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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의 알베르 사맹(Albert Samain) 시 번역을 다시 읽는다
구인모(Ku, In mo) 동악어문학회 2018 동악어문학 Vol.75 No.-
이 글의 목적은 근대기 한국에서 운문 양식의 글쓰기가 형성되던 과정에 번역, 특히 일본어로부터의 중역이 중요한 동력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1/1923) 소재 「싸멘의 詩」장에 주목했다. 그리고 신문학 초기 근대적 문학어, 시성·시정(poésie)의 고안 과정에 서구시의 일본어 번역으로부터의 중역이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입증했다. 이를 위해 이글은 우선 김억의 알베르 사맹 시 중역의 저본이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의 『어제의 꽃(昨日の花)』(1918)과 고바야시 아이유(小林愛雄)의 『현대만엽집(現代萬葉集)』(1916)이었음을 밝혀냈다. 또한 김억의 중역이 일본어 번역시에 자신의 해석과 언어감각을 투영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김억의 중역이란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 등 이질적인 타자의 언어들의 적층과 혼종의 결과이며, 김억의 『오뇌의 무도』가 신문학 초창기 운문양식의 글쓰기의 전범이었다면, 그러한 근대기 한국의 문학어, 시성·시정의 고안 또한 그러한 적층과 혼종의 결과임을 밝혀냈다. 아울러 김억이 자신의 중역, 모방을 일관되게 직접번역이라고 역설했던 배경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리고 그러한 김억의 입장이란 사실 서구의 근대문학, 근대(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 강박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This Article presents the results of rereading Kim Eok"s translations of poems by Albert Samain (France, 1858~1900) in his The Dance of Agony (1921/1923).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emonstrate that translation, especially relay translation from Japanese, was important driving force in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writings in the verse form during the modern times in Korea. For this purpose, This article first examined the backgrounds of Kim Eok"s translations of Albert Samain"s poems and shed light on the mechanism of his translations and its significance. It especially found that Kim Eok"s translations of Albert Samain"s poems were based on the relay translation of two anthologies, Horiguchi Daigaku (Japan, 1892~1981)"s The Yesterday’s flower (1918) and Kobayshi Aiyou (Japan, 1881~1945)"s The Modern collection of ten thousand leaves (1916). As well as this article shed light on the styles in which Kim Eok projected his own interpretations and linguistic senses onto the vocabulary and rhetoric of the translated poems. It then showed the circumstances in which that relay translations from Japanese texts were not only a means of accepting the world literature, but also an opportunity to discover and devise the Joseon language as a literary language, modern literariness to Kim Eok. The special focus was on the fact that the texts of the translated poems that were creative classics to Kim Eok were indeed the laminated products of heterogeneous languages. This article demonstrated that the writing in the verse form during the modern times in Korea derived from these laminated products. It also focused on the background in which Kim Eok consistently highlighted that his relay translations and imitations were direct translations. Kim Eok made the argument out of his intense desire and obsession for the modern literature and modernity of the West.
근대기 문학어의 고안과 중역(重譯) : 베를렌 시 번역을 둘러싼 논란과 함의에 대하여
구인모 ( Ku In-mo ) 한국문학연구학회 2018 현대문학의 연구 Vol.0 No.64
이글의 목적은 근대기 한국에서 운문 양식의 글쓰기가 형성되던 과정에 번역, 특히 일본어로부터의 중역이 중요한 동력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김억이 번역한 베를렌(Paul-Marie Verlaine)의 시 < 검고 □업는 잠(Un grand sommeil noir) >이 노자영 등 동시대 문학청년들에 의해 모방되고 표절되기도 했던 사정, 그리고 김억의 창작을 추동했던 사정에 주목했다. 특히 글쓰기 주체로서 이들이 자신의 특별한 정서, 정조를 운문 양식으로 재현할 수 없는 곤경에서 번역시의 어휘, 수사에 자기 다름의 해석, 언어적 감각의 투사를 거쳐 그것을 전유했던 양식들을 규명했다. 한편 김억의 베를렌 시 번역이 사실은 프랑스어 원전이 아닌 영역시집, 일본어 번역시집으로부터의 중역이었던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김억과 노자영 등에게 창작의 전범이었던 번역시의 텍스트가 이질적인 언어들의 적층물이었던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러한 적층물을 토대로 근대기 한국의 운문 양식의 글쓰기가 비롯했음을 규명했다. 아울러 김억과 노자영 등이 자신의 중역, 모방을 일관되게 직접번역이라고 역설했던 배경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특히 김억의 경우, 그것이 서구의 근대문학, 근대(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 강박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demonstrate that translation, especially relay translation from Japanese, was important driving force in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writings in the verse form during the modern times in Korea. For this purpose, This article focused on the circumstances in which “Un grand sommeil noir” by Paul-Marie Verlaine translated into Korean by Kim Eok was imitated and plagiarized by his contemporary literary youths including Noh Ja-yeong and facilitated his creative efforts. They had a difficult time reproducing their special emotions and feelings in the verse form as the writing subjects. This article shed light on the styles in which they projected their own interpretations and linguistic senses onto the vocabulary and rhetoric of the translated poems and had them to themselves. This article also focused on the fact that Kim Eok translated poems by Paul-Marie Verlaine not based on their original French texts but on their relay translations from English and Japanese poetry books. The special focus was on the fact that the texts of the translated poems that were creative classics to Kim Eok and Noh Ja-yeong were indeed the laminated products of heterogeneous languages. This article demonstrated that the writing in the verse form during the modern times in Korea derived from these laminated products. It also focused on the background in which Kim Eok and Noh Ja-yeong consistently highlighted that their relay translations and imitations were direct translations. Kim Eok made the argument out of his intense desire and obsession for the modern literature and modernity of the West.
구인모 ( In Mo Ku ) 한국문학연구학회 2016 현대문학의 연구 Vol.0 No.58
이 글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근대문학연구의 모험들과 문제의 식들 가운데 번역연구가 아직도 고유한 범주로서는 온전히 정위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리고 번역연구라는 시좌를 통해 한국근대문학연구가 미루어 온, 혹은 아직 다다르지 못한 과제들을 다시 환기하기 위한 질문을 제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번역연구가 숱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근대기 한국의 번역과 문학에 대한 총론의 부재, 문헌학적연구 풍토의 불비에 따른 연구의 곤란, 비교문학론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 번역을 둘러싼 인식론적 사유의 빈곤 속에서 난관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번역연구가 이러한 난관들을 극복하고 한국근대문학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근대기 한국에서 이루어진 번역을 둘러싼 에피스테메이자, ‘언어-문화’의 지평을 탐색하고 조망하는 일이다. 한편 이 글은 한국근대문학 또한 자신의 타자(들)와의 대화 속에서 한국, 근대, 문학을 사유하고 논변할 것을, 그 가운데에 세계문학은 물론 자국문학마저도 타자로 치환하는 상대주의적 사유와 윤리적 자세에 철저히 기반할 것을 요청한다. 특히 이러한 사유와 자세가 바로 새로운 비교문학론의 과제임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번역연구의 소명이자 보람임을 제시한다. This study was conceived by a question about why translation research, one of the adventures and problematic perceptions in the field of literature study in modern Korea since the 1990s, had not been established fully as a unique category. The study focused on arousing once again the attention to the tasks that had been postponed or not fulfilled in the literature study of modern Korea from the perspective of translation research. In the 1990s, the translation research of Korea faced complex difficulties that were as various as its achievements. They included the absence of general theories about translation and literature in modern Korea, difficulties with conducting research due to no climate for bibliographical research, deep-rooted doubt about the comparative literature theory, and lack of epistemological thinking about translation. The present study proposed tasks for translation research to overcome those obstacles and make a contribution to the literature study of modern Korea, exploring and shedding light on what was episteme around translations in modern Korea and the horizon of "language-literature." It also proposed the tasks forgotten in the literature study of modern Korea since the 1990s on the thorough basis of relativistic thinking and ethical attitude for modern Korean literature to replace both world literature and its own literature with others. It thus explained that such thinking and attitude were new tasks for the comparative literature theory and proposed that implementing the tasks should be a calling and reward of translation research.
구인모(Ku, In-Mo) 한국시학회 2021 한국시학연구 Vol.- No.67
김억은 1916년 에스페란토를 습득한 후 1919년부터는 에스페란토 시를 번역했고, 1921년부터는 에스페란토 관련 논설을 본격적으로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김억은 프랑스어와 영어 학습, 그 문학의 수용에 대한 절망을 드러내는 한편으로, 에스페란토 문학 대 자국어문학이라는 다른 세계문학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김억의 에스페란토 시 창작과 번역이란 프랑스·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의 세계문학을 상대화하는 일이자, 그것을 초월하는 다른 세계문학의 공간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억은 에로셴코의 시를 번역하면서 일본어 대역문까지 저본으로 삼아 중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조선어와 에스페란토란 일본어, 심지어 영어까지 매개로 한 복잡한 중역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김억에게 에스페란토 시 번역이든, 창작이든 제국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김억은 이러한 사정을 인식하지 못했고, 『오뇌의 무도』(1921) 발표 직후에는 그것이 일본어 번역시로부터의 중역임을 은폐하기 위해 에스페란토와 그 문학을 알리바이로 삼기도 했다. 그것은 김억이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문학의 중심과의 동시성, 그 중심을 향한 욕망을 부상하는 인공어 에스페란토와 실험적 문학에 투사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Kim Eok studied Esperanto in Tokyo, Japan in 1916, translated poems written in Esperanto in 1919, and published his editorials about Esperanto in full scale in 1921. In this process, he displayed his despair with his study of French and English and acceptance of French and English literature and proposed a vision of world literature, Esperanto literature vs. vernacular literature. For him, the creation and translation of poems in Esperanto were to relativize the world literature of Western Europe around France and the U.K. and participate in the space of other world literature that transcended it. Translating poems of Vasili Eroshenko, however, he was forced into double translation based on the original scripts of their translations in Japanese. In those days, there were complicated double translation relations between Korean and Esperanto via Japanese and even English. Moreover,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translate or create Esperanto poems without resorting to the Esperantisto of Imperial Japan. However, he had no idea of this situation. He even used Esperanto as his alibi to cover up the fact that his The Dance of Agony was an outcome of his double translation of Japanese versions. This means that he projected himself onto the central and simultaneous nature of world literature including France and the U.K., the artificial language Esperanto as his desire emerging toward the center, and its experimental literature.
사실의 낭만화, 욕망의 팰럼시스트(palimpsest)
구인모 ( Ku In-mo ) 국제어문학회 ( 구 국제어문학연구회 ) 2013 국제어문 Vol.59 No.-
이 논문은 1932년 김갑순과 노병운의 자살 사건이 신문의 기사, 유성기음반(SP record)의 대중서사 등으로 파생되었던 현상과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당시 이 사건은 사실과 무관하게 픽션의 서사들로 재구성되고, 대중적인 문화상품으로 소비되었다. 실제의 사건을 다양한 서사들로 만들어낸 동력은 당시 여급에 대한 엘리트 남성글쓰기 주체의 관음증적 시선, 낭만적 연애에 대한 대중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의 형성 과정에서 근대의 번역어로서 연애의 개념은 확장되고 변용된다. 김갑순과 노병운의 자살 사건 관련 서사들은 근대기 한국의 공론장 혹은 문화장에서 사실이 다양한 발화주체의 서사적 실천에 의해 의미가 규정되고, 그것이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독특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드러낸다. 특히 이 사건과 관련 서사들은 1930년대 이후 카페 여급과 지식인의 연애를 모티프로 한 서사들의 원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과 관련 서사들은 인간의 행동을 전체로 조직하는 의미 구조로서 서사의 본질적 국면을 훌륭히 드러내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phenomenon and its significance that the suicide issue of Gim, Gap-sun and Noh, Byeong-un in 1932 had been derived to the newspaper article and the popular narrative in SP record. In those days, this issue was reconstructed with narratives in fiction regardless of a fact and was consumed as popular cultural product. The driving power, which made actual case as diverse narratives, include a voyeurism-based sight in the main agent of elite man`s writing on waitress at that time and a popular desire for romantic love. Added to this a concept of love as the modernly translated language in the process of being formed this narrative is expanded and modified. Narratives related to the suicide issue of Gim, Gap-sun and Noh, Byeong-un reveal unique communication structure that a fact is prescribed a meaning by narrative practice in various utterance subjects in the public sphere or cultural sphere of Korea in the modern period and that it is consumed as cultural product. Especially, the narratives related to this case are also the prototype of narratives of having a motive as love between cafe waitress and intellect following the 1930s. In particular, the narratives related to this case have important significance in a sense of being a case, which excellently reveals the essential aspect of narrative as semantic structure of giving totality to a human being`s behavior.
구인모(Ku, In-mo)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한국학연구 Vol.46 No.-
이 논문은 근대기 한국에서 변사가 영화설명과 영화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종 서사를 음반에 취입했던 사정을 통해 문화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영화의 서사보다도 변사의 구연자체가 관객 혹은 청취자로부터 더 큰 환영을 받았던 현상, 조선에서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영화설명 혹은 영화극 장르 음반으로 취입되었던 사례, 영화가 아닌 서사가 영화설명이라는 장르로 음반에 취입되었던 과정등을 다면적으로 검토한다. 그리하여 근대기 한국에서 영화와 그 서사의 독특한 존재 양상은 물론, 풍설과 신빙성 낮은 회고로만 전하는 변사의 위상과 역할을 재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와 그 서사가 변사에 의해 영화관 안팎에서 구연되고 청취되었던 가운데 형성된 새로운 차원의 문자성 혹은 구술성의 복잡한 양상들을 통해 근대문화 혹은 근대성의 특징적인 국면을 규명할 것이다. 나아가 영화라는 근대적인 대중매체 혹은 대중서사의 (재)생산·소비·유통을 둘러싼 근대기 한국의 문화장의 독특한 의사소통의 구조 또한 조망하고자 한다. This investigation aimed at finding a new possibility in modern Korean culture research by examining the sales of records in the genres of film narration and kino dramas that demonstrated the vivid voice of silent-film narrators in the modern period of Korea and how they made records of not only film narration and kino dramas but also various heterodiegetic. It especially tried to explore from various aspects the phenomenon where the narrations of Byeonsa(or Benshi, silent film narrators) had more influence on audience or listeners than the narratives of films, cases in which films that had not been released were made in records in the genres of film narration and kino dramas, and the process that narratives, not films, were made in records in the genre of film narration. The study, therefore, restructured not only films and their narratives but also the status and roles of Byeonsa which had been known only through unfounded reports and not very convincing remembrance. Through this, it looked into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Korean culture by examining the complicated aspects of non-conventional literary and oral culture which had been formed through the performance of Byeonsa inside and outside of cinemas. Furthermore, it also explored the unique structure of communications in the cultural site of the modern Korea regarding the (re)production, consumption and distribution of films, one of the modern mass media forms or popular narratives.
구인모(Ku, In-Mo)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5 코기토 Vol.- No.78
김억은 서구 근대시, 상징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영국 시인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 1865~1945)의 『Poems』(1901?1906)를 번역하여 『잃어진 진주』(1924)를 발간했다. 이것은 김억의 ‘상징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저작이라는 점, 근대기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아서 시먼스의 번역 시집이라는 점, 이 번역시집의 서문이 김억의 근대시와 번역에 대한 입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김억이 서문에서 역설한 ‘창작적 번역’은 그가 서구 근대시, 상징주의와 직접 대면하여 조선의 근대시를 창안안 방법으로서 평가 받아 왔다. 하지만 김억이 영국의 아서 시먼스를 번역한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는 지금껏 온전히 규명되지 못했다. 사실 김억은 구리야가와 하쿠손(?川白村)의 문학론, 이와노 호메이(岩野泡鳴)의 문학론과 번역을 통해 상징주의를 이해했고 아서 시먼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야노 호진(矢野峰人)의 아서 시먼스 시 번역에 의존하여 『잃어진 진주』를 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노 호진을 통한 아서 시먼스 시의 번역 경험은 김억의 시 창작 과정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것은 비서구 식민지인 조선의 번역가, 시인으로서 김억이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아서 시먼스 번역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시, 상징주의와도 직접 대면할 수 없었던 사정을 드러낸다. 김억의 『잃어버린 진주』를 둘러싼 이러한 사정들은 그에게 김억에게 아서 시먼스의 시와 그 번역이, 자국 문학을 구성하고 고안하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아울러 이것은 김억의 ‘창작적 번역’의 의의는 물론 비서구 식민지의 번(중)역을 통한 근대(성)의 경험 혹은 근대시의 체현과 관련하여 새롭게 논변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In an attempt to make a full-blown introduction of modern Western poetry and symbolism, Kim Eok translated Poems(1901, 1906) by Arthur Symons(1865-1945), a British poet, and published The Lost Pearl. The book holds important significance in that it represents his ‘era of symbolism’, that it was the only translation of Symons’ works in modern Korea, and that its preface contained his positions about modern poetry and translation. Highlighted in the preface by him, ‘Creative translation’ has especially evaluated as a method to create the modern poetry of Joseon in his direct encounter with modern Western poetry and symbolism. There has been, however, no clear explanation about the reasons and motives behind his translation of Symons, the British poet. As a matter of fact, it was only after he understood symbolism through the literary theories of Kuriyagawa Hakuson and the literary theories and translations of Iwano H?mei that he discovered Symons. He resorted to the translation of Symons’ works by Yano H?jin when publishing The Lost Pearl. The experiences with translating Symons’ poems through Yano H?jin left profound traces in his process of poetic creation, which reveals the circumstances those days that he, who was a translator and poet of Joseon, a non-Western colony, could not face modern Western poetry and symbolism first-hand as well as the translations of Symons unless they were via Japan. Those circumstances around his The Lost Pearl indicate Symons’ poetry and its translation contained both the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of composing and devising Joseon literature to Kim. It also offers an opportunity to engage in new discussions in relation to the experience or practice of modern times(modernity) through the translation(retranslation) of non-Western colonies as well as the significance of his ‘creative translation’.
『오뇌의 무도』 성립 사정에 대하여 : 초판(1921)을 중심으로
구인모 ( Ku¸ In-mo )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21 한국문학연구 Vol.- No.66
이 글은 근대기 한국의 프랑스 상징주의 수용의 시발점이자 한국근대시의 한 기원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1)의 성립 사정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유학시절(1914.4~1916?) 문학청년 김억은 베를렌, 보들레르는 물론 바이런,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투르게네프 등을 일정한 표준도, 연구도 없이 난독(亂讀)하고 있었다. 그러한 지적 잡거(雜居) 상태에서 김억은 1918년 12월에서 1920년 7월 사이 조선적인 신시 창작의 전범을 프랑스 상징주의 시로 삼은 이후 본격적으로 『오뇌의 무도』 초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억은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이쿠다 쐌게쓰[生田春月] 등의 번역시 사화집들을 주된 저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어 번역시들의 구문을 해체하여 다시 쓰는 방식으로 중역했다. 이 일본어 번역시집들은 우선 1910년대 이후 일본의 이른바 ‘프랑스 심취시대’를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20세기 초 제라르 발치(Gérard Walch), 아돌프 방 비베(Adolphe van Bever)와 폴 리오토(Paul Léautaud)의 프랑스 현대시 사화집의 전세계적 유행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김억의 『오뇌의 무도』는 근대기 한국의 신시가 동시대 일본, 유럽 문학계와 연동(連動) 혹은 동조(同調)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억의 『오뇌의 무도』는 근대기 한국에서도 일본의 ‘프랑스 심취’ 시대를 방불하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베를렌, 보들레르 번역열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사에서 서양의 현대시 번역을 통해 조선의 신시, 혹은 조선적인 근대시 창작의 전범을 삼는 기획의 패턴을 형성한 계기이자 기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뇌의 무도』를 발생론적 기원으로 삼는 한국적인 자유시는 곧 번(중)역의 소산이자, 프랑스와 서양의 현대시가 유럽을 넘어서 동아시아로 확산되던 가운데 일어난 효과이다. 또 『오뇌의 무도』는 단지 한국문학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문학사, 나아가 세계문학사의 한 사건이기도 하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ircumstances around the publication of Kim Eok's The Dance of Agony (1921), which was the starting point of modern Korea’s acceptance of French symbolism and the origin of modern poetry in Korea. Studying at Keio University (April, 1914~1916?), Kim Eok was a literary youth that randomly read works of Byron, Oscar Wilde, and Turgenev as well as Verlaine and Baudelaire without any certain standards and researches. In this mixed residence of intelligence, he decided to find examples of new Joseon-style poems in French symbolist poetry between December 1918 and July 1920. Since then, he began to write the draft of The Dance of Agony in full scale. In the process, he used anthologies of translated poems by Horiguchi Daigaku and Ikuda Shungetsu as his Source texts. He adopted the method of second-hand translation by deconstructing phrases in poems translated in Japanese and rewriting them. These anthologies of poems translated in Japanese appeared in the so-called “era of Japan’s fascination with France” since the 1910s amid the global vogue of anthologies of modern French poems by Gérard Walch, Adolphe van Bever, and Paul Léautaud in the early 20th century. Kim’s The Dance of Agony is an outcome of Korea's new poetry interlocking with the contemporary literary circles of Japan and Europe. It was both the origin of modern Korea's fever with French symbolism and the translation of Verlaine and Baudelaire, which reminded people of Japan’s “infatuation with French” era, and the opportunity and beginning of patterns to find examples of Joseon’s new poetry and Joseon-style modern poetry writing in the translation of modern Western poetry in the literary history of Korea. The Korean-style free verses whose genetic origin was The Dance of Agony were products of translation (second-hand translation) and effects of modern French and Western poems spreading to East Asia beyond Europe. In addition, The Dance of Agony was an event in the literary history of East Asia and further the world as well as the literary history of Korea.
구인모(Ku In-Mo) 한국시학회 2009 한국시학연구 Vol.- No.25
After 1930's Kim, Dong-hwan recorded his seven 'Sokyo' in Sp-records. As he experimented on various form of 'le vers libre', in the strict sense these are not modern poetry. Nevertheless, the reason he wrote such works, is his' own idea of 'Gayo'(popular song) movement. When Kim was a member of KAPF(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 he had a detailed plan for combination of poetry and music, moreover it's popularization. And he willing to realize his idea, after seceded from KAPF and join Chosun Popular song Association, Kim gained an opportunity to realize his idea. The three piece of Sp-records that recorded Kim's works is realization of his idea. But the song composed by his works were empty of literary completion, as well as rigidly inspected by the government general of Chosun. Moreover those were nearly 'lied' then popular song. So those were not coincides with contemporary taste of popular song. after all Kim were changed from record maker to another, and his idea of 'Gayo' movement was end in failure. By the way Kim's such idea was realized by korean classical composers in 'lied' till 1990's. Such Kim's works and idea are an example that very dynamic sphere of modern korean poetry connected with musical form, existed by modern soun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