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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지역 유찬희의 민족운동

        박영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3

        유찬희는 1900년에서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추진했던 민족운동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그는 1883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오경을 배웠고 17살이 되는 해에는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사상을 접한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신사상을 수용한 유찬희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고 초창기에는 의병활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의병투쟁은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유찬희는 서북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유찬희는 서북학회를 통해 이동휘를 비롯한 기독교민족지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유찬희는 그의 민족운동 기저를 형성하는 기독교민족주의를 수용할 수 있었고 강원도 이천군 교회운영에서 나아가 가솔들을 이끌고 북간도 국자가로 이주한다. 1918년부터 유찬희는 대표적인 북간도 한인지도자로 부상한다. 특히 그는 무악흥업회사를 경영하며 실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유찬희는 안정적인 자금력을 통해 파리강화회담 대표파견 기부금 모연, 민족학교 설립 자금 보관 등에서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로써 유찬희는 한인사회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여러 민족단체의 재무부문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상무총회 활동 이후 유찬희는 북간도지역 민족운동단체 대한국민회에서 총기구입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어 참모장으로 영전된 그는 총기뿐 아니라 군량, 부대이동 등 구춘선, 홍범도, 안무 등과 함께 독립군의 제반 업무를 살핀다. 봉오동전투 이후 유찬희는 액목현에 은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의 동향을 대한국민회에 보고하고 김일을 비롯한 의기청년들과 교류하며 일본군의 움직임을 내사한다. 하지만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국민회가 추진하던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유찬희는 공산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오히려 그는 고려공산당 참사로 활동하지만 기존의 목회활동에 더 치중했고 남감리교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찬희의 고려공산당 가입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무장투쟁이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실천적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찬희는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ㆍ1운동 제7주기기념행사를 추진하여 1,500여 명의 재러한인들에게 항일사상을 일깨운다. 의병투쟁, 애국계몽활동, 기독교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활동, 대한국민회를 통한 무장투쟁, 고려공산당 활동, 동성노농공사에서의 농민운동까지 유찬희는 시기와 상황에 맞춰 독립운동의 방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자신의 실업가적인 특질을 토대로 총무, 재무 등 민족운동단체의 실질적인 직위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유찬희의 민족운동과 향배를 연구하는 것은 구한말에서부터 1920년대까지 국내와 북간도, 러시아일대에서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추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인 동시에 실업가적 특질을 갖는 민족운동가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Yoo Chan-hee is a nationalist activist born in Geumcheon, Hwanghae Province in 1883. His ideological foundation was rooted in neo- Confucianism education of his childhood school seodang and modern education received in Seoul’s PaichaiHakdang. In particular, Yoo Chan-hee embraced Christianity at the Paichai Hakdang, which served as bedrock of his national movement. In 1907, Yoo Chan-hee left the Paichai Hakdang to join independent patriot Cha Dosun’s righteous army. Yoo physically fought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in Goksan by carrying out arson attacks with his cousin Yoo Myung-hee. Subsequently, Yoo Chan-hee joined the North-West Society to engag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Yoo Chan-hee settled in Yanji, China and established the Taekwang School, which means light of the national Korean flag Taegeukgi. As a principal, he supervised school operations and sought to raise awareness of national consciousness by educating the Koreans living in Yanji.  In addition to educational movement, Yoo Chan-hee actively promoted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autonomy group Ganminhoe in the North Gando region, establishing under alias Doseong. As the leading Korean social organization in North Gando, Ganminhoe conducted census research and established private schoolfor education. Yoo Chan-hee served as the secretary of the Ganminhoe and orchestrated major operations, influencing both the Chinese and Korean societies. He formed a large-scale mutual financing association by rallying enlightenment activist Jeong Jae-myung and other key figures of Ganminhoe. The financing association was operated by issuing lottery tickets, and its profits were used to operate national education schools. In addition, Yoo Chan-hee expanded informal youth gathering to conduct practical operations of Ganminhoe. In 1916, Yoo Chan-hee achieved great economic success through the Muhak Industries. As Yoo Chan-hee became one of the prominent store owners in Yanji, he assumed substantive national movements through considerable capital. In 1919, the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March 1st SamIl movement, took place in Longjing Village, Machuria. Yoo Chan-hee made speeches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alongside Christian national leaders in the North Gando region, such as Choi Il, Kim Young-hak. Yoo’s son Yoo Ki-seok joined the Chungreoldan to print national flag Taegeuki and flyers for independent protests. After the March 13th independence movement, Yoo Chan-hee moved to Vladivostok and subsequently joined the Korean General Assembly Sangmuchonghoe an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Daehankukminhoe. In particular at the General Assembly, he served as the vice-chairman, which indicates that the Korean-Russian community recognized Yoo’s financial competency. Upon returning to Gando, Yoo Chan-hee joine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and became a committee member in charge of purchasing firearm. The Korean National Council represented the North Gando province and was a national movement group that supported independence war. As Yoo was a firearms purchasing committee member, he was responsible for arming the troop that was under the auspice of the Council.  Furthermore, Yoo Chan-hee assumed the chief of staff role, serving alongside Hong Beom-do, ChoiJin-dong to lead the army and victory of Bong-o-dong. After the battles of Bong-o-dong and the invasion of Cheongsan-ri, Japanese imperialists sent large-scale troops to Gando to retaliate. Yoo Chan-hee, who became the head of financial affairs of the National Council, received An Jung-geun who was dispatched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thereby serving as a communication link between the Council and the government. Additionally, Yoo contacted Meng Boo-duk who was attacking the independent army to allow for a month of troop movement, minimizing the damage to the army. In December 1921, the leaders of the Korean National Council, such as Yoo Chan-hee and Kim Ju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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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현황과 개선방향

        오영섭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5

        현재 한국 사회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교용 『한국사』교과서들이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현행의 『한국사』교과서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육성한다고 하는 국사교육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미흡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연구는 현행 6종의 『한국사』교과서의 일제시기 독립운동사 서술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의 한국독립운동사 서술경향은 대략 네 가지로 정리된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1)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을 중시하고, 2) 민족유일당운동(민족통일전선)과 한중연대활동(한중연합전선)을 주목하고, 3) 다소간 반미친소적인 시각으로 국제적 사건이나 인물을 인식하고, 4) 약소국이 중시해야 하는 외교독립운동을 경시하는 서술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무장독립전쟁이나 민족통합(+국공합작)노선에 대한 서술분량과 외교독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에 편차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온건론보다는 급진론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온건론에 속하는 실력양성운동이나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이 충분치 못한 반면, 그 대척관계에 있는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실정과 국제정세에 비추어 전자나 후자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동등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분량과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을 균등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온건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승만의 활동을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친미적 국제관에 기초한 기독교민족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려 하고, 좌우합작과 민공협동을 배격하는 반공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고,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의열투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을 지지한 이승만의 활동을 다루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보다 역사적 중요도가 낮은 인물에 대한 독사진이 들어간 반면, 이승만 사진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에서조차 이승만 사진이 빠진 것으로도 증명된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에서도 균형점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은 사실 서술과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사』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에는 자잘한 사실에 대한 오류는 물론, 부정확ㆍ불충분한 해석이 이따금 보인다. 이는 집필자들이 특정 시대의 특정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전문학자들로서 일제시기사 전공자가 아니라는 문제점, 그리고 검인정을 받기 위해 출판사가 제출한 교과서를 검토하는 연구위원과 검정위원들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제대로 검토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문제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 『한국사』교과서의 개정판을 낼 때에는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고 해석하는 한편, 서술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사실이나 해석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국사 교과서는 겉으로는 교육부의 집필지침에 따라 집필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 부분 집필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집필되고 있다. 교육부는 국사 교과서의 각 장의 명칭과 각 절에 들어갈 중요 내용이 담긴 집필지침을 반드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준수한 교과서만을 교육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사 교과서의 집필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각 절의 체제 구성과 그 내용 및 분량 안배가 전적으로 집필자들의 자유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집필자의 노력 여하게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교육부의 집필지침을 넘어서는 재량과 노력을 발휘하여 국사 교과서의 참신성과 독창성 및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on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n six types.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show that their historical perception is nationalistic and popular, it belittles on the system of liberal democracy and the market economy and it has a perception against USA and for Soviet Union in international issues. Therefore, it needs to value liberal democracy of ROK in writing Korean History. In describing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t is easy to find a number of errors in quoting and interpreting truthful facts. I think that it is because the history writers research only on the particular subject. Further, it might be because the scholars who examine the contents of textbook are not professional in the part of Japanese occupation history. Thus, they need to be more cautious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 sense of contents and system of Korean History textbooks, it is problematic these are so similar. After the Ministry of Education usually gives important points, only the textbooks which fit on the standard could be allowed to use. However, I think it depends on the writers in writing contents of detail. Therefore, the writers can change contents of history textbook according to their opinion. Korean History textbooks focus more on radical ideas rather than moderate ideas. While Korean History textbooks belittle upon training capability movement or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the textbooks considerate more on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Particularly, if it is composedly examined about the Korean situation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t is possible that both the former and the latter are equal for historical value. Korean History textbooks disregard and devaluate Syngman Rhee’s activities who is the most representative moderate among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s. The textbooks don’t deal with the Syngman Rhee’s activities which attached importance to Christianity nationalism and anticommunism and developed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 of America. Thus, it needs to reduce the part of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and extend the part of moderate’s activities like Syngman Rhee and Ahn Chang-ho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ddition, it is to correct the point that there is no picture of Syngman Rhee among a number of historical figures in Korean History text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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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정기 국정 공민교과서의 성격과 집필진의 구성

        김동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4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식 민주교육제도’를 남한에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 의도는 남한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bulwark)으로 만들고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시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장기적인 정치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교육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하여 朝鮮敎育審議會(위원 100여명)를 설치하였다. 본 위원회에서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한국교육의 기본이념으로 교육법에 명시하였다. 이 이념은 교육현장에서 일제 잔재의 청산, 평화와 질서 유지, 새나라 민주시민 육성으로 구체화되어 교과편제 및 시간배당과 교수요목에 나타났다. 이러한 미군정의 교육정책의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과목이 바로 사회생활과이며, 그중에서도 公民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은 공민교과서에서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반공주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의도와 달리, 공민교과서의 내용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영국식 의원내각제 옹호, 무조건적인 자본주의 배격,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국정공민교과서 편찬에 깊은 영향을 끼친 편수관과 편찬위원들 때문이었다. 공민교과서 편수책임자인 최재희는 최현배에 의해 추천되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랑도 및 민족을 우선시하고, 당시 풍미하던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정공민교과서의 편찬위원들은 미군정 학무국장 고문이었던 김성수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보성전문의 교직원이었다. 또한 정열모, 현상윤, 장덕수는 모두 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하여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찬위원이 된 것은 김성수와의 인연이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군정은 조선어학회에 국어교과서와 공민교과서의 편찬을 의뢰하였다. 심지어 당시 편수국장도 조선어학회의 주요인물인 최현배였다. 편찬위원들도 대체로 조선어학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대종교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안호상과 정열모, 백낙준 같은 편찬위원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인보다도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공민교과서는 미군정의 의도대로 편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이 교과서 출판과 편찬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교육 이념에 적합한 교과서 제도는 원칙적으로 자유발행제였다. 게다가 유능한 교과서 저술 인력은 트럭운전사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미군정에서 일하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정은 필요한 만큼의 직원을 확보할 수 없었고, 교과서 편찬과 배부도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이런 현실적인 원인들도 미군정이 교과서 편찬기준을 엄격하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기 공민교과서는 편수관과 편찬위원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공민교과서를 통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정치를 소개하였다. 아울러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의 행복과 복리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공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The educational polic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short, to carry out an “American-style democratic education system” in South Korea. The purpose of this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o make South Korea a bulwark against communism, and to lay the foundation for incorporating South Korea into the capitalist world market. The United States recognized that Koreans needed long-term political education. In this regard, the U.S. Military Government established the Korean Education Council (approximately 100 members) to prepare a blueprint for Korean education. In this committee, the philosophy of ' Hongik-Ingan’' was specified in the Education Act as the basic philosophy for ​​Korean education. This philosophy was reflected in the curriculum composition, the time allocation and syllabus, pursuing the settlement of the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maintenance of peace and order, and the cultivation of democratic citizens. One of the subjects that can best reveal the purpose of this education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he social sciences subject, particularly the civic education. The U.S. Military Government tried to emphasize “American democracy,” capitalism and anti-communism in the civic textbooks, without cultivating nationalism. However, unlike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content of the civic textbooks emphasized the support of the British parliamentary system, unconditional rejection of capitalism, and statism- based nationalism under the philosophy of Hongik-Ingan. This was due to the compilation editor and Compilation Board members who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compilation of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Jae-Hee Choi, the head on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civic textbooks, was recommended by Hyun-Bae Choi. Jae-Hee Choi emphasized liberalism and criticized communism, sharing common political views wi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However, Choi saw differently from the U.S. Military Government with regards to the concept of Hwangryangdo, which prioritized the people first, and his opposition to the pragmatic educational philosophy of Dewey.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had much to do with Sung-Soo Kim, who was the academics adviser to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y were staff members of Bosung College. In addition, Yeol-Mo Jeong, Sang-Yoon Hyun, and Duk-Su Jang had all studied at Waseda University. Therefore, it seems that their relationship with Sung-Soo Kim helped them to be on the Compilation Board. On the other h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mmissioned the compilation of Korean textbooks and civic textbooks to Joseoneohakhoe (The Korean Language Society). Even at that time, the head of Chief Compilation Editor was Hyun-Bae Choi, a major figure in Joseoneohakhoe. The Compilation Board was also deeply involved with Joseoneohakhoe. Joseoneohakhoe was associated with Daejonggyo, which had a strong nationalistic color. Therefore, the Compilation Board including Ho-Sang Ahn, Yeol-Mo Jeong, and Nak-Jun Baek emphasized the excellence of Korea and ethnic-centered education. In addition, the state and national security was given priority over the individual. As such, the civic textbooks were not compiled according to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Nonetheless, publishing was made possible because the U.S. military took a flexible attitude toward textbook publication and compilation. The textbook system suitable for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principle, a self-regulated publication system. Moreover, competent textbook writers were not willing to work in the U.S. Military Government, who received less wages than truck drivers. As a result,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unable to secure the necessary staff, and textbook compilation and distribution was seriously delayed. These also made it impossible for the U.S. military to strictly set textbook compilation standards.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civic textbook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period had to be influenced by compilation editors, the Compilation Board, and Joseoneohakhoe. They introduced democratic politics based on the parliamentary system through the civic textbooks. In addition, they emphasized statism and nationalism, and sought to cultivate “public citizens” for state and nation rather than individual happiness and 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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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9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이 글은 2011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에 대한 서술의 체계와 내용을 검토하여 분석한 글이다. 구체적으로는 3ㆍ1운동의 배경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의 전개와 의의ㆍ영향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 관련 인물ㆍ사진ㆍ도표ㆍ보론의 내용을 검토한 후, 각각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2010 부분개정)>에 따라서 제작된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3ㆍ1운동 관련 부분을 제Ⅵ 대단원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에서 다루고 있다. 이 대단원 아래 중단원의 제목은 대체로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고 하고 있다. 소단원의 제목은 교과서별로 상이하나, 대체로 3ㆍ1운동의 배경, 3ㆍ1운동의 전개, 3ㆍ1운동의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3ㆍ1운동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먼저 일제의 무단 통치, 즉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들고 있다. 그리고 1910년대 국내의 비밀결사활동과 교육ㆍ문화 운동,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과 이를 통한 교육ㆍ문화 운동을 또 다른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제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지원 천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주목하고 있다.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지학사 교과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천명 사실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보다 강조하는 것 같다. 레닌의 식민지의 민족해방 지원 선언을 주요한 국제적 배경으로 거론하지 않은 고등학교 한국사는 천재교육 교과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으로 인한 영향으로는 3ㆍ1운동 직전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 파견, 일본 유학생의 2ㆍ8독립선언, 만주 길림성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선우혁의 이승훈과의 접촉, 여운형의 연해주 러시아한족대회 참석과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참석 소식 전파 등,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움직임을 3ㆍ1운동 발생의 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3ㆍ1운동의 또 다른 근본적 배경은 ‘문화 민족으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레닌의 약소민족 해방 지원 천명’을 3ㆍ1운동 발생의 국제적 배경으로 들고 있으나, 민족대표 33인의 심문조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므로, 조금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천재교육의 네 출판사의 교과서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가 3ㆍ1운동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였으나,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시기를 3ㆍ1운동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이것을 3ㆍ1운동의 배경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다. 3ㆍ1운동의 원인과 배경의 서술에 있어, 역할과 비중 등을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지 않은 곳이 약간 보인다. 예컨대 법문사의 교과서에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에는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민족 대표”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3ㆍ1운동 시의 역할과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의 순으로 배열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 단원의 전개 부분에서는 독립선언서의 발표, 서울 및 주요 도시 시위, 농촌으로의 시위 확산, 비폭력시위에서 무력시위로의 변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국외로의 시위 확산 등의 사항이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독립선언식의 추진 주체와 민족 대표의 역할 등에 있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은 거론하지 않고,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만을 서술하였다. 또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천재교육의 교과서는 일제가 시위 초기부터 발포 명령을 내려 무자비한 탄압을 한 것으로, 지학사ㆍ법문사ㆍ삼화출판사ㆍ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는 시위가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자 일제가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 것으로, 비상교육의 교과서는 농민 등의 비폭력 시위에 일제가 헌병 경찰, 군대 등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주장이 다르므로, 선후관계를 다시 파악하여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3ㆍ1운동을 전개한 계층을 서술할 경우에 삼화출판사의 교과서는 “처음에는 학생과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점차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고”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참여자 수를 볼 때 ‘농민과 노동자들’로 순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3ㆍ1운동에 관련된 인명의 거론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교과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유관순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ㆍ1운동의 주역은 소개하지 않고, 김규식과 2ㆍ8독립선언 참가자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다. 화보와 캡션 설명에 있어서도 오류가 간혹 보인다. 불탄 제암리교회의 사진은 비상교육과 천재교육의 사진이 다르다. 그리고 지학사의 <종로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주위의 인물과 행진하는 여성들의 시선이 다른 점, 여성들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밝은 점 등으로 볼 때 3ㆍ1운동 당시의 사진인지 의문이 든다. 전거를 확인하여 정확한 사진을 실어야 할 것이다. 법문사 교과서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임시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1919.3)>이란 사진과 천재교육 교과서의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이란 사진은 동일한 사진이나 캡션은 다르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것은 1919년 4월이므로 법문사 교과서의 캡션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Cho, Kyu-tae This research paper is on the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used from 2011. Concretely, I studied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And I examined thoroughly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development, influence of 3ㆍ1 Movement. Finally I reviewed persons, photographs, diagrams, and supplementary explanations about 3ㆍ1 Movement. In these textbooks, Japanese political suppression and economical exploitation are narrated as fundamental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As external causes, Wilson’s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s and Lenin’s clarification for supporting the people of a small and weak power are described. In these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Lenin’s clarification for this point is especially emphasized. In the section of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tagonism to Japanese rule itself should be narrated as a fundamental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d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should not be described as a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Because a theory has insisted that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did after 3ㆍ1 Movement. It is reasonable that the way of describing to ignore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Buddhism, Christianity”, or “Son Byeong Hee, Han Yong Woon, Lee Seung Hoon” is changed to the way of describing to reflect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Christianity, Buddhism”, or “Son Byeong Hee, Lee Seung Hoon, Han Yong Woon”. In the section of development of 3ㆍ1 Movement, announcemen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monstration in Seoul and great cities, demonstration in rural cities, Japanese cruel repression, and 3ㆍ1 Movement in foreign countries is described. Most of these is appropriate. But a few of these are not reasonable. Explanations on the reason of armed crackdown are different each other. We have to endeavor to find reasonable explanation of this. Jihaksa textbook emphasize students’ role in 3ㆍ1 Movement, without mentioning religion leaders. But this is different from historical fact. Therefore Jihaksa textbook should be amended to the way to emphasize religion leaders’ role. And Samhwa Press textbook should be changed to the way to put stress on peasant than laborer. Besides, a few pictures should be replaced, because these are not appropriate. And inconsistency of Bopmoonsa textbooks’s caption with it’s picture should be amended righ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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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중국 광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변천

        조은경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1

        이 논문은 1930년대 중국 광저우 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검토시기는 와해된 한인 독 립운동세력이 광저우에서 재구축되는 1930년부터 광저우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는 1938년까지로 하였다. 이를 통 해 1930년대 광저우 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중국 남부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거점으 로서 광저우의 특징과 위상을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광저우는 1920년대 중반 한국혁명의 중심으로 부상하였으나 1920년대 말 한인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한동안 침체되 었다. 1930년 광저우에 온 한인은 광동성 정부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편의와 자금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이를 각지에 알리며 한인들에게 광저우에서 오라고 선전하였다. 광저우가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 한 것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였다. 기존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인 상하이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광동의 중국인사들과 교류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고자 광 저우를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저우 한인수가 증가하자 한국독립당 광동지부(韓國獨立黨 廣東支部)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청년투사의 양성’ 을 목적으로 중산대학과 광동군관학교 등에 한인 청년의 입학을 지원하며 광저우 한인사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와 중산대학 내부에서 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 중국 관내지역에서 정당통일 운동이 전개되자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간부는 통합정당에 반대하여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서 활동하였고, 청년 세력은 찬성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담하였다. 광저우에서 두 정당은 서로 경쟁하였으나 1936년 이후 한 국국민당의 세력이 우세해졌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광저우 한인 대다수가 난징으로 이동하여 중국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광저우에 남은 한인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193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광동 성 광저우와 불산(佛山)에 머물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함락하면서 한인들 이 광저우를 떠나고 중국 남부지역 한인독립운동 근거지로서 광저우는 1920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와해되었다. This study explores the formation and activities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Guangzhou(廣 州), China in the 1930s. The period ranges from 1930 when the collapsed groups were reformed in Guangzhou to 1938 when the area was taken by Japanese soldiers. This study is aimed at providing an overview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Guangzhou during the 1930s. Another aim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and status of Guangzhou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Southern China. During the mid-1920s, Guangzhou became the hub of Korean revolution. However, the area became stagnant for a while as Koreans left the area at the end of 1920s. In 1930, the Guangdong province(廣東省) government promised to suppor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ns who came to Guangzhou. Also, the government promoted it everywhere to attract Koreans to the area. In the 1930s, the first time Guangzhou garnered attention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as 1932, the year of Yun Bong-gil(尹奉吉)'s heroic deed. As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found it hard to stay in Shanghai,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y flocked to Guangzhou. Some of them were motivated by the funding for their activities, which was arranged through interactions with influential Chinese people in Guangdong. As more and more Koreans came to Guangzhou,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韓國獨立黨 廣 東支部) was formed. It supported young Korean people to enter Zhongshan University(中山大學) and Guangdong Military School(廣東軍官學校) ; the purpose was to ‘produce young warriors.'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 also led the Korean community in Guangzhou. However, serious conflicts among Koreans occurred in the organization and Zhongshan University. In the 1930s, there was political party unification movement in China. The leaders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 were against the united political party, joining the Korean National Party(韓國國民黨). As for young groups, they supported the united political party, joining the National Revolution Party(民族革命黨). The two parties competed in Guangzhou and the Korean National Party gained the upper hand after 1936. After the Sino-Japanese War broke out in 1937, most of Koreans in Guangzhou moved to Nanjing to enter China Military School's special training class. As a result, only a small number of Koreans remained in Guangzhou. From July to October 1938,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大韓民國臨時政府) stayed in Guangzhou and Foshan(佛山) to carry on their activities. However, Koreans left Guangzhou as Japanese soldiers captured the area in October 1938. It is the second collapse of Guangzhou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in Southern China after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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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조범성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 No.107

        본 연구는 1930년대 청구활동의 설립과 활동을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 (이하 식민사학)이 식민지 조선의 역사학계에 학문적으로 고착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먼저 1920년대에 추진되고 있던 『조선사』 편찬사업의 전개 과정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및 사학과의 설치, 그리고 동시기 활동하고 있던 식민사학 연구단체들의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청 구학회 설립 이전 시기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강점 이후 역 사 연구에 필수적인 학문 제도의 권력을 이미 선점·독점하고 있던 식민사 학이 왜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체계화된 학회를 갖추게 되었고, 비로소 장기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930년 청구학회의 설립 과정과 그 인적 구성, 운영 체계를 보 다 면밀히 분석했다. 청구학회는 1세대 일본인 식민사학 연구자인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감독과 지도하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조선 으로 건너온 젊은 2세대 엘리트 연구자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중심이 되어 설립·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극동문화 연구 및 보급”이라는 명분하에 1930년대 일제의 대륙 침략을 학술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음을 규명하였다. 아울 러 청구학회는 설립 당시 조선총독부 및 조선사편수회 관계자와 경성제 국대학 소속 교·강사와 출신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이전의 학회들보다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일 본의 역사학계에서는 청구학회의 설립과 취지를 환영하며 기대를 보내 왔다. 한편, 9년여 간에 걸친 청구학회의 활동 내용을 통해 식민사학이 식민 지 조선의 역사학계에 학문적으로 고착화되어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청구학회는 『청구학총』을 연 4회 계간으로 간행하고, 정기적으로 강연 회·강습회를 개최하며, 연구자료와 저술을 출판하고, 고적답사도 추진하 는 등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였다. 특히 『청구학총』은 기존의 식민사학 연구단체에서 간행했던 것보다 체재와 내용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모습 을 보였다. 그리고 1939년 10월 제3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선언할 때 까지 매년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1930년대 생산된 식민사학의 연구 성과 를 축적하고 학계와 일반에 보급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렇게 청구학회를 통해 연구·보급된 식민사학의 성과는 한국근대역사학에 뿌리 깊게 남아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학계에서 끊임없이 비판과 반성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Through the establishment and activities of the Cheong-gu Hakhoe(Cheong-gu Academic Society) in the 1930s, this study attempts to examine the process in which the history of colonialism (hereinafter referred to as colonial history) became academically entrenched in the history academia of the colonized Joseon. To begin with, the study reviews the development process of a compilation project called The History of Chosen that was promoted throughout the 1920s as well as the establishment of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and the foundation of its Department of History. Furthermore, this article seeks to examine the situatio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Cheong-gu Hakhoe by scrutinizing the trends among research groups of colonial history that were active in the 1920s. Through such attempts, this study aims to explain why it was not until the 1930s that colonial history, which had already preoccupied and monopolized the power of the academic system essential for history research, was not able to form a systematic academic society and eventually sustain in the long run. Additionally, the foundation of Cheong-gu Hakhoe in 1930, the organization’s personnel structure and operations system are thoroughly analyzed in this research. It can be concluded that under the supervision and guidance of Shogo Oda, a first-generation Japanese colonial history researcher, Cheong-gu Hakhoe was established and operated mainly by young second-generation elite researchers, namely Hidetaka Nakamura and Yasukazu Suematsu, who came to Joseon right after graduating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Moreover, this study found out that Cheong-gu Hakhoe, under the pretext of ‘research and dissemination of Far Eastern culture’, provided academic support to Imperial Japan’s invasion of the continent in the 1930s. As Cheong-gu Hakhoe is comprised of officials working for Governor-General of Chosen and Chosen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as well as teachers and professors from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it can be seen that Cheong-gu Hakhoe was founded with a more diverse pool of human resources compared to previous academic associations. At that time the history academia in Japan welcomed and had high expectations of the establishment as well as the purposes of Cheong-gu Hakhoe. Meanwhile, through the activities of Cheong-gu Hakhoe during nine years, this study recognizes that colonial history was becoming academically entrenched in the history academia of the colonized Joseon. Cheong-gu Hakhoe planned various activities such as the issuance of Cheonggu Hakchong four times a year, frequent operations of lectures, publication of research materials and books, and promotion of history research. In particular, in comparison to the materials published by preexisting research groups of colonial history, Cheonggu Hakchong was far more superior in terms of format and content. Published annually until October 1939 when the 30th issue was released as the last publication, Cheong-gu Hakchong played a part in accumulating and dispersing research results of colonial history in the 1930s to both the academia and general public. The achievements of colonial history that were studied and distributed through Cheong-gu Hakhoe have remained deeply rooted in the Korean modern history and become the subject of criticism and reflection within Korean history academia even after liber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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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홍의 3ㆍ1민족운동像과 신민족주의의 역사의식

        김인식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6

        3ㆍ1민족운동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만큼이나 질과 양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논급되는 식민지시기 최대의 항일민족항쟁이었다. 8ㆍ15해방 후 각 정치세력들도 넓게는 한국민족사 전체, 좁게는 자신들의 경험ㆍ실천 영역이었던 민족운동사를 역사비평하면서, 그들의 정치 이념과 노선을 정당화하는 준거로 3ㆍ1민족운동을 해석하였다. 모든 정치세력들에게 3ㆍ1민족운동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사 텍스트로서, 여기서 도출한 교훈은 그대로 현재 노선의 타당성과 지향점을 표현하였다. 8ㆍ15해방 직후 좌익ㆍ우익을 불문하고 모든 정치세력들이 3ㆍ1민족운동을 역사비평하면서, 이의 긍정정ㆍ부정성의 양면을 동시에 언급ㆍ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안재홍은 식민지시기나 8ㆍ15해방 후에도 일관되게 최상급의 언어를 동원하여 3ㆍ1민족운동을 극찬하였다. 그에게 ‘3ㆍ1정신의 진면목’은 일체의 분열이 개입하지 않았던 ‘전민족적 협동’이었다. 8ㆍ15해방 후 그가 제창한 신민족주의 사상의 핵심어는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였다. 안재홍은 3ㆍ1민족운동에서 ‘초계급적’의 원형과 실상을 확인하였다. 민족 내부의 모든 분열ㆍ대립을 극복하려는 정신에서 볼 때, 3ㆍ1민족운동은 지극한 모델이었으므로, 그는 3ㆍ1민족운동의 역사상을 신민족주의 국가건설의 ‘이상향’과 동일시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 근현대사의 민족지성들이 3ㆍ1민족운동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이를 어떻게 실천론으로 이어나갔는가를 해명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먼저 안재홍의 3ㆍ1민족운동像과 신민족주의 국가건설론의 상관성을 다루려는 작업의 연속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안재홍은 8ㆍ15해방 후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의 3ㆍ1민족운동像과 이에 근거를 둔 역사의식은, 그의 사상의 총체인 신민족주의ㆍ신민주주의 속에도 내재화ㆍ가시화하여 중요한 구성 부분을 이루었다. 안재홍의 3ㆍ1민족운동像은 오늘날 학계의 3ㆍ1민족운동사 연구에서 논쟁을 촉발하였던 내용과 상당한 부분 중첩된다. 그의 3ㆍ1민족운동상이 절대화되어 신민족주의 이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주관성을 갖지만, 당시대의 역사참여자가 3ㆍ1민족운동에 어떠한 인식을 보였는가 검토함은, 오늘날 학계의 논점에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도 있을 듯하다. The March 1st Movement was the largest anti-Japanese national uprising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as such it has been treated by historians as one of the most critical events in Korean history. After liberation from the Japanese occupation in August 1945, various political groups critiqued the history of nationalist movements, which constituted the nation’s history as well as their own experience and practice, and in the process they interpreted the March 1st Movement in efforts to justify their political ideology and line. To all political groups, the March 1st Movement was the most important historical text, and the lessons derived from it led them directly to their current political line’s validity and direction. Right after liberation, all political groups, regardless of being right or left, acknowledged and regretted both its positive and negative aspects through their historical criticism of the March 1st Movement. However, Ahn Jae Hong was consistent in extolling the March 1st Movement in high praises. To him, the ‘true character of the March 1st Movement’ was the ‘cooperation among all Korean people’ without any division amongst them. The keyword of the New Nationalism that he promoted after liberation was the ‘unified nation state transcending class divisions.’ Ahn identified in the March 1st Movement the form and actuality of transcending classes. Since the March 1st Movement was the utmost ideal for overcoming divisions and conflicts among Koreans, he equated the retrospective 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with the ‘utopia’ of nation building under the New Nationalism. In section 1 of this paper, we examined Ahn Jae Hong’s theory of the causes of the March 1st Movemen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after the August 1945 liberation, and discussed his theory regarding the effects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Section 2, we confirmed how he perceived and defined the principal agents, character, and meaning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Section 3, we explained the thesis that Ahn Jae Hong’s retrospective 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became established as an ideal of the New Nationalism. By doing so, we intended to confirm that his retrospective 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became the foundation for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f the New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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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전환기 서구 근대 식물학의 도입과 확산의 토대 구축

        윤정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2

        이 글은 한국근대식물학의 도입과 그 확산의 토대가 어떻게 구축되었 는지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한국에서 근대식물학은 1876년 개항을 전후 로 중국을 경유하여 한역서로 도입되었다. 이상설은 이 한역서를 참고로 하여 필사본 「식물학」을 남겼다. 1905년 이후 일본의 보호국체제가 됨으로써 황제권이 약화되자 애국 계몽운동가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시기에 몇 종의 근대식물학 교 과용 도서가 자연과학 교과용 도서와 함께 출간되었다. 대부분이 국한문 혼용체였으나 애니 베어드의 책은 순한글체였다. 애니 베어드가 편역 출 간한 책은 당대 최고의 미국 식물학자였던 아사 그레이의 책이었다. 아사 그레이는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학문적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러므로 애니 베어드가 출간한 책은 당대 최고의 식물학 교과서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교과서는 총독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애 니 베어드는 『식물도셜』을 『식물학』으로 재출간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 책 서론은 『식물도셜』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삭제되어 있고 대신에 한 일병합 이전 서북학회의 학회지 『서북학회월보』에 유해영이 쓴 「식물학」 글과 유사하다. 애니 베어드의 책을 통해 1905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 던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이 숭실대학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숭실대학에서 식물학 강의는 현장실습과 함께 이루어졌다. 1920년대 후반 기독교인들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전문학교에서는 농과가 설치되었다. 이과 에서 가르치던 자연과학은 농과에서 담당하였다. 농과는 우수한 교수진 과 실습장을 완비하였다. 이러한 교육 환경은 식물학자 양성을 위한 토대 가 되었다. 농과 4회를 졸업하고 일본 도호쿠제국대학 생물학과에 진학 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준민은 식물생태학의 한국 최고의 권위자 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고등식물의 식물분류에만 그쳤던 식물학 연구를 그는 식물형태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교 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고, 1957년 한국식물학회를 설 립해서 한국 근대식물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This examines the introduction of Korean modern botanical science and how the foundation of its spread was established. In Korea, modern botanical science was introduced into Korea by way of China before and after 1876, when it was open to Korean trade. Lee Sang-Seol made a manuscript, Botanyology, concerning the Korean version. Since 1905, Japan's protectionist state has weakened the Emperor's right, and then, the activities of patriotic enlightenment activists became active. At this time, several modern botanical textbooks were published along with natural science textbooks. Most of them were mixed Korean, but Annie Baird's books were all written in ‘pure’ Korean. Annie Baird's book was translated by Asa Gray, the greatest American botanist of his day. Asa Gray was Darwin's academic colleague and friend who advocated evolution. Therefore, Annie Baird's book was the best botanical textbook of his time. The textbooks were controlled by the Governor-General due to the forced merging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1910. However, Annie Baird re-published Gray's Botany for young people and common schools as Botany was accredited. Instead of eliminating the biblical verses quoted from Gray's Botany for young people and common schools, the introduction to this book is similar to the article "Botany," written by Yoo Hae-Young, in the Journal of the Northwest Society before the merger of Korea and Japan. In Annie Baird's book, the awareness of the natural sciences of patriotic enlightenment activists since 1905 has been continuously conveyed to Soongsil University students. At that time, the Botany Lecture at Soongsil University was accompanied by hands-on practice. In the late 1920s, Christians established rural enlightenment as part of the national movement, and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was established at Soongsil College. The natural sciences taught in the department of Natural Science were in charge of agriculture.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was equipped with excellent faculty and training rooms. This educational environment was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botanists. Kim Joon-Min, Ph.D., graduated four times in agriculture and entered the Department of Biology, Tohoku Imperial University, Japan, became Korea's premier authority on plant ecology. He developed botanical research into plant morphology, which was only a plant classification of higher pla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fter liberation, he worked as a professor of biolog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where he trained numerous after school students and founded the Korean Botanical Society in 1957 an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modern botanical science in Korea.

      • KCI등재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ㆍ학생운동

        임송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5

        The self-burning of Chun Tae-il on 13th of November in 1970 was the monumental event in the social movement history of South Korea. His self-burning brought out the people’s rights including the workers’ right to live in sharp relief in the front of the society which was indifferent to the labor problems. It played an important role to change the character of social movement in the 1970s. Chun Tae-il went through a lot of changes in his thought since he came to know the Labor Standards Law; He was conscious of the worker’s right to be treated as a human being, not a machine. His struggle way didn’t get out of idealism and petition at that times. However, he developed and sublimated his thought into the love toward all the workers who had been treated like machinery, they were human beings though. His struggle way was turned into more positive method from the way to get the rights through petitioning by October, 1970. He began to fight against not only employers but also labor authorities. His desperate struggle kindled up at that point. He finally chose the self-burning, the extreme way of struggle to resist horrible working conditions on 13, November. Federation of Korean Trade Unions(FKTU) couldn’t be free from the responsibility of Chun’s self-burning. Although FKTU censure companies’ on their antihuman labor management by issuing a statement, it didn’t develop positive struggle. Meanwhile, FKTU played a catalytic role to organize Chung-ghye textile worker’s union. The member’s of Samdonghoe came to realize that a trade union was necessary to succeed Chun Tae-il's spirit through union officials who despatched from FKTU. Chung-ghye textile worker’s union which was organized after Chun Tae-il’s self burning had diverse features as one of very few democratic trade unions in the 1970s. It showed its limit to be in leading struggle without popularity in the early times of union organization. There was also conflict between a person who was sent FKTU and the executive branch because the person whom FKTU dispatched was scouted as the branch manager. Some struggles which were developed to the exclusion of the executive branch from November of 1975 up to March of 1976. There was conflict between the executive branch and junior members of the union. Chung-ghye textile worker’s union had more contrasting features than other democratic trade union viewed from the fact that it was not influenced by Urban Industrial Mission or JOC, but involved to some activists came from student movement. Also Chung-ghye textile worker’s union was so positive to support and encourage other working place’s struggle from the late 1970s. The self-burning of Chun Tae-il made a watershed of student movement history in 1970s. The student movement activists developed the movement for improving working conditions. They began to be sure the workers and people as the main group to be able to change the history. The student movement took their course toward laying weight on the solidarity with workers in the later 1971. Activists from the student movement after the incident of the National League of Democratic Youth and Students joined the hardship of workers to participate in the labor movement in the working field. Some of them approached labor problem with working at the night classes. The student movement activists organized the struggles with making direct or indirect solidarity with democratic trade union's fight to improve working condition and win the right to live.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은 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무관심했던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를 비롯한 민중의 제반 권리를 사회 전면에 부각시켰으며, 197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노동자도 기계취급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투쟁방식은 진정주의와 이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인간으로서 기계취급을 받는 모든 노동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승화되었다. 1970년 10월에 이르러 진정을 통해 권리를 획득하고자 했던 방식에서 적극적 투쟁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투쟁의 대상도 업주만이 아니라 노동당국에도 돌리기 시작하였다. 필사적인 투쟁주의가 이때부터 발화하게 되고, 결국에는 11월 13일 참담한 노동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극단적인 형태인 분신을 선택하였다. 한국노총은 분신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업체의 비인도적인 노동관리를 규탄하였지만 적극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한편, 한국노총은 청계피복노조 결성에 첫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노총이 파견한 간부를 통해서 삼동회원들은 전태일의 뜻을 잇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태일 분신 이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몇 안되는 민주노조의 하나로서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다. 노조결성 초기의 투쟁에서 대중성이 담보되지 않은 선도적인 투쟁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였으며, 한국노총에서 파견한 인물을 지부장으로 영입함으로써 한국노총 파견 인물과 집행부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1975년 11월부터 1976년 3월까지의 투쟁은 집행부가 배제된 상태로 전개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집행부와 중견 조합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청계피복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여타 민주노조와 대비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70년대 후반기부터 타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하거나 격려하는 연대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1970년대 학생운동사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분신 사건 후 학생운동세력은 근로조건개선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와 민중을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학생운동은 1971년 후반기에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1971년 9월의 전국학생연맹의 주장이나 선언문에 등장하는 민족·민주·민중이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민주·민중이념은 1974년 민청학련에 의해 삼민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거나 야학활동을 하면서 노동문제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학생운동은 민주노조들의 근로조건 개선 및 생존권 투쟁에 직접 간접으로 연대하여 투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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