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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古詩歌文學會의 硏究活動과 그 成果 - 학회 창립 20주년을 즈음하여
박준규 한국시가문화학회 2011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27
한국고시가문학회에서는 그 동안 매년에 걸쳐 학술연구 발표대회를 가졌고, 학회지로서 『古詩歌硏究』를 발간하는 등 고시가 연구의 활발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여 왔다. 학술 발표대회는 금년까지 23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동안 수행되었던 연구발표의 안건은 총 102건이요, 대회에 임한 학술연구 발표자 수는 56명에 이른다. 또한 회원들의 꾸준한 학문연구로서 추진한 학회지 『고시가연구』는 제27집의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 제25집까지 게재된 논문의 수는 총 316편이요, 그 집필자 수를 헤아리면 112명에 이른다. 이는 학계 절대 다수의 연구진이 참여한 방대한 논문집의 출간이라 하겠다. 한편 학술발표에는 주요 과제를 공동연구의 특별 주제로 내세워 전국대회를 8차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사대부가사의 전통과 미학, 고시가의 정체성과 미학, 고시가 연구 방법론의 검토와 모색 등 흥미 있는 주제 논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학회지에 발표된 316편의 논문은 고전시가 전반에 걸쳐 심층적으로 연구된 결과이다. 이를 시가 유형별 비중으로 보면 가사와 시조 그리고 한시 등에 대한 논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사문학 연구의 업적이 대단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송강문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작가론 또는 문학론의 탐색이 다양하게 모색되었다고 하겠는데, 본 학회지에 발표된 정철관계의 다양한 연구들은 ‘송강문학 재인식’의 한국고시가문학회에서는 그 동안 매년에 걸쳐 학술연구 발표대회를 가졌고, 학회지로서 『古詩歌硏究』를 발간하는 등 고시가 연구의 활발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여 왔다. 학술 발표대회는 금년까지 23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동안 수행되었던 연구발표의 안건은 총 102건이요, 대회에 임한 학술연구 발표자 수는 56명에 이른다. 또한 회원들의 꾸준한 학문연구로서 추진한 학회지 『고시가연구』는 제27집의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 제25집까지 게재된 논문의 수는 총 316편이요, 그 집필자 수를 헤아리면 112명에 이른다. 이는 학계 절대 다수의 연구진이 참여한 방대한 논문집의 출간이라 하겠다. 한편 학술발표에는 주요 과제를 공동연구의 특별 주제로 내세워 전국대회를 8차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사대부가사의 전통과 미학, 고시가의 정체성과 미학, 고시가 연구 방법론의 검토와 모색 등 흥미 있는 주제 논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학회지에 발표된 316편의 논문은 고전시가 전반에 걸쳐 심층적으로 연구된 결과이다. 이를 시가 유형별 비중으로 보면 가사와 시조 그리고 한시 등에 대한 논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사문학 연구의 업적이 대단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송강문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작가론 또는 문학론의 탐색이 다양하게 모색되었다고 하겠는데, 본 학회지에 발표된 정철관계의 다양한 연구들은 ‘송강문학 재인식’의 괄목할 성과로 평가된다. 괄목할 성과로 평가된다.
기획 : 한국고시가문학회(韓國古詩歌文學會)의 연구활동(硏究活動)과 그 성과(成果) -학회 창립 20주년을 즈음하여
박준규 한국고시가문학회 2011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27
한국고시가문학회에서는 그 동안 매년에 걸쳐 학술연구 발표대회를 가졌고, 학회지로서 『古詩歌硏究』를 발간하는 등 고시가 연구의 활발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여 왔다. 학술 발표대회는 금년까지 23회를 개최하였는데, 그동안 수행되었던 연구발표의 안건은 총 102건이요, 대회에 임한 학술연구 발표자 수는 56명에 이른다. 또한 회원들의 꾸준한 학문연구로서 추진한 학회지 『고시가연구』는 제27집의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 제25집까지 게재된 논문의 수는 총 316편이요, 그 집필자 수를 헤아리면 112명에 이른다. 이는 학계 절대 다수의 연구진이 참여한 방대한 논문집의 출간이라 하겠다. 한편 학술발표에는 주요 과제를 공동연구의 특별 주제로 내세워 전국대회를 8차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사대부가사의 전통과 미학, 고시가의 정체성과 미학, 고시가 연구 방법론의 검토와 모색 등 흥미 있는 주제 논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학회지에 발표된 316편의 논문은 고전시가 전반에 걸쳐 심층적으로 연구된 결과이다. 이를 시가 유형별 비중으로 보면 가사와 시조 그리고 한시 등에 대한 논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사문학 연구의 업적이 대단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송강문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작가론 또는 문학론의 탐색이 다양하게 모색되었다고 하겠는데, 본 학회지에 발표된 정철관계의 다양한 연구들은 ``송강문학 재인식``의 괄목할 성과로 평가된다.
정해령 ( Ding Hai Ling ) 한국시가문화학회(구 한국고시가문화학회) 2016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38
원의 부(賦)에서 여러 여성 인물을 형상화하였는데, 그 중 “미인”의 형상은 가장 대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인”의 형상은《시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실주의를 지니고 있는《시경》에서 “미인”에 대한 묘사는 현실 생활 속에 진실한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굴원은 중국 시가(詩歌) 역사상 최초로 “미인”을 의식적으로 아름다운 정치와 밝은 군주의 상징으로 비유하였다. 아름다운 정치와 밝은 군주라는 이상을 추구했던 굴원이 비록 현실 속에서는 여러 번 좌절당하지만, 아름다운 정치를 추구하는 그의 숭고한 정신은 세인들의 경앙을 받아 왔다. 이에 굴원의 “미인” 형상은 후세 및 국내외의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쳐 역대 문인들이 본보기로 삼아 학습하는 문학전범이 되었다. 특히 굴원과 그의 작품이《문선(文選)》을 통해 한국 문학계에 들어왔을 때, 한국과 초나라의 정치 환경이 서로 비슷하였는데, 한국의 문인명사들은 불안정하고 부패한 사회 환경 속에서 정신적으로 위로해줄 약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초사》에 나타난 굴원의 충정한 애국심은 특별히 추앙을 받았고, 생사의 선택에서 굴원이 보여준 굴절된 인격의 가치 및 그의 작품에서 향초 미인으로 비유한 군신과 이상에 대한 추구 등에서 드러난 인격적인 매력은 역대 한국의 문인묵객을 감화시켜 그들이 잇따라《초사》와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의소(擬騷), 조소(吊騷) 등 문학 작품들을 저술했다. 고려 시기와 조선 시기에 “미인”의 형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작품들의 출현은 한국 한문학과 시가 문학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다. There are many types of women images created in the Fu of Qu Yuan ,in which the image of ‘the beauty’ is the most representative one.This image can be traced back to the ‘the book of songs’,in which it referred to person in real life.Qu Yuan was the first one who consciously compared‘the beauty’ to the good politics and capable and moral monarch in the Chinese poetry history, for which he suffered many setbacks,however,his spirit was highly admired by people.The image of ‘the beauty’ has a profound impact on the literature in later times and at home and abroad, and become the literature model imitated and learned by writers in all ages. When the works of Qu Yuan entered into the Korean literary circles with ‘the selection of literary works’, the political environment in Korea was similar to the Chu country. The writers and celebrities in Korea had to look for some mental consolation under this unrest and corrupt social environment.Qu Yuan’s loyalty and patriotic to his country in his works was highly respected. His personality reflected in his choice of death and his pursuit of good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his ministers deeply influenced the Korean writers in all ages. They wrote lots of poems which imitated or paid respect to the works of Qu Yuan. Lots of works used ‘the beauty’ image as their content during the Korea and North Korea periods, which greatly promoted the development of Korean Chinese literature and poetry.
고순희 ( Soon Hee Ko ) 한국고시가문화학회(구 한국고시가문학회) 2014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34
이 연구는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서술한 가사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사는 총 7편으로, <회심□> <원한가> <고향 □난 회심곡> <피란사> <나라의 비극> <추월감> <셋태비감> 등이다. <추월감>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학계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먼저 각 가사 자료의 확인된 소재지를 정확하게 밝혔다. 그리고 작품 내용의 분석을 통해 각 가사가 한국전쟁과 관련한다는 점, 가사의 창작연대, 작가의 성별, 창작 당시 작가의 나이 등을 고증했다. 다음으로 한국전쟁을 직면한 작가의 입장을 분석했다. 국군과 인민군 중어느 한 편의 입장을 벗어나 전쟁 자체에 대한 반감에 초점을 두고 서술한 가사는 <회심□>, <나라의 비극>, <피란사> 등이다. 국군의 입장에서 서술한 가사는 <원한가>와 <고향 □난 회심곡>이다. 그리고 좌우갈등의 문제를 서술한 가사는 <추월감>과 <셋태비감>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가사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를 규명했다. 가사문학이 한국전쟁 당시까지도 장르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는 점,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의 경험과 입장들을 다양하게 반영하는 다큐멘터리로 기능한다는 점, 한국전쟁 당시 동족상쟁의 비극성을 한탄하고 전쟁 자체를 강하게 거부하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이들 가사 작품의 문학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his article researched the texts of Gasa which describe the experience of the writer in the period of Korean War. To obtain the texts of Gasa which describe the experience of the writer in the period of Korean War, I have extensively investigated the collections of manuscrips and printing books. As a result, seven pieces of Gasa were corrected until now. These are <hoesimsa>, <Wonhanga>, <Gowhyang-dduhnan-hoesimgok>, <Peeransa>, <narayi-beeguk>, <Chuwolgam>, <Setebigam>. Until now the academia did not pay attention to these texts of Gasa except <Chuwolgam>. First of all, I presented the texts of Gasa which describe the experience of the writer in the period of Korean War. And through the analysis on the contents of work I proved the writer, writing age, the fact that each work was related to The Korean War, and whether the writer is a woman or a man. Next, I analyzed the position of each writer facing the Korean War. Gasa which describe the antipathy to the war itself are <hoesimsa>, <narayi-beeguk>, <Peeransa>. Gasa which describe in the position of Southern soldiers are <Wonhanga>, <Gowhyang-dduhnan-hoesimgok>. Gasa which describe the ideological conflict of one woman are <Chuwolgam>, <Setebigam>. Finally, I probed the literary significance of these Gasa works. These Gasa works has the significance as a documentary literature which typically reflect the tragedy of war and the life of our ordinary people in the period of Korean War. And these Gasa works shows us that traditional features of poetry existence was maintained until recently.
일반논문 : 영호남사림(嶺湖南士林)과 금남최부(錦南崔溥)
최한선 한국고시가문학회 2011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27
崔溥(1454-1504)는 耽津人으로 자는 淵淵호는 錦南인데 進士澤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異質하여 剛毅精敏했다고 한다. 금남은 점필재의 문하로서 戊午士禍(1498) 시 그의 집안에 점필재집이 있다는 이유로 訊問을 받고 杖刑을 받은 뒤 端川에 유배되었다가 甲子士禍(1504) 때 處刑되었다. 금남은 호남인으로서 占畢齋의 학문을 직접 받아들여 이 고장 士林의 발흥에 크게 기여한 첫 번째 세대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 점필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호남 선비로는 竹林曺秀文인데 그는 담양 竹林書院에서 배향되고 있거니와 그의 아들 雲穀曺浩는 점필재의 문하로서 汝忠, 汝諶등 문학으로 훌륭한 후손을 많이 배출했다.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로 이어지는 학맥과 함께 호남 사림의 깊이와 폭을 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최부는 후생의 敎導에 미미不倦하였는데 해남의 邑을 밑아 있을 때 그 곳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文學이란 게 없고 禮儀또한 荒陋했는데 금남은 正論으로써 陋俗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이때 漁樵隱尹孝貞과 林遇利그리고 柳桂隣등을 부지런히 가르쳤는바 이들을 보고 온 고을 사람들이 翕然하여 마침내 文獻之邦이 되게 했다고 한다. 호남의 사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 말 할 수 있겠다. 먼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王朝交替期(1392)와 世祖의 王位簒奪事件(1455) 때 입향 또는 낙향해 온 세력과 다음으로는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로 이어지는 이른바 영남을 통하여 호남에 뿌리를 내린 계열을 들 수 있겠다. 호남 사림은 대체로 金宏弼, 崔溥, 宋欽, 樸祥, 李恒, 金安國계열 등으로 나누는데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樸祥을 제외한 모두가 金宗直淵源임을 알 수 있다. 宋欽도 김굉필을 私淑했으니 송흠을 연원한 박상도 어떤 면에서는 같은 뿌리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최부 계열은 주로 海南과 羅州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금남 학맥은 尹孝貞, 林遇利, 柳桂隣, 羅질, 尹衢, 尹巷, 尹行, 尹復, 柳成春, 柳希春, 李仲虎, 鄭介淸, 羅士침(錦南의 外孫子), 羅德明등 6 兄弟, 羅緯素(羅德埈의 子) 등으로 이어진다. 최부의 호남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로 이어지는 사림의 正脈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사림들은 韓國儒學史上 또는 韓國文學史上과 韓國義兵史등에서 뚜렷한 足跡을 남긴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문하들이 이룬 호남학에서의 문학적 성과는 浪漫的情緖라는 風流性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데서, 곧 溪山風流를 표방한 부류와는 시 세계를 달리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의 史學, 文學, 經學등 학문적 영향은 해남과 나주를 중심으로 湖南學의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文學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羅緯素: 1582-1666) 약 2세기 동안 그 전통이 활발히 이어져 나왔고, 그 이후에도 羅景煥(性菴家藏), 鄭錫珍(蘭坡遺稿), 羅允煦(錦坡集), 羅燾圭등으로 20세기까지 계승되면서 근현대 문학으로 移行되었다. 崔溥(1454-1504) 字淵淵,號錦南,明朝朝鮮全羅道耽津(卽今韓國康津郡),進士澤的兒子。崔溥是占畢齋(金宗直)門下,不幸戊午士禍(1498)時因家裏被發現占畢齋文集,他受杖刑後流放到偏僻端川,然後甲子士禍(1504)時被處刑。錦南崔溥被評爲韓國湖南士林人脈的第一個世代。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的一些人的學脈근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的學脈對韓國湖南士林的形成和發展起了흔大的影響。韓國湖南士林分爲兩大類。朝鮮王朝交替期(1392)和世祖的簒奪王位事件(1455)時入鄕或被露鄕的勢力。前者是光州出身錦城範氏範世東、羅州出身河東鄭氏鄭地、天安全氏全新民、在鄕下隱居的沃川趙氏趙瑜、光山金氏金子進、金麟厚祖先蔚山金氏金穩、光州卓氏卓光武等。後者世祖的찬奪王位事件時在鄕下隱居的是順天金氏的金宗瑞、流放到長興的晉州鄭氏鄭분、在靈巖隱居的南平文氏文孟和、在光山隱居的樸祥的父親忠州樸氏樸智興、在務安隱居的務安樸氏樸益卿、在長興隱居的忠州金氏金麟、在高興隱居的礪山宋氏宋侃、在淳昌隱居的高靈申氏申末舟、在羅州隱居的慶州李氏李碩、在海南隱居的原州李氏、在潭陽隱居的洪州宋氏、在鹹平隱居的陽城李氏、在靈巖隱居的鹹平魯氏魯宗周等。其次是嶺南系的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學脈。湖南士林分爲金宏弼、崔溥、宋欽、樸祥、李恒、金安國系, 細看湖南士林的分類分析, 除了樸祥以外都是其淵源在金宗直。崔溥系主要是在海南和羅州活動的人物。崔溥學脈是尹孝貞、林遇利、柳桂隣、羅질、尹衢、尹巷、尹行、尹復、柳成春、柳希春、李仲虎、鄭介淸、羅士침(錦南的外孫子)、羅德明等6兄弟、羅緯素(羅德埈的兒子)等人。住在海南蓮洞的尹孝貞是孤山尹善道的高祖父, 以근海南鄭氏家婚姻爲跳板復興名門貴族。尹孝貞的三個兒子橘亭尹衢、尹行、杏堂尹復是公認的詩書門弟。尹衢的兒子曆任左參贊, 他的兒子尹惟幾曆任江原道觀察使。他抱養了尹善道繼承下來了海南尹氏家的榮譽。孤山尹善道寫瞭『孤山遺稿』『漁父四時詞』40首等75首詩歌。孤山尹善道與長歌松江一同稱爲韓國文學界的皇帝。此外尹氏家在壬辰倭亂和丁酉再亂中培養出了許多的義兵將,在救國運動中立了大功。尹衢的女서履素齋李仲虎是在光州初次實行鄕約, 以鄕校爲中心振作了儒學。他曆任全羅監査和大提學,有四子汲、潑、潔、직。杏堂尹復曆任全羅道使、忠淸道觀察使,寫出了『杏堂先生遺稿』及許多漢詩。杏堂的甥姪楓菴文緯世在退溪門下學了「八陳圖」,硏究了性理學。壬辰倭亂和丁酉再亂中근5個兒子、奴僕、弟子一起擧行了義軍蜂起,特別是在自籌軍糧米中做出了흔大貢獻。.柳桂隣有兩個出衆的兒子懶齋柳成春和眉巖柳希春。柳成春同尹衢、崔山斗被稱誦爲湖南三傑,又曆任了吏曹銓郞,但因己卯士禍時被流放到邊疆幷夭折的緣故沒留下特別的業績。柳希春寫出了有名的『眉巖日記』。『眉巖日記』是從宣祖卽位年(1567)起十年時間裏的公私內容的日記,在當時曆史硏究上흔有硏究價値。他校訂『朱子大典』,編纂『國朝儒先錄』,寫出『眉巖集』,還刊行外祖父崔溥的『漂海錄』。流放到鏡城的羅德明在流配地遇到壬辰倭亂,在戰亂中討伐鞠景仁等的叛亂留以功績。也有文學方面的知識流傳『嘯浦遺稿』。他兒子羅緯素是短歌『江湖九歌』的作者。他的詩歌作品和孤山尹善道的『漁父四時詞』相提幷論,又被評爲江湖詩歌潮流的繼承。羅德憲從流配地被釋放後壬辰倭亂和李適之亂(1624)時立下了功勳,而且善於外交的他訪問了三次瀋陽,被國王稱爲忠烈諡號。林遇利是善山人,其父秀的四個兒子元、亨、利、貞中排老三。林亨有五個兒子千齡、萬齡、億齡、百齡、九齡都是賢達。林千齡被追贈領議政,寫出了『遯庵先生文集』。林九齡曆任光州牧使以善政被稱爲淸官的稱誦。林百齡被追贈右議政,乙巳士禍時受禍了。林億齡(號石川)是韓國湖南歌詞的詞宗,被退溪、栗穀、聽松、玉峰、高峰、河西、龜峰等盛贊叫大詩人。同霽峰高敬命、松江鄭澈、棲霞堂金成遠等一起有時以朋友交流,有時以師弟關系交遊,開展了不拘一格,又不失氣稟和格調的講學與詩的創作活動。從上述來看崔溥的湖南學脈是連接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的韓國士林正脈。從崔溥門下輩出的人在韓國儒學史上、韓國文學史上、韓國義兵史上都有흔多影響。他門下一些人的文學方面的成就因근以前浪漫情緖的不一樣,근標榜溪山風流的當時詩歌派的不一樣,有著更深的意義,他們創作了新詩歌世界。他的史學、文學、經學等學問的影響對以海南和羅州爲中心成立的湖南學有흔大貢獻。特別是在文學方面直到17世紀中期(羅緯素1582-1666)還活潑地流傳了下去。此後以羅景煥(性菴家藏)、鄭錫珍(蘭坡遺稿)、羅允煦(錦坡集)、羅燾圭等形式繼承到20世紀的文學,現在移行到了近現代文學。
김아연 ( Kim A-yun ) 한국시가문화학회(구 한국고시가문화학회) 2017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40
『제국신문』에는 철도 소재 시가 7편이 게재되어 있다. 1903년에 발표된 2편, 1906년에 게시된 5편이 그것이다. 이 글은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의 내용을 발표 시기별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먼저, 1903년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러일 전쟁(1904 1905) 이전에 열강들이 대한제국 철도부설권을 경쟁적으로 침탈하려던 정황을 형상화하고, 경의철도부설권을 수호 하려는 대한제국 정부와 민간의 의지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1906년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한일의정서(1904), 을사늑약(1905)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철도부설권을 독점 했고, 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을 철저하게 배제했으며, 역세권의 이점에 주목하여 용산에 일본인 거주지를 구축한 상황을 재현한 한편, 기적 소리를 청각적 심상으로 활용하여 독자에게 계몽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이 글은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조명했다. 첫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맞춰 시가가 변모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둘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신문 매체를 통해 대한제국의 철도부설권 및 국가의 자주성 되찾기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다. 셋째, 한국 철도문학의 계보학적 측면에서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대한매일신보』 철도 소재 시평가사에 선행하며 1907년부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전에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철도 소재 시평가사와 상호보완 관계를 맺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 결과,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제국신문』 철도 소재 시가는 러일 전쟁 발발 전후 대한제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이에 따라 외세의 철도부설권 침탈이 국제적·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였음을 말해 준다. 둘째, 『제국신문』철도 소재 시가는 전통 시가의 형식 위에 철도 담론을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냈고 이 계보를 『대한매일신보』철도 소재 시평가사가 계승함으로써, 근대에 전통 시가의 형식이 철도 담론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유효함을 보여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comment poetry on current topics of railway in Jekuk Sinmun(founded in 1898). The two of them were composed in 1903, and the five were published in 1906. The contents of poetries are as follows. Firstly, the former represented events in Korea railway history which the powers competed over the railway concession of Korea Empire before the Russo-Japanese War. Secondary, the latter were a realistic depiction of events happened after signing the Japan-Korea Treaty of 1904 and 1905. At that time, Japanese Imperialism monopolized the railway concession of Korea Empire. Meanwhile, 1 poetry of them needed the awakening enlightened consciousness to readers. Based on that, this paper has analyzed the significances of Jekuk Sinmun`s railway poetries. These poetries have shown the changing aspects along with the flow of time, are a new writing to regain railway concession and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n Empire through the newspaper, and complement Daehan Maeil Sinbo`s railway gasa composed in 1907, 1908, 1909 and 1910 on genre of Railway Literature in Korea. This paper, therefore, has drawn conclusions from the discussion described above. These poetries have shown a few things: Affairs of Korea Empire was changed at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powers competed over the railway concession of Korea Empire was a internationally, politically and socially sensitive issue. In addition, the form of poetry was a medium through which to transfer discussion of railway the modern.
이도흠 한국시가학회 2022 韓國 詩歌硏究 Vol.57 No.-
고전시가에 대한 100여 년에 걸친 연구사를 학문 주체, 학문의 경향, 시대적 맥락에 따라 일제강점기의 1세대의 연구, 해방이후부터 70년대 초반의 2세대의 연구,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사이의 3세대의 연구, 90년대 이후의 4세대의 연구로 나누어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길을 전망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김태준과 조윤제 등 1세대 학자들에 의한 시가연구의 핵심은 ‘타자의 발견으로서 근대’, ‘식민지적 침탈 대 저항으로서 민족문학 수립’, ‘실증주의와 마르크시즘 연구방법론’이다. 해방 직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구자균과 고정옥, 정병욱 등 2세대 학자들에 의한 시가 연구의 가장 큰 흐름은 ‘민족 문학의 정립’과 ‘한국 문학의 내재적 근대성,’ ‘한국문학의 ‘전후의 복구와 진보적 해석의 타자화/주변화,’ ‘남북한 문학의 분리’다. 최동원, 조동일, 박노준 등 3세대가 주도한 70년대-90년대 시가연구의 큰 흐름은 ‘역사·실증주의의 압도와 탈주,’ ‘(이에 따른) 시가연구의 화려한 개화’와 ‘굳건한 연구 토대의 구축’이다. 이들은 실증주의 방법론에 역사주의 비평을 접목하여 작품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해석을 하였으며, 반면에 몇몇 학자들은 이에서 탈주하여 시가의 형식과 시학적 분석을 하고 미학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치중하였다. 21세기를 맞아 고전시가 연구자들은 형식주의 비평이나 기호학, 자율성의 미학에 맑스주의 비평과 타율성의 미학, 문화연구를 융합하여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자들이 동일성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차이의 패러다임으로 연구를 수행할 때 창조적 연구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아울러, 연구자들이 지배적 담론에서 벗어나 배제되거나 경계에 선 이들을 주목하며 서발턴(subaltern)의 입장에서 ‘결을 거스리는 읽기’를 하면 기존과 다른 해석들이 풍성하게 생산될 것이다.
나경수 한국시가문화학회 2015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36
개인들의 욕구가 모여 사회적인 문화적 요구로 분출된다. 이 시대는 과거와는 다른 문화적 요구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충족하기 위해 문화콘텐츠라 는 신개념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시가가 겪고 있는 오늘의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의 가치에 상관없이 즐기려 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현전화에 실패한 까닭도 그 한 요인일 수 있다. 한 때 근대서사가 개연성을 앞세워 공격했지만, 오늘날 고소설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환상성이 다시 살아나고 있듯, 서정장르에 속하는 고시가 역시 그것을 재생시키는 현전화의 방식으로서 잃었던 또는 유보해두었던 음악성과 음악을 되살리는 방법이 고안되어야 할 줄로 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적 전략에 따라 우리의 고전시가에 속하는 국문시가, 구비시가, 한문시가의 작품을 현전화하여 오늘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또는 이용 가능한 문화자원으로 재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형태의 변화보다는 기능적 전환을 통해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문화로 재생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