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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전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과 이주

        정용길(Yong-Kil Chung) 북한학회 2009 북한학보 Vol.34 No.2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 및 이주는 독일이 분단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독이 수립된 1949년부터 독일이 통일되던 해인 1990년 6월 30일까지 무려 5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서독인들의 동독으로의 이주는 겨우 47만 여명에 그쳤다. 이주자(Uebersiedler)란 넓은 의미로 동독과 서독사이의 모든 이동자를 가리킨다. 그들에는 모든 탈출자 즉,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국경을 탈출한 사람들을 일컫는 “Sperrbrecher", 또 공화국을 탈출한 사람들, 노령연금수령자 또는 이산가족이었다가 결합한 사람들, 가정적인 일오 합법적으로 동독정부의 허가를 받아 서독을 방문하였으나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독에 머문 사람들, 그리고 제3국을 통한 탈출자들 또는 1989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국가의 서독대사관에 진입하여 서독으로 온 사람들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 밖에도 동독인들의 서독이주에는 동독에서 반체제운동을 하다가 형사처벌을 받고 복역을 하던 사람들이나, 또는 서독으로 탈출을 기도하였던 동독의 이른바 정치범들을 서독정부가 비밀리에 석방거래를 통하여 데려 온 사람들이 있다. 이 연구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대체로 넓은 의미의 이주자이지만, 동독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으로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은 탈출자로 사용한다. 이 연구에서 알아 보고자 한 것은 우선 많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을 하거나 이주를 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이고, 그들의 탈출 및 이주방법과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이다. 그리고 동독인들의 탈출과 이주문제에 대하여 서독정부는 어떤 정책을 갖고,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결론부분에서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사태와 같은 일이 한반도 탈북자들의 문제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Immigrants (Uebersiedler) in broad term, refer to all those movers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This includes many of those who escaped in Germany during the cold war called Fluechtlinge-Sperrbrecher who got through the cross barrier between two Germanies, Republikfluechtlinge who escaped from the republic, rentner who regularly receive social-welfare checks, Familienzusammengefuehrter whose families are separated, but reunited in the end, familienfeiern Eingereister who personally and legally visited West Germany and did not return to East Germany, fluechtlinge ueber Drittstaaten who indirectly bypassed through the third countries, or Botschaftsbesetzer who penetrated through West German embassies in Hungary, the Czech Republic Poland and others. Besides, the migration from East to West Germany covers politische Haeftlinge, political prisoners whose antiestablishment activities had led him to the prison and secretly been released under West German government's bargaining deals. Though this study terms all those immigrants as Uebersiedler in the broad sense, we separate Uebersidelder from Fluechtlinge who took a risk and ran to West Germany without East Germany's permission. This study seeks the reason and background why many of East Germans have escaped or migrated to West Germany. Further, this study tries to find the routes and scopes of their migrations. This study thinks West German government's policies over those matters throughly and reflects its implications on north korean refugees in the conclusion.

      • KCI등재

        자본주의 미디어가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 동독과 북한비교를 중심으로

        안지호,현주 한독사회과학회 2017 한독사회과학논총 Vol.27 No.2

        1989년-1990년 사이에 독일통일의 창이 열렸던 골든타임에 동독 주민이 서독과의 평화로운 통일을 선택하는데, 서독의 방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 시작된 동독과 서독의 시청률 경쟁은 1970년대에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동독 정권의 기대와는 달리 동·서독 주민 모두가 동독의 방송을 외면하였으며, 서독보다는 동독이 상대국의 미디어 방송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수세적 입장이 된 동독정권은 동독주민들의 서독방송 접촉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서독방송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동독주민들은 통일 전까지 동독의 미디어보다는 서독의 미디어의 선호하고 신뢰하였다. 결국 동독의 미디어 정책은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동독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은 1990년대 이후부터 남한의 미디어 영상물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독의 사례를 통해 서방언론의 효과를 학습한 북한정권은 남한의 미디어 유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성장한 장마당을 통해 북한내의 남한미디어의 유입은 접경지역의 북한 주민들에서 내륙으로 점차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본 연구에서는 동독과 북한의 서방 미디어 유입의 과정과 정권의 대응, 효과를 분석하여 방송컨텐츠가 주민들의 정치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을 통해 남북교류와 통일준비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Between 1989-1990 Golden Age of Germany(which was open minded for Reunification of Germany), West German Broadcasting has played a decisive role in helping East German Residents choosing Peaceful Reunification of Germany. The war of the audience ratings of East German Broadcasting and West German Broadcasting (Selection of different country's Broadcasting with themselves' Broadcasting by East and West German residents) began in the 1960s and became more regularized in the 1970s. However, Against all expectations of East German Regime, Both East and West German Residents didn't give a attention to East German Broadcasting, and East German Broadcasting was influenced by West German Broadcasting more than West German Broadcasting was influenced by East German Broadcasting therefore East German Regime tried to solve the problem that East German Residents didn't care of East German Broadcasting. However, until the Reunification of Germany, East German Residents preferred and trusted West German Media rather that East German Media. The Media Policy of East Germany has failed. Since the 1990s South Korean Media Images also came in North Korea. Although it is still limited to some North Koreans, it is constantly increasing. In this study, researcher analyzed the each processes of Media inflow to each countries(East Germany and South Korea) and its impact to East German and South Korean Residents.

      • “나는 가 본 적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 동독의 제 3 세대: 동서독의 공통 정체성으로 가는 길

        레만토비아스 ( Tobias Lehmann ) 한국헤세학회 2014 헤세연구 Vol.31 No.-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이 된 지 거의 25년이 지났다. 1990년대 통일된 동독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해체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특히 동독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 변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많은 동독 전문가들은 통일 독일의 미래는 동독의 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동독의 제 3 세대는 동독식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서독식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동독과 서독의 두 국가 체제에서 사회화되었으며 오늘날에 우리는 그들을 독일의 전환기의 자식이라고 한다(Wendekinder). 이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1989년11월9일에 함께 경험하였고, 사태 격변으로 인해서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회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시기에 4-15 세였기 때문에 동독의 마지막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 논문에서 동독의 제 3 세대인들 전기들을 검토하면서 젊은 동독 여성과 남성이 진보적인 성향과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발전하고 사회화되었는지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 2002년에 출판된 “동쪽지역 아이들”(“Zonenkinder”) 전기를 분석하였다. 이책의 작가 야나 헨젤 Jana Hensel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시기에 열세 살이었다. 헨젤은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의 동독의 생활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포함한 동독출신의 젊은 세대가 같은 또래 서독 젊은이들에 비해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와야 했기 때문에 보다 성공적으로 위기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기된 이러한 주장들은 언론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며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최근 2013년에 출판된 “철의 아이들”(“Eisenkinder”) 이라는 동독의 대표적인 전기를 살펴보았다. 이 책의 작가는 사비네 레네판즈 Sabine Rennefanz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에 열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레네판즈는 통일 후 자신의 삶이 더욱 복잡해졌다고 말했으며, 특히 동독 교육제도의 변화가 뿐만 아니라 수업의 내용, 특히 사회, 역사, 문학 등 교육내용이 서독의 교육 규정 내용에 따라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학생들은 자주 싸우는 행동을 보여주었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는 성향도 나타나는 상황 때문에 학생 그리고 교사 중에는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이들 두 책을 중심으로 동독출신 젊은 세대가 통일 독일사회를 이끌어 갈 주역이 될 수 있을지 살펴보았다. 또한 통일 이후의 문제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통일 당시의 상황과 현재를 고찰하면서 위와 같은 문제를 제기해본 보았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후 25년이 된 현재까지도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독일은 여전히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진 나라가 아닐까?

      • KCI등재

        포스트-동독문학으로서 우베 텔캄프의 『탑』 읽기

        박정희 ( Park Chung-hi ) 한국독어독문학회 2021 獨逸文學 Vol.62 No.1

        동서독의 분단을 넘어 동서유럽을 나눈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된 지30여년이 흘렀다. 정치체제로서 동독이란 국가는 사라졌지만, 40여년의 동독 역사에서 생성된 흔적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동독문학은 이제 더 이상 자주 회자되지 않지만, 남겨진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성찰을 통해 포스트-동독문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본 글에서는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동독문학에서 전환기문학을 거쳐 포스트-동독문학까지 논쟁을 간단히 정리한 뒤, 가족소설, 시대소설, 역사소설, 전환기소설 등으로 회자되는 우베 텔캄프의 장편소설 『탑: 멸망한 나라의 이야기』(2008)를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며 포스트-동독문학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동독 40년 역사 중 마지막 7년 동안의 드레스덴의 ‘탑’ 구역에 살아가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한 966쪽의 서사 속에는 우선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다. 특히 작가의 경험을 공유한 17세의 주인공 크리스티안의 사회체제 안에서의 사회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교양소설의 일면도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기억문화로서 이 소설은 동독문학의 성역 같은 동독의 특권층과 인민군 내부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들춰내며 탈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 독재체제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찬찬히 그려냈다. 동독 사회주의 안에서 특권적 교양시민을 대변하는 호프만 가족의 운명은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은 동독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하는데, 기울어져가는 마지막 동독사회를 지배한 다양한 부정적 징후들을 담은 이 소설을 포스트-동독문학으로 포섭해 읽는 이유이다. In dieser Untersuchung geht es in erster Linie um die Frage, wo die DDR-Literatur zu situieren ist, denn sie erscheint in der deutschen Gegenwartsliteratur nach dem Fall der Berliner Mauer und der darauf folgendenen Wiedervereinigung Deutschlands nicht mehr relevant. Im Anschluss an die gesellschaftlich-politischen Umwälzungenen und Transformationsprozesse in der DDR um 1989/1990 wurden unter dem Stichwort ‘Wenderomane’ eine Fülle von literarischen Verarbeitungen veröffentlicht. In dem Monumentalwerk ‘Der Turm’(2008) mit einem Umfang von 966 Seiten konzentriert sich Uwe Tellkamp auf die bessere Gesellschaft in den letzten sieben Jahren der DDR in einem priviligierten Dresdener Villenviertel verkörpert durch eine ‘Turmgesellschaft’, wodurch man Verbindungen zu dem Bildungsroman Goethes ziehen kann. Das Auseinanderbrechen der Familie Hoffmann entspricht dem Kollaps des Staates oder dem Sturz des ‘gelobten Landes’. Bei den zahlreichen Beschreibungen des Turmviertels greift Tellkamp, der selbst in einem akademisch-bildungsbürgerlichen Milieu Dresdens aufgewachsen ist, auf Erlebtes zurück, was diesem Roman große Authentizität und Glaubwürdigkeit verschafft. Die Vielzahl der Stilebenen und Schreibformen - Dialoge, Briefe, Monologe, Tagebuchnotizen usw. - zeugen von einem literarisch anspruchsvollen Text und diese Komplexität zeigt, wie zwiespältig das Alltagsleben im DDR-Regime war. Der Autor nimmt mit Ironie, Melancholie und nicht zuletzt mit Zorn die ganze DDR-Wirklichkeit mit Arbeitswelt wie Braunkohletagebau, Nationaler Volksarmee, Staatssicherheit, Zensurverfahren etc. in den Blick. In diesem Sinne fungiert die ‘untergegangene’ DDR als ‘literarischer Gedächtnisort’ und bietet weiterhin Stoff für die Post-DDR-Literatur.

      • KCI등재

        독일 통일과 동독 이탈자를 통해 본 자유와 평등의 문제

        윤용선(Yun, Yong-seo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역사문화연구 Vol.49 No.-

        동유럽의 체제전환은 동독인과 동유럽인에게 사회주의에 이어 자유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그런데 두 이념과 체제의 차이는 다른 동구권 국가 국민들보다 서독의 흡수 통일을 선택한 동독인이 훨씬 더 선명하게 경험했는데, 그들은 서독이라는 이미 주어진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자유주의 세계에서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독인은 통일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독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유의 전제이자 대가인 불평등을 좀 더 신랄하고 강렬하게 경험해야 했다. 다른 동유럽 사회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된 후에 비로소 인식하게 될 실망과 불만을 동독은 처음부터 겪어야 했던 것이다. 통일 이전에 동독을 떠난 이탈자는 이러한 체험을 좀 더 일찍 한 경우였다. 동독에서 통일 이후의 서독이 불평등과 불만의 원인이자 대상이었다면, 통일 이전의 서독은 동독 체제의 비효율성과 부정적인 측면을 선명하게 부각시켜주는 이상적인 대안이었다. 그로 인해 서독은 지속적으로 동독인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이었고, 무려 360만 명에 이르는 동독인이 통일 이전에 서독의 흡인력에 이끌려 동독 땅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 과정 역시 실망과 절망으로 점철되었다. 동독인은 평등과 자유를 모두 경험한 이념사적으로 매우 소중한 경험적 자료이자 정보이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긴장관계는 물론 양자의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통일 후 20년을 훌쩍 넘겨버린 오늘날에도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여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동독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체제의 냉혹함과 배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 오늘날 동독인이 여전히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2) 단순히 막연한 기대만으로 이 체제를 선택한 그들이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통해 체제에 내재하는 불평등과 배타성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다. 이를 위해 통일 이전 동독을 떠난 사람들(이하 동독 이탈자)과 통일 이후의 동독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경험과 인식을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해석하고 평가해보고자 한다. For the East German and East European People the transformation of Eastern Europe meant an opportunity to experience western democracy and capitalist market economy after socialism and dictatorship. However,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ideologies and systems were experienced much more clearly by the East German People who were absorbed to West Germany through the reunification, than the people of the other Eastern Bloc countries. They had to begin the long and difficult journey in the liberalism under an structural inequalities, West Germany. Because of the presence of West Germany secured hegemony in the process of the unification they experienced the inequality as the premise and prices of the freedom more intensely. Therefore, East Germany must have had the disappointment and dissatisfaction from the beginning that other Eastern European societies would be aware of only after some time. The deserters who left East Germany before reunification had an experience of these sooner. In GDR, FRG after reunification is the cuase of the inequality and the target of complaints, while FRG before reunication was regarded as an ideal alternative to the inefficient and negative socialist system in east side of Germany. As a result, the West Germany attracted the East German people like a strong magnet leading a whopping 3.6 million people to West Germany before reunification. But the process their settlement in FRG also was accompanied with disappointment and despair. The people of GDR experienced both ot freedom an equality can be considered as an very important empirical data information in the history of thought. They show not only the tension between freedom and equality, but also the limits of both values. We find the brutality and aggression of liberalism and capitalism in the case of them who could still not integrated 20 years after reunification.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1) to show that they keep still distance from that systems, and also to show the inequality and exclusion that are inherent in the system with them, the people of GDR, who choose wrong with a vague expectation and, as a result, are confronting difficulties in integration today. This article looks forward to contribute to the debate on the problem of freedom and equality.

      • KCI등재

        통일 이후 독일영화에 나타난 동독상

        김누리(Kim, Nu Ry),최기훈(Choi, Kee Hoon)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 통일인문학 Vol.68 No.-

        이 논문은 독일이 통일된 이후 역사가 되어버린 동독사회의 모습이 어떠한 ‘문화적 기억’으로 재현되어 왔는지를 통일 이후 발표된 독일영화를 통해 살펴본다. 논문에서 〈존넨알레〉(1999), 〈굿바이, 레닌!〉(2003), 〈타인의 삶〉(2006)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이 영화들이 동독사회의 특정한 국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전형성), 영상 예술로서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예술성), 관객들의 폭 넓은 호응을 받았다(대중성)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 세 편의 영화에 나타난 동독사회의 모습은 서방세계가 동독 체제에 대해 갖고 있던 통념과 선입관을 확인시킨다기보다는 전복시키고 있다. 〈존넨알레〉는 동독의 청년세대가 서방의 젊은이들과 유사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했음을 보여주고, 〈타인의 삶〉은 동독의 지식인들이 감시와 억압 속에서도 사회주의의 이상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굿바이, 레닌!〉은 독일통일이 평범한 동독인의 일상에 미친 파괴적 영향을 그려내고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묻고 있다. 이 영화들은 또한 동독사회를 단순히 ‘반공주의’의 입장에서 악마화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존넨알레〉에서 동독사회는 이제는 사라진 우애와 선의의 공동체로서 동독에 대한 향수, 즉 오스탈지아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기억되며, 〈타인의 삶〉에서는 스탈린주의적 억압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의 분위기 속에서도 이상사회주의자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재현되고, 〈굿바이, 레닌!〉에서는 통일 이후 급속한 자본주의화가 몰고 온 인간성의 파괴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붕괴가 반어와 멜랑콜리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들은 동독인들의 ‘유토피아가 닿아있던 나라’(헬가 쾨니히스도르프)와의 ‘기품 있는 이별’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research analyses the ways in which the East German society has been represented as ‘cultural memory’ in the post-unification German cinemas. The films that are analysed in this research are the following: 〈Sonnenallee〉(1999), 〈Good Bye, Lenin!〉(2003) and 〈The Lives of Others〉(2006). These three films show the prototypical aspects of the East German society, with excellent cinematic quality and high popularity. These films overturn the widely spread prejudices of the Western world about the East German society rather than recognizing them. 〈Sonnenallee〉 shows the unexpected similarity of values and lifestyle between the young people of the East and West. 〈The Lives of Others〉 alludes to the cherished ideals of socialism in the mind of East German intellectuals even under the rigorously controlled system and severe oppression. Lastly, 〈Good Bye, Lenin!〉 captures the destructive influence of the German reunification on a mediocre East German family, and it questions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reunification from below. Furthermore, the three films have the common feature of not ‘demonizing’ the East German society from the perspective of ‘Anti-Communism’. For example, 〈Sonnenallee〉 depicts the East German society as a community of friendship and goodwill, although the virtue has faded away after the reunification. Hence the film evokes ‘ostalgie’, nostalgia for the East. 〈The Lives of Others〉 describes an idealistic socialist in a positive way even under the overwhelming atmosphere of criticism against the Stalinistic oppressive system. In 〈Good Bye, Lenin!〉, the destruction of humanity and socialistic utopia, a result from the rapid capitalization after the reunification, is portrayed from the perspective of irony and melancholy. In sum, these films can be characterized as ‘a dignified farewell’ to ‘the nation that has once stretched its hands to utopia’(Helga Königsdorf).

      • KCI등재

        통일 이후 동독 경제재건 위한 금융개혁 및 지원과 북한 지역 금융에 주는 시사점

        조봉현 한국통일전략학회 2015 통일전략 Vol.15 No.4

        Finance is one of the biggest role in Germany reunification. A total of 2,630 million DM was invested for east german economic reconstruction shortly after reunification 6 years. KfW has played a leading role in financial unification of Germany. Funds of 141.7 trillion won had been invested shortly after reunification 7 years(1990~96). Especially KfW has provided financial support for SME development in East Germany and it reached a total of 47.5 trillion won shortly after unification until 1996. There is a strong implication in North korea finance when reunification occurs. If Korean reunification ever happens, the normal financial system implementation should be established in North Korea. We should push ahead with the financial unification at multiple steps : South-North Korea financial cooperation -> Financial Reform and Opening of North Korea -> South-North Korea financial integration -> South-North Korea econimic integration and so on. Like the example of German reunification Finance, We should actively support the reunification fiance for activation of SME in Nortk korea when reunification occurs. 독일은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3일에 통일을 이루었다. 글로벌 경제 위기에도 독일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은 통일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통일 초기에는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정 기간 지나면서 통일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금융이다. 통일 직후 동독지역의 경제재건으로 동서독 지역의 경제적 이질감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동독지역의 금융개혁을 실시하여 시장경제가 확산되도록 하였으며,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축과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금융지원시스템을 가동했다. 그 결과 동독지역의 경제는 높은 성장세를 보이면서 서독 지역 경제수준까지 근접해 갔다. 동독지역 금융개혁의 기본 방향은 시장 경제적 금융제도를 구축하고 통화신용정책을 실시했으며, 동독지역에 맞는 새로운 지급결제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동독지역 금융기관을 새로운 상업은행으로 개편하고, 동독지역 금융시장을 개방하여 서독 및 외국은행의 진출을 유도하였다. 통일 직후 동독지역의 경제 및 산업 재건을 위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였다. 유럽부흥프로그램(ERP)특별기금 융자를 비롯한 자금 융자와 신용보증지원 등을 했다. 동독 지역 경제재건을 위해 통일 직후 6년간 총 2,630억 DM이 지원되었다. 통일에 따른 동독 지역 금융지원에서 독일재건은행(KfW)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통일 이후 7년간(1990~96년) 총 141.7조원의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는 동독 지역 총 투자액의 약 25%나 되었다. 특히 KfW는 동독 지역 중소기업 육성에 많은 금융을 지원했는데, 통일 이후 1996년까지 동독지역 중소기업 지원 실적이 총 47.5조원에 달했다. 그 결과 동독 지역 6만개 기업이 수혜를 받았고, 25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금융 수단을 통해 동독지역 중소기업을 집중 육성함으로써 동독 주민의 대규모 서독 이주를 막았으며, 동독 지역 경제를 단기간 내에 재건시킬 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 통일시 북한 금융에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 북한에는 아직 금융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못하다. 통일이 되면 우선적으로 북한 지역에 정상적인 금융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많은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통일금융이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남북한 금융협력 → 북한의 금융개혁 및 개방 → 남북한 금융 통합 → 남북한 경제 통합 등의 단계로 통일금융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또한 독일 통일금융의 사례처럼, 한반도 통일시 북한 지역에 중소기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통일금융을 적극 지원하고, 국책 금융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하도록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동독 과학기술체제 전환과 한국에 대한 시사점

        Werner Meske,이춘근,배용호 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5 정책자료 Vol.- No.-

        과학기술체제 통합의 원칙과 의미□ 동서독 과학기술체제 통합의 원칙○체제전환의 기본원칙은 이미 1990년 동서독 사이의 통일원칙에 대한 합의 과정에서 규정됨. 동년 6월 서독과 동독의 과학기술부 장관인 리젠후버(Riesenhuber)와 테페(Terpe) 사이에 통일 독일의 과학기술체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통합 원칙이 합의됨-과학기술분야 통일 협상은 통합 연구개발체제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며, 통합 연구개발체제는 서독의 연구개발체제를 특징짓는 분화된 구조를 갖추어야 함-이러한 통합 과정에서 구 동독의 과학원을 새로운 연구개발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임-동독의 민간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구역량을 유지하면서 서독과 유사한 연구개발 구조와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향후 과학과 경제의 발전에 필수적임○1990년 6월, 서독의 과학위원회(Wissenschaftsrat:Science Council)에서 12개의 권고안을 발표함-이 안에서, 기관의 연구 증진보다는 다양하고 효율적인 고등교육체계 창출의 중요성을 강조함ㆍ고등교육기관은 R&D의 기초를 형성하는 연구와 교육, 신진과학자의 훈련 등을 하기 때문임○통일조약(Unification Treaty) 38조는 “서독에서 달성되었던 것과 동일한 정도로 통일 독일의 R&D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며,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동독 내의 필수적인 연구능력은 유지되어야 하고, 과학, 연구 및 기술의 생산적 역량은 확대되어야 하며, 이러한 역할이 통일 독일의 국가 및 사회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천명함 □ 독일의 통일 과정과 과학기술체제 변화에 대한 의미○1989년 후반 동독의 정치적 변혁(베를린 장벽의 붕괴)과 그에 이어지는 독일 통일(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은 1990년 동독 사회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옴-이러한 통독과정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동독과 서독의 동등한 참여가 아닌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흡수 통일의 성격을 띰○이로 인해 적응의 시간이 부족하여 예기하지 못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의사결정들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져 정책이 의도한 효과를 달성하지 못함○통일 과정에서 동독의 과학기술체제가 범 독일 연구개발체제에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 고려되었지만, 동독의 입장에서 보면 통일과정에서 서독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동독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지 않아 통독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부담을 동독만이 짊어지게 됨-예를 들어 대학개혁과 동독 공공 R&D조직에 대한 평가에서 보이듯이 통일과정에서 동독이 새로운 효율적인 과학기술체제 구축의 기회를 상실함 □ 연구의 배경 및 구성○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서독과 동독의 과학기술체제 통합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는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는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함-다시 말하면 통일이 독일의 과학기술체제에 가져온 변화와 그 성과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필요함○이하에서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동독 과학기술체제 및 인력 구조의 변화와 그 의미, 그리고 통일 독일의 과학기술체제 변화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를 검토함 독일 통일 후 동독 과학기술체제의 변화1) 통일 전 동독 과학기술체제의 특징□ 통일 전 서독과 독일 과학기술체제의 특징○서독과 동독의 과학기술체제는 규모, 구조, 국제 협력과 기능 등에서 서로 다르게 발전함-서독은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자율이 보장되는 연구기관을 가진 차별화된 체제를 구축함-동독은 위계적 구조와 다양한 기능의 통합에 노력함○특히 동독의 혁신모형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학기술과 경제활동의 통합, 선형모형 개념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음-선형모형은 기초연구에서 응용연구, 개발 및 생산으로 이어지는 형태로서 기본적으로 생산을 강조하고 있음. 이것은 후에 환류(feedback)과정이 포함되는 선형모형으로 변화됨□ 통일 전 동독의 관리구조 및 과학기술시스템○혁신모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절한 관리 구조 형성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과학계, 교육계, 경제부문이 각각의 계층을 구성하고 이들 세 부문간에 수평적 관계가 유지되는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함-연구계획과 자원배분을 중앙에서 통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상위 관리조직은 지도 및 조정활동을 통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방향성을 유지하고, 하위조직(연구소와 기업)은 대개 계약에 기초하여 유관 기관간 실제 협력을 수행함○과학의 사회적 역할, 특히 과학의 생산에 대한 기여를 강화하기 위해 동독의 R&D 규모는 과학부문 및 산업부문에서 1960년대 이래 계속 확장됨-서독과 비교하는 경우 비대학연구(non-university based research)의 비중, 즉 산업체에 고용된 R&D 인력의 비중이 매우 높음 2) 통일에 따른 동독 과학기술체제의 구조 변화□ 동독 과학기술체제의 급격한 구조 변화○1990년 독일 통일 후, 과학기술체제를 비롯하여 동독의 각 체제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남○서독에서 동독으로의 “기관 이전”은 구 동독지역의 사회시스템 확립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여건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이는 민주원리, 시장경제 개념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구 서독 사회시스템과의 조화를 의도한 것임○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구조변화는 주요 R&D 부문의 침체를 가져옴-R&D 인력은 OECD 기준으로 1993년에 1989년의 3/1 수준, 즉 36% 정도로 급감함-1995년 이후에는 1989년의 40% 대 수준을 회복함○이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동독 R&D 체제의 제도적 전환이 이루어짐-특히 서독의 조직 모델에 따라 동독 연구체제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원, 대학, 산업 부문의 연구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함□ 과학원의 구조 변화○1990년 3월 동독의 총선거 결과 독일 통일의 방향이 예상치 않게 “서독연방으로의 동등한 자격으로의 편입”에서 “흡수에 의한 통일”로 급격히 전환되어 동독은 자주권을 상실하게 됨-이 같은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과학원은 생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음. 산하기관들도 통일 독일의 기관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관한 심각한 걱정을 하여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됨 □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의 구조 변화○과학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독일통일조약에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의 구조조정 방향이 명시되었고, 실제 구조 조정은 서독의 모델에 따라 진행됨○교육과 대학 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제도와 인력 변화는 비대학연구기관(과학원)처럼 급격하고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및 인프라의 재정비는 이루어지지 않음□ 산업 R&D의 구조 변화○동독의 산업R&D는 동독 산업의 붕괴 및 사유화에 따라 붕괴되고, R&D 인력의 20% 미만이 살아남음의 모든 산업 R&D는 몇 년 동안 정부에 의존하게 되었음○이 과정은 사유화기구(Treuhandanstalt:Privatisation Agency)에 의해 추진된 “갱신 보다는 사유화” 정책과 “보상 보다는 반환 (상환)” 원리에 의해 강화됨○이에 따라 산업과 농업부문이 크게 위축되어 1989년 이후 동독지역에서 3백만명(약 30%)의 인력이 감축됨 동독 R&D 인력 구조의 변화1) 관리직 인력 대체2) 동독지역 인력구조의 개편 체제 전환을 평가하는 세 가지 관점1) 동독 과학자의 관점□ 통독으로 과학활동에서 배제된 그룹□ 자발적으로 과학계를 떠났거나 퇴출이 강요된 그룹□ 과학연구기관에 계속 남아 있는 과학자 그룹2) 서독 과학자의 관점□ 체제 전환을 보는 시각□ 통독에 따른 서독 과학기술자의 수혜3) 통일 과학기술체제의 관점□ 문제 인식의 관점□ 독일 전체의 과학기술계에 미친 영향 한국에 대한 시사점□ 통일 독일의 경험□ 한국에 대한 시사점○남과 북의 과학기술체제가 상당히 다른 경로로 발전해 왔고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측을 균형 있게 평가하는 것이 필요함○통일 한국의 과학기술체제 변화에 있어서 생각해야 할 세가지 점-남북 양측의 동등한 권리와 상호 인정 및 통합 원칙의 동등 적용 필요-장기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연구 환경을 창출하기 위한 양측 과학기술 잠재력의 통합 추진-양측이 동감하는 통합방안 창출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이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통일 전에, 연구조직을 포함한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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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기 북한 - 동독의 외교관계(1953~1989): 협력과 갈등

        이경석,김경미 한국유럽학회 2016 유럽연구 Vol.34 No.3

        Foreign Relations between North Korea and East Germany during the Cold War period was strongly affected by Sino-Soviet relations. Before the détente in the 1970s, North Korea’s pro-China policy was the pivotal factor in deciding whether to pursue cooperation or conflict between North Korea and East Germany. Based on the Soviet foreign policy of cooperation among fraternal Socialist nations, from 1953 to 1962, East Germany provided economic aid, as well as science and technology support towards North Korea to restore its economy after the Korean War. However, in early 1960s, North Korea engaged in a pro-China policy during the Sino-Soviet conflict and North Korea-East Germany relations substantially cooled. After North Korea altered its foreign policy to an equidistant foreign policy between the Soviet Union and China in the mid-1960s, foreign relations between North Korea and East Germany were restored and gradually redeveloped. From 1970s, in accordance with North Korea’s self-reliance policy and General Secretary Erich Honecker’s economic- centric foreign policy, foreign relations between North Korea and East Germany considerably enlarged until the collapse of East Germany in 1989. However, both countries maintained relations during the Cold War period and was mainly limited to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transfer of science/technology. During this period, North Korea was heavily reliant on East Germany’s economic and technological support. 냉전기 북한-동독의 외교관계는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외 국제정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0년 데탕트 시기 이전까지 북한-동독의 협력관계 및 갈등관계는북한의 친(親)중국⋅반(反)소련 정책에 따라 결정되었다. 소련의 헤게모니 아래서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연대 기조에 따라 동독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부터 1962년 중⋅ 소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북한의 전후복구 사업을 위해 경제적 원조와 과학기술을 지원했다. 중⋅소 분쟁 시기에 북한이 친(親)중국⋅반(反)소련 정책을 펼치면서 동독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지만, 1960년 중반부터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대(對)동독관계가 복원⋅발전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의 자주노선과당시 동독 서기장 호네커의 경제중심적 외교정책이 맞물리면서 동독이 붕괴하기까지 북한과 동독은 경제⋅과학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협력을 확대해나갔다. 냉전기 동안 전반적으로 북한-동독 간 외교관계는 경제⋅과학기술분야에 국한되었고, 북한은 동독의 경제적 원조와 과학기술지원에 크게 의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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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슈테판 하임의 재이주 문제 -단편집 『명암』을 통하여

        서윤정 ( Yun Jung Seo ) 한국독일어문학회 2010 독일어문학 Vol.51 No.-

        1913년에 켐니츠에서 유대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슈테판 하임은 영원한 망명자라 할 수 있다. 김나지움 재학 중 독일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이 일어난 직후 프라하로 도망갔다가 미국으로 망명 했으며 그곳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작가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 슈테판 하임은 미국에서 군인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그곳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기사를 쓰라는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복을 벗었다. 미국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동독으로 재이주 했다. 동독으로 재이주한 다른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동독의 재건에 있어 사회주의 교육을 담당해야 했다. 국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하임의 문학작품들은 검열에 걸렸고, 출판금지가 되었다. 그는 작가는 사회를 사실적으로 작품에 표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소신 있는 비판적 작가활동으로 인해 작가로서의 활동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서독에서 출판했고 이런 그의 저항이 동독에 그를 박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재이주한 동독에서 자신의 작가로서의 입장을 표명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열망을 담은 작품 중의 하나가 l960년에 쓴 단편집인 『명암Schatten und Licht』이다. 단편소설 ‘미친 내 동생Mein verruckter Bruder’ 에서 그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서독과의 비교를 통해 동독의 현실을 비판하였고, 동독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단편소설인 `선물바구니Der Prasentkorb’ 에서 동독의 사회주의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 단편집의 대표작인 ‘훌륭한 2인자Ein sehr guter zweiter Mann’ 에서 작가는 동독의 현실을 비판하고 서독을 동경하는 내용을 담았으나 동독이 사회주의로 굳건히 자리들 잡고 현재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이 단편집을 통해서 슈테판 하임은 사회주의자인 자신이 선택한 동독의 현실과 그곳에 적응이 어려운 자신의 모습을 담았으며, 그럼에도 동독에서 사회주의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담았다. 이 단편집 외에도 하임은 많은 작품활동을 통해 서독에 동독의 현실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동독의 검열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비판했던 이상적인 사회주의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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