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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악원 무동과 기녀의 춤을 사가(私家)에 내려주다 : 정원용 회방연(回榜宴)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구 한국무용사학회) 2016 무용역사기록학 Vol.43 No.-

          이 글은 임금이 개인에게 내려주는 가무악인 사악(賜樂)에 어떤 춤이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은 회방(回榜)에 관해 전하는 기록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친척 여성이 쓴 한글가사인 <뎡상공 회방긔록>과 정원용의 일기인 『경산일기』를 토대로 회방연 의례와 관련된 사악, 그리고 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첫 단계로, 회방연 의례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았다. 경산 정원용의 회방연은 1862년 1월 1일에 철종이 내린 전교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회방과 관련된 궁궐 행차와 집안 잔치, 묘소에까지 회방 관련 의례가 이어졌고, 준비부터 회방 행사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는 세 달이 걸릴 정도였다. 두 번째 단계로, 회방연 사악의 면모를 파악하였다. 정원용에게 내려진 1등 사악은 전악(典樂) 1명, 악공 36명, 무동 10명, 오방무(五方舞) 5명으로 구성되어, 총 52명이었다. 이러한 구성은 『육전조례』의 1등 사악이 악사 1명, 전악 2명, 악공 20명, 무동 10명, 처용무 5명, 색리 1명으로 구성되어, 총 39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악공의 수가 더 많았다. 1등 사악으로 보내진 공연단은 예행연습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친 대궐 행차와 팔순 생일잔치, 마을에 음식 나눔과, 묘소의 연회에서도 공연활동을 수행하였다. 1등 사악의 공연활동 기간은 두 달에 이르렀다. 세 번째 단계로, 회방연 사악으로 공연된 춤을 살펴보았다. <뎡상공 회방긔록>에 따르면, 10명의 무동이 춤을 추었으나, 구체적인 춤 종목은 알기 어렵다. 기녀들은 회방연에서 장악원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기녀들이 정원용의 집에서 공연한 춤은 처용무․초무․검무․무고․선유락․포구락․향발․헌선도 등 8종목의 정재였다. 회방연 사악으로 공연되었던 춤 종목은 조선후기 궁중에서도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정재임이 확인되었다. 정원용 회방연의 사악을 한국 공연예술사에서 주목해야할 이유는 궁중의 문화가 개인 집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궁중공간에서 공적인 성격을 띤 악무는 개인공간에서 사적인 성격을 띤 잔치에서도 공연되었다. 이처럼 중앙의 ‘악’이 확산되고, 궁중악무의 향유층이 개인과 문중까지 확대되는 문화적 유통의 성격을 지니므로 ‘사악’은 조선의 춤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즉, 정재가 궁중에서 왕실을 위한 춤과 지방 관아에서 행사를 위한 연향 춤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공연되고 향유되었던 춤이라는 정재의 존재 방식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본 연구의 의미라 하겠다. This study begins with the question of what dances were performed in the Sa-ak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Sa-ak (賜樂) consisted of a director, musicians, female entertainers, boy dancers, and a Cheoyong masked dance group. The research objective is Jeongsanggonhoenangilok, which was written to celebrate Hoebang (回榜)’s 60th anniversary of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by Jeong Won-yong(1783- 1873). The Joseon wangjo sillok (朝鮮王朝實錄) and Akhakgwebeom (樂學軌範) were also sources of background material, consisting of official records and literary works, that were subject to review. In terms of the rites of the Hoebang, on January 1, 1862, the king gave orders. In addition to feasting by the royal family, the government allowed citizens to also participate in festivals, many of which were held over the course of two months. Relative to the Sa-ak, the king established the first degree of Sa-ak, which consisted of a total of 52 people: 1 director, 36 musicians, 10 boy dancers, and 5 Cheoyong masked dancers. They performed for two months. In terms of the performances, the repertoires of the boy dancers were not recorded and remain unknown. While it was performed leisurely, it gave a feeling of flourishing and colorful. The female entertainers performed seven kinds of dances along with the Jangagwon orchestra: Cheoyong masked dance, sword dance, drum dance, pogulak (dancing ball into hole), seonyulak (dancing to play on the ship), and hyangbal heonseondo (dancing to give a long life peach). These repertoires were the most popular forms of jeongjae (呈才) in the late Joseon court. The Sa-ak was performed as part of a private feast. “Sa-ak” is an important keyword for understanding the culture of Korean dancing, because it spreads as “Sa-ak” in private space, and has the character of cultural circulation in which the enjoyment of royal court dance extends to individuals.

        • KCI등재

          純祖代 呈才 創作樣相 : 중국 문헌의 수용을 중심으로

          조경아 한국음악사학회 2003 韓國音樂史學報 Vol.31 No.-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an aspect of receive Chinese literature on cho˘ngjae 呈才 invention in the reign of King Sunjo. This study is based upon such aource materials a government office document called Muja chinjak U˘igwe 『戊子進爵儀軌』(1828) and Kich'uk chinch'an U˘igwe 『己丑進饌儀軌』(1829). The first case, it receive of cho˘ngjae movement are Kainjo˘nmoktan 佳人剪牧丹, Mangso˘nmun 望仙門, Ch'unaengjo˘n 春鶯??, and Ho˘nch'o˘nhwa 獻天花. The second case, it receive of cho˘ngjae composition element are Yo˘nhwamu 蓮花舞, Yo˘ngji 影池, Ch'undae okch'ok 春臺玉燭, Ch'imhyangch'un 沈香春, Musanhyang 舞山香, Pakcho˘p 撲蝶, and Koguryo˘ 高句麗. The third case, it received with established cho˘ngjae element are Mansumu 萬壽舞, Posangmu 寶相舞, Hyangryo˘ng 響鈴, and Kongmangmu 公莫舞. The fourth case, it receive of cho˘ngjae name are Kyo˘ngp'ungdo 慶豊圖, Changsaeng poyo˘njimu 長生寶宴之舞, Chesuch'ang 帝壽昌, Ch'oehwamu 催花舞, and Ch'ungwangho 春光好. The fifth case, it non-receive are Saso˘nmu 四仙舞, Yo˘nbaekpokchimu 演百福之舞, and Ch'o˘psu˘ng 疊勝.

        • KCI등재후보

          일제강점기 기록을 통해 본 춘앵전의 역사성

          조경아 한국무용예술학회 2010 무용예술학연구 Vol.29 No.-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process performing Chunaengjeon (春鶯), Dance of the Spring Oriole) from historical viewpoint. The core of history is the change. Therefore this study will focus on the change following the period, space of the performance, and dancers. The scope of time period for this research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research objectives are Joseon aak(朝鮮雅 ·), Joseon miin bogam(朝鮮美人寶鑑), modern newspaper, and magazine. The first performance of Chunaengjeon in 1828 June 1st. King Sunjo’ son, Hyomyeongseja had created the Chunaengjeon musical texts called as akjang. The place for performance was the Yeonggyeongdang(演慶堂) and the dancer was a boy called as mudong(舞童), Hyeong-Sik Kim(金亨植). Yeonggyeongdang Jinjak which introduced new nineteen items of jeongjae has omitted ceremony, and had less people invited with less political intention relatively. Chunaengjeon performed by female dancers called as gisaeng(妓生)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1945). After the female dancers belonged to the Royal Palace had been dissolved in 1908, than the dancers belonged to gisaengjohap(妓生 組合)or gweonbeon(券番) and performed the Chunaengjeon. The performance places were various such as restaurant, playground, etc. Consequently met the spectator who is various. Gisaeng learned Chunaengjeon form the teacher in the Yiwangjik Aakbu(キ王職雅キ部). Until 1945, Chunaengjeon had been popular and represented traditional dance. Chunaengjeon performed by mudong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1945). Mudong’ Chunaengjeon had been performed two times from the royal palace in 1923 and 1930.

        • KCI등재

          조선시대 일본 사신의 춤 향유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구 한국무용사학회) 2015 무용역사기록학 Vol.37 No.-

          이 글의 목적은 춤의 국제 교류라는 측면에서, 일본 사신이 조선에서 향유한 춤의 양상을 밝히려는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국제 관계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달라졌으며, 그에 따라 춤의 무대가 되었던연향 공간도 달라졌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도착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과 서울에서 연향이 베풀어졌다. 반면에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래에서만 사신 일행이 머무를 수 있었으므로, 연향역시 동래에서만 베풀어졌다. 일본 사신연은 지역 교방의 예술적 기량을 높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것이다. 일본 사신연에서 여악과 무동 중, 누가 공연을 담당할 것인가는 지속적인 논쟁거리였다. 일본 사신을위한 잔치에서 주로 여악이 춤을 추었으며, 세종․세조․선조․중종․광해군․숙종 대에 부분적으로무동이 춤을 추었다. 성종대에 일본 사신연에서 기녀는 12인부터 24인까지 편성되었으며, 연산군대는300명의 기녀가 구성되어 일본 사신을 위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일본 사신이 향유한 춤종목은 전하지 않아서, 사신연이 아닌 다른 의례 기록에서만 전한다. 일본 사신은 세종대 회례연에서 <문무>․<무무>․<몽금척지기>․<오양선지기>․<동동지기>․<무고지기>를보았다. 단종대에는 <봉래의>, 세조대 회례연에는 <정대업지무>와 <보태평지무>를 감상했고, 성종대에는 <초무 금척무>를 비롯해 임금이 지정한 정재를 보았다. 회례연에 일본 사신이 참여했고, 일본 사신을 위해 별도로 창작된 정재가 없었으며, 일본 사신을 배려한 춤에 관한 언급도 없고, 임금이 권유하여일본 사신이 춤추기도 했다는 점에서 중국 사신과 일본 사신의 접대와 춤 향유에는 큰 차이가 나타났다. 사대의 관계인 중국과, 교린의 관계인 일본과의 국제적 관계 차이는 사신의 춤 향유에서도 반영되었다. 특히, 1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일본 사신 일행과 조선 관원을 관객으로 하여 춤추는 장면이 유일하게 등장한다. 동기와 기녀가 추었던 춤 공간은 사신연에서 이루어진 조선시대 춤의 국제 교류 현장이었다. This study starts from the question of what kind of dance had been appreciated by Japanese envoys. The scope of time period for this research is the Joseon Dynasty. The research objective is Joseon-wangjo-sillok (朝鮮王朝實錄), Akhakgwebeom (樂學軌範), all of source materials from official record and many literary works. First, Japanese envoys were enjoying the dance on the way to Seoul. In the Gyeongsangdo, Chungcheongdo, Gyeonggido, the banquets were held for Japanese envoys. Particularly, most performances took place in Gyeongsangdo. Thus the hosting for the Japanese envoys has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dance culture Gyeongsang region. Unfortunately the dance repertories are not known . After Imjin War, the feast and dance performances for Japanese envoys have existed only in Dongrae. Dancing performances performed in Japan House in Dongrae is seen in Dongrae-busa-jeobwae-sado (東萊府使接倭使圖). Secondly, the dances which were enjoyed by Japanese envoys in the court are Munmu, Mumu, Mongkeumcheok, Oyangseon, Dongdong, Mugo, Jeongdaeeop, Botaepyeong, and Bonglaeui. And those are called as court dance, jeongjae(呈才). Depending on the time, gisaeng and boy dancer were dancing performances for the Japanese envoy. The dance was not created for the Japanese envoys. In this regard, it can be seen that significantly less than the Chinese envoys. Third, Japanese envoy was also dancing in the royal feast. As the nationalities of audience and performers were different, the dances performed for Japanese envoys in Joseon Dynasty were kinds of international exchange.

        • KCI등재

          정도전 악장 정재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을 중심으로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 2014 무용역사기록학 Vol.33 No.-

          이 글은 정재가 지닌 융합적 성격을 고려하면서, 정재의 의미에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그가 지은 악장은 조선시대에 표본적 역할 을 했으며, 이후 정재의 형태로 공연되어 대한제국까지 지속되었기에 그의 악장 정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 7월에 태조에게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그 중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이 나중에 정재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정도전 악장의 정재인 <몽금척>․<수보록>․<문 덕곡>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는 무엇가? 그 상징이 어떻게 조선시대에 지속되었으며, 현재적 의미 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조선시대로 한정하며, 대한제국기를 포함한다. 연구방법은 정재가 기록된 사료와 도상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문헌연구방법을 택했다. <몽금척>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꿈에 신인이 내려와 천명을 상징하는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금척’은 곧 ‘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尺]는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한다. 치어의 내용에 서 금척을 받을 인물의 조건은 문무를 겸하고, 덕이 있으며,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고,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 이었다. 1인이 읊는 치어가 하늘 뜻을 대표한 것이라면, 12명의 함께 노래하는 창사는 많은 백성들의 뜻이라 는 것을 시각화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금척사에서는 ‘유덕’과, ‘백성들의 마음’을 강조했다. 창사를 부르면 서 점진적으로 춤도 확대되는데, 천 억대를 이어가라는 금척사의 메시지의 확대와도 상응하였다. 마지막 퇴구 호에서는 경계의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수보록>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이상한 글이 쓰여 있는 ‘이서’를 지리산의 석벽에서 사람이 얻었는데, 이후에 태조가 즉위하여 이 글이 실현되었다는 내용이다. <수보록>의 춤에서 핵심적인 상징은 ‘보록’이라는 무구이다. ‘금척’이 하늘에서 천명으로 신인이 내린 것이라면, ‘보록’은 살아있는 사람이 전해준 것이나, 왕업 이라는 상징은 상통한다. 춤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지선(地仙)인데, <수보록> 악장에 없던 새로운 역할로 등장 했다. 보록사를 창한 뒤에 전체 6대의 18인의 무원이 이중으로 줄지어 세 차례 도는 춤동작은 창사의 내용이 모두 이루어지라는 온 백성의 염원과 소망을 담은 듯하다. <문덕곡> 정재에서는 백성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문덕곡> 악장은 태조 이성계가 언로(言路) 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예악을 정리한 것을 치적으로 찬양한 내용이다. 표면 적으로는 공덕을 기리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정도전이 건의하여 진행 중인 네 가지 사안이 앞으로 조선왕 실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세 악장은 늦어도 태종대에 정재로 만들어져서 각종 의례에 쓰였다. 태종대에는 <몽금 척>과 <수보록>의 내용이 꿈에 일어난 일과 도참설일 뿐 태조의 실제 덕이 아니라고 비판받았으나 세종대는 다시 <몽금척>과 <수보록>을 활발히 공연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몽금척>만이 연향에서 자주 공연되었 으며,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도전 악장의 정재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하는 발언이자 제언이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부르는 악장을 단순 히 임금의 공덕이나 치적을 받들어 올리는 송덕이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으로만 이해하면 평면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 오히려 정도전이 악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위정자로서 칭송받을 만한 공덕을 지니고 있어야 한 다는 ‘경계’의 시각과, 천명과 민심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낮고 무겁게 깔려 있다. 정도전의 민 본사상이 그의 세 악장 정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정도전의 악장에서는 민심을 반영하는 좋은 국가 를 만들기 위해 군주로서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천심, 즉 민심을 떠난 왕과 왕실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고국정자의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 는가?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오늘날에도 정도전의 악장 정재가 주는 ‘묵직한 울림’은 여전하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eaning and historicity included in the songs, dances, and music of performing court dance called as Jeongjae(呈才), especially songs written by JeonDojeon. Monggeumcheok(夢金尺), Suborok(受寶籙), Mundeokgok(文德曲) were produced by Jeondojeon during the reign of Taejo. His songs had a contained in the request as a puisne. The scope of time period for this research is from Joseon to Imperial Daehan(大韓帝國). The research objective is Joseon wangjo sillok(朝鮮王朝實錄), Akhakgwebeom(樂學軌範), all of source materials from official record of court event called Uigwe(儀軌), Jeongjae Mudo Holgi(呈才舞圖笏記) and many literary works. First, Geumcheok in Monggeumcheok Jeongjae symbolizes the command of the skies. Geumcheok to take upon command to convey the role of the god of the sky symbolizes. Yiseonggye was a metaphor for a man of virtue, in the song of Geumcheok. Depending on the song, the dance moves gradually expanded. Thaejo was a metaphor for a complete human, in the song. Depending on the song, turned into a big circle all the dancers, symbolizing hope was to receive all the blessings. Watch out for the end and leave a message. Second, Suborok can show the symbolic message of the land. Dancing tool called Borok is a key symbol. There are written prophecy, Yi Seonggye would become the king. These commands are passed to the land of the gods appeared in dance. Borok singing finished, all dancers turns into a circle. The circle is a metaphor, the content of the song want done. Third, Mundeokok can show the symbolic message of the 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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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춤 향유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구 한국무용사학회) 2014 무용역사기록학 Vol.35 No.-

          이 글은 중국 사신(使臣)이 조선시대에 어떠한 춤을 향유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중국 사 신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주요 사행로는 의주(義州)-정주(定州)-안주(安州)-평양(平壤)-황주(黃州)-개 성(開城)이었다. 사행로의 주요 길목에서는 사신 접대의례와 더불어 사신 위로연이 열렸고, 춤 공연도 함께 베풀어졌다. 세종대에 큰 고을에서는 백여 명이 넘는 여악(女樂)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춤 공연뿐만 아니라 산대와 잡희, 무예 등도 수반되기도 했다. 또한 한강나루에서 기생이 춤과 노래를 연 출해서 태평성대의 모습을 사신에게 보여주려고도 했다. 명 사신이 궁중에서 향유한 조선의 춤은 주로 정재였다. 태종대에는 <오양선>ㆍ<연화대>ㆍ<포구 락>ㆍ<아박>ㆍ<무고> 정재가 공연되었다. 이들 정재가 고려부터 이어져온 정재였다면,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악무 창작도 적극적으로 이어졌다. 태종대에 창작된 <근천정>ㆍ<수명명> 과 세종대에 창작된 <하황은>ㆍ<하성명>ㆍ<성택>정재는 모두 명 사신을 위한 연향에서 쓰기위한 목적 으로 만들어졌다. 명과의 조공-책봉 관계가 춤의 내용으로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세조대 사신연에 는 조선 태조의 승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정대업>이 공연되기도 했다. 명 사신은 조선의 춤을 감상하 는데만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춤을 소개하기도 했고, 직접 기녀의 무구를 들고 춤추기도 했다. 명 사신을 위한 춤 공연을 주로 여악이 담당했다면, 청 사신을 위한 춤 공연은 주로 무동이 담당했다 는 점이 가장 큰 변화였다. 청 사신이 의주에서부터 주요 도정에서 연향을 행할 때 무동이 춤 공연을 담당했다. 따라서 청 사신이 연도에서 향유한 춤종목은 명 사신보다 적었을 것이다. 또한 명 사신을 위한 연향에서는 명나라를 칭송하는 내용이 적극적으로 정재에 반영되었다면, 청 사신을 위한 연향에서 는 춤의 내용이 탈각되었다. 청 사신을 위한 궁중의 사신연은 통문관지(1720)에 따르면, <광수무>ㆍ<아박무>ㆍ<향발무>ㆍ<무고> 등 네 종목이었는데, 모두 내용보다는 움직임 위주의 정재로 종목이 구 성되었다. This study starts from the question of what kind of dance had been appreciated by Chinese envoys. The major spots where Chinese envoys visit are Uiju-Jeongju-Anju-Pyeongyang-Hwangju- Gaeseong and there are banquets for Chinese envoys, with female professional entertainer, called as gisaeng’ s dance performance. According to Joseonbu朝鮮賦, solmu率舞 which is a type of group dance was performed in Pyeongyang and Hwangju. Dance was included even in various amusements. And it was intended to show the very peaceful time to Chinese envoys through performing dance and song by gisaeng at han river. Also small scale dance was performed in Chinese envoy's personal space. The dance which was enjoyed by China Ming envoy in court banquets for Chinese envoys is <Oyangseon>․<Yeonwhada>․<Pogurak>․<Abak>․<Mugo>․<Geuncheonjeong>․ <Sumyeongmyeong>․<Hahoangeun>․<Hasungmyeong>․<Seongtaek>․<Jeongdaeeop>, court dance called as jeongjae(呈才). The number of gisaeng who entertained Chinese envoys was forty, during the reign of king of Sejong. The number of dances which has been enjoyed by the Qing dynasty envoys is smaller than what has been enjoyed by the Ming dynasty envoys. The number of parties and dance performances for Qing envoys in local is also smaller than Ming dynasty envoy's case. The Qing dynasty envoys appreciated jeongjae which was performed by dancing boys as called mudong in the court. According to diplomatic records in 1720, as called Tongmunganji, those were <Gwangsumu>ㆍ<Abak>ㆍ<Hyangbalmu>ㆍ<Mugo> etc.

        • KCI등재

          정도전 악장 정재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을 중심으로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 2014 무용역사기록학 Vol.33 No.-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eaning and historicity included in the songs, dances, and music of performing court dance called as Jeongjae( 呈才 ), especially songs written by JeonDojeon. Monggeumcheok( 夢金尺 ), Suborok( 受寶 籙 ), Mundeokgok( 文德曲 ) were produced by Jeondojeon during the reign of Taejo. His songs had a contained in the request as a puisne. The scope of time period for this research is from Joseon to Imperial Daehan(大韓帝國). The research objective is Joseon wangjo sillok( 『 朝鮮王朝實錄 』 ), Akhakgwebeom( 『 樂學軌範 』 ), all of source materials from official record of court event called Uigwe( 儀軌 ), Jeongjae Mudo Holgi( 『 呈才舞圖笏記 』 ) and many literary works. First, Geumcheok in Monggeumcheok Jeongjae symbolizes the command of the skies. Geumcheok to take upon command to convey the role of the god of the sky symbolizes. Yiseonggye was a metaphor for a man of virtue, in the song of Geumcheok. Depending on the song, the dance moves gradually expanded. Thaejo was a metaphor for a complete human, in the song. Depending on the song, turned into a big circle all the dancers, symbolizing hope was to receive all the blessings. Watch out for the end and leave a message. Second, Suborok can show the symbolic message of the land. Dancing tool called Borok is a key symbol. There are written prophecy, Yi Seonggye would become the king. These commands are passed to the land of the gods appeared in dance. Borok singing finished, all dancers turns into a circle. The circle is a metaphor, the content of the song want done. Third, Mundeokok can show the symbolic message of the human. 이 글은 정재가 지닌 융합적 성격을 고려하면서, 정재의 의미에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그가 지은 악장은 조선시대에 표본적 역할 을 했으며, 이후 정재의 형태로 공연되어 대한제국까지 지속되었기에 그의 악장 정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 7월에 태조에게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그 중 <몽금척>․<수보록>․<문덕곡>이 나중에 정재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정도전 악장의 정재인 <몽금척>․<수보록>․<문 덕곡>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는 무엇가? 그 상징이 어떻게 조선시대에 지속되었으며, 현재적 의미 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조선시대로 한정하며, 대한제국기를 포함한다. 연구방법은 정재가 기록된 사료와 도상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문헌연구방법을 택했다. <몽금척>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꿈에 신인이 내려와 천명을 상징하는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금척’은 곧 ‘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尺]는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한다. 치어의 내용에 서 금척을 받을 인물의 조건은 문무를 겸하고, 덕이 있으며,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고,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 이었다. 1인이 읊는 치어가 하늘 뜻을 대표한 것이라면, 12명의 함께 노래하는 창사는 많은 백성들의 뜻이라 는 것을 시각화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금척사에서는 ‘유덕’과, ‘백성들의 마음’을 강조했다. 창사를 부르면 서 점진적으로 춤도 확대되는데, 천 억대를 이어가라는 금척사의 메시지의 확대와도 상응하였다. 마지막 퇴구 호에서는 경계의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수보록> 정재는 태조가 즉위 이전에 이상한 글이 쓰여 있는 ‘이서’를 지리산의 석벽에서 사람이 얻었는데, 이후에 태조가 즉위하여 이 글이 실현되었다는 내용이다. <수보록>의 춤에서 핵심적인 상징은 ‘보록’이라는 무구이다. ‘금척’이 하늘에서 천명으로 신인이 내린 것이라면, ‘보록’은 살아있는 사람이 전해준 것이나, 왕업 이라는 상징은 상통한다. 춤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지선(地仙)인데, <수보록> 악장에 없던 새로운 역할로 등장 했다. 보록사를 창한 뒤에 전체 6대의 18인의 무원이 이중으로 줄지어 세 차례 도는 춤동작은 창사의 내용이 모두 이루어지라는 온 백성의 염원과 소망을 담은 듯하다. <문덕곡> 정재에서는 백성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문덕곡> 악장은 태조 이성계가 언로(言路) 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예악을 정리한 것을 치적으로 찬양한 내용이다. 표면 적으로는 공덕을 기리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정도전이 건의하여 진행 중인 네 가지 사안이 앞으로 조선왕 실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이었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세 악장은 늦어도 태종대에 정재로 만들어져서 각종 의례에 쓰였다. 태종대에는 <몽금 척>과 <수보록>의 내용이 꿈에 일어난 일과 도참설일 뿐 태조의 실제 덕이 아니라고 비판받았으나 세종대는 다시 <몽금척>과 <수보록>을 활발히 공연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몽금척>만이 연향에서 자주 공연되었 으며,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도전 악장의 정재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하는 발언이자 제언이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부르는 악장을 단순 히 임금의 ...

        • KCI등재

          그림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춤 문화 Ⅰ : 왕실공간의 춤 그림

          조경아 무용역사기록학회 2019 무용역사기록학 Vol.55 No.-

          이 연구의 목적은 춤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의 춤 문화를 읽어내려는 것이다. 연구대상은 왕실공간에서 춤추는 모습이 그려진 22종의 그림이며, 이본과 모사본을 포함하면 37종이다. 연구방법은 도상과문헌 연구를 기본으로 했으며, 아래의 여섯 가지 키워드로 춤 그림을 읽고자 했다. ‘언제’라는 시간적 측면에서 보면, 왕실공간의 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중종대에서 고종대까지이다. 특히 춤 기록이 소략한 조선 전기의 춤 그림 두 점은 매우 소중하다. 춤 그림이 그려졌던 때는 왕실의생신잔치가 다수였으며, 관료나 공신을 위로하는 잔치 때, 청 사신을 접대할 때, 사직과 종묘 제사 때였다. ‘어디서’라는 공간적 측면에서 보면, 궁궐 안팎의 춤 그림이 모두 존재했다. 5대 궁궐의 춤 그림을통해 궁궐 공간은 왕실뿐만 아니라, 관료들도 춤을 향유하는 공간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궁궐 밖의 교외, 행궁, 종묘와 사직 공간의 춤 그림으로 왕실 춤 공간의 외연이 넓었음이 입증되었다. ‘누가’라는 춤 관객과 공연자의 측면에서 보면, 중종대에서 영조대까지는 남성 관객만 왕실공간의춤 그림에 그려졌다. 여성 관객이 춤 그림에 첫 출연한 것은 정조대였는데, 왕의 어머니인 혜경궁홍씨가 여성으로서 춤 그림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춤 그림에서 공연자는 여령, 무동, 처용무원, 악공, 관료로다양했다. 근정전에서 서연관에게 내려준 잔치를 그린 <중묘조 서연관 사연도>(1534)는 정전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기녀가 춤추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악(賜樂)’의 구성에 기녀의 ‘춤’이포함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매우 중요하다. 광해군이 공신에게 내려준 잔치를 그린 <녹훈도감 선사어선 연회도>(1613)도 인정전이라는 정전 공간에서 기녀가 춤추는 장면을 그렸다. 숙종대와 영조대처럼 무동의 춤 그림만 남아 있는 시기도 있으나, 이후 여령은 내연의 춤을, 무동은 외연의 춤을 담당했던 현상이 그림으로도 반영되었다. 관료가 춤추는 그림은 <서총대 친림사연도>(1560) 한 점만이 전하는데, 임금이 계신 잔치에서 관료가 춤추는 문화가 있다는 문헌기록이 그림으로도 증명되었다. ‘어떻게’라는 춤을 그리는 방식의 측면에서 보면, 한 화면에 여러 정재를 동시에 그리는 방식은 정조대에 시작되었다. 영조대까지는 한 가지 춤만 그려졌다. 공연된 춤이 모두 병풍그림으로 그려지는 현상은 순조대부터인데, 공연된 춤을 빠짐없이 남기려는 기록성은 이때를 정점으로 하여 대한제국기에 소략해졌다. 당시 인기 있었던 춤은 그림으로도 자주 그려졌다. 외연에 비해 내연을 그린 그림에서 춤은비중이 높았다. ‘왜’ 왕실공간을 그린 기록화에서 춤의 비중이 컸을까를 생각하면, 왕실공간에서 실제 차지하는 춤의문화적 위상과 정비례하지 않을까 한다.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understand the dancing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period(1392~1910) by examining dancing pictures in multi-level. The objects of the analysis are 22 pictures of dancing in royal space, 37 pictures if one counts copies and different editions. Iconography and literature research are used as basic research methods, and comparative study is used as well. Chronologically speaking, the pictures of dancing in royal space had been drawn from Jungjong(1488~1544, r.1506~1544) to Gojong(1852~1919, r.1863~1907) in Joseon Dynasty. In terms of space, royal palace is the space where the royal family and officials enjoyed dancing. In terms of audience-performer, there are only male audiences in dancing pictures from Jungjong to Yeongjo(1694~1776, r.1724~1776) but female audiences appear from Jeongjo(1572~1800, r.1776~1800). The performers in the dancing pictures are various like female dancers entertainer called as ginyeo, boy dancers called as mudong, cheoyong dancers, and even officials. In later times, the dancing ginyeo becames noticeable. It has been proven by the pictures of dancing officials that the officials were dancing in the party with a king. In terms of the way of drawing dancing, it has been started from Jeongjo that multiple jeongjae appear in one scene as if they are performed simultaneously. In Soonjo(1790~1834, r.1800~1834), dance painting accurately reflected the performance. All the dances performed were pictured. Gradually, however, during the Korean Empire, only some of the dances performed were painted. Popular dance was drawn frequently. I suggest that the importance of dance in record pictures of royal space is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importance of dance in re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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