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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鐺洲 朴琮의 流配詩 硏究

          손혜리(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20 大東漢文學 Vol.62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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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鐺洲 朴琮(1735~1793)은 국내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고 기록을 남길 만큼 山水詩書에 대한 癖이 있다. 그의 산수유기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연구가 축적된 반면 다른 문학작품에 대한 논의는 전무한 만큼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그는 스승 홍계희의 두 손자가 일으킨 정조 시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영해에서 16년간 적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시절 지은 시문은 유배라는 극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더라도 박종의 문인적 감성과 역량이 오롯이 발현되어 작품적 성취가 크다. 한편 박종의 문집 간행에 참여하고 서발문을 썼던 이들은 대부분 그가 억울하게 유배되었음에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은 점을 특기하여 군자적 면모를 고평하였다. 그러나 실제 유배 시절 지은 시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억울하게 유배된 과정에서 정의감과 억울함의 착종, 유배객의 실존과 회한, 가장으로서의 역할 괴리 등에서 원망하고 탓하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토로하였다. 박종 문학의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를 통해 18세기를 살다 간 한 인물의 문학작품을 적실하게 평가함과 동시에 지역적으로 소외된 문인 지식인을 소환하여 한문학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의미를 아우르게 될 것이다. This paper focuses on Park jong's poems written in the times of exile. Tangju(鐺洲) Park Jong(朴琮, 1735~1793) is well-known for his favor of poetry or writings on landscapes, even he roamed over all the famous scenic sites. Park's travel journals around landscapes(山水遊記) have been spotted and researches were conducted for quality of the journals, which implies the importance of studies on his other writings. Especially Park was involved in the case of assassination attempt of Jŏngjo by two grand sons of his teacher, Hong Gye-hŭi(洪啓禧). In result, he was exiled to Yŏnghae, Gyeongsang Province, and after 16 years he died. Poetries written in this period are result of Park Jong's essence of literary sensibility and ability, even under days of banishment. Therefore, these works can be considered as a huge literary achievement. Each personnel who participated in publication of Park Jong's collection or wrote postscript highly praised his nobility of not showing resentment or blames upon others. However, in fact if we read through his writings carefully, there are humanely general and natural emotions he felt through unjust accusation and banishment. There is entanglement of his justice with frustration, self-awareness as an exile with remorse, and discrepancy between a head of household and an exile, with resentment or blames toward others. This honest responses shows various aspects of Park Jong. Closer study of his exile poems will allow us to appraise literary works of a scholar in 18th century precisely, and give spotlight to someone yet recognized by geographical isolation, thus broaden the horizon of Korean Liteature in Classical Chinese.

        • KCI등재

          정조대 관찬(官撰)과 사찬(私撰)의 이중주 - 이덕무와 성해응의 어정명찬서 편찬과 사적 저술 활동 -

          손혜리 ( Son Hye-ri ) 우리한문학회 2020 漢文學報 Vol.43 No.-

          본고는 조선 후기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서얼 출신 문사들의 御定命撰書 편찬 활동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 저술과의 상관성을 탐색한 글이다. 이를 위해 정조대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15명에 대한 인적사항과 재임기간, 관력, 저술 등을 조사하고, 朴齊家·柳得恭·李德懋·成海應·朴宗善·柳本學 등 6명의 문집이 현재 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중 이덕무와 성해응은 각각 『靑莊館全書』와 『硏經齋全集』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바, 이들이 검서관으로 재임하면서 참여한 어정명찬서 편찬 사업이 개인 저술 활동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포착하였다. 따라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덕무가 편찬한 『宋史筌』「遺民列傳」과 「磊磊落落書」, 그리고 성해응이 편찬한 『尊周彙編』과 「皇明遺民傳」의 상관성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어정명찬서의 편찬과 간행을 주로 담당했던 규장각 검서관의 직무와 역할에서 나아가 관찬활동이 개인 저술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의 직무와 역할의 외연이 심화 확장되었음을 확인하였다. This paper is a research of correlationship between official publication and private publication of seo-eol(庶孼) literati in Kyujanggak(奎章閣) gumseogwan (檢書官) at King Jeongjo period of Late Choson. For the research, this paper searched informations as biographic data, record of official service, and publication list of 15 gumseogwans, and it is found that 6 of them, Park Je-ga(朴齊家)·Yu Deuk-gong(柳得恭)·Lee Duk-moo(李德懋)·Sung Hae-ung(成海應)·Park Jong-seon(朴宗善)·Yu Bon-hak(柳本學), left personal collection(文集). Especially, Lee and Sung left a publication of large volume, each Cheongjanggwan-jeonseo(靑莊館全書) and Yeongyeongjae-jeonseo(硏經齋全書). It tells us that their experience of participating in ‘Collection of Royal Highness(御定命撰書)' as gumseogwan has close relation with their personal writings. Thus from this point of view, this paper closely investigated correlation between Lee's publication, Yuminyeoljeon(遺民列傳) in Songsajeon(宋史筌) and Noeroenangnakseo(磊磊落落書), and Sung's publication, Jonju-hwipyeon(尊周彙編) and Hwangmyeongyuminjeon(皇明遺民傳). Furthermore the research examined that experiences of official publication for Kyujanggak gumseogwans above their duties and tasks have affected their personal publication practices. Therefore it is clear that denotation of duties and tasks for Kyujanggak gumseogwans in Jeongjo period has developed more broad and more complex.

        • KCI등재

          성해응(成海應)의 송서(送序)를 통해 본 경세의식

          손혜리 ( Son Hye-ri ) 한국실학학회 2018 한국실학연구 Vol.0 No.36

          본고는 硏經齋成海應(1760∼1839)이 저술한 22편의 送序를 대상으로 전체작품의 개요를 파악한 뒤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송서란 길 떠나는 이를 전송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글이다. 성해응의 송서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조선 후기 사상 가장 많은 편수의 송서를 저술하였거니와 여기에는 사명을 받고 연행을 가거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를 전송하는, 즉 공적인 영역의 송서가 14편이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성해응은 송서를 써 준 대상과 世交가 있는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에 치력할 때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학문이 노성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식이 잘 집적되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해응은 청도군수로 부임하는 金箕書에게 改量의 중요성과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였으며, 연행하는 조카 成佑曾과 趙萬永에게는 중국에 변고가 있을 경우 조선이 영향을 받아 위험해질 것을 경계하고 覘國을 통해 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이천과 춘천 등 한때 고대 국가의 수도였던 동국의 경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의 송서 작품에는 조선후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체제 모순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제기되어 있다. 특히 서북지역뿐만 아니라 삼남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에게 탐관오리와 간악한 吏胥, 倖民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송서에 표출된 성해응의 이러한 의식은 실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경세의식의 소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content and deduce meaning with twenty-two songso(送序farewell document) which was written by Yon'gyongjae(硏經齋) Song Haeung(成海應, 1760∼1839). Songso is document that farewells and encourages departees. In this paper, the main reason I have noticed is that Song Haeung wrote songso in the majority, and fourteen songso are about the public realm. Furthermore, most of the works are related to a traditional friendship between families. He wrote them after resigning from office, so it is expressed in his awareness on the condition of ripeness level of study. Song Haeung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improvement(改量) and stabilization of public welfare to Kim Kiso(金箕書) who left for Cheongdo governor. And he made a request for spying for China(called 覘國) to Song Uchung(成佑曾) and Cho Manyong(趙萬永) who visited China as public duty. In this regard, he showed a special interest in frontier awareness of ancient countries's capital such as Icheon and Chuncheon. In addition, songso contains criticism of contradiction in system significantly. Especially he pointed out to local government of northwestern province and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ficial structural problems, and attached importance to appoint competent people. Song Haeung's consciousness that is expressed in his songso is based on thought of Silhak(實學), and can assess a result of economic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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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전반 成祐曾과 淸 문사들의 교유 양상과 의미

          손혜리(Son Hye ri) 한국고전연구학회 2016 한국고전연구 Vol.0 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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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成祐曾(1783~1864)이 1818년 무인연행 시 淸의 문사들과 교유한 양상과 의미에 대해서 논의한 글이다. 그는 청의 문사들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茗山集󰡕에 수록하였는데, 이는 1818년에 있었던 3차례의 연행 중 유일하게 전하는 기록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성우증의 연행 기록은 무인연행의 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817년에서 1821년까지 비교적 간극이 길었던 연행록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성우증은 연행을 통해 청 문사들과의 학문적 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실제 이를 성취하였다. 그가 교유한 청의 문사들은 陶澍와 陳用光을 중심으로 翰林院에 재직하며 혈연과 관직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과 창수한 시는 대부분 상대방의 인품과 詩才를 칭찬한 뒤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의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진정성이 오롯이 표출되어 우정이 빛을 발한 경우가 더 많다. 성우증에게 있어 이들과의 교유는 神交이자 得意處라 하기에 충분하다. This paper studies aspect and meanings of companionship between Sŏng, U-chŭng and scholars in Qing dynasty during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Muin(1818). He made an exchange with scholars in Qing dynasty about poems and letters, and included them in Myŏngsanjip. It is a valuable material which is the only record of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Muin. It is a very important document that verifies aspect of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Muin and fills a gap in Yŏnhaengnok studies from 1817 to 1821. Sŏng, U-chŭng thinks companionship is the most important thing during diplomatic mission. He met Do Ju(陶澍) and Jin, Yong-gwang(陳用光) who were well-known in Qing dynasty, and they built human networks. They exchanged poems which were related to compliments of personality and poetic talent, and expressed wishfulness and longing for saying goodbye. They are not always ceremonial, they are much more sincere and truthful. So, it is enough to say that their companionship is tŭkŭich'ŏ(得意處) and sinkyo(神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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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서얼가의 學知생성과 家學의 성립

          孫惠莉(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13 大東漢文學 Vol.38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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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昌寧 成氏 桑谷公派 서얼가문에서 16世부터 22世까지 7세대 동안 연속해서 생원진사시와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고 또 조선조 서얼출신 문과급제자 중 가장 높은 품계를 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을 배출하는 등 이 집안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얼 명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가문적 배경과 학적 역량을 비롯하여 ‘詩社를 통한 과거시험의 준비와 합격'이 중요한 이유를 차지하고 있음을 규명하였다. 이를 위해 족보와 읍지, 향교지, 방목 등의 자료를 두루 검토하여 조선조 서얼출신 생원진사시 합격자와 문과급제자 및 포천지역 생원진사시 합격자와 문과급제자의 현황을 파악하고,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얼출신 생원진사시 합격자와 문과급제자 현황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얼출신의 과거합격 비율과 품계를 고찰하였다. 또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얼가는 76년간 4차례에 걸쳐 고향 포천에서 詩社를 지속적으로 결성하고 功令業을 가르쳐 많은 수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시사를 결성하여 공령업을 가르치는 것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과거합격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실제 여느 양반가문보다 많은 수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것이다. 이때의 공령업이란 단순한 공령문자가 아닌 仁義의 내용을 담은 공령문자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단서를 달았다.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얼가가 시사를 통해 공령업을 가르쳐 과거에 대한 집중적이고 계획된 대비를 하여 많은 수의 합격자를 낸 만큼, 4차례의 시사와 그로 인한 많은 수의 과거합격자 배출은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얼가의 학지를 생성하고 가학을 성립하는데 중요한 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고를 통해 한 서얼가문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얼명문가로 자리잡기 위해 기울인 현실적이며 집단적인 노력을 확인함으로써 신분과 과거제도의 상관 관계를 비롯한 조선후기 사회 문화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This article wa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reason why ‘the preparation of Gwageo exam through Sisa(poetry society)' is important for the writers of Seoeol birth of Sanggok gongpa, a sub-branch of family of Changnyeong in establishing as a nobel family of Seoeol. This family had produced many successful applicants for examination of Saengwon, Jinsa and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men of the highest rank for seven generations in a row from the 16th to the 22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First, I considered the situation of successful applicants for Saengwon, Jinsa and civil service examination, of Seoeol birth, and those for Saengwon, Jinsa and civil service examination, from Pocheon district by reviewing Mungwa Bangmok and Sama Bangmok along with Changnyeong Seongssi Songgok Gongpa-bo(the genealogical record), and the ratio of successful applicants of Seoeol birth of Sanggok gongpa, a sub-branch of family of Changnyeong was found to be high, which showed it was an important factor in establishing the family as a representitive noble family of Seoeol in the Joseon dynasty. Besides, the Seoeol family of Changnyeong seong family Sanggok gongpa had produced many successful applicants of Gwageo examinations while consistently organizing Sisas four times in 76 years and teaching Gongnyeongeop. As appeared by their slogan, ‘organization of Sisa and teaching of Gongnyeongeop'. four Sisas and large amount of successful applicant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reating their cognition and establishing home scholarship. Their practical and collective efforts to become a noble family of Seoeol birth that represented the late Joseon dynasty, reveal a cross section of society and cultural history of late Joseon dynasty including Gwageon examin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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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본 성해응의 복수론

          孫惠莉(Son, Hye-ri) 진단학회 2012 진단학보 Vol.- No.115

          硏經齋 成海應(1760~1839)은 유교적 가치 이념을 충실히 수행한 하층민들을 포착하여 그들의 사적을 전과 기사 및 인물지 등의 서사양식에 담아내는데 있어 ‘復?'를 중요한 장치로 설정하였다. 충효열 등을 실천하기 위한 주체자의 복수 행위를 문학적으로 적극 형상함으로써, 그 사적과 주제의식을 보다 생동하고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金銀愛와 江上孝女, 甲은 나이어린 연약한 여인들로써 정절과 효와 충의를 지키기 위해 직접 칼로 원수를 죽이거나 또는 무기는 아니지만 殺性을 지닌 역병으로 죽은 자의 四肢를 이용해 원수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萬石은 직접 원수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범상치 않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법에 의거하여 주인의 원수를 갚았다. 즉 성해응은 나이어린 연약한 여인과 미천한 노복들이 충효열을 실천하기 위해 복수를 감행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여 문학작품으로 형상하였다. 충효열을 지키기 위해 원수를 직접 죽이는 등의 복수를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성해응은 복수에 대한 의론을 본격적으로 펼친『復?議』에서 有司가 논의하여 임금이 사면을 판결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면받은 崔玉函을 찔러 죽인 石致圭를 비판하였다. 법에 의거하지 않은 개인의 사적인 복수를 반대한 것이다. 따라서 억울한 일이 생겼을 경우 官에 고소하여 법에 의해 복수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김은애와 강상효녀, 갑의 경우처럼 법에 의해 복수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특히 나이 어린 연약한 여성들이-에는 개인의 사적인 복수를 한정적으로 허용하였다. Yeongyeongjae(硏經齋) Seong Hae-eung(成海應, 1760~1839) set up ‘revenge' as an important mechanism to write on the deeds of the lower class who performed well Confucian values and ideas into some descriptive modes such as life(傳), story(記事) and who's who(人物誌). By aggressively embodying the revenge acts done in order to practice loyalty, filial piety and chastity. Seong highlighted their deeds and thematic sense more lively and effectively. Kim Eun-ae(金銀愛), Gangsanghyonyeo(江上孝女) and Gap (甲), all being young and frail woman, stabbed enemies to death in person to preserve their chastities, filial piety and loyalty or made enemy die of a plague using the corpse died of a fatal plague. Manseok(萬石), though not killed the enemy in person, revenged his master through by legal procedure with remarkably independent and aggressive actions. Highly rating the revenges that frail women and humble servants conducted to fulfill Confucian virtue. Seong embodied them in his literary works. He accepted the revenge, like killing the enemy in person, if it were done to preserve chastities, filial piety or loyalty. In『Boksuui(復?議)』, his book that deals with revenge in earnest, he criticized Seok Chi-gyu who stabbed Choi Ok-ham to death to revenge his father though Choi Ok-ham was pardoned by king after the discussion with relevant authorities. Thus, Seong did oppose the private revenge without recourse to law. However, in case that there was no chance to revenge legitimately in accordance to law, like Kim Eun-ae, Gangsanghyonyeo and Gap, particularly weak women, Seong allowed private revenge by self-help to a limited ex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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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大中의 『仙槎漫浪集』 硏究

          孫惠莉(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10 大東漢文學 Vol.3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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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靑城 成大中(1732∼1809)이 울진현령 시절(1767∼1770)에 저술한 『仙槎漫浪集』2책을 소개하고 내용적 특징을 규명하였다. 仙槎는 경상북도 울진의 古號로, 불영계곡.성류굴.망양정 등 뛰어난 승경지가 많은 지역이다. 성대중은 울진 현령으로 재임하면서 주변의 승경지를 두루 유람하고 그 흥취를 시로 묘사하였다. 또 공무로 原州 감영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이 곳에는 성대중의 스승인 金焌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준을 통해 蟾洲에서 閔百順.林配垕.安錫儆 등의 선배학자를 만나 주역을 강론하고 근처의 汶田巖과 翠屛山 등을 유람하며 백여 수의 시문을 창수하였는데, 이는 『선사만랑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대중은 癸未사행을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울진현령으로 부임한만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사행의 임무를 수행했던 趙曮.元重擧에 대한 시를 많이 저술하였다. 조엄.원중거와는 사행을 계기로 만난 이후 평생동안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고 世交를 맺었던 바, 이들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유감없이 시 속에 표출하였다. 성대중의 울진현령 시절은 문과에 급제한 뒤 사행을 다녀온 이후이며 순정한 학식과 고문으로 정조에게 인정받고 널리 명성을 떨치기 이전 시기이다. 즉 성대중의 청장년 시절로 학문에 대한 드높은 열정을 지니고 고귀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던 즈음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선사만랑집』에 여실히 표출된 만큼, 『선사만랑집』은 성대중의 청장년 시절 학문적 성향과 시작 경향 및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李德懋와 宋載道가 『선사만랑집』에 評語를 더하고 높이 평가했던 만큼, 『선사만랑집』의 문학적 가치 또한 주목할 만하다. This article introduced the two volumes of 『Seonsamanrangjip(仙槎漫浪集)』, a collection of poems written by Cheongseong(靑城) Seong Dae-jung(成大中, 1732∼1809) during his term of office as Uljin county governor(1767∼1770), and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contents. Seonsa(仙槎) is the old name of Uljin. As Uljin has many excellent natural scenes such as Bulyeong valley, Seongryu cave and Mangyang bower, Seong had visited them and described their charms in poems. He also had often called at on business the local government office of Wonju where his master Kim Jun(金焌) had stayed. Seong met Min Baek-sun(閔百順), Im Bae-hu(林配垕) and An Seok-gyeong(安錫儆) at Seomju(蟾洲) on the introduction of Kim Jun to discuss on the Book of Changes. Seong and three men had wrote one hundred or more poems during their sight-seeings to nearby Munjeon temple(汶田巖) and Chuibyeong mountain(翠屛山), which poems account for the major portion of 『Seonsamanrangjip』. As Seong proceeded his office in Uljin not long after accompanying Gyemi year delegation to Japan, 『Seonsamanrangjip』 uniquely contains the poems that he wrote with Jo Eom(趙曮), the official envoy, and Won Jung-geo(元重擧) the secretary who shared the good times and the bad times with him for 11 months. Because Jo Eom and Won Jung-geo had become his life long acquaintances and companions after forming ties for the first time at the delegation, Seong fully expressed the memories and yearnings for them in his works. Seong's Uljin office term, being followed by his pass of ranking officials exam and Gyemi year delegation accompanying, was the time he won recognition from King Jeongjo as well as reputation from many people for his genuine learning and archaic texts. In other words, it was the period in which he had ardent passion for learning and had pursued sublime mental world. As such basis was well expressed in 『Seonsamanrangjip』, it must be a very important and helpful material to find out his academic inclination, mental world and companionship in his manhood.

        • KCI등재

          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의 학지와 가학 전승 -창녕 성씨가의 연행과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손혜리 ( Son Hye-ri ) 한국한문학회 2021 韓國漢文學硏究 Vol.- No.82

          본고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서족 가문인 창녕 성씨 참봉공파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과정을 통시적으로 조망한 글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력이 있는 인물을 논의의 중심에 둔 바 ‘성후룡-성완-성몽량-성대중-성우증-성인호'에 이르는 6대를 주목하였다. 이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경향성이 확인된다. 첫째 대부분 당대 문인들에게 박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학한 학문 성향을 지닌 이들은 해외 체험을 통해 인식의 전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나 견문이 확장되었다. 둘째 선조의 연행 및 통신사행 기록을 숙지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빨리 새로운 지식 정보를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셋째 가문적 배경과 본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투철한 대명의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연행과 통신사행을 체험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상이다. 넷째 알레니, 마테오리치, 유구ㆍ안남ㆍ시암 사신, 『직방외기』, 『동자문』 등 이국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다섯째 두레박, 고구마, 수차 등 이국의 문물 특히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수입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창녕 성씨 참봉공파가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연행과 통신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와 이로 인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신속한 습득 및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This article prospects one of representative sub-branch family in Late Choson, Changnyong Seong Family's Chambong-gong Clan, especially about the succession of cognition and family scholarship in diachronic view. As discussion focus on personnel with experience of successful candidate of civil exam and participation in diplomatic mission to China or Japan, spotlight is on the 6 successive generation of the family, Seong Huryong - Seong Wan - Seong Mongryang - Seong Daejung - Seong Ujeung - Seong Inho. Research on records of this members implies following tendencies. First, they were recognized as highly literate from scholars of their era. Though their literacy did not advanced to transition of perception, foreign experience led them to widen their knowledge. Second, each member have wellacquainted the writings of their ancestors on diplomatic mission. Thus they were able to capture new experience comparatively fast and leave the writings themselves. Third, because of personal political inclination and family background, they had firm and clear mindset of ‘Loyalty to Ming'. This tendency existed consistent after their diplomatic mission. Fourth, they had huge interest about foreign people and studies, such as Giulio Aleni, Matteo Ricci, Diplomats from RyukyuㆍAnnamㆍSiam, Jikbangoegi, Dongjamun. Fifth, they showed active curiosity upon foreign products and cultures like well bucket, sweet potato, waterwheel, which may help welfare of Choson, and emphasized to import those culture. To put it short, it is found that quicker access to newest academic information and succession of the information within the family tree have allowed Chambong-gong Clan of Changnyong Seong Family firmly establish themselves as the prestigious sub-branch family of Late Choson.

        • KCI등재

          成海應의 「草榭談獻」 硏究

          손혜리(Son, Hye-ri) 대동한문학회 2015 大東漢文學 Vol.43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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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硏經齋 成海應(1760~1839)의 「草榭談獻」을 서지적으로 검토하고 내용상 특징과 의미에 대해 규명한 글이다. 첫째, 草野의 奇傑之士들이 인멸되는 과정과 이유에 대하여 다양한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둘째, 노비·기녀·광대·백정 등 다채로운 여성 인물이 수록되어 있다. 성해응은 이들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였으며, 나아가 창기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셋째, 입전 인물의 확장을 통해 일국적 시야를 넘어선 세계 인식을 탐색할 수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네덜란드인으로 뛰어난 사적을 남긴 이들을 기록하고, 특히 역법과 의 술 등 서양의 선진 기술을 수용하여 經世濟民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초사담헌은 성해응의 하층민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및 개명적, 실학적 사유와 인식이 표출된 저술로서 의의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content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based on the text Ch'osadamhŏn(「草榭談獻」) First, this paper studies on process and cause for disappearance of weird and preeminent scholars who live in a remote village through diverse example. Second, Ch'osadamhŏn has so many documents of female character which are excel at literary figuration included in private house woman, female servant, clown and daughter of butcher. Sŏng Haeŭng criticizes system of gisaeng(courtesans) and insists on abolishment. Third, this paper reveals a global perspective over a perspective of the nation through extension of figure. Ch'osadamhŏn records of outstanding people who live in Chosŏn, China, Japan and Namman(南蠻). He also emphasizes administrating the state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經世濟民) accepting advanced technology. So, Ch'osadamhŏn is an important text which has affective view on the lower class, and expresses thought of enlightenment and practical science (實學) by Sŏng Haeŭng.

        • KCI등재

          성해응(成海應)의 서북지역에 대한 인식과 비판 : 「속죄언(續罪言)」을 중심으로

          손혜리 ( Son Hye-ri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8 민족문학사연구 Vol.0 No.66

          본고는 정조 대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한 서족 출신의 지식인인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속죄언(續罪言)」을 중심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진단하고 19세기 전반 서북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며 제도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학적 대응을 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속죄언」은 글을 쓸 만한 처지가 아닌데 외람되이 쓴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장인재(?人才)」·「택수령(擇守令)」·「통이서(通吏胥)」·「금행민(禁倖民)」·「파기악(罷妓樂)」·「정전제(正田制)」·「정군제(正軍制)」·「축화재(畜貨財)」 등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서북지역 개혁안이다. 이러한 인식과 비판은 이후 서북지역에 부임하는 수령을 전송하면서 쓴 글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만큼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수의 세도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민(民)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던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성해응은 서북지역을 개혁하기 위한 비전과 대책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행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정책화하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이들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강조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의식의 소산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 후기 한 서족 지식인의 학적 대응을 통해 시대적 사명에 부응한 면모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cause of the Hong Kyongnae rebellion and academic response to reform institutional contradiction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of the Northern region in the early 19th century focused on Sokchoeon(「續罪言」) of Song Haeung(成海應) who was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and inspector of the archive in King Jeongjo period. Sokchoeon contains unmerited meaning, and is made up of eight books such as Changinjae(「?人才」), T'aeksuryong(「擇守令」), T'ongiso(「通吏胥」), Kumhaengmin(「禁倖民」), P'agirak(「罷妓樂」), Chongjonje(「正田制」), Chonggunje(「正軍制」), Ch'uk'wajae(「畜貨財」). It is a kind of a reform plan of the Northern region. These perceptions and criticisms are general and systematic through writing of saying farewell to a provincial governor who goes the Northern region. And it implies criticism of power politics in the early 19th century. Song Haeung had a vision to reform the Northern region, but he was not in a position to practice. So, he wanted to relieve the poor who had fallen into a state of distress through his reform. It is philosophy of governance(經世意識). It's from this point that this paper can be confirmed aspects of meeting the demands of the times for academic re-sponse to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in the late Chos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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