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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마음’과 현대적 수용의 문제

        신연우(Shin Yeon-Woo)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4

        퇴계 이황(1501~1570)이 가장 중시한 책은 󰡔심경(心經)󰡕이었다. 󰡔심경󰡕의 핵심은 ‘심(心)’과 ‘경(敬)’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순수하기만 한 마음이 오염되고 위축되었다. 퇴계는 순수한 자연과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그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을 퇴계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에서 보여주었다. 퇴계가 60세 경에 지은 <도산십이곡>에는 퇴계의 마음이 드러나 있으며 마음에 대한 퇴계의 사상을 읽어볼 수도 있다. 본고는 <도산십이곡>을 통하여 퇴계 이황이 제시한 마음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 당대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다. 나아가서 현대적으로 수용 가능한 지점을 살폈다. 퇴계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크게 달라서 퇴계도 오늘날을 산다면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없던 새로운 학문의 성과도 수용해서 재조명하면서 또 다루었다. 도산십이곡의 마음을 따라 가는 것은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에 휩쓸리지 말고 인간 내면의 고요함을 찾고 자신의 마음이 주체가 되어 세계와의 합일을 능동적으로 확보하자고 말할 수 있다. 현대 학문의 추이에 발맞추어 인간의 마음이 한 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퇴계의 주장은 통하는 바가 있기도 하다. 퇴계 학문의 특징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진화 과정에서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본능과 사회를 이루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현실성 속에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능력을 신장해 온 사회성이 두 방면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를 위한 욕망은 칠정에 가깝고 사회에 기여하는 노력은 사단에 가깝다. 그러나 주리론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 속에서 마음과 리의 능동적 작용을 통해 자아를 세워야지 객관 상황을 무시하고 옛 성현의 마음이나 리만으로 세계를 포섭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마음을 고정시키고 불변의 진리를 주장하고 성현을 따라야 한다는 교훈으로 흐르는 것도 잘못되는 것이다. 두 개처럼 보이는 마음도 사실은 마음 밖의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늘 변화한다. 심지어 자아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뇌가 설정한 가상세계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자아는 하나가 아니며 그 범위는 신축성이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오늘날의 변화된 현대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고정된 마음이 아닌 진행형으로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Toegye LeeHwang(1501-1570), a major Neo-Confucian Scholar of Joseon dynasty, composed <Tosan 12 songs> in his late years. We can search his thoughts about ‘mind’ in that poem. It is still meaningful for us to understand the ‘mind’ in <Tosan 12 songs>. The songs tell us to look into deep inside ourselves, find the tranquility of our mind and secure the unity with the outer world, not being swept away with capitalism, science and technology of this world. For the excessive desire and consumption destruct the eco-system of the world and fail human relation, Toegye’s idea can help us to avoid the blind impulse, give us the peace of mind. Toegye divided human mind into two levels, Four Beginnings and Seven Emotions, which are derived from different spring. It corresponds to modern theory of socio-Darwinism which explains that human mind developed two aspects; the selfish instinct to maximize his own advantage and the altruistic capacity to contribute to his community as he could exist only by the group or society from the beginning of human history. Desire for his own self is near Seven Emotions and capacity to contribute to society, Four Beginnings. It is the base of Toegye’s idea shown in his philosophy and <Tosan 12 songs>. However, we ought to not to return to his theory as it is. It could happen subjective idealism and may cause anachronistic fallacy. We should find out our ‘Self’ in our modern society of capitalism and Technology unavoidably. It is also wrong to admonish like; to fix human mind, maintain unchangeable truth, follow the sages of the past. Minds appeared as two levels is newly formed by the relation with the outer world and always changes. The Self is said that it is not substantial and a virtual world which our brain sets up for our existence. We have to understand the idea of LeeWhang and his <Tosan 12 songs>. but aware of the ‘mind’ as a present process in this modern world. We should read <Tosan 12 songs> in the eyes of our own contempor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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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학십도 제6도 「心統性情圖」의 판본․방위문제와 감정이해방식에 관한 연구

        김성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9 규장각 Vol.54 No.-

        퇴계의 『聖學十圖』는 사칠논변을 거쳐 퇴계의 사상이 응축된 만년의 저서로서 퇴계의 진의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는 理와 氣, 心․性․情, 四端과 七情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핵심자료이다. 그러나 현재 연구되고 있는 『聖學十圖』 「심통성정도」의 판본을 보면 그림에 다소 차이가 있는 판본이 각각 연구되고 있다. 퇴계 『聖學十圖』 「심통성정도」 중도는 수정한 판본과 수정 전의 판본이 있는데, 오늘날 성학십도 연구자들은 그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심통성정도」의 上圖는 林隱 程氏가, 中圖와 下圖는 퇴계가 그렸다. 퇴계는 중도를 처음에는 禮가 북쪽에, 智가 남쪽에 위치하도록 그렸는데, 이후 智가 북쪽에, 禮가 남쪽에 위치하도록 바꾸었다. 이 내용은 『退溪集』에 실린 「心統性情中下二圖改作圖」에 살펴볼 수 있다. 퇴계가 개정하고자 했던 이유를 살펴본다면, 四七論辯의 발단이 되는 天命圖 수정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퇴계는 天命圖說後敍에서 천명도 방위가 기존 河圖․洛書와 뒤바뀐 이유를 主賓의 관계로 설명하는데 「심통성정도」 중도 역시도 이와 같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퇴계가 본래 말하고자 하던 바가 가려져 있다면 그 의도를 살펴 수정한 본의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聖君이 되기를 희망하며 임금께 올린 『聖學十圖』지만, 어쩌면 오늘날 우리 모두가 聖人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퇴계의 본의는 아닌지 살펴볼 때이다.

      • KCI등재

        퇴계와 율곡의 철학정신

        황의동(Hwang Eui-Dong) 대한철학회 2008 哲學硏究 Vol.107 No.-

        퇴계와 율곡은 조선조 유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고, 그들의 성리학은 한국유학사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적 연구는 이미 괄목할만하다. 양자의 학설은 비교적 대비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양자의 철학적 입장과 관점이 다른데서 기인한다. 퇴계는 理氣互發을 말하고, 율곡은 氣發理乘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七對四’의 감정론을 말하고, 율곡은 칠정 속에서 사단을 보아 ‘七包四’의 감정론을 말한다. 그리고 퇴계는 氣는 물론 理의 發을 말하고, 율곡은 理의 發을 극력 부정한다. 이 문제는 退. 票의 후학들로부터 오늘날 현대 학자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논란을 야기해 왔지만, 논자가 볼 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문제는 퇴계가 말한 理發의 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퇴계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 또한 수양론에서는 퇴계가 敬을 중시하는데 대해 율곡은 誠을 통해 務實로 확충해간다. 논자는 이 논문을 통해 양자의 학설상의 차이가 주는 철학정신을 찾고자 했다. 퇴계의 철학적 입장은 가치와 윤리를 중시한데 있었다면, 율곡은 존재의 정합성 내지 理氣之妙의 涵義를 體認함에 있었다. 퇴계는 理氣互發論을 통해 사단과 칠정을 구별하고, 도덕적 특수감정과 일반적 감정의 가치적 구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사단의 근원처를 理에, 칠정의 근원처를 氣에 두어 理의 능동적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율곡은 氣發理乘을 인간과 자연 모두에 적용하고, 오직 發하는 것은 氣요 理는 그 스스로 發하지 아니하고 發하는 氣의 근본이 되고 주재가 된다 하였다. 따라서 율곡은 사단이나 칠정을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로 이해하고, 칠정 가운데에서 사단을 이해하고자 했다. 퇴계가 理의 發을 주장하는 본래적 의도가 가치론적 시각에 있지만, 율곡이 理의 發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존재론적 시각에서 形而上者의 발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퇴계는 主理的 입장에서 氣를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理의 체인, 理의 실현이 그의 철학적 목표이자 이상이다. 퇴계에게 있어 理는 神이며 절대적 가치이며 善이다. 理는 절대시되고 만물의 창조적 活物로 간주된다. 여기에 理에 대한 자발성과 능동성이 인정된다. 도덕적 본성의 자발성을 인정할 때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따라서 氣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이에 대해 율곡은 理氣之妙의 관점을 견지한다. 일체 존재란 理 없는 氣가 없고 氣 없는 理가 없다. 氣도 理만큼 중요한 존재적 의미를 갖는다. 율곡의 입장에서는 氣 없는 理는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퇴계에게서 경시된 氣의 가치와 역할이 인정되는데 특징이 있다. 퇴계는 天理로서의 理를 存養하기 위해 氣와의 협잡을 경계하지만, 율곡의 경우는 氣의 변화를 통해 理의 善을 지켜가고자 한다. 퇴계는 敬을 개인의 修己나 聖學의 요체로 중시하였다. 율곡도 敬을 말하고 있지만, 誠이 修己論의 중핵을 이룬다. 율곡은 宋學에 의해 誠이 實로 구체화 된 바탕위에서 務實로 발전시켰다. Toegye and Yulgok are Korea's representative philosophers for Confucianism. Their Sung Confucianism influenced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Philosophical doctrine of Toegye and Yulgok are compared. Toegye’s idea was developed in axiological and ethical viewpoint, Yulgok, in ontological viewpoints. Toegye was interested in reason, recognition and realization of reason. Meanwhile, Yulgok is interested in harmony and balance of reason and life force. While Toegye distinguished Sadan from Chiljung, Yulgok understood Sadan within Chiljung. Toegye emphasized the difference between reason and life force, regrading reason as higher value. Yulgok pursued harmony of vulues of reason and life force. Specifically, Toegye contended activeness of reason, which is "Igihobalsul", but Yulgok advocated "Ibakisungildosul" denying activeness of reason. In terms of Suyang theory, Toegye favors respect but Yulgok, sincerity, developing it to true substance.

      • KCI등재

        退溪 書札의 意義와 現況

        문석윤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5

        현재 전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찰(書札)은 3,118통에 달한다. 퇴계의 서찰은 퇴계의 철학과 삶의 정수를 보전하고 있는 것으로서 조선유학사에서 퇴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그 중요성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퇴계는 서찰을 통해 자신의 도학적(道學的) 삶과 철학을 표현하였고, 시현(時賢), 지구(知舊), 문인(門人), 가인(家人)에 걸치는 동시대인들과 소통하였으며, 그 소통 행위를 통해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 혹은 도학(道學)의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퇴계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조선성리학의 형성 과정을 밀도 있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다. 퇴계의 서찰은 또한 당대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고 있다. 특히 그간의 문집 편찬에서 산절(刪節) 및 산거(刪去)된 부분들에는 그러한 생활사적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정본 퇴계전서(定本 退溪全書)』 편성 사업을 통해 그러한 부분들이 거의 모두 복원됨으로써 관련 연구를 위한 유용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urrently, the total number of the letters of Toegye(退溪) Yi Hwang(李滉) amounts to 3,118. They preserve the philosophy and the life of Toegye. Considering the status of Toegye in Korean Neo-Confucian History, their importance is indisputable. Toegye expressed his life and philosophy through them which are communicated with his contemporaries including government officials, friends, rival scholars, disciples, and family members. And through this act of communication, he was able to form a scholarly or academic community. Through the study of them, we can densely reconstruct the formation of the 16th-century Korean Neo-Confucianism focusing on Toegye and provide a more systematic and vivid approach to it. Toegye’s letters are also of value as a living and life-historical record of the time. In particular, the discarded or erased parts of them include many such life-historical records. Almost all of these parts have been restored through Jeongbon Toegye Jeonseo(定本 退溪全書, Completed Works of Toegye) project, which provides useful data for related research.

      • KCI등재후보

        퇴계 예학 관련 문헌자료의 전개양상

        한재훈 영남퇴계학연구원 2015 퇴계학논집 Vol.- No.17

        일반적으로 조선유학사에서 예학은 사계와 한강이 활동하던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화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6세기 퇴계 이황에 의해 조선 예학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처럼 퇴계는 조선 예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학과 관련한 저서 나 편찬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退溪先生喪祭禮答問』처럼 평소 문인 이나 지인들과 주고받은 왕복서 중에 예를 주제로 한 답문들이 문인 또 는 후학들에 의해 발췌ㆍ편찬되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퇴계가 예서를 남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퇴계가 예서를 저술하 지 않은 이유는 연구역량이나 수준의 문제라기보다 예서를 저술한다는 것에 대한 퇴계의 생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예란 사회적 규범과 일상의 양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에 관한 논의를 저술로 남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矯俗의 의미를 가지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사회개혁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퇴계가 예와 관련한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 부분에 지나칠 정도로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퇴계는 직접 예서를 저술하거나 편찬하지 않았지만, 문 인에 의해 편찬된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은 예학과 관련한 퇴계의 대표적 인 문헌자료로서 기능하였다. 물론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은 간행초기부 터 그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후 조선 예학의 발전에 든든한 토 대가 되어주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은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더 완벽한 형태의 퇴계 예설집을 구축 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퇴계의 후학들에 의한 퇴계 예설집 구상은 『퇴계선생상제례답문』과 거의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퇴계의 예설에 대한 수요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 고 『퇴계선생상제례답문』 이후 세대들은 지속적으로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을 수정하고 보완하되, 특히 類編 형식을 지향하면서 考閱의 편의성 을 제고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퇴계 예설집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현 상은 퇴계의 예설이 조선시대에 예를 논하는 장에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고 참고자료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KCI등재

        퇴계(退溪)와 고봉(高峯)의 매화시(梅花詩) 화답(和答)의 미의식(美意識)

        신두환 ( Shin Doo-hwa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2020 漢文古典硏究 Vol.41 No.1

        이 논문은 退溪 李滉(1501~1571)과 高峰 奇大升(1527~1572)의 매화시 화답에 대한 미의식을 연구한 논문이다. 퇴계와 고봉은 26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단칠정론을 비롯해서 다양한 학문적인 교류와 토론이 있어왔다.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삼아 성리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다. 고봉은 선조임금에게 퇴계를 다시 조정으로 모셔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다. 퇴계가 선조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마지막으로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사직 상소를 수차례 올려 드디어 사직을 허락받고 도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때 고봉은 봉은사까지 따라와 같이 자면서 퇴계를 전송하며 둘이서 이별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고봉은 그 자리에서 퇴계가 서울의 건천동 우사에서 기르던 매화 화분을 주제로 시를 지어 바쳤다. 퇴계는 그 매화시에 대한 화답의 의미로 떠나는 배에 올라 마지막으로 전송하는 자리에서 이별의 정표로 고봉에게 梅花詩 8수를 주면서 화답을 해달라고 하였다. 고봉은 퇴계가 주었던 매화시 8수에 정성을 다하여 和答한 시를 지어서 부쳤다. 퇴계는 또 화답시를 지어 편지와 함께 고봉에게 보냈다. 고봉은 이에 대한 화답시를 또 지어 보냈다. 퇴계와 고봉이 이렇게 주고받았던 매화시에는 매화가 상징하는 고매한 절개와 선비정신이 들어 있으며 멋과 풍류가 넘쳐난다. 이들이 주고받았던 매화시에는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넘쳐나며 고도의 품격과 다양한 성리학적 美意識이 함의되어 있었다. This paper studied the aesthetic sense of Maehwa-poem exchanged between Toe-gye(退溪) Lee-hwang(李滉.1501-1571) and Go-bong(高峯) Gi-dae-seung(奇大升.1527-1572). Despite the age gap between Toegye and Gobong, there has been a variety of academic exchanges and discussions. Gobong systematically completed his knowledge of Neo-Confucianism by using Toegye as his teacher. Go Bong insisted to the government that Toegye should be served as a regent. Toegye, who was last present at the request of King Seonjo, After working for the government, he filed several appeals for his resignation, and finally came back to his hometown after being allowed to resign. At that time, Gobong sent Toegye and wrote a poem on the theme of the Maehwa-pot that Toegye grew in Seoul. Toegye asked Giogobong to give him an answer by giving him eight Maehwa-poems as a token of farewell at the last time he was on a boat leaving. The scene of the two parting as Maehwa-poems was noble and noble. Toegye was a literary man who loved Maehwa so much that he left about 120 Maehwa poems. Gobong was sent to the eight Maehwa poems that Toegye had given to him with great care. Toegye also wrote a reply poem and sent it to Gobong along with a letter. Go Bong wrote another poem about it. Maehwa poems, where Toegye and Gobong exchanged, is full of dignity and style. The Maehwa poems they exchanged were full of intelligent and romantic poetry, imbued with a high degree of dignity and a variety of Neo-Confucian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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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後期 退溪 學派의 心學的 특징

        장윤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민족문화논총 Vol.43 No.-

        退溪 李滉(1501~1570)의 後學들이 강하게 지니고 있는 道統意識은 퇴계학파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安東을 중심으로 한 慶北 北部 지역의 퇴계 후학들은 퇴계로부터 말미암은 학문적 계보에 學的 정통성이 있다고 보며, 이러한 정통성이야말로 儒學의 참된 정신과 일치하며 또한 性理學의 핵심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자부한다. 이들이 자부하는 學的 정통성의 구체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여 ‘心學’이다. ‘심학’이라는 용어는 퇴계 자신이 스스로의 학문을 특색 짓는 말로 직접 사용하기도 하였다. 퇴계의 高弟인 鶴峰 金誠一(1538~1593) 또한 유학의 핵심을 심학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평소 子弟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학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대 학자들은 학봉을 평하여 “일찌기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심학의 요체를 얻어 들었다.”(鄭逑)라고 하였다. 그리고 鶴峰의 수제자인 敬堂 張興孝(1564~1633)의 학문 요체 또한 심학이었다. 후대 학자들은 敬堂學을 규정하면서, “敬堂선생께서 退溪 심학을 鶴峰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서 葛庵 李玄逸(1627~1704)선생에게 전수하자 영남의 학자들은 모두 갈암선생에게로 모여들었다.”(李秉遠)라고 하였다. 즉 퇴계의 심학이 鶴峰과 敬堂을 거쳐 葛庵에게까지 전수되었다는 의미이다. 갈암 이후 퇴계학파는 ‘학파’로서 색깔과 특징을 분명히 했고, 그리고 그 중심에 ‘심학’이 존재하였다. 필자는 퇴계학(파)의 특징을 심학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退溪를 心學者로 규정하고 그의 학문을 心學으로 특징짓는 데에 몇 가지 문제점이 따르기는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보다 훨씬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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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退溪)의 사칠론(四七論)에 대한 율곡(栗谷)의 비판은 정당한가?

        宣炳三 한국유교학회 2014 유교사상문화연구 Vol.55 No.-

        율곡은 퇴계의 사칠론의 2가지 병폐로 “이기호발”과 “유중감외”를 거론하며 비판을 가하는데 “이기호발”은 이기불상리의 이기론에 근거하여 이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고 “유중감외”는 율곡이 정감의 작동 메커니즘에 착안하여 사단이 안에서 나온다는 퇴계의 논리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정감의 작동 메커니즘은 율곡의 비판과는 별개로 퇴계 또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비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국 사단과 칠정이 두개의 정인가 아니면 하나의 정인가를 변론하는 데에 퇴계 사칠론의 뇌관이 자리하고 있다. “성발위정”이라는 성리학 심성론의 기본문법과는 달리 사단과 칠정은 소종래와 혈맥이 다르다는 퇴계의 주장은 두 개의 정을 인정하는 혐의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사칠론은 사단과 칠정은 소종래와 혈맥이 다르면서도 하나의 정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성립되는 것이고 율곡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본 논문에서는 율곡의 비판이 정당한지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사랑을 표현한 다양한 언어 중에서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일종의 사고실험을 해 보았다. 이를 통해 퇴계가 주장한 사칠론이 충분히 성립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李栗谷把李退溪四七論的弊病概括爲“理氣互發”和“由中感外”,即就“理氣互發”而言,栗谷根據於理氣不相離的理氣論,批評理發之主張;就“由中感外”而言,他按照情感作用的機制,反對四端由中之主張。 可是退溪也同意栗谷所主的情感作用的機制,所以栗谷對此問題的批評無有效力。 然則問題之核心在於:四端七情是一個情感,還是兩個情感的論爭。本來性發爲情是朱子學的基本原則,而退溪認爲,四端是理發,七情是氣發,四端和七情有不同的所從來和血脈,這種見解未免肯定兩種情感的嫌疑,很可能違反性發爲情的基本原則。 因此爲了辨證退溪四七論的妥當性,必須論爭四端七情是不同所從來的一個情感,栗谷堅持這種見解不能成理。本論文爲了評價關於李栗谷對李退溪四七論評價的正當性,在表達愛情之語言中,使用eros和agapē,實行一種思維實驗,得到如此的結論:退溪所主的四端七情是不同所從來的一個情感,故退溪的主張可以成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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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退溪)의 서원관(書院觀)에 대한 철학적 해명

        김형찬 ( Hyoung Chan Kim ) 퇴계학연구원 2014 退溪學報 Vol.136 No.-

        조선시대 서원의 역사에서 退溪 李滉(1501~1570)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의 서원은 周世鵬(1495~1554)의 白雲洞書院 건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서원의 역할과 의의를 재천명하여 조선 서원의 발전 방향을 세우고,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도록 함으로써서원의 공적 위상을 확립한 것은 바로 퇴계였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퇴계의 書院觀에 관해 철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재검토한다. 첫째, 퇴계가 서원의 기능 중 교육과 함께 祭享을 중시하게 된 것 은 서원들의 건립과정에서 제향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는 사실 외에도, 天命·上帝에 대한‘종교적’敬畏의 자세를 강조 하고 학문의 기본자세로서 敬을 중시했던 퇴계의 공부·수양론과 연 관해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퇴계는 과거공부에 몰두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內聖外王이 라는 유학 또는 성리학의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볼 때 과거공부와 도 학공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퇴계는 사적인 利를 추 구하는 것은 반대하였지만, 義를 추구하는 가운데 그 義에 대한 和應 으로서 얻어지는 利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학 연마의 결과로서의 관직 진출까지 반대한 것은 아니다. 셋째는 퇴계의 서원 건립 운동이 국가 차원의 정치를 포기하고 향 촌 단위의 정치로 입장을 전환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관직을 물러나 향촌에 머무는 현실적 처지에서는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겠지 만, 오히려 진리의 성전으로서 서원을 세움으로써 理一分殊的 理가 군왕의 마음으로부터 향리까지 관철되는 중요한 거점으로서 서원을 자리매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서원을 통해 현실 권력을 견제하고 공론을 형성하며 인재를 양성해 중앙정계와 향촌에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서원 건립 운동을 향촌 차원의 일로 한정지 을 수는 없다. Yi Hwang (李滉, pen name T`oegye 退溪; 1501-1570) occupies a special place in the history of the Confucian academies (Sowon 書院) of the Choson dynasty. He set the direction for the academies` development by redefining their sociopolitical role, and established their public status by obtaining the official approval of the king, even though the institutions began with Chu Sebung`s (周世鵬; 1495-1554) building of Paegundong Sowon. Based on existing research, this paper reconsiders a few concerns about T`oegye`s view of the academies from a philosophical stance. First,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T`oegye emphasized ceremonial rites as the main functions of the academies besides education, after noticing the importance of the former in establishing such institutions. However, his stress on the rites should be considered in connection with his theoryof study and cultivation, which focused on the "religious" attitude of mindfulness and awe (敬畏) toward the Mandate of Heaven (天命) or the Lord on High (上帝) and regarded mindfulness (敬) as the basic posture for study. Second, in light of the final aims of Confucianism or Neo-Confucianism, the inner sage and outer sovereign (內聖外王), the preparation for the civil service exam (kwago 科擧), and the study of tao-learning (tohak 道學) were not necessarily in conflict, even though T`oegye opposed total absorption in study for the civil service exam. He objected to the seeking of personal interests [利], but did not disapprove of the attainment of personal interests as the outcome of the pursuit of justice [義] or of public posts that resulted from tao-learning. Third, does T`oegye`s campaign to establish the Sowon indicate that his concern changed from the politics of the nation to that of the rural communal society? This shift might have been inevitable after his move from public office to living in the country. However, it could also be understood as a reflection of his effort to build the Sowon as a sacred hall of truth and the primary base of disseminating the ideology of li (理) from the king`s mind to rural areas. The meaning of his campaign for Sowon is found in his desire to check political power, develop public opinion, and cultivate people of talent in order to offer them to the political world or rural society. Therefore, the meaning of his campaign cannot be limited to the scope of the rural society.

      • KCI등재

        퇴계 철학에서 ‘理到’의 문제

        전병욱 한국동양철학회 2012 동양철학 Vol.0 No.38

        이 글은 退溪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理의 능동성’ 테제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로 활용되고 있는 ‘理到’설을 분석한 글이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리의 능동성’에 대한 긍정이 퇴계 철학의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尤庵이 퇴계의 ‘理到’설을 ‘理活物說’로 매도할 때와 마찬가지로 현대 연구자들 사이에서 퇴계의 ‘理到’설은 理가 물질적 매개 없이 시공간을 이동한다는 의미로까지 이해되곤 한다. 우암은 퇴계가 理에는 情意·計度·造作이 없다는 기본 전제를 어겼다고 비판하였고 반면 현대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퇴계가 理의 절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평가하였다. 理를 無爲之體와 至神之用로 구분하는 방식이 주자의 格物致知說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비판과 칭송이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식 과정에서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 안으로 시공을 이동하여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 대상의 理가 물질적 매개없이 시공을 이동해 인식의 주체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주자나 퇴계의 설명에 따르면 형이하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은 理의 顯行이다. 나의 인식 능력이 작동하여 타자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 내재된 理가 顯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저 개체 속의 理가 이 개체 속으로 시공을 건너뛰어 이동할 필요가 없으므로 尤庵이나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은 퇴계의 본의를 벗어나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대 연구자들 중에는 퇴계가 말한 ‘리의 능동성’이란 시공간의 능동성이 아니라 초월적 능동성 내지 형이상학적 능동성을 지칭한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하다. ‘天道流行’과 같은 서술은 理의 실재성을 강조한 표현이지 理가 특정한 의지를 가지고 형이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이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자면 ‘動靜의 理’가 動靜의 현상에 先在한다는 주장이며, 이때 ‘動靜의 理’는 動靜이라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일 뿐이지 물리 세계의 動靜에 ‘원인’으로서 작동한다는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적 능동성이나 형이상학적 능동성이라는 말도 주자나 퇴계의 개념을 설명하기에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퇴계의 ‘理到’설은 格物致知를 통합적으로 설명한 『大學或問』의 내용을 근거로 物格을 독립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약간의 ‘不自在’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理 는 死物이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天道가 流行하여 만물을 發育한다’라는 주자의 존재론을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리의 능동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통해 주자 철학과 퇴계 철학 사이에 애써 간극을 만들려고 하는 현대 연구자들의 시도는 유효하지도 않을뿐더러 퇴계의 전체 철학이 그것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철학적인 의미도 큰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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