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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슬라브족의 형성과 분화 :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임형백 한국이민정책학회 2022 한국이민정책학회보 Vol.5 No.1

        이 연구는 인도-유럽인 중에서 슬라브족, 그리고 슬라브족중에서도 동슬라브족의 형성과 분화를 다루었다. 서로 마제국(B.C.27-395)이 멸망하면서, 슬라브족은 확산하기 시작했고, 동슬라브족, 서슬라브족, 남슬라브족으로 분화되었다. 슬라브족은 기원후 450년과 550년 사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부 세력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있었다. 슬라브족에서는 동슬라브족이 가장 수가 많다. 동슬라브족은 키예프 루스(882-1240)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략과 이후의 리투아니아대공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로 분화되었다. 몽골은 정복에는 강했으나 통치에는 약했고, 특히 키예프 루스에서는 상주하면 서 통치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위치했던 키예프 루시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면서, 당시에는 변 방에 불과했던 모스크바가 반사적 이익을 얻으면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동슬라브족의 주도권이 우크라이나에 서 러시아로 넘어갔다. 벨라루스라는 용어는 16세기 후반에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에서의 민족주의 는 유럽 지역에서 가장 늦게 태동한 것이다.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 영토, 민족, 정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하 여,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표출되었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해졌고, 러 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세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This study dealt with the formation and differentiation of slavs among Indo-Europeans and east slavs among slavs. With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B.C.27-395), the slavs began to spread and divided into east slavs, west slavs, and south slavs. It was not until between A.D.450 and A.D.550 that the slavs were completely freed from external oppression. Among the slavs, the east slavs are the most numerous. East slavs originated from the same root, Kievan Rus(Kyiv Rus, 882-1240). However, under the 13th century Mongol invasion(Kipchak Khanate=Golden Horde) and later under the rule of the Grand Duchy of Lithuania, it was divided into Ukraine, Russia and Belarus. Monglos were strong in conquest but weak in rule. Especially in Kievan Rus, they did not reside and rule. As Kievan Rus, located in present-day Ukraine, was destroyed by the Mongol invasion, Moscow, which was only a frontier at the time, grew with reflex benefits. In the process, the leadership of the east slavs passed from Ukraine to Russia. The term Belarus began to be used only in the second half of the 16th century. Nationalism in Belarus was the latest in Europe. After the dissolution of the former Soviet Union, potential conflicts were expressed due to various causes such as territory, ethnicity, and politics. In 2022, conflict intensified over Ukraine’s accession to NATO, and Russia invaded Ukraine. It is difficult for the world to go back to the pre-Ukrainian war.

      • KCI등재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의 경우를 중심으로

        최정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11 슬라브연구 Vol.27 No.2

        이 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르누보 예술의 절정을 구가한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마리아 무하의 작품 세계와 범슬라브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을 함께 관찰하려는 시도이다. 장식적, 상업적, 실용적 예술로 평가받는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라는 이념은 함께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범슬라브주의를 러시아 중심의 여타 슬라브 민족의 결집으로 통상 읽어내는 협의의 보수적 범슬라브주의가 아니라 피지배 상태에 놓은 여타 슬라브 제 민족이 자유와 평등, 독립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광의의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로 받아들인다면, 무하의 말년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부터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오히려 조국과 민족의 가치를 느끼기 시작한 무하는 만년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체코 민족의 자유와 평등, 독립을 위해 자신의 남은 재능을 모두 바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슬라브 서사시』이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인 들에게 조금은 특징적인,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지식인, 예술가의 책무 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르누보``라는 예술 양식이 서유럽 주변부 민족에게 낭만적 민족주의 운동을 추동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기존의 전통적 재현 양식을 거부하고 새롭고 젊은 양식으로 자리 매김한 아르누보라는 사조가 천부적 인권인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슬라브 세계가 ``근대``(modernity)로 진입하는 데서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KCI등재

        소슬라브민족회의(1866) 개최원인, 진행과정, 그리고 결과를 중심으로

        김장수(Kim, Jang-soo)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3 역사문화연구 Vol.48 No.-

        186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체코 정당들, 즉 구체코당과 신체 코당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지향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지시켜야만 보헤미아 왕국의 독립 역시 쟁취할 수 있다 는데 암묵적 합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정당 중에서 팔라츠키와 리게르가 주도한 구체코당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던 구체코당과 신체코당은 18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한 입장표명에서 적지 않은 간극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신체코당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원칙적으로 인정했지만 이들은 실용적 측면과 정치적 능동성을 부각시키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주력했다. 1866년 형제전쟁이 발생한 이후부터 구체코당과 신체코당 사이의 대립은 보다 가시화되었는데 이것은 신체코당이 구체코당의 주도로 개최된 소슬라브민족회의에 참여하지 않은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빈에 집결한 슬라브 정치가들은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개최되었던 슬라브민족회의에서와 같이 그들의 정치적 요구사안들을 집약시킨 선언문작성에 합의 했고 그러한 과제를 팔라츠키와 리게르에게 위임시켰다. 슬라브 정치가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더 이상 급변하는 국내 상황에 수수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그들의 민족적 이익을 보호하고 증대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팔라츠키와 리게르는 그들이 작성한 선언문에서 연방체제의 도입으로 제국 내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 민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법률적 권익옹호 역시 그러한 체제 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부각시켰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측근들은 슬라브 정치가들이 발표한 선언문 보다는 자신들의 관점, 즉 이중체제의 도입을 보다 빨리 가시화시키려는 의지만을 밝혔다. 이에 따라 1867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원화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그것에 따른 효력발휘는 1867년 6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중체제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체코 정치가들, 특히 팔라츠키를 비롯한 구체코당의 정치가들은 이 체제가 도입된 이후 그동안 견지한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범슬라브주의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슬라브 정치가들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그 동안 우려했던 제국해체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포기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슬라브 민족의 사회적•법적 지위향상이 오스트리아 제국이외의 다른 국가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하에서 체코 정치가들은 정치적 은둔생활내지는 소극정치(pasivní politika)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빈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시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Following the suppression of the 1848 revolutions in the Habsburg lands, political activity was outlawed. But the failures of this neoabsolute system, especially the losses in the Italian War in 1859, cauesd Emperor Francis Joseph I to change course. As a result, the so-called constitutional era in the Austrian Empire was launched in 1860, and provincial diets reappeared. An imperial parliament(the Reichsrat) was established in Vienna, and political parties were founded. In Prague, Czech leaders, led by František Palacký and his son-in-law František L.Rieger, created the Czech National Party. Its goals were the political autonomy of the Bohemian crown lands of the empire on the basis of the traditional state rights of the old Kingdom of Bohemia, and greater rights for Czech language and culture. This party made a tactical alliance with the conservative great landowners, who shared their desire for provincial autonomy. From its origins, The National Party had incorporated two factions, the conservative Old Czechs and progressive Young Czechs. The more conservative wing was around Palacký and Rieger. The Young Czechs questioned the need for an alliance with the landed aristocrats, and developed an interpretation of Bohemian state rights that did not emphasize its feudal aspects. They combined their demands for greater democracy with a program of strident nationalism and occasional anticlericalism designed to appeal to broad masses. At that time R.Belcredi, Statesman of the Austrian Empire, worked for a federal constitution under the Habsburg monarchy. He advocated conservative federalism under which the Slavs’ historic rights would be recognized instead of being subsumed by those of the Germans and Magyars. After succeeding Anton von Schmerling as prime minister, Belcredi revoked ‘the February Patent of 1861’ as a concession to the Slavic groups, especially the Czechs. He also established Czech as a language of instruction in the Bohemian high school, where only German had been permitted. The Seven Weeks’ war in the summer of 1866 led to the decisive defeat of Austria at Königgrätz and consequent exclusion of Austria from German affairs. Under this circumstances the Slav Politicians attended a Small Slavic Congress in Vienna, which convened on 26 July 1866. At this meeting they discussed the contemporary political matters. And they proposed the introduction of federal system and indicated the problems of dualism. But Francis Joseph I and his followers were negative about this proposal. The military disaster compelled Francis Joseph I to come to terms with the Magyars. The subsequent Ausgleich, or Compromise of 1867 transformed the Habsburg Empire into a dual monarchy. This monarchy, in effect, permitted the German- speaking Austrians and the Hungarians Magyars to dominate all other nationalities in their respective states. Many of the other national groups within the empire-including the Czechs, the Ruthenians, and the Serbo-Croatians opposed the Compromise of 1867. The most vicious critics were the Czechs of Bohemia. They favored a policy of trialism or triple monarchy. But the Hungarian Magyars vetoed this proposal for fearing that they might have to make similar concessions to their own subject nationalities. As a result, the Czech politicians began to have passive politic. This action on the Vienna Government of the Czech politicians would show strong indirect compl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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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슬라브어 성경의 동사 과거시제 비교 연구: 겐나디(1499), 오스트로크(1581), 모스크바(1663), 엘리자베타(1751) 성경의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한지형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2022 슬라브학보 Vol.37 No.1

        This study intends to examine the use patterns and changes in uses of verbs by investigating past tenses used in four bibles written in Church Slavic language, Gennadius-Bible, Ostrog-Bible, Moscow-Bible and Elizabeth-Bible that were all published in the East Slavs. To do so, two approaches were used. First, with the comparative perspectives from the Byzantine text, this study examined the usage of aorist, imperfect, perfect, and pluperfect tenses used in Church Slavic texts and checked establishment patterns. Second, 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our bibles, this study examined change patterns of the verb past tense in Church Slavic. As such, this study confirmed the uses of verb past tenses established in the Gospels as a source language, as a target language with Greek through the relationship with Church Slavic language. And based on this,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past tenses rooted in the foundation of East Slav’s Church Slavic language through the changes between aorist and imperfect tenses and between aorist and perfect tenses. As for the motif behind this change, Greek roots as an external factor and interactions with Church Slavic standards as an internal factor could be considered. Therefore, this study has its significance as it initiated the study in the development and directions of verb past tenses in Church Slavic language through the history of bible publications. 본 연구는 동슬라브에서 편찬된 4권의 교회슬라브어 완역성경, 즉 겐나디 성경(Геннадиевская Библия, 1499), 오스트로크 성경(Острожская Библия, 1581), 모스크바 성경(Московская Библия, 1663), 엘리자베타 성경(Елизаветинская Библия, 1751)의 사복음서가 제시하는 동사 과거시제를 통해 그 사용 양상과 사용 변화 추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두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첫째,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과 비교 관점에서 교회슬라브어 텍스트에 이식된 아오리스트(Αόριστος – Аорист), 임퍼펙트(Παρατατικός – Имперфект), 퍼펙트(Παρακείμενος – Перфект), 플루퍼펙트(Περσυντελικός – Плюсквамперфект)의 용법을 살펴보고 그 정착 양상을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사건의 기술에 있어 아오리스트가 골격 구조를 개관적으로 제공한다면, 이에 임퍼펙트는 지속·반복·시도적 행위를 지시함으로써 서로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4권의 성경이 맺고 있는 선·후 편찬관계를 바탕으로 동사 과거시제의 동슬라브 교회슬라브어적 변화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근원 언어로서 그리스어와 목표 언어로서 교회슬라브어의 관계를 통해 사복음서에 정착된 동사 과거시제의 용법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동슬라브의 교회슬라브어 토양에 뿌리를 내린 동사 과거시제가 정립되는 과정을 아오리스트와 임퍼펙트의 퍼펙트 시제로의 변화, 아오리스트와 임퍼펙트간의 변화 양상을 통해 확인하였다. 이에 대한 변화의 동인으로 외적으로는 그리스어 원전과 내적으로는 교회슬라브어 규범과의 상호작용을 고찰해볼 수 있었다. 특히 후자에서 아오리스트 2-3인칭에 대한 퍼펙트로의 교정은 동슬라브 교회슬라브어에서 발생되는 형태적 동음이의어를 해결하기 위한 현상으로, 결과적으로 퍼펙트 형태의 외연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는 구어의 과거시제 체계와 방향을 함께 하는 바, 17세기 교회슬라브어 문어와 러시아어 구어의 과거시제 체계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성경 문헌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본 연구는 교회슬라브어의 과거시제 발전 방향을 성경 편찬사를 통해 개관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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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러시아철학에서 ‘유라시아’ 문명 논쟁 (1) ― 슬라브주의 철학의 부활과 그 현재적 함의―

        이성백 대동철학회 2001 大同哲學 Vol.15 No.-

        이 글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철학계에 일고 있는 슬라브주의(славянофильство) 철학의 ‘르네상스’ 현상을 고찰한다. 슬라브주의는 소련 체제하에서 ‘반동적 철학’으로 규정되어 그 연구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70여년간 어둠 속에 묻혀있던 슬라브주의 철학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부터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소위 ‘포스트코뮤니즘’ 시대에 들어서서 활발하고도 대대적인 연구와 더불어 러시아 철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슬라브주의는 서구주의와 더불어 러시아 전통 철학의 양대 흐름을 형성하여 왔다. 슬라브주의는 서구 유럽과 ‘유라시아’의 문명적 차별성에 입각하여 러시아적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유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추구해 온 철학적 흐름이다. 초기 슬라브주의에서부터 소련 시기의 망명 철학자와 국내 은둔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전 슬라브주의 철학자들이 20세기 말의 신슬라브주의자들에 의해 재조명이 되고 있다. 슬라브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호먀코프는 그의 “사보르노스츠(Соборность)” 개념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신슬라브주의자들은 사보르노스츠를 슬라브주의 철학자들을 재조명하면서 발견한 최대의 보물로 간주한다. 이들은 사보르노스츠가 슬라브 문명의 독자성을 표현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한다. 러시아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심오하고 영향력있는 철학을 발전시킨 솔로뵤프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라지는데, 한 쪽은 그를 슬라브주의 계보로 보지만, 다른 쪽은 그의 “브쇼이진스트바(Всеединство, 전일성)” 개념을 서구적, 합리주의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은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해외 망명 철학자를 대표하는 베르자예프는 그의 맑스주의 비판과 관련하여 재조명된다. 소련의 해체는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퇴조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슬라브주의 철학의 르네상스는 일차적으로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퇴조로 초래된 ‘정신적 공백’을 채우려는 철학적 시도의 일환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서구주의가 제외되고, 슬라브주의만이 주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슬라브주의 철학르네상스의 현재적 함의가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난다. 슬라브주의 철학은 그 재조명을 통해 러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동원되고 있다. Es handelt sich in dieser Arbeit um die „Renaissance“-Erscheinung der slawofilen Philosophie in der russischen Philosophie nach dem Zerfall der Sowjetunion.. Das Slawofilentum wurde unter dem sowjetischen Regime als reaktive Philosophie“ beurteilt, und seine Forschung wurde streng verboten. Die Perestroika erweckte das Interesse an die slawofile Philosophie, und diese stellte sich nun in der sogenannten „postkommunistischen Periode“ als einer der bedeutenden philosophischen Strömungen heraus. Das Slawofilentum bildete mit dem Westlertum zusammen zwei herrschende Strömungen in der Geschichte der russischen Philosophie. Von der zivilisatorischen Differenz zwischen dem westlichen Europa und dem Eurasia ausgehend, strebte es danach, nämlich eine selbständige russische Philosophie zu entwickeln, die das eigene russische Leben ausdrücken sollte. Die ganze Generation der slawofilen Philosophen, die von frühen Slawofilen began, wurde von den jungen Philosophen neu beleuchtet, die man als Neo-Slawofile am Ende des 20 Jahrhunderts nennt. Chomjakow, einer der Begründer des Slawofilentums, bekommt wegen des Begriffes, „Sobornost“ eine besondere Aufmerksamkeit. Die Neo-Slawofile sehen die Sobornost als größten Schatz an, den sie aus der neuen Untersuchung der slawofilen Philosophie entdeckten. Sie behaupten, daß sie der Kernbegriff sei, der die Selbständigkeit der slawischen Zivilisation zusammenfaßt. Über Solowjow, der in der Geschichte der russischen Philosophie als größten Denker gilt, gehen die Meinungen auseinander. Eine Seite zählte ihn zur Linie des Slawofilentums, aber die andere interpretiert seinen Begriff, „Bsjoedinstwo“ als westlichen, rationalistischen Begriff. Berdjajew, der sowohl die „silberne Zeit“, als auch emigrante Philosophen repräsentiert, wird im besonderen im Hinblick auf seine Kritik am Marxismus untersucht. Die Auflösung der Sowjetunion brachte die Diskreditierung der marxistisch-leninistischen Philosophie mit sich. Die heutige Renaissance der slawofilen Philosophie kann man als einen philosophischen Versuch verstehen, der das „geistige Vacuum“ ergänzen will, das aus der Diskreditierung der marxistisch-leninistischen Philosophie resultierte.Und von der Tatsache, daß man mit der Ausschließung des Westlertums hauptsächlich nur auf das Slawofilentum Aufmerksamkeit schenkt, erkennt man die gegenwärtige Implikation der Wiederbelebung der slawofilen Philosophie : die slawofile Philosophie wird als Ideologie der russischen nationalistischen Bewegung mobilisiert.

      • KCI등재

        On Some Linguistic Features of the 'Simple Narrative Slavonic Register'

        Song, Eun-Ji 서울대학교러시아연구소 2003 러시아연구 Vol.13 No.2

        본 논문은 교회 슬라브어 레지스터의 한 종류인 소위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의 언어적 특성에 관한 개관적 연구로서 정교하고 규범적인 교회슬라브어와 대조되는 레지스터로서 허구적 서사장르에 종종 나타나는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의 주요 언어적 특성을 연구한 것이다. 필자는 이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가 주로 혼합된 레지스터의 양상을 띤다는 측면에 주목하여, 교회슬라브어의 한 변이체로서의 이 레지스터가 정교한 교회슬라브어와 어떤 언어적 차이를 보이는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는 결국 러시아표준어(문학어)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현대러시아어의 기원을 형성하는 두 가지 기본적 언어적 자원, 즉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의 폭넓은 상호근접과 수용을 가능케 하였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의 여러 가지 언어적 특성 가운데 특히 형태적인 측면과 통사적 측면을 관찰하였다. 우선 메타교회슬라브어, 특히 아오리스트와 더불어 완료분사 출신의 -л 형 과거동사의 분포와 충음화 형태의 분포를 살폈고, 두 번째로 통사적 특성을 살폈다. -л 과거의 분포적 특성 가운데 본 연구에서 새롭게 관찰된 것은 그것의 통사적 환경 (종속절)과 담화기능의 상관관계로서 이것이 -л 과거형의 기능적 영역확대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또 한편 텍스트 내에서 나타나는 -л 과거형과 특정 어휘 결합의 규칙성 혹은 일관성이 서사장르의 구술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발화동사의 특이성도 지적되었는데, 이같은 의미의 동사들은 의례적 아오리스트로 나타나고 또한 텍스트의 서두부분에 나타나는 관용적 아오리스트 역시 의례성을 부여하는 서사장르의 표지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에 나타나는 충음화 형태와 관련하여 본 연구는 비충음화 대 충음화 대립이 의미적 '한정성', '지시성', '개별성'과 연관될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더불어 여기서도 어휘적 결합이 일정한 규칙성을 띠어 구술성에 공헌한다는 측면에 주목하였다. 한편,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의 통사적 특성을 살펴보면, 등위접속과 동사중심의 구심적 특성이 그 주요한 특성으로 파악되었고 접속소사 и를 통한 연쇄사슬구조가 무표적으로 나타나며 교회슬라브어체 종속접속사나 관계사는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제시되었다. 새로운 장르의 도입과 탈규범적 사회, 문화 환경이 어울러져 언어적 실험에 우호적인 맥락을 형성하여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가 세속적 허구 서사장르의 최적의 무표적 코드로서 선택되었고, 특히, 이 단순서사체 교회슬라브어는 그 복합적 성격, 즉 그것이 문자적 전통과 규범에 무표적인 교회슬라브어와, 제고된 서사성과 잠재적 구술성에 적합한 러시아어와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코드라는 점에서 향후 현대표준러시아어의 형성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 KCI등재

        Краткое причастие действительного залога в древнерусском языке

        Й. Ф. Ким(김용화)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2002 슬라브학보 Vol.17 No.2

        본 논문에서는 교회슬라브어(문어)와 동슬라브 구어의 상호 연관성 관점에서 고대러시아 단어미 능동 분사의 통사-의미적 기능이 연구된다. 교회슬라브어 문헌으로는 13-14세기에 필사된 제1 노브고로드 연대기(시노달 필사본)가, 구어체 문헌으로는 주로 11-14세기에 작성된 고대노브고로드 자작나무 문헌이 분석된다. 필사본은 필사 사기뿐만 아니라 전 시기의 언어적 규범 역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두 문헌은 동시대적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작성 시기와 장소(고대노브고로드)가 일치하는 이 사료에는 고대러시아에 공존하는 교회슬라브어와 동슬라브 구어체계가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의 비교, 분석은 본 논문의 연구목적에 부합된다. 두 문헌에 나타난 단어미 능동 분사의 일차적 통사-의미적 기능은 일치한다: 통사적 주 기능은 종속 복문 부문의 술어적 기능이고, 이것은 주문과의 관계에서 시간, 양보, 목적, 원인, 조건, 비교 등과 같은 의미를 표현한다. 교회슬라브어와 구어에서 분사의 일차적 통사-의미적 기능의 일치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래 동슬라브어와 교회슬라브어 단어미 능동분사는 -예를 들어, 동사과거시제 체계와는 달리- 그 기본 체계에서 일치하며, 이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밀도 높은 상호 침투가 가능했다. 따라서 문헌가가 교회슬라브어 텍스트에 술어적 기능으로 단어미 능동분사를 사용할 때, 그는 인위적으로 습득된 문어적 언어의식이 아니라 분사의 이 기능을 담지하고 있는 자신의 구어적 언어의식에 의거한다. 독립여격, 제2 대격 분사, 단문의 술어로 기능하는 분사, 합성술어의 명사류 부분, 그리고 명사화한 분사는 제1 노브고로드 연대기에서만 사용된다. 이 기능들의 사용 빈도나 특성상 독립여격과 제2 대격 분사는 문어적 규범의 확고한 문법적 특징이라는 주지의 사실은 본 논문에서도 재차 입증되었다. 반면 단문의 술어로 기능하는 분사, 합성술어의 명사류 부분, 그리고 명사화한 분사는 매우 이른 시기의 문법적 현상의 흔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듯 싶다. “단어미 능동 분사 ..., 명령형 ...” 구조는 자작나무 문서에서 빈번히 장하며, 제1 노브고로드 연대기에서는 문헌가의 자연적 언어의식이 작용할 수 있는 직접문에서만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구조는 구어의 특징으로 간주한다. 분사 “хотя”는 두 문헌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형태이지만, 제1 노브고로드 연대기에서는 예증된 모든 경우에 고대러시아 분사 본래의 기능으로, 자작나무 문헌에서는 초기부터 양보적 의미의 접속사, 즉 현대러시아어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처럼 두 문헌에서 분사와 일차적 가능이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기능은 상호 영향과 침투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 기능을 전 텍스트에서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러시아 문어와 구어의 독자적 발전 공간이 기존 연구들에서 주장하는 것 보다 더 넓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두 언어 체계는 수세기 동안의 부단한 상호 영향하에서도 상호 간섭이 용이하지 않았고, 자신의 견고한 체계 안에서 고유한 언어적 특징들을 보존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구어가 고대러시아 문어의 문법적 규범 변화의 일차적 원천이라는 기존 가설을 재고할 필연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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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민족회의의 개최필요성제기와 그 준비과정

        김장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10 국제지역연구 Vol.14 No.2

        3월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헝가리 지방을 제외한 제국의 적지 않은 지역, 즉 독일연방에 포함된 지역들이 통합 독일로 편입되는 것과 그것에 따라 야기될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를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통합 독일에서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지 않고 오히려 격하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의 존속을 그들의 최우선 정책 내지는 과제로 설정했는데 그러한 것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적인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실제적으로 5월 18일부터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는 대독일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를 ‘신독일’에 편입시키는 절차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그것에 대한 대비책마련에 나서게 되었고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와 이반 쿠쿨레비치-사크신스키(Ivan Kukuljevič-Sakcinski)를 비롯한 일련의 슬라브 인사들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후 슬라브 정치가들은 슬라브 민족회의의 개최필요성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슬라브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민족만을 우선시하려는 자세를 보였고 그러한 태도는 이들 간의 의견적 대립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오스트리아 제국 내 독일인들의 반발 역시 민족회의 개최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슬라브 정치가들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 즉 연방체제의 도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슬라브 인들의 단결을 대내외적으로 알릴 최초의 민족회의를 개최했다. The Prague Slavic Congress of 1848 was a major event of upheavals of 1848 in Europe. The idea of the Congress was put forward on April 20. 1848 by a Croat Ivan Kukujevič Sakcinski and a Czech František Palacký. Soon afterwards, a similar project was proposed by Pavel Šafařík from Slovakia. Around this time Palacký was the main advocate of an idea of Austroslavism, i.e. a transformation of the Austrian Empire into a federal state, in which Slav nations would give up the idea of full political independence in favor of cultural freedom within Austria. Individual nations oppressed by the Habsburg monarchy, inspired by the French Revolution, gained confidence to fight back against the ruling class and secure individual freedom. There were many dividing issues among the individual Slav peoples, which had to do with what area of the Empie they were under, Austrian or Hungarian. The nations under Austrian rule dreaded growing German nationalism, which is what drove some of them to embrace the docrine of Austroslavism. It was in this scenario that the delegates from individual Slavic nations met to express their grievances, enhance understanding of the issues of their neighbors, and draw up a plan for further actions, on both the national and the international levels. The goals of the Congress were vague at the outset, and it was not concluded properly due to armed unrest, but it created a petition of Slavic demands to the Emperor and provided a bluepoint for international relations, where equal rights of all nations would be acknowled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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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동슬라브 문화권에서의 인쇄의 시작과 그 의의

        최정현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2023 슬라브학보 Vol.38 No.1

        In this article, we will pay attention to a man named Ivan Feyodorov (Иван Фёдоров; ок.1510-1583) called “the first Russian book-printer”(первый русский книгопечатник). The qualifier ‘East Slavic’ can be used literally because the scope of Ivan Fyodorov’s activities covers the entire East Slavic region. Estimated to be born around 1510, in his twenties he studied at the historic University of Krakow in Poland. In 1564, he succeeded in printing the first printed book of the Middle East Slavs, the Apostle(Апостол), and gained fame. Later settled in Lvov, the center of present-day western Ukraine, he produced the first printed edition of Ukraine's book(1573), and also published a spelling book(Азбука). Later, as the influence of Uniate(Униат), a joint Orthodox and Roman Catholic church, grew stronger in western Ukraine and Lithuania, he stopped printing Cyrillic books. It is a brief story, but in the 16th century, in the formation of a unified medieval East Slavic state centered on Moscow, the printing of religious texts for the entire East Slavs, from Moscow to Lithuania and Lvov, and commercial printing of spelling books for illiteracy. Ivan Fyodorov deliberately tried to weave the Middle East Slavs into the widest area, linking <Moscow–Lithuania–Lvov>, it was difficult to organize such an action. To the extent that it is difficult, he uses the medieval East Slavs as his stage for his activities and mediates them through the medium of 'print'. This study, which traces the role of Ivan Fyodorov by examining his activities at the Moscow printing bureau and the activities of his remaining disciples, will identify all the major stems of book printing in the East Slavs in the 16th century. 이번 글에서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러시아 최초의 서적인쇄자”(первый русский книгопечатник)라 불리는 이반 표도로프(Иван Фёдоров; ок.1510~1583)라는 인물이다. ‘동슬라브’라는 한정어를 쓸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이반 표도로프의 활동 범위가 동슬라브 전체 권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510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20대에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Rzeczpospolita, Речь Посполитая)의 유서깊은 크라쿠프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상태에서 40이 넘은 나이에 모스크바에서 사제가 되고, 1553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인쇄일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1564년 중세 동슬라브 최초의 인쇄본 서적인 <사도>(Апостол) 인쇄에 성공하게 되며 유명세를 얻게 되나, 이내 제자인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Петр Мстиславец)와 함께 리투아니아 공국(Великое Литовское княжество)으로 떠나게 되고(1565), 나중에는 지금의 서부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르보프에 정착하게 된다(1572). 이후 르보프에서 우크라이나 최초의 인쇄서적본을 제작하고(1573), 르보프에서는 철자집(Азбука)도 간행한다(1578). 이후, 서부 우크라아니 및 리투아니아에서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의 합동교회인 우니아트(Униат)의 영향력이 점점 거세지자 그는 키릴 문자로 된 서적 인쇄를 중단하기도 한다. 당시 70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1583년에는 비엔나까지 여행해 자신이 만든 인쇄 기계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보이기까지 하지만, 르보프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사망, 르보프에 묻히게 되었다. 간략한 소사이지만, 16세기,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중세 동슬라브 통일 국가 형성에 있어, 모스크바로부터 리투아니아, 르보프까지 동슬라브 전역을 대상으로 종교적 문헌의 인쇄와 문맹 퇴치를 위한 철자집 등의 상업적 인쇄에 이르기까지 이반 표도로프가 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이반 표도로프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16세기 중세 동슬라브의 인쇄는 이반 표도로프라는 인물로부터 모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남은 그의 제자들은 모스크바 인쇄국에서 여전히 서적 인쇄에 힘썼으며, 이반 표도로프는 <모스크바–리투아니아 공국–르보프>를 잇는, 일부러 중세 동슬라브를 가장 광역으로 엮으려고 해도 이렇게 행동반경을 짜기는 힘들다 싶을 정도로 그는 중세 동슬라브 자체를 자신의 활동무대로 삼아, ‘인쇄’라는 매체를 통해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인쇄국에서의 그의 활동과 남겨진 제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며, 이반 표도로프의 역할을 추적하는 이번 연구는 16세기 중세 동슬라브에서의 서적 인쇄의 큰 줄기를 모두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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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중재하에 의한 모듈러 건축물의 슬라브 2시간 내화성능에 관한 실험적 연구

        손승문(Son, Seung-Mun)이재승(Lee, Jae-Sung),나옥빈(Na, Ok-Pin) 한국방재학회 2021 한국방재학회논문집 Vol.21 No.2

        건축물에서 4층 이상 12층 이하 슬라브의 경우, 2시간 내화성능을 만족하여야 한다. 모듈러 건축물에서 스틸 스터드가 적용된 슬라브의 2시간 내화성능에 관한 연구는 국내에서 발표된 사례가 없다. 본 연구는 모듈러 건축물의 구조적 요소로서 스틸 스터드를 사용한 슬라브의 2시간 내화성능을 평가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시험체는 유럽과 북미에서 사용되는 전형적인 슬라브를 기초로 재설계되었으며, 45 mm 내화 보드를 활용하여 내화성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실험결과 하부슬라브에 미네랄울 140 mm를 적용한 FR-001 시험체와 하부슬라브 글라스울 100 mm, 상부슬라브 미네랄울 150 mm를 적용한 FR-002 시험체의 경우, 각각 75분과 110분에 시험체의 급격한 변형으로 인해 시험이 조기 종료되어 2시간 내화성능을 만족하지 못하였으나, 하부슬라브에 글라스울 100 mm, 상부슬라브에 미네랄울 150 mm, 슬라브에 콘크리트를 적용한 FR-003 시험체의 경우 2시간 내화성능을 만족하였다. For a floor of a building with no less than four stories and no more than twelve stories, the two-hour fire resistance performance should be satisfied. In the case of slabs with steel studs, no two-hour fire resistance performance has been proposed in Korea. In this study, the two-hour fire resistance performance of slabs with steel studs performing as structural elements of modular buildings was evaluated. These specimens were redesigned based on the typical slab used in Europe and North America by modifying the 45 mm fire-resistant board to achieve two-hour fire resistance. The experimental results showed that the FR-001 specimens with 140 mm mineral wool applied to the lower slab and the FR-002 specimens containing 100 mm lower-slab glass wool and 150 mm upper-slab mineral wool did not satisfy the two-hour fire resistance performance, owing to the rapid deformation of the specimens after 75 and 110 min, respectively. However, the FR-003 specimens containing 100 mm glass wool, 150 mm mineral wool in the upper slab, and concrete in the slab satisfied the two-hour fire resistance performance requir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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