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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식인의 생업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 대응

          손혜리(Son Hye ri) 한국고전연구학회 2014 한국고전연구 Vol.0 No.30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는 白雲 沈大允(1806∼1872)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지식인이 학문과 도덕의 수양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마련하지 못한 경우 상공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심대윤이 노모와 어린 두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목반을 만들고 약을 판 행적을 기록한 글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몰락한 처지이긴 하지만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생계를 위해 직접 상공업에 종사한 데다 이를 기록으로 자세하게 남긴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땀 흘려 일한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 것에 대한 기쁨을 표출하고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재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士의 정체성 상실로 인한 내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變通'의 논리를 제시하여 논리적 대응을 모색하였다. 이 글은 조선후기 한 몰락 지식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이며 적극적 대응과 그로 인한 고뇌와 갈등을 통해 인간적 초상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intelligentsia in the late Choseon dynasty who were not financially independent by studying and cultivating morals engaged in commercial and industrial circles focused on Baek-Woon(白雲) Shim Dae-Yoon(沈大允, 1806∼1872). It is a very important document that Shim Dae-Yoon engaged in commercial and industrial circles such as making wood block and selling medicine to maintain his aged mother and two younger brothers. Because it rarely remains document which is related to working commerce and industry as a noble family, even though they fall in their circumstances. Shim Dae-Yoon expressed of joy on supporting his family and rediscovered value of working for his hard work he did. But, he experienced an inner conflict because of cold eyes and lost of identity as classical scholar. To overcome, he insisted on a logical argument called Byeontong(變通). It is meaningful that this paper reveals intelligentsia in the late Choseon dynasty who had practical actions and inner conflict to earn a scant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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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해응(成海應)의 송서(送序)를 통해 본 경세의식

          손혜리 ( Son Hye-ri ) 한국실학학회 2018 한국실학연구 Vol.0 No.36

          본고는 硏經齋成海應(1760∼1839)이 저술한 22편의 送序를 대상으로 전체작품의 개요를 파악한 뒤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송서란 길 떠나는 이를 전송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글이다. 성해응의 송서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조선 후기 사상 가장 많은 편수의 송서를 저술하였거니와 여기에는 사명을 받고 연행을 가거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를 전송하는, 즉 공적인 영역의 송서가 14편이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성해응은 송서를 써 준 대상과 世交가 있는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에 치력할 때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학문이 노성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식이 잘 집적되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해응은 청도군수로 부임하는 金箕書에게 改量의 중요성과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였으며, 연행하는 조카 成佑曾과 趙萬永에게는 중국에 변고가 있을 경우 조선이 영향을 받아 위험해질 것을 경계하고 覘國을 통해 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이천과 춘천 등 한때 고대 국가의 수도였던 동국의 경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의 송서 작품에는 조선후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체제 모순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제기되어 있다. 특히 서북지역뿐만 아니라 삼남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에게 탐관오리와 간악한 吏胥, 倖民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송서에 표출된 성해응의 이러한 의식은 실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경세의식의 소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content and deduce meaning with twenty-two songso(送序farewell document) which was written by Yon'gyongjae(硏經齋) Song Haeung(成海應, 1760∼1839). Songso is document that farewells and encourages departees. In this paper, the main reason I have noticed is that Song Haeung wrote songso in the majority, and fourteen songso are about the public realm. Furthermore, most of the works are related to a traditional friendship between families. He wrote them after resigning from office, so it is expressed in his awareness on the condition of ripeness level of study. Song Haeung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improvement(改量) and stabilization of public welfare to Kim Kiso(金箕書) who left for Cheongdo governor. And he made a request for spying for China(called 覘國) to Song Uchung(成佑曾) and Cho Manyong(趙萬永) who visited China as public duty. In this regard, he showed a special interest in frontier awareness of ancient countries’s capital such as Icheon and Chuncheon. In addition, songso contains criticism of contradiction in system significantly. Especially he pointed out to local government of northwestern province and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ficial structural problems, and attached importance to appoint competent people. Song Haeung’s consciousness that is expressed in his songso is based on thought of Silhak(實學), and can assess a result of economic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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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손혜리 ( Son Hye-ri ) 한국한문학회 2021 韓國漢文學硏究 Vol.- No.82

          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This article prospects one of representative sub-branch family in Late Choson, Changnyong Seong Family’s Chambong-gong Clan, especially about the succession of cognition and family scholarship in diachronic view. As discussion focus on personnel with experience of successful candidate of civil exam and participation in diplomatic mission to China or Japan, spotlight is on the 6 successive generation of the family, Seong Huryong - Seong Wan - Seong Mongryang - Seong Daejung - Seong Ujeung - Seong Inho. Research on records of this members implies following tendencies. First, they were recognized as highly literate from scholars of their era. Though their literacy did not advanced to transition of perception, foreign experience led them to widen their knowledge. Second, each member have wellacquainted the writings of their ancestors on diplomatic mission. Thus they were able to capture new experience comparatively fast and leave the writings themselves. Third, because of personal political inclination and family background, they had firm and clear mindset of ‘Loyalty to Ming’. This tendency existed consistent after their diplomatic mission. Fourth, they had huge interest about foreign people and studies, such as Giulio Aleni, Matteo Ricci, Diplomats from RyukyuㆍAnnamㆍSiam, Jikbangoegi, Dongjamun. Fifth, they showed active curiosity upon foreign products and cultures like well bucket, sweet potato, waterwheel, which may help welfare of Choson, and emphasized to import those culture. To put it short, it is found that quicker access to newest academic information and succession of the information within the family tree have allowed Chambong-gong Clan of Changnyong Seong Family firmly establish themselves as the prestigious sub-branch family of Late Cho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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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들의 明 遺民에 대한 기록과 편찬의식 -李德懋의 『磊磊落落書』와 成海應의 『皇明遺民傳』을 중심으로-

          손혜리 ( Hye Ri Son ) 한국실학학회 2014 한국실학연구 Vol.0 No.28

          李德懋(1741-1793)와 成海應(1760-1839)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의 사상적 배경이 부합되면서 방대한 분량의 『磊磊落落書』와 『皇明遺民傳』을 저술하였다. 이덕무는 연행시 오랑캐가 되어버린 중국을 보고 충격 받아 명말 유민에 관한 자료를 대거 취재하여 『뇌뢰낙락서』를 편찬하였으며, 성해응은 『뇌뢰낙락서』를 바탕으로 범례를 정하고 번잡한 내용을 산삭하여 『황명유민전』을 저술하였다. 『뇌뢰낙락서』의 문제점으로 제기된 번잡함은 오히려 중요한 특장이 된다. 교정과 편집 과정을 거치지 않아 번잡하고 거칠긴 하지만 이덕무의 폭넓은 독서체험과 범위, 지적 탐구와 관심의 향방을 생동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황명유민전』은 완성도가 높은 데다 『뇌뢰낙락서』와의 비교 고찰을 통해 명 유민에 대한 기록이 편찬되는 과정의 추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처럼 『뇌뢰낙락서』와 『황명유민전』은 18~19세기 지식인들의 사상적 배경과 기록 태도, 편찬 의식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큰 저술이다. Lee Deok-mu(李德懋, 1741-1793)`s writing of NoeLoeNakRakSeo(『磊磊落落書』) and Seong Hae-eung(成海應, 1760-1839)`s writing of Hwang MyeongYuMinJeon (『皇明遺民傳』) coincides with an atmosphere of times and personal ideological background. Lee Deok-mu visited China in 1778 and was shocked to see China turned into a barbarian state. So he gathered related vagrant people in the Ming dynasty to document and compiled NoeLoeNakRakSeo. Seong Hae-eung`s compilation of HwangMyeongYuMinJeon fixes a legend and focuses on the undecided constitution of NoeLoeNakRakSeo. These books have massive amounts of material and it is an event unprecedented in history, not only for Joseon but also for China as well. Lee Deok-mu and Seong Hae-eung have attitude of learning of erudition and historical research. In reality, NoeLoeNakRakSeo and HwangMyeong YuMinJeon revealed their attitudes of learning. But one problem is that NoeLoeNakRakSeo does not fix one of it`s legend and it is a noticeable feature in his book. Even though it`s complicated and rough because of the lack of editing, we can identify not only his experience in nature and his extent of reading, but also his intellectual pursuit and interest. Also HwangMyeongYuMinJeon fixes and edits legend of NoeLoeNakRakSeo, so it is high quality book which refers to the latest books. It is interesting that we peep process of compilation of vagrant people in the Ming dynasty comparing with NoeLoeNakRakSeo. Therefore NoeLoeNakRakSeo and HwangMyeongYuMinJeon are valuable textbooks which reveal ideological backgrounds, attitudes of records, and consciousness of compiling in the 18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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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大中의 『仙槎漫浪集』 硏究

          孫惠莉(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10 大東漢文學 Vol.3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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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靑城 成大中(1732∼1809)이 울진현령 시절(1767∼1770)에 저술한 『仙槎漫浪集』2책을 소개하고 내용적 특징을 규명하였다. 仙槎는 경상북도 울진의 古號로, 불영계곡.성류굴.망양정 등 뛰어난 승경지가 많은 지역이다. 성대중은 울진 현령으로 재임하면서 주변의 승경지를 두루 유람하고 그 흥취를 시로 묘사하였다. 또 공무로 原州 감영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이 곳에는 성대중의 스승인 金焌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준을 통해 蟾洲에서 閔百順.林配垕.安錫儆 등의 선배학자를 만나 주역을 강론하고 근처의 汶田巖과 翠屛山 등을 유람하며 백여 수의 시문을 창수하였는데, 이는 『선사만랑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대중은 癸未사행을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울진현령으로 부임한만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사행의 임무를 수행했던 趙曮.元重擧에 대한 시를 많이 저술하였다. 조엄.원중거와는 사행을 계기로 만난 이후 평생동안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고 世交를 맺었던 바, 이들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유감없이 시 속에 표출하였다. 성대중의 울진현령 시절은 문과에 급제한 뒤 사행을 다녀온 이후이며 순정한 학식과 고문으로 정조에게 인정받고 널리 명성을 떨치기 이전 시기이다. 즉 성대중의 청장년 시절로 학문에 대한 드높은 열정을 지니고 고귀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던 즈음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선사만랑집』에 여실히 표출된 만큼, 『선사만랑집』은 성대중의 청장년 시절 학문적 성향과 시작 경향 및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李德懋와 宋載道가 『선사만랑집』에 評語를 더하고 높이 평가했던 만큼, 『선사만랑집』의 문학적 가치 또한 주목할 만하다. This article introduced the two volumes of 『Seonsamanrangjip(仙槎漫浪集)』, a collection of poems written by Cheongseong(靑城) Seong Dae-jung(成大中, 1732∼1809) during his term of office as Uljin county governor(1767∼1770), and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contents. Seonsa(仙槎) is the old name of Uljin. As Uljin has many excellent natural scenes such as Bulyeong valley, Seongryu cave and Mangyang bower, Seong had visited them and described their charms in poems. He also had often called at on business the local government office of Wonju where his master Kim Jun(金焌) had stayed. Seong met Min Baek-sun(閔百順), Im Bae-hu(林配垕) and An Seok-gyeong(安錫儆) at Seomju(蟾洲) on the introduction of Kim Jun to discuss on the Book of Changes. Seong and three men had wrote one hundred or more poems during their sight-seeings to nearby Munjeon temple(汶田巖) and Chuibyeong mountain(翠屛山), which poems account for the major portion of 『Seonsamanrangjip』. As Seong proceeded his office in Uljin not long after accompanying Gyemi year delegation to Japan, 『Seonsamanrangjip』 uniquely contains the poems that he wrote with Jo Eom(趙曮), the official envoy, and Won Jung-geo(元重擧) the secretary who shared the good times and the bad times with him for 11 months. Because Jo Eom and Won Jung-geo had become his life long acquaintances and companions after forming ties for the first time at the delegation, Seong fully expressed the memories and yearnings for them in his works. Seong's Uljin office term, being followed by his pass of ranking officials exam and Gyemi year delegation accompanying, was the time he won recognition from King Jeongjo as well as reputation from many people for his genuine learning and archaic texts. In other words, it was the period in which he had ardent passion for learning and had pursued sublime mental world. As such basis was well expressed in 『Seonsamanrangjip』, it must be a very important and helpful material to find out his academic inclination, mental world and companionship in his man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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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해응(成海應)의 서북지역에 대한 인식과 비판 : 「속죄언(續罪言)」을 중심으로

          손혜리 ( Son Hye-ri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8 민족문학사연구 Vol.0 No.66

          본고는 정조 대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한 서족 출신의 지식인인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속죄언(續罪言)」을 중심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진단하고 19세기 전반 서북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며 제도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학적 대응을 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속죄언」은 글을 쓸 만한 처지가 아닌데 외람되이 쓴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장인재(?人才)」·「택수령(擇守令)」·「통이서(通吏胥)」·「금행민(禁倖民)」·「파기악(罷妓樂)」·「정전제(正田制)」·「정군제(正軍制)」·「축화재(畜貨財)」 등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서북지역 개혁안이다. 이러한 인식과 비판은 이후 서북지역에 부임하는 수령을 전송하면서 쓴 글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만큼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수의 세도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민(民)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던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성해응은 서북지역을 개혁하기 위한 비전과 대책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행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정책화하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이들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강조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의식의 소산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 후기 한 서족 지식인의 학적 대응을 통해 시대적 사명에 부응한 면모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cause of the Hong Kyongnae rebellion and academic response to reform institutional contradiction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of the Northern region in the early 19th century focused on Sokchoeon(「續罪言」) of Song Haeung(成海應) who was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and inspector of the archive in King Jeongjo period. Sokchoeon contains unmerited meaning, and is made up of eight books such as Changinjae(「?人才」), T’aeksuryong(「擇守令」), T’ongiso(「通吏胥」), Kumhaengmin(「禁倖民」), P’agirak(「罷妓樂」), Chongjonje(「正田制」), Chonggunje(「正軍制」), Ch’uk’wajae(「畜貨財」). It is a kind of a reform plan of the Northern region. These perceptions and criticisms are general and systematic through writing of saying farewell to a provincial governor who goes the Northern region. And it implies criticism of power politics in the early 19th century. Song Haeung had a vision to reform the Northern region, but he was not in a position to practice. So, he wanted to relieve the poor who had fallen into a state of distress through his reform. It is philosophy of governance(經世意識). It’s from this point that this paper can be confirmed aspects of meeting the demands of the times for academic re-sponse to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in the late Chos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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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명(明),청(淸) 문학에 대한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식 : 조선 후기 문인들의 고염무(顧炎武)에 대한 인식과 수용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을 중심으로-

          손혜리 ( Hye Ri So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1 大東文化硏究 Vol.0 No.73

          본고는 엄정한 고증을 통하여 학술적 관심사를 연구하는 고증적 학문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만큼, 淸朝고증학의 개황이자 중심인물로 평가되는 顧炎武(1613~1682)를 주목하고, 조선 후기 문인들의 고염무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을 논의하였다. 고염무는 명말청초를 살다간 문인이자 학자로서 명이 망한 후 抗淸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나, 실패한 뒤로는 전국을 유랑하며 청조의 부름을 거절한 절의의표상이다. 그는 고통의 시간동안 『日知錄』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방대한 전거의 인용과 치밀한 고증을 활용한 학문방법을 구사하여 청대 고증학의 개황으로 일컬어졌다. 고염무는 明道와 救世에 바탕을 둔 經世致用의 學에 목표를 두었으며, 그의 고증학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결과 고염무의 학문과 저술은 청대의 학문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 문인들은 고염무의 명나라에 대한 견결한 절의와 박학고증적 학문태도 및 경세적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적극 수용하였다. 고염무의 학문 성향과 연구방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硏經齋 成海應(1760~1839)이다. 그는 博文約禮의 학문성향을 지녔으며 문헌고증을 통한 실증적 학문방법을 구현하였고, 박학고증을 통한 經世學으로의 추동을 지향하였다. 이는 고염무의 학문 성향 및 연구 방법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성해응 학문에 있어 고염무 수용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여 조선 후기 학술계와 고염무 그리고 고증학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를 수행하는데 하나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This article paid attention to Gu Yanwu(顧炎武) who is considered as the founder and central figure of Qing(淸)`s bibliographical study and discussed on the recognition and acceptance of him by the scholars of the late Joseon. Gu Yanwu had lived the late Ming(明) and early Qing period. After Ming fell, he joined aggressively in anti-Qing struggle but failed. This intellectual adhered to old Ming firmly refusing to answer the call of Qing Dynasty, just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He had written various books including 『Ri·zhi·lu(日知錄)』 during the years of hardship. In those books, he cited enormous old references and used historical researches as study method. It made him being called as the founder of Qing`s bibliographical study. The aim of his study was ``administrating the world and pursuing practicalness`(namely, to seek after truth and rescue the people). His bibliographical study has been considered to be scientific, subjective, strict and elaborate. Therefore, his study and books had influenced not only on the direction of Qing`s studies but greatly on the scholars of the late Joseon. The scholars of the late Joseon admired Gu`s stern fidelity to old Ming and accepted widely his encyclopedic bibliographical attitude of study and administrative tendency. Yeon·gyeong·jae(硏經齋) Seong Hae-eung(成海應) is one of scholars who took the academic inclination and research method of Gu deeply in their study. Seong pursued erudition and returning-to-proprieties(禮) in his study, tried to realize practical study through bibliographical research in methodology and wished to drive the practical administrative study by means of encyclopedic bibliographical research. Seong`s attitude are same on the whole with Gu`s. From such similarity, this article tried to find the detailed aspects of acceptanc of Gu in the study of Seong. The findings might be of some help for the overall researches on the academic society, Gu Yanwu and bibliographical study in lat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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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鐺洲 朴琮의 流配詩 硏究

          손혜리(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20 大東漢文學 Vol.62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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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鐺洲 朴琮(1735~1793)은 국내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고 기록을 남길 만큼 山水詩書에 대한 癖이 있다. 그의 산수유기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연구가 축적된 반면 다른 문학작품에 대한 논의는 전무한 만큼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그는 스승 홍계희의 두 손자가 일으킨 정조 시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영해에서 16년간 적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시절 지은 시문은 유배라는 극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더라도 박종의 문인적 감성과 역량이 오롯이 발현되어 작품적 성취가 크다. 한편 박종의 문집 간행에 참여하고 서발문을 썼던 이들은 대부분 그가 억울하게 유배되었음에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은 점을 특기하여 군자적 면모를 고평하였다. 그러나 실제 유배 시절 지은 시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억울하게 유배된 과정에서 정의감과 억울함의 착종, 유배객의 실존과 회한, 가장으로서의 역할 괴리 등에서 원망하고 탓하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토로하였다. 박종 문학의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를 통해 18세기를 살다 간 한 인물의 문학작품을 적실하게 평가함과 동시에 지역적으로 소외된 문인 지식인을 소환하여 한문학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의미를 아우르게 될 것이다. This paper focuses on Park jong’s poems written in the times of exile. Tangju(鐺洲) Park Jong(朴琮, 1735~1793) is well-known for his favor of poetry or writings on landscapes, even he roamed over all the famous scenic sites. Park’s travel journals around landscapes(山水遊記) have been spotted and researches were conducted for quality of the journals, which implies the importance of studies on his other writings. Especially Park was involved in the case of assassination attempt of Jŏngjo by two grand sons of his teacher, Hong Gye-hŭi(洪啓禧). In result, he was exiled to Yŏnghae, Gyeongsang Province, and after 16 years he died. Poetries written in this period are result of Park Jong’s essence of literary sensibility and ability, even under days of banishment. Therefore, these works can be considered as a huge literary achievement. Each personnel who participated in publication of Park Jong’s collection or wrote postscript highly praised his nobility of not showing resentment or blames upon others. However, in fact if we read through his writings carefully, there are humanely general and natural emotions he felt through unjust accusation and banishment. There is entanglement of his justice with frustration, self-awareness as an exile with remorse, and discrepancy between a head of household and an exile, with resentment or blames toward others. This honest responses shows various aspects of Park Jong. Closer study of his exile poems will allow us to appraise literary works of a scholar in 18th century precisely, and give spotlight to someone yet recognized by geographical isolation, thus broaden the horizon of Korean Liteature in Classical Chinese.

        • KCI등재

          특집 1: 백운 심대윤의 문학과 사상 : 심대윤(沈大允)의 남정록(南征錄) 연구(硏究)

          손혜리 ( Hye Ri Son ) 한국실학학회 2015 한국실학연구 Vol.0 No.30

          본고는 19세기의 사상가이자 문인 학자인 沈大允(1806∼1872)의 『南征錄』을면밀하게 검토하여 저술배경과 여정 및 내용상 특징과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남정록』의 가치와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정록』은 1755년을 해옥사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죽은 심대윤의 증조모와 조부, 대고모 세 분의 유골을 선영으로 返葬하기 위해 6개월에 걸친 여정을 기록한 저술이다. 심대윤 가문의 처절한 비극이 오롯이 수록되어 소수자로서 고뇌의 독백이 잘 담겨 있다. 심대윤은 반장을 통해 가족사의 비극을 치유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가문 재건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출함으로써 소론명문가의 후예로서 자부심과 사명감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둘째, 짧은 편폭 안에 祭文, 遊記, 詩등 다양한 양식이 두루 수록되어 있고, 구성과 주제의식 및 형상화가 뛰어나 작품적 성취가 크다. 셋째, 심대윤의 초기작으로 문학과 사상의 전개양상과 전모를 파악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다. 넷째, 반장의 여정과 절차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19세기 사회·제도사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studies background in writing and characteristic and meaning in content based on the Sim Dae-yun(1806~1872)’s Namjongnok. Value and significance of Namjongnok is as follows. First, Namjongnok is the text which writes journey to panjang(返葬) for six long months. Sim Dae-yun wanted to overcome tragedy of the family through panjang, so he moved great-grandmother, grandfather and grandaunt’s remains to the family burial ground. They died of involvement of Ulhae-oksa(乙亥獄事) in a place of exile in 1755. Namjongnok reveals monologue of anguish as a minority. Through detailed record, he wishes to give a sense of pride and duty as noble family of soron(少論) expressing a firm will of reconstruction of the family. The second, Namjongnok has a variety of styles in a short story and excels at composition and figuration. The third, Namjongnok is Sim Dae-yun’s early work, so it is an import part of understanding of developmental aspects and whole story of literature and thought. Lastly, it is recorded journey and procedure of panjang in detail. so it will help to examine socio-cultural history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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