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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경 한국극예술학회 2008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27
Many directors and play writers have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70'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Myung Kon Kim who has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Myung Kon Kim is a playwriter and director and one of the representative writers who have creat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80's. I make, his early works, “Kabose Kabose”, “Jum-a Jum-a Konjum-a”, “Kyek-jung-man-ri” an objects of this study. His initial interests of ‘Korean style’ originated in the Ma-Dang-Kuek Movement. Ma-Dang-Kuek was handed down by the success of Tal-Chum(Mask play). He transformed Ma-Dang-Kuek into the style on the stage theater. The materials of his plays are basically focused to social subjects and historical matters of Korea like Dong-Hak revolution, Gyang-Ju demonstration, The 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n and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and Korean theater history. He often applies the plot of epic theater and Ma-Dang-Kuek. In the aspects of plots, the quality is not so excellent, because the principles of theater on the stage and Ma-Dang-Kuek clashsed in his works. Moreover he intends to put too many materials, stories, and characters into a play. Therefore it is not easy to communicate the message of the play. He cares much for ‘theatrical ways’ in writing and directing, which are movement, song and dance, the participation of the audience, play within the play, masks and dress, and spectacle. He takes good ideas on theatrical ways from traditional drama and culture like the technique of traditional theater and play, Pan-So-ri and Korean folk songs, traditional dance, original korean objects and dress. The theatrical ways cover the problems of the writing in the performance and make the audience feel easy. However the misapplication and frequent insertion of theatrical ways make a paly worse and complicated. In this case, Myung Kon Kim may cause misunderstanding that he intends to depend on the formal and easygoing way in creating ‘Korean style theater’. 본 논문은 ‘한국적 연극’을 지향했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명곤의 초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국적 연극’을 지향하는 그의 연극관이 극작술에 어떻게 반영되고 실현되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대상 작품은 <갑오세 가보세>, <점아 점아 콩점아>, <격정만리>이다.김명곤은 마당극의 무대화를 통해 ‘한국적 연극’을 추구한다. 주로 동학농민혁명, 광주항쟁, 6.25전쟁, 분단과 통일, 한국연극사와 같은 당면한 사회문제나 민족수난사에서 극의 소재를 취해 리얼리즘적 현실 깨닫기를 지향한다. 김명곤은 민중 지향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에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작품의 구성에 있어 연구 대상 작품들은 상호 공통된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해설자를 등장시키는 서사극적 구조나 앞풀이-각 장-뒤풀이 식의 마당극적인 구조, 그리고 연대기적 구성은 두 작품 이상이 갖고 있는 공통된 구성 방식이다. 마당극과 무대극 모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창작의 방향을 표방하지만, 초기 극작품에서는 마당극의 영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며, 이는 이후까지도 김명곤의 극작술의 한 특성으로 지속된다. 초기 작품에서는 마당극의 구성원리와 무대극의 구성원리가 적절하지 않은 지점에서 충돌하기도 한다. 해설자 진행 방식이 극을 상투적이고 평범하게 만드는가 하면, 총체적 접근이라는 목적 하에 다수의 짧은 장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시켜 극의 효과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내용과 구성방식이 유기적으로 관련 맺지 못하는 측면도 발견된다.이러한 구성의 문제는 일정 부분 ‘연극적 방식’의 활용으로 공연에서 보완될 가능성을 마련하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연극적 방식’은 대부분 한국의 전통연희나 전통극, 판소리와 민요, 한국의 전통춤(몸짓), 한국 고유의 오브제나 의상 등 ‘한국적 연극’ 지향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한국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의 활용은 구성의 밋밋함이나 느슨함을 보완해주고, 대중적인 친근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잦은 삽입으로 표면상 ‘한국적’ 분위기를 내는 데에 그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한국적 연극’을 만드는 정형화되고 안이한 연출 방식에 기대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크다.‘마당극의 무대화’, 또는 ‘마당극과 무대극의 절충적 계승’은 김명곤의 ‘한국적 연극’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자, 김명곤의 연극미학을 결정짓는 주요 개념이다.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4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6
현철의 번역희곡 「하믈레트」는 한국의 셰익스피어극 수용사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위치를 점한다. 우선 1920년대에 수용된 여타의 셰익스피어극과는 그 번역 양상과 번역의 목적이 가장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특이성을 보인다.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을 일별해 보면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소설적 수용’이고 한 가지는 ‘연극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적 수용’은 주로 찰스 램(Charles Lamb)의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저본으로 하여 독서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찰스 램의 저작물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의 대사를 살린 산문체 형식으로 바꾸고 복잡한 구성을 간결하게 추림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가장 큰 목적은 셰익스피어극에 대한 한국인 독자들의 접근과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적 수용’은 현철의 「하믈레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당시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소설적 수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실질적인 공연을 의식한 공연용 대본으로서,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곡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연극의 하위 장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실제적인 실례로 제공되었다. 이는 희곡 장르의 번역과 더불어 연극 대본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번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적 수용’이 셰익스피어극의 내용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현철의 「하믈레트」가 보여주는 ‘연극적 수용’은 희곡의 번역을 한국의 근대극 수립을 위한 근대극 운동의 일환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현철의 「하믈레트」가 갖는 시대적 가치는 일본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선명해 진다. 1920년대까지 일본 내에서 진행된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가부키적 수용에서 신파극적 수용으로, 그리고 다시 신극적 수용을 거쳐 대학 강단의 학문적 수용으로 변모되어 나갔다. 그리고 1911년에 쓰보우치 쇼요의 ‘후기 문예협회’가 공연했던 <하무렛토(햄릿)>(1911.5)를 기점으로 셰익스피어극은 사실상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극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1년에 공연되었던 <하무렛토>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서구식 근대극의 연극적 성공과 일본 내에서의 영문학 위상의 제고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함으로써 1920년대가 되면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고전극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바로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시점에서, 그리고 마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옛날의 연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쓰보우치 쇼요의 <하무렛토> 공연에 사용되었던 번역본 『하무렛토』를 번역의 저본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는 한국의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시기로, 한국의 근대극이 일본의 근대극 ...
[자료]한운사의 광복절 특집드라마 <기다려도 기다려도> 해제
정현경 한국극예술학회 2015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9
한운사(본명은 한간남(韓看南), 1922~2009)의 방송극은 선택된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인간의 삶과 역사의 속내를 허구라는 틀 속에 담아 그려내며 시청자로 하여금 가려진 역사 속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정현경,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24~26면 참조. 일제의 강점으로 시작된 20세기를 산 한국인들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한운사는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그의 인생에서 현재로 살아왔다. 80여 편에 달하는 한운사의 방송극은 그의 인생 여정인 동시에 그가 살아온 질곡의 역사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고 할 수 있다. 극작가로서의 한운사가 추동해내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그가 살아온 ‘한국사’에 맞닿아 있는 것은 그의 문학관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학이나 영화를 자기가 살아본 세상에 있었던 일,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느냐는 이야기, 그런 것을 재현해 내일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가를 상의해 보는 장으로 인식하였다. 한운사, 『구름의 역사』, 민음사, 2006, 112면. 더불어 그는 식민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트라우마(trauma)를 ‘소화’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건강도, 개인의 건강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위의 책, 126면. . 한운사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았던 민족사는 같은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독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운사가 끊임없이 ‘한국사’를 소환하고 있는 이유는 문학이 독자/시청자로 하여금 불행했던 역사로서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직면하도록 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한운사의 극작은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한국전쟁 그리고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대표되는 정치적 갈등과 모순의 1960~1970년대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운사의 작품 중,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향한 노모(老母)의 기다림과 죽음을 통해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극화한 ‘광복절 특집드라마’이다. 1970년대에 8.15광복을 기념하는 특집극으로 방영된 한운사의 TV 방송극은 모두 4편이다.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으로 방영된 「미싯가루」(TBC, 1975)를 비롯하여 「기다려도 기다려도」(MBC, 1977)와 같은 해인 197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3부작으로 제작되어 미니시리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나루터 3대」(KBS, 1977) 그리고 「파도여 말하라」(TBC, 1978)가 그것이다. 1970년대에는 계몽과 선전선동의 목적극이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특집극을 통해서 목적극의 실상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억압과 통제의 방송 현실에서도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도 발견할 수 있다. 윤석진,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 <미싯가루> 해제」, 『한국극예술연구』 제37집, 한국극예술학회, 2012, 231면 참조. 한운사는 광복 기념 특집극들을 통해 일제강점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극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 30여 년이 흐른 서울의 종로를 극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197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해 동시대성과 리얼리티(reality)를 획득하고 있다. 극의 전개는 교회의 교육관을 짓기...
일제하 전시체제기 이동연극 연구 - 이동연극 제1대와 극단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이덕기 한국극예술학회 2009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0
The traveling theatre was core businesse of theatrical mobilization in wartime. Colonial authority used traveling theatre as the instrument of propaganda by presenting sound entertainment and enlightenment. Traveling theatre platoon 1 and Hyundai-gukjang's patriotic troupe were representative traveling theatre in this time, they played an active part as a model of national theatre. Traveling theatre platoon 1 was made up Joseon theatrical association's directly agency at 1941. In 1942 they digested superhuman performances schedule, but after this, their activity has declined by degrees. Hyundai-gukjang's patriotic troupe were formed in cooperation with Gukminchongryeocjoseonyeonmeng at 1941. Although ambitious conception, their activity didn't hold on, the result was poor. This two troupe had no regret for theatrical quality, and objectified the spectator with prejudice. For example Deachunamu and Heungbujeon, their repertory were inappropriate and low quality. As a result their ambitious conception fell through, their play ended in vulgar propaganda drama. 이동연극은 일제하 전시체제기 연극동원에 있어 핵심사업이다. 일제 당국은 농산어촌에 건전한 오락을 보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극을 그들의 선전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연극협회를 결성, 이동연극대의 조직을 서둘렀다. 이동연극 제1대는 협회 직속의 이동연극대이자, ‘국민연극’의 전초부대로서 조직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을 보냈고, 조선연극협회는 협회의 조직적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1942년까지 그야말로 초인적인 공연일정을 소화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동연극 제1대는 1943년부터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여 1944년에 이르러서는 협회 직속 이동연극대로서의 위상을 거의 상실하였다. 극단 현대극장은 자체적으로 이동연극대를 조직하였다. 현대극장의 주요멤버인 유치진과 함대훈은 국민연극 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이동연극을 주장하였다. 1941년 10월 현대극장은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제휴하여 총력연맹 이동연극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주영섭 작 <흥부전>과 허남실 번안 <만석보>를 가지고 경남 지방을 순회 공연하였다. 1944년에는 이동연극보국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광산지역을 순회 공연하였다. 현대극장은 이동연극을 통해 그들이 주장해 온 ‘국민연극론’을 실천하는 한편 ‘국민연극’을 주도하는 극단으로서 위상을 과시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이동연극 활동은 다만 일회성에 그쳤다. 이동연극 제1대와 현대극장은 전시체제기 이동연극의 한 전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일제 당국과 언론은 이들의 활약상을 과장하고 미화하였으나 정작 이들의 연극은 연극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단순한 선전도구에 머물렀다. 이들의 연극적 실패는 이 시기 이동연극의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1930년대 ‘중간극’ 이념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 1937~1939년 시점을 중심으로 -
김남석 한국극예술학회 2015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8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朝鮮 演劇界에는 ‘中間劇’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일어났다. 그 기폭제가 된 사건은 ‘中央舞臺’의 창립과 中間劇 이념의 제창이었다. 이후 中間劇은 朝鮮 演劇界의 화두가 되었고, 1930년대 후반 朝鮮 演劇界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상정되었다. 비록 中間劇이 최초에는 다소 우발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점차 新劇 陣營과 大衆劇 陣營 모두가 관심을 두는 장르로 발전했던 것이다. 비록 中間劇이라는 장르 명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을지라도, 관객의 확대를 꾀했던 新劇 陣營과 작품의 질적 수준 향상을 염원한 大衆劇 陣營 양자에게 中間劇은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근접하면, 新劇 陣營은 그 위세가 위축되면서 大衆劇의 特徵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大衆劇 陣營의 演技 方式과 大衆性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大衆劇 陣營 역시 ‘高協’으로 대표되는 中間劇 양식의 일차적 완성을 실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자의 중간자적 혼류 양상은, 1940년대 연극의 원류를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이후 1940년대 朝鮮 演劇界는, 관객의 성향을 충족하면서도 작품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고, 中間劇은 그 대안으로 인식되었다.
한·일 표현주의극의 전유 방식 비교 연구 -김우진과 오사나이 카오루를 중심으로-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6
이 논문은 김우진이 표현주의극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창작하였는가 하는 주체적인 측면에 주목한 논의를 확장시키는 차원의 연구로, 김우진의 표현주의극 이해를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증해보기 위해 동시대 일본의 표현주의극을 비교 지표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서구의 표현주의극이 한·일 양국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비교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김우진의 표현주의극이 갖는 탈식민적 의미를 확인하여 한국 근대극의 독자성과 선구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오사나이 카오루와 「츠키지소극장」은 번역의 시대를 상정하고 이 기간 동안 표현주의극 상연을 통해 당대 일본의 연극 토대와 단절된 신극을 수립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실천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표현주의극은 새로운 정신을 상실한 채 새로운 기교로만 경도되어 스스로 번역의 시기에 갇힌 무대상의 표현주의극에 그치고 말았다. 반면에, 김우진의 표현주의극은 작가의 철리(哲理)와 ‘이즘(-ism)’을 찾아나가는 예술로서 새로운 정신을 중시하는 창작활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작가의 주의·주장은 시대적, 역사적 현실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조선’이라는 현실적 토대가 없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식민과 근대라는 두 가지 대립의 상황이 교차되고 있던 과도기적 공간으로, 현상태를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자연 발생적 의지로서의 개인의 내적 생명력을 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적 생명력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연극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필요성에서 표현주의극이 적극적으로 창작되었던 것이다. 한·일 표현주의극 전유 방식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탈식민적 인식의 차이를 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것이 되겠지만, 1920년대 일본의 표현주의극은 적극적으로 ‘서양화 되기’를 시도한 전유라는 점에서 스스로 타자화 되고자 한 방식이며,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된 상태를 스스로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설정한 번역 시기에만 갇혀 새로운 정신을 제시하는 표현주의극 작품을 산출하지 못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우진은 서구를 모방하는 것은 물론 일본식 근대화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조선의 문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대립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생명력의 예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품 창작을 통해서 새로운 정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이점에서 1920년대 한국의 표현주의극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전유 방식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표현주의극의 주체로서 표현주의극의 정신을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 적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탈식민적 인식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윤석진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7
1970년대 방송계는 경제 성장을 알리기 위해 정책 홍보성 드라마들이 대거 방영될 정도로 계몽과 선전선동의 목적극이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 방송계는 유신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박정희 정권의 방송정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신과 긴급조치의 억압과 통제의 틀에 순응 또는 적응하면서 반공드라마를 강화하고, 새마을운동을 홍보하는가 하면,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보여주면서 이웃 간의 화합과 이상적인 사회 모습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형성했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였다. ‘동양방송(TBC-TV)’의 <토요무대> 제 15화이자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으로 1975년 8월 9일 방영된 <미싯가루>는 1970년대 목적극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억압과 통제의 방송 현실에서도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이 내재되어 있는 단막극이다. 한운사가 극본을 쓰고, 연극무대에서 방송극으로 자리를 옮긴 심현우가 연출을 맡은 <미싯가루>는 광복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른 서울을 배경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생사를 함께 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아사(餓死) 직전에 조선인 학도병 ‘박완수’가 건네준 ‘미싯가루’를 먹고 생명을 건진 일본군 ‘사이토오[齊藤]’가 은혜를 갚기 위해 광복 30년이 되던 해에 한국을 찾아와 민족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까지 모색한 특집극이 바로 <미싯가루>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청취자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운사(1923~2009)는 방송극을 통해 전쟁과 남북 분단의 상처는 물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아픔, 전후 사회의 혼란과 세대 갈등 등을 치유하고 극복함으로써 한국의 새로운 미래상을 모색하고자 했던 1세대 방송극작가이다. 1960~1970년대 한국 방송극의 형성기를 이끌었던 한운사의 민족을 초월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1960년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된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미싯가루>는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고자 했던 한운사의 문제의식이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미싯가루>는 일본인 ‘사이토오’가 아들 ‘젠사쿠’와 함께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이토오’의 한국 방문 목적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박완수’를 찾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젠사쿠’는 아버지와 달리 일본의 도쿄와 다를 바 없이 번화한 서울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관광에 나선다. 번화한 서울의 모습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풍경을 기억해내는 아버지와 일제강점기를 경험하지 못해 서울의 현재 모습에 감탄하는 아들의 시선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미싯가루>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목적극’이라는 특성상 계몽극으로서의 교조성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다. ‘사이토오’의 아들 ‘젠사쿠’와 역사학자가 된 ‘박완수’의 딸 ‘박인옥’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설정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작가의 목적의식이 교조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
이정숙 한국극예술학회 2011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4
한국전쟁기에 유치진은 반공극과 함께 역사소재극 두 편을 집필한다. <처용의 노래>와 <가야금>은 처용과 우륵이라는 예술가를 소재로 선택하여 이를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로 풀어내고 있으며, 모든 갈등이 해결하는 것으로 예술의 힘을 배치하여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대사 위주의 화극에서 벗어나 춤과 노래를 활용하였고, 창극과 같은 전통극의 기법을 도입하여 극의 표현기법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전쟁기의 유치진 희곡은 국립극장 재개관에 대한 요구와 국립극장에 적합한 민족극 구상의 일환으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극장은 유치진의 오랜 바람이 실현된 형태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립극장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재개관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치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어 국립극장 재개관의 당위성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전쟁기의 역사소재극은 국립극장에 적합한 민족극에 대한 모색의 결과였다. 유치진의 민족극 구상에서 전통극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기존의 사실주의극의 기법이 우리의 생활이라는 내용만 가져온 것이라면 전통극의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그릇에 우리의 생활을 담는 민족극 모색이 가능해지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함세덕의 번안 희곡 <산적> 연구 -낙랑극회 공연 사례를 중심으로-
김남석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8
This paper reviews the Nacklang-kuckhoi(Nacklang theater company)'s play, The Robber. Nacklang-kuckhoi was organized in 1945 and worked Until 1947. In Korea history, This period is a part of the Liberation period. This paper arranges the aspect of Nacklang-kuckhoi‘s plays in 1945 to 1946 and finds out the special feature of it. This dissertation has been written with a purpose to examine and to understand the Nacklang-kuckhoi in 1945 and playwright intent of Hamsedeok in second half of 1940s. In conclusion, this paper checks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Robber in Nacklang-kuckhoi's palys and as Hamsedeok's masterpiece. Nacklang-kuckhoi was a dramatic company that was compositively coexisted with Sinkuck and Sinpakuck, the Right and the Leftism, an Intellectual player and a professional actor. This aspect is particular instance of the varied appearance and characteristic of Korean play in 1945 to 1950. 이 연구는 낙랑극회의 공연 대본인 <산적>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낙랑극회는 1945년에 발족하여 1947년까지 활동한 대중극단으로, 한국 역사에서 이 시기는 흔히 해방공간으로 불린다. 이 연구는 낙랑극회가 창립하여 <산적>을 공연하고, 그와 동시에 함세덕이 <기미년 3월 1일>을 집필 준비하는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낙랑극회의 1945년부터 1946년까지의 공연사와, 해방공간에서 함세덕의 활동이 다루어질 것이다. 그 결과 낙랑극회의 의의뿐만 아니라, 극작가 함세덕의 특성 또한 분석될 것이다. 당시 낙랑극회는 신극과 신파극, 우익극과 좌익극, 지성 연극인과 전문 연극인의 틈바구니에서 활동하였고, 어떤 면에서는 양자의 특성을 지니는 극단이었다. 그로 인해 1945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해방공간에서 한국연극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극단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승희 한국극예술학회 2009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29
The translation in colonial Joseon was modern phenomenon, to advance a time delay, to get a world historical simultaneity. It is the appearance of realism style that the desire to translation was the most consciously exteriorized case. At this time, being worthy of note is that realism drama has formed with the influence of socialism at once. With the thought revolution―the evolution theory’s socialistic appropriation―socialism offered the perspective of realistic representation. Socialism was accepted as a modern knowledge extensively regardless of authors’ political attitude. First of all, the best feature was the discovery of lower classes. They were represented as physical existence that was able to show the inevitability of reformation. The lower classes drama become the place showing that socialistic epistemology is the determinant of narrative. But censorship derived from the crisis of language and representation in realism drama. Nevertheless the authors’ struggle for this institutional pressure produced distinctive features. Those were summarized the rhetoric of reversion and the emotional excess. And socialism’s influence arranged ‘family’ newly. That was understood the socialization of family. Namely family the buffer zone between the realm of family relations and the realm of society. However the importance of society was increased, on the other hand a individual was reduced or erased. We call this the becoming hollow of individual. The relation of individual and the society was non-dialectic and non-symmetrical. This resulted from crippling colonial modernization. And this situation was concerned that on the one hand realism drama and socialism mixed, on the other socialism and Sinpa mixed. This network at once was the core of the former realism drama, there is socialism in its center. But when realism drama shut from socialistic perspective, this means that realism drama cut the network those and exist as a realistic description. That realism drama got a vitality by the progress’s logic was ironically the moment that it placed itself at the service of nationalism. 식민지조선에서 번역이란 시간적 지체를 앞당기는 동시에 세계사적 동시대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근대적인 현상이었으며, 한국근대연극사에서 번역에의 욕망이 가장 의식적으로 구상화된 사례는 사실주의 양식의 등장이었다. 이때 사실주의극의 성립이 사회주의의 반향과 함께 동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진화론을 계승하여 이를 사회주의적으로 전유해간 사상적 전회와 함께, 사회주의는 사실주의적 재현이 어떤 퍼스펙티브에서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나침반을 제공했다. 이 현상은 작가의 정치적 좌표와 관계없이 사회주의가 근대지식으로서 폭넓게 수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하층계급의 발견이었다. 하층계급은 개혁에의 필연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육체적 현존으로 호명되었던바, 하층계급의 드라마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사회주의적 인식론이 내러티브의 결정소임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검열제도는 사실주의극에 언어의 위기, 재현의 위기를 초래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적 압력과 길항하면서도 그에 회수되지 않으려는 고투는 일정한 양식적 특징으로 표현되었다. 한편으로는 반전의 수사학을 구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과잉으로써 언어의 위기를 보상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족을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했다는 점도 하나의 변화였다. 그것은 가족의 사회화로 요약될 수 있으며, 가족이라는 공간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가족관계의 영역과 계급갈등이 격화되고 있던 사회영역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사회의 중요성은 증대되었지만, 개인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거나 소거되었다. 이는 개인의 공동화(空洞化)라 할 만하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비변증법적․비대칭적 관계는 양자가 행복한 조우를 할 수 없었던 식민지적 근대화의 파행성으로부터 야기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한편에서는 사실주의와 사회주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와 신파가 습합할 수 있었던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네트워크는 곧 전기 사실주의극의 특징을 이루는 핵심적인 계기들이며, 그 중심에 사회주의가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극이 사회주의적 시선을 거두는 시점, 그것은 곧 사실주의극이 사회주의/신파와의 네트워크를 절연하고 이제 사실적 재현이라는 범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주의극이 진보의 논리로 다시 활력을 얻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주의에 봉사하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