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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南山新城碑ㆍ月城垓字碑의 再解析

        朴方龍 한국목간학회 2011 목간과 문자 Vol.8 No.-

        남산신성비는 1934년 제1비가 발견된 이래로 파편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10기가 발견되어 新羅史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비문에 치중되어 비석의 발견 경위와 최초의 立碑狀態에 대한 연구는 소홀이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남산신성비의 발견경위를 통하여 그 출토위치를 개략적이나마 파악해 볼 수 있었으며, 제9비의 발견으로 최초 남산신성비가 제작되어 성벽 안쪽에 비석의 앞쪽이 통행로에서 보이도록 세워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200여기로 추정되는 공사 참가 집단의 명칭을 기록한 종합비가 남산신성내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월성해자비는 이제까지 삼국시대 말쯤에 ‘首力知奈末’등의 몇 자 되지 않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석 조각 정도로만 생각되어 왔으나, 이를 면밀히 再判讀하고 출토장소에 대하여 검토해 본 결과 월성해자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월성해자 ‘가地區’ 축조와 관련된 일종의 工事碑로 볼 수 있어 ‘月城垓子碑’로 호칭코자 하였으며 7세기 중반 무렵에 작성된 중요한 금석문임을 알게 되었다.

      • KCI등재

        경주 남산신성의 축성현황 보고

        박종익 영남고고학회 2014 嶺南考古學 Vol.- No.69

        경주 남산신성은 신라왕경의 남쪽에 위치하는 남산에 축조된 편축식 석성이다. 해목령을 잇는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솟아 있으나, 능선상에 성벽이 입지하지 않고 동서 양사면의 골짜기를 넓게 포함하는 포곡식 산성으로 산록에 축성되어 있다. 남산신성의 축조의미는 단순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피난성으로서 방어적이며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출발을 알리는 적극적인 의지를 내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며, 아울러 신라 성곽 발달사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남산신성은 591년의 초축과 679년의 증축기록이 뚜렷한 신라 왕도의 산성이다. 현존하는 성벽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나, 체성의 축조에 사용된 성돌과 축조기법으로 보아 초축시의 성벽은 북서쪽 골짜기 한 곳에서 확인된 것을 제외하면대부분 증축시의 성벽으로 파악하였다. 증축시의 성벽에서는 대부분 장방형 내지 세장방형의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유지하면서 일부 구간에서 2열축조기법과 부분적인 보축의 확인으로 증축시기의 축조수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신라산성의특징적인 보축이 현재까지 보고되지 않고 있었으나, 최근 필자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부분적으로 기저부에서 확인되고 있어 신라의 전통적인 축성기법이 남산신성에서도 유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초축시의 체성과 증축시의 체성 입지와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 미비점이 있지만, 초축시의 사실을 보여주는 남산신성비가 현재까지 10기 확인되고 있어 차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미비점들은 해소되리라 여겨진다. Gyeongju Namsansinseong is a Pyunchooksik stone fortress built in Namsan which is located in the south of Silla’s royal district. Although the main ridge connected to Haemokryeong rises long to the north and the south, the ramparts are not located on the ridge. It is built on the foot as a Pogok style fortress widely embracing the valleys located in both slopes on the east and the west. The meaning of building Namsansinseong is not merely defensive or passive as a fortress for evacuation to cope with foreign invasion but symbolic as it implies aggressive intention to declare a departure of the new ruling system. Furthermore, we can say that it is remain that well shows an aspect of the developmental history of Silla’s fortresses. Namsansinseong is one of the fortresses of Silla Dynasty as the record clearly shows it was initially built in 591 and then extended in 679. Although the ramparts still remaining are found in many places, according to the fortress stone and construction technique used to build the fortress body, the ramparts found in a valley on the northwest side were built at the initial construction, and most of the rest were built at the extension. The ramparts built at the extension are mostly made of rectangular or slender rectangular fortress stone, and they maintain horizontal accumulation. In some of the sections, 2-row construction technique and partial Bochook are observed, and this supports it as it is the accumulation technique used at the extension. Even though Bochook, one of the crucial features of Silla’s fortresses, has not been reported so far, it was observed from the base partly as a result of this author’s latest precise earth surface investigation; therefore, we can see that Silla’s traditional fortress construction technique is also found in Namsansinseong. However, there is still limitation that this study was not able to find any accurate data with which we can figure out the fortress body at the initial construction or the location or scale of the fortress body at the extension. Despite this, it is expected that this limitation can be eliminated afterwards if further excavation research is conducted as there have been 10 stone monuments of Namsansinseong fortress found up to now which verify the facts at the initial construction.

      • KCI등재

        신라 중고기 역역동원체계의 확립과 「경주남산신성비」

        강나리 한국고대학회 2023 先史와 古代 Vol.- No.73

        본고는 신라 중고기 역역동원체계의 정비 과정과 역역동원방식을 검토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관련 금석문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건립된 「慶州南山新城碑」(591, 이하 「신성비」)의 역역동원체계를 살펴보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신성비」는 모두 10기로, 축성을 위해 지방은 村 단위, 왕경은 里 단위로 전국에서 역역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성비」의 역역동원체계는 출신지와 역할에 따라 A‧B‧C집단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 연구에서는 C집단을 Ca, Cb 두 소집단으로 세분하였다. 이를 통해 郡‧部 단위의 B집단과 城‧村‧里 단위의 C집단 상부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일련의 기술자로 구성된 C집단의 하부 역시 일정한 직명과 위계를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새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성비」의 역역동원체계는 기존의 이해보다 상당히 체계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匠尺‧工尺을 포함한 B집단과 C집단의 직명이 지역 혹은 수작집단에 관계없이 모두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신성비」 단계에 이르면 역역동원조직이 전국적으로 일원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명활성비」 단계와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동시기의 문서목간 가야5598에서도 「신성비」와 동일한 역역동원체계가 확인되므로, 「신성비」 단계의 역역동원조직을 중고기 역역동원체계의 완형으로 볼 수 있다. This paper is designed to examine the labor mobilization system of the <Namsanshinseongbi Monuments in Gyeongju(591)>. The mobilization system of the <Shinseongbi Monuments> is generally understood by dividing it into A/B/C groups according to place of origin and role, but in this study, the C group is subdivided into two sub-groups, Ca and Cb. This allows us to newly confirm the fact that the upper part of Group B and Group C were organically linked, and that the lower part of Group C also had certain job titles and ranks. Thus, the mobilization system of the <Shinseongbi Monuments> consisted of a much more systematic organization than previously understood. In addition, the fact that the job titles of Groups B and C appear the same on all monuments suggests that the labor mobilization system was unified nationwide at the time of the <Shinseongbi monuments>. These characteristics indicate a clear difference from the <Myeonghwalseongbi Monuments>. In addition, since the same mobilization system as that of the <Shinseongbi Monuments> is also found in the Gaya 5598 of the same period, the mobilization organization at the <Shinseongbi Monument> stage can be regarded as the completed mobilization organization of the labor mobilization system in the middle ancient period of Silla.

      • KCI등재

        中古期 新羅 築城碑의 연구

        하시모토 시게루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5 No.-

        본고는 신라가 왕경을 방어하는 산성을 쌓았을 때 세운 비석인 남산신성비(591년)와 명활산성비(551년)에 관한 연구다. 원비 조사를 통해 판독문을 수정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비문 내용을 재검토했다. 남산신성비에 대해서는 歷名部分을 4집단으로 나눠서 검토했다.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인 A집단에 대해서는 邏頭가 새로 신라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지방관의 인원수가 비문에 따라 다른 것은 지방지배 방식이 지역마다 달랐던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제9비에 지방관이 안 보이는 것은 仇伐 지역이 일찍 신라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군 레벨의 지방민 책임자인 B집단에 대해서 제1비의 「郡上村主」는 지금까지 「郡中上人」과 같은 것이며 군 레벨 재지유력자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郡中上人인 村主」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신라 중고기 금석문에 보이는 촌주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촌주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또 匠尺이나 文尺도 군중상인이라는 役名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성ㆍ촌 레벨 책임자인 C집단에 대해서는 役名으로 「城徒上人」과 「村/里作上人」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밝혔다. 또 성 안에는 몇 개 촌이 존재하는 사례가 보이지만, 촌의 경우에는 그런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종래 지방제도에 있어 성과 촌은 동등하다고 생각되어 왔는데 성과 촌의 위상은 달리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술자인 D집단에는 「面石, 胸石, 不石, 小石」의 네 가지 유형의 기술자에 대한 명칭이 있었고 비문마다 기술자의 구성도 달랐다. 이는 축성담당 장소의 난이도에 의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종래 비문에 적혀있는 사람들 이외에 많은 雜役夫가 있었다고 추정해 왔는데 축성에 관한 사료를 살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전국의 성ㆍ촌에서 축성을 위해 7명씩 균등하게 동원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활산성 단계에서는 군에 파견된 지방관은 1명뿐이며 군 안의 力役動員은 재지유력자한테 맡겨졌다고 추정했다. 명활산성비와 남산신성비 사이의 40년이란 기간 동안에 신라 왕권의 지배력이 성ㆍ촌까지 침투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 KCI등재

        中古期 新羅 築城碑의 연구

        橋本 繁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5 No.-

        본고는 신라가 왕경을 방어하는 산성을 쌓았을 때 세운 비석인 남산신성비(591년)와 명활산성비(551년)에 관한 연구다. 원비 조사를 통해 판독문을 수정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비문 내용을 재검토했다. 남산신성비에 대해서는 歷名部分을 4집단으로 나눠서 검토했다.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인 A집단에 대해서는 邏頭가 새로 신라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지방관의 인원수가 비문에 따라 다른 것은 지방지배 방식이 지역마다 달랐던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제9비에 지방관이 안 보이는 것은 仇伐지역이 일찍 신라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군 레벨의 지방민 책임자인 B집단에 대해서 제1비의 「郡上村主」는 지금까지 「郡中上人」과 같은 것이며 군 레벨 재지유력자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郡中上人인 村主」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신라 중고기 금석문에 보이는 촌주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촌주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또 匠尺이나 文尺도 군중상인이라는 役名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성ㆍ촌 레벨 책임자인 C집단에 대해서는 役名으로 「城徒上人」과 「村/里作上人」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밝혔다. 또 성 안에는 몇 개 촌이 존재하는 사례가 보이지만, 촌의 경우에는 그런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종래 지방제도에 있어 성과 촌은 동등하다고 생각되어 왔는데 성과 촌의 위상은 달리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술자인 D집단에는 「面石, 胸石, 不石, 小石」의 네 가지 유형의 기술자에 대한 명칭이 있었고 비문마다 기술자의 구성도 달랐다. 이는 축성담당 장소의 난이도에 의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종래 비문에 적혀있는 사람들 이외에 많은 雜役夫가 있었다고 추정해 왔는데 축성에 관한 사료를 살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전국의 성 촌에서 축성을 위해 7명씩 균등하게 동원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활산성 단계에서는 군에 파견된 지방관은 1명뿐이며 군 안의 力役動員은 재지유력자한테 맡겨졌다고 추정했다. 명활산성비와 남산신성비 사이의 40년이란 기간 동안에 신라 왕권의 지배력이 성ㆍ촌까지 침투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 KCI등재

        연구논문 : 중고기(中古期) 신라(新羅) 축성비(築城碑)의 연구

        하시모토시케루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5 No.-

        본고는 신라가 왕경을 방어하는 산성을 쌓았을 때 세운 비석인 남산신성비(591년)와 명활산성비(551년)에 관한 연구다. 원비 조사를 통해 판독문을 수정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비문 내용을 재검토했다. 남산신성비에 대해서는 歷名部分을 4집단으로 나눠서 검토했다.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인 A집단에 대해서는 邏頭가 새로 신라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지방관의 인원수가 비문에 따라 다른 것은 지방지배 방식이 지역마다 달랐던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제9비에 지방관이 안 보이는 것은 仇伐 지역이 일찍 신라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군 레벨의 지방민 책임자인 B집단에 대해서 제1비의 「郡上村主」는 지금까지 「郡中上人」과 같은 것이며 군 레벨 재지유력자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郡中上人인 村主」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신라 중고기 금석문에 보이는 촌주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촌주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또 匠尺이나 文尺도 군중상인이라는 役名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성ㆍ촌 레벨 책임자인 C집단에 대해서는 役名으로 「城徒上人」과 「村/里作上人」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밝혔다. 또 성 안에는 몇 개 촌이 존재하는 사례가 보이지만, 촌의 경우에는 그런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종래 지방제도에 있어 성과 촌은 동등하다고 생각되어 왔는데 성과 촌의 위상은 달리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술자인 D집단에는 「面石, 胸石, 不石, 小石」의 네 가지 유형의 기술자에 대한 명칭이 있었고 비문마다 기술자의 구성도 달랐다. 이는 축성담당 장소의 난이도에 의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종래 비문에 적혀있는 사람들 이외에 많은 雜役夫가 있었다고 추정해 왔는데 축성에 관한 사료를 살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전국의 성ㆍ촌에서 축성을 위해 7명씩 균등하게 동원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활산성 단계에서는 군에 파견된 지방관은 1명뿐이며 군 안의 力役動員은 재지유력자한테 맡겨졌다고 추정했다. 명활산성비와 남산신성비 사이의 40년이란 기간 동안에 신라 왕권의 지배력이 성ㆍ촌까지 침투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本稿は、新羅が王京を防禦する山城を築いた際に建立した石碑である南山新城碑(591年)と明活山城碑(551年)に關する硏究である. 原碑調査に基づいて釋文の再檢討をおこない、その成果に基づいて碑文の內容理解に努めた. 南山新城碑については、歷名部分を4集團に分けて檢討した. 王京から派遣された地方官であるA集團について、地方官の一つである邏頭は、新たに新羅領となった地域に派遣された可能性を提起した. また、地方官の人數が碑文によって異なっているのは、地方支配の方式が地域によって異なっていたことを反映したものと考えられる. 特に、第九碑に地方官が記されていないのは、この地域が早い段階で新羅領になっていたためであるとみられる. 郡レベルの地方民の責任者であるB集團について、第一碑の「郡上村主」は、これまで「郡中上人」と同義語であり郡レベルの在地有力者であるという理解が通說となってきたが、「郡中上人である村主」の意味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それによって、六世紀の金石文にみえる村主は、非常に限られた事例しかないことになり、從來の村主理解は、根本から再檢討される必要がある. また、匠尺や文尺も、郡中上人に含まれると推測した. 城·村レベルの責任者であるC集團については、冒頭の役名に「城徒上人」と「村作上人」という使い分けの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また、城のなかにはいくつかの村が存在する事例がみられるが、村の場合にはそうした例が確認されない. したがって、從來、地方制度において城と村は同等であるとされてきたが、城と村の位置づけは異なっていたと考えられる. 技術者であるD集團については、「面石、胸石、不石、小石」の4種の技術者名が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碑文によってこれら技術者の構成は異なっており、築城擔當箇所の難易度の違いによるものと推定される. そして、從來、碑文に書かれた人物以外に多くの役夫がいたものとされてきたが、築城に關する史料からはそのようには考え難い. むしろ、全國の城·村を單位に均しく七人を動員したことを評價するべきである. 明活山城碑の段階では、郡に派遣された地方官は一人のみであり、郡內の力役動員は在地有力者に委ねられていたと考えられる. 明活山城碑から南山新城碑への40年間に、新羅王權の支配力が、郡から城·村へと浸透していったことが明らか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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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조사된 경상도 지역 석축산성(石築山城)의 축성법 검토

        박종익 국립문화재연구원 2013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Vol.46 No.4

        Myeonghwalsanseong Fortress and Namsansinseong Fortress in Gyeongju are one of the few that have accurate records of when and who constructed the structures. Based on the monument commemorating the construction of Myeonghwalsanseong Fortress and the construction technique and structure of the fortresses confirmed through excavation survey, it can be induced that Myeonghwalsanseong Fortress was built prior to the 7th century. Meanwhile, Namsansinseong Fortress is believed to have been erected in 679, with the exception of one part of the wall found in the northwestern valley that was built during the first construction period of 591. Referring to the construction method of these fortresses in the royal capital, Gyeongju, various recentlystudied fortresses were reviewed to estimate the construction periods. As a result, Haman Seongsansanseong Fortress, which takes similar form with Myeonghwalsanseong Fortress,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during the mid-6th century based on the construction method and supplementary work method(i.e. Bochuk). Yangdongsanseong Fortress in Gimhae and Singisanseong Fortress, similar in their construction method, are also believed to be from the same period. Meanwhile, Jusanseong Fortress of Goryeong, despite the similar construction technique used, the construction technique used for Bochuk or limited Bochuk imply a time gap. Separately, most of the remaining walls of Namsansinseong Fortress appear to date back to the additional construction period, and Sageunsanseong Fortress in Hamyang and Dadaesanseong Fortress in Geoje that show similar construction method are set for the same period. Such conclusion was drawn from straight layer piling using the refined rectangular stones found in the fortress and the supplementary part remaining thereof. In addition, the study discovered a cross-section triangular water hole at Yangdongsanseong Fortress in Gimhae and Sageunsanseong Fortress in Hamyang and the trace of wooden fences constructed before the construction of stone-wall, reaping outcomes rarely found in this region. 신라의 산성 중 정확한 축성시기와 주체를 밝힐 수 있는 것은 경주의 명활산성(明活山城)과 남산신성(南山新 城) 등 몇 개소에 불과하다. 명활산성은 작성비와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체성의 축조기법과 보축을 기준으로 7 세기 이전의 산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산신성의 경우 북서 골짜기에서 찾은 초축시기(591년)의 석축 성벽 한 곳을 제외하면 증축시기(679년)로 추정하였다. 경주 왕도에 있는 이들 산성의 축성방법을 기준으로 최근 조사 된 각종 산성의 축성모습을 검토하여 축조연대를 추정하여 보았다. 그 결과 명활산성의 축조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은 축조방법과 보축 등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보았고, 이와 축조수법이 유사한 김해 양동산성(良洞山城)과 양산 신기산성(新基山城)을 비슷한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만, 고령의 주산성(主山 城)을 살펴보면 축조수법이 이들과 비슷하지만, 보축의 축조기법과 제한적인 보축에서 다소 시기차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과는 별도로 남산신성에서 확인되는 잔존성벽 대부분을 증축시기의 것으로 보고 이와 유사한 축조수법 을 보이는 함양 사근산성(沙斤山城)과 거제 다대산성(多大山城)을 동시기로 설정하였다. 체성에서 확인되는 치 석된 장방형의 성돌로 바른층쌓기한 점과 형식적으로 남은 보축을 설정근거로 하였다. 또한 김해 양동산성과 함양 사근산성에서의 단면 삼각형 수구, 김해 신기산성에서는 보축이 있는 석성축조에 앞서 선축된 목책의 흔 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조사성과를 확인하였다.

      • KCI등재

        雁鴨池出土 碑片에 대하여

        이호선(Lee Ho-sun) 한국서예학회 2005 서예학연구 Vol.6 No.-

        한국고대사 분야의 관련 사료가 지극히 빈약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연구자들은 기존의 사료를 면밀하게 분석하거나 때로는 歷史理論이나 比較史學的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자료 출현을 학수고대한다. 현재로서는 새로운 내용을 담은 고대사 관련 史書의 출현은 여러 가지 사정상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보면 대체로 金石文이나 古文書가 주로 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와 같은 새로운 자료가 간혹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출현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을 흥분시키고 침체된 분야에 활기를 불러 넣기도 하였다. 과거 <丹陽新羅赤城碑>, <蔚珍鳳坪新羅碑>, <迎日冷水里新羅碑> 등은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雁鴨池 碑片의 자료는 그 내용이 방대하지 못하여 굵직한 금석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많은 연구를 통해 한국고대사 분야에 새로운 知見을 더해 주는 활력소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75년 신라 왕도였던 慶州의 雁鴨池 발굴을 통해서 이 雁鴨池 비편이 발굴되었는데, 통일기의 수많은 생활용품과 함께 50여 점의 목간과 더불어 출토된 것 이었다. 비편은 처음 출토되었을 당시에 별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1978년 간행된 『雁鴨池 발굴조사보고서』에서도 비문의 판독이나 상태 등 분석이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은 채 2매의 도판만이 게재되었다. 이후 이 비편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南山新城碑>7비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南山新城碑>와 기재양식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 되면서 이 비편을 <南山新城碑>의 하나이거나 아니면 <明活山城碑>의 하나로 추정하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완전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비편은 어느 비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는 글자가 몇 자 되지 않아서 그 판단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 동안 서체를 통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다. 기왕의 연구에 한 두 줄의 서체에 관한 언급이 있었을 뿐이다. 서체에 관한 분석을 통한 연구의 필요성이 요청되어 왔지만 그 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비였기 때문에 거의 연구가 이루어 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 雁鴨池 碑片은 비록 글자 수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한국 고대 금석문에 나타나는 내용과 형식을 보여 주고 있어서 귀중한자료라 할 수 있다. Anapji(pond) was excavated through unearthing process held by Kyongju Investigetion Committie of historic place approximately for one year; from March 1975 until the same month in 1976. The historic remains dug out caught scholars’ attention. Particularly, it was an epochal event that for the very first time in Korea that a wooden pipe was unraveled. This fragment of the monument was found coincidentally from an Embankment, however did not caught much attention at that time. Without any explanations about the circumstances of the excavation of the illustration, it was merely displayed in the Reporte of Anapji(pond) Excavation Investigation. Because this fragment resembled the structure which was reported of the Monument of <Namsansinseong>(Mountain Fortress), it was named as Monument 7 of <Namsansinseong>(Mountain Fortress), thereafter. However, this was highly controversial within the scholars. Moreover, it was difficult to interpret since it was no more than just a small fragment with few words remaining. Research, up until now, was done through comparing and analyzing the contents on the fragment. This thesis will provide analysis of the penmanship based on the result induced by the researches and contribute to the interpretation of the fragment. It was considered, at the beginning of excavation, that this fragment is part of Monument of <Namsansinseong>(Mountain Fortress); however it is now commonly viewed as a portion of Monument Commemorating Construction of <Myeonghwalsanseong> that was founded in the year between 541 and 544. One of the evidences of this is because it was since year 561 that 之 started to appear on 干郡經緯that also appears in Daegu Monument commemorating build of defense bank with Inscription of Musul and Monument 9 of <Namsansinseong>(Mountain Fortress). In this point of view, the estimation of the monument’s foundation should be reconsidered. This monument is less 'square-hand' writing than that of Monument Commemorating Construction of <Myeonghwalsanseong>. In the case of 兮, it is considered less 'square-hand' writing when the bottom stroke is more curved. This monument should not be judged as Monument commemorating Construction of <Myeonghwalsanseong> but should be named as a fragment found in Anapji(pond) or view it as a thoroughly different monument and wait until other monuments to be discovered

      • KCI등재

        6세기 중반 신라 丹陽 赤城의 景觀

        백종오 한국고대학회 2019 先史와 古代 Vol.- No.61

        This study investigated landscapes of Jeokseong Fortress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based on the current status and investigation results of Danyang Jeokseong Fortress. It was started from the suspicion whether the proposition, “Jeokseong(monument)=Silla Dynasty (6th century)=Stone-piled Fortress” is rational. In general, most of the stone-piled fortresses in Silla Dynasty scattered over Imjin River, Han River, and the Sobaek mountains were known as a fortress buil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to the middle of the 7th century. It was mainly because of the undefined location of the fortresses based on the records in literature and Danyang Jeokseong Stone Stele of the Silla Dynasty. The representative examples of such fortress were Samnyeon Fortress in Boeun and Jeokseong Fortress in Danyang. First, this study studied Jakseongbi(551 A.D) in Myeonghwal Fortress and Namsan Sinseongbi(591 A.D) for reference. These monuments have the significance in that they were built in the transition period changing from earthen fortress to stone-piled fortress, with the purpose of maintenance and repair of stone-piled fortresses. Based on that, it is assumed that the defense system of a royal castle was completed when stone-piled fortresses were built in the east, south, and west of Gyeongju surrounding Gyeongju Basin in the middle and late period of the 6th century when Jakseongbi in Myeonghwal Fortress and Namsan Sinseongbi were built. It is also assumed that local key fortresses could have been built with stones after the 7th century and stone-piled fortresses have been built after the mid of 7th century. As for the excavation research of Danyang Jeokseong Fortress, parts of the earthen wall were identified and we could see the traces of an earthen barrier. It was highly likely that they were initially built as an earthen fortress and they were built as a stone-piled fortress after the mid of 7th century. As if to disprove it, there found traces of earthen-piled barriers in two spots of the inner part of the south wall of Samnyeon Fortress. Other cases include earthen-piled barriers of the west wall of Yiseong Fortress in Okcheon, partial remodeling of the outer surface of an earthen wall to stone walls, and the Gangmundong earthen fortress in Gangneung. Therefore, Jeokseong Fortress in Danyang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reminded us of Jeokseong Stone Stele facing Jukryeong, adjacent to the east earthen wall casting the landscape of earthen fortress. It is necessary to work on summarizing the lineage of building methods of the earth-piled and stone-piled fortress of the late 5th century to the 7th century in Silla Dynasty. It is required to do in-depth studies on those issues. As for the earth-piled and stone-piled fortresses built in the times when the Silla Dynasty expanded to the basin of Han River, it is required to keep finding the prototype of the original fortress wall built ahead of current extended and reinforced walls. 본 고는 단양 적성의 현황과 조사 성과를 토대로 6세기 중반 적성은 어떠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는 그 동안 막연히 ‘赤城(碑)=新羅(6世紀)=石築山城’이라는 공식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임진강에서 한강과 금강, 그리고 소백산맥 일대에 분포한 신라 석축산성의 대부분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쌓은 성들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문헌기록에 근거한 산성의 위치 비정과 단양 신라 적성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심에 報恩 三年山城과 丹陽 赤城이 있다. 이와 관련해 明活山城 作城碑(551년)와 南山新城碑(591년)가 참고된다. 이들 축성비는 토축산성에서 석축산성으로의 변화 시점에서 석축산성의 유지 관리에 목적을 두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명활산성 작성비와 남산신성비가 세워지는 6세기 중후반 들어 경주 분지를 둘러싸고 명활산성 석축구간 신축과 남산신성 신축, 서형산성 수․개축 등 경주의 동쪽과 남쪽, 서쪽 등에 석축산성이 축조되면서 왕경 방어체계가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로보아 지방 거점성의 石築化는 7세기 이후,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단양 적성의 최근 시굴 결과, 토축 성벽이 일부 확인되었고 육안상으로도 토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초축 당시에는 토축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현재의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반증하듯 보은 삼년산성의 경우, 남벽 내측구간 2개 지점에서 판축토루가 발굴된 바 있고 옥천 이성산성도 서벽부 판축토루와 외벽의 외면만 석축으로 개축(토심석축)한 사례가 있다. 물론 강릉 강문동 토성, 양산 순지리토성 등도 그 예에 속한다. 따라서 6세기 중반의 단양 적성은 토축산성의 전경과 함께 동벽부에 인접하며 죽령과 마주한 적성비를 연상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신라 토축산성 및 석축산성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걸친 축성방식에 대한 계보적인 정리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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