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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세기 신라와 북위의 교섭

        홍원기(Hong, Won-Gi)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4

        본 글은 5~6세기 신라와 북위의 교섭을 밝히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우선 5세기와 6세기 신라의 대외적 상황은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에, 5세기와 6세기를 각각 간접 교류시기, 직접 교류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 시기 신라와 북위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도 파악하여야 함으로 부가적으로 서술하였다. 5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된 상황이었으므로, 당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북위와 간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예시를 제시하였다. 첫째, 신라의 初傳佛敎가 북위의 승려 曇始에 의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담시와 墨胡子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三國遺事』 「阿道基羅」의 논평에서 一然은 담시가 阿道, 墨胡子, 摩羅難陀 중 한 사람이 필히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중 아도는 일연이 말하기를 묵호자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하였다. 아도 즉 묵호자는 눌지마립간 시대에 불교를 전파하였으므로, 북위의 승려 담시와 활동연대가 겹친다. 그렇다면 담시가 묵호자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을 가정이 성립된다. 둘째, 신라의 왕호와 관등에 붙은 ‘干’이라는 호칭이 북위의 ‘可汗’ 호칭에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可汗’은 ‘干’과 언어학적으로 통용되는데, 이것은 북위 太武帝 太平眞君 4년(443) 내몽고 嘎仙洞에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石刻祝文에 기록되어 주목되었다. 나아가 ‘可汗’의 유입 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435년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을 때로 생각된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예속된 상황이었으므로 고구려를 통해 간접적으로 북위의 영향을 받아 왕호와 관등에 붙은 ‘干’이라는 호칭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는 고구려의 예속에 벗어나기 위해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450년 신라의 何瑟羅 성주가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면서 두 국가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454년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497년까지 지속되었다. 497년 신라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지만, 백제는 국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으면서 나제동맹에는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는 국익을 위하여 고구려와 맹약을 체결하고, 다시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개선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이후, 신라가 북위에 직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신라와 북위의 교류방식이 5세기 간접 교류에서 6세기 직접 교류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신라가 북위의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였다. 북위는 당시 宣武帝의 시대로써 이전 孝文帝가 단행한 개혁들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효문제의 개혁은 지증왕대에 실시된 국호 · 왕호의 제정, 상복법의 제정 · 반포, 주군제의 시행, 동시의 설치 등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This thesis is intended to reveal the negotiation of the Northern Wei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First of all, since the external situation of Silla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is distinct, the 5th and 6th centuries were divided into the indirect exchange period and the direct exchange period, respectively. It also described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Northern Wei and Silla during this period. As Silla was under the subjugated situation by Goguryo until the mid-5th century, Silla was able to interact indirectly with the Northern Wei through Goguryeo. The two examples are given to explain this. First, Silla"s Early Tradition Buddhism(初傳佛敎) was propagated by the Buddhist monk named Damshi(曇始) of the Northern Wei. In this paper, I thought that Damshi and Mukhoja(墨胡子) are the same person and resented the basis. According to commentary by 『SamGukYuSa』(三國遺事)「Adokira」(阿道基羅), Il-yeon(一然) said Damshi would be the same person as 阿道(Ado), Mukhoja, Maranata(摩羅難陀). In addition, Il-yeon Said Mukhoja and Ado was same person. Ado(Mukhoja) propagated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Nulji Maripgan(訥祗麻立干), overlaps with Damshi, a Buddhist monk in the Northern Wei, and a family that, using the stage name of Mukhoja, first spread Buddhism to Silla. Second, It is the fact that the title of "gan(干)" attached to the royal family name and official rank of Silla was establish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Northern Wei "Khan(可汗)". "Khan(可汗)" is linguistically used with "gan(干)", which was noted for the record of Seokgakchukmun(石刻祝文) made in Alseondong(嘎仙洞), Inner Mongolia, to honor ancestors in the 4th year of Emperor Taiwu of Northern Wei Taepyeongjingun(太武帝 太平眞君 4年=443). Furthermore, after reviewing the inflow timing of "Khan(可汗)", it is believed to be the time when Goguryeo first dispatched envoys to the Northern Wei in 435. Under the subjugated situation by Goguryeo, Silla was indirectly influenced by the Northern Wei through Goguryeo and established "gan(干)" for the title of king and official rank. On the other hand, Silla formed an alliance with Baekje to break away from Goguryeo.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triggered by the murder of Goguryeo"s frontier general by the lord of Haslla(何瑟羅) in 450, and the relationship of the two countries turned hostile in 454 when Goguryeo attacked Silla. This relationship lasted until 497. Sllia was invaded by Goguryeo in 497, but Baekja did not dispatch reinforcements due to domestic political chaos, resulting in cracks in the allies of Silla and Baekje. Under these circumstances, Silla formed an alliance with Goguryeo for its own national interests and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s again. The improved relationship with Goguryeo later became the backdrop for Silla"s direct dispatch of envoys to the Northern Wei. This change indicates that the period of indirect exchange between Silla and the Northern Wei in the 5th century had changed to the period of direct exchange in the 6th century. At that time, Goguryeo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the Northern Wei, so it was the best time for Silla to accept the advanced cultural properties of the Northern Wei. The Northern Wei at that time was maintaining the reform of the previous Emperor Xiaowen(孝文帝) in the era of Emperor Xuanwu(宣武帝), which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reforms carried out in the King Jijeung(智證) period,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the country name·title of king, enactment and promulgation of mourning law, implementation of State Army System, and installation of Dongsi(東市).

      • KCI등재후보

        羅・濟 경계고(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6

        신라사학회에서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외국 논문을 번역해 게재함으로써 연구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신라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이마니시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신라사를 체계화했다면,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해 가치를 평가한 사람은 바로 츠다였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지도를 받은 그는 滿鐵 동경지사에 1908년 설립된 滿鮮地理歷史調査室에 들어가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 상고~고려 부분을 담당해 1913년에 ≪滿鮮歷史地理≫1・2[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펴냈다. 그 1권에 실린 글 중의 하나가 우리가 이번에 소개하는 <나・제 경계고>이다. 지난 번에 소개한 저자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 洛陽堂, 1919 : ≪津田左右吉全集≫ 별권제1, 岩波書店, 1966]가 신라본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신라본기에 대한 그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던 영토적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1964년에 간행된 ≪津田左右吉全集≫ 제11권에 수록된 것을 모본으로 삼았다. 이하에서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역자들의 간단한 보충설명이다. 新羅・百濟 두 나라의 경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는 유일하게 ≪三國史記≫가 있다. 그러나 이 책 上代의 기술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으므로 이 기술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는 시대의 경우에도, 역사상에 기록된 지명의 대다수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아서 그 소재를 아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반도의 남부를 둘로 나눠 각각 한쪽을 가졌던 양국의 강역을 살피는 것은 실로 가망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백제본기에서는 近肖古王 후기 이후의 기재는 대략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동시대의 신라본기에는 역시 믿을 수 없는 기사가 많은 듯하다. 이것은 중국문화가 신라로 들어온 시기가 백제보다 늦고, 백제에 이미 기록이 존재했을 때 신라에서는 역시 아직 史籍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설에 후세 사람들의 潤色・虛構가 가해질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삼국사기≫가 그 재료를 주로 신라의 사적에서 취했다고 본다면, 신라본기에서 비교적 후세까지 이렇게 황당무계한 기사가 있는 것은 이유가 없지도 않은 것이다. 신라본기의 영토 관련 기사에 과장의 흔적이 많은 것 같아도, 이는 ≪삼국사기≫의 편자가 신라의 사적을 맹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신라・백제 두 나라의 교섭에 관해서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린 예가 많지만, 그것은 두 나라의 사료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존재하는 사료에 다른 한쪽도 근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료가 신라의 사적일 수 있다는 것은, 백제의 기록이 나라의 멸망과 함께 많이 흩어지고 없어진 반면 신라의 사적은 여전히 고려에 남겨졌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사적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허구의 기사가 많다. 이 때문에 신라・백제의 강역을 파악하는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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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서현주(Seo, Hyun-ju)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고고학 자료 중 주거와 건물, 고분, 이와 관련이 많은 기와, 토기 등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신라와 백제의 문화적 특성을 정리해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교류) 문제에 접근해보았다. 신라와 백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대체적인 변화 양상이 유사하지만, 그 이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주거뿐 아니라 고분, 기와의 제작기법, 토기의 기종 구성과 형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원삼국시대 이래 두 국가의 왕실이나 건국세력의 계통이나 구성, 북방과의 친연성,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중국과의 친연성 차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 국가의 문화적 특성은 신라의 경우 전통성, 배타성(획일성), 후진성, 백제의 경우 다양성(포용성), 개방성, 그리고 선진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두 국가는 일정 시기에 문화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단계적으로 차이가 난다. 4~6세기 전엽에는 두 국가의 변경지역인 충청지역에 신라가 진출하여 백제계(마한계 포함) 문물이 늦게까지 공존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지역 일대의 백제계 지방민에 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신라 왕경에 나타나는 토기나 기와 등의 백제 문물도 이들을 매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문화가 전반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기와의 제작기술, 사찰을 비롯한 건물의 건축기술, 토기를 중심으로 한 식기문화 등에서 백제 문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이 때의 문화적 융합은 나제동맹, 혼인동맹 등으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 관계가 바탕이 된 것이며, 주로 신라지역에서 백제 멸망 직후까지 이어진다. 이후 신라는 기존의 전통문화나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차이는 다소 커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This study set out to arrange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Silla and Baekje in archeological materials about dwelling, buildings, old tombs, and many roof tiles and pottery related to them and take an approach to the issues of cultural convergence(including exchanges) between Silla and Baekje. The two states showed similar changing patterns overall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but there were big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them in the former period. These differences are clear in houses, old tombs, making techniques of roof tiles, and types and forms of pottery. As for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wo states reflected in them, Silla was characterized by tradition, exclusiveness(uniformity), and backwardness, while Baekje was characterized by diversity(acceptability), openness, and advancement. There was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as well, with some differences in its pattern according to the stages. During the period of the fourth century ~ the former half of the sixth century, the Baekje-style things remained in some areas of Chungcheong that were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Silla or were partially found in Wanggyeong of Silla.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became full-blown in the overall changing process of Silla culture. Silla accepted many things from Goguryeo and Baekje, and the influence of Baekje culture was found in Silla"s roof tile-making technology, building construction technology, and tableware culture around pottery. This cultural convergence was based on the relations of Baekje and Silla including Silla-Baekje Alliance and marriage alliance. As Silla created a new culture based on the introduc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s well as its old traditional culture since then,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Baekje and Silla became larg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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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진평왕대 對隋 외교와 請兵

        정덕기(Jung, Duk-gi) 신라사학회 2021 新羅史學報 Vol.- No.52

        신라-수 외교는 신라-남북조 외교에서 신라-당 외교로의 이행과정에 해당하며, 학술·문화 교류를 주요 목적으로 시작해 ‘對隋 請兵 外交’로 발달하였다. 579년부터 593년까지 중국 정세는 급변하나, 신라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 삼국 항쟁은 일시적인 소강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594년에 對隋 外交를 개시하였다. 신라의 대수 외교는 Ⅰ기(594~604년)·Ⅱ기(605~617년)로 구분된다. Ⅰ기에 신라의 사신 파견 빈도 증대·정기화가 이루어졌고, 유학승・사신의 연계가 강화되었다. Ⅰ기는 대수 외교의 효과가 목적을 견인하며, 정기 사행을 촉진한 시기이다. Ⅱ기는 신라의 請兵 및 국제적 위상 증대가 나타난 시기이다. 신라는 수에 請兵하고, 고-수 전쟁을 이용해 실리를 취했다. 수는 신라가 고-수 전쟁에 협조했다고 인식하였고, 이로 인해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대폭 증대되었다. 신라의 ‘對隋 請兵 外交’는 ‘對唐 請兵 外交’를 수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신라-당 외교의 원형적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외교사적 의의가 있다. Silla"s diplomacy toward Sui is a part of the process of diplomatic transition from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to Tang. It started with academic and cultural exchanges as the main purpose and developed into "request for troop diplomacy toward Sui (對隋 請兵 外交).“ From 579 to 593, the situation in China changed rapidly, but Silla did not react. This is because the war between the Three Kingdoms enters a temporary lull during this period. Silla started diplomatic relations with Sui in 594. The diplomatic development is characterized by two phases. In the first phase from 594 to 604, Silla"s dispatch of envoys increased and regularized. Also, the connection between envoys and priest studying abroad strengthened. The first phase was a period that a much greater effect of the diplomacy toward Sui invigorated dispatch of regular envoy. The second phase from 605 to 617 was the period when Silla enhanced its international status and increased the number of request for troop. Silla asked for a dispatch of troop and took advantage of Goguryeo-Sui War. Consequently, Sui regarded that Silla had cooperated in the war, which greatly increased Silla"s international status. Silla’s "request for troop diplomacy toward Sui" has diplomatic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it provided a platform for Silla"s diplomatic principle and showed the original form of “request for troop diplomacy toward Tang (對唐請兵 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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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一統’ 인식과 그 영향

        장일규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This article was studied Silla's ‘Unification’ perception. Sinmoon King was emphasized ‘Unification’ perception. The perception continued after Soseong king. At the end of the Silla kingdom, ‘Unification’ perception was changed. Confucian scholar Gimyeon was stress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However, Choi Chi-won was stressed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But again, ‘Unification’ perception was changed in later Three Kingdoms period. Gyeonhwon and Wanggeon was emphasiz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perception. In particular, Wanggeon was present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in order to appease public sentiment. It was an act of ‘Samhan should be unified as one of the country.’ Silla's ‘Unification’ perception was unification plan. 이 글은 신라의 ‘一統’ 인식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고찰한 것이다.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義軍’과 함께 ‘선왕의 뜻’을 이어 ‘원흉을 제거하였다’고 국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신문왕은 ‘一統三韓’・‘統三’을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신라 백성의 추숭’을 부각하였다. 이것은 원성왕과 소성왕 이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일통’ 인식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하대 초에 정립되었다. 신라 말에 ‘일통’ 인식은 혼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대체로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던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나타났다. 곧 金穎은 ‘삼한’과 ‘신라 백성’을 강조하였는데, 崔致遠은 신라 백성을 위무하였던 무열왕을 강조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일통삼한’・‘통삼’에서 ‘삼한’을 ‘삼국’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一統三韓’과 ‘一統三國’을 함께 강조하는 ‘일통’ 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신라와 발해를 둘러싼 進士試 급제 경쟁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할 때, 삼한의 비정을 달리하며 진한인 신라 국가를 앞세우는 ‘일통삼국’ 인식을 애써 강조하였다. 후삼국시기에 ‘일통’ 인식은 다시 변화하였다. 견훤과 왕건은 세력을 다투면서 ‘일통삼한’ 인식을 거론하였다. 그들은 신라 국왕을 존중하고 수호해야 할 ‘尊主’로 부각하였다. 특히 신라의 영역을 나누어 지배하였으므로, ‘일통삼국’이 아닌 ‘일통삼한’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의자왕의 宿憤’을 강조하였고,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고구려의 원수’가 아닌 ‘고구려’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백제 국가를 유념한 ‘일통삼국’을 나타내었지만, 왕건은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이전의 ‘일통삼한’을 내세우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신라 국가를 부정하였던 백성들은 점차 ‘삼한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통’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민심은 왕건 쪽으로 기울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일통삼한’ 인식을 유지하면서, 따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아울렀다. 신라의 ‘일통’ 인식은 후삼국시기에 통일 방안의 하나인 ‘일통’ 의식으로 기능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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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4년 당의 대고구려전 파병 요구와 신라의 대응

        최희준(Choi, Hee-joon)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4

        본 논문은 당이 645년의 대고구려 원정에 앞서 644년 신라에 파병을 요구한 사실을 밝히고, 이에 대응하여 신라가 군사를 내어 참전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640년대 초반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643년 당에 구원병을 요청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였고, 그 일환으로 644년 신라에게 대고구려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던 신라로서는 당의 파병 요구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고구려전 참전 문제를 놓고 신라에서는 수 개월에 걸쳐 신중한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신라는 참전을 결정하고 이를 당에 통지하는 한편, 백제의 침공에 대비한 군사적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마침내 645년에 대고구려전이 개시되자 신라는 3만 명의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략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우려대로 백제는 전쟁의 틈을 노려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략하였으나, 이에 대한 사전 방비로 신라는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645년 당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종결되었으나, 신라는 이를 계기로 당과의 견고한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양국의 신뢰관계는 향후 나당군사동맹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다. This paper was written for the purpose of clarifying the fact that the Tang Dynasty requested Silla to dispatch troops in 644 ahead of the Goguryeo War in 645 and the process of Silla dispatching troops in response to this. In the early 640s, Silla, which was in crisis due to the military attacks of Baekje and Goguryeo, was able to escape the crisis by asking Tang for military help in 643. In the process, Emperor Taizong of the Tang Dynasty decided to invade Goguryeo, and in 644, Silla was asked to participate in the war with Goguryeo. It was difficult for Silla, which was facing a military threat from Baekje at the time, to easily accept the Tang Dynasty"s request to dispatch troops. For this reason, careful discussions continued over the issue of participating in the Goguryeo war over several months in Silla. In the end, Silla decided to participate and notified it to the Tang Dynasty, while preparing military measures in preparation for Baekje"s invasion. Finally, in 645, when the war between Goguryeo and Tang began, Silla dispatched 30,000 soldiers to target the southern border of Goguryeo. And as feared, Baekje targeted the western border of Silla, but Silla was able to minimize the damage as a precaution against this. As a result, the Tang Dynasty"s expedition to Goguryeo ended in failure in 645, but Silla was able to form a solid trust relationship with the Tang Dynasty. And such strong trust between the two countries served as an important basis for future development into the Nadang Military Alliance(羅唐軍事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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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최호원(Choi, Ho-won)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본래의 목표인 백제 故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신라는 670년 상반기까지는 고구려 유민세력을 진압하려는 입장이었으나, 7월경에 이러한 방침은 바뀌게 되었다. 그 계기는 웅진도독부측의 불온한 움직임 및 영토 획정에서 나타난 당의 압력이었다. 검모잠 등 유민세력은 안승을 왕으로 한 한성 고구려를 세운 뒤 신라에 인정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여기에는 유민측에서 온 책봉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한 신라측의 의도,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원한이 백제보다 적었던 점 등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유민세력은 도움을 청할 만한 세력이 없던 당시의 상황과 보장왕대 대신라정책에 대한 일면의 반성, 책봉 요청을 함으로써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는 의도 등이 작용하여 신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민세력 지도부 내에서는 고구려 부흥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 안승이 고구려 국가 자체의 부흥보다 유민들을 존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검모잠은 안승에 비해 한성 고구려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한성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검모잠에 대한 안승의 불만도 작용하고 있었으며, 고연무는 이러한 안승의 조력자였다. 마침내 당군과의 전투와 한성 고구려의 유지를 놓고 생긴 전략적인 시각 차이는 검모잠의 죽음을 초래하였고, 673년 윤5월의 호로하 전투를 계기로 한성 고구려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안승은 신라로 간 이후인 674년 보덕왕에 봉해졌고 이후 신라에 대한 예속도가 점점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유민 세력 내에는 684년 대문 등 보덕국 잔여 무리의 반란이 말해주듯 안승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도 잔존하였다. 결국 신라는 684년의 반란을 평정한 이후에야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할 수 있었다. After the fall of Goguryeo, Silla tried to acquire the old territories of Baekje which had been its original goal. Consequently, the conflict between Silla and the Tang Empire deepened. Until the first half of 670, Silla’s policy was to suppress the Goguryeo refugees; however, Silla changed its policy around July, triggered by the suspicious activities of Ungjin Commandery and the pressure exerted through the territorial demarcation by the Tang Empire. Goguryeo refugees led by Geommojam re-established Hangseong Goguryeo and crowned Anseung as the new king. In August 670, Silla proclaimed Anseung as the King of Goguryeo. This move was prompted by Silla’s intention to prevent an attack from Goguryeo refugees by granting their request for investiture as well as by the fact that Silla hold lesser grudges against Goguryeo than Baekje. The refugees turned to Silla for help because of the following reasons: the situation at the time was such that there was no one else they could have asked for help, they regretted King Bojang’s policy toward Silla, and they wanted to protect themselves against a possible attack from Silla by requesting an investiture. However, within the leadership of the refugee force, there were disagreements about how to revive Goguryeo. Anseung prioritized the survival of the refugees over the revival of Goguryeo as a state, while Geommojam had a stronger volition to retain Hanseong Goguryeo. This disagreement also stemmed from Anseung’s dissatisfaction with Geommojam who was the de facto leader of Hanseong Goguryeo, and Goeyeonmu was an ally of Anseung. Eventually, the disagreements over the strategy of battle with the Tang Empire and the revival of Hanseong Goguryeo led to the death of Geommojam, and after the Battle of Horoha in leap May 673, Hanseong Goguryeo almost disappeared. Anseung was crowned King Bodeok in 674 after joining Silla, following which Silla’s domination over him and Goguryeo refugees strengthened. However, within the refugees, there were people who disagreed with Anseung as is evident by the 684 rebellion by the remaining force of Bodeokguk including Daemun. Silla was only able to control the Goguryeo refugees after it quelled the rebellion of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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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征討 地理考(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신라사의 기본사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 전문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연구자는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우리는 그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 洛陽堂, 1919)의 번연문을 ≪新羅史學報≫제15집 (2009.4)에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은 1913년 <新羅征討地理考>(≪滿鮮歷史地理≫ 1,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그가 표명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신라본기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논의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新羅征討地理考>에 대한 소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본고에서 츠다는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1년~소지마립간 32년에 기재된 왜의 침공 기사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天平寶字 3년(759) 즉 경덕왕 18년경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설에 의거해 역사가들이 해당 기사들을 構成해 낸 것이라고 보았다. 이 주장이 왜의 신라 침공을 부정하는 데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을 통해 임나일본부의 기초가 공고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의 침공이 모두 가야 방면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된 근거는 당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한다고 본 데 있었다. 그의 신라본기 비판론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신라본기 기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일본인 연구자들의 인식을 파악하는 데는 이 글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하에서 본문의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간단한 설명이다. 각주에서는 ‘**’만 저자의 원주이고, 나머지는 역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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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 후반 신라의 백제·고구려 유이민 정책

        최희준(Choi, Hee-joon)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50

        통일전쟁의 결과로 7세기 후반 신라에는 많은 유이민이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유입되었다. 이들은 유입 경로나 성격에 따라서, 첫째 전쟁 과정에서 신라에 투항하거나 망명한자, 둘째 전쟁의 결과 신라군에 생포된 포로, 그리고 셋째 자신들의 터전과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귀속된 遺民 집단 등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통일전쟁 중 신라는 유이민들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함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끌어가려 하였고,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책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서 신라는 7세기 후반,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정책목표를 달리한 백제・고구려 유이민 정책을 단계적으로 펼쳐나갔다. 7세기 후반 신라의 유이민 정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Ⅰ기는 통일전쟁이 개시된 660년부터 나당전쟁 발발 직전인 669년까지로, 신라는 전쟁에서 투항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유이민 중 고위층 인사를 중심으로 적극 포섭・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Ⅱ기는 나당전쟁기인 670년부터 676년까지로, 백제 故地를 당으로부터 공취한 결과, 새롭게 유입된 백제계 유이민에게 신라의 관등을 일괄적으로 사여해 주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Ⅲ기는 통일전쟁 종결 이후로, 유이민 정책이 전시의 포섭책에서 전후의 통합책으로 새롭게 전환된 시기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가 고구려계 유이민에 비해서 백제계 유이민에게 차별적인 정책을 폈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근거들을 검토해 본 결과, 이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골품제에 기반한 신라 사회에서 백제나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모두에 대해서 차별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통일전쟁 이후의 유이민에 대한 통합정책이 다방면에서 이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인과 유이민의 통합은 유기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As a result of the Unification War(三國統一戰爭), many immigrants(流移民) came from Baekje(百濟) and Goguryeo(高句麗) during the late 7th century Silla(新羅). They can be grouped into three main groups. The first group is that surrendered or defected to Silla during the war, and the second group is priso ners who were captured by Silla forces as a result of the war. And the last one is a group of refugees whose territory were annexed to Silla. Silla tried to take advantage of the war situation by strategically accepting and utilizing the immigrants during the war. After the war, they sought ways to efficiently manage the immigrants along with the kingdom’s greatly expanded territory. Accordingly, Silla implemented policies on immigrants from Baekje and Goguryeo in the late 7th century, depending on the changes in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s. Meanwhile, it has been argued from early on that Silla had differentiated Baekje immigrants compared to Goguryeo immigrants. However, after reviewing the arguments, it was not historical. In fact, in the Silla society based on the bone-rank status system(骨品制, kolp’umche), discrimination was structured for both the Baekje and Goguryeo immigrants. As a result, Silla’s integration policy for immigrants after the Unification War was implemented in many ways, but Silla’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did not achieve organic integration between Silla and its immigr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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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서』의 王言과 신라의 문예

        張日圭(Chang, Il-gyu)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이 글은 『구당서』 본기의 조서나 제서 등 당 황제의 왕언을 신라 국왕의 외교문서와 비교해 당 문예를 수용한 신라 문예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당의 왕언은 821년 이전 조서와 제서가 혼용되었던 반면, 821년 전후 조서와 제서는 칙서와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특히 805년~846년, 888년~908년에는 활발하게 작성되어 반포되었다. 왕언은 황실 권위 신장과 국가 안정 염원을 담았다. 신라는 당과 외교 관계를 맺은 뒤 당의 제도 정비와 정책 시행을 꾸준히 주목했다. 신문왕 때 당시 전하는 시문을 모은 1천권 문관사림 중 규범에 해당하는 글을 모은 50권을 받았고, 성덕왕 때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서표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또한 851년 편찬된 개벽~수나라 때까지 제왕의 美政과 詔令, 制置, 銅鹽錢穀 損益, 用兵, 僧道 등을 연대별로 수록한 300권 『통사』도 참고했다. 신라 왕실은 당과의 교류에서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고 당의 문예에 민감했다. 신라 문한관은 신라에 있거나 당의 국자감에 머물면서 여러 양식의 글이 담긴 『백씨장경집』 등 당 문인의 문집을 열람했고, 당 문인의 글이나 신라에 파견된 당 사절단, 또는 당 연회에 참석한 문무관과 교유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익혔다. 현재 전하는 당의 왕언과 신라의 표문을 비교하면, 형식의 통일성은 비슷하지만, 신라가 중화의 의관과 제도를 수용해 유풍을 품고 예악의 성행을 이룬 번국으로 조공의 임무를 다했음이 特記되었다. 당이나 신라는 당시 동아시아 문서의 보편적 구성, 보편적 문체를 염두에 두어 3단락 구성과 변려문체로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 신라의 문한관은 중국의 제후국 중에 신라가 가장 유사한 나라라고 자부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을 가지고 신라 고유정서를 문예에 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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