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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範禹와 그의 가계

        김두헌(Kim Doo-Hean)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敎會史硏究 Vol.0 No.34

        This paper studied on the Kim Beom-u (金範禹) and his lineage who was first persecuted in 1785 for his belief in Roman Catholicism (天主敎). Followings are results of the research in this paper: First, the Kim Beom-u's ancestors began to separate themselves from YangBan (兩班) lineage and to form Chungin (中人) lineage in the early 17th century. From that time on, some of the Kim's ancestors passed not only Mugua (武科) but also Japgua (雜科). Although they passed Mugua, their social status as Chungin were unchanged. The existing arguments that Kim's lineage was changed from Muban (武班) status into Chungin status must be reexamined because their social status was never changed since they had became Chungin in the early 17th century. Second, though Kim Beom-u's father Kim Ui-seo (金義瑞) had four legitimate children from his wife who had been still alive, he had more children from a concubine. He also paid some funds for publications of his lineage books, ChogPo (族譜). Such actions were very popular practices in Chungin society. On the contrary, the fact that Kim Ik-han (金翊漢), Kim Beom-u's great-grandfather, after passing the YugGua (譯科), became active in a chief interpreter of a diplomatic envoy to Beijing (北京) illuminated that Kim Beom-u's lineage seems to be quite open to the outside world. Third, the existing research emphasized that Chungin accommodated Catholicism because of their resistance to the discrimination by YangBan. But Chungin also must be giving up desires for getting public offices or concubines to receive Catholicism. Kim Beom-u, as the member of a powerful Chungin lineage, must have more determination than other Chungin members become a Catholic believer because Kim Beom-u could easily get those advantages such as public offices or concubines. Fourth, Kim Beom-u was intimate with Yi-Byeok (李檗) because they were related by marriage. Their in-lawships were formed by Kim Ssi (金氏) who was Jeong Yak-yong (丁若鏞)'s father's concubine. But the most important reason for their intimate relationships was the fact that Kim Beom-u was a man of great knowledge. The fact that Yi-Byeok was a great scholar and Kim Beom-u propagated many people such as not only Chungin but also YangBan make me surmise their close relations. Fifth, the Kim Beom-u's descendants still had married with Chungin after 20 years of his persecution. Kim Dong-yup (金東曄), Kim Beom-u's grandson, who resided in Mil-Yang (密陽), associated with YugGuan (譯官) who kept high ranking public offices in Seoul. The purpose of his intimate relations with them was to maintain his social position for his family. Kim Dong-yup kept the relationship by marriage and the scop of the relationship was very wide. Through this fact we can conclude that interrelationship in the late ChoSon (朝鮮) society was very powerfully influenced by not only blood but also marriage. Sixth, through this research I can notice that the most important qualification of Chung in was kept in the blood, and Chungin must marry Chungin and reside in Seoul or suburb to maintain it's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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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울산 · 언양 지역 과거 합격자 배출 양상 및 과거 시험의 개방성

        김두헌(Kim, Doo Hean) 교육사학회 2016 교육사학연구 Vol.26 No.2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울산 · 언양 지역 과거 합격자의 과목별 · 가문별 · 신분별 배출 양상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함양 · 안의 지역 및 옥구 · 임피 지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분석하였다.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울산 · 언양 지역과 옥구 · 임피 지역은 해안이나 그 인근에 위치해 있었고, 海防 기지로 중시되었으며, 일찍이 출중한 무관이 배출되었기에, 문과나 소과 합격자 보다는 상대적으로 무과 급제자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 · 안의 지역은 내륙에 위치해 있었고, 군산 기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찍이 출중한 문관이 배출되었기에, 무과 급제자보다는 문과나 소과 합격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하여 이들 여섯 지역에서 과거 합격자를 과목별로 배출하는 데, 각 지역의 군사적 · 지리적 특성과 이들 지역에서 배출된 출중한 인물에 따라서 과거 합격자의 과목별 배출 양상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이들 여섯 지역에서의 소수의 유력한 가문의 과거 합격자 배출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소수의 유력한 가문에서 과거에 합격한 자보다 합격하지 못한 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 등의 사실을 통해서, 과거 합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개인의 능력이었으며, 그 다음이 소속 가문이었다고, 그리고 과거 합격이 원칙적으로 가문으로부터 개방되어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들 여섯 지역에서 양반 미만의 신분이 과거에 합격한 사실들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수는 양반의 그것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것만으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기란 극히 어려웠다는 것 등의 사실들을 통해서, 이들 여섯 지역에서 과거제도가 양반과 비양반의 신분 차별이라는 갈등을 완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 정도는 미미하였다고 판단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s that contributed to the pass rate of State Examinations in Ulsan and UnYang regions. We compared these rates with those of the OgGu(沃溝) · ImPi(臨陂), HamYang(咸陽) · AnUe(安義) regions during the JoSun Dynasty. The results of this paper illustrates our findings. First, there ar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 pass rate between these six regions according to the presence of military,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and the historical prominent figures of the region. This indicates an influence on the pass rate within these six regions based on the factors mentioned above. Second, the pass rate for State Examination takers for prominent families was considerably higher indicating that the pass rate was influenced by the affluence of the family. This shows that the absolute element needed to pass the State Examination was not the affluence of the family, but the ability of the candidates. Access and opportunity to pass the State Examination was open to all in principle, but was affected by the affluence of the family. Third, there were those who were under YangBan(兩班, the best social status) w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these six regions. However, the pass rate for the those under YangBan was smaller than YangBan. Although those not under YangBan had passed State Examinations, they were not able to rise to YangBan status. These facts indicate that the State Examination mitigated the conflicts of social discrimination, but that was few and far bet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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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조선후기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의 신분과 가계 및 혼인

        김두헌 ( Kim Doo-hean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2017 항도부산 Vol.33 No.-

        조선후기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들의 신분과 가계 및 인척관계를 탐구한 본고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 사자관들이 총 18명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이들이 수록된 典據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 이어서 이들 모두가 『寫字廳先生案』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사자청선생안』의 사자청 선생들이 사자청의 고위 사자관직을 역임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방증하였고, 역으로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들이 실제로 실력 있는 사자관들이었다는 것을 방증하였다. 그리고 본고의 말미에 『사자청선생안』에 이들에 대해 수록된 내용을 보완하여, 「朝鮮後期 通信使行隨行 寫字官案」이라는 자료를 제시하였다. 둘째,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들이 속한 가계를 분석한 결과, 이들 가계들이 잡과와 주학 입격자를 다수 배출한 명문 기술직 중인 가계였으며, 가계가 밝혀지지 않은 일부 사자관들의 신분은 기술직 중인이거나 그와 동등한 사회 신분적 위계의 신분이었다고 유추하였다. 주요 기술직 중인 가계에서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을 배출한 양상을 파악한 결과, 주요 기술직 중인 가계의 벌열화 양상과 아울러, 1명의 사자관을 배출한 가계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2명 이상의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을 배출한 각 가계 출신의 수행 사자관들이 대부분 서로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을 선발하는데 부계 혈통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유추하였다. 그리고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과 대일본사행 참여 역관을 모두 배출한 가계에서 수행 사자관을 먼저 배출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당시 사회에서 수행 사자관의 역할도 참여 역관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셋째,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들의 혼인 양상을 살펴본 결과, 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들과 대일사행 참여 역관들 사이에서, 외가나 처가 등 직접적인 혼인 관계를 형성한 사례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벗어났지만 사회생활을 하는데 영향을 미칠만한 정도의 인척관계를 형성한 사례는 적지 않았다. 이 사실을 근거로, 통신사행 수행 사자관을 선발하는데 본인의 능력은 물론, 인척관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유추하였다. 그러나 개인이 지닌 능력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였지만 기술직 중인 사회 내에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This paper analyzed the social status and lineage and marriage of the SaJaGuans(寫字官, official transcriber) those who followed TongSinSa (通信使, diplomacy party assigned from JoSun to Japan) in the late JoSun Dyansty(朝鮮). This study on above issues first was performed. The results is this; first, through reserch on the diplomatic materials were written the diplomatic relation history between JoSun and Japan, the member of the SaJaGuans(寫字官) corrrectly was confirmed. second, through the SaJaCheongSeonSangAn(寫字廳先生案, high official transcriber rosters), it was proved that they were high SaJaGuans of SaJaCheong(寫字廳). third, through the reserch on the their family records, their social status was Jungin(中人) or the same social rank status. Their families were powerful families in the Jungin society, and formed marriage relationship with the families produced the OyugGuans (譯官) who followed TongSinSa and conducted MunUiHang(問慰行) to such a degree as have an effect on appointment. Absolutely it was known that the top qualification element to be the SaJaGuan who followed TongSinSa was the individual ability. But although smaller than the individual ability, the social position of the lineage and the marriage relationship in Jungin(中人) society affected to some extent on the oppointment of the SaJaGuan who followed TongSinSa.

      • KCI등재

        조선 후기 경아전(京衙前) 서리(書吏) 가계 사례 연구:신득린(申得麟)(1734~?) 가계

        김두헌 ( Doo Hean Kim ) 한국고문서학회 2013 古文書硏究 Vol.42 No.-

        본고에서는 申得麟 가계 출신들이 남긴 30장의 준호구를 주된 연구 자료로 사용하여, 이 가계의 경아전 서리 가계로 들어서기 직전의 신분, 경아전 서리 세전 시기, 가계 기록 편찬 여부, 혼인 양상, 문무 관직 진출과 이로 인한 신분 상승 여부 등을 탐구하였다. 그 결과, 이 가계가 영·정조 연간에 장악원 전악에서 경아전 서리로 직역을 전환하였다는 것, 이 가계에서 경아전 서리를 세전한 시기가 18세기 말이나 19세 초 무렵이었다는 것, 이 가계에서는 조선시대에 가계기록을 편찬하지 않았다는 것, 이 가계 출신들은 주로 같은 경아전 서리 출신들과 혼인을 하였다는 것, 이 가계 출신들 중에 문무 관직이나 官階에 진출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지는 못하였다는 것 등을 확인 또는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상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경아전 서리 가계에서 경아전 서리를 세전하기 시작한 시기가 각 가계마다 달랐다는 것, 경아전 서리는 기술직 중인과 다른 신분으로 존재하였으며 이들의 사회 신분적 지위는 기술직 중인에 비해 낮았다는 것, 경아전 서리들은 주로 같은 신분끼리 신분 내 혼인을 하였다는 것, 영·정조 연간에 경아전 서리, 장악원 전악, 시전 상인 중에 사회 신분적 지위가 같은 부류들이 상당 수 존재하였다는 것 등을 유추하였다. 아울러 조선후기 사회가 능력과 명분을 동시에 중시한 곧, 유교의 인본주의와 성리학의 명분론이라는 두 개의 사회 이념이 현실에서 적절하게 융합, 적용된 사회였다고 판단하였다. This paper studied on the Sin Dug-Lin(申得麟, 1734~?)`s lineage by analyzing their thirty-page JunHoGu(準戶口).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followings: the status of Sin Dug-Lin`s lineage before entering GyeongAJeon(京衙前) Seoli(書吏) was JangAgWon(掌樂院) JeonAg(典樂)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Sin Dug-Lin was JangAgWon(掌樂院) JeonAg(典樂) and his descents was GyeongAJeon(京衙前) Seoli(書吏); This lineage started to hand down Seoli posts(書吏職)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n the late 18th century or the early 19th centry. From that time on, the family married with other Seoli family members. They didn`t compiled records of their family lineage such as JogBo(族譜) during the Choson(朝鮮) dynasty. Although there was a few those whom proceeded the official post in this family, their status can`t mobile upward to YangBan(兩班). From the above facts, following explanations on the GyeongAJeon Seoli society can be possible: first, the periods of keeping Seoli posts(書吏職)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n the GyeongAJeon Seoli society was different from each families. Seconds, GyeongAJeon Seoli was distinctive themselves from technical post of JungIn(技術職 中人) and their social status was a little bit lower than technical post of JungIn. Thirds, the marriage of the GyeongAJeon Seoli was made only among themselves. Forth, there were similar social ranks such as GyeongAJeon(京衙前) Seoli(書吏), the JangAgWon(掌樂院), JeonAg(典樂), and the SiJeon(市廛) merchants during the YungJo(英祖)-JeongJo(正祖) peorids. And finally, in the Choson(朝鮮) society both ability and MyungBun(名分) were high esteemed by two confucian ideas in the reality.

      • 군산 금강사(해방이후 동국사) 창립자 內田佛觀의 이력과 포교 활동 :

        김두헌(Kim Doo Hean)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5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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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사(錦江寺) 제1대 주지였던 내전불관(內田佛觀)의 호칭은 대외적인 기록물에는 속세의 성씨와 법명을 연합한 것이, 금강사 내의 동종 명문에는 호와 법명을 연합한 것이 각각 사용되었다. 60여 년 동안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로 살았던 내전불관은, 국가가 불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불교관을 갖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전후의 시기에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들은 한국 포교사로 임명되고 나서, 한국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드러났다. 내전불관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 단한다. 이 시기 내전불관을 포함한 일본 조동종 소속 한국 포교사들의 나이나 경력은 만만치 않았다. 이로 보아, 당시 일본 조동종 본산에서 한국 포교를 중시하였고, 내전불관의 포교사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내전불관의 주된 포교 대상은 군산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 이었다. 당시 금강사는 일본인 위주의 사찰이었다. 그의 사찰 운영 방침은 군산에서 쌀을 수탈하는데 앞장선 일본인 신도들의 평안을 빌어준다는 것, 일본 천황에게 충성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포교 활동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과 쌀 수탈 정책을 협조하였다. The Kumgangsa(錦江寺, the previous name of Dongguksa(東國寺))’s first monk, Uchida Bukkan(內田佛觀) who had been a monk belonging to the Japanese Jodongjong(曺洞宗) for 60 years had the thinking that the country had the need to protect the Buddhism. By the time Japanese imperialism invaded Korea, some of the Japanese Jodongjong monks were appointed as Korea pogyosa(布敎師) and then deployed the missionary work in Korea. It judges that Uchida Bukkan also have been no exception in this respect. At that time the age and the career of Japanese Jodongjong Korea pogyosa was not less. Uchida Bukkan was the same. The Japanese Jodongjong was focus on the missionary work in Korea and recognized Uchida Bukkan’s mission capability. Uchida Bukkan’s main mission target was not korean but Japanese those who lived in Kunsan. Kumgangsa was a temple of the Japanese-oriented. The Uchida Bukkan’s mission purposes were to make a give peace of Japanese believers those who take the lead to the exploitation of rice in Kunsan and to be loyal to the Emperor of Japan and so on. Through missionary work, he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policies of aggression and rice explo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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