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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철(玄哲)의 소설작법론(小說作法論) 연구(硏究)

        송명진 ( Song Myung-jin )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7 어문연구(語文硏究) Vol.45 No.3

        본고는 그동안 전신자 혹은 극문학자 등으로 한정되어 논의되었던 玄哲에 대해 小說作法論의 측면에서 玄哲이 지향했던 近代小說의 모습을 고찰하고자 했다. 첫째, ‘近代小說의 人物’과 관련된 것이다. 玄哲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이 近代小說이 갖추어야 할 요 건이라고 논의하면서도 단순히 인물의 리얼리티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玄哲은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성격묘사의 방법과 개인의 경험에 기초한 구체적 감정의 형상화를 강조했다. 둘째, ‘近代小說이 재현해야 할 세계’와 관련된 것이다. 玄哲은 近代小說의 요건으로 리얼리티를 강조했지만, ‘外界’를 직접적으로 소설에 옮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논의했다. 소설에 표현되는 세계는 ‘실제의 세계가 아니라 재현된 세계’라는것을 인식했던 玄哲은 여러 ‘史實’들 가운데 보편성을 띨 수 있는 ‘眞理’로서의 세계를 문학적 ‘事實’로 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玄哲의 小說論은 近代小說의 형식, 요소, 작법 등을 최초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당시 사회에 보편화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novel writing and novel discussions of Hyun Chul. He has been studied only as a dramatist or transmetteur who introduced foreign literary trends and theories. But his influence on the novel was great. This study tracked the forms of modern novels that he thought highly. First, Hyun Chul argued that modern novels must form individuality. He said that the novels need to describe characters in everyday life. However he did not emphasize only the reality of the character. He thought that individuality is more important. Therefore he proposed to describe the inside of the characters and to narrate specific emotions based on individual experience. Second, Hyun Chul argued that the novel world is not a real world but a reproduced world. He proposed that the novel world is composed by truth, that is, selected historical facts. Hyun Chul’s novel discussions are not a genre theory. His discussions are about novel forms, novel writing. His literary discussions are based on Japanese literary discussions. Nevertheless, his novel discussions were the first discussion of novel forms and novel writing in Korea.

      • KCI등재

        현철의 문화주의론과 민중극에 대한 연구-현철의 연극론과 카네코 치쿠스이(金子筑水)의 영향을 중심으로

        김동현 구보학회 2023 구보학보 Vol.- No.33

        This paper corrected the errors of the existing discussions on Hyeon Cheol’s culturalism and newly explained his theatre theory. His argument was based on Kaneko Chikusui’s culturalism, not Kuwaki Genyoku’s theory. Kaneko Chikusui’s culturalism put art as the root of culture under the influence of Tsubouchi Shoyo’s art theory. Accordingly, He asserted that the spread and development of art in Japan is an urgent priority. Acceptting Kaneko Chikusui’s discussion, Hyeon cheol argued that People’s Theater was necessary as an urgent tesk of cultural projects in colonial Joseon. And the word “Kultur” became a concept including not only spiritual civilization but also material civilization because art inspires “creative vitality” in humans. Hyeon Cheol paid attention to Kaneko Chikusui’s theory in order to supplement his thetre theory. Insisting on New Drama, He had emphasized the need for theater in colonial Joseon based on Tsubouchi Shoyo’s theory. Since the argument remained at the level of emphasizing justification, it could not properly respond to Lee Gise’s refutation that it was premature in colonial Joseon. He, based on Kaneko Chikusui’s argument, sought to prove that theater was not only necessary in the underdeveloped colonial Joseon, but also that New Drama was possible. As a result, he was able to advocate People’s Theater, and introduce the German expressionist art movement as a reconstruction of the losers. This shows that Hyeon Cheol’s theatre theory is not simply an idealistic theory obsessed with Western or Japanese theater, but a result of continuous thinking in the reality of colonial Joseon. 지금까지 현철의 문화주의에 관한 논의는 개벽 의 문화주의 담론 속에서 쿠와키 겐요쿠(桑木厳翼)의 문화주의를 변용한 결과물로 잘못 논해졌다. 이에 이 글은 현철이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의 자장 속에서 카네코 치쿠스이(金子筑水)의 문화주의를 변용하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기존 논의의 오류를 바로잡고 현철이 이를 주목한 이유를 해명하였다. 카네코 치쿠스이의 문화주의는 쓰보우치 쇼요의 예술론의 영향 속에서 예술을 문화의 근본으로 내세우며 현 일본에서 예술의 보급과 발달이 급선무임을 주장하였다. 현철은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이 필요하다고 논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정신 문명을 의미했던 ‘문화(kultur)’는 예술이 인간에게 “창조적 활력”을 불어 넣는다는 점에서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현철이 카네코 치쿠스이의 문화주의론을 주목하고 이를 변용한 것은 자신의 연극론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현철은 「연극과 오인의 관계」, 「현당극담」 등 일련의 연극론에서 쓰보우치 쇼요의 연극론을 기반으로 식민지 조선에 연극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신극 창시’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당위성만 강조하였기에, 낙후한 조선 사회에서 시기상조라는 이기세의 반박(「소위 현당극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에 현철은 카네코 치쿠스이의 논의를 바탕으로, 낙후한 식민지 조선에서 연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자신이 주장하는 ‘신극’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문화사업의 급선무로서 민중극을 제창할 수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독일 표현주의 예술운동을 “패자의 개조”로서 소개하였다. 이는 현철의 연극론이 단순히 서구나 일본의 연극에 경도된 이상론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을 지속적으로 사유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 KCI등재

        1930년대 후반 현철의 삼담(三談)운동과 공연사적 생멸

        문경연(Moon, Kyoung Yeon) 한국비평문학회 2017 批評文學 Vol.- No.63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현철이 1920~30년대에 이룬 성취는 상당했다. 그런데 한국근대극의 정립과 배우 양성에 힘을 썼던 현철은 1935년경부터 활동 방향을 급선회하였다. 그는 ‘삼담(三談)’이라는 새로운 담류(談類)의 공연예술을 개발하고 운동의 차원에서 확산시키고자 했다. 삼담은 현철이 만든 신조어인데, 연담(演談), 가담(歌談), 산담(散談)이라는 세 가지 공연 형식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본고는 아직까지 연구되지 않은 현철의 삼담 공연대본을 수집하였다. 남아있는 연담, 가담, 산담 원고들은 모두 독연 혹은 독창을 위한 대본이다. 본고의 연구목적은 1930년대 후반 조선의 담류 공연 안에서 삼담의 공연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공연대본을 통해 삼담의 성취 혹은 실패를 확인하는 데 있다. 삼담은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의 대중문화계를 장악했던 야담, 만담과 함께 담류(談類)의 새로운 지류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현철의 창작 공연물이다. 하지만 현전 작품들은 소재 면에서 새로움을 담보하지 못했고, 각각의 공연이 갖는 화술적 특이점을 대본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특히 극장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어야하는 연행 자체의 오락성과 흥행성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담은 당시 공연 흥행계에 안착하지 못했다. 삼담의 등장은 근대적인 양식들과 결합한 식민지 시기 야담, 만담 공연의 변이 양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생 대중예술 장르의 생멸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삼담은 민중교화와 공리성이라는 이념적 명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연극교육자 현철의 지도자 포지션이 보여준 고투의 흔적이기도하다.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drama, Hyeon Cheol made quite an accomplishment from the 1920s through 1930s. Yet he makes a sharp turn around 1935 from endeavoring to establish modern Korean drama and train actors to developing and spreading new story-type (談類) performing arts called the “three-stories” (samdam) as part of cultural movement. Samdam is a term coined by Hyeon Cheol to designate and encompass three types of story performances: yeondam (演談), gadam(歌談), and sandam(散談), Collected and presented in this paper are the scripts of Hyeon Cheol’s samdam performance that are have not been studied yet. The scripts of yeondam, gadam, and sandam are all stories designed for solo performance or solo vocal.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meaning of samdam performance within the context of 1930’s story-type performance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and identify its artistic accomplishment by reviewing the scripts. Producing samdam performance was a groundbreaking attempt by Hyeon Cheol to add a new trend of story-type performance to the existing types of story performances, namely, the historical romance (yadam) and comic monologue (mandam), which have already been dominating the popular culture scene of Korea since the late 1920s. However, individual pieces did not seem to present anything new and fresh in terms of their subject matter, and each performance did not seem to demonstrate any unique quality in the style of speech. In particular, they seemed to lack the entertainment and commercial qualities as performing arts that are expected to win the audience response. In the end, samdam failed to settle into the world of performing arts with commercial success. However, what samdam successfully demonstrated is the self-motivation and vital strength of a popular art form, which showed the mode of which a story performance makes a transformation through the fusion with the modern culture forms. It is also an evidence of Hyeon Cheol’s struggle as the one maintaining the position of a leader and educator of drama education, who held onto the ideological cause of pursuing the utilitarianism and edification of the public. Despite his struggles and effort, samdam disappeared into the mists within the history of performing arts, while revealing the limitation of an intellectual on stage who failed to embody the logics of commercial success within the changed cultural geography after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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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철의 「하믈레트」 번역과 그 의의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4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6

        현철의 번역희곡 「하믈레트」는 한국의 셰익스피어극 수용사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위치를 점한다. 우선 1920년대에 수용된 여타의 셰익스피어극과는 그 번역 양상과 번역의 목적이 가장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특이성을 보인다.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을 일별해 보면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소설적 수용’이고 한 가지는 ‘연극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적 수용’은 주로 찰스 램(Charles Lamb)의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저본으로 하여 독서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찰스 램의 저작물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의 대사를 살린 산문체 형식으로 바꾸고 복잡한 구성을 간결하게 추림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가장 큰 목적은 셰익스피어극에 대한 한국인 독자들의 접근과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적 수용’은 현철의 「하믈레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당시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소설적 수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실질적인 공연을 의식한 공연용 대본으로서,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곡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연극의 하위 장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실제적인 실례로 제공되었다. 이는 희곡 장르의 번역과 더불어 연극 대본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번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적 수용’이 셰익스피어극의 내용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현철의 「하믈레트」가 보여주는 ‘연극적 수용’은 희곡의 번역을 한국의 근대극 수립을 위한 근대극 운동의 일환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현철의 「하믈레트」가 갖는 시대적 가치는 일본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선명해 진다. 1920년대까지 일본 내에서 진행된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가부키적 수용에서 신파극적 수용으로, 그리고 다시 신극적 수용을 거쳐 대학 강단의 학문적 수용으로 변모되어 나갔다. 그리고 1911년에 쓰보우치 쇼요의 ‘후기 문예협회’가 공연했던 <하무렛토(햄릿)>(1911.5)를 기점으로 셰익스피어극은 사실상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극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1년에 공연되었던 <하무렛토>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서구식 근대극의 연극적 성공과 일본 내에서의 영문학 위상의 제고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함으로써 1920년대가 되면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고전극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바로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시점에서, 그리고 마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옛날의 연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쓰보우치 쇼요의 <하무렛토> 공연에 사용되었던 번역본 『하무렛토』를 번역의 저본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는 한국의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시기로, 한국의 근대극이 일본의 근대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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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논쟁(1920~21)의 알레고리

        신지연(Shin Ji-yeon) 한국근대문학회 2008 한국근대문학연구 Vol.9 No.2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은 언어의 도구성과 정신성을 특권화 하는 방식의 근대적 언어 이데올로기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과 민족정신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은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상호배타적이지만, 근대적으로 재편된 언어질서가 두 관점의 공존을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면서 그 논리적 모순관계는 은폐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특수한 언어적 사정으로 인해 이러한 논리모순을 적절히 은폐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두 관점의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나는 양상을 살피는 것, 나아가 그것을 근대적 ‘증상’ 중의 하나로 파악해 보는 것, 이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이 충돌은 특정한 언어적 실천 속에서 자신에게 이미 침투되어 있거나 혹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묻어두지 못하고 언표화 하는 일이 요구될 때에 발생한다. 이 논문은 무엇보다도 1920년대 초중반 ‘시를 쓰고 논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근대적 언어이데올로기가 형성하는 ‘증상’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근대시론이 형성 되는 과정에 대한 논의와 다르지 않다. 즉 이 글은 한국 근대시론의 형성 메커니즘의 규명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면적 목표를 위해 1920~21년에『개벽』지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시 논쟁을 중심 대상으로 설정하였으며, 언어관ㆍ문학관의 대차대조표 제시보다는 논쟁과 반박의 과정 속에서 언어관ㆍ문학관이 어떤식으로 생성되는지에 주목하였다. 현철은 미세(微蛻)를 향한 반박문에서 시의 율격을 설명한 다음 시의 본질을 정열의 표출로 상정하는데, 두 측면의 정의는 상이한 언어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맹아상태에 머무는 이 이율배반이 배면으로 숨지 못하고 표면화되는 것은 황석우를 향한 다음 반박문에서이다.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적 관점에서 시의 의미를 기술하려고 한 황석우를 논박하면서 현철은 정열의 표출을 시의 본질로 보는 관점을 묻어두고 대신 ‘시형의 중요성’과 ‘조선문’, ‘조선어’에 대한 천착을 강조한다. 이는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민족성의 담지체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황석우의 관점을 견지할 때, 1920년 당시 조선에서 구성되고 있던 질서, 즉 이제 막 조선어 출판 활동이 활발해지며 민족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성해내기 시작하는 작업이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세ㆍ황석우와의 논쟁을 통한 현철의 시론 전개 방식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중반에 걸쳐 일어난 이광수 문학론의 변화, 그리고 주요한과 김억의 변화가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철과 황석우를 중심으로 한 신시논쟁은 알레고리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현철의 이율배반이 전면화된 데에 황석우의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광수, 주요한, 김억 등이 시(문학)를 바라보는 관점을 급선회한 데에는 ‘황석우 같은 존재’, 혹은 ‘유령화된 황석우’가 개재되어 있다. ‘황석우 같은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이들은 조선문학의 구성을 본격화하고 조선문단 혹은 조선시단의 주류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In Modern linguistic order, it has come up that two viewpoints of regarding language as a intrument for communication and as embodiment of nationality. These two points of view contradict each other logically, but have coexisted under the realistic necessity. However, Colonial Korea was a topos to hard to cover this up because of its unusual linguistic circumstances. It is the first purpose of this paper to consider unavoidable collision of two viewpoints in Colonial Korea and to grasp it as a modern symptom. This collision has arised in the exceptional discourse when someone has been demanded to be constrained to refer to linguistic ideology for him to be saturated with. I have noticed that these cases happened when the ontology of modern poetry was discussed in the first half of 1920s. Eventually the consideration on the symptom caused by modern linguistic ideology is not differentiated with the examination on the mechanism-formation of Korean modern poetics. Therefore, the other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e mechanism of inclusion and exclusion that shapes the Korean poetics in the colonial era. For these double aims, I focused on the controversy over new-wave-poetry among Mise, Hyon Chol and Hwang Seogwoo in 1920~21. This controversy had a significance because it is not only the first one about modern poetry but also shows a tendency of Korean modern poetry and poetical essays thereafter symptoma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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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논쟁(1920~21)의 알레고리 - 한국근대시론의 형성과 ‘배제된 것’의 의미

        한국근대문학회 2008 한국근대문학연구 Vol.2008 No.18

        <P>이 글의 일차적 목적은 언어의 도구성과 정신성을 특권화 하는 방식의 근대적 언어 이데올로기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과 민족정신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은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상호배타적이지만, 근대적으로 재편된 언어질서가 두 관점의 공존을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면서 그 논리적 모순관계는 은폐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특수한 언어적 사정으로 인해 이러한 논리모순을 적절히 은폐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두 관점의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나는 양상을 살피는 것, 나아가 그것을 근대적 ‘증상’ 중의 하나로 파악해 보는 것, 이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P><P> 이 충돌은 특정한 언어적 실천 속에서 자신에게 이미 침투되어 있거나 혹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묻어두지 못하고 언표화 하는 일이 요구될 때에 발생한다. 이 논문은 무엇보다도 1920년대 초중반 ‘시를 쓰고 논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근대적 언어이데올로기가 형성하는 ‘증상’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근대시론이 형성 되는 과정에 대한 논의와 다르지 않다. 즉 이 글은 한국 근대시론의 형성 메커니즘의 규명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P><P> 이와 같은 양면적 목표를 위해 1920~21년에『개벽』지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시 논쟁을 중심 대상으로 설정하였으며, 언어관ㆍ문학관의 대차대조표 제시보다는 논쟁과 반박의 과정 속에서 언어관ㆍ문학관이 어떤식으로 생성되는지에 주목하였다. 현철은 미세(微蛻)를 향한 반박문에서 시의 율격을 설명한 다음 시의 본질을 정열의 표출로 상정하는데, 두 측면의 정의는 상이한 언어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맹아상태에 머무는 이 이율배반이 배면으로 숨지 못하고 표면화되는 것은 황석우를 향한 다음 반박문에서이다.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적 관점에서 시의 의미를 기술하려고 한 황석우를 논박하면서 현철은 정열의 표출을 시의 본질로 보는 관점을 묻어두고 대신 ‘시형의 중요성’과 ‘조선문’, ‘조선어’에 대한 천착을 강조한다. 이는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민족성의 담지체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황석우의 관점을 견지할 때, 1920년 당시 조선에서 구성되고 있던 질서, 즉 이제 막 조선어 출판 활동이 활발해지며 민족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성해내기 시작하는 작업이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P> 미세ㆍ황석우와의 논쟁을 통한 현철의 시론 전개 방식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중반에 걸쳐 일어난 이광수 문학론의 변화, 그리고 주요한과 김억의 변화가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철과 황석우를 중심으로 한 신시논쟁은 알레고리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현철의 이율배반이 전면화된 데에 황석우의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광수, 주요한, 김억 등이 시(문학)를 바라보는 관점을 급선회한 데에는 ‘황석우 같은 존재’, 혹은 ‘유령화된 황석우’가 개재되어 있다. ‘황석우 같은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이들은 조선문학의 구성을 본격화하고 조선문단 혹은 조선시단의 주류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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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 격야(隔夜)」 번역의 시공간적 맥락

        손성준 ( Son Sung-jun ),한지형 ( Han Ji-hyoung ) 국제어문학회 2015 국제어문 Vol.0 No.67

        투르게네프는 시대 상황과 그 변화의 조류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가졌지만 혁명적 변혁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정치적 온건파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장편소설 중 『그 전날 밤(Накануне)』(1860)의 경우 혁명을 꿈꾸는 불가리아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 러시아의 급진 세력이 적극적 평가에 나서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작 투르게네프 본인은 『그 전날 밤』을 `혁명의 전야`로 간주하는 입장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이 텍스트에는 정치적 해석의 중층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1920년, 신극운동가이자 개벽사의 학예부장 현철은 『개벽』의 창간호부터 제9호까지 번역 연재물 「脚本 隔夜」를 선보인다. 이는 소설 『그 전날 밤』을 연극 공연용 각본으로 각색한 것으로서, 저본은 `예술좌(藝術座)`의 각본가로 활약하던 구스야마 마사오(楠山正雄)의 『脚本 その前夜』였다. 『脚本 その前夜』는 그 자체로 식민지인의 현실 환기와 투쟁적 측면이 원작보다 강화된 텍스트였다. 현철은 역자서문에서부터 원작을 `오늘날의 러시아`, 즉 사회주의 혁명국가가 수립된 러시아를 설명하는 작품으로 소개하며, 이 각본을 번역하게 된 이유가 바로 작금의 조선과 공명되는 지점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 밝힌다. 현철의 선택 이면에는 혁명 러시아를 통해 조선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의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번역 과정에서 여성해방의 당위성을 중심으로 한 신ㆍ구세대 등장인물의 `사상충돌`에 방점을 둠으로써 조선의 문화적 진보를 꾀하기도 하였다. 현철의 기획 하에 「隔夜」는 단성사에서 실제로 공연된 바 있으며, 「隔夜」에 대한 조선인의 반향은 현진건의 소설 『지새는 안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증언된다. 『개벽』의 창간이 임박한 시기, 현철은 『인형의 집』이나 『햄릿』이 아닌 소설 『그전날 밤』의 각색 극본을 번역의 최우선순위로 낙점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脚本 その前夜』를 접하며, 이것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으로 전이될 때 지니게 될 위상을 예감했던 것이다. Turgenev is a writer a ssessed as a political moderate who was opposed to revolutionary changes, though he had sensitivity to the situation of times and the current of its changes. In the case of On the Eve(Накануне, 1860) among his novels, it featured as its main character a young Bulgarian man who dreams of revolution, and even such a situation was created that even the radical group of the then Russia came to evaluate the work positively. Actually, Turgenev himself was adamant in rejecting the position of considering On the Eve as `the eve of a revolution`; however, its text contained inter-textuality for political interpretation. In 1920, Hyun Cheol, who was a New Drama Movement promoter and the Chief of Department of Art & Science for Gaebyeok, published Scenario Gyeogya, serials of a translated work, in the first issue of the magazine through its ninth issue. The Scenario Gyeogya was On the Eve adapted for the stage, and its original script was Kyakuhon Sono Zenya(脚本 その前夜) by Kusuyama Masao(楠山正雄), who was working as a dramatizer for Geizyutsuza(藝術座). Kyakuhon Sono Zenya (脚本 その前夜) itself was a text that emphasized more the aspects of awakening colony people to the reality and their struggle than the original work. In the translator`s forward, Hyuncheol introduced the original work as a work that explained `today`s Russia,` that is, Russia where a socialist revolutionary state was established; and made it known that the reason for translating the scenario was that it had the most points in common with Joseon of those days. Behind Hyun Cheol`s selection of the scenario was his intention to tell about the political reality of Joseon through the revolutionary Russia. On the other hand, he attempted progress in the culture of Joseon by emphasizing in the translation `the collision of ideas` between characters of old and new generations revolving around the necessity for women`s liberation. Under Hyun Cheol`s planning, Gyeogya was actually performed at Danseongsa theater, and a sensation created by Gyeogya among Joseon people is indirectly witnessed by Overnight Fog (Jisaeneun angae), a novella written by Hyun Jin-geon. At the time when the first publication of Gaebyeok was imminent, Hyun Cheol picked the scenario of On the Eve, placing the first priority in his translation to the work over A Doll`s House (Et dukkehjem) or Hamlet. For after encountering Kyakuhon Sono Zenya(脚本 その前夜) during his study in Japan, he had a hunch about the status to be retained by it in case that it would be placed into the specific time and space of colony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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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논쟁(1920~21)의 알레고리 -한국근대시론의 형성과 ‘배제된 것’의 의미-

        신지연 한국근대문학회 2008 한국근대문학연구 Vol.9 No.2

        In Modern linguistic order, it has come up that two viewpoints of regarding language as a intrument for communication and as embodiment of nationality. These two points of view contradict each other logically, but have coexisted under the realistic necessity. However, Colonial Korea was a topos to hard to cover this up because of its unusual linguistic circumstances. It is the first purpose of this paper to consider unavoidable collision of two viewpoints in Colonial Korea and to grasp it as a modern symptom. This collision has arised in the exceptional discourse when someone has been demanded to be constrained to refer to linguistic ideology for him to be saturated with. I have noticed that these cases happened when the ontology of modern poetry was discussed in the first half of 1920s. Eventually the consideration on the symptom caused by modern linguistic ideology is not differentiated with the examination on the mechanism-formation of Korean modern poetics. Therefore, the other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e mechanism of inclusion and exclusion that shapes the Korean poetics in the colonial era. For these double aims, I focused on the controversy over new-wave-poetry among Mise, Hyon Chol and Hwang Seogwoo in 1920~21. This controversy had a significance because it is not only the first one about modern poetry but also shows a tendency of Korean modern poetry and poetical essays thereafter symptomatically.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은 언어의 도구성과 정신성을 특권화 하는 방식의 근대적 언어 이데올로기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과 민족정신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은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상호배타적이지만, 근대적으로 재편된 언어질서가 두 관점의 공존을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면서 그 논리적 모순관계는 은폐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특수한 언어적 사정으로 인해 이러한 논리모순을 적절히 은폐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두 관점의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나는 양상을 살피는 것, 나아가 그것을 근대적 ‘증상’ 중의 하나로 파악해 보는 것, 이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이 충돌은 특정한 언어적 실천 속에서 자신에게 이미 침투되어 있거나 혹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묻어두지 못하고 언표화 하는 일이 요구될 때에 발생한다. 이 논문은 무엇보다도 1920년대 초중반 ‘시를 쓰고 논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근대적 언어이데올로기가 형성하는 ‘증상’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근대시론이 형성 되는 과정에 대한 논의와 다르지 않다. 즉 이 글은 한국 근대시론의 형성 메커니즘의 규명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면적 목표를 위해 1920~21년에 『개벽』 지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시 논쟁을 중심 대상으로 설정하였으며, 언어관ㆍ문학관의 대차대조표 제시보다는 논쟁과 반박의 과정 속에서 언어관ㆍ문학관이 어떤 식으로 생성되는지에 주목하였다. 현철은 미세(微蛻)를 향한 반박문에서 시의 율격을 설명한 다음 시의 본질을 정열의 표출로 상정하는데, 두 측면의 정의는 상이한 언어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맹아상태에 머무는 이 이율배반이 배면으로 숨지 못하고 표면화되는 것은 황석우를 향한 다음 반박문에서이다.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적 관점에서 시의 의미를 기술하려고 한 황석우를 논박하면서 현철은 정열의 표출을 시의 본질로 보는 관점을 묻어두고 대신 ‘시형의 중요성’과 ‘조선문’, ‘조선어’에 대한 천착을 강조한다. 이는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민족성의 담지체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황석우의 관점을 견지할 때, 1920년 당시 조선에서 구성되고 있던 질서, 즉 이제 막 조선어 출판 활동이 활발해지며 민족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성해내기 시작하는 작업이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세ㆍ황석우와의 논쟁을 통한 현철의 시론 전개 방식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중반에 걸쳐 일어난 이광수 문학론의 변화, 그리고 주요한과 김억의 변화가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철과 황석우를 중심으로 한 신시논쟁은 알레고리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현철의 이율배반이 전면화된 데에 황석우의 래디컬한 언어도구론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광수, 주요한, 김억 등이 시(문학)를 바라보는 관점을 급선회한 데에는 ‘황석우 같은 존재’, 혹은 ‘유령화된 황석우’가 개재되어 있다. ‘황석우 같은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이들은 조선문학의 구성을 본격화하고 조선문단 혹은 조선시단의 주류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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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완역본 현철의 『하믈레트』 연구 — 현철의 근대극 운동과 연극론을 바탕으로 한 연극사적, 셰익스피어 수용사적 연구

        권오숙 한국셰익스피어학회 2021 셰익스피어 비평 Vol.57 No.1

        2021 marks the 100th anniversary of Korean Shakespeare translation. Hyeon-cheol began serializing Hamlet, the first complete translation of Shakespeare in Korea, in Gaebyeok in May 1921. Hyeon-cheol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n modern drama introducing theater theory, translation of foreign plays and creation of his own play, as well as establishment of a theater institution and an actor training school. He wrote numerous theatrical articles and established a theatrical theory in Korea. Hyeon-cheol’s Hamlet is a translation based on Shoyo Tsubouchi’s Hamlet, as he himself reveals. Although it is a retranslation, it is the first complete version of Shakespeare plays in Korea and the significance and value of this translation in the history of Shakespeare reception in Korea can be seen as great. Nevertheless, his translation has been neglected for the past 100 years. In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translation of Hyeon-cheol’s Hamlet, I felt the need for re-evaluating its significance and value. In this thesis, I looked at Hyeon-cheol’s new drama movement and theatrical theory, and based on this, the significance and value of the translation of Hamlet. This paper examined not only the meaning of Hyeon-cheol’s Hamlet in the history of Korean theater and the history of Shakespeare reception in Korea, but also its problems and limitations.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완역본인 현철의 『하믈레트』에 대한 분석과 이 번역 작품이 한국 연극사, 번역사, 셰익스피어 수용사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 문제점과 한계를 연구한 논문이다. 특히 그의 신극운동과 연극 관련 논저들을 바탕으로 한 연구이며 원전인 쓰보우시 쇼요의 번역과의 비교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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