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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문화(文化) : 조선시대 선잠(先蠶) 악장 연구

        박현숙 ( Hyun Sook Park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4 No.-

        악장은 본래 원구(園丘), 사직(社稷), 종묘(宗廟) 등 일정한 국가적 의례(儀禮)에서 신에게 올리는 제가(祭歌), 곧 제사에서 쓰인 노래이다. 악장문학이라는 명칭은 국가적 의례인 제사에서 신에게 바치는 노래인 악장이나, 궁중의 연향에서 사용된 송축적인 노래인 가사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시가 명칭이다. 연구자에 따라 악장문학의 외연이 조금 넓어질 수는 있으나, 그 본령은 신에게 바치는 제사노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사노래로서의 각 악장은 유교의 종교적 의례 중 특정 제사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장의 본질은 구체적 의례와 더불어 논할 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악장 중 특히 제례악장의 본질을 제례 속에서 구명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종종 제기되었으나, 아직 구체적인 결과물은 없었다. 이글은 선잠악장의 의미를 조선시대 국가제사의 행례(行禮)과정과 연관하여 구명하고자 한 것이다. 선잠악장은 조선시대 국가 제사인 선잠제(先蠶祭)에서 사용한 악장이다. 선잠제는 누에의 신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지내는 제사로 음력 3월 길한 사일(巳日)에 동교(東郊)에 있는 선잠단에서 거행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양잠과 관련되는 의례에서 사용한 악장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선잠악장>과, 국가전례서에 수록된 <선잠악장> 및 친잠례에서 사용한 악장 등 3종류가 있다. 변계랑이 지은 악장은 『춘정집(春亭集)』에 수록되어 있다. 왕비가 직접 선잠단에 나아가 서릉씨에게 제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관원을 보내 제사를 거행한 조선시대 국가제사에서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가전례서에 수록된 악장은 선잠제의 의례 과정 중 신에게 폐백을 바치는 전폐(奠幣), 첫 번째 잔을 바치는 초헌(初獻) 및 제사상에 올렸던 변과 두를 거두는 철변두(徹邊豆) 절차에서 사용한 것이다. Akjang means Jega, songs of sacrificial rites, which are songs dedicated to gods used in established national rites such as Hwangu(園丘:worshiping heaven), Sajik(社稷:guardian deities of the state), Jongmyo(宗廟:the royal ancestors`` shrine).The title of Akjang literature(the Aesthetics of a movement) includes the comprehensive poems and songs of Akjang, songs dedicated to gods in sacrificial rites of a nation, and Gasa(歌詞), glorifying songs used at feasts performed at royal court.There can be different wider or narrower extensions of Akjang literature according to different researchers, but Akjang basically has the characteristic function of ritual songs dedicated to gods.Akjang as ritual songs is used in some specific rites of Confucian religious rites.Therefore the intrinsic features of Akjang can be revealed when discussed along with the specific rites.The necessity has been raised that the essential natures of Akjang, especially of ritual Akjang, must be researched within the sacrificial rites, but no definitive studies in this regard were made yet.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implications of Seonjam Akjang in association with the process of practical etiquettes during national ancestral rites in Choseon Dynasty. Seonjam Akjang is a type of Akjang performed at Seonjam-je Ceremonial Rites in Choseon Dynasty. Seonjam Ceremonial rite, a specific rite for the God of Silkworms, Seoreung, was conducted with solemnity on the Auspicious Day of the Snake, in March of the lunar calendar at Seonjam altar located in Dong-gyo.Currently, there are three remaining Akjang: Seonjam Akjang by Byun, Gyeryang, the one included in National Rituals, and the last one performed at Chinjam-rye. Among those three, the one composed by Byeon, Gheryang is included in ChunjeongChip (the book with poetry and prose composed by Byeon, Gyeryang). In light of the fact that the remaining Akjang contains the story of Queen`s performance of rites in person, it could be surmised that it would not be actually used in Choseon Dynasty due to the fact that the rites in Choseon era were practiced by the official crier the King sent. Akjang that is included in National Rituals is the one that is used for JeonPye (the offering of ceremonial food), Choheon (the first libation), and Cheolbyeondu (the removal of the ceremonial vessels from the altar for praying benediction after performing enshrinement politely) among procedures of Seonjam-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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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석전음복연악장(釋奠飮福宴樂章)> 연구

        조규익 ( Kyu Ick Cho ) 한국고전문학회 2011 古典文學硏究 Vol.40 No.-

        본고의 대상인 <석전음복연악장>은 『조선왕조실록』에 ``新撰登歌樂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음복은 제사의 한 절차이면서도 잔치의 성격을 겸한 행위이다. 공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왕조의 문명성이나 임금에 대한 찬양 혹은 축수가 이 악장 전편의 주제의식으로 되어 있다. 당시 연주되고 있던 향악이나 당악의 곡조에 塡詞하는 방법으로 제작한 것이 이 악장들이다. 즉 당악으로 연주되던 제1작 <여민락>과 제2작 <보허자>, 향악이었는지 당악이었는지 불확실한 <천권곡> 등 세 작품을 제외한 <봉황음>·<만전춘>·<융화>·<한림가>·<오륜가>·<납씨가> 모두 향악으로 연주되던 노래들인데, <문선왕악장>과 달리 <석전음복연악장>에서는 조선의 독자성이나 개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9장의 <석전음복연악장>은 내용 상 제5작을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응된다. 제1작~제4작에서는 공자와 임금을 등장시켜 임금이나 조선왕조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했고, 제5작에서는 문치가 융성해져 나라가 억만년 동안 복록과 태평을 누릴 것이라는 신념을 표출했다. 후반부인 제6작~제9작에서는 전반부와 달리 임금이나 조선왕조만을 주된 찬양의 대상으로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 악장에 속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존의 악곡에 전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런 제작방식은 고전시가의 통시적 흐름을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사직·종묘·영녕전 등 국가적 大祀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음복연 악장이 있었는지 현재 확인할 수 없고, 이런 범주 밖의 제례들에도 이와 필적할만한 규모의 악장들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문선왕악장>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연주되던 것을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조선왕조의 治者그룹이 갖고 있던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다거나 ``공자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이룩한 왕조의 文明性이나 제왕의 治功``을 찬양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석전음복연악장>은 왕조의 이념적 근원과 그것이 꽃 피어난 현실적 양태를 복합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악장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Deung-ga akjang newly made, this paper`s object is Seokjeon-eumbokyeon-akjang. The ceremony of Eumbok[partake of sacrificial food and drink] is a process of memorial services as well as feasts. Dynasty`s inclination of civilized level or praise and wishing a long life for their King is thematic consciousness of the whole akjang works. The works made with a method stuffing the existing Hyang-ak and Dang-ak tunes with a new lyrics are these akjangs. <Bonghwang`eum>, <Manjeonchun>, <Yoonghwa>, <Hanrimga>, <Oryun`ga>, <Napssiga>, exept for the 1st Jak <Yeominrak>, 2nd Jak <Boheoja> and <Cheon`gweon`gok> unconfirmed it is Hyang-ak or Dang-ak tunes, are all the songs played with Hyang-ak. It seems that individuality was pursued in Seokjeon-eumbokyeon- akjang, different from Munseonwang akjang. The nine stanzas of Seokjeon-eumbokyeon-akjang are divided into the first half and the second half with the 5th Jak as the boundary. From the 1st Jak to 4th Jak, writer finished with praise for the King and Joseon Dynasty after showing Confucian and King. In the 5th Jak, he expressed a sort of conviction that they can enjoy good fortune and happiness during countless years. From 6th Jak to 9th Jak, the second half, he showed only the King or Joseon Dynasty as the main object of praise. Although in the national memorial services like Sajik, Jongmyo, Yeongnyeongjeon, we cannot ascertain the existence of each Eumbokyeon-akjang. As a matter of fact, nearly no akjang works matching for size of Seokjeon-eumbokyeon- akjang even in the memorial services out of this category. In addition, for the reason that Munseonwang akjang was imported from successive Chinese dynasties, only with it they could not show their pride or praise dynasty`s inclination of civilized level or Kings` administrative achievements realized with accepting Confucious teachings. Therefore, we can say Seokjeon-eumbokyeon -akjang has an important meaning in the point that it showed in both ideological origin and realistic aspect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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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文宣王樂章 연구

        조규익(Cho, Kyu-Ick)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2 한국문학과 예술 Vol.9 No.-

        文廟祭禮는 文昭殿이나 宗廟 등 국가적 大祀들 가운데 하나로서 조선조 아악이 연주되던 핵심제의였다. 조선왕조의 정치적 정당성과 왕실의 카리스마를 얻고자 행하던 종묘제례와 함께 왕조 存立의 보편적 가치와 당위성을 宣揚하기 위한 문묘제례는 목적의식이나 정신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적 大事였다. 왕조의 文明性이나 정통성을 강조할수록 문묘제례의 중요성은 높아졌으며, 그에 따라 구성원들의 자부심이 앙양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본 발표의 대상은 『國朝五禮儀』 와 『樂學軌範』 에 실려 있는 文宣王 樂章인데, 그 원류로 볼 수 있는 중국의 문헌들[『宋史』 ?『元史』 ?『明集禮』 ?『明史』 ?『大成樂譜』 等]과 내용을 비교하면 대부분 일치한다. 제목을 중심으로 양자를 대조할 경우 『국조오례의』 와 『악학궤범』 의 문선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악장과 악곡의 관계, <?國公 악장>과 <沂國公 악장>의 존재 등이다. 조선조의 문선왕 악장은 『송사』 ?『원사』 ?『대성악보』 ?『명집례』 등으로부터 옮겨온 것들일 텐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중점적으로 수용했는가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성국공 악장>과 <기국공 악장>의 존재인데, 이 두 악장은 송대의 釋奠樂章을 수용한 『송사』 ?『원사』 ?『대성악보』 ?『명집례』 등에 들어 있다. 문헌들 간의 비교와 대조를 바탕으로 한다면, 『명집례』 에 들어 있는 <성국공 악장>과 <기국공 악장> 모두 송대에 만들어진 작품들일 것이고, 『원사』 ?『대성악보』 등 元代에 이루어진 史實의 기록이나 원대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문헌도 송대의 악장을 반영했다고 본다. 송대의 악장을 반영한 『명집례』 의 석전악장이나 『대성악보』 의 악장이 조선조의 석전악장으로 수용되었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 점을 근거로 한다. 악장의 字句들을 비교할 경우에도 같은 의미의 글자로 바꾸어 놓거나 숙어의 글자 순서를 바꾼 것 한 두 예를 제외하면 내용도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조선조의 석전악장이 『명집례』 나 『대성악보』 의 것을 수용하고 『송사』 등을 참고로 했음은 분명해진다. 宗廟樂이나 社稷?釋奠 등 雅樂의 祭禮樂章들은 모두 4言의 正格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같은 內容構造를 보여준다. 즉 祭祀 對象인 文宣王을 頓呼하고 그의 功德을 羅列?讚揚했으며, 제사 節次를 提示하면서 降臨하여 祭需를 歆饗하실 것을 祈願하는 구조가 모든 악장들에 공통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나 구조의 起源을 ?詩經?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詩經』 ?魯頌?<泮水> 4章에 대한 朱子의 註에 ‘釋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노래의 내용에 釋奠 혹은 釋奠과 類似한 祭禮가 暗示되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시경』 시대에 이미 그런 제례와 그에 대한 악장이 존재한 것이고, 그것이 『시경』 시에 반영된 셈이니, 문선왕 악장이야말로 악장으로서의 『시경』 시를 정신적으로 이어받은 구체적 사례이자, 고려나 조선의 太廟 혹은 宗廟 등 國家的 祭禮 樂章의 標本 역할을 수행한 模範的 先例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문선왕 악장은 雅樂 혹은正格 祭禮樂章의 東亞細亞的 標準이나 普遍性을 確認해주는 尺度 役割을 했다고 보는데, 문선왕 악장의 通時的 位相이나 共時的 意味 또한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Munmyojerye was one of Joseon Dynasty"s big and core commemorative rites played with A-ak at that time. The more they emphasized dynasty"s civilization or legitimacy, the more importance of Munmyojerye got higher, thereby their pride was elevated. I suppose that Munseonwang Akjang of Joseon Dynasty was accepted from ≪History of the Sung≫, ≪History of the Yuan≫, ≪Daeseong"akbo≫, ≪Myeongjiprye≫, etc., it is not easy to clarify to accept chiefly which one of them. The examples we can benchmark are <Seong"gukgong Akjang> and <Gigukgong Akjang>, the two akjang works are in ≪History of the Yuan≫, ≪Daeseong"akbo>, ≪Myeongjiprye≫, etc. I suppose that <Seong"gukgong Akjang> and <Gigukgong Akjang> are the works made in Sung Dynasty, the records about historical facts like ≪History of the Yuan≫, ≪Daeseong"akbo≫ or documentary records made by figures of Yuan Dynasty reflected Akjang of Sung Dynasty. My opinion that Seokjeon Akjang or ≪Daeseong"akbo≫"s Akjang was accepted into Joseon Dynasty"s Akjang relies on the viewpoint. Except for one or two cases exchanging some words to the others having same meaning, exchanging word"s order, their contents are corresponding exactly. Regarding to this fact, it is clear that Joseon Dynasty"s Seokjeon Akjang accepted the Akjang works in ≪Daeseong"akbo> or ≪Myeongjiprye≫ and referred to ≪History of the Sung≫ etc. Jerye akjang played with A-ak like Jongmyo"ak, Sajik or Seokjeon are made up of 4 words regular form, and they show same contents structure. In other words, we can make sure that the structure presenting the rites" processes and praying for coming and having the offerings are common in all akjang works. By the way, we can find out the origin of the contents or structures in the Book of Songs. If it were true, the rite"s process and akjang about it even in the time of Shijing, might as well it was reflected to Shijing Shi, the very Munseonwang akjang is a concrete example succeeded to Shijing Shi spritually. As well as it is a typical precedent performed a specimen role of dynasty"s commemorative rites like Taemyo and Jongmyo. Like this, Munseonwang akjang did a standard role checking East Asian standard or universality of A-ak of authentic jerye akjang, diachronic phase or synchronic meaning also can be found out in this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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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초 악장의 정립 과정과 그 의미

        김명준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7 고전과 해석 Vol.3 No.-

        첫째, 답습을 벗어난 제례 악장 완성. 조선의 제례 악장은 제례 악장의 기준이 송․원․명에 있다 할지라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비해 나갔다. 문묘제례악장의 경우 지역적 시대적 보편적 규준이 되는 것은 그대로 답습하였고,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환구제(악장)을 폐지하는 대신 우사제(악장)을 신설(제작)하여 명분과 실리적 자존을 지켰다. 그리고 국가 기본 제사인 종묘제(악장)는 고려 예종 이후 종묘제(태묘제)의 큰 틀이었던 ‘아악 연주-4언 형식’에서 벗어나 ‘속악 연주-자유 형식(3․5․7언)’으로 새롭게 올려졌던 것이다. 둘째, 신제 연향 악장의 이념화에 따른 새로운 악장 질서 수립. 국초 창작된 연향 악장들은 주자학 이념과 조선의 긍정적 전망 등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어 내용상 제례 악장과 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에 제례 악장과 신제 연향 악장은 통용하게 되었고, 실제 연향에서 요구하는 흥취 제고와 적절한 이완성을 위해 전조 연향 악장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결국 선초 악장은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으며 특히 연향 악장은 전대에 비해 이성과 감성, 긴장과 이완, 안정과 역동 등이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 대까지 문화 주류가 보여준 이상과 현실의 균형과 조화의 결과라 할 수 있다. First is the completion of a movement for religious ceremonies which does not follow old tradition. Although the standard of Chosun dynasty lies in Song․YuanㆍMing, the movements for religious ceremonies were accustomed to the situation of the times. 'Moonmyojaeraeak' faithfully followed the criteria of area, period, and the norm. Considering the relations with Ming, the 'Hwangujae (movement)'-a ritual ceremony dedicated to heaven-was abolished, but 'Usaje(movement)'-'Kiuje' were newly composed to sustain moral obligation and practical self-existence. The national royal ritual Jongmyojae (movement) has moved out of the general format of 'Ahahk concert-4 Eon' and newly developed 'Sohkahk concert-free format(3ㆍ5ㆍ7 Eon).Secondly, a new order of the movements was formed following the development of ritual 'Janchi' movements. The 'Yeonhyang' movements, created upon the foundation of the dynasty, strongly reflect the doctrines of Chu-za and positive prospect of Chosun, and shares much with the ritual ceremony movements. Thus the ritual movements and new 'Janchi' movements were widely used. To improve the taste and for adequate relaxation required for parties, the prelude of 'Janchi' movement was accommodated. Ultimately, the 'Seoncho' movement gave lead to quantitative expansion and 'Yeonhyang' movement specifically created a world in which reason, emotion, tension and relaxation, and stability and dynamics coexist. This can be explained as a result of balance and harmony between ideality and reality, which the cultural mainstream until Sejo has sh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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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 악인(樂人)의 음악 연습과 『악장요람(樂章要覽)』

        이정희 ( Lee Jung-hee ) 한국공연문화학회 2021 공연문화연구 Vol.- No.43

        『악장요람(樂章要覽)』은 악장의 요람, 즉 악장 중에서 중요한 내용만 뽑아 간추려 놓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전반부에는 악장(樂章)이, 후반부에는 악보(樂譜)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렇게 이원화된 체재는 정조대에 구축된 것이다. 필체와 수록된 가사의 작성된 시기를 통해 『악장요람』은 1809년 즈음에 작성된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즉, 총 네 단계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다양한 필체와 수정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곧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음을 의미하니, 『악장요람』의 표지 뒷면에 여러 자취가 남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반부의 악장은 제례 절차를 기준으로 그에 수반되는 악곡명과 가사를 제시하는 방식이며, 특히 노랫말을 한문과 한글음으로 병기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였다. 후반부의 악보는 제례 절차를 준수하되 중복되는 선율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음악을 기준으로 구성하였고, 율명ㆍ한문가사ㆍ가야금과 거문고의 격도지법ㆍ점(‘ㆍ’, ‘ㆍ’)과 같은 기호를 사용하여 궁중음악을 담아냈다. 이러한 구도는 제례의 구조 이해와 제례의 의미를 글로 담아 놓은 악장을 숙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한문과 병기된 한글음을 보면서 정확하게 노랫말을 익히게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형태라고 하겠다. 의식 절차와 딕션을 선행한 후 전체적으로 음악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연습했던 방향성이 악장과 악보를 수록하는 방식에 투영된 셈이다. 이러한 수록 방식은 악인의 음악교육과 음악연습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였다. 수록곡들의 특징은 우방(右坊)의 향악기 전공자로써 익혀야 할 필수악곡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악장요람』의 표지 뒷면에서 김형식(金亨植)이라는 이름이 주목되니,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기획한 궁중연향에서 무동(舞童)과 대금차비(大笒差備)로 활약했던 그의 이력을 통해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악장요람』의 수록곡은 김형식과 같은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들이 평소에 연습하고 현장에서 연주하던 핵심 레퍼토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악장요람』은 궁중악인의 일상이 담긴 ‘음악 연습 책자’였던 셈이다. 요컨대 『악장요람』은 주요 의례에서 노랫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가창할 수 있게 악인을 교습시키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책자로, 정조의 아이디어로 ‘악장+가보(歌譜)’의 체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정재를 공연했던 무동으로 맹활약한 김형식이 소장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이기도 했던 악공 김형식의 이름이 남아있는 데에다 이후 여러 악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투영하여 수정하면서 활용했다는 실용성에서, 궁중음악을 전승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과 시간을 보냈던 궁중 악인의 노정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book that summarizes only the important contents from the Akjang 樂章. Akjang 樂章 is arranged in the first half, and score 樂譜 is arranged in the second half. It seems that Akjang yoram 『樂章要覽』 passed through a total of four stages through the time when the handwriting and the lyrics were written. The presence of various handwriting and traces of modifications means that it has been passed through by several people, so it is not unrelated to the fact that several traces remain on the back of the cover of Akjang yoram 『樂章要覽』. The first part of the Akjang 樂章 is a method of presenting the name and lyrics of the accompanying music based on the ritual procedure, and in particular, the lyrics ar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and Hangeul sounds to improve readability. The score in the second half complies with the ritual procedures, but boldly omits overlapping melodies, and is composed based on the music, and various symbols are used to capture the expression of court music. This structure is a reflection of the direction we practiced to harmonize with the music after prior ritual procedures and diction. This was a device to increase the efficiency of music education and music practice for the court musician. The characteristics of the musical pieces are that they consist of essential musical pieces that must be mastered as musicians. In addition, the name Kim Hyung-sik 金亨植 is noted on the back cover of Akjang yoram 『樂章要覽』, and he was a court musician who was active in the age of King Sunjo 純祖. In other words, the musical pieces included in Akjang yoram 『樂章要覽』 are the core repertoire played by court musicians like Kim Hyung-sik 金亨植.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music practice booklet' containing the daily life of court musicians.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booklet designed for the purpose of teaching the court musicians to sing while correctly pronouncing the lyrics in major ceremonies. It is even more noteworthy in that Kim Hyung-sik 金亨植 was an owner. In addition to the fact that Kim Hyung-sik’s name remains, and in the practicality of being used by various court musicians reflecting and modifying the changes of the times, it is meaningful in that it contains the path of court musicians who spent a lot of time and time to transmit court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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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장(樂章) 연구의 현황과 전망

        김승우 한국시가학회 2022 韓國 詩歌硏究 Vol.57 No.-

        본고에서는 악장(樂章) 연구가 진행되어 온 그간의 내력을 살핀 후 앞으로의 논의에서 좀 더 유념해 볼 필요가 있는 사항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1990년대까지의 악장 연구에서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이 발견된다. 하나는 악장 갈래 자체보다는 조선초기 시가사의 흐름 속에서 악장이 차지하는 위상을 진단하고자 했던 경향이다. 조선초기 전후의 시가사를 이어주는 역할을 악장이 감당했을 여지를 타진하는 한편, 시조와 가사 갈래의 성립에도 악장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탐문하였다. 반면, 1980년대에 이르러 악장의 성격과 존재 양상을 보다 독립적이고 분석적으로 살핀 성과가 제출되기 시작하였다. 악장의 제작과 향유가 아송이라는 동아시아 보편의 문학적 전통 속에서 배태된 현상이라는 관점이 이들 논의의 바탕을 이룬다. 또한 문면에 드러나는 아유의 면모뿐만 아니라 이면에 개재된 규계의 지향 역시 악장의 중요한 요건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1990년대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여기에 새로운 안목과 방법론을 적용한 논저가 다수 발표되었다. 먼저 개별 악장 작품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그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선초 악장 작품의 제작 배경과 지향이 깊이 있게 검토되었으며 악장의 제작자에 대한 연구도 축적되었다. 다음으로 악장 연구의 시각을 확대한 시도가 두드러졌다. 문헌에 대한 탐구를 면밀히 진행한 성과, 악장 연구를 고려와 조선후기로 확장시킨 성과, 여타 갈래와 악장의 연관성을 탐색한 성과 등이 이 부류에 해당된다. 또한 악장에 관련된 종합적 연구서들이 출간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악장의 개념 및 요건, 존재 양식, 작품 창작의 목적과 활용 양상, 악장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각적 측면에서 악장 연구를 총괄한 저술이 근래에 출간되었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특히 유념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첫째로 한문악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선초 악장이 어떤 의도와 세계관 속에서 제작되었는지 면밀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국문 및 현토악장 이외에 주요 한문악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정치사적․사상사적 맥락에 대한 탐색이 진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맥락에 대한 이해가 확보되어야만 악장이란 누가 언제 짓든 대개 유사한 지향을 띠기 마련이라는 오랜 편견을 극복할 수 있다. 셋째로 시대적 전개와 변모 과정에 유의해야 한다. 악장은 대개 고정적으로 전승되어 왔으나, 시대와 정치적 상황,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악장을 짓는 방식과 기존 악장에 대한 평가 역시 달라지고는 하였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끝으로 연행 양상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텍스트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분단과 구성에 관한 단서를 연행상의 특징을 통해 발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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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장집(樂章集)≫을 읽는 사회문화적독법(社會文化的讀法)

        박홍준 한국중국어문학회 2008 中國文學 Vol.57 No.-

        ≪樂章集≫, 是北宋柳永的詞集, 在當時和以後的詞壇上?流行, 受到?多人的歡迎. 但是一般的批評界, 對柳永的詞帶着批判的態度. 因此本稿, 要從宋代社會文化的角度來硏討≪樂章集≫, 特別是要解釋≪樂章集≫裏多樣的作品, 而達到對宋詞的新理解. 宋詞是與一般詩歌不一樣的獨特的詩歌, 而且帶有?自身的特徵. 那就是, ?基本上音樂的歌詞, 而在宋代獨特的社會文化背景下創作而享受的. 再說, 宋詞, 在特殊的場所, 爲了特殊的目的, 由特殊的歌妓演唱. 因此爲了硏究宋詞, 需要特殊的方法論. 在本稿, 宋詞的社會文化背景下考察柳永的≪樂章集≫. 首先要注意的是, 歌妓傳播的現象. 這樣的傳播模式, 就影響到作品的多樣話者的出現. 這意味着≪樂章集≫的作品, 與作者要分開, 而和歌妓和聽者結合理解. ≪樂章集≫的愛情詞, 風物詞, 羈旅行役詞, 都是在不同程度上, 配合歌妓和聽者的役割, 而創作出多樣的作品. 因此我們要理解≪樂章集≫, 應該先理解歌妓傳播的特殊情況. 還要注意的是, 宋詞演唱的場所. 當時的瓦肆勾欄裏, 宋詞與其他民間演藝一起來表演. 所以演唱的過程中, ?容易受到話本小說和戱曲的影響. 在≪樂章集≫裏, 也可以發現 這樣特殊的作品. 總之, 柳永的≪樂章集≫, 在多樣的場所, 爲了滿足多樣的聽者的要求, 而由多樣的歌 妓來演唱的特殊的音樂文學. 所以在這樣的基本認識下, 我們可以更深層地硏究宋詞的形式和美學, 而與其他文學樣式交涉現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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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신찬태묘악장(新撰太廟樂章)」연구 - 텍스트 구성양상과 그 정치 · 문화적 의미 -

        조규익(Cho, Kyu-Ick)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20 한국문학과 예술 Vol.35 No.-

        우리나라의 왕조들이 『시경』을 도입하여 체질화시킨 역사는 매우 길다. 고구려의 태학(太學),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등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들에서 『시경』은 정식 교과목으로 교육되었는데, 태학이 소수림왕 2년[AD 372]에 세워졌음을 감안하면, 이미 4세기 이전에『시경』은 도입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고려 예종 11년[1116]의 「신제9실등가악장(新製九室登歌樂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시경』 텍스트가 국가 제사의 악장에 수용되었음을 문헌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예종 11년의「신제구실등가악장」은 공민왕 12년[1363]의 「환안9실신주태묘악장(還安九室神主太廟樂章)」· 공민왕 20년[1371]의「신찬태묘악장(新撰太廟樂章)」으로 이어지면서 고려조 길례(吉禮) 대사(大祀)에 속하던 태묘의 악장은 완성되었고, 그것이 조선조의 종묘제례악장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공민왕 16년[1367]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徽懿公主魂殿大享樂章)」은 공민왕 20년의「태묘신찬악장」과 함께 전적으로『시경』 텍스트를 수용했다. 무엇보다 이 두 악장들에 수용된 『시경』 텍스트의 양적 비중이 절대적인데, 그것은 왕조별 전통문화의 단순한 선양을 지양하고 유교의 전파나 통치이념화와 함께 출현한 보편주의에 의지하려는 의식의 수준을 파악할만한 잣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위까지의 어려운 과정에서 갖가지 정치적 난국들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던 공민왕의 개인적 상황, 왕조 말기의 보수적 기득권세력과 그들의 이념적 바탕이었던 불교에 대한 개혁적 신흥세력과 그들의 이념적 바탕이었던 유교의 갈등으로부터 생겨난 소용돌이가 일종의 아노미 상태로 나타난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열성조(列聖朝)를 모신 태묘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권위를 통하여 왕권을 부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다급한 집권층의 과제였다. 『시경』텍스트 가운데 주송 26회 · 상송 13회 · 노송 6회 등 3송(三頌)이 45회로 가장 많고, 대아 26회 · 소아 16회 등 2아(二雅)가 42회로 그 다음을 차지한다 주나라 초기의 악장들이 주송으로서 주나라 왕실이 흥기했을 때의 가사들이고, 상송은 상나라를 세운 탕왕의 공을 기린 노래들로서 상나라의 주(紂)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은 송나라로 하여금 상나라 탕왕과 후왕들의 제사를 모시게 했으며, 노송은 노나라의 주공 단(周公旦)과 그의 아들 백금(伯禽)의 공덕을 기린 것이다. 천하를 평정하고 예악을 정비한 주공의 공덕을 기려 천자의 음악으로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특히 주공은 주나라의 예악을 정비했을 뿐 아니라 제도를 정리하여 『주례』를 만들었고, 공자는 주공을 숭앙해 마지않았다는 점에서 고려 공민왕을 둘러싸고 있던 유자계급으로서는 공자와 그가 편찬한 『시경』을 내세우는 것만큼 왕실의 권위를 세워주는 방법은 따로 없었다. 불교와 이민족인 원나라에 기대고 있던 기득권 세력을 일소하는 지름길이야말로 삼대의 문화를 집대성한 주공과 공자를 추앙하고, 그에 대한 오마주로서『시경』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만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다. 악장 제작의 방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어구들을『시경』에서 적출 · 조립함으로써 공자가 스스로 밝힌 ‘술이부작(述而不作)’을 통해 교조(敎祖)에 대한 오마주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점은 당대 지식사회의 집단의식과 정치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그들이자 조선조창업의 주역으로서 조선조 악장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은 고려와 조선이 우리 역사상 중세로 묶일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었던 것이다.『시경』과 공자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강화된 왕권을 통해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한 집권세력의 의도가 바로「신찬태묘악장」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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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와 중국왕조들의 아악악장 비교 - 고려와 송·금·원을 중심으로 -

        조규익(Cho, Kyu-Ick)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21 한국문학과 예술 Vol.39 No.-

        선진지역으로부터 후발지역으로 전파되어 공통의 정신적 질서를 만들어낸 것이 예악문화였다. 고려와 조선조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유교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예악제도를 수립함으로써 중세적 보편성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권세력은 집권세력대로 민중은 민중대로 그것을 자신들의 왕조에 대한 자부심의 근거로 삼았다. 천명에 따라 성립된 왕통체계의 자부심, 백성들을 위한 선정(善政)의 명분, 어렵게 이룩한 왕조를 영속시켜야 할 당위성 등은 그들이 음악이나 악장 등 예악에 담고자 한 핵심적 주제였다. 아악 악장들이 『시경』의 전통을 이은 송나라 악장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고려의 당악이나 속악 등 연향악과 그에 올려 부르던 악장들도 대부분 송을 통해 도입된 당악이나 송사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고려 왕조가 당·송·금·원·명이 통시적·공시적으로 형성하던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중국의 음악을 도입해 쓰는 것을 생존외교의 일환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예악이 단순한 의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말기의 고려 정권이 송·금·원에서 음악 혹은 악장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 자리에서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음악이나 악장의 테두리를 벗어나 당대 정치·외교적 범주의 사안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북송·요(遼)[거란(契丹]·금(金)[여진(女眞)]이 패권을 다투었고, 고려는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매우 현실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음악이나 악장에 이들 왕조의 것들이 일부 섞여 있는 점은 그런 복잡한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송나라 휘종은 조서에서 ‘고려의 왕이 바깥에 있으면서 의(義)를 사모하여 동화(同化)해왔고, 신악을 원하므로 신악을 내린다’고 함으로써 동화의 대상 안에 음악을 포함시켰다. 음악이 단순히 음악으로 끝나지 않고 악장이나 의례로 확장되면서 예악제도가 이루어지고, 결국 왕조의 품격을 보여줌으로써 한 시대의 문화로 승화되는 것임을 당시의 지배자들도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타인의 관점이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의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동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악제도나 문화에 내재하는 보편성을 공유하는 데서 정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네 왕조의 악장이 언어와 국경을 초월하여 공유하는 유사성이란 시대와 지역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보편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보편성이란 유교 이데올로기와 한자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악문화의 측면에서 고려가 중세왕조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를 음악과 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It was the Yeak(禮樂) culture that spread from developed regions to undeveloped regions and created a common spiritual order. By establishing the Yeak system based on Confucian ideology accepted by China, medieval universality could be realized. And, either the ruling class or the lower class used it as the basis for their pride in their dynasty. The pride about the royal ruling system established according to Heaven’s command, the virtues of a benign rule for the people, and the legitimacy to perpetuate the dynasty build with difficulty were key themes they wanted to put into music and Akjang(樂章). There is no doubt that the Aak(雅樂) Akjangs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Song Dynasty"s Akjangs and most of the Yeonhyang(宴享) music, such as the Tang-ak(唐樂) of Goryeo and the traditional music of Song,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Tang-ak or Songsa(宋詞) introduced through Song. Above all, the fact that the Goryeo Dynasty considered introducing and using Chinese music as a part of its survival diplomacy in the realities of international politics, which were formed by Tang, Song, Jin, Yuan, and Ming, shows that Yeak was not just a matter of ritual. It is very important to define in this paper the fact that the late Goryeo regime was influenced by music or Akjang at the Song, Jin, and Yuan. It was because it could be a contemporarily political and diplomatic issue of the time beyond the boundaries of music or Akjang. During this period, North Song, Kitan, and Yeojin struggled for supremacy, and Goryeo was closely watching this situation and engaged in very realistic diplomacy. Therefore, the fact that some of these dynasties are mixed in the music and Akjang of Goryeo reflects such a complex reality. The Emperor Hwijong of the Song Dynasty included music in the objects of assimilation by saying, "The king of Goryeo has been outside and has been assimilating for adoring righteousness, and I give music according to his want." It was shown that the rulers of the time realized that music did not just end in music, but expanded into Akjang and ceremonies, resulting in a system of Yeak, and eventually sublimated into the culture of an era that showed the dignity of the dynasty. It is the meaning of assimilation to accept other people"s perspectives or ideologies and transform them into their own consciousness. Therefore, it is also a concept that extends from sharing the universality inherent in the Yeak system or culture to the political level. Therefore, the similarities shared across languages and borders by these four dynasties should be seen as a kind of universality that has no choice but to admit beyond the differences between times and regions. And the universality is based on Confucian ideology and Chinese character culture. That"s why there is clear evidence in music and Akjang which shows that Goryeo joined the ranks of the medieval dynasty from the angle of Yeak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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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社稷樂章의 성격과 의미

        조규익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1 어문연구(語文硏究) Vol.39 No.4

        Sajik Akjang consists of 4 pieces of poems, and it is formed with extracting and assembling with the phrases from Chinese classical documents or books. Sajik Akjang was an authentic Akjang played with A-ak. So it was formed with exact four letters' phrases. Its sources are most of poems in the Book of Songs, sometimes the I-ching and the Shoo-king are out of sight. Possibility of custom making Akjang in use until then outweighed urgent necessity about the reason why Sajik Akjang was assembled with poems from the Book of Songs. Goryeo Dynasty's custom accepted Chinese custom was continued to Joseon Dynasty. Therefore, even they made an important Akjang like Sajik with the method assembling pieces from the other documents or books. It was a method to secure an East Asian standard or universality. Like this, we can ascertain the characters of Sajik Akjang in showing the typical custom of Goryeo and Joseon Dynasty's Akjang as the representative authentic Akjang at that time. 社稷樂章은 모두 4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거의 완벽하게 中國 文獻들로부터의 摘句와 集句로 이루어졌다. 사직악장은 雅樂으로 연주되던 正格의 악장이었던 만큼 정확한 4언구로 이루어졌다. 그 典據들은 대부분 『詩經』이고, 간간이 『周易』이나 『書經〔 등도 보인다. 사직악장이 대부분 『시경』시들의 集句로 이루어진 것은 악장이 다급하게 필요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시까지 통용되던 악장 제작의 慣習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중국의 慣習을 수용한 高麗朝의 관습이 朝鮮朝로 이어져 사직악장 같이 중대한 악장을 집구로 만들기까지 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아시아적 標準이나 普遍性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처럼 당대의 대표적인 正格 祭禮樂章으로서 고려 및 조선조 악장의 典型的인 관습을 보여준다는 데서 사직악장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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