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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지역 유찬희의 민족운동

          박영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3

          유찬희는 1900년에서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추진했던 민족운동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그는 1883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오경을 배웠고 17살이 되는 해에는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사상을 접한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신사상을 수용한 유찬희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고 초창기에는 의병활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의병투쟁은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유찬희는 서북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유찬희는 서북학회를 통해 이동휘를 비롯한 기독교민족지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유찬희는 그의 민족운동 기저를 형성하는 기독교민족주의를 수용할 수 있었고 강원도 이천군 교회운영에서 나아가 가솔들을 이끌고 북간도 국자가로 이주한다. 1918년부터 유찬희는 대표적인 북간도 한인지도자로 부상한다. 특히 그는 무악흥업회사를 경영하며 실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유찬희는 안정적인 자금력을 통해 파리강화회담 대표파견 기부금 모연, 민족학교 설립 자금 보관 등에서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로써 유찬희는 한인사회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여러 민족단체의 재무부문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상무총회 활동 이후 유찬희는 북간도지역 민족운동단체 대한국민회에서 총기구입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어 참모장으로 영전된 그는 총기뿐 아니라 군량, 부대이동 등 구춘선, 홍범도, 안무 등과 함께 독립군의 제반 업무를 살핀다. 봉오동전투 이후 유찬희는 액목현에 은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의 동향을 대한국민회에 보고하고 김일을 비롯한 의기청년들과 교류하며 일본군의 움직임을 내사한다. 하지만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국민회가 추진하던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유찬희는 공산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오히려 그는 고려공산당 참사로 활동하지만 기존의 목회활동에 더 치중했고 남감리교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찬희의 고려공산당 가입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무장투쟁이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실천적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찬희는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ㆍ1운동 제7주기기념행사를 추진하여 1,500여 명의 재러한인들에게 항일사상을 일깨운다. 의병투쟁, 애국계몽활동, 기독교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활동, 대한국민회를 통한 무장투쟁, 고려공산당 활동, 동성노농공사에서의 농민운동까지 유찬희는 시기와 상황에 맞춰 독립운동의 방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자신의 실업가적인 특질을 토대로 총무, 재무 등 민족운동단체의 실질적인 직위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유찬희의 민족운동과 향배를 연구하는 것은 구한말에서부터 1920년대까지 국내와 북간도, 러시아일대에서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추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인 동시에 실업가적 특질을 갖는 민족운동가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Yoo Chan-hee is a nationalist activist born in Geumcheon, Hwanghae Province in 1883. His ideological foundation was rooted in neo- Confucianism education of his childhood school seodang and modern education received in Seoul’s PaichaiHakdang. In particular, Yoo Chan-hee embraced Christianity at the Paichai Hakdang, which served as bedrock of his national movement. In 1907, Yoo Chan-hee left the Paichai Hakdang to join independent patriot Cha Dosun’s righteous army. Yoo physically fought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in Goksan by carrying out arson attacks with his cousin Yoo Myung-hee. Subsequently, Yoo Chan-hee joined the North-West Society to engag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Yoo Chan-hee settled in Yanji, China and established the Taekwang School, which means light of the national Korean flag Taegeukgi. As a principal, he supervised school operations and sought to raise awareness of national consciousness by educating the Koreans living in Yanji.  In addition to educational movement, Yoo Chan-hee actively promoted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autonomy group Ganminhoe in the North Gando region, establishing under alias Doseong. As the leading Korean social organization in North Gando, Ganminhoe conducted census research and established private schoolfor education. Yoo Chan-hee served as the secretary of the Ganminhoe and orchestrated major operations, influencing both the Chinese and Korean societies. He formed a large-scale mutual financing association by rallying enlightenment activist Jeong Jae-myung and other key figures of Ganminhoe. The financing association was operated by issuing lottery tickets, and its profits were used to operate national education schools. In addition, Yoo Chan-hee expanded informal youth gathering to conduct practical operations of Ganminhoe. In 1916, Yoo Chan-hee achieved great economic success through the Muhak Industries. As Yoo Chan-hee became one of the prominent store owners in Yanji, he assumed substantive national movements through considerable capital. In 1919, the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March 1st SamIl movement, took place in Longjing Village, Machuria. Yoo Chan-hee made speeches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alongside Christian national leaders in the North Gando region, such as Choi Il, Kim Young-hak. Yoo’s son Yoo Ki-seok joined the Chungreoldan to print national flag Taegeuki and flyers for independent protests. After the March 13th independence movement, Yoo Chan-hee moved to Vladivostok and subsequently joined the Korean General Assembly Sangmuchonghoe an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Daehankukminhoe. In particular at the General Assembly, he served as the vice-chairman, which indicates that the Korean-Russian community recognized Yoo’s financial competency. Upon returning to Gando, Yoo Chan-hee joine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and became a committee member in charge of purchasing firearm. The Korean National Council represented the North Gando province and was a national movement group that supported independence war. As Yoo was a firearms purchasing committee member, he was responsible for arming the troop that was under the auspice of the Council.  Furthermore, Yoo Chan-hee assumed the chief of staff role, serving alongside Hong Beom-do, ChoiJin-dong to lead the army and victory of Bong-o-dong. After the battles of Bong-o-dong and the invasion of Cheongsan-ri, Japanese imperialists sent large-scale troops to Gando to retaliate. Yoo Chan-hee, who became the head of financial affairs of the National Council, received An Jung-geun who was dispatched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thereby serving as a communication link between the Council and the government. Additionally, Yoo contacted Meng Boo-duk who was attacking the independent army to allow for a month of troop movement, minimizing the damage to the army. In December 1921, the leaders of the Korean National Council, such as Yoo Chan-hee and Kim Ju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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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9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이 글은 2011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에 대한 서술의 체계와 내용을 검토하여 분석한 글이다. 구체적으로는 3ㆍ1운동의 배경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의 전개와 의의ㆍ영향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 관련 인물ㆍ사진ㆍ도표ㆍ보론의 내용을 검토한 후, 각각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2010 부분개정)>에 따라서 제작된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3ㆍ1운동 관련 부분을 제Ⅵ 대단원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에서 다루고 있다. 이 대단원 아래 중단원의 제목은 대체로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고 하고 있다. 소단원의 제목은 교과서별로 상이하나, 대체로 3ㆍ1운동의 배경, 3ㆍ1운동의 전개, 3ㆍ1운동의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3ㆍ1운동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먼저 일제의 무단 통치, 즉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들고 있다. 그리고 1910년대 국내의 비밀결사활동과 교육ㆍ문화 운동,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과 이를 통한 교육ㆍ문화 운동을 또 다른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제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지원 천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주목하고 있다.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지학사 교과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천명 사실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보다 강조하는 것 같다. 레닌의 식민지의 민족해방 지원 선언을 주요한 국제적 배경으로 거론하지 않은 고등학교 한국사는 천재교육 교과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으로 인한 영향으로는 3ㆍ1운동 직전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 파견, 일본 유학생의 2ㆍ8독립선언, 만주 길림성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선우혁의 이승훈과의 접촉, 여운형의 연해주 러시아한족대회 참석과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참석 소식 전파 등,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움직임을 3ㆍ1운동 발생의 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3ㆍ1운동의 또 다른 근본적 배경은 ‘문화 민족으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레닌의 약소민족 해방 지원 천명’을 3ㆍ1운동 발생의 국제적 배경으로 들고 있으나, 민족대표 33인의 심문조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므로, 조금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천재교육의 네 출판사의 교과서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가 3ㆍ1운동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였으나,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시기를 3ㆍ1운동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이것을 3ㆍ1운동의 배경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다. 3ㆍ1운동의 원인과 배경의 서술에 있어, 역할과 비중 등을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지 않은 곳이 약간 보인다. 예컨대 법문사의 교과서에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에는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민족 대표”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3ㆍ1운동 시의 역할과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의 순으로 배열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 단원의 전개 부분에서는 독립선언서의 발표, 서울 및 주요 도시 시위, 농촌으로의 시위 확산, 비폭력시위에서 무력시위로의 변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국외로의 시위 확산 등의 사항이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독립선언식의 추진 주체와 민족 대표의 역할 등에 있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은 거론하지 않고,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만을 서술하였다. 또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천재교육의 교과서는 일제가 시위 초기부터 발포 명령을 내려 무자비한 탄압을 한 것으로, 지학사ㆍ법문사ㆍ삼화출판사ㆍ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는 시위가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자 일제가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 것으로, 비상교육의 교과서는 농민 등의 비폭력 시위에 일제가 헌병 경찰, 군대 등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주장이 다르므로, 선후관계를 다시 파악하여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3ㆍ1운동을 전개한 계층을 서술할 경우에 삼화출판사의 교과서는 “처음에는 학생과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점차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고”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참여자 수를 볼 때 ‘농민과 노동자들’로 순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3ㆍ1운동에 관련된 인명의 거론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교과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유관순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ㆍ1운동의 주역은 소개하지 않고, 김규식과 2ㆍ8독립선언 참가자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다. 화보와 캡션 설명에 있어서도 오류가 간혹 보인다. 불탄 제암리교회의 사진은 비상교육과 천재교육의 사진이 다르다. 그리고 지학사의 <종로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주위의 인물과 행진하는 여성들의 시선이 다른 점, 여성들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밝은 점 등으로 볼 때 3ㆍ1운동 당시의 사진인지 의문이 든다. 전거를 확인하여 정확한 사진을 실어야 할 것이다. 법문사 교과서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임시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1919.3)>이란 사진과 천재교육 교과서의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이란 사진은 동일한 사진이나 캡션은 다르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것은 1919년 4월이므로 법문사 교과서의 캡션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Cho, Kyu-tae This research paper is on the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used from 2011. Concretely, I studied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And I examined thoroughly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development, influence of 3ㆍ1 Movement. Finally I reviewed persons, photographs, diagrams, and supplementary explanations about 3ㆍ1 Movement. In these textbooks, Japanese political suppression and economical exploitation are narrated as fundamental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As external causes, Wilson’s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s and Lenin’s clarification for supporting the people of a small and weak power are described. In these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Lenin’s clarification for this point is especially emphasized. In the section of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tagonism to Japanese rule itself should be narrated as a fundamental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d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should not be described as a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Because a theory has insisted that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did after 3ㆍ1 Movement. It is reasonable that the way of describing to ignore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Buddhism, Christianity”, or “Son Byeong Hee, Han Yong Woon, Lee Seung Hoon” is changed to the way of describing to reflect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Christianity, Buddhism”, or “Son Byeong Hee, Lee Seung Hoon, Han Yong Woon”. In the section of development of 3ㆍ1 Movement, announcemen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monstration in Seoul and great cities, demonstration in rural cities, Japanese cruel repression, and 3ㆍ1 Movement in foreign countries is described. Most of these is appropriate. But a few of these are not reasonable. Explanations on the reason of armed crackdown are different each other. We have to endeavor to find reasonable explanation of this. Jihaksa textbook emphasize students’ role in 3ㆍ1 Movement, without mentioning religion leaders. But this is different from historical fact. Therefore Jihaksa textbook should be amended to the way to emphasize religion leaders’ role. And Samhwa Press textbook should be changed to the way to put stress on peasant than laborer. Besides, a few pictures should be replaced, because these are not appropriate. And inconsistency of Bopmoonsa textbooks’s caption with it’s picture should be amended righ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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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정기 국정 공민교과서의 성격과 집필진의 구성

          김동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4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식 민주교육제도’를 남한에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 의도는 남한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bulwark)으로 만들고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시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장기적인 정치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교육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하여 朝鮮敎育審議會(위원 100여명)를 설치하였다. 본 위원회에서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한국교육의 기본이념으로 교육법에 명시하였다. 이 이념은 교육현장에서 일제 잔재의 청산, 평화와 질서 유지, 새나라 민주시민 육성으로 구체화되어 교과편제 및 시간배당과 교수요목에 나타났다. 이러한 미군정의 교육정책의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과목이 바로 사회생활과이며, 그중에서도 公民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은 공민교과서에서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반공주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의도와 달리, 공민교과서의 내용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영국식 의원내각제 옹호, 무조건적인 자본주의 배격,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국정공민교과서 편찬에 깊은 영향을 끼친 편수관과 편찬위원들 때문이었다. 공민교과서 편수책임자인 최재희는 최현배에 의해 추천되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랑도 및 민족을 우선시하고, 당시 풍미하던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정공민교과서의 편찬위원들은 미군정 학무국장 고문이었던 김성수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보성전문의 교직원이었다. 또한 정열모, 현상윤, 장덕수는 모두 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하여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찬위원이 된 것은 김성수와의 인연이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군정은 조선어학회에 국어교과서와 공민교과서의 편찬을 의뢰하였다. 심지어 당시 편수국장도 조선어학회의 주요인물인 최현배였다. 편찬위원들도 대체로 조선어학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대종교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안호상과 정열모, 백낙준 같은 편찬위원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인보다도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공민교과서는 미군정의 의도대로 편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이 교과서 출판과 편찬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교육 이념에 적합한 교과서 제도는 원칙적으로 자유발행제였다. 게다가 유능한 교과서 저술 인력은 트럭운전사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미군정에서 일하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정은 필요한 만큼의 직원을 확보할 수 없었고, 교과서 편찬과 배부도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이런 현실적인 원인들도 미군정이 교과서 편찬기준을 엄격하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기 공민교과서는 편수관과 편찬위원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공민교과서를 통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정치를 소개하였다. 아울러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의 행복과 복리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공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The educational polic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short, to carry out an “American-style democratic education system” in South Korea. The purpose of this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o make South Korea a bulwark against communism, and to lay the foundation for incorporating South Korea into the capitalist world market. The United States recognized that Koreans needed long-term political education. In this regard, the U.S. Military Government established the Korean Education Council (approximately 100 members) to prepare a blueprint for Korean education. In this committee, the philosophy of ' Hongik-Ingan’' was specified in the Education Act as the basic philosophy for ​​Korean education. This philosophy was reflected in the curriculum composition, the time allocation and syllabus, pursuing the settlement of the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maintenance of peace and order, and the cultivation of democratic citizens. One of the subjects that can best reveal the purpose of this education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he social sciences subject, particularly the civic education. The U.S. Military Government tried to emphasize “American democracy,” capitalism and anti-communism in the civic textbooks, without cultivating nationalism. However, unlike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content of the civic textbooks emphasized the support of the British parliamentary system, unconditional rejection of capitalism, and statism- based nationalism under the philosophy of Hongik-Ingan. This was due to the compilation editor and Compilation Board members who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compilation of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Jae-Hee Choi, the head on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civic textbooks, was recommended by Hyun-Bae Choi. Jae-Hee Choi emphasized liberalism and criticized communism, sharing common political views wi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However, Choi saw differently from the U.S. Military Government with regards to the concept of Hwangryangdo, which prioritized the people first, and his opposition to the pragmatic educational philosophy of Dewey.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had much to do with Sung-Soo Kim, who was the academics adviser to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y were staff members of Bosung College. In addition, Yeol-Mo Jeong, Sang-Yoon Hyun, and Duk-Su Jang had all studied at Waseda University. Therefore, it seems that their relationship with Sung-Soo Kim helped them to be on the Compilation Board. On the other h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mmissioned the compilation of Korean textbooks and civic textbooks to Joseoneohakhoe (The Korean Language Society). Even at that time, the head of Chief Compilation Editor was Hyun-Bae Choi, a major figure in Joseoneohakhoe. The Compilation Board was also deeply involved with Joseoneohakhoe. Joseoneohakhoe was associated with Daejonggyo, which had a strong nationalistic color. Therefore, the Compilation Board including Ho-Sang Ahn, Yeol-Mo Jeong, and Nak-Jun Baek emphasized the excellence of Korea and ethnic-centered education. In addition, the state and national security was given priority over the individual. As such, the civic textbooks were not compiled according to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Nonetheless, publishing was made possible because the U.S. military took a flexible attitude toward textbook publication and compilation. The textbook system suitable for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principle, a self-regulated publication system. Moreover, competent textbook writers were not willing to work in the U.S. Military Government, who received less wages than truck drivers. As a result,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unable to secure the necessary staff, and textbook compilation and distribution was seriously delayed. These also made it impossible for the U.S. military to strictly set textbook compilation standards.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civic textbook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period had to be influenced by compilation editors, the Compilation Board, and Joseoneohakhoe. They introduced democratic politics based on the parliamentary system through the civic textbooks. In addition, they emphasized statism and nationalism, and sought to cultivate “public citizens” for state and nation rather than individual happiness and 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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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현황과 개선방향

          오영섭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5

          현재 한국 사회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교용 『한국사』교과서들이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현행의 『한국사』교과서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육성한다고 하는 국사교육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미흡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연구는 현행 6종의 『한국사』교과서의 일제시기 독립운동사 서술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의 한국독립운동사 서술경향은 대략 네 가지로 정리된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1)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을 중시하고, 2) 민족유일당운동(민족통일전선)과 한중연대활동(한중연합전선)을 주목하고, 3) 다소간 반미친소적인 시각으로 국제적 사건이나 인물을 인식하고, 4) 약소국이 중시해야 하는 외교독립운동을 경시하는 서술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무장독립전쟁이나 민족통합(+국공합작)노선에 대한 서술분량과 외교독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에 편차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온건론보다는 급진론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온건론에 속하는 실력양성운동이나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이 충분치 못한 반면, 그 대척관계에 있는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실정과 국제정세에 비추어 전자나 후자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동등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분량과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을 균등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온건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승만의 활동을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친미적 국제관에 기초한 기독교민족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려 하고, 좌우합작과 민공협동을 배격하는 반공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고,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의열투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을 지지한 이승만의 활동을 다루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보다 역사적 중요도가 낮은 인물에 대한 독사진이 들어간 반면, 이승만 사진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에서조차 이승만 사진이 빠진 것으로도 증명된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에서도 균형점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은 사실 서술과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사』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에는 자잘한 사실에 대한 오류는 물론, 부정확ㆍ불충분한 해석이 이따금 보인다. 이는 집필자들이 특정 시대의 특정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전문학자들로서 일제시기사 전공자가 아니라는 문제점, 그리고 검인정을 받기 위해 출판사가 제출한 교과서를 검토하는 연구위원과 검정위원들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제대로 검토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문제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 『한국사』교과서의 개정판을 낼 때에는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고 해석하는 한편, 서술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사실이나 해석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국사 교과서는 겉으로는 교육부의 집필지침에 따라 집필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 부분 집필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집필되고 있다. 교육부는 국사 교과서의 각 장의 명칭과 각 절에 들어갈 중요 내용이 담긴 집필지침을 반드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준수한 교과서만을 교육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사 교과서의 집필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각 절의 체제 구성과 그 내용 및 분량 안배가 전적으로 집필자들의 자유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집필자의 노력 여하게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교육부의 집필지침을 넘어서는 재량과 노력을 발휘하여 국사 교과서의 참신성과 독창성 및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on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n six types.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show that their historical perception is nationalistic and popular, it belittles on the system of liberal democracy and the market economy and it has a perception against USA and for Soviet Union in international issues. Therefore, it needs to value liberal democracy of ROK in writing Korean History. In describing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t is easy to find a number of errors in quoting and interpreting truthful facts. I think that it is because the history writers research only on the particular subject. Further, it might be because the scholars who examine the contents of textbook are not professional in the part of Japanese occupation history. Thus, they need to be more cautious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 sense of contents and system of Korean History textbooks, it is problematic these are so similar. After the Ministry of Education usually gives important points, only the textbooks which fit on the standard could be allowed to use. However, I think it depends on the writers in writing contents of detail. Therefore, the writers can change contents of history textbook according to their opinion. Korean History textbooks focus more on radical ideas rather than moderate ideas. While Korean History textbooks belittle upon training capability movement or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the textbooks considerate more on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Particularly, if it is composedly examined about the Korean situation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t is possible that both the former and the latter are equal for historical value. Korean History textbooks disregard and devaluate Syngman Rhee’s activities who is the most representative moderate among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s. The textbooks don’t deal with the Syngman Rhee’s activities which attached importance to Christianity nationalism and anticommunism and developed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 of America. Thus, it needs to reduce the part of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and extend the part of moderate’s activities like Syngman Rhee and Ahn Chang-ho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ddition, it is to correct the point that there is no picture of Syngman Rhee among a number of historical figures in Korean History text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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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독 적십자병원의 활동 성과와 기억

          조성훈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5

          본고에서는 6.25전쟁 중 서독 적십자병원의 공적이 전쟁 당시 미군을 비롯해 한국과 독일에서 부각되지 못한 배경을 살펴보고 그 공적을 기억하기 위한 방안을 보충하려 했다. 1959년 3월 14일 서독 적십자병원 폐쇄식에 독일 대사, 한국 측 인사가 참석했고, 미 8군사령관을 대신한 존 피딕스 부산기지 미군사령관이 25만 명의 환자를 치료한 업적은 결코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고 찬양했다. 독일 적십자사에서는 폐원 직후인 1959년 4월 병원 활동을 사진과 함께 정리해 독일적십자한국병원(Deutsches Rotes Kreuz: DAS DRK‧Korea‧Hospital)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의 회고도 포함되어 있었고, 1984년에는 한독관계 100년사를 기념하는 독일과 한국 100년 관계: 우정의 성과(100 Jahre deutsch-koreanische Beziehungen Bilianz Einer Freundschaft)에서 아데나워 수상이 미국을 방문할 때, 연방공화국 국민의 이름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야전병원의 설립할 것을 약속했다는 점을 재확인했고, 당시 병원장과 외과 수석의사 회고를 수록했다. 트리그브 리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각국의 한국 원조에 관해 유엔경제이사회에 보고하면서, 유엔 직접 원조와 한국재건계획 외에 의료지원은 군사원조 범주로 분류할 만큼 그 비중을 크게 평가했다. 하지만 유엔 홈페이지에서도 한국전 유엔종군기장(UN Medals: Korea)과 관련해서 파병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을 통합해서 알파벳순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 독일의 의료지원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서독 적십자병원이 1997년 10월 유엔의 날에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의사와 환자가 개인적으로 기념비를 세울 때까지 잊혀진 존재였다. 서독 의료진들은 유엔종군기장(UN Korean Service Medal)과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종군기장을 받지 못했다. 유엔종군기장 수여 대상 기간은 1950년 6월 27일부터 1954년 7월 27일이고, 공식 시찰 혹은 출장자(official visitors)는 합산해서 30일간 지원한 경우에 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관련국 정부의 요청으로 기간이 연장된 경우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1955년 1월로, 스웨덴과 타이는 1955년 7월 21일까지 연장되었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연금 관련 한국전 전투기간 산정 시 1955년 1월 말과 1956년 4월까지로 적용한 예를 보더라도 6‧25전쟁 시기 유엔군 지원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특히 분쟁 기간 중이나 분쟁 후 회복과 재건 혹은 개발 과정에서 유엔활동 및 관련된 국제사회의 지원활동은 ‘평화구축 활동’으로서 정의되고 있음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독 적십자병원 의료진은 한국에서 유엔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해당 정부에 의해 지정된 파견단으로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직접적으로 지원한다(as having directly supported military operation in Korea)”라고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규정 3조 B항) 독일 정부는 적십자병원의 존재에 대해 유엔군사령부를 대표하는 미국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북한과 중공군 당국에 통보되기를 원했고, 이에 따라 함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은 1954년 3월과 5월 북한과 중국에 통보했다. 미국에서도 그 의미를 미 국가안보회의에서는 이해 3월 하순 제출한 보고서에서 “동맹군 병력(Allied forces) 중 유일하게 증강된 것은 서독에서 온 의료부대(hospital unit)뿐”이라고 평가했다. 임무에 대해서도 독일 정부는 의료단 지원이 전후 구호 사업이 아니라, 유엔군 지원을 목표로 했다. 결론적으로 서독 적십자병원도 의료지원 5개국처럼 봉사정신으로 전재민을 치료한 업적에 대해 대등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한국 정부에서 독일을 의료지원국으로 지정했지만, 후속조치를 통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유엔 홈페이지나 미국 주요 사이트에 6‧25전쟁 의료지원국은 아직 5개국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tried to remember the achievements of Busan West German Red Cross Hospital, examining the background that did not stand out its role in Korea and Germany, including the UNC. On March 14, 1959, German Ambassador and Korean officials attended the closing ceremony of the Hospital, and the U.S. military commander, Busan Base, who replaced the US 8th Army Commander George H. Decker, praised its achievements that it was never overestimated. The German Red Cross published Deutsches Rotes Kreuz” in April 1959, just after closing. This included retrospections of Korean doctors and nurses. In 1984, the 100 Years of Germany-Korea Relations: Achievements of Friendship described Chancellor Konrad Adenauer reaffirmed that he had promised U.S.A’s president to establish a field hospital and included recollections of the hospital chief and chief surgeon. Trygve H. Lie, the Secretary-General of UN, reported to the UN Economic Council on aids to Korea from each country, and evaluated the proportion of medical aid to be classified as military aid. However, the UN didn’t mention Germany medical assistance. In Korea, too the Red Cross Hospital was forgotten until the doctors and patients who worked at the hospital individually erected a monument on UN Day in October 1997. West German medical staff did not receive the UN Korean Service Medal and the Korean War Veteran badge. The period for awarding the UN Veteran Badge is from June 27, 1950 to July 27, 1954. However, there were cases where the period was extended at the request of the relevant country. The Netherlands extended to January 1955, and Sweden and Thailand extended to July 21, 1955. In the United States and Australia, when calculating the duration of the Korean War battles related to pensions, it could be evaluated as UN military support activities during the Korean War. In recent years, it can also be used that UN activities and related international support activities are defined as “peace-building activities”, especially in the process of recovery, reconstruction or development during or after conflict. The German government wanted the United Nations to notify the North Korean and Chinese authorities of the existence of the Red Cross Hospital, and Dag Hammarskjold, UN Secretary-General notified North Korea and China in March and May 1954.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USA understanded the meaning, and submitted a report in late March, "the only augmentation of the Allied forces was the hospital unit from West Germany." Regarding the mission, the German government aimed to support the UN forces, not the post-war relief project. In conclusion, it is possible for the West German Red Cross Hospital to equally evaluate the achievements like the five medical aid countries to Korea. Although the Korean government designated Germany as the country of medical support, continue to follow-up measures not only in Korean school history textbooks, but also on the website of the United Nations or major US sites where is still being introduced as five countries internation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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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치(일)투쟁의 전개와 그 의미

          신운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6

          국치투쟁의 전개와 그 의미 신운용 필자는 이 글에서 병합이라는 용어의 출현배경과 그 의미, 미주, 러시아ㆍ중국, 국내로 나누어 국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점, 국치(일)투쟁의 전개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국치라는 용어가 항일투쟁과 대한민국 건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음도 아울러 살펴보았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 침략으로부터 시작하여 1910년까지 한국 침탈을 위해 약 34년간 끊임없이 한국침탈을 시도하였다. 1894~1895년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한국침탈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과 ‘일한병합조약’을 조작하여 한국을 강탈하였다. 병합이라는 용어도 침략과정에서 국제사회의 이목을 피하면서 침략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임은 구라치의 「조선병합의 경위」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민족운동가들은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로 국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국치(일)’이라는 용어가 1913년에 들어와서 광범위하게 국내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1910년 8월 22일(29일) 일제의 한국침탈’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일정하게 논의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합’은 역사용어로써 비역사적 용어이며 정통성이 없는 것이다. 반면 ‘국치(일)’라는 용어가 항일투쟁 과정에서 생성된 역사용어로써 역사적 정통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이처럼 일제가 한국침탈을 호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가 ‘병합’이라는 점, 민족운동가들이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국치물망國恥勿忘’이었다는 사실을 보건대, ‘병합’이라는 글자 앞에 ‘강제’를 붙인다고 하여 ‘병합’의 본질적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강제병합’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펴져 나가고 있는 가운데 심지어 2010년 국치 100년에 세워진 남산 통감부 자리의 표지석에도 ‘강제병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민족운동가들은 국치일에 단식과 금연을 하면서 일제에 침략을 당한 원인을 분석하고 항일투쟁의 의지를 굳건히 하는 등 ‘국치’의미를 되새겼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치’는 항일투쟁의 사상적 에너지가 되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항일전쟁기 동안 매년 국치일이 되면 국내외, 좌우를 막론하고 온 겨레가 힘을 합쳐 불법적인 일제의 군사침탈을 해소하기 위해 단식ㆍ단연ㆍ연설ㆍ격문ㆍ교육ㆍ연극 등의 국치투쟁에 목숨을 걸고서 매진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격문과 연설, 언론 투쟁과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이 국외 국치투쟁의 주된 내용인데 반하여 국내의 국치투쟁은 주로 격문과 단식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민족운동가들은 “주권(국권)을 일제에게 넘겨준 적이 없는데도 일제가 국제법을 위반하고서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하였다”고 인식하여 1910년 8월 22일 일제의 한국 군사침탈을 ‘국치’라고 정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임시정부(대한민국)는 대한제국의 법통을 잇고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고유한 권한을 갖는 주권(국권)국가이자 독립국가”라는 인식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이루었던 것이다. Korean Struggle on Gukchiil(國恥日: National Disgrace Day) Shin, Woon-yong 100 Years ago, Japanese Imperialism made the deliberate attack on Korean territory with military force. For a century, there have come out resilient movements and struggle by Korean patriots for getting Korean peninsula independen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t this time, it is important to know how serious it would be to use historical term “Gangje-byeonghap(强制倂合, Forced annexation)”, for not only whose underlying meaning is drastically getting rid of Korea and Korean people forever but also it means “Korean voluntarily asked Japan to merge their mother territory and be the part of Japanese Empire”. Therefore if Korean people keep using this term “Byeonghap(倂合)”, the situation would contain decisive pitfalls: firstly, all the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would be “terrorists” ruining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Secondly, what makes the situation becoming worse is Korea would be the new nation with the fall of The Empire of Japan, therefore Korea can never has the legal voice for the claim for compensation to Japan by the international law. Thirdly, that would be the reason that Japan keep insisting Korea illegally occupied Dokdo Island(독도). Like this, these main problems between Korea and Japan are sharing same context. This is the reason why we should deeply reconsider to use the term “Gangje-byeonghap” Japanese imperialism would use the term “Byeonghap” with much more enhanced meaning containing not just Japan and Korea were merged but Korea voluntarily asked to be involved in Japanese imperialism and be the part of The Empire of Japan, Japan generally accepted this asking for help. After that, Japan herself worked for Korean colony to be improved and civilized territory for Korean people wanted it to be. In those days right after being colonized, Korean Patriots and people refused to say “병합”. Instead, they rather used the term “Gukchi(國恥), National disgrace):the national disgrace” whose meaning is “Korean peninsula was illegally occupied by Japanese imperialism, they never wanted and asked to be the part of The Empire of Japan. Needless to say, it was illegal invasion by Japan Imperialism”. And these Korean Patriots stuck to their principle for good. A hundred years ago, the Japanese Empire attacked Korean Peninsula; there are various events in remembrance of this year, 2010. Anyhow, however, the term “Gangje-byeonghap” which was discouraged to use among Korean Patriots for decades would pop up everywhere now. It seems Korean historical consciousness is rather regressing compared to those days where Korean resilient independence fighters would struggle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When it comes to the term “Gukchi”, this would contain the meaning and the theoretical basis for Korean struggle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plus, it is about winning recognition of Korea and Korean people who stood firmly with their beliefin spite of all the suffering and pain for losing their mother country. Therefore, keeping the term “Gangje-byeonghap” is not to know what is right and wrong and refuse to acknowledge the Korean historical legitimacy but allowing the Japanese illegal invasion and lawless territorial expa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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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마쓰오(加藤増雄)의 주한일본 영사․공사 활동과 한국 통치론

          최보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0

          가토 마쓰오(加藤増雄)는 청일전쟁기 한국주재 영사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자국민 보호와 무역 증진 및 한국 내 일본세력을 부식했다. 이후 공사로서는 자국의 경제적․외교적 이해에 철저히 복무했다. 공사 퇴직 후에는 연설과 기고를 통해 일제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에 물질적․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가토는 부산영사로 파견되기 전 해외의 외교공관에 근무한 사실이 있으며 한국에 파견되기 전 이미 『日韓交涉略史』를 간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인물이었다. 가토는 2년간 부산에 주재하면서 개항장 시행규칙을 제정해 시행하고 개항장 밖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던 일본인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육군통신소 군인이나 부산항을 왕래하는 승선원 등으로부터 외부 정보를 입수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의 동태를 짐작하고 이들과 교전시 유리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공사로 재임할 때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수세에 몰린 일본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종의 환어를 위한 공작을 시도하였다. 또 영사 재임기 목포 개항의 경제성과 관련한 의견을 제시하고 공사 재임기 목포 및 군산 등 개항장의 조계장정을 직접 체결하여 개항장 내 일본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데 역할을 일정한 하였다. 영사와 공사로 활동하면서 형성된 그의 한국인식은 자연스럽게 한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그는 한국인을 대체로 열등하면서도 의구심마저 큰 인종으로 폄하하였다. 따라서 제도개혁이나 교육에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한국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일본인에게 동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통감부의 적절한 인재등용과 통치를 요구하였다. 이처럼 가토의 활동은 영사와 공사의 분업적이고 단절적인 업무 한계를 극복하고 목포개항과 같은 연속적인 사업을 이뤄냄으로써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한국민과 고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한 말과 행동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한국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After taking the first step as a consul in Korea during the Sin-Japanese War, Kato Matsuo protected his fellow countrymen, enhanced trades, and influenced Japanese power within Korea. After that, as the minister to Korea, he thoroughly served in the economic/diplomatic interests of his country. After retiring from the minister to Korea, he had materially and psychologically huge influences on the process of colonizing Korea by the Japanese Empire through address and contribution. Before being sent as a consul in Busan, Kato worked for an overseas diplomatic mission. He had the great understanding of Korea enough to publish 『A Brief History of Korea-Japan Negotiations』 even before being sent to Korea. While holding the diplomatic post in Busan for two years, Kato enacted/enforced the enforcement regulations of open port and also devoted himself to the management of Japanese people who were broadening their boundary outside of open port. For this, obtaining the external information from soldiers of army communication center or crewmen visiting Busan Port, he guessed the movements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Armies and then suggested the opinions advantageous to the battles with them. When in office as the minister to Korea, he attempted the maneuver for the return of King Gojong, in order to regain the Japanese power on the defensive by King Gojong’s royal refuge at the Russian legation. Also, when in office as a consul in Korea, he played a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Japan’s influence in open port by suggesting his opinions related to the economic feasibility of opening Mokpo Port and also directly concluding the General Foreign Settlement of open port like Mokpo and Gunsan. His perception of Korea that was formed while working as a consul and minister in Korea, was naturally moved to rule over Korea. He denigrated most of the Korean people as an inferior race with huge doubt. Thus, he argued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produce the actual results of system reformation or education. Moreover, after feeling the necessity to assimilate Korean people into Japanese people to smoothly rule over Korea, he asked for the proper appointment of talented people and ruling of Residency-General. Like this, Kato’s activities became the basis for maximizing Japan’s profits in Korea by overcoming the divided and disconnected limitation of work as a consul and minister in Korea, and also accomplishing the continual project like opening of Mokpo Port. Furthermore, he not only obtained the trust from King Gojong with his words and actions based on his accurate understanding of Korean people and King Gojong, but also had huge influences on Japanese people’s percep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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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의 한일관계사 이해 -『은둔의 나라, 한국』을 중심으로-

          김수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3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 William E, Griffis) 의 『은둔의 나라, 한국 The Hermit Nation, Corea』(1882)은 미국에서 나온 최초의 한국사 통사이다. 이때 그리피스가 한국사를 공부하게 된 동기는 일본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사가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둔의 나라, 한국』에는 그리피스의 한일관계사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한국』에 실린 그리피스의 한일관계사 이해에 대한 현재 한국학계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리피스의 한국사 이해를 일제 식민주의사학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살고, 일본사 연구를 하였던 그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왜곡된 한국사관을 갖는데 오히려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이러한 서술을 통해서 일본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시켜주었다고까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피스의 저술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그 일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어서 커다란 문제가 된다. 그리피스는 한국고대사의 시기에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한 국가였음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고대의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9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이 제기한 한국정벌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은둔의 나라, 한국』을 통해서 한국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발전해 나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리피스의 수많은 저술에 대해서는 보다 새롭게 깊이 분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William E. Griffis's The Hermit Nation, Corea is a history of Korea published in U.S.A for the first time. As a scholar of Japanese history he finds that Japan is historically in close relation with Korea, and such an awareness makes him turn to Korean history and write the book. So it reflects his understanding of Korea-Japan’s historical relationship. The academics in Korea have devaluated Griffis’s endeavor in the book because they saw that his book had been very much influenced by a Japanese colonial historiography, and as a result had contributed to Japan’s distortion of Korean history and even justified its enforced colonization. However, I maintain that such a doubtful devaluation is due to a partial understanding of Griffis’s book or a generalization error. In the book, Griffis repeatedly stresses on the fact that Korea was superior to Japan in the early period of Korea-Japan history. On the basis of the view, he furthermore criticizes the nineteenth century theory that Japan had subjugated Korean peninsula in the early period. Specially considering the fact that Griffis’s book purports to promote Korea-Japan’s closer partnership and co-prosperity, further studies on his other books are needed along with this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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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신운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1

          안중근의거는 우덕순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특히 그의 안중근의거 이후와 해방공간의 활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이글은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우덕순은 1879년 평범한 부모 밑에서 통감 등 기본적인 한학을 익혔다. 그는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 기 전에 상동청년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는 그가 민족문제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 그의 러시아 망명은 을사늑 약에 따른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과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이유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우덕순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안중근이다. 안중근과 만난 시점은 1908년 봄 무렵으로 이범윤 진영 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국내진공작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헤이그 특사파견을 위한 모금에 참여하였고 교육운동에 도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안중근과 함께 동의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에도 참여하였다. 국내진공적전 때 일제에 잡힌 우덕순은 다행히 탈옥에 성공하여 국내에 잠시 머물다가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대동공보사의 수금원과 한인상업회사의 발기인으로 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처단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우덕순은 안중근의 이토 제거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물론 이는 안중근과 역사와 민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었다. 우덕순은 안중근과 같이 재판을 제2의 투쟁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덕순은 안중근만큼 일제의 침략이론을 적극적이 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13년에 출옥한 우덕순은 1917년까지 주로 국내에서 정대호・김좌진 등과 교류하면서 민족운동을 모색하였다. 1918년 정대호의 동지로 정보수집에 진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3년 김좌진과는 같은 대종교 신도로서 대종교의 표면단체인 만몽산업회에 동참하였고, 배정자 제거계획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이토 처단의 결의를 담은 자신의 보구가를 한인시회에 널리 유행시킨 그는 청구신보의 간행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 다 그는 러시아 민족운동가들이 하얼빈에 오면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로 대표적인 한인민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우덕순이 하얼빈 조선인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점에 서 친일시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배일사상이 농후하다”라는 그에 대한 일제의 평가, 그의 민족운동 경력, 동삼성한인협력회와 열사 안중근선생 기념사업협회를 주도한 점, 해방 후 민족운동가들의 지탄을 받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친일로 변절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 그는 안중근 추모사업을 주도하였고 1946년 『부녀신문』을 창간하여 편집 및 발행인을 맡았 으며, 같은 해 평화보육원 건립에 참여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수립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한국민당과 민 족진영강화위원회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당이 대한민국의 수호와 반공을 강령으로 하였다는 점, 민족진 영강화위원회가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 우덕순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였다는 점 등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그는 6ㆍ25 때 납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수 습되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larify the activities of Woo Deok-sun(禹德淳)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this paper. The result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Woo Deok-sun was born in 1879, the same year as Ahn Jung-geun, into an average family. He received a basic education in the Chinese classics, including the “Tonggam”(通鑑). In 1906, after being active in the Sangdong Youth Association, he sought political asylum in Vladivostok. This opened his eyes to Korean national problems. It seems that his decision to defect to Russia was both in order to escape from economic difficulties and out of fervor for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fter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Protection in 1905. Ahn Jung-geun had a major impact on the life of Woo Deok-sun. He met Ahn around the spring of 1908, when both were active in Lee Beom-yun’s group. He took part in fundraising activities to support the secret mission to the Hague in 1907, and was very activity in educational activities. Furthermore, Woo and Ahn together participated in the Donguihoi and the Gongnip Hoieui in Vladivostok. Most importantly, they worked together in forward military operations on Korean territory against the Japanese. This can be seen as one reason why Ahn Jung-geun chose Woo Deok-sun as his comrade in arms. During forward operations in Korea, Woo Deok-sun was captured by the Japanese, but was luckily able to escape prison. He stayed for a while in occupied Korea, before returning to Khabarovsk. Afterwards, he continued his work as a fighter for Korean independence, as the founder of the Daedonggongbosa(大東 共報社) and Hanin Trading Company(韓人商業會社). In early September 1909, when Ito Hirobumi’s visit to Manchuria was confirmed, Woo Deok-sun became determined to kill Ito. It was at this time that Ahn Jung-geun(安重根) suggested to Woo a great and meritorious deed. Since he shared with Ahn Jung-geun the same historical and nationalist consciousness, Woo naturally agreed wholeheartedly to his proposition. Ahn Jung-geun succeeded in his valorous deed, but it can be seen that Woo Deok-sun’s assistance played a decisive role. Like Ahn Jung-geun, Woo Deok-sun saw his trial in court as a second struggle. But unlike Ahn Jung-geun, He was unable to refute Japan’s policy of imperial expansion logically and convincingly. In 1913 Woo was released from prison, and for 5 years he mainly roamed within Korea, seeking unsuccessfully to involve himself in the nationalist movement. At this time, he worked together with Jeong Dae-ho and Kim Jwa-jin. As a comrade of Jeong Dae-ho, Woo worked hard to gather intelligence. Moreover, Woo was a believer in Daejonggyo (大倧敎), as was Kim Jwa-jin(金佐鎭), and he worked together in the Daejonggyo front group, the Manmong Industrial Association (滿蒙産業會), as well as collaborating in the plans to do away with pro-Japanese Koreans. His song “Boguga(報仇歌)”, that tells of his resolve to kill Ito Hirobumi, became widely known in Korean society, and he actively assisted in the publication of the Cheonggu Sinbo (靑邱新報). The fact that Woo Deok-sun was seen as a person who all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living in Russia had to meet when visiting Harbin shows that Woo was a central figure in the struggle for Korea‘s sovereignty. However, while active as the leader of the Harbin Korean Association (哈爾濱朝鮮人民會), Woo received funds from the Japanese Consulate-General resident in Harbin, and this earned him the label of pro- Japanese collaborator. But taking together the Japanese assessment of him as “rapidly anti-Japanese”, his experience as an independence activist, his leadership activities in the Dongsamseong Korean Association(東三省韓人協力 會) and the Memorial Society for Heroic Marty Ahn Jung-geun, and the fact that after Liberation he was not rejected by other independence fighters, it cannot be concluded that Woo Deok-sun had converted to a pro-Japanese traitor. In 1945, after the recovery of Korea’s national sovereignty, Woo led efforts to memorialize Ahn Jung- geun. In 1946 he founded, edited and published the Bunyo Sinmun newspaper (婦女新聞), and took part in setting up the Pyeonghwa Nursery School (平和保育院).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became a politician and was active at the center of the Daehan kumin Party (大韓國民黨) and the Minjok Jinyeong Ganghwa Committee (民族陣營强化委員會). Woo Deok-sun’s political leanings can be seen in his support for President Syngman Rhee, as well as the Daehan kumin Party’s platform of national defense and anti-Communism, and the fact that the Minjok Jinyeong Ganghwa Committee was set up to keep leftist groups in check. However, during the Korean War, Woo was abducted to the north and saw out his last days in the dreary Pyongyang Prison. His remains were later brought south by the South Korean army and are now buried in the Korean National Ceme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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