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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姓貫制와 本貫 ‘慶州’ 姓氏

        김창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1 민족문화논총 Vol.79 No.-

        이 글에서는 한국의 성씨들 중에서, 특히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를 본관으로 표기하는 성씨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 성씨와 본관의 특징을 언급하고, 이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는 성씨들에 대해 검토하였다. 본관을 경주로 하는 성씨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전통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慶州府 本府의 성씨로는 신라 宗姓 三姓 및 六部姓과 回鶻系 偰氏가 있었다. 이 성씨의 후예들이 늘어나 인구수가 많아지고, 또 일부가 주거지를 옮겨 생활하면서, 서로간에 혈족의 계통을 구분하고 先代와 出自를 분명하게 할 필요에서 새로운 성을 칭하고 다른 지역명을 본관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성씨간에 혈통의 근원과 출자는 동일 하다고 하면서도 성과 본관을 달리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大姓名門 중심으로 성과 본관을 변경하는 추세가 있었는데, 여러 群小 성씨들은 신라 또는 경주와 연계성이 있는 본관과 성을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전통시대 뿐만 아니라 근현대에도 여전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성과 본관을 달리하면서도 그 출자와 연원은 신라 종성과 6부 의 성에서 유래하였고 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즉 ‘新羅出自說’ 을 자처하며 우월감과 자긍심을 갖는 가문과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의식은 한말에 신분제가 폐지되고, 더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법적으로 성과 본관의 개정과 창설이 가능해짐에, 이에 따라 옛 신라의 왕경이라는 역사문화적 특별성을 지닌 경주를 본관으로 표기하는 많은 성씨가 생겨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본관을 경주로 표기하는 성씨의 수는 물론 여기에 따른 총가구수와 인구수가 폭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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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 葛項寺石塔記와 신라 元聖王家의 위상

        김창겸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22 新羅文化 Vol.60 No.-

        In this article, I talked about the status of King Wonsung in Silla, Using the inscription of the stone pagoda of Galhangsa Temple. The contents are as follows. I knew that this temple existed until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Also, The inscription is related to the fact that the family of the “Jomunhwangtaehu”, the mother of King Wonsung, built the stone pagodas and rebuilt the temple. And I think the tomb called “Kimhyowangryung” in Gimcheon area is related to this temple. Perhaps this is related to ‘Kim Hyoyang’, the father of King Wonsung. The “Kyungsindaewang” and “Jomunhwangtaehu” in this inscription are to let us know that King Wonseong was the emperor, his family had a royal status. After all, The three-story stone pagodas of the east and west at the Galhangsa Temple are very important cultural heritages. So I argue that these should be moved to their original location.

      • KCI등재
      • KCI등재

        신라 憲康王과 義明王后, 그리고 ‘野合’과 孝恭王-특히 신라말 ‘非眞骨王’의 등장과 관련하여-

        김창겸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2

        이 글은 신라 헌강왕과 그의 여인들, 그리고 효공왕의 즉위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전하는 자료에서 확인되는 헌강왕의 여인으로는 의명왕후, 수원 권씨, 요(효공왕)를 낳은 생모 김씨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효공왕의 생모는 왕족도 진골귀족도 아니었고, 게다가 헌강왕과 야합으로 아들 요를 낳았으나 궁궐 밖에서 키워야만 하였다. 또 효공왕은 즉위 후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 헌강왕의 정식 왕비인 의명왕후를 의명왕태후로 책봉하였다. 신라 골품제의 원리에서 진골이 아닌 생모가 낳은 효공왕도 진골이 아니었다. 효공왕이 즉위한 것은 골법의 특이성이라는 왕실 혈통, 즉 오로지 왕족이라는 신성성만을 내세워 비상조치로써 이루어진 왕위계승이었다. 이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오직 왕의 아들이라는 혈통의 신성성만 강조되고, 골품제 규정은 기능을 상실하고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헌강왕과 비진골 김씨녀의 야합으로 출생한 효공왕의 즉위는 신라 왕위계승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요인 중의 하나인 골품제 규정을 소멸시키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며, 이는 골품제의 바탕 위에 존립하였던 김씨 신라왕조의 종말이었다.

      • KCI등재후보
      • KCI등재후보

        신라 元聖王의 先代와 血緣的 背景에 대한 재검토

        김창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이 글은 신라 하대의 왕통을 연 원성왕의 선대와 중대에서 정치사회적 위상 및 선덕왕과의 친족관계를 알아봄으로써, 원성왕이 즉위할 수 있는 혈연적 배경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원성왕의 증조부 의관은 무열왕의 女壻이면서 문무왕의 妹夫로서 삼국통일전쟁 중에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할아버지 위문은 성덕왕대에 執事部 中侍를 역임하는 등 김경신의 선대는 중대 무열왕계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며, 당시 정치권과 진골 귀족사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원성왕 어머니의 외숙이면서 동시에 왕비의 외조부인 당시 유력한 진골귀족 金元良과 김양상의 할아버지 元訓이 형제 항렬에 해당하는 가까운 인척이었던 것 같다. 즉 원성왕은 모와 처를 통하여 이중으로 맺어진 김양상의 弟 또는 從兄弟뻘에 해당한다. 김경신은 이러한 혈연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정계에 나아가 활동하였다. 김경신은 김양상과 혈연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를 따르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원하여 정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해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780년 2월 김지정의 난이 일어남에, 4월 上大等 김양상이 진압군을 거병하자 김경신은 군사력을 제공하고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김양상을 추대하여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선덕왕이 즉위하자 김경신은 상대등에 임명되어 二宰의 지위에서, 당시 정치권내에서 최고 실력자의 한명으로써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선덕왕이 죽은 뒤, 김주원을 몰아내고 먼저 즉위하여 원성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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