이터 송수신 위한 Client/Server 소켓 프로그램 개발

          박용만(Yong-Man Park),권종원(Jong-Won Kwon),김희식(Hiesik Kim),Odgerel Ayurzana 대한전기학회 2006 정보 및 제어 심포지엄 논문집 Vol.2006 No.1

          An automatic remote water measurement system was developed. This system sends automatic remote measured and collected water meters data automatically from the transmitter with CDMA modem through SK-Telecom network. The water meter data are received through LAN TCP/IP and displayed as test file on IE(Internet Explorer) window. The existing water meters of mechanical type have so many problems to measure data. The person must visit the location of each water meters and write down the data records manually. In this system the RF module has attached each water meter. Client/Server programs are developed by network socket program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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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휴(李承休) 빈왕록(賓王錄)의 특징과 문학적 형상화

          박용만(Park, Yong-Man) 포은학회 2018 포은학연구 Vol.21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1273년 원나라 세조(世祖)가 황태자를 책봉하자 고려에서는 왕종(王悰) 을 하진사(賀進使)로 파견하여 축하하였다. 이승휴(李承休)가 1273년 윤6 월 9일부터 10월 3일까지 남긴 ≷빈왕록(賓王錄)≸은 현재 남아있는 사행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원종(元宗)은 철저하게 고려의 현실 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 차례의 추천을 물리치고 이승휴를 서장관으로 발탁하였다. 이승휴는 사행의 기록을 상세하게 남김으로써 서장관의 책무를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방식보다 유의미한 것을 상세 하게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원나라 인사와의 수창은 관반사인 후우현(侯友賢)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승휴와 후우현의 관계는 사신과 관반사의 공적 관계를 넘어 친밀한 인간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당시 사행은 시기적으로 장마철과 겹쳐 열흘 이상 지체될 만큼 험난한 여정이었다. 원나라에 대도(大都)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은 지체된 사행의 일정은 물론 그 과정의 피곤과 배고픔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대도에 도착한 뒤 세조 배알 장면, 황태자 책봉 장면, 연회 장면 등 원나라의 의식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대도에서의 기록은 이국(異國)의 문물과 경관에 대한 감탄이 주를 이룬다. ≷빈왕록≸은 당시 원나라의 모습은 물론 초창기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행기록으로 이후 사행기록 연구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In 1273, as King Sejo of the Yuan Dynasty was proclaimed heir to the throne, Wang jong was dispatched to the Hajin-sa to congratulate him in Goryeo. The 「Binwang-rok」 by Yi seung-hyu contains envoy duty from June 9 to October 3, 1273 and it is considered to be the oldest of the remaining private life records. Wonjong chose Yi seung-hyu as the chief recorder, defeating the three recommendations, in order to record the realistic interests of Goryeo thoroughly. Yi seung-hyu carried out the duty of the chief recorder by recording the details of the envoy duty, and in that process, he chose the method of recording the meaning more than the information when recording everything. The work with the famous person of Yuan Dynasty was limited to the foreign messenger, Hu Wu-hyun. Specifically, the relationship between Yi seung-hyu and Hu Wu-hyun formed an intimate human relationship beyond the public relations of the ambassadors and foreign messengers. At that time, envoy duty was a difficult journey that took more than ten days, overlapping with the rainy season. The records from the Yuan Dynasty to the Dae-do depicted not only the schedule of delayed envoy duty but also the tiredness and hunger of the process. After arriving in Dae-do, he recorded in detail the ceremony of the Yuan Dynasty including the scenes of Sejo’s rite, heir to the throne. In particular, the record of Dae-do is made up of the admiration of foreign culture and landscapes. 「Binheongg-rok」 is meaningful in that it is a record showing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the Yuan Dynasty in the early days as well as the appearance of Yuan Dynasty at that time. It is also noteworthy that it is the oldest envoy duty record that remains to the present and is the standard of envoy duty record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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