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러시아 연해주 계동학교의 민족교육사에서 위상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4

        러시아 연해주 계동학교의 민족교육사에서 위상 김형목 계동학교는 연해주 이주한인들에 의하여 1907년 2월 설립되었다. 주도한 인물은 최재형ㆍ이동국ㆍ김학만ㆍ최봉준ㆍ한익성ㆍ차석보 등이었다. 한인들 적극적인 참여와 임원진의 열성적인 지원 등은 교육내실화를 도모하는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건축은 주민들 ‘의무금’으로 충당되었다. 미주에서 발행된 공립신보사 연해주지국은 계동학교였다. 교과목은 한글ㆍ한문ㆍ습자ㆍ산술ㆍ수신ㆍ한국지리ㆍ한국역사ㆍ체조ㆍ노어 등이었다. 한글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유효한 방안으로 매우 중시되었다. 한국역사와 한국지리 교육도 중시된 과목 중 하나였다. 창가는 학교생활이나 과외활동 여가에 일상적으로 불렀다. 항일사상 고취와 신한국 독립정신 배양은 궁극적인 교육목표였다. 여성교육 시행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정기적인 토론회 개최는 국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는 학습현장이었다. 주제는 「지혜가 자본보다 승하다」ㆍ「군사를 기르는 것이 금전을 많이 짓기만 못하다」 등 매우 다양했다. 독립국가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방책은 군사양성과 자본육성이었다. 1909년 개최된 연합운동회는 한인사회 초유의 대사건임에 틀림없다. 인산인해를 이룬 광경은 가슴 벅찬 환희로서 다가왔다. 상호간 유대감을 결속시키는 동시에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는 현장은 바로 운동회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연설회나 강연회 개최로 잠재된 민족의식을 각성시켰다.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체조는 체력을 증진하는 동시에 인내력과 정신력을 배양시켰다. 계동학교는 ‘단순한’ 초등교육기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상무정신 고취를 위한 설립이념에 따라 교과목을 편성했다. 학교 현관 정면과 각 교실 안에는 ‘태극’ 원안을 새겨 넣었다. 교과서는 배일사상과 국권회복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전명운과 안중근 유가족에 대한 후원 등 시대적인 소명에 소홀하지 않았다. 민족교육이 지닌 역사적인 의의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The national education and its characters of Gyedong School in the Primorskiy Krai Kim, Hyung-mog The Gyedong School was established by Korean diasporas’ migration in February 1907. In that process, Choi JaeHyung, Lee dongkuk, Kim Hakman, Choi Bongjun, Han Ikseon and Cha Seokbo played the important roles. The active participation of Koreans and committed support of executives were the foundation for advancement of education. The costs of building school were covered by funds of residents. The Primorskiy branch of GonnipShinbo press company published in America was the Gyedong School. There were various curriculum subjects, such as Korean, Chinese, calligraphy, arithmetic, moral training, Korean geography, Korean history, gymnastics and the Russian language. The education of Korean language attached great importance as the effective way to inspire the national consciousness and education of Korean history and geography ditto. They sang the Changga daily both in their school life and extra-curricular activities. The inspiration of anti-Japanese sentiments and the development of the spirit of independence of Korea was the ultimate objectives of Gyedong School. They looked upon themselves as pioneer in women’s education. The panel discussion opened on a regular basis was a studying scene to devise the various methods for restoring national right. The subjects were various, such as ‘Wisdom is more worth than capital’ and ‘Raising the military cannot hold a candle to building a lot of money’. The fundamental way to maintain the nationhood was the training of army and promoting of capital. The united field day held in 1909 must be an unheard-of event of Korean diaspora. A big crowd was gathered in the schoolyard. It was the field day that strengthened the Korean solidarity and exchanged the information for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s. The gymnastics was second to military training developed the patience and willpower as well as enhancing their physical strength. The Gyedong Shcool was more than just elementary school. The subjects were organized according to idea of establishment for inspiring the martialism and awakening the national consciousness. The original design of Taegeuk was engraved in front-door and each classroom. The most contents of textbook were the anti-Japanese thought and recovering the sovereignty of a nation. And they supported the family of the deceased, Jeon MyeongWoon and Ahn ChungGuen. In this, there were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of national education.

      • KCI등재

        한말 김광제의 현실인식과 계몽운동사상 역할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1

        한말 김광제의 현실인식과 계몽운동사상 역할 김형목 국채보상운동 주역인 김광제는 전통교육을 받았다. 23세인 1888년 무과에 합격ㆍ관계에 진출한 이래 1902년까지 약 15년간이나 실제로 재직한 기간은 5~6년에 불과하였다. 오랫동안 고향 남포에 은거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1896년과 1905년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儒會軍과 의병활동 등 다양한 경험은 현실인식 심화와 정확한 정세판단을 이끄는 요인이었다. 재직한 주요 관직은 동래경무관과 삼남찰리사 등이었다. 공직기강 확립을 위한 활동은 지배체제 문란 등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래 여러 차례 건의문과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현실정치에 수용될 수 없었다. 당시까지 인식은 충군애국적인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공제소 조직과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을 저지하려는 노력은 경제적인 자립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론과 맞닿아 있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안은 문화계몽운동 투신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대구에서 서상돈 등과 대구광문사를 조직한 후 교육활동ㆍ출판활동ㆍ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동보』발간이나 서적종람소 운영 등도 민지계발을 위함에서 비롯되었다. 대한자강회ㆍ대한협회ㆍ기호흥학회 임원과 시찰원 활동은 지역사회 계몽운동을 촉진시키는 기폭제였다. 대한협회 호남시찰원과 경북 개령ㆍ김천ㆍ선산지역 방문과 강연회는 근대교육을 확산시키는 ‘촉매제’나 다름없었다. 순회강연회에서 연설은 당대를 대표하는 명연설가로서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국채보상운동=김광제’라는 이해와 인식은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1910년대 경남 마산에서 문예활동ㆍ출판활동과 3ㆍ1운동 이후 조선노동대회를 통한 노동운동 주도 등은 이와 같은 경험적인 산물임에 틀림없다. 삶의 궤적은 심화된 현실인식과 정세판단에 기초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활동가였다. 충남 홍주군 김병년이『마산문예구락부』창간호 발간에 즈음하여 보낸 축문은 이를 반증한다. Kim Gwang-je’s awareness on reality and his role in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the Great Han Era Kim, Hyung-mog Kim Gwang-je who was a leading role in the national dept payment movement got traditional education. He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entered government service from the age of 23 in 1888 to 1902. But he held office just for 5 or 6 years for those 15 years. He retired to hermitage in his hometown, Nampo and planed ahead for a long time. He exiled to Gogunsando, Jeonnam in 1896 and 1905. His various experiences participating righteous army and Yuhoegun(儒會軍) were a main factor to encourage his profound grip on reality and right analysis of the situation. He worked as Dongnae duty assistant commissioner(東萊警務官) and Samnam Chalisa(三南察里使). He tried to tighten discipline among government officials but it was not succeeded because of disorder of the system. Since his retirement, he proposed and appealed to the government but his idea was inadequate in realistic politics. By then, his movements were based on the loyalty and patriotism. His organization of Gongjeso and his blocking of currency circulation of Japanese First Bank bills met the idea to build the independent country through self-supporting economy. One of his alternatives for realizing his ideal was devotion to cultural enlightenment movement. After Ulsa illegal treaty, he organized Daegu Gwangmunsa with other people including Seo Sang-don in Daegu and worked in various fields such as education, publication and press. The publication of monthly-magazine 『Daedongbo』and management of complex-library were proceeded from the will for development of the public intellect. One of executives in Daehan Jaganghoe, Daehan Hyeophoe, Giho Heunghakhoe and his activity as Shichalwon(視察員) were a catalyst for encouraging the local enlightenment movement. His work as a Honam Inspector in Daehan Hyeophoe and visits and lectures in Gaeryeng, Gimcheon, Seonsan Gyengbuk were an accelerator for spreading modern education. His speech in lecturing tour made him as one of the greatest speakers in the time. Nevertheless, his role was only limited in the National Dept Repayment Movement. His literature and publication activities in Masan, Gyengnam in the 1910s and his leading role in a labor movement through ChoSeon Labor Convention(朝鮮勞働大會) since the March 1st Independent Movement must be the product of his these experiences. He was an activist who lived based on a deep grip on reality and right analysis of the situation. This point was showed by a congratulatory address that Kim Byeng-nyeon sent to him from Hongju-gun, Chungnam when the first issue of 『Masan literature club』was published.

      • KCI등재

        1898-1905년 야학의 근대교육사상 의의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48

        The modern education thoughts and meaning of night-schools in the early Great Han EmpireKim, Hyung Mog 1898~1905년 야학의 근대교육사상 의의김형목

      • KCI등재

        한말 경남지방 야학운동의 전개양상과 운영주체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63 No.-

        한말 경남지방 야학운동의 전개양상과 운영주체 김형목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야학운동을 추동시키는 원천이었다. 높은 향학열과 교육열은 야학운동 진전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과중한 수업료 부담은 자제들 교육을 야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야학을 통한 근대교육 수혜는 공립보통학교 수용력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도내에 운영된 야학수는 8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1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야학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설립된 이래 1930년대 후반까지 운영된 마산노동야학은 ‘상징이자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설립ㆍ운영주체는 지방관리ㆍ언론인ㆍ교사ㆍ학생ㆍ자산가 등 매우 다양하였다. 지방자치제 시행을 위한 민지계발 일환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주민들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일환이었다.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은 민중의식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중요한 기제 중 하나였다. 야학운동은 단순한 지식 배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곧 일상사 변화와 더불어 현실인식 심화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책무를 자각시키는 요인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국민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원천은 여기에서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참여를 통한 자아각성은 항일의식 고취와 시세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는 기반이었다. Development Phase and Establishment idea of the Night School(Yahak) Movement in Kyungnam Region at the end of the Greater Korean Empire Kim, Hyung-mog The night school(Yahak) movement was expended since the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s of Japan and Korea in 1905(the Treaty of Eulsa). Korean intellectuals were aroused by the Treaty. So their desire to learn and enthusiasm for education led to progress of the night school movement. Moreover, school fees were so expensive that night schools were only way to educate their children for ordinary Koreans. Modern education through the night schools had considerable receptive capacity over the public elementary schools. At that time, approximately 80 night schools were running in Kyungnam region. And there were ‘large scale’ night schools which have more than 100 students in several places. Especially, Worker’s night school in Masan which was established in 1907 and was managed until late 1930’s was the ‘symbol’ of the night schools. The founders and managers of the night schools were very various-local officials, journalists, teachers, students, wealthy persons, and so on. In some cases, some night schools were a part of development of the public intellect to launch the autonomous local government system. In this case, the local residents covered the school fee as compulsory education. Koreans' Voluntary participation awakened the people’s consciousness and the national spirit. The night school movement was to be more than just development of knowledge. It was the change of daily life for Korean people, and they finally had the awareness to take an obligation as social beings. So, for example, the movement of compensation for national debt in 1907~1908 could become a national campaign. Self-awareness through voluntary participation built a new social order in the changing world and inspired the anti-Japan consciousness in Koreans.

      • KCI등재

        충북지역 국채보상운동의 지역운동사상 의의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9

        충북지역 국채보상운동의 지역운동사상 의의 김형목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시에 국내외로 확산되었다. 행정구역인 군을 단위로 조직된 국채보상회는 「취지서」를 발표와 동시에 모금활동을 적극적이었다. 충북지방은 3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연금 모금에 들어갔다. 한말 국채보상운동이 지닌 역사적인 의의는 바로 여기에 찾을 수 있다. 도내 조직된 국채보상회는 호중국채보상의조회ㆍ옥천 단연의무회ㆍ진천 국채보상회ㆍ보은 국채보상단연동맹회ㆍ영동 국채보상회 등 최소한 12개소 이상이었다. 이러한 조직은 의연금 모금을 사실상 주도하는 중심단체였다. 청주ㆍ충주ㆍ옥천ㆍ진천 등 행정ㆍ상업도시나 교통 요충지는 비교적 일찍부터 의연활동을 추진했다. 성과도 이와 비례할 만큼 활성화로 나타났다. 모금 방식은 생활 정도에 따라 일정한 금액을 배렴ㆍ갹출하는 등 향촌공동체 운영원리를 활용하였다. 강한 족적 기반에 근거한 문중 조직이나 친위대ㆍ상무사 등 공동조직체는 의연금 모집에 적극 활용되었다. 유생 참여는 주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상인층 적극적인 동참은 경제적인 침략에 대한 자구책 일환이었다. 심지어 죄수ㆍ도둑ㆍ백정ㆍ걸인 등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되었던 계층도 참여했다. 이는 국민운동으로 진전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반면 종교계는 동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국채보상운동은 8월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침체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충북인은 이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현실인식 심화와 자아각성 등은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는 요인이었다. 자립경제 도모를 위하여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변혁운동으로 승화되어 나갔다.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 등 경제운동은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에서 비롯되었다. The National Dept Repayment Movement in Chungbuk Province and it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Local Movements Kim Hyung-mog The National Dept Repayment Movement which started from Dagu on February in 1907 rapidly spreaded across the country. Regional agencies for the repayment organized by Do, Gun, Myun(Korean civic units) announced its ‘prospectus’ and opened fundraising. Chungbuk province started the fundraising at the beginning of March. There were 10 repayment agencies in the province including Hojung Dept Repayment Organization(호중국채보상의조회), Okcheon No Smoking Repayment Organization(옥천단연의무회), Jincheon Dept Repayment Organization(진천 국채보상회), Boeun Deptm-No Smoking Repayment Organization(보은 국채보상단연동맹회), Yeongdong Dept Repayment Organization(영동국채보상회). In fact, such groups leaded the donation. Civic centers or main traffic hubs such as Cheongju, Chungju, Okcheon, Jincheon engaged in the donation activity earlier than any other regions. Proportionally to it, the activity got a fruitful income. Generally, people donated a specific sum of money as to their living standard. Some organizations such as family groups based on strong blood ties actively took part in the donation. Participation of confucian scholars was one of catalysts for encouraging voluntary donation of many people in the region. Merchants also actively donated in response of economic aggression by Japan. Even thieves donated and this developed into national movement. But Religious groups don’t engaged in this movement going along with the atmosphere. The movement of National Dept Repayment in Chungbuk province sunk into a swamp of stagnation since August like any other provinces. But people in the province started to find a new social order. They realized their social duties through an deep understanding on reality and self awareness. The movement started for economic independence from Japan developed into social reform. Various economic movements such as the Movement for Local Product Promotion(물산장려운동) in Japanese colonial rule began from this historical context.

      • KCI등재

        韓末 始興農民運動에 관한 연구

        金炯睦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1989 중앙사론 Vol.6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 KCI등재

        한말 경남지방 야학운동의 전개양상과 운영주체

        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3

        The night school(Yahak) movement was expended since the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s of Japan and Korea in 1905(the Treaty of Eulsa). Korean intellectuals were aroused by the Treaty. So their desire to learn and enthusiasm for education led to progress of the night school movement. Moreover, school fees were so expensive that night schools were only way to educate their children for ordinary Koreans. Modern education through the night schools had considerable receptive capacity over the public elementary schools. At that time, approximately 80 night schools were running in Kyungnam region. And there were ‘large scale’ night schools which have more than 100 students in several places. Especially, Worker’s night school in Masan which was established in 1907 and was managed until late 1930’s was the ‘symbol’ of the night schools. The founders and managers of the night schools were very various-local officials, journalists, teachers, students, wealthy persons, and so on. In some cases, some night schools were a part of development of the public intellect to launch the autonomous local government system. In this case, the local residents covered the school fee as compulsory education. Koreans' Voluntary participation awakened the people’s consciousness and the national spirit. The night school movement was to be more than just development of knowledge. It was the change of daily life for Korean people, and they finally had the awareness to take an obligation as social beings. So, for example, the movement of compensation for national debt in 1907~1908 could become a national campaign. Self-awareness through voluntary participation built a new social order in the changing world and inspired the anti-Japan consciousness in Koreans.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야학운동을 추동시키는 원천이었다. 높은 향학열과 교육열은 야학운동 진전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과중한 수업료 부담은 자제들 교육을 야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야학을 통한 근대교육 수혜는 공립보통학교 수용력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도내에 운영된 야학수는 8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1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야학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설립된 이래 1930년대 후반까지 운영된 마산노동야학은 ‘상징이자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설립ㆍ운영주체는 지방관리ㆍ언론인ㆍ교사ㆍ학생ㆍ자산가 등 매우 다양하였다. 지방자치제 시행을 위한 민지계발 일환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주민들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일환이었다.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은 민중의식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중요한 기제 중 하나였다. 야학운동은 단순한 지식 배양에만 그치지 않았다. 곧 일상사 변화와 더불어 현실인식 심화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책무를 자각시키는 요인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국민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원천은 여기에서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참여를 통한 자아각성은 항일의식 고취와 시세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는 기반이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