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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敎科書編輯彙報』 발간과 ‘國史’ 교육 방침

        조건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9 동국사학 Vol.6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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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utilized as guide and tool for Japanese colonial policy through publishing Itemized collection of edited textbook(敎科書編輯彙報) from 1938. At first the governmental general planned to issue twice per year but sometimes issued 3 times in 1940 and 4thtimes in 1941. There was the regulation of issuance but issuance of the collection is known to happen fluidly according to the time without sticking to the regulation. The collections of edited textbooks can be found with all 12 books from Vol.1 to Vol.11 and additional Vol.13. Vol. 12 and 13 are attached to ‘Geography Special’ and Vol.8 to Vol.11 are ‘Elementary Special Volume’. At that time they were made up newly based on system and contents tailored to the issuance of textbook of the related subject and change in educational policy. The collection attracting attention with regards to ‘History’ education among the itemized collections of edited textbook are Vol. 3 and Vol. 6. Vol.3 issued in April 1939 contained the characteristics of history geography and history textbook and time and textbook distribution according to the point of Joseon Education Ordinance announced 1 year ago. Vol.6 is composed by Editoria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Management Bureau in honor of issuing after revising Elementary National history for 5thgrade. Announcing revised Joseon Education Ordinance in late 1930s, publishing textbook accordingly and issuance of the itemized collection of edited textbook is crucial in terms of showing the procedure of educating Japanese Colonial Policy of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detail. 조선총독부는 1938년부터 『교과서편집휘보』를 발행하여 황국신민화 교육을위한 지침서 및 도구서로 활용하였다. 처음에는 매년 2회 발행을 계획했으나 1940 년 3회, 1941년에는 4회 발행되기도 했다. 발행 규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시국’에 따라 유동적으로 발행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교과서편집휘보』는 모두 12권으로, 제1집부터 제11집까지, 그리고 제13집 별편이 남아 있다. 『교과서편집휘보』 제6집은 ‘국사특집’, 제7집은‘지리특집’, 그리고 제8집부터 제11집까지는 ‘국민학교특집’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 당시 해당 과목의 교과서 발행과 교육정책 변화에 따라 체제와 내용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교과서편집휘보』 중 ‘국사’ 교육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편은 제3집과 제6집이다. 1939년 4월 발간된 제3집에는 1년 전 발포되었던 개정 조선교육령의 취지에 따라 당시 『국사지리』와 『국사』 교과서의 특징, 그리고 시간 및 교재 배당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제6집은 『초등국사』 5학년용의 개정 발간을 맞아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서 특별히 구성한 것이었다. 1930년대 말 개정 조선교육령의 발포와 그에 맞춘 교과서 발행, 그리고 『교과서편집휘보』의 발간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황민화교육 시행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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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C와 AHP를 활용한 중소기업기술지원사업 성과평가 : 광산업기술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조건,정경호,이경재,박이숙 한국산업경제학회 2011 산업경제연구 Vol.24 No.6

        본 연구에서는 균형성과표(balanced score card: BSC)와 계층분석적 의사결정기법(analytic hierarchy process, AHP), 중요도-만족도 연관분석(importance-performance analysis, IPA) 등을 활용하여 정량적 측면과 정성적인 측면을 동시에 고려한 중소기업기술지원사업의 성과평가모형을 개발하고자 하며, 광산업기술지원사업 수혜기업을 대상으로 이 모형에 대한 실증분석을 수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BSC의 4대 관점(재무관점, 고객관점, 내부프로세스 관점, 학습 및 성장관점)을 활용하여 지원사업의 성과평가에 필요한 핵심성공요인(critical success factors, CSF) 및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s, KPI)를 도출하고자 하며, AHP를 활용하여 BSC 각 관점 및 세부사업의 합리적인 가중치를 결정하고자 한다. 또한 IPA를 활용하여 BSC의 각 관점별 중요도(importance)와 성과(performance)간의 연관성을 분석함으로써 향후 지원사업의 개선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결과는 BSC와 AHP를 활용하여 중소기업기술지원사업의 성과평가모형구축에 필요한 이론적 프레임워크를 제공하였다는데 학문적 의의가 있으며, 광산업기술지원사업의 성과를 여러 관점에서 평가해 볼 수 있는 포괄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였다는데 실무적 의의가 있다. In this study, we will first try to develope a performance evaluation model of technology support programs for small and medium industries using BSC, AHP, and IPA from the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point of view and then conduct an empirical study on photonics firms being supported by the technology support program for small and medium industries. For this purpose, we will first determine the critical success factors(CSF) and key performance indicators(KPI) required for evaluating the performance of technology support programs for small and medium industries from four perspectives of BSC and then determine the weight for each of CSF, KPI, and four perspectives of BSC using AHP. Moreover, we will conduct IPA analysis to propose an improved managerial scheme for future's technology support programs for small and medium industries. There are two kinds of main contribution of this study: one for theoretical contribution and the other for practical contribution. In fact, we would be able to provide a theoretical framework required for establishing a performance evaluation model of technology support programs for small and medium industries using BSC and AHP. We would also be able to provide comprehensive and various perspectives for evaluating the performance of technology support programs for photonics industries from the variou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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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 防衛省 소장 陸軍 ‘日露戰役’ 문서군의 한국사적 의의

        조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6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는 러일전쟁과 관련된 문헌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중 육군성대일기와 육군일반사료에는 ‘일로전역’이라는 제목의 문서군이 존재한다. 육군성대일기는 패전 이전 일본 육군성이 직접 생산하거나 묶은 것이, 육군일반사료는 현지 부대의 진중일지나 역사자료 및 지도, 개인이 작성한 보고서나 문건 등이 주류를 이룬다. 육군성대일기 ‘일로전역’ 문서군 중에는 한국과 관련한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들 자료는 러일전쟁이 결코 러시아와 일본 양국만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직결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육군성 일로전역’ 문서군 내 군무국 군사과의 『전역업무상보』에는 개전 전후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부터 전쟁 중 활동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전역업무상보』는 1905년 12월 육군성이 예하 부서에 전시 활동 사항을 보고토록 지시한 결과물로서 개전 전야부터 종전 직후까지의 군사행정 사항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군무국 군사과의 『전역업무상보』에는 러일전쟁 개전 당신 한반도를 무단으로 침입했던 선견징발대와 임시파견대의 군사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눈길을 끈다. 일본은 러일전쟁 종료 이후 ‘공식전사’를 발간하였다. ‘공식전사’는 일본 정부와 군이 공식적으로 생산한 것이지만 내용에 따라 비밀리에 편찬한 것도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 ‘공식전사’의 내용이 실제 전쟁 상황과 달리 기술되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일본이 과장하거나 축소하고자 했던 전황은 방위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일로전역’ 문서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일로전역’ 문서군은 한국과 관련된 러일전쟁의 실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러일전쟁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위한 무력적인 침략과 점령의 과정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자료들이다. 앞으로 이들 자료를 통해 ‘한국사적 러일전쟁사’ 서술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At The National Institute for Defense Studies(NIDS; 防衛硏究所) of the Ministry of Defense of Japan, many literatures related to the Russo-Japanese War have been possessed. Among these, in the Rikugunsho Dainikki(陸軍省大日記; the Document Files of the Army Ministry) and in the General Historical Records of the Army, the document group with the title 'The Russo-Japanese War(日露戰役)' exists. Regarding the Rikugunsho Dainikki, the things that had been directly produced or tied up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before losing the war are the main ones. And, regarding the General Historical Records of the Army, the Jinchu Nisshi(陣中日誌) of the military unit of the site, the historical materials, the maps, the written reports written by the individuals, the official papers, etc. are the main ones. ‘The Russo-Japanese War’ Because, in the document group, the not-small number of the materials related to Korea have been contained, it catches the attention. These materials have been attesting well the facts that ‘the Russo-Japanese War’ had not been a war between only the two countries of Russia and Japan at all and, rather, that the independence and the right to survive of Korea are directly related. Especially, in 'The Detailed Work Report of the Military Section of the Military Affairs Bureau(軍務局 軍事課 業務詳報)', within the document group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 Russo-Japanese War, the contents regarding the activities during the war, from the invasion of the Korean Peninsula by the Japanese military before and after the beginning of the war, have been recorded specifically. After the end of the Russo-Japanese War, Japan published 'The Official History of the War(公式戰史)'. Although The Official History of the War is a thing that had been officially produc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military, there are the things that had been compiled secretly according to the contents. A point that should be paid attention to is the fact that there exist the cases in which the contents of 'The Official History of the War' are described differently from the actual war situation. In this way, the situation of the war which Japan had intended to exaggerate or hide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document group of 'The Russo-Japanese War', which has been possessed by the NIDS. To sum up, in the document group of 'The Russo-Japanese War', the many materials with which the real situation of the Russo-Japanese War related to Korea can be even more specifically understood are included. These are the materials that make it clear that the Russo-Japanese War had been the process of the armed forces invasion and occupation for the colonial rule of the Korean Peninsula by the Japanese Imperialism. It is judged that, in the future, through these materials, the description of the history of the Russo-Japanese War in the Korean history will become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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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 일본군 헌병대의 경성 지배사,『京城憲兵隊歷史』

        조건 한국근현대사학회 2019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8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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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軍政期 吳天錫의 교육정책 수립과 역사교육

        조건 역사와 교육학회 (구 동국대학교 역사교과서연구소) 2015 역사와 교육 Vol.21 No.-

        오천석은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 한국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던 대표적인 교육행정가였다. 특히 미군정청 학무국과 문교부에 근무하면서 한국 교육정책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오천석이 추진한 교육정책은 해방 이후 민족교육이 절실한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미국식 교육제도의 모방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교육과정 수립 과정에서 역사 과목을 사회생활과에 통합함으로써 식민 교육 청산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당대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오천석이 처음 미군정청의 직원으로 근무하게 된 것은 미군정 교육담당자 얼 락커드(Earl N. Lockard)의 제의에 따른 것이었다. 락커드를 비롯한 미군정의 인사들은 영어에 능숙하고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식 교육제도에 익숙한 오천석을 신뢰하고 있었다. 미군정청 내에서 오천석은 한국인 교육계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를 설치하고, 교육제도 및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일을 맡았다. 오천석이 주도하여 설치한 교육 자문기구로는 한국교육위원회와 조선교육심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자문기구의 논의과정에 참여하면서 교육제도와 교육과정 수립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역사가 독립교과로 바로 서지 못하고 사회생활과 속에 편재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오천석은 역사를 사회생활과에 편입한 이유로, 첫째 역사과가 기존 사회의 관념과 지식을 주입하는 교과이고, 둘째 사회생활과를 통해 민주주의 공민을 양성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오천석이 주장한 사회생활과 교육과정은 당시 미국의 사회과 교육과정을 무비판적으로 한국에 적용한데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곧 미군정청에서 교육정책을 담당하고 있던 미군들의 입장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오천석이 수립한 사회생활과 교육과정은 역사학계의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교육정책 수립을 통해 교과만 통합했을 뿐 교육 현장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아 교실에서는 역사과를 독립된 교과로 인식하고 가르치는 실정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렇듯 교육정책과 현장의 교육이 혼돈되는 과정에서 탈식민화를 위한 제대로 된 역사 교육과정 수립과 교과서 제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Cheon-Seok Oh(吳天錫) was a representative educational administrator who formulated and implemented Korean education policy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after liberation in Korea. In particular, he is known as a person who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 policy while serving at the Bureau of Education and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However, the education policy promoted by Cheon-Seok Oh at that time had a number of problems, because it imitated the American education system that was the not suitable to the Korean circumstances which desperately needed ethnic education after liberation. In particular, by integrating the subject of history with the social studies in the course of establishing curriculum, he failed to properly meet demand of the time for the clearing of colonial education and the building of a new unitary national state. Cheon-Seok Oh started to work as an official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office in accordance with the proposal of Earl N. Lockard, who was in charge of education at the US military government. US military officials including Lockard trusted Cheon-Seok Oh, who spoke fluent English, had the Christian ideas, and was familiar with the American education system. In the US Military government office, Cheon-Seok Oh was assigned a task of installing an advisory body consisting of Korean education experts, and also took on the job of establishing the educational system and curricula. The education advisory bodies the installation of which was led by Cheon-Seok Oh included 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 and the 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 As he participated in the discussions at these advisory bodies, he was deeply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of Korean education system and curriculum. Notable is that in this process, history failed to stand upright as an independent subject and ended up being integrated into the social studies. Cheon-Seok integrated history into the social studies, on the grounds that first, history is a subject to instill existing social notions and knowledge, and secondly, citizens of democracy can be nurtured through the social studies. But the social studies’ curriculum insisted by Cheon-Seok Oh was nothing more than the indiscriminate adoption of US social studies’ curriculum at that time uncritically applied to Korea, and it was in line with the position of the US military officials in charge of education policy at the US Military Government Office. Eventually, the social studies’ curriculum Cheon-Seok Oh established aroused considerable opposition from the historical academia. Furthermore, since he only integrated educational curriculum through education policymaking and failed to take into account the realities of the educational field, teachers in the classroom recognized Korean history as an independent subject and taught it separately. A noteworthy fact is that, in the chaos of the actual education in the classrooms not in conformity with the educational policy, the establishment of the proper historical curriculum for decolonization and production of appropriate textbooks were pushed a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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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조선인 ‘戰死者’ 정책과 식민 지배

        조건 역사와 교육학회 (구 동국대학교 역사교과서연구소) 2021 역사와 교육 Vol.32 No.-

        제국주의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였 다. 이들 중 약 2만 1천명이 사망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전사’로 규정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시켰다. 이글은 일제의 조선인 전사자 정책을 살펴보고 이것이 식민지 지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고찰하였다. 우선 일본군 보훈 제도를 개략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어서 1937년 이후 일본군의 ‘전사’ 정의에 관해 살펴보았다. 일본군은 1938년과 1942년의 규정에서 전사를 전장 에서 사망하거나 부상 후 야전병원 등에 도착하기 전 사망한 것으로 정의했다. 전사 의 엄격한 규정은 전사자에 대한 ‘현창’으로 이어졌다. 특히 일제는 전사자 현창을 식 민지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와 결부시켰다. 조선인 전사자들은 조선사회에서 더 높 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조선인 전사자를 포상하고 이를 조선사회에 널리 선전하였다. 특히 첫 번 째 전사자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들에게 과한 훈장을 수여했 다. 그리고 죽음을 미화하여 조선 사회에 널리 유포시켰다. 유족들에 대한 지원도 아 끼지 않았다. 나아가 남겨진 자녀들에게까지 추도를 금기시 하고 현창을 위한 교육 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결국 침략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일제가 계획한 식민과 죽음의 굴레였다. Imperial Japan mobilized the youth of colonial Joseon during the Asian-Pacific War. Of these, about 21,000 died. The Japanese colonized them as killed in action and enlisted them at Yasukuni Shrine. This article examined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of the deceased Koreans and how it was related to colonial rule. First of all, the Japanese military veterans system was described. Next, we looked at the definition of “killed in action” prescribed by the Japanese military after 1937. In the regulations of 1938 and 1942, the Japanese military defined a dead person as a person who died on the battlefield or after an injury and before arriving at a field hospital. The strict regulations of the killed in action led to the commendation(顯彰) for the killed in action. In particular, the Japanese imperial ties the commendation of the deceased with colonial rule over colonial Joseon. The dead Koreans became the object of higher worship in Joseon society. The Japanese imperialism rewarded the Korean dead and widely advertised it to the Korean society. In particular, in order to maximize the symbolic meaning of the first killed in action, excessive medals were awarded to them. In addition, death was glorified and widely circulated in Joseon society. He also spared no support for his bereaved family. Furthermore, the memorial service was taboo to the children who were left behind, and education for commendation was implemented. All of these processes were ultimately a bond between colonization and death, plann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to continue the war of ag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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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체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防空 조직과 활동

        조건 숭실사학회 2011 숭실사학 Vol.0 No.27

        전시체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防空 조직과 활동 조 건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조선 주둔 일본군을 중심으로 관과 민이 참여하는 방공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군의 방공 활동은 연합군의 항공기가 일본 본토와 식민지 및 점령지역에 침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감시·탐지하여 격추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군의 방공 활동 뒤에는 반드시 민간의 방공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방공활동은 단순히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을 저지하는 행위를 넘어서 식민지 조선사회와 조선인들을 ‘방공’이라는 기재를 통해 전시체제 아래 동원하고 통제하는데 추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일본은 1920년대 후반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대규모 방공훈련을 시행했다. 이때의 방공훈련은 직접적인 공습에 대비하기보다 훈련을 통해 민간을 조직·관리하여 통제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방공훈련이 실시되었는데, 경성·부산·평양 등의 대도시와 나남 등 군사도시에서 주로 행해졌다. 조선 내 방공훈련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공습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였다. 조선 주둔 일본군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방공지구를 개편하고 지속적으로 방공부대를 확충했다. 조선 내 방공부대는 크게 高射砲部隊를 중심으로 한 지상방공부대와 第5航空軍을 주축으로 한 항공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방공부대는 B-29를 앞세운 미군의 폭격기들에 맞서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미군의 공습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실제 1944년 말부터 종전 때까지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지역이 공습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글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시행한 조선 내 방공훈련과 태평양전쟁 이후 방공부대 실태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전쟁 말기 미군의 실제 공습 상황과 그에 따른 피해 내용을 살펴보았다. 결국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방공활동은 공습에 대비한다는 명목아래 조선인을 통제하고 동원한 虛僞에 지나지 않았다. The Air Defense System and Activities of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1930~1945) Cho, Gun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its colony, began to conduct air defense exercise (ADE) in public-private partnership with a view to cope with the air raid of the Allied Forces from the 1930s. The ADE was to monitor whether the aircrafts of the Allied Forces invade Japan, its colonies and occupied areas, and also to shoot down invaders. The military exercise involved civil supports. In this regard, the ADE was not only to restrain the air raid of the Allied Forces but to mobilize and control Joseon‘s people. Japan began to conduct ADE on large scales in urban areas from the late 1920s. The ADE was to systematically control civilians rather than to cope with air raid. In Joseon, ADE was begun from the early 1930s, especially in major cities, such as Gyeongseong, Busan and Pyeongyang, and fortress cities including Nanam. ADE in Joseon was led by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It was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that air raid was a threat to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Hereat, it rearranged air defense areas and expanded air defense Forces(ADF) continuously. ADF in Joseon was focused on antiaircraft batteries, e.g., ground air defense system and the 5th Air Forces. Nevertheless,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could not effectively take action against US air Forces’s bombers, preceded by B-29. In result, Joseon was exposed without protection to the air raid of the US air Forces; actually, major areas including Busan were damaged by air raid from the end of 1944 until the end of the war. This study is to clarify ADE in Joseon conducted by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the actual state of ADF after the Pacific War, the air raid made by US air Forces during the last period of the war, and the ensuing damages. In conclusion, ADE, conducted by the Japanese Forces stationed in Joseon, was to control Koreans in the name of military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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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朝鮮文 朝鮮』에 나타난 조선인 面吏들의 面治 인식

        조건 숭실사학회 2019 숭실사학 Vol.0 No.42

        Joseon Myeon ruling(面制) in 1917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meant that the ruling policy of Joseon rural area by Imperial Japan which started from the latter era of Joseon dynasty was at an end. This was a part of reorganization of regional system which started from Residency-General and in line with the implementation of local ruling and merge of Gun and Myeon in 1914. Above all the implementation of Myeon ruling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t that time is marked by the fact that it nurtured low-level officials in Korea, which contributed to the change of ruling method. Meanwhile Korean Myeon officials who were nurtured by Myeon ruling grew as working-level of local ruling in 1920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tended to make Myeon official root out the traditional power relations in the local area and take root of colonial government policy in rural area. I took a look at the whole of colonial government's ruling policy and its characteristics by collecting the voice of Myeon officials shown in 'Reader Forum' of Joseon Writing Joseon issued in 1920s. Approximately 500 cases of writing are confirmed in Reader Forum of ‘Joseonmun-Joseon(朝鮮文朝鮮)’ from 1923 to 1929. The analysis by local areas of the writing in Reader Forum shows that it is likely that Myeon officials in the area with less rural population like Gangwondo, Hamgyeongdo and etc. rather than regions actively involved in agriculture posted a lot of writing. The job title of Myeon officials is divided into Myeon heads and clerks which has frequency of approximately 18% in Myeon head and 68% in Myeon clerks. This paper analyzed the posting of Myeon officials by dividing into administrative affairs, industry, social general and cultivation by characteristics. As a result, the writing of Myeon ruling administrative affairs accounted for majority until early and mid 1920s while posting related to social general had a huge presence toward the late era. The responsibility and importance of recognition to Myeon ruling of Myeon officials have been emerged but as times goes by, there were remarkable cases of showing discontent in working environment where the treatment were poor and room for improvement has no choice were noticed. But there was not intention of giving up Myeon job title even in case of shown discontent was not seen. To sum up, 1920s is the transitional period when local ruling system was being established in colonial era of Japan and Myeon officials nurtured in this period seem to be important backer in implementing war footing and full-scale mobilization in 1930s. 1917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한 면제(面制)는 한말부터 진행된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농촌사회에 대한 통치정책이 일단락된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통감부 때부터 시도된 지방제도 개편의 일환이었으며, 1914년 부제(府制) 시행과 군·면 통폐합의 연장선에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면제 시행은 조선인 하급 관리를 양성하고 이를 이용하여 통치 방식의 변화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한편 면제 시행으로 양성된 조선인 면리(面吏)들은 1920년대 지방통치의 실무자로 성장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통해 전통적인 지방의 권력 관계를 일소하는 한편 식민 당국의 정책을 농촌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자 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 발행된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문 조선(朝鮮文 朝鮮)』의 ‘독자논단’에 드러나 있는 면리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식민 당국이 이들을 통해 의도했던 지배정책의 일단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1923년부터 1929년 사이 『조선문 조선』의 ‘독자논단’에는 모두 약 500건의 글이 확인된다. 독자논단에 수록된 글을 지역별로 분석해 보면, 농업이 활발한 지역보다 강원도, 함경도 등 비교적 농촌 인구가 적은 곳의 면리들이 글을 많이 게재하는 경향을 보인다. 글을 게재한 면리들의 직책은 면장과 면서기로 나뉘는데, 면장이 약 18%, 면서기가 약 68%의 빈도를 보였다. 이글에서는 면리들이 게재한 글을 행정과 산업, 사회일반, 수양 등 성격별로 나누어 분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20년대 초중반까지는 면치 행정에 관한 글이 다수를 점유한 반면 후반으로 갈수록 사회일반과 관련한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면리들의 면치에 대한 인식은 초기에는 면직 자체에 대한 책임과 중요성이 부각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낮은 처우와 개선의 여지가 적은 업무 환경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례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불만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면직 자체를 포기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192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방통치제도가 자리 잡아 가는 과도기였고, 이 기간을 통해 양성된 면리들은 1930년대 전시체제와 총동원체제를 수행하는 데 중요한 배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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