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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집(退溪集)』 산문(散文) 편성(編成)의 체제(體制)와 『정본(定本) 퇴계전서(退溪全書)』의 산문(散文) 편성(編成)

        윤상수 ( Youn Sang-soo ) 퇴계학연구원 2017 退溪學報 Vol.142 No.-

        퇴계학연구원에서는 기존의 退溪 李滉의 문집 편성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오늘날 학계 내외의 학문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2018년 완성을 목표로 『정본 퇴계전서』 편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글은 『정본 퇴계전서』의 편성을 위하여 서간을 제외한 산문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정본 퇴계전서』는 산문의 경우, 기존 『퇴계집』의 문장 유형별 편집을 지키되 그 내부에서 고증을 거쳐 年月日順으로 편집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장 유형별 분류→저작 연대순 배열’이라는 산문의 편성 원칙을 실제 편성 작업 과정에서 일관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퇴계집』의 편성 체제 및 그 산문 편성에 대해 살펴보고 나서, 『정본 퇴계전서』의 산문 편성 과정에서 부딪히는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문 목록(안)을 제시하였다. Compiling The Critical Edition of the Collected Works of Toegye(定本 退溪全書) is in progress with the aim of completion in 2018 by the Toegye Studies Institute, to meet today’s academic need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present a table of contents for the prose, except for the letters. In case of the prose, it is the editorial principle to keep the classi-fication by literary genre of the existing Toegyejip(退溪集), and then as-certain the time when the articles were written and modify the contents accordingly. However, in order to apply the principles in the actual edit-ing process, many problems must be solved. After reviewing these prob-lems in detail, it will propose a table of contents for the p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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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退溪의 拾遺詩

        鄭錫胎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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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退溪의 拾遺詩48제 69수(이 글 맨 끝의 「題武夷九曲 圖次櫂歌韻」 1제 10수는 제외함)를 모아서 엮은 것이다. 저작 연 월이 밝혀지는 작품들부터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붙여서 먼저 엮 은 다음, 그 뒤에 저작 연대 미상인 작품들을 소재 문헌 등을 기 준으로 분류해서 이어 붙였다. 수록한 작품들은 『退溪集』 草本, 『韓國文集叢刊』과 『退溪學資料叢書』 등에 수록된 退溪와 유관한 인물들의 문집과 연보, 退溪관련 자료, 서화 관련 도록과 읍지 등 문헌 자료와 누정의 시판 등을 조사해서 찾아내었고, 그런 다 음 그 하나하나에 대한 습유 여부와 저작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저작 연월이 밝혀지는 작품들은 대부분 편자의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 1∼4(퇴계학연구원, 2001∼2006)를 통 해 이미 소개한 적이 있지만, 나머지 저작 연대 미상인 작품들 은 이번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이 글을 엮은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각 작품은 제목을 먼저 들고, 그 옆에 저작 연월과 저작 장소, 그리고 연작시의 경우는 작품 편수를 밝혔다. 2. 작품 원문은 연작시 경우만 매 작품마다 행을 달리해서 기록 하고, 한 편일 경우에는 그대로 이어서 기록하였다. 3. 작품 원문은 각 구가 나누어지는 곳에 한 칸씩만 띄어 놓았 고, 현대식 부호를 사용한 별도의 표점은 하지 않았다. 4. 각 작품에는 자료 관련 사항, 연월 고증 내용, 편집 관련 사항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해설을 붙였다. 이 글에 수록한 退溪의 拾遺詩48제 69수는 현전하는 退溪詩 2,300여수(이 글에 수록한 拾遺詩를 포함함. 하동)를 두고 본다 면, 실상 그리 많은 작품을 수집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退溪詩의 경우 『退溪集』 편집 당시만 해도 4,000수에 이를 것으 로 추정되는 2,000여제가 수집되었다가, 그 중 2,243수만 문집에 실리고 나머지는 유실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拾遺詩 는 이 글에서 찾아 수록한 48제 69수 외에도 앞으로 작품이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은 평상적으로 조사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개 인 소장 유묵 등의 형태로 말이다. 이번에 자료를 소개하는 것을 계기로, 詩뿐만 아니라 退溪의 다른 저작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데 주변의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이것은 편자뿐만 아니라, 편자가 작업자로 참여하고 있는 퇴계학연구원 정본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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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退溪詩를 통해 본 ‘學問’의 의미

        이정화 영남퇴계학연구원 2017 퇴계학논집 Vol.-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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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paper considers the correlation between poetry and scholarship. In addition, this paper analyzes the minds of enlightenment, temperance, and practice reflected in poetry. Toegye shows that it is important to control his own mind. His study is based on the mind of the scholar who intends to learn. He did not want profits, riches, or material abundance, but a poet who sought only spiritual abundance, including righteousness, honesty, and good deeds. His learning was aimed at self - perfection, and he was able to reach experiential enlightenment. Therefore, his life and poetry could provide a very pure and correct mind. The secular people suffer from mental illness due to private greed. Toegye shows in his poetry that this mind sickness can also be eliminated through the control and study of the mind. His poetry contains content to control his mind and study hard. In addition, the task assigned to him is to be a clean scholar, and his poetry is depicted in the way of practicing the Confucius' academic studies. His sincere heart has been proven by humble words and actions, and this fact has also been pursued in his poetry. 퇴계 당시에 그가 구현한 유도(儒道)의 경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었으니, 도를 환하게 바라보면서도 아직까지 도를 미쳐 못 본 듯이 갈구하였던 학자가 바로 퇴계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자세를 통해 배움에 뜻을 둔 군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에게 학문이란 위기지학을 일컫는데, 천리(天理)를 제대로 알고 이를 실천하는 삶은 자신을 수양하는 가운데 완성되는 것이다. 위기지학에 힘쓴 성현들을 존숭한 퇴계는 그들이 남긴 역대 잠언들을 직접 써가면서 평생의 수양 덕목으로 삼았으니, <경재명(絅齋銘)>이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퇴계는 성학(聖學)을 궁구함으로써 스스로 천(天)의 신명과 일치하는 깨달음의 공부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학문을 강론한(講學)> 시에서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의(義)를 견지하겠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성찰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유도의 이치를 깨닫는 학문은 자기완성을 목표로 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 방법이 핵심임을 알 수 있다. <동재에서 일을 느끼며(東齋感事 其四) 읊은 네 번째 시에는 학문에 대한 체험적인 깨달음이 잘 나타나 있다. 끊임없이 성학을 온축해가며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였던 퇴계의 내면에는 도심(道心)이 충만해 있었다. 퇴계는 참다운 스승의 가르침이야말로 수기(修己)에 뜻을 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도산에서 뜻을 말한(陶山言志)> 시에서는 학문을 강론하고 수기에 힘쓴 퇴계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데, 이러한 삶 속에서 고결한 학문 정신이 완성될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은 사리사욕을 따르는 속인(俗人)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으니, 성학을 연마해야 병든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치를 시화하기도 하였다. <달밤에 동재에서(東齋月夜)> 읊은 시는 존덕성재(尊德性齋)라는 명칭에 깃든 주자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있고 있다. 이로써 퇴계의 공부는 수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단지 안다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앎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될 때까지 몸으로 익히는 공부 즉, 실천의 공부를 행하였다. 성학에의 가르침을 토대로 실천하였던 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저녁(暮)> 시에도 반영되어 있다. <계상에서… (溪上…)> 시에 나타난 퇴계의 참마음은 겸손한 삶의 실천 의지에 의해 구현된 것이다. 퇴계시에서는 배우는 것 자체에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잘 실천하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선행의 실천을 중시한 군자의 학문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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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退溪)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수정(修正)에 관한 연구

        문석윤 ( Suk Yoon Moon ) 퇴계학연구원 2011 退溪學報 Vol.130 No.-

        退溪의 『聖學十圖』 修正은 第4圖 「大學圖」의 原圖인 陽村 權近의 「大學之圖」에 대한 것, 第6圖 「心統性情圖」의 原圖인 程復心의 「心統性情圖」에 대한 것, 그리고 그 中圖와 下圖에 해당하는 퇴계 자신의 그림들에 대한 것, 第7圖와 第8圖의 자리바꿈 등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수정에 관해 검토함을 통해 우리는 퇴계가 『성학십도』에 기울인 공력과 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으며, 『성학십도』가 단순히 기존의 선현들의 설을 집성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라 퇴계 학문의 精髓가 결집되어 있으며, 퇴계가 그를 통해 자신의 보편적인 학문의 이상을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聖學十圖』 定本의 구성을 위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퇴계의 수정 의견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海州本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This is a study on the formation of the Seonghaksipdo(聖學十圖), the compilation of Toegye(退溪) Yi Hwang(李滉), which is a collected works of Chinese and Korean Neo-Confucians including Zhu Xi(朱熹), Cheng Fu-xin(程復心) and Kwon Keun(權近). Of course Toegye himself drew some diagrams and wrote commentaries to all the diagrams respectively. More importantly Toegye sometimes revised some parts of the original texts, and even after the first print of the Seonghaksipdo he suggested some revision. In this study the author investigated what was the revision of Toegye, and tried to interpret and understand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at revision. And through this study the author also confirmed Haejubon(海州本) was the best version of Seonghaksipdo which applied all the revision of Toe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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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상(退溪像)의 변모 -초상화(肖像畵)를 통해서 본 선비상(像)의 변천에 대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퇴계학연구원 2011 退溪學報 Vol.130 No.-

        退溪 李滉(1501~1570)(이하 퇴계)의 경우에 지금까지 초상화나 영정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유통되는 천원권 지폐 속의, 현대의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초상화를 통해서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중에 간행된 한 책자에는 우리의 천 원 권 지폐에 나오는, 玄艸 李惟台(1916-1999) 화백이 그린 퇴계초상화 다른 모습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필자는 여기에 주목하여「퇴계의 초상화에 대하여- 근·현대기 ``퇴계상`` 탄생에 대한 성찰을 겸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서 퇴계라는 인물이 ``초상화`` 라는 형태로, 근현대기의 굴곡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형성되고 인식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더욱이 최근 필자는 종전의 논문에서 다루지 못했던 두 건의 퇴계 초상화를 새로이 접하였다. 한 건은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해방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이전의 내 논문을 새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초상화를 통해서 선비로서의 퇴계상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1)조선시대 1건, (2)근대기(일제강점기) 1건, (3)현대기(해방 이후 현대까지) 2건 총 4 건의 초상화를 근거로 퇴계상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살펴보고, 거기에 내재한 선비像과 그 굴곡의 단면을 논하였다. 여기서 퇴계의 초상화에는 각기 그 시대가 요구했거나 상상했던 이념들, 이미지가 잘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고정된 하나의 퇴계상은 없고, 우리나라의 복잡한 역사적 사정에 발맞춰서 거기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퇴계상이 새롭게 창출되어 왔던 것이다. 퇴계가 조선시대 및 근현대기를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儒者 혹은 老人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초상 자체의 이미지 면에서 볼 때 전통시대, 근대기에는 근엄, 위엄, 강건의 측면이 부각되고 있었으며, 현대기에 와서는 대조적으로 문약, 병약한 이미지로 왜곡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퇴계초상은, 크게 보면, 전통적 유자에서 국민적 어른·노인으로 진화해 갔는데, 이것은 각 시대가 요구한 유자로서의 퇴계상, 선비로서의 퇴계상이 달랐던 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퇴계의 초상화를 통해서 본 ``선비``의 모습은 결국 그 시대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며, 한 가지 고정된 형태로 있었던 것이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Until now, the Toegye Yi Hwang(1501-1570)` Chosanghwa, a portrait, is not found. So today, we usually imagine Toegye` shape really so through the 1,000 won bill`s, created by a modern painter Hyeon Cho Lee Yutae(玄艸 李惟台). However, a few years ago I discovered that was a new portrait of Toegye, is made by someone during Japanese Ruling Era of Korea. Then I wrote a paper. titled A Study on Tyoegye`s Portrait of Korea in Toegyehaknonjip. However, I recently have knew, in addition to this, a new two portrait of Toegye of Joseon Dynasty and modern era are existed in our country. So I decide to to improve them on the basis of these data. In addition, I think, through these portraits of Toegye reconsider a Toegyesang, Toegye image, as a Sonbi(士, a true confucian gentleman) in korean confucian context. This paper is written in awareness of these issues. Catching how to transform the image of Toegye, through portraits of Toegye, is very meaningful work, apart from studying the text of Toegye who is left. We know, In the period of our modern and contemporary, in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had needed to be established a new Toegye image for the public enlightenment, education, and governance. As shown in this paper, Toegye portrait of that era had asked each of imagination and ideology is reflected in it. So there is no one fixed Toegye image, but Toegye image have produced depending on the situation of our country. Toegye image, in common, through the Joseon Dynasty, modern, contemporary, was a senior Confucian scholars(國老) who represents Korea society. However, the image portrayed in the Joseon dynasty and modern times are hardy dignified appearance. On the other hand, we feel the image as a weakness scholars. Such this, Toegye creation of the image is currently underway, is not done. Toegye images as Sonbi, so called a true gentleman in Korea, still open in the door to whatever is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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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질의 문제로 본 퇴계와 율곡의 수양론

        이치억 영남퇴계학연구원 2017 퇴계학논집 Vol.-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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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tween Toegye and Yulgok, there exist many differences in their philosophy. Most of all, the problem with disposition in the aspect of Liqi theory and the theory of psychology shows the biggest difference. In the basic principle of Zhuxi's Neo-confucianism, 'Li and Qi are not able to separated or mingled'. Toegye specifically emphasized 'Li and Qi are not mingled.' and separated Four-Seven with Human mind and Moral mind. Thus, Toegye insisted on active role of Li. Accordingly, Toegye established moral cultivation that the embodiment of nature of heaven rather than direct treatment of nature. On the other hand, Yulgok's thought drew the theory of self-cultivation that focuses to change of disposition instead of experiencing direct embodiment of Li. About the disposition itself, Toegye considered that the already established disposition seemed to be difficult to change. On the other hand, Yulgok considered that the disposition is able to regain its original condition through temperament rectification, because of pure clarity. Toegye thought that qi from the phase of the creation was not in order, there was not only purely clear but also cloudy in order. Meanwhile, qi is more clear in original condition and unlike other beings, humans are naturally resilient and are able to regain its purity in Yulgok's view. According to Toegye, it is not possible for the nature to be changed. Becoming a sage is only achieved in direct and personal embodiment. On the other hand, Yulgok believed that one can make a vast difference through the changes of one's disposition. Thus, the theory of 'Toegye' and 'Yulgok'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moral cultivation seems to be incompatible. However,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two figures share the same scholarly goal, the two different views in those theories will be able to complement the other. 퇴계와 율곡의 사상은 리기론 및 심성론 상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곳이 수양론과 관련된 기질의 문제일 것이다. 주자 성리학의 기본 명제인 리기불상리(理氣不相離)⋅불상잡(不相雜)의 원칙 중에서 리기의 불상잡을 중시하고, 사단칠정, 인심도심을 각각 이원화해서 보면서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퇴계는 수양론 상에서 기질에 대한 직접적인 처치보다는 천리의 직접적인 체인을 중시하는 수양론을 형성했다. 한편 리의 무위(無爲)와 기발일도(氣發一途)를 주장하는 율곡의 사상 속에서는 리의 직접적인 체현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닌, 기질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교기질(矯氣質)의 수양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 기질 그 자체에 대해서도, 퇴계는 기질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변화가 어려운 것으로 보는 반면, 율곡은 기가 본래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것으로서 교기질을 통해 기의 본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퇴계는 기가 생성의 단계부터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서 원기(元氣)조차도 모두 맑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청탁의 구분이 있다고 보았다. 한편 율곡은 기의 본래 상태는 맑은 것이므로, 여타 존재와 달리 인간은 기의 본래적 상태인 맑음과 순수함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에 따르면 기질은 교정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리의 직접적인 체인과 실현을 통해서만 성성(成聖)이 가능한 반면, 율곡은 기질의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천리를 체인할 수 있다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이 기질을 둘러싼 퇴계와 율곡의 수양론은 일견 양립 불가능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두 인물의 학문적 지향점이 같고 기질 자체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두 이론 속에서 상호보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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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유학(朝鮮儒學)의 일본 전파 경로에 관한 재론(再論)

        김언종 영남퇴계학연구원 2017 퇴계학논집 Vol.- 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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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 일 양국의 여러 학자들은 임진왜란 전후 시기, 퇴계 문하의 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유학이 일본에 전해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17~8세기경 퇴계의 학문이 일본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되면서 조선 유학의 일본 수용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포장하고 그 시기를 소급하려는 의도가 작용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 유학을 전한 인물로 일찌감치 주목받은 허성의 경우 ‘퇴계의 수제자 3인 중 하나인 유희춘의 제자’라 일컬어졌지만 실상 허성의 학통은 퇴계의 학문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또한 허성 일가의 학문은 김안국, 서경덕 등의 학통을 이어 포용적이고 절충적인 성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같은 면모는 허성이 세이카를 위해 쓴 <柴立子說>에 잘 드러나 있다. 세이카가 일본 유학을 개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강항 역시 퇴계의 문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는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서인 계열에 속하여, 퇴계 문인들과는 줄곧 대척점에 위치해 있었던 인물이었다. 강항이 세이카에게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유학을 전수(傳授)했는지 그 실체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것 역시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김성일 역시 조선 유학의 일본 전파자로 관심을 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가 퇴계의 제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1590년 당시 세이카에게 조선의 유학, 그 중에서도 퇴계학을 전했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김성일이 다른 통신사 일행과 함께 세이카를 접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진 흔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진지한 학문적 교유가 있었을 가능성 역시 극히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고려할 때 퇴계의 학문으로 대표되는 조선 유학이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 특정인물에 의해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보는 종래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세이카가 퇴계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세이카가 퇴계학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직접 천명할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으며 이런 이유로 세이카가 퇴계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임진왜란 도중 반출된 조선의 서적들이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유통되기 시작되면서 조선 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7세기 이후 잦은 통신사행이 이루어지면서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Many scholars across Korea and Japan states Korean Confucianism was transmitted to Japan by scholars raised by Toigye about the time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owever, it is the aftermath of the attempt to dramatize the spread of Korean Confucianism, and claim the impartation had taken place much earlier, as Toigye’s scholarly work grabbed a huge attention in Japan during 17th to 18th century. Huh Sung, having been received a spotlight from long before by imparting Korean Confucianism to Fujiwara Seika, was often referred to as a pupil of Ryu Hee-chun, one of three students nurtured by Toigye. Yet, Huh Sung’s scholastic lineage was very different from the work of Toigye. Huh Sung and his family pursued the path paved by Seo Gyeong-deok and Kim Ahn-kook, featuring embracing and eclectic approach, which is clearly shown in Huh Sung’s writing drafted for Seika <Siripjaseol>. Kang Hang, also widely known as the one who played a crucial role in supporting Seika’s establishment of Japanese Confucianism, can hardly be called as Toigye’s disciple. Kang Hang learned from Seong Hon, and politically, belonged to the sect of Seoin. He usually stood against Toigye’s pupils. Another notable point is, it is completely obscure when and how Kang Hang imparted Confucianism to Seika. Kim Sung-il is another figure who is pointed as an introducer of Korean Confucianism. It is incontestable that he is a pupil of Toigye. Notwithstanding, it is hard to agree with the contention that he transmitted Korean Confucianism, particularly that of Toigye, to Seika in 1590. Albeit it is fact that Kim Sung-il met Seika along with Korean delegation, whether they continued interacting with each other is unproven. Moreover, it is highly unlikely for them to have devoted exchange of knowledge. Hence, the idea of Korean Confucianism, centered by the work of Toigye, introduced to Japan about the time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hould better be re-examined. Many believe Seika was directly influenced by Toigye’s scholarly work. Nevertheless, there is no clear evidence demonstrating Seika’s view on Toigye’ Confucianism. In that, it is hard to say Seika was greatly affected by Toigye. Rather, more plausible theory would be growing interests towards Korean Confucianism driven by the distribution of Korean publications taken away from the country during the war among elites in Japan, and more frequent dispatch of Korean delegation to Japan from 17th century made Toigye the most representative scholar of Korean Confucianism, more popular. Overall, further research on this topic should fo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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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退溪 文學批評 硏究의 現況과 課題

        李貞和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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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문학비평 연구의 두 축은 대체로 載道論的관점과 學問 意思가 투영된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문학이 ‘詞華’와 같 이 공교로움이나 科擧及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 퇴계의 입장에 주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心性의 바른 이치를 표현해야 하며, 심성을 바르게 도야하는데 공헌을 하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지 고민한 것에 초점을 둔 것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계의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학 비평 연구의 성과는 儒家의 전통적인 문학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君子라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퇴계의 논리를 구체 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 고전비평사에 道學者문학의 품 격을 높인 비평가로써 퇴계의 위상을 높인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있다. 둘째, 퇴계가 도학자라는 인식만을 토대로 한 연구논저와, 철 학 연구의 일환으로 퇴계 문학을 조망한 것들 가운데에는, 퇴계 가 理善氣惡이라는 인식으로 理法만 주장하여 情感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뿐더러, 현실을 도외시하고 理想만을 쫓는 고루한 사람 이라는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논의한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퇴계 역시 다른 도학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는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 자체의 個性을 살핀 논문들에서는 문 학을 바라보는 퇴계의 진면목에 한결 근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문들이 이룩한 연구성과에 의해 현재 퇴계 문학비평에의 연구 는 載道論的관점을 지닌 퇴계의 글에서도 法古와 新奇의 조화 를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비평도 社會史와 연계되어 있음 을 밝힐 수 있었으며, 杜甫처럼 民生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 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을 추적하여 그가 지닌 인 간에 대한 애정이 정감의 문학을 이끌 수 있는 근간임을 제시하 기도 하였다. 퇴계는 당시 江西詩派와 같은 騷壇의 흐름에 구애받지 아니하 고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시세계를 구축한 점은 理學으로 숭앙된 도학자로만 퇴계를 주목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요 망하는 것이 된다. 그의 학문이 爛熟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제작 한 시편 가운데서 정감이 무르녹은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정감 깊은 도학자인 퇴계 문학에 진입하는 관건이 되리라 사료된다. 퇴계의 개성이 이룩한 문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지 고민해 야 할 것이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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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비지문 연구현황과 과제

        이종호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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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세를 대표하는 대학자의 명망을 얻었던 퇴계는 70 평생에 46편의 비지문자를 남겼다. 매양 비지 청탁을 끝내 사양하여 찬 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계는 비문부작론자였다. 퇴계 는 「유계」에서 “비석을 쓰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퇴계가 말한 비석과 비문은 신도비와 신도비명에 한정된 표현이다. 퇴계는 비 문과 갈문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썼다. 비문이 갈문보다 규모가 크고 내용이 상세해야 하므로 비문찬술은 노년의 처지에서 위기 지학을 지향했던 그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을 터이다. 퇴계는 갈문을 주로 찬술했는데 일정한 찬술원칙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고문의 격례(상격과 정법)를 존중하고 내용구성에 있 어 허사를 버리고 실록(實錄)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퇴계가 갈문수사에서 중시한 대목은 ‘국촉’(局促)함이 제거된 ‘간 엄’(簡嚴)함의 추구였다. 비문보다 규모가 작기에 각자의 수효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갈문의 한계이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 해가는 길이 바로 ‘간결’함의 추구였는바, 이 역시 ‘엄격한 법도’ 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는 갈문을 써서 석면에 새 겨 넣을 때, 갈석의 공간처리에도 일정한 미학적 배려가 요구된 다고 보았다. 즉 ‘균제미(均齊美)’를 추구했던 것이다. 퇴계의 비지문 찬술태도는 한유와 구양수의 비지서사 방식에 기초해 있으면서 훗날 비지문의 전범을 보여준 농암 김창협에 의해 거듭 강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고문가들에게 하 나의 지침으로 작용했다. 향후 연구에서는 퇴계의 인간이해 태도 를 중심에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퇴계의 비지문에서 어떠 한 문학성을 운위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을 배제하면서 차분히 중세시대의 고문수사론의 범위 안에서 치밀하게 검토되 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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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교육과 퇴계서찰

        이동기,김정수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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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the educational implications of Toegye Letters(退溪書札). Toegye Letters is the best materials for understanding Toegye’s Thought. Traditional society was considered as one of the knowledge and behavior, and identified the academic and personality. Also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oegye based on traditional education of Confucianism. In some ways these current education method is different from our emotions, and actually ineffective in part. Therefore,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Toegye Letters.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are follows. First, in terms of educational purpose, Toegye Letters was very emphatic on the Jigyeong(持敬; maintained Gyeong) and ybji(立志; the decision of purpose in life) Second, in terms of educational contents, Toegye Letters was very emphatic on the Filial duty(孝) and the care(配慮), Third, in terms of educational method, Toegye Letters was very emphatic on the education of individual differences(因材施敎) and the level-based education from a fundamental knowledge to a higher rank knowledge(下學上達). 퇴계서찰은 ‘인간 퇴계’를 이해하는 보고(寶庫)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퇴계서찰을 숙독하면 숙독할수록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퇴계’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퇴계서찰에서 ‘퇴계의 마음’을 가장 적확(的確)히 읽을 수 있다. 퇴계서찰은 퇴계의 소소한 일상생활과 원대한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인적 교류와 학문적 토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퇴계는 한 평생 3,200여 통의 서찰을 남겼다. 그러나 필자는 퇴계서찰 중에서 번역된 467편을 분석하여 퇴계가 추구했던 교육론을 논의했다. 논의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목적의 측면에서 보면, 퇴계는 성인에 도달하기 위한 지경과 원대한 입지를 강조했다. 퇴계에게 있어 성인은 보편타당한 가치의 실현자이다. 성인에 도달하기 위해 퇴계는 주체적 성찰과 실천적 가치의 실현에 핵심인 지경과, 성학을 달성하려는 입지를 초학자의 요법(要法)으로 삼았다. 둘째, 교육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퇴계는 강상 윤리로서 효제와 배려를 중시했고, 사회 윤리로서 출처와 율신을 강조했다. 퇴계는 효제와 배려의 가치교육을 위해 『소학』과 『효경』을 중요한 교과로 선택하여 손자녀에게 가르쳤다. 또한 퇴계는 출처를 위해 출사(出仕)와 치사(致仕)의 도리를 초학자에게 강조했고, 율신을 위해 명예욕과 허명(虛名)의 위험을 곡진하게 손자녀에게 가르쳤다. 셋째, 교육방법에 측면에서 보면, 퇴계는 인재시교(因材施敎)와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원리를 강조했다. 퇴계는 공부하는 자질과 능력에 따라 개인차를 고려하여 손자녀와 노비들을 가르쳤다. 또한 퇴계는 일상생활의 원리를 터득한 이후에 성리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퇴계의 개인차에 의한 교육방법과 단계적 적용에 관한 교수방법은 현대교육이론에도 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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