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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지방 횃불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김진호(Kim, Jin-ho)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1 No.-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침탈당한지 8년 6개월, 3,107일인 1919년 3월 1일에 한민족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 독립을 성취하여 민주 공화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3·1독립운동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다양한 형태로 독립을 주창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과 야간에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 등의 형태로 전개됐다. 즉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거나 독립 관련 유인물과 격문들을 제작하여 배부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거나 군중들에게 권유하여 시장, 마을, 학교, 교회, 일제기관(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형태였다. 반면에 야간에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중부지방, 특히 충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독립운동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반화됨에 따라 일제의 무력적 탄압도 잔혹성을 띠게 됐다. 따라서 누구나 주도 인사나 참여자로 독립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과 일제의 탄압을 피할수 있는 방안 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야간에 접근과 활동이 용이한 마을 주변의 산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불을 피워 인접 마을과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독립만세 의지를 알렸다. 이 독립운동을 일제는 ‘篝火’, ‘焚火’ 등이나 ‘烽火’로 표기했고, 『매일신보』는 ‘불’, ‘화투불’, ‘봉화’, ‘거화’ 등으로 보도했다. 이를 독립만세운동과 대별하여 횃불독립만세운동이라 하고자 한다. 3월 23일 충북 청주의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 등지에서 주민들이 산위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충남 연기의 조치원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에 연기의 동면, 서면, 북면의 주민들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충남지방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연기에서는 3월 26일부터 4월 2일까지 26곳(회), 미상 일에 1곳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천안에서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기 수 일전부터 병천 주위의 산위에 봉화가 올랐고 3월 30일 풍세에서는 주민들이 20곳의 산위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쳤다. 아산에서는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80곳, 공주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13곳, 예산에서는 4월 3일부터 5일까지 27곳, 홍성에서는 4월 4일, 5일, 7일에 26곳, 당진에서는 4월 4일과 5일에 22곳, 청양에서는 4월 6일부터 8일까지 6곳, 서산에서는 3월 31일과 4월 5일, 8일, 10일에 7곳, 논산에서는 4월 1일, 3일, 7일에 5곳, 미상 일에 2곳, 대전에서는 3월 29일에 1곳, 보령에서는 4월 17일에 1곳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의 산 위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따라서 충남에서는 12개군 64개면에서 연216개 마을의 238곳(회)에서 가장 최소한으로약 13,000명이 참가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일경, 헌병, 수비대 보병 등을 출동시키고 일본인 민간인, 소방조, 재향군인 등까지 동원해 무력적 탄압을 했다. 현장 출동이 22차례나 하여 11곳에서 총기를 발포해 진압했다. 무력 진압으로 10명이 사망하고 13~4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111명 이상의 인사들은 독립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체포당한 인사들과 함께 주재소, 경찰서, 헌병분견소, 헌병분대에서 악형을 당하며 심문조사를 받았다. 검사국에 기소되어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인사가 48명이었다. 주도 인사나 참여자 대부분은 경찰서나 헌병분견소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잔인한 태형을 당했다. 수형 관련 기록을 분석하면, 참가자에 대한 체포와 태형의 집행이 4월 초순부터 지속적으로 자행되었고, 면 단위의 체포와 태형이 마을 단위로 실시되었으며, 동일 태형의 처분(형량)은 대부분 동일 형량으로 처벌됐다.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전적 형태로 등장하여 3월말부터 급속히 확산되어 마을 단위로 군(郡), 면(面)내 일대에서 대규모로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또한 마을들이 연합하여 아산, 홍성, 예산 등도(道)내의 내륙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었던 충남지방의 대표적인 3·1독립운동의 형태이었다. The Korean people declared The Independence from the colonial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on March 1, 1919. This toke eight years and six months, namely, in 3,107 days since the Korean Empire was robbed of the national sovereignty to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Korean people yelled for Korean independence and waved the Korean flag. Therefore they achieved independence from the colonial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hoped to build the democratic republic natio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developed many various forms all across the country. Accordingly the Japanese imperialism thoroughly oppressed by force of arms to the Korean people who cried the hurrah for the independence. So they found the method which directly evaded the crackdown of the Japanese imperialism and freely yelled for Korean independence. It was a signal torch(Hwaetbul, 횃불) of the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It yelled on March 23th in Yeongi-gun, Chungcheongnamdo. Since then, It lasted to early in April. It put in practice 27 locations in Yeongi-gun, more than 21 locations in Cheonan-gun, 80 locations in Asan-gun, 13 locations in Gongju-gun, 27 locations in Yesan-gun, 26 locations in Hongseong-gun, 22 locations in Dangjin-gun, 6 locations in Cheonhyang-gun, 7 locations in Seosan, 7 locations in Nonsan, 1 locations in Daejeon-gun and Boryeong. The Hwaetbul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yelled 238 locations(or times) in 12-gun(郡), 64-myeon(面), 216-village of the Chungcheongnamdo. The total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was the 13,000 person at the very least. They waved the Hwaetbul and yelled the Independent Harrish on the around mountain of the their village. But the Japanese imperialist and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ppressed the participant in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Movement. The Japanese imperialist mobilized the police, the the military police(MP), the Japanese Army in Korea(朝鮮駐箚軍) and even the civilian Japanese(gownsman), the fire fighting service(消防組), the veteran(在鄕軍人) and so on. They dispatched 22 times on the spot and fired a gun in the 11 locations. So the Korean was killed the 10 persons, injured the 13~4 persons and arrested the more than 111 persons. Ever since the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The Japanese imperialist executed a wholesale arrest operations. The arrest were severely interrogated in the substation of the police–military police(警察,憲兵駐在所), the squad of military police(憲兵分隊) and the outsation of military police(憲兵分遣所). After this, they were charged with the violation of safety-code (保安法) by Japanese prosecutor. As a result, the Japanese judge panel sentenced the prison and flogging(Taehyeong, 笞刑) on the 48 persons. Most participants were oppressed the flogging in the substation of the police–military police(警察,憲兵駐在所), the squad of military police(憲兵分隊) and the outsation of military police(憲兵分遣所). The flogging was the immoral, inhumane and cruel punishment. It was practiced the 30~90 lash. Conclusionally, the Hwaetbul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developmental form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It was rapidly spread toward the end of March and practiced on the mountain of village in gun and myeon. It was carried ou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intensive, large scale, short-term. It appeared in Asan, Hongseong, Yesan, namely, the mountainous regions of the interior in Chungcheongnamdo. And it was the representative independence movement in Chungcheongnamdo.

      • 대전-충남 금강 문화권의 불교문화와 사상

        김방룡(Kim Bang-ryong)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2 충청문화연구 Vol.27 No.-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충북과 충남 그리고 전북을 관통하며, 장항과 군산을 거쳐 서해에 이르고, 다시 바닷길을 따라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진다. 본고에서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하여 충남 서북부의 내포문화권과 나뉘는 대전-충남 지역의 문화권을 금강문화권이라 명명하고서, 이 지역의 불교문화와 사상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백제시대 웅진과 사비천도 이후 불교문화는 크게 발달하여, 사상적으로 미륵, 화엄, 열반, 법화, 선, 율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까지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의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는 미륵사상과 화엄사상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미륵신앙은 왕조를 중심으로 국가불교적인 모습과 민간을 중심으로 한 저항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화엄사상은 국가불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과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갑사 영규를 중심으로 한 의승군의 활약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구한말 경허와 만공 등이 동학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새롭게 떨친 사실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이 지역의 불교가 크게 공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Geumgang River originates from Jangsu-gun, Jeollabuk-do, passes through Chungbuk, Chungnam, and Jeonbuk, reaches to the West Sea via Janghang and Gunsan, and leads to China and Japan along the sea route. In this paper, the cultural area of Daejeon-Chungnam region, which is divided from the Naepo Cultural Area in northwest Chungcheongnam-do, was named Geumgang Cultural Area, and Buddhist culture and ideas of this region by period were considered. After moving the capital to Woongjin and Sabi in Baekje period, Buddhist culture has developed greatly, ideologically showing various aspects such as Maitreya, Hwaeom, Nirvana, Beophwa, Seon, and Yul. Baekje people entered India as well as China, did activities of seeking truth, and spread Buddhism to Japan, which greatly influenced Japans ancient culture. During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Dynasty, Maitreya thought and Huayan thought were prominent in this area. If the Maitreya faith has both a state Buddhist character centered on the dynasty and resistance character centered on layperson, it can be seen that Huayan thought has a state Buddhist charac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can be seen that loyalty and righteousness are important, and the performance of the righteous monks army centered on Gapsa Yeonggyu, is a representative example. In addition, the fact that monk Gyeongheo and monk Mangong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made a new sensation of Seon centered on Donghaksa Temple shows that Buddhism in this area contributes greatly to modern Korean Buddhism.

      • 대전 충남지역 지방문화의 연구현황과 과제

        김상기(Kim Sangki)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0 충청문화연구 Vol.3 No.-

        Research on the local culture in Daejeon, Chungcheongnam-do has been vitalized since 1980 and made a progressive development. Local History Research Association organized by a city and county publishes a bulletin and carries articles relating with the local culture, introduction of materials and essays on visit to the place. However, it is a common trend that the place where the research association is difficult to be continued owing to lack of the succeeding generation and financial support is on the rise. In comparison, a local culture center is rather active as national support is ensured by the enactment of the laws for cultivating local culture business. Chungcheongnam-do History Culture Centerand Daejeon Current Affairs Compilation Committee established by Chungcheongnam-do and Daejeon city respectively have embarked regarding themselves as the cradle for the local culture. Especially, Chungcheong History Culture Research Institute made rapid progress like establishing its history museum. Now, the writer of this study wishes that the organizations will continue to develop an independent research business that can intensify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f the people in Chungcheonam-do pasting the present level of simply issuing city and county bulletins. Chungnam University, Hannam University and Gongju Universityare taking initiative to conduct a local culture research by establishing Local Culture Research Institute. The Chungnam Universityestablished Chungcheong Cutlure Research Institute in 2003 and has sought for the revitalization of study on Chung cheong province including studies on villages in Chungcheong, its language literature, the racial movement of modern and contemporary age and so forth. As a method to vitalize studies on local culture, an institutional strategy is primarily required to cultivate local history investigators. In addition, publication of source books that form the foundation of local culture research must rake precedence. After that, joint researches between local history invesrigators and regional history researchers must be revitalized.

      • 〈춘향전〉 이본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과 그 가치

        경일남(Kyung, Il-Nam)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1 충청문화연구 Vol.26 No.-

        이 논문은 〈춘향전〉 이본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과 그것이 지닌 가치를 고찰한 것이다. 〈춘향전〉 이본에는 충청지역의 지리·명소, 토산물, 지명, 기녀 등과 관련된 내용이 적잖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양상은 〈춘향전〉 이본 중 필사본에서 더욱 두드러진 양상을 보여준다. 〈춘향전〉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은 작품 내에서 향토적 현실성을 강화시켜주는 문학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충청 관련 내용의 확대·변이와 추가적 수용은 주로 〈춘향전〉의 필사본에서 나타난다. 이 이본들의 필사자는 충청지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많은 자라고 보아지며, 이 이본들은 주로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춘향전〉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은 이 작품이 전승되던 당시의 충청지역의 실상과 충청지역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충청학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This study examined the content and the value related Chungcheong appeared in a different version of 〈Chunhyangjeon〉. Some details involved geography, famous place, local produce, nomination and ginyeo are pretty implicated in this version of 〈Chunhyangjeon〉. This aspect is shown remarkably in the manuscript one among different versions. Substance on Chungcheong has made literary effect in the work, which stiffens indigenous reality. These additional acceptances and expansions, transitions about Chungcheong are usually appeared in the manuscript. The writer of the manuscript is seen as a person who has lots of interest in Chungcheong area. And it seemed quite probable that these different versions were distributed centering around Chungcheong. Because details on Chungcheong in 〈Chunhyangjeon〉 reflects the reality of area and the recognition, so these have value as a critical data of Chungcheong studies.

      • 충청지역 구석기 유적의 다양성

        유용욱(Yoo, Yongwo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1 No.-

        충청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다수의 지점에서 구석기가 확인되었고 대부분 금강 하계망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본고는 금강유역 제4기퇴적층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고 이 지역 고인류의 점거 양상에 대한 초보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금강유역은 상류, 중류, 하류 각 세 지역이 지형적으로 독특하게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금강유역이 관통하는 충청지역의 구석기 유적 입지 유형은 1) 금강 중·하류 지역과 2) 충남·전북 접경 지역의 충적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각 지역의 대표적 유적들은 금강 중·하류역의 본 하계망과 지류의 유역 형성 과정을 반영한다. 또한 퇴적층 내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대부분 후기 홍적세에 해당한다. 충청지역 구석기시대 고인류는 현재 청원군, 대전 일대의 남한강과 미호천이 마주보는 지역을 기점으로 해서 금강유역을 상류역과 하류역의 두 갈래 방향으로 점거해 나가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 축적된 절대 연대 자료와 석기군의 변천상을 볼 때 후기 홍적세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Chungcheong area, especially around the Geum River Area(the GRA hereafter), has yielded many palaeolithic localities until now. In spite of numerous studies on individual sites and lithic assemblages, their general formation processes are yet to be understood in a larger scale concentrating on the terrain and landscape of the Geum River channels. This article attempts to observe the principal process of hominid occupation during the Pleistocene era on a macroscopic scale. The GRA is characterized by uniquely distinguished terrains from upstream, midstream to downstream area respectively and this can be one of major factors responsible for the different geomorphological formation processes of palaeolithic sites across this area. The sub-area of the GRA can be suggested two territories: 1) mid-and downstream territory of Chungcheong province; and 2) floodplain territory at the border between Chungcheong and Jeolla province. Each territory assumes unique depositional environment reflecting the influence of different terrains and river channel energies, of both main Geum River and tributary channels; lithic artifacts discovered in situ are generally dated Upper Pleistocene(mostly from MIS 3 to 2). Given the available chronometric dates and lithic assemblage characteristics, the hominid occupation might have initiated at least during the later phase of Upper Pleistocene and continued to the MIS 2.

      • 대전·충청지역 『국학 기초자료조사』 10년의 성과와 과제

        성봉현(Seong bong-hyeon)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1 충청문화연구 Vol.25 No.-

        본 논문은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의 ‘국학자료사업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에서 실시한 ‘국학기초자료조사’ 사업을 2009년부터 충청 남·북도를 대상으로 10년에 걸쳐 수행한 결과를 간략히 소개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사업팀에서는 10년간 약 23개 소장처에서 25,000여건을 조사하였고, 이를 22책으로 간행하였다. 조사대상은 간인된 서책을 제외하고, 고문헌 즉 고문서 전수를 조사하였다. 조사된 자료의 성격과 의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사된 고문서의 상한 년대는 17세기 이전의 자료는 매우 희소하였다. 이는 조사된 가문의 충정도로 입향과 사족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둘째 조사한 자료는 한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자료가 많았다. 이는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가문을 많이 조사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조사한 자료중에는 간찰이 많았다. 특히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가족 사이에 수발한 간찰이 상당량이었다. 이는 문집에 수록되는 간찰이 주로 의리 중심으로 선택되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넷째 성책자료들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남양홍씨 내외십세보』 등 10여건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유일본이어서 사료(史料)로 의미가 있었다. 다섯째 그동안 조사가 미흡하였던 충청북도에 소장된 자료를 상당량 조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사팀의 바람은 조사된 자료가 한국학 연구에 적극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The ‘Korean Studies Data Project Team’ of Chungcheong Institute of Cultural Studies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has carried out the project of ‘Investigation in the Basic Data of Korean Studies’ conducted by "Korean Studies Promotion Service"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over 10 years. As a result, investigations took place in 25,000 cases in 23 collections, which led to publishing 22 books. The subject of this investigation included all of the old documents excluding the signed books.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the investigated data are as follows: First of all, of the old documents investigated, data before the 17<SUP>th</SUP> century were very rare. This seemed to be relevant to the investigated families’ escape to Chungcheong-do and transformation into ‘Sajok’ figures. Second, numerous data on the Righteous Army Movement in the Late Joseon and independence movements were found. The reason for such results was because a large number of families who participated in the Righteous Army Movement in the Late Joseon were investigated. Third, numerous old letters were found in the investigateddata. Particularly, there was a considerable amount of old letters between families that were not recorded in the book. This was believed to be due to the fact that the old letters recorded in the book was mainly selected on the basis of loyalty. Fourth, there were several cases where the data made into books had historical values. For instance, since about 10 cases including ‘Namyang Hong Family’s Naeoesibsaebo’ were either not known to academia or the only copy, they were meaningful as historical sources. Fifth, the investigation was carried out on a considerable amount of data stored in Chungcheongbuk-do, which had been insufficiently investigated. Lastly, the investigation team expects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ed data to be actively utilized in Korean studies.

      • 한국어 교재 및 수업 방법 개발을 위한 출판 프로젝트 활용 방안 연구

        한유진(Han, Yu-jin)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6 충청문화연구 Vol.16 No.-

        The textbook is closely related with a curriculum and an outline program of instruction and is medium of teaching-learning to connect with teachers and students. this function is more than simple learning material. So this study analyzed the satisfaction level and unsatisfaction contents of Korean textbook that the universities use in Chung-Cheong area. based on this results, this paper also checked the Problems that old books have and suggested "the Publication Project" as a new model for the development of Korean textbook. Also, this study introduced that there is a potential to sere many important functions as databases for the development of Korean textbooks, which is the result of the publication project that the teachers and students made collaboratively. The publication project is also meaningful as a teaching-learning methodology. This education methodology expects positive effects in the teaching-learning of integrative approach which has amalgamated the speaking, listening, reading, writing of the korean language, the improvement of whole language ability, and the formation of an effective domain. This paper has designed a semester curriculum based on the Korean teaching-learning project and created a specific teaching-learning guidance which utilizes the workshop model. In addition, it will explore the viable plans of real world applications in a live school environment. Korean teachers and students have to keep check real problems and research future-oriented studies. this paper expects the study of Korean textbook and Korean education are active more through this research.

      • 충청지역 신종교와 그 문화적 특징

        김탁(Kim, Ta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7 충청문화연구 Vol.18 No.-

        계룡산은 조선(朝鮮)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 후보지의 하나로 선택했던 곳이다. 조선의 태조는 즉위 2년(1393)에 계룡산(鷄龍山)으로 행차하여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삼는다. 이 일이 후대에 이씨(李氏) 조선을 대신할 새 왕조가 계룡산에 건국될 것이라는 {정감록}류의 예언으로 흡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조(宣祖)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이 계룡산이 새 왕조가 세워질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인조(仁祖) 때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에서 계룡산에서 새 임금이 등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권대진의 역모사건에도 계룡산이 새 도읍지로 부각되었다. 영조 때에는 {정감록}이 등장하는데, 계룡산이 진인(眞人)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울 곳이라고 주장되었다. 정조 때 이경래와 문인방 등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새 왕조가 세워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에도 계룡산이 언급된다. 그리고 동학(東學)에서도 계룡산 중심의 왕조건설이 믿어졌고, 전봉준과 최시형도 계룡산을 신성시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계룡산은 새 왕조가 건설될 중심지로 믿어졌으며,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천교에서도 계룡산을 신성시했고, 많은 신종교 교단이 계룡산을 정씨 진인의 새 도읍지로 믿었다. 해방 이후에도 천진교, 동학회, 천지대안도, 금강대도, 삼령교, 삼신당, 무량천도, 정도교 등의 교단에서 계룡산에 새 왕조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고, 계룡산을 교단의 중심지로 삼고 이곳에서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교단에서도 계룡산은 성스러운 지역으로 이해되었다. Gyeryongsan is the place where Taejo Lee Sung-gye, the founder of Joseon, selected as one candidate of new capitals. Taejo in Joseon visited Gyeryongsan and took it as a new candidate of the capital in the second year of enthronement. This became a crucial clue to the prophets like Jeonggamrok that a new dynasty to replace Joseon of the Lees would be founded in Gyeryongsan. Later, Chung Yeo-rip in Seonjo insisted that Gyeryongsan be the center where a new dynasty would be founded. It was also argued that a new king would be made in Gyeryongsan at Yu Hyo-rip"s conspiracy in Injo. And Gyeryongsan stood out as a new capital at Gweon Dae-jin"s conspiracy. In Youngjo, Jeonggamrok appeared, where it was said that Gyeryongsan would be a new country by a true man of Chung. Later, Gyeryongsan was referred to in 10 beautiful places of Jeonggamrok. Also in Donghak, the dynasty founding in the center of Gyeryongsan was believed. Jeon Bong-jun and Choe Si-young also took Gyeryongsan as holy. Also in the Japanese occupation, Gyeryongsan was believed to be the center of a new dynasty being founded, and people gathered there. Bocheon-gyo took Gyeryongsan as holy, and a lot of new religions believed Gyeryongsan to be a new capital of a true man of Chung. Also after the liberation, in the religions of Cheonjin-gyo, Donghak-hoe, Cheonjidaean-do, Geumgangdae-do, Samryeong-gyo, Samshin-dang, Mooryangcheon-gyo, Jungdo-gyo, and so on, it was believed that a new dynasty would be founded in Gyeryongsan, which was regarded as the center of the religions and their followers prayed earnestly there. Also in the new religions of Christianity, Gyeryongsan was regarded as a holy place.

      • 부여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현황과 기념관 건립

        박경목(Park, Kyung-m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0 No.-

        본 논문은 충남 부여군에 소재한 독립운동사 사적지의 현황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기념관 건립에 대한 타당성을 모색하는 한편 관련 콘텐츠 개발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부여에서는 의병, 군자금 모집, 3.1운동, 중국방면 무장 항일투쟁, 농민운동, 학생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 다양한 방법론의 독립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 가운데 충화. 임천에서 펼쳐진 1919년 3월 6일 만세운동은 충남지역 최초의 3.1운동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최근 독립운동사는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까지 아우르는 문화원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이를 대리표상하는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보존과 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부여 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23개소로 기념비와 생가 위주로 남아있으며 체계적인 안내 시스템이 미흡한 실정이다. 또한 대표적인 기념관도 부재하다. 부여 전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다양한 방법론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만큼, 이제 부여 독립운동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기억과 기념을 가능케 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바로 독립운동 관련 기념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념관의 명칭은 부여의 정체성과 지역을 포괄하는 동시에 부여 독립운동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부여 독립운동 기념관’이라는 명칭을 제안하고 타당성을 제시했다. 기념관의 위치는 접근성, 경제성, 효율성, 활용도 4가지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부합하는 곳으로 규암면 오수리 일대 ‘부여 노인복합단지’조성지역 제 1공구 내 유보지(미 계획 공간)를 제안했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여 주민과 관광객의 접근이 용이하다. 이미 기반 조성 작업이 되어 있고, 주변 시설 및 자원과의 연계가 가능한 최적의 위치이다. 기념관 건립은 사업조성기, 건립 추진기, 건립과 완공기로 나누어 2018~2021년까지 4개년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부여 시민들의 참여와 공유를 유도하고 민, 관, 학 협치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충화와 임천의 3.1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방에 전개된 3.1운동 가운데 최초로 일제 헌병기관 앞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가치를 전승하기 위해서 우선 명칭을 확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여 충화.임천 3.6독립만세운동’이라는 명칭을 제안 했다. 다음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념행사를 지역의 특화 축제로 육성하고, 학술, 선양, 체험, 문화 분야 등에서 관련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이는 부여 독립운동사를 주민들과 공유하고 외부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주요 소재가 될 것이다. 부여 독립운동 기념관 건립과 충화.임천 3.1운동 콘텐츠 개발을 통해 부여 지방정부의 위상이 높아지고 지역민 삶의 품격이 제고되기를 기대한다. This study listed the historical sites of independence movements in Buyeo-gun, Chungnam and discussed the feasibility of constructing a memorial.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carried out in various forms in Buyeo during the Japanese Imperial Rule, including the justice army, the 3.1 Movement, fund-raising for military purposes, and labor movement. There needs to be a certain facility to symbolize Buyeo"s independent movement and for commemoration and celebration of its history. We are in need of an independent movement memorial at this point. "Buyeo Independent Movement Memorial Hall" has been suggested as the name of the memorial to represent Buyeo"s independent movement. Accessibility, economic value, efficiency, and usability were considered for the location. The empty lot within the property for "Buyeo Senior Complex" around Osu-ri, Gyuam-myeon was proposed. This place is the best location considering traffic, infrastructure, and surrounding amenities. The 3.1 Movement of Chunghwa/Imcheon is historically significant as it was the first unarmed protest in front of a Japanese military police facility in the rural areas. The proposed title of the movement is ‘Buyeo Chunghwa/Imcheon 3.6 Independence Manse Movement.’ It is also important to develop related contents related to localized festivals, academics, enlightenment, experience, and culture to attract attention of local people and outside visitors. It is expected that the memorial brings honor to Buyeo"s local government and enhance the quality of life for the local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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