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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우(崔奭祐) 교회사학(敎會史學)의 사학사적(史學史的) 의의(意義)

            원재연(Won Jae-yeon)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3

            최석우 몬시뇰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집체적 연구를 시작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설자로서, 구원사와 실증사의 조화를 통해서 전체사적 전망을 제시한 선각적 교회사가였다.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학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석우 몬시뇰이 추구한 교회사 연구의 이상적인 형태는 교회사가 신학과 역사학의 두 영역에서 서로 공존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둘째, 최 몬시뇰은 신학으로서의 교회사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개념 정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최 몬시뇰은 처음에는 교계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 중요하다고 보았지만, 차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특히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가 보장되는 교회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게 되었다. 셋째,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원사료의 발굴과 이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그의 실증주의적 역사학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경향으로, 달레, 다블뤼, 정약용 등 교회 측 인사의 기록뿐만 아니라 관찬 연대기와 재판 기록 및 척사론자들의 문집에 나오는 기록들도 매우 중시했다. 넷째, 최석우 몬시뇰은 박해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진출, 다산 정약용의 신앙과 가톨릭 사상, 안중근의 애국 활동과 신앙심,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활동 등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통하여 구세사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연구를 진전시켜, 단순한 선교사와 그리스도교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전체사로서의 교회사를 조망하고 추구하였다. 최 몬시뇰은 우리 벽돌로 지은 ‘한국 교회사'라는 건축물을 짓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소망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교회사 연구의 진정한 토착화는 실현되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벽돌의 재질을 따지기 전에 그 벽돌로 지을 ‘교회사'라는 ‘무형(無形)의 성전(聖殿)'에 대한 건축설계도와 각종 도면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체적 내용에 대한 합의가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석우 몬시뇰이 소망했던 “국산 벽돌로 지은 한국 교회사라는 무형성전의 건립”이 아직도 요원한 현실이 안타깝다. Msgr. Andrea Choi seok-woo is the founder of The Research Institute for Korean Church History who has started joint rearches on the catholic history in Korea with his fellow workers. He was the pioneer who showed the view of total history though harmonious research of Salvation and of Positivism in Catholic history. The research meaning of catholic church history studied by him was as follows. First, his ideal type of studying church history was that of communicating and coexisting between the division of catholic theology and of secular histoy. Second, he regarded formulating the concept of church most highly, for pursuing of church history in theologic viewpoint. He focused on the concept of church as catholic hierarchy at first, but he gradually became to attach much more importance to it as God's people. Third, he stressed on the excavations of historical materials and on systematic analyses of them in studying Korean catholic history. This stress was came from the viewpoint of regarding Positivism in studying histoy, with focusing not only on the church data of Rev. Dallet, bishop St. Daveluy and John Jeong Yak-yong, but also on the persecutor's materials such as annals of government, judicial records, and personal books worked by anti-catholic confucianist. Fourth, he has researched and wrote such papers as of French missionaries' coming to Korea in the period of persecution, of John Jeong Yak-yong's belief and catholic thought, of Thomas Ahn Joong-keun's patriotic movements and his catholic faithfulness, of the spiritualities and activities on Rev. st. Andrea Kim Dae-keun and his friend Rev. Thomas Choi Yang-eop, and of etc. Through these works, he inquired into studying of church history in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salvation, and became to search and have the observation concerning total history of church, with transcending the mere history of mission or with surpassing the histoy of Christian. Msgr. Andrea Choi wanted that the study on Catholic history in Korea by foreign bricks might become by Korean. And now, he thought it became true. But I do not think so, in the strict point of view. Because we Koreans have not been able to reach an consensus on the concrete plan of Korean catholic history. Until now, we are in such needy circumstances that we do have enough discussions of total history containing of salvatio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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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김수태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敎會史硏究 Vol.0 No.55

            Monsignor Choi Seok-woo(1922~2009) was a priest who thought about what Korean Catholic Church should do after liberation, and was a scholar who studied hard to find the answer. His appearance marks the birth of a well-trained professional researcher in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t the same time, it was to forsee the full-fledged study of church history by Koreans, not by foreigners such as French or Japanese. Monssignor continued to emphasize the introductory whole history writing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fter receiving Ph.D, he continuously expanded his study of the history of the times, covering almost all periods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In addition, considering that writing the taxonomy is very important for the writing of the whole history, he tried to fill the contents of the whole history through various Categorized History. Based on this research, he set up an independent period division based on ecclesiastical theory for the writing of the whole history. Through this, he tried to show the process of changing the contents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from history of missionary, to history of martyrdom, and cultural history, and then through national history to salvation approach. Monsignor also pondered what kind of view of history he should carry out regarding the study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t first he considered church history as a discipline under two areas; history and theology. He focused on study of the historical records for establishing a proper relationship between research of church history and history. And he understood that church history should be directed not only to national history but also to the theme of globalization, which seeks to relate to world history. This approach eventually led him to gradually emphasize church history as theology. This is because he saw the application of the church concept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study of church history. And at the same time, he believed that salvational interpretation should be applied to that direction of the study. In this way, Monsignor's study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clearly holds its historical posi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Catholic Church. Then, it might be enough to call his study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s ‘Choi Seok-woo History'. 최석우 몬시뇰(1922~2009)은 해방 이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죽을 때까지 고민한 사제였으며,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열심히 공부한 학자였다. 그의 등장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연구자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외국인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인에 의하여 교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주도되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통사 저술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시대사 연구를 계속해서 확대시켜 나가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거의 전 시기를 다루었다. 그리고 통사의 저술에 분류사 저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 다양한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통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가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통사의 저술을 위해서 교회론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시대구분을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을 선교사에서 순교사 및 문화사로, 그리고 다시 민족사를 거쳐서 구세사적 접근으로 나아가는 변화과정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어떠한 사관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또한 깊이 고민하였다. 처음에 그는 교회사가 역사학과 신학이라는 두 개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그는 교회사 연구와 역사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사료론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사가 민족사만이 아니라, 그리고 세계사와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세계화라는 주제까지 지향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결국 그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교회사가 신학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교회 개념의 적용이 교회사 연구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방향은 구세사적 해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천주교회사 속에서 그 역사적 위치를 뚜렷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해서 ‘최석우 사학'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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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김수태(Kim, Soo Tae)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3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학사적 분석과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책은 서론과 본론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이를 각각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 책과 혹은 순교사 중심의 호교론적 저술로서만 그 성격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천주교회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검토해 보았다. 역사 연구를 위한 훈련을 받지 않았던 다블뤼 주교와 역사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달레를 비교할 때 《한국천주교회사》가 달레의 단독 저술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달레가 한국사와의 관련 속에서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려고 한 사상사 연구 방법을 적용하려고 했음을 지적해 두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을 둘러싼 대외 관계 속에서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다루고자 하였다. 달레는 한국인들이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배교를 통해서 순교로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는 개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의 서술에 많은 비중을 두었는데, 특히 박해가 정치 사상적인 이유에서 일어났음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천주교가 수용되면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함께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서구 사회의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달레는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 속에서 선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부분도 새롭게 이해하였다. 또한 한국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달레가 앞으로 열리게 될 새로운 시대에 천주교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을 크게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달레의 한국관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까닭에 《한국천주교회사》에 실려 있는 방대한 내용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s a member of Paris Foreign Mission Society(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M.E.P.), Father Charles Dallet's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is the first book to cover about the whole history of Korean Church. Despite such a significanc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has not yet been properly analyzed and evaluated in the domain of historical studies. The book is mainly divided into introduction and body parts however, each part was separately defined. One as introduction of Korean history and culture, and the other as Apologetics text focused on martyrs. Therefore, novel approach is required for proper understanding of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This study examined few major features of the contents of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By comparing Dallet's outstanding ability as a historian with Bishop Daveluy, whom had never received a training for historical studies, the fact, tha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was Dallet's solitary work, was found. Dallet's attempt to apply research method of history of thought by describing Korean Church history in relation with Korean history was also mentioned. Due to this attempt, Dallet tried to deal with how reception and development of Catholic voluntarily took place while regarding foreign relations of the Chosun Dynasty. Dallet specifically narrated the history of conversion by describing how koreans became theists from atheists and how koreans proceeded to martyrdom through perversion of faith. As a result, Dallet placed a importance on describing the history of persecution in Korean Catholic. He especially elaborated that such persecutions occurred due to political and ideological reasons. Dallet tried to show significant change that took place, regardless of such a brutal persecution, in Korean society as a result of the acceptance of Catholic. Through these efforts, he endeavored to remove prejudice of Western society about their new mission field, the Chosun Dynasty. Dallet had original understanding about how the history of mission works took place in Korea regarding Korean Church history. Thereupon, he also gained interests in the matter of whether Korean church could attain the freedom of religion. This was because Dallet greatly anticipated the role of the Catholic church inside the Korean society in upcoming epoch. This fact proves that Dallet's view of Korea can be positively evaluated. Due to these reasons, thorough and systematic analyzation of vast amount of contexts in the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is necess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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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그 특성

            박광용(Park, Kwang-Young)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3

            유홍렬은 일생을 역사학자로 살았지만, 동시에 뛰어난 교육 행정가이자, 열심한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활동가였다. 그의 한국사 연구는, 조선의 성리학 사회를 구명하는 노력에서 시작하였으나, 한국 천주교회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로 귀결되었다. 달레는 복음전래사와 순교사를 서술하였고, 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을 사용했다. 이에 반해서 유홍렬은 한국 사회에서의 천주교회사를 서술하였고, 연대기를 위시한 국가 편찬 사료들을 보완했다. 유홍렬의 천주교회사 연구는 이전보다 폭넓고 철저하게 문헌 고증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단편적인 사료들을 발굴하여, 교회사를 조금이라도 보완하려 노력했다. 다만, 개척적 저술이라서 오류들이 가끔 나타난다. 다음으로, ‘근대화론'과 ‘자체발전론'의 시각으로, 새롭게 밝혀낸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했다. 조선 교우들은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하고 전파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서구적 근대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데 직접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조선 교우들은 근대적 휴머니즘이나 실험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변별 없이도,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여서, 곧바로 서구 근대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많은 부분이 오류일 것이다. 결국 유홍렬은 성리학이 우리 민족의 올바른 신앙생활-사회생활을 저해한 근원이라고 파악하였다. 반면에 이러한 비과학적이고 불평등한 역사적 상황을, 한국 천주교회가 극복해갔다고 파악하였다. 곧 달레의 호교론도 이어받고 있다. 서구 지향 근대화로 조국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슬로건은 1960~1970년대 국가적 표방인데, 유홍렬은 이를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하여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유홍렬의 사고는 너무 단순하고 자의적이지만, 사목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오늘날까지 폭넓은 이해를 받고 상당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 역사학은 크고 작은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를 구성체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통합하여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홍렬의 역사학은 이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 Yoo Hong-youl had lived as a historian all the time, excellent educrat and activist of Catholic lay apostolate, too. His study of Korean history had started trying to follow up Korean Neo-Confucianism society, and boiled down to total understanding of the Catholic Church of Korea. Dallet had wrote a history of the Evangelization and of the martyrdom in Chosun Dynasty, using mainly French sources. In contrast, Yoo had wrote about the Catholic Church history within the Korean society, and made up for the chronicles of Chosun Dynasty which is past Korea, and the historical data of the Dynasty, using mainly Korean sources. Above all, Yoo's Catholic Church research has more perfect and much more historical sources than before. Scrappy remains and feeds the research a daunting, his trying to back up a little more on the history of the Church. Sometimes we can find a few mistakes in this research because it is pioneer writing. Next, he said the newly uncovered and organized them in his research with the theory of modernization and the theory of autonomous development. Chosun Christians accept Catholicism spontaneously and propagate to their nation, so Chosun society had had a big impact directly and developed into a modern Western society. Chosun Christians fell into the Catholic ideas and directly could get the Western modernism without distinguishing the modern humanism or the empirical-scientific way of thinking from the Catholicism. This is probably a lot of error. Eventually, Yoo thought that Neo-Confucianism was the bar for the people to become courteous believers in Catholicism. He thought Chosun Catholic Church had overcome these non-scientific and historical situation of inequality. So, he succeeded to the Dallet's apologetics. The modernization of the Western-oriented slogan was a national promotion in 1960~1970'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motherland, Yoo had showed that situation throughout the Catholic History of Korea. These Yoo's attitudes could be so simple and arbitrary, but because of its pastoral needs and public needs, Korean Catholic accept and support it significantly until this day. However, modern history aims not at clarifying great and small causes and effects but at examining and explaining the result of a structural or a social organic integration. This could be filling up the shortage of Yoo's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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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최선혜(Choi, Seon Hye)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敎會史硏究 Vol.0 No.49

            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 천주교회와 미국 천주교회의 교류를 검토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있다. 유럽의 천주교회와 달리 미국 천주교회는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외방 선교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를 창설(1911)하였고, 한국 천주교회는 메리놀회 창설 직후 부터 교류를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무엇보다 아시아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였으며, 한국은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영성이 일어나는 준비된 선교지임을 강조하였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더욱 절박하게 미국 천주교회가 선교지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되기를 촉구하였다. 메리놀회는 외방 선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청에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창설자 월시 총장은 선교사 파견을 위한 초석으로 아시아 천주교회 순방길에 올랐고, 직접 진출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여정에서의 경험을 담아 여러 출판물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고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의 전기도 출간하며 한국 교회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의 압박에도 시달리고 있음을 전하며 일본 정부가 일본과 한국 모두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천주교인이 되는 것과 관련해 한국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이며, 교묘하게 자행되는 일본 정부의 그리스도교 압박으로 개종자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메리놀회도 이러한 요청에 적극 반응하며 한국에 진출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집중해 다루었다. 마침내 교황청은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메리놀회는 순교자의 나라인 한국은 메리놀에게도 감동적인 곳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회를 향한 선교의 책임과 당위성에 대한 호소, 아시아 선교를 목표로 한 미국 외방선교회의 적극적 호응, 이에 대한 교황청의 후원과 승인으로 마침내 미국 천주교회의 한국 진출은 이루어졌다. The goal of this research i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orean Catholic Church and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Catholic Church in Asia, there had never been a direct exchange with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Only after the 20th Century did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begin leading foreign missionary work. After the mid-19th Century, Fr. Walsh, Fr. Price, and Mother Mary Joseph Rogers founded 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Maryknoll) with the aim of creating mission in Asia. The Korean Catholic Church hoped that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would realize its responsibility in foreign missions, and wanted it to recover it's reputation by realizing that the United States was the only country with Protestantism, and prejudiced as a country known only for its money. Maryknoll responded genuinely to the Korean Catholic Church's request regarding foreign missions. As a cornerstone for sending missionaries, Superior General Fr. Walsh visited Korea where he discussed making advances in Korea. By publishing a magazine and Korea-related books, the history and circumstance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which transpired out of persecution and martyrdom were introduced, and garnered further interest and attention about the Korean Church. Ultimately, the Vatican officially allowed Maryknoll a mission in Korea. The responsibility and duty of the American Catholic Church's missionary work, the active response to create Asian missions by 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and the Vatican's support and approval is subsequently what brought about the entrance of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in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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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련옥략셜》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조현범(Cho, Hyeon-Beom)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敎會史硏究 Vol.0 No.50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는 《련옥략셜》이라는 한글 필사본 하나가 소장되어 있다. 그 서지사항을 보면 저자 불명으로 나와 있다. 누가 그리고 언제 이 필사본을 만들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는 《련옥략셜》과 함께 한문본《연옥약설》(煉獄略說)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련옥략셜》은 한문본의 번역임을 알 수 있다. 본고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한문본 《연옥약설》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였다. 1871년에 처음 간행된 한문본 《연옥약설》에는 중국인 예수회원 이문어(李問漁, 1840~1911) 신부가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862년 5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87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따라서 한문본 《연옥약설》은 그가 사제로 서품되기 직전에 집필 간행되었다. 《연옥약설》은 총 8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편의 제목과 세부 장절을 보면, 연옥 교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주제별로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각 편의 세부 장절 아래에 연옥 관련 예화들을 고적(故迹)이라는 제명으로 한두 편을 실어 놓았다. 그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인데, 단 두 편만이 중국의 예화들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된 《련옥략셜》에 대한 기록은 모리스 쿠랑의 저서 《한국서지》에 처음 등장한다. 쿠랑이 제시한 서지 사항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는 쿠랑의 저서가 《련옥략셜》의 존재가 처음 기록된 자료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쿠랑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1892년 이전에 《련옥략셜》이 주교관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한문을 잘 아는 조선인 신자가 프랑스인 사제나 주교의 감독 아래에 교회의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번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한문본 《연옥약설》이 조선인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점이 많다고 판단하여 조선에서도 이를 번역 간행할 의향을 갖고 준비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련옥략셜》의 인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A Korean manuscript about purgatory is owned in the library of the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RFKCH). It's title is Ryeon-Ok-Ryak-Syeol which means an outline of purgatory. In bibliographic data there is written of unknown authorship. Who made this manuscript? And when? The library has no information about it. In which locus was it stayed before registration into the storage of the library of the RFKCH? What is the first record about the document which is at issue here? To put it briefly, when was born the RORS, where it has lived, and finally to exist in now and there? Fortunately we have one clue to the mystery of our manuscript. That is, the library retains a chinese book with the same name. Regarding that it is the original version of the Korean manuscript, we undertook the task for discovering the curriculum vitae of the RORS. The Chinese book, Lien Yu Lio Choe(煉獄略說) which was published in 1871 by the young Chinese jesuit, Fr. Li Wen Yu (李問漁, 1840~1911) could be estimated for the mother of the RORS. The LYLC consists of eight chapters which gathered, classified and disposed logically all the teachings and arguments about the doctrine of purgatory. Specially we could find two or three stories which are titled ‘Old Story' in the end of each chapter. As European Catholic fables or legends, they are passed down from the medieval era, even dated to the ancient era. Therefore, we could find out a kind of imaginative world-making and describing the life after death in the Western societies, and examine the adequacy of the application of the same scheme to the East Asian societies. Now let us turn to the Korean case. In the book of Maurice Courant, french diplomat and author, Bibliographie Coréenne, there is the first record of the RORS. Its bibliographical information has an accurate consistency with the formal character of the manuscript of the library. So evidently the RORS was deposited in the library of french bishop of Vicariate Apostolic of Joseon before the year of 1892. Moreover we incline to the suggestion that an anonymous Korean layman who was so intelligent as to translate Chinese literature to Korean, did it for the ecclesiastical purpose under the direction of French bishop or priest. But the RORS was not published for the unknown motive, left the only manuscript to sit crouched on the worn-out bookshelf, waiting for the eyes of researc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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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에 대한 논쟁 : 그 교회사적 의미와 신학적 전망

            박준양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20 敎會史硏究 Vol.0 No.56

            Concerns over the Legion of Mary Promise have been raised recently within the Catholic Church of Korea, prompting the CBCK Committee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to officially address the issue. After due consideration, the Committee issued a letter to the three regional Senatus of Korea and expressed concerns over the questionable language found in the second paragraph of the Legion Promise. The letter was then sent to the International Centre of the Legion of Mary (Concilium Legionis Mariae), after which the Committee received a response containing a reflection prepared by Fr. Bede McGregor, the spiritual director of the Concilium. Fr. McGregor's reflection asserts that the Legion Promise does not raise theological concerns, as the Promise draws primarily from the writings of St. Louis-Marie Grignion de Montfort. According to Fr. McGregor's reflection, the Committee's concerns stem from its failure to acknowledge Mary as ‘Co-Redemptrix' and ‘Mediatrix of all graces.' The reflection goes on to emphasize how the key notion contained in the Legion Promise is that the “Holy Spirit could hand over the entire conduct of affairs to Mary.” In response, the Committee has issued a response paper rebutting the theological positions of Fr. McGregor's reflection. Turning to the teachings of the Magisterium of the Catholic Church articulated in Letters of St. Pope John Paul II to the Montfort Religious Family in 1997 and in 2003, the Committee's response paper reiterates the late Pontiff's claim that there is “no doubt certain changes in the language seem imperative,” given that St. Louis-Marie's style can “surprise our contemporaries.” For this reason, the Committee contends that St. Louis-Marie's words need to be reinterpreted in light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Chapter 8 of Lumen Gentium in particular, to conform to the Council's teachings on Marian theology. The Committee echoes the Magisterium's position that the role of Mary is subordinate to the unique and universal mediation of Jesus Christ, which clearly establishes “Mary's total relativity to Christ and through him, the Blessed Trinity.” The Committee then ties these principles to St. Louis-Marie's own words that “Mary only exists with reference to God” and is “the echo of God.” The Committee's response paper concludes by underlining that its “major concern is to protect the many good faithful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from possible confusion or embarrassment caused by some ambiguous expressions of the Legion Promise.” The Concilium has yet to issue a statement in response to the Committee's response paper. The recent debate surrounding the Legion Promise invites the Catholic Church of Korea to realize the continuing need to reformulate her faith in the spirit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As part of this mission to engage in constant ecclesial and theological renewal, the Catholic Church of Korea is especially being called to reformul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ly Spirit and Mary through theological reflections on popular piety. In addition to such a theological perspective, the debate also carries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Committee and the Concilium was initiated by concerns raised by theologians within the Korean Catholic Church together with its official assembly of bishops, which is significant given that the Korean faithful were first introduced to the Legion of Mary through the churches of Europe. This marks a significant point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Church, as it has undertaken the task of reinterpreting and shedding new light on the fundamental principles and theological foundations of the Legion of Mary which originated in the West predating the Second Vatican Council. The once nascent Korean Catholic Church that received the seed of the Gospel from the Western world is now contributing to the theological developments in the West, perhaps sign... 최근 한국 교회에서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고,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래서 선서문의 두 번째 단락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서한을 한국의 3대 세나투스에 보냈고, 이것이 레지오 마리애 세계본부(콘칠리움)에 전달되었다. 콘칠리움은 영적 지도자 비드 맥그리거 신부의 의견서를 첨부해 답변 서한을 보내왔다. 여기에서, 선서문의 내용은 주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의 저서 내용이 반영된 것이며, 그 신학적 입장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앙교리위원회의 문제 제기는 성모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이며 ‘모든 은총의 중개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모든 것에 대한 운영을 넘겨주실 수 있다.”는 것이 선서문의 요점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신앙교리위원회는 맥그리거 신부의 의견서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해 신학적으로 반박하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 답변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몽포르의 수도 가족들에게 보낸 1997년과 2003년의 서한에 나타난 교도권적 가르침에 근거해, 성 루도비코의 문체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당황스러울 수 있기에 언어적 표현에서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따라서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제8장의 내용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리아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개에 종속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되신 삼위일체에 대한 마리아의 전적인 상대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임을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 루도비코의 말을 직접 인용해, 마리아는 “오로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기에 곧 “하느님의 메아리”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 구속자'나 ‘모든 은총의 중개자'라는 명칭은 적합하지 않고, 마리아의 역할은 참여적 중개임을 밝힌다. 레지오 마리애 운동이 활발한 한국에서 많은 선의의 신자들이 선서문에 나온 일부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더 이상 혼란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교리위원회의 관심임을 밝히면서, 앞으로 이에 대한 신학적 교육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하며 답변서는 마무리된다. 이후 지금까지, 이에 대한 콘칠리움의 의견 표명은 없다. 이러한 선서문 논쟁은, 공의회의 정신으로 성찰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한국 교회 안에 남아 있다는 자각을 통해, 지속적인 교회적·신학적 쇄신의 과제에로 연결된다. 그리고 대중 신심에 대한 신학적 탐구를 통해 성령과 마리아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 작업을 해야 할 과제를 남겨주었다. 이 논쟁은, 한국 교회의 현대사 안에서 서구로부터 도입된 레지오 마리애의 선서문에 대해 한국 지역 교회의 신학자들과 공식 기관에 의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지닌다. 즉, 공의회 이전 유럽에서 시작된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정신과 영성을 신학적으로 새로이 조명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한국 교회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서구 교회로부터 복음이 전해졌던 한국 교회에서, 이제는 역으로, 신학적 차원에서 서구 교회에 공헌하고 기여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교회사적 전환을 암시하기도 한다.

          • KCI등재

            파리 외방전교회의 19세기 한국어문법 문헌 간 영향 관계 분석 −Grammaire coréenne(인쇄본), Grammaire coréenne(육필본),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의 비교−

            윤애선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5

            The French missionaries of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hereafter SMEP) who entered Korea in the early 19th century represented by F. Ridel published Grammaire coréenne (hereafter GCI) in 1881 (Yokohama, Japan), a qualified and voluminous Korean grammar book as well as the well-known Korean-French bilingual dictionary. In France, Ch. Dallet wrote a brief section on Korean grammar entitled as “La langue coréenne” in his book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hereafter HEC) published in 1874 (Paris, France). Most of Korean grammar history scholars did not pay attention to their interrelation, or sometimes erroneous arguments have been formulated : HEC is a simple summary of a previous version of GCI. The author of this article (hereafter, I) found two manuscripts of GCI : GCM-1 in 2012 and GCM-X in 2013, With a close examination on the interrelation of the four texts, this paper demonstrated their close relationship which was wrongly described in the history of Korean grammar, and the analysis reinforced my arguments of the previous paper in 2013. I could conclude, in this article : (1) that GCM-X is a following version of GCM-1 ; (2) that based on errors in Korean examples and long and complicated Korean sentences found in HEC of which the author could not formulate Korean language, it was GCM-1, not GCM-X, which provided HEC with a variety of descriptions on Korean language ; (3) that, however, the description of GCI on syntactic structure was influenced greatly by the comprehensive view and integrated knowledge of Ch. Dallet, as a general linguist who has acquired already rich experiences in analyzing ‘exotic oriental' languages such as Tamil. In conclusion, these are strong evidences that HEC was not mono-directionally influenced by GCI/ GCM, but that HEC and GCI/GCM have influenced mutually in bi-directional ways : GCI/GCM provided HEC with raw data and detailed descrition of Korean language ; GCI/ GCM owe expert knowledge especially on syntactic structure and language classification to HEC.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한국어 사전과 문법서 편찬에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들의 인쇄된 한국어 문법서 Grammaire coréenne(1881년 인쇄본, 이하 GCI)과 Histoire del'église de Corée의 서론 7장 “La langue coréenne”(1874년, 이하 HEC)에 대한 연구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어 문법서 간 상호 영향 관계에 대해 미처 분석되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았다. 즉 이들은 HEC가 GCI의 초고를 요약했다는 것이다. 본 논문의 저자는 리델의 GCI의 초고인 두 편의 육필본(GCM-1, GCM-X)을 파리 문서고에서 찾아 최초로 면밀하게 분석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GCI 및 달레의 HEC와의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명하면서, GCM-1만 발견되었던 2013년의 선행 연구에서 제기한 주장에 더욱 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첫째, GCM-X는 GCM-1의 후속본이다. 둘째, 한국어를 잘 알지 못하는 달레의 HEC에 수록된 오류 예문과 긴 예문을 근거로 볼 때, HEC의 참조본은 GCM-X가 아닌 GCM-1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달레는 인도 지역의 다양한 언어의 사전 및 문법서도 집필했는데, HEC에 수록된 한국어 통사 구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표현이 그가 집필한 타밀어 문법서 초본 등에도 나타난다. 이는 HEC와 GCI에 동시에 나타난 한국어에 대한 통합적인 기술은 달레의 것임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HEC가 GCI/GCM으로부터 일방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영향 관계가 있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GCI/GCM은 HEC에 한국어 원자료와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 반면, HEC는 GCI/GCM에 통사 구조에 관한 전문적인 언어학적 지식과 함께 한국어 계통 분류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 KCI등재

            고등학교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 서술

            김아네스(Kim Agnes)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敎會史硏究 Vol.0 No.36

            This paper aims at critically exploring the descriptions of Korean Catholic history in high school Korean history textbooks. The study examined textbooks currently used in high schools, which include National History(Guksa),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Hanguk Geunhyeondaesa), and Korean History (Hanguksa). The study analyzes the formats and the contents of the textbooks, points out the problems in the description of the Korean Catholic history and presents suggestions for improvement. In terms of formats, Catholicism was rarely selected as a topic, and the description on Catholic was minimal. National History(Guksa) selected ‘propagation of Catholic' in late Joseon era as a sub-topic.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Hanguk Geunhyeondaesa) and Korean History(Hanguksa) described on the acceptance of Catholic and persecution under the sub-topic of social transformation in late Joseon era. In the modern history chapter, Korean history textbooks rarely dealt with religions including Catholic. Textbooks should provide more description on the achievements of Catholic churches. For example, in late Joseon Catholic churches criticized Confucius social order, and in modern history Catholic churches contributed to the democratization of the nation. Chronologically, Korean history textbooks described on the acceptance of and persecution on Catholic churches in late 18th century. In describing early catholic history, current textbooks did not give weight to the catholic catechism and the significance of establishing churches volunteered by parishioners in the absence of missionaries. The textbooks should supplement such contents as catechism that early catholic believers accepted and the significance of their worship. They should also present the ideological and socio-political perspectives by explaining the reason why Joseon government persecuted Catholic churches and examining the factors that affected the spread of Catholicism despite the persecution. In the modem history chapter, textbooks described that Catholic institutions took the lead in providing the social welfare services by running orphanages and convalescent homes. The books also mentioned that Catholic institutions established schools and published newspapers, therefore, contributed in enlightening the people. In the Japanese colonial times chapter, the textbooks described that Catholic churches continued to provide the welfare services and participated in national in dependence movements. They also give light to the Catholic parishioners in Manchuria who organized Uimindan and pioneered in anti-Japanese movement. In terms of contemporary history, a couple of textbooks described major Catholic commemorative events and social welfare services. Pro-Japanese activities or corruption by religious figures were rarely mentioned in the textbooks. In the future, the textbooks should present balanced point of view by describing both contributions and the problems of the Catholic churches in the Korean history.

          • KCI등재

            한국 천주교회 전교회장의 활동과 의의 : 1923~1950 −평양교구 유급(有給) 전교회장을 중심으로−

            최선혜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敎會史硏究 Vol.0 No.51

            This article examined the role and significance of a paid Catechists in Diocese of the Modern Korean Catholic Church. Through this study, I tried to reveal the development and maturity of Korean Catholic Church after freedom of religion. The paid Catechists were a profession dedicated to missionary work with a newly established salaried position since the early 1920s. The Diocesan Bishop and Provost had the authority to appoint and dismiss Catechists. The Paid Catechists had no fixed term but a lifelong commitment. They was selected through a test among Korean aspirants, and studied doctrine, wrote articles, were tested and were finally appointed under the guidance of a parish Priest. They taught doctrines, gave lectures, worked on general missionary activities and especially engaged in missionary work through publishing. The fact that the number of paid Catechists in Diocese of Pyongyang increased indicates that their activities have been successful. Their active and devoted activities involved literary missions, touring lectures, and doctrinal lectures. The Korean Catholic Church's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revealed through their activities was a more mature one. The values and perspectives of patients, who are marginalized in society, were greatly changed. The church has portrayed the patient as an active missionary. The perspective of looking at women has also changed so much that they looked upon women as apostles who preach the gospel. The church also paid much attention to the children. The children are the protagonists of evangelization movement and the church emphasized that they are like weapons to reform Korea into national evangelization. This is why the church has paid attention to catechetical education, especially for children, with paid Catechists. Under the guidance of the parish Father with professional and systematic training, a paid Catechists who worked in the field of mission through catechetical education, lecture, and publishing were the motive power of the mature change and qualitative growth of Korean Catholic church. 회장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부터 준(準)성직자라고 할 정도로 교회 발전의 토양이었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 회장을 추적하는 작업에 이 글은 각별히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회장에 주목하였다.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 들어와 새로이 설치 · 운영된 유급의 직분으로 전교사무에 집중한 전문적 인력이었다. 이들은 다른 회장과 달리 보수를 받는 직분이었다. 유급으로 본당 신부의 지휘에 따라 전교와 교리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대세를 줄 의무가 있었다. 정해진 임기가 있기 보다는 ‘평생' 헌신이 기본 원칙이었고, 한국인 지망생 가운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선발자들은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 공부와 논문을 작성하고,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임명되었다. 유급 전교회장은 문서선교 · 순회강연 · 교리강습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한국 천주교회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한층 성숙한 것이었다.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이념의 추구나 도덕의 실현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나 의미가 소외되었던 환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져, 환자 역시 주체적인 전교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대우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정 안에서 여성(딸, 누이, 아내 등)을 복음의 사도로 세워주었다. 교회는 어린이에 대해서도 매우 주목하였다. 어린이야말로 복음화의 주인공이며 한국을 복음으로 개혁할 무기와도 같은 존재로 강조하였다. 교회가 유급 전교회장에게 특히 어린이를 향한 교리교육에 주목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전문적 훈련을 거치고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교육과 강연, 출판 등을 통한 선교의 현장에서 헌신적 활동을 전개한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한 변화와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낸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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