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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15광복, 건국의 이정표를 제시한 장로교회 신학자들

        임희국(LIM Hee-Kuk)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 문화연구원 2017 장신논단 Vol.49 No.4

        이 논문은 8.15광복이후 김재준과 한경직이 장로교회 목사와 신학자로서 제시한 건국이념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8.15광복 직후에 대한 장로교회사 연구는 많은 경우 일제의 잔재 청산과 교회 재건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김재준의 강연 “기독교의 건국이념”은 8.15정국에서 교회재건 보다도 국가건설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필자의 주목을 끌었다. 이 논문은 김재준이 제시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 1945년 8.15광복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사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그 여부와 범주를 살펴보았다. 또한 장로교회 목사 한경직도 미군정 시기에 건국의 이념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설교를 통해 자주 밝혔는데, 그의 설교원고도 중요한 논문서술 자료로 채택했다. 이 논문의 일차 자료는 김재준의 강연원고 “基督敎(기독교)의 建國理念(건국이념)”(1945)과 한경직의 설교집 『건국과 기독교』(1949)이다. 김재준의 강연과 한경직의 설교는 오늘의 우리에게 각각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 공적 책임을 성찰하게 한다.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the founding ideals of the new nation that two Presbyterian pastor-theologians, Jae-Jun Kim and Kyung-Jik Han, envisioned right after the national independence in 1945. Discovery of a new document motivated me to write this paper. Recently I happened to find a manuscript of Jae-Jun Kim’s 21-page-long speech entitled “A Christian Perspective on the Founding Ideal of the Nation,” which he presented as the Principal of Joseon Theological Seminary right after the national independence on August 15, 1945. Since it contains Reformed theologian Jae-Jun Kim’s blue print for the emerging country, in my judgement, it is of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Study of the histo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since the national independence in 1945 has so far tended to focus on the repentance upon the Shinto Shrine worship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church. In this situation Jae-Jun Kim’s manuscript attracted my attention, for it focused more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nation than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church. In this essay I investigate whether and, if so, to what extent Jae-Jun Kim’s blue print for the emerging country influenced the Korean society and politics after the national independence on August 15, 1945. In addition, I studied another Presbyterian pastor Kyung-Jik Han’s sermons since 1946, in which Han often displayed his views concerning the national foundation. In the social-political situation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U.S. army Han’s sermons set milestones in the founding process of the country. The primary sources for this study are Jae-Jun Kim’s speech under the title of “A Christian Perspective on the Founding Ideal of the Nation” (1945) and Kyung-Jik Han’s book of sermons entitled The National Foundation and Christianity (1949). Both Kim’s speech and Han’s sermons challenge us today to reflect upon the church’s public responsibility in the social-political rea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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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상응하는 신학교육에 관한 소고

        임희국(Hee-Kuk Lim) 한국기독교교육정보학회 2009 기독교교육정보 Vol.23 No.-

        As new educational environment is formed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the postmodern era, there is a move to reexamine the existing education system's structural formalization and standardization. In Korea's educational circles, there is a surging interest in previously dismissed aspects of education such as personality, aesthetics, emotions, and practical skills. As cutting-edge information technology develops at a fast rate turning the world into a knowledge-based society, there is also a great change in the field of education. Among the recent attempts in the field are cyber education, alternative education and life-long education. Thanks to the development of information technology (IT), new ways of learning are being developed for the Ubuquitous age. Individuals can freely log on to the internet for learning where education may progress without the limitation of space and time. Through two-way communication methods in education, the formerly standard rote teaching method is experiencing change, and an educational space is being provided so the students themselves may take the initiatives to learn. The issue of theological education is the same today as it had always been. The foremost goal of theological education is in raising up people (fostering ministers). The core meat of the theological content is fresh realization of the Word of God through scripture. But the method of theological education should change in correspondence to the 21st century context. Today's theological education is stifled under too much specialization, splintered and scattered allover the place. It is time for different theological spheres to connect and synthe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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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1948년 경상북도 대구지역 장로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참여

        임희국(Hee Kuk Lim)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18 선교와 신학 Vol.45 No.-

        이 글은 1945년 8.15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1945-48) 경상북도 대구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한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연구 기법으로는 지역사(local history) 및 미시사(micro history) 연구이며, 또 교회사를 일반 역사와 연계하여 연구하려는 작업이다. 1945년 8.15광복 직후에 경상북도 대구의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일제 강점기 무너진 교회 재건에 착수하지 않고 사회의 치안질서 유지와 새 나라 건설에만 몰입했다. 그 이후에 이들은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으로 나누어져서 활동했다. 그런데 양편은 좋은 관계 속에서 상호 협조적이었다. 8.15광복 이후의 정국을 미군정이 주도해 나갔다. 미군정의 정책은 좌익 세력 약화와 우익 세력 육성이었다. 미군정은 그해 11월에 남한을 반공주의 사회로 구축하고자 군대를 창설하고 경찰을 조직했다. 1946년 상반기에 대구에서는 -미군정의 우익 세력 육성에 힘입어- 우익 세력이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장로교회 백남채 장로는 우익의 정당인 한민당 대구지부 수석총무가 되었다. 1946년 10월에 일어난 ‘대구항쟁’ 기간에 좌익 세력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와 더불어 좌익에 속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세력도 와해되었다. 그 이후로 경찰과 극우 정치단체들이 좌익 세력을 혹심하게 억눌렀다. 지역의 우익 세력은 1948년 남한에서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합류했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대구에서는 3개의 선거구(갑, 을, 병)에서 한민당 후보들이 당선되었다. 장로교회의 백남채 장로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전국의 국회의원 200명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50명 정도(약 25%)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국회개회식에서 이윤영 목사에게 개회기도를 요청했다. 그 이후로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대통령 이승만의 친미반공 정책과 그의 북진통일 노선에 대체로 협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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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 조선의 사회ㆍ정치적 상황에 대한 내한(來韓) 선교사들의 이해

        임희국(Hee Kuk Lim)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09 선교와 신학 Vol.23 No.-

        19세기 말 조선은 봉건 사회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봉건 시대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폐지하려는 사회ㆍ정치적 혁명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 요청으로 들어온 외국(일본) 군대와 정부의 관군이 동학군을 무력으로 격파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변혁 운동’ 이 좌초되었다. 이제부터는 외세(일본)와 결탁한 친일 내각이 정치 제도로부터 생활 관습까지 개혁하기 시작했다. ‘관(官) 주도로 추진된 위로부터의 개혁’ 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의 성격이었다. 이 개혁의 과정에서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수구 세력과 개화파 세력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을미의병은 척사유생들이 주도하여 개혁을 거부하고 옛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무력 행동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 변혁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각자의 선교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선교 현장은 매우 다양했다. 서울의 궁궐에 자주 드나들면서 의료 선교 사역을 한 선교사들이 있는가 하면, 황해도 소래 마을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서양의 의식주를 끊어 버린 채 복음을 몸으로 증언한 선교사가 있었다.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여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것은 선교사 매켄지의 선교 사역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소래 마을에서 7개월 동안 동학군과 이웃하며 살았다. 처음에는 그가 동학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몇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겼는데, 차츰차츰 만남의 횟수가 쌓이면서 서로 친해졌다. 동학군에게 열린 마음으로 쉼없이 따뜻한 손을 내민 매켄지는 그들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동학군 역시 차츰차츰 매켄지의 친구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과 동학의 신념 체계가 소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동학군 가운데서 하나씩 둘씩 기독교 신앙인이 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소래 마을에 최초의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건축을 위하여 동학의 지도자들이 헌금하였다. 마지막에는 선교사 매켄지는 동학의 접주와 관군의 지휘자가 만나게 하는 중재의 역할도 하였다. 복음의 능력으로 화해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을미개혁의 단발령을 거부하는 백성을 지켜보던 선교사 대다수는 상투를 조선의 전통 분화로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단발령을 선뜻 받아들이는 조선 기독교인에게 오히려 신중하라고 충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면, 선교사들은 조선의 전통 문회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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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임희국(LIM Hee-Kuk)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 문화연구원 2016 장신논단 Vol.48 No.4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2017)을 세계교회들이 준비하고 있다. 이 종교개혁의 원천(源泉)은 루터가 신약성경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발견한 복음이었고, 이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성경’이 생성되었다. 이 원리는 독일 루터교회 및 개신교의 신앙유산이 되었고 또 한국 개신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신앙유산임이 확실하다. ‘오직 성경’은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기독교’와 연계된다. 그런데 20세기 스위스 개혁교회 신학자 라가츠(L. Ragaz)가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이 교회와 신학에서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루터의 관점에서 성경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 성경해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블룸하르트 부자(父子)의 성경신학(Biblische Theologie)을 제시했는데,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사건’으로 파악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의 나라를 증언하는 데 집중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이 한국교회에 적용되어 계승될 개연성을 모색했다. 그간에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이 서로 대립하여 왔음을 돌아보면서, 루터가 발견한 ‘성령의 내적 증언’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게 한다는 점을 새삼 인식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In 2017 the Protestant Church celebrates the 500th anniversary of Luther’s Reformation in Germany. The starting point of this Reformation was Luther’s rediscovery of the power of the gospel in Romans 1:17. The Reformation principle of sola scriptura derived from this biblical insight and formed an important theological legac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this article I discuss how this Reformation principle of sola scriptura was first formed and understood in Luther’s mind and then how it was rediscovered and understood by L. Ragaz, who’s rediscovery of the principle will be the main focus of this article. “The Bible interprets itself (sui ipsius interpres).” Luther’s idea of sola scriptura was inherited by two Blumhardts in the 19th century and by Ragaz in the 20th century. In the process of healing a mentally sick woman through prayer, Blumhardt the father rediscovered this principle. He witnessed to her liberation from the mental illness through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who testifies the Word of God in the Bible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Blumhardt the son inherited this theological legacy. He insisted that as a ‘Word-event’ the Bible is “the fountain from which the living water overflowing” and “the mustard seed of God’s kingdom growing on soil.”

      • 특집 : 한국 장로교회 연합을 위한 모색 ; 분열된 한국 장로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제언

        임희국 ( Hee Kuk Lim ) 한국장로교신학회 2011 장로교회와 신학 Vol.8 No.-

        이 글에서 우리는 1950년대에 일어났던 한국 장로교회의 교단 분열을 되돌아보려 한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한 점은 1950년대의 장로교회는 분열만 거듭하지 않았고 분열 직후에 화합과 재결합을 위한 노력도 했다는 것이다. 고신교단과의 화합을 위하여 1954년 제39회 총회가 ``신사참배 취소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또한 1959년도 교단 분열 직후에 결성된 ``통합추진위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통합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들이 가시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런데 1950년대 초반에 일어난 두 번째 분열(``기독교장로회`` 교단 생성)에 관하여는 다음 기회에 서술하고자 한다. 그다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분열된 상태인 한국 장로교회의 화해와 일치의 가능성을 짚어볼 것이다. 첫째로, 한국 장로교회는 공통 기반인 ``성경 기독교``로 일치될 수 있다고 본다. 성경 기독교는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는 사경회(査經會)를 기초로 형성되었다. 사경회는 장로교회가 이 나라의 문화 토양에 정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를 향해 자긍심을 갖는 새벽기도회는 사경회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신앙 경건 훈련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기독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장로교회의 중심에 있다. 둘째로,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전통``은 ``상호 협력과 연합``의 정신(에큐메니칼 정신)이다. 보수적 전통이란 1907년 장로교회 독노회의 회록 서문이 선포한 연합과 일치를 말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1959년도 장로교회 분열 직후에 통합촉진위원회는 교단 화합을 촉구하는 성명서의 첫 머리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 교회의 75년의 보수적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따라서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는 것임을 우리가 확인한다. 셋째로, 연합과 일치는- 기구와 제도의 연합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우선적으로 연대하고 화합해야 할 일이다. 맨 먼저 목회자들 사이에서 연합과 일치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다양한 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 운동이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의 전망을 환히 밝히고 있다. 하나의 예로 들자면,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의 일치, 갱신, 연합운동이다. 1998년에 창립된 한목협은 교회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분단현실을 극복하여 화해케 하고, 세계의 경제적 양극화의 현실을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변혁하고, 생명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인식의 틀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며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 왔다. 끝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인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원리에도 ``연합과 일치``가 크게 강조되었다. 특히 ``제2스위스 신앙고백``(1566, 2nd Helvetic Confession)은 개혁교회(스위스,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화란, 체코 등)들의 공동 신앙고백서이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유산을 이어받은 한국 장로교회의 교단들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We hope for the reconciliation and unity among the divided Presbyterian denominations. The only way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can come to reunite and agree is if the people have solidarity and alliance. For example, pastors must serve together in ministry with understanding and cooperation, and in the midst of that agree in thought and intention to push forward a good business. Everyone must acknowledge the diversity of various denominations and agree with one another in Jesus Christ. Working together with the same heart will prevent doctrinal or theological debate, and instead, a joint vision will be sought together, developing collaboratively the action of sharing and serving. This follows the ecumenical spirit of the early 20th century Europe that corresponds to the proverb that says, "Theory and debate divides but serving unites". Lastly, alliance and agreement is strongly emphasized even in the principle of the Reformed Church, which is the root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For example,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is a joint Confession of Faith by the Reformed Church (Switzerland, France, Hungary, Poland, Netherland, the Czech Republic, and etc).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denominations that have inherited the legacy of the Reformed Church must reunite and agree in Jesus Christ on the basis of the Bible, the Word of God, through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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