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김수영 시에 나타난 ‘우리’와 ‘사랑’의 의미 -C. D. 루이스『현대시론』의 영향을 중심으로-

          김지녀 우리문학회 2020 우리文學硏究 Vol.0 No.68

          This study analyzed how Kim Soo-young’s poems utilized the term ‘we’ is used and explored its meaning within the context of his poetry. Kim Soo-young stated that A Hope for Poetry by C. D. Lewis provoked the problem of ‘we.’ Therefore, this study attempted to understand why ‘we’ was increasingly used in place of ‘I’ in his works and explored how C. D. Lewis’ theory was manifested in Kim Soo-young’s poems. First, this study identified the works in which ‘we’ was used and analyzed them. ‘We’ was expressed in two ways in his poems. The first was the use of ‘we’ in first person singular form. This was primarily utilized to express uniqueness or friendliness through personal relationships, such as referring to family or an intimate space. The other case indicated the plural meanings of ‘we’ to express historical and social events or ideas. Next, this study examined A Hope for Poetry by C. D. Lewis. The book emphasized the need for young poets to communicate with the past and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their ancestors. This is similar to the manner in which Kim Soo-young perceived ‘we’ in his poetry. In other words, A Hope for Poetry enabled Kim Soo-young to realize that ‘we’ represents the entire nation. It also facilitated his recognition and rediscovery of ‘history’ and ‘people.’ The ‘awareness’ of ‘we’ resulted in the emergence of ‘love’ for the collective (‘we’). In this case, the ‘love’ arises due to a stronger social and historical relationship. Through several poems, Kim Soo-young realized the true meaning of ‘we’ who made ‘our’ history. Consequently, he began to affirm ‘our’ history and tradition, which have shown persistent vitality. This set him on the path of living his life with reconciliation and love instead of opposition and antagonism. 이 연구는 김수영 시의 언술에서 인칭대명사 ‘우리’가 어떤 용법으로 활용되며 의미화되는지를 분석했다. 김수영은 시에서 ‘우리’의 문제를 사유하게 해준 텍스트로 C. 데이 루이스의 현대시론을 언급했다. 이점에 주목해 이 연구에서는 김수영 시의 언술 주체가 ‘나’에서 ‘우리’로 이행하는 이유를 다각도로 살펴보고, C. 데이 루이스의 시론이 김수영 시에 어떻게 내면화되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먼저, 김수영 시에서 인칭대명사 ‘우리’가 사용된 작품을 목록화하고 정리했다. 김수영 시에서 인칭대명사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하나는 ‘우리’를 일인칭 단수의 의미로 사용한 경우로, 주로 개인적 관계를 통해 유일성이나 친근감을 표현하며 가족이나 공간을 지칭할 때 자주 출현했다. ‘우리’가 ‘나’로 대체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나’를 포함한 복수의 의미로 사용한 경우였다. 이 경우는 주로 공동체 의식에 기반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이나 관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김수영 시의 언술 주체가 ‘나’에서 ‘우리’로 변모해가는 과정에는 4․19혁명과 C. 데이 루이스의 시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연구에서는 그 동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C. 데이 루이스의 시론과 김수영 시에 출현하는 ‘우리’의 상관성을 살펴보았다. C. 데이 루이스는 ‘우리’를 호명하면서 젊은 시인들에게 과거와 교통하고 선조들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함을 강조했다. 김수영은 선조의 의미를 가장 소박하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민중’에서 발견하며 ‘우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점은 김수영에게 C. 데이 루이스의 시론이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의 ‘우리’에 대한 자각은 시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이때의 ‘사랑’은 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를 호명하며 김수영은 당대 현실을 대립과 반목보다는 화해와 사랑으로 접근하고 ‘아들’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가 경험할 ‘사랑’이 과거의 역사과 전통을 통해 개진해나가는 현실의 모습에 기반해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영원한 ‘우리’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 KCI등재

          근대적 예술인식의 논리화 방식과 그 의미

          이선이(Lee, Sun-Yi) 우리문학회 2015 우리文學硏究 Vol.0 No.47

          이 연구는 우리의 근대적 예술인식이 어떤 논리화 방식을 통해 제출되었는가를 살피고, 이들 예술담론 속에 투영된 예술인식의 내용과 의미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근대문학 초창기에 우리 문학이 도달해야 할 하나의 이상으로 상정했던 예술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는 작업과 결부된다. 우리의 근대문학에 대한 인식은 근대적 예술인식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근대적 예술인식을 활발하게 담론화한 문학담론, 미술담론, 종교담론을 중심으로 개별 담론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을 수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근대적 예술인식의 논리화 방식을 살펴보았다. 세부적으로는 이광수 · 김동인의 논의를 중심으로 문학담론을, 최남선 · 김환 · 김찬영의 논의를 중심으로 미술담론을, 신태악 · 오상순의 논의를 중심으로 종교담론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의 근대적 예술인식이 다양한 세부담론과 결합되면서 다양하고 복수적인 인식으로 제출되었다는 점, 예술의 타율성에서 벗어나 자율성의 획득이라는 단선적 발전 경로를 밟지 않았다는 점, 우리의 인문적 전통과 대화적 관계를 견지하며 심미적 인문성의 토대 위에서 예술을 재인식해 나갔다는 점을 새롭게 포착하였다. This essay is to explore what organizational process Korea’s modern awareness on arts has gone through and how it is formed, and to find contents and meaning of arts awareness that is reflected on such a discourse. This is also colligated with a task to understand the reality of arts that was designated as a ideology of which Korean literature should arrive, at the beginning of modern literature. It is because that the awareness on Korea’s modern literature ha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awareness of modern art Thus, the paper focused on the way which individual discourse including discourses on literature, arts and religion that are most actively discussed, are combined with the arts discourses as well as analyzing logical organization method of modern awareness on arts of those discourses. For example, the paper focused on arguments of Lee Kwang-su and Kim Dong-in for literature discourse, those of Choi Nam-seon, Kim Hwan, Kim Chan-yeong for art discourse, and those of Shin Tae-ak and Oh Sang-soon for religion discourse. Based on this analysis, the study has found detailed aspects of complex and multiple awareness of Korea’s awareness on arts in modern times. Also, it has newly found that Korea’s modern awareness on arts did not follow the linear footstep of just getting autonomy only escaping from heteronomy and, also that it tried to recognize the arts on foundation of aesthetic humanities while adhering to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Korea’s humanistic tradition during the process of accepting western arts awareness.

        • KCI등재
        • KCI등재

          映像資料를 활용한 多文化家庭의 傳統文化 교육 방안 연구

          유권석(Yu, Kwon-Sek) 우리문학회 2017 우리文學硏究 Vol.0 No.55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의 재편으로 인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유학생, 국제결혼, 중도입국청소년 등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다문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이 우리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다문화를 먼저 경험했던 여러 나라들의 선례에 비추어 볼 때 영상자료를 활용한 전통문화 교육이 매우 유익한 방법임을 제시해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에게는 1960년대부터 국립무형유산원과 KBS, 아리랑TV 등에서 제작한 전통문화 관련 영상들이 존재한다. 이 논문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공동체문화, 연희문화, 의식주문화, 한의 문화로 범위를 획정하고 이에 맞는 적절한 영상들을 제시해 보았다. 공동체문화와 관련된 영상으로는 농악, 달집태우기, 줄다리기, 불천위제사, 전통혼례 등을 중심으로 제시해 보았다. 다음으로 의식주문화와 관련해서는 누비장과 조선왕조궁중음식, 대목장, 제와장 등의 영상 작품들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셋째, 연희문화와 관련된 영상은 남사당놀이와 줄타기, 아리랑, 하회별신굿탈놀이, 북청사자놀음 등을 중심으로 제시해 보았는데, 이 영상들은 우리 조상들이 놀이와 극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았다는 점에서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이 우리의 한류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넷째는 한의 문화인데 한과 관련된 영상은 씻김굿과 판소리, 위도띠뱃놀이 등을 중심으로 제시해 보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교육함에 있어 영상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이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orea has been rapidly heading to a multi-cultural society as the increase of foreign workers, international students. international marriage and immigrated children causing from the industry reorganization. However, there was no depth discussion about an education of traditional culture even if it is the most important part for multi-cultural families being adapted to a Korean society. Therefore, a study offers several methods for effective education of traditional culture by using video materials based many cases of experienced countries about multi-culture before Korea. As everyone knows, Korea has many video materials produced by The National Intangible Heritage Center, KBS and Arirang TV since 1960’s. The study extends Korea’s traditional culture to community culture, a play, food, clothing, shelter and bitter memories called Han with resonable video materials. Related to community culture, a study provides videos of traditional Korean farmer music ‘Nong-ak’, sheaf burning, tug-of-war, ancestral rites and traditional marriage. Regarding to food, clothing and shelter, a study covers Nubijang, Royal cuisine, Daemokjang and Jewajang(Roof Tile Making). The study presents ‘Namsadang Nori’, tightrope, Arirang, Hahoe Pyolshingut Mask Dance and Bukcheong Saja noreum dance which would be effective for multi-cultural families to understand Korean culture. Lastly, the study consists of ‘Han’ with video materials such as a shaman ritual for cleaning dead person’s soul, Pansori and a ceremony before boating. If Korea makes the best use of these video materials for education of traditional culture, it would be deeply supportive for multi-cultural families to be accustomed with Korean society beyond the cultural differences.

        • KCI등재

          고전문헌에 나타난 거문고의 명칭에 대한 연구

          정하운 우리어문학회 2011 우리어문연구 Vol.40 No.-

          우리의 전통악기 중 하나인 <거문고>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또는 현악기의 통칭으로 불리면서 고구려에서 제작, 통일신라의 <금도(琴道)>를 이루었고, 고려와 조선 선비들의 수양을 위한 필수품으로서 독창적인 이면(裏面)에 대해 찬사를 받아가며 오랜 세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왔으나, 실용성의 여부와 연주방식의 어려움으로 그 위상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거문고(玄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악지」의 <현금(玄琴)>조에 있고, 『악학궤범』의 권지 칠에도 <현금(玄琴)>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고전문헌 안에서 중국의 <금(琴)>에 대한 음악사상이 <거문고>의 음악사상을 대신하고 있는 걸로 보아 <거문고연주자>의 음악정신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확인된다. <금>의 표기가 <재래현악기>와 <가야금>을 포함하고 있는 점과 <금>의 이칭이 <거문고>의 이름으로 사용된 점에서 <거문고>의 무형적 가치 중 상당한 부분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칠현금>을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나, 일본학자들은 <와공후>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 음악학계에서 밝혀진 <위진시대 와공후>가 <거문고>의 전신(前身)이라는 해석이 한·중·일 학자들 간에 논의되고 있다. <칠현금>의 전래 전에 유사한 악기로 추정되는 고분벽화의 <금>을 <현금>으로 보는 국내학자와 <와공후>로 보는 일본학자의 의견대립이 있고, <거문고>로 주장하는 국내학자들도 견해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문고(玄琴)>·<금(琴)>·<고토(こと: 琴)> 외에 성경(Bible)에서도<거문고>로 해석된 서양 현악기의 기록이 발견되고 있어, 이미 고대에서부터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체형이 비슷한 현악기는 <거문고>로 해석 또는 번역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의 이칭이나 특정 연주가와 관련되어있는 악기이름이 <금>의 사상과 함께 수입되어져 우리 고전문헌 안에서 <거문고>를 대신했으며, <금>의 연주에서 비롯된 미학적 요소와 사상들을 <거문고연주가>들은 답습하게 되었고, 우리의 선비들은 <금>·<슬(瑟)>·<거문고> 등을 통칭하는 의미로 <거문고>를 설정하여 중국의 음악사상과 함께 수용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 <금>은 고려 예종 11년(1116)때 들어와 <문묘제례악>에 <슬>과 함께 쓰이다가 한말(韓末)에 주법(奏法)이 끊어졌다. <가야금>과 <슬>은 각각 오른손과 양손 손가락으로 뜯는 점, 줄(絃)의 수와 크기만 다를 뿐, 별 차이가 없는데, <금>과 <거문고>는 구조와 <탄주(彈奏)>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문헌의 내용에 <금>·<슬>·<거문고> 등의 재료나 부품은 오동나무·명주실과 <금>의 <휘(徽)>·<줄(絃)>, <슬>의 <주현(朱絃)>·<주(柱)> 등이 있으며, <거문고>의 부품명인 <안족(雁足)>·<괘(棵)>·<술대(匙)>에 대한 표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명금(名琴)들은 고사(故事)의 내용을 갖추고 있어, 제작자의 품격·재능, 당시대의 배경·사상 등을 이면(裏面)에 동반하여 고전문헌상의 내용을 상징과 은유로 견인하면서 <거문고>의 사상에 관여하고 있다. <금>의 명인들이 고전문헌에 남긴 체취는 우리 선비들의 <거문고사상>으로 재탄생하였다. 명금, 금의 명인, 명곡 등의 표면 또는 이면(裏面)으로부터 취한 음악적·문학적 사상과 그 외의 미의식을 내재한 어휘나 문구들은 우리의 고전문헌에 유입되어 물리적 또는 화학적으로 투영되어졌다. <거문고>를 예악과 수양의 도구로 생각했던 ... “Geomungo”, a Korean traditional musical instrument, was called baekakjijang (meaning the best musical instrument of all) or as the collective name for string instruments. It was produced in Goguryeo, and Geumdo, the theory and techniques of geomungo, was accomplished in Unified Silla. Classical scholars of Goryeo and Joseon praised its unique aspects as an essential instrument to cultivate their mind. It played various roles for a long time. However, due to its impracticality and difficult playing techniques, its status is falling. The record of geomungo is in Chapter Hyeongeum, ‘Akji’ of Samguksagii, and volume 7 of Akhaguebeom has it recorded as Hyeongeumi. Chinese musical ideas about geum in classical literatures represent the musical ideas of geomungo. It tells that Chinese ideas influenced the musical ideas of geomungo players. Considering that the word geum include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s and gayageum and that another name for geum was geumungo, it was deducted that significant parts of intangible values of geomungo were introduced from China. In Samguksagi, it was explained to have been created by remodeling chilhyeongeum, but Japanese scholars argue that it originated from wagonghu. Also, scholars of Korea, China and Japan are discussing that wagonghu of Wei and Qin era found in Chinese musical academic circles is the origin of geomungo. Korean scholars consider geum in ancient tomb murals which is assumed to be a similar instrument before the introduction of chilhyeongeum as hyeongeum, but Jananese scholars are disagreeing because they consider it as wagonghu. Even some Korean scholars believe that is is geomungo. Beside geomungo, geum and goto, the Bible has a record of a western string instrument that is interpreted as geomungo. It tells that similar looking string instruments were interpreted or translated as geomungo from the ancient times until the latter era of the Joseon Dynasty, the Japanese Rule Era. Another name for geum or names of musical instruments related with certain players were introdueced with the ideas of geum to replace geomungo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s. Aesthetic elements and ideas of playing geum were succeeded by geomungo players. It seems that Korean classical scholars selected ‘geomungo’ as a collective name for geum, seul, geomungo and other similar instruments and adopted the concept with Chinese musical ideas. Geum was introduced in the 11th year of King Yejong, Goryeo (1116) and was used with seul in music for Confucian ceremonies, and its techniques were stopped at the end of Korean Empire Period. Gayageum and seul are similar in that the right hand and the both hands fingers except that they have different numbers and sizes of strings. However, geum and geomungo have different structures and techniques. Literatures include sentences explaining that materials and parts of geum, seul, geomungo and such are royal foxglove tree and silk strings, of geum are hui and jul and of seul are juhyeon and ju. However, it is hard to find uses of anjok, gwae and suldae which are names of parts of geomungo. Famous geums have contexts of history. Along with dignity and talents of producers and backgrounds and ideas of the period, they symbolizes or metaphorizes contexts of classical literatures to be involved with the ideas of geomungo. Traces of famous geum players left in classical literatures were reborn as geomungo ideas of Korean classical scholars. Musical and literary ideas from surfaces or belows of masters and famous songs of famous geums and words and phrases showing other aesthetic senses were used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 physically or chemically. Joseon scholars considered geomungo as the tool of manners and cultures. Therefore, it can be deducted that they would have possessed one essentially and that there would have been many players. The instruments played by Mulgyeja and Master Baekgyeol seemed to be a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 not geomungo or g...

        • KCI등재

          소설과 연극의 이야기하기(strorytelling)

          김윤희(Kim, Yoon-Hee) 우리문학회 2016 우리文學硏究 Vol.0 No.52

          콘텐츠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매체의 전회는 이야기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태도를 바꿔 이야기 자체보다는 같은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인 매체 환경과 새롭게 변형하는 재창작자의 시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즉, 기존의 이야기와 그것을 변주한 작품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각각의 매체가 지닌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자 창작자들 사이의 시각 차이를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한국적 상황을 바탕으로 한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을 이방인의 시각에서 새롭게 변주한 동명의 연극 〈빛의 제국〉의 이야기하기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소설과 연극을 작동시키는 메카니즘은 무엇이며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두 창작자들이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를 살펴보았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은 남파공작원이라는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소설에서 주인공 김기영이 남파공작원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물론 그와 같은 내력이 그의 현재를 만들어낸 중요한 인자이기는 하지만,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비로소 단절되어 있던 과거를 인정하고 자기의 서사를 완성함으로써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현존재로서의 실존을 깨닫게 되는 여정에 있다. 그리하여 소설은 그가 지금 여기 있는 시공간을 낯설게 하여 생경한 모든 것들에서 과거를 떠올리고 망각했던 자기를 추체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에 비해 연극 〈빛의 제국〉은 자기 서사의 완성보다는 개인의 서사 속에 담겨 있는 공동체의 서사를 복원하는 데 주력한다. 연극이 지닌 현장성과 쌍방향성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 함께 하는 우리들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이끌어냄으로써 분단에 대해 재인식하도록 한다. 이러한 분단에 대한 재인식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면서도 이에 대한 인식이 없는 한국인들을 낯선 이방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재의 삶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살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을 형성하는 데 있어 근간이 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처럼 연극 〈빛의 제국〉은 이방인이라는 낯선 시선을 투과하여 분단이 아픈 상처이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치유해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라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이끈다. As developments in science have created numerous media, the demand for stories has increased. However, creating stories is something that machines cannot do; therefore, they are not replacements for humans in this context. Thus, stories cannot be written at high speeds despite developments in civilization. These days, a common storytelling technique is to change the goal and meaning of an existing story so that they are appropriate for the characteristics of media. This trend has become so popular that we often find it in the lines of characters in TV drams. When we take a look at stories that are retold, we focus on the way they unfold rather than on the narratives themselves. Techniques for telling stories are greatly influenced by viewpoints of the recreators whose work may cause the same stories to be understood differently or the focus of stories to change, resulting in different forms of expression. Young-ha Kim’s novel, The Empire of Light, uses the unique material of a North Korean spy; however, the fact that the main character—Ki-young Kim —is a spy is not considered very important in the novel. His identity is naturally one of the important factors that created his present status, but what is given more weight in the novel is the acknowledgment of his past, which was severed. He completes his own narration, realizing his existence as a being who can be honest about his desires. The novel unfolds in a way that defamiliarizes the reader with the time and place of the main character’s current existence by having him recall the unfamiliar past and relive forgotten experiences. In comparison, the play, The Empire of Light, focuses more on restoring the narration of community than on completing one’s narration. Plays convey the sense of being on-the-spot or bidirectional, capturing the collective trauma of an audience and making us aware again of the divisions in our nation. This reawakening regarding division is possible because the play resorts to the perspective of a stranger who views Koreans as living in the only divided nation in the world without being aware of this fact.

        • KCI등재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작가의 일상·의식·욕망

          김성렬 우리어문학회 2010 우리어문연구 Vol.38 No.-

          Choi In-Hoon is very unique writer having much parody novels in his all works on 1960's. A Day of Writer Goobo is his grand finale of his parody novels and also has meaning of mid account on 1960's creative works. This work opens a beginning as relating continuous complex of marginal intellectual to the west accomplished modernization earlier than the east. This work has such a last work certifying the value of Buddism and getting a peace of mind. The mid parts of this work is filled with fierce meditation for giving modernization to korean literature, arts and society in historical roughness like division. We find this work is a product of elaborate plan and composition mind not but endumerations of simple ideas because this work shows trace of so many days over toiling and laboring for getting modernization of korean literature, arts and society. When we consider these points, we can find his vigrous drama creating on 1970's is caused by this work accounting and recertifying on his 1960's writing novels. We also find His pioneering researcher's eye on literary history is caused from his academic talent and pioneering medation not having any other writers. 최인훈은 패러디 소설이 1960년대에 활발하였던 그의 창작의 절반에 가까운 독특한 작가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그의 패러디 소설의 대미이면서 1960년대의 소설 창작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를 가진다. 근대를 일찍 연 서구를 끊임없이 대타적으로 의식하는 주변부 지식인의 열패감을 술회함으로써 시작하는 이 연작은 불교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구보의 관념의 여정으로 끝난다. 이러한 시작과 끝 사이의 중간 부분은 분단 상황이라는 시대적 험난함 속에서 우리 문학과 예술, 사회에 자율성과 주체성 ― 근대성을 부여하려는 치열한 사유들로 채워진다. 우리는 이로써 산만한 관념의 나열인 듯 보이는 이 소설이 실상은 우리 사회와 문화의 근대성 획득을 위하여 광장과 밀실을 부단히 오가며 고심한 수많은 날의 궤적을 마치 하루처럼 보여주는 치밀한 기획과 구성의식의 산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참조하면 1960년대의 창작을 결산하고 재점검하는 이 작품이 있었음으로 하여 1970년대의 왕성했던 최인훈의 희곡창작이 가능했음 또한 알 수 있게 된다. 우리 문학의 근대성 획득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타 학자보다 앞선 문학사가적 안목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짚어볼 수 있는데 이는 책 속으로 망명한 그의 학구적 기질과 진취적 사고의 소산이었다. 이 글은 이러한 이면에 숨은 그의 보수적 측면도 동시에 밝혀보았다.

        • KCI등재

          고전문학 : 고전문헌에 나타난 거문고의 명칭에 대한 연구

          정하운 ( Ha Un Jung ) 우리어문학회 2011 우리어문연구 Vol.40 No.-

          우리의 전통악기 중 하나인 <거문고>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또는 현악기의 통칭으로 불리면서 고구려에서 제작, 통일신라의 <금도(琴道)>를 이루었고, 고려와 조선 선비들의 수양을 위한 필수품으로서 독창적인 이면(裏面)에 대해 찬사를 받아가며 오랜 세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왔으나, 실용성의 여부와 연주방식의 어려움으로 그 위상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거문고(玄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악지」의 <현금(玄琴)>조에 있고, 『악학궤범』의 권지 칠에도 <현금(玄琴)>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고전문헌 안에서 중국의 <금(琴)>에 대한 음악사상이 <거문고>의 음악사상을 대신하고 있는 걸로 보아 <거문고연주자>의 음악정신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확인된다. <금>의 표기가 <재래현악기>와 <가야금>을 포함하고 있는 점과 <금>의 이칭이 <거문고>의 이름으로 사용된 점에서 <거문고>의 무형적 가치 중 상당한 부분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칠현금>을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나, 일본학자들은 <와공후>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 음악학계에서 밝혀진 <위진시대 와공후>가 <거문고>의 전신(前身)이라는 해석이 한·중·일 학자들 간에 논의되고 있다. <칠현금>의 전래 전에 유사한 악기로 추정되는 고분벽화의 <금>을 <현금>으로 보는 국내학자와 <와공후>로 보는 일본학자의 의견대립이 있고, <거문고>로 주장하는 국내학자들도 견해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문고(玄琴)>·<금(琴)>·<고토(こと: 琴)> 외에 성경(Bible)에서도<거문고>로 해석된 서양 현악기의 기록이 발견되고 있어, 이미 고대에서부터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체형이 비슷한 현악기는 <거문고>로 해석 또는 번역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의 이칭이나 특정 연주가와 관련되어있는 악기이름이 <금>의 사상과 함께 수입되어져 우리 고전문헌 안에서 <거문고>를 대신했으며, <금>의 연주에서 비롯된 미학적 요소와 사상들을 <거문고연주가>들은 답습하게 되었고, 우리의 선비들은 <금>·<슬(瑟)>·<거문고> 등을 통칭하는 의미로 <거문고>를 설정하여 중국의 음악사상과 함께 수용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 <금>은 고려 예종 11년(1116)때 들어와 <문묘제례악>에 <슬>과 함께 쓰이다가 한말(韓末)에 주법(奏法)이 끊어졌다. <가야금>과 <슬>은 각각 오른손과 양손 손가락으로 뜯는 점, 줄(絃)의 수와 크기만 다를 뿐, 별 차이가 없는데, <금>과 <거문고>는 구조와 <탄주(彈奏)>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문헌의 내용에 <금>·<슬>·<거문고> 등의 재료나 부품은 오동나무·명주실과 <금>의 <휘(徽)>·<줄(絃)>, <슬>의 <주현(朱絃)>·<주(柱)> 등이 있으며, <거문고>의 부품명인 <안족(雁足)>·<괘(과)>·<술대(匙)>에 대한 표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명금(名琴)들은 고사(故事)의 내용을 갖추고 있어, 제작자의 품격·재능, 당시대의 배경·사상 등을 이면(裏面)에 동반하여 고전문헌상의 내용을 상징과 은유로 견인하면서 <거문고>의 사상에 관여하고 있다. <금>의 명인들이 고전문헌에 남긴 체취는 우리 선비들의 <거문고사상>으로 재탄생하였다. 명금, 금의 명인, 명곡 등의 표면 또는 이면(裏面)으로부터 취한 음악적·문학적 사상과 그 외의 미의식을 내재한 어휘나 문구들은 우리의 고전문헌에 유입되어 물리적 또는 화학적으로 투영되어졌다. <거문고>를 예악과 수양의 도구로 생각했던 조선의 선비는 필수품으로 소장하였을 것이므로 많은 연주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계자(勿稽子)와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연주한 악기는 활동 연대로 보아 <거문고>도 <가야금>도 아닌 <재래현악기>이었을 걸로 보인다. 또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금갑(射琴匣)>에 관한 일화의 <금> 역시 <거문고>나 <가야금>의 전래와 유포된 시기의 연대와 비교해볼 때 <거문고>가 아닌 <재래현악기>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금>과 <슬> 및 <거문고>의 음악사상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음으로 인해 <금>과 <슬>, <거문고>의 정확한 명칭이 혼선을 빚게 되었으며, 현악기의 통칭으로 사용하는 경향에 따라 서양의 현악기도 <거문고>로 해석되어졌고, <거문고>·<가야금> 전래 이전의 <재래현악기>도 모두 <거문고>로 해석되고 있음이 파악되었다. "Geomungo", a Korean traditional musical instrument, was called baekakjijang (meaning the best musical instrument of all) or as the collective name for string instruments. It was produced in Goguryeo, and Geumdo, the theory and techniques of geomungo, was accomplished in Unified Silla. Classical scholars of Goryeo and Joseon praised its unique aspects as an essential instrument to cultivate their mind. It played various roles for a long time. However, due to its impracticality and difficult playing techniques, its status is falling. The record of geomungo is in Chapter Hyeongeum, ``Akji`` of Samguksagii, and volume 7 of Akhaguebeom has it recorded as Hyeongeumi. Chinese musical ideas about geum in classical literatures represent the musical ideas of geomungo. It tells that Chinese ideas influenced the musical ideas of geomungo players. Considering that the word geum include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s and gayageum and that another name for geum was geumungo, it was deducted that significant parts of intangible values of geomungo were introduced from China. In Samguksagi, it was explained to have been created by remodeling chilhyeongeum, but Japanese scholars argue that it originated from wagonghu. Also, scholars of Korea, China and Japan are discussing that wagonghu of Wei and Qin era found in Chinese musical academic circles is the origin of geomungo. Korean scholars consider geum in ancient tomb murals which is assumed to be a similar instrument before the introduction of chilhyeongeum as hyeongeum, but Jananese scholars are disagreeing because they consider it as wagonghu. Even some Korean scholars believe that is is geomungo. Beside geomungo, geum and goto, the Bible has a record of a western string instrument that is interpreted as geomungo. It tells that similar looking string instruments were interpreted or translated as geomungo from the ancient times until the latter era of the Joseon Dynasty, the Japanese Rule Era. Another name for geum or names of musical instruments related with certain players were introdueced with the ideas of geum to replace geomungo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s. Aesthetic elements and ideas of playing geum were succeeded by geomungo players. It seems that Korean classical scholars selected ``geomungo`` as a collective name for geum, seul, geomungo and other similar instruments and adopted the concept with Chinese musical ideas. Geum was introduced in the 11th year of King Yejong, Goryeo (1116) and was used with seul in music for Confucian ceremonies, and its techniques were stopped at the end of Korean Empire Period. Gayageum and seul are similar in that the right hand and the both hands fingers except that they have different numbers and sizes of strings. However, geum and geomungo have different structures and techniques. Literatures include sentences explaining that materials and parts of geum, seul, geomungo and such are royal foxglove tree and silk strings, of geum are hui and jul and of seul are juhyeon and ju. However, it is hard to find uses of anjok, gwae and suldae which are names of parts of geomungo. Famous geums have contexts of history. Along with dignity and talents of producers and backgrounds and ideas of the period, they symbolizes or metaphorizes contexts of classical literatures to be involved with the ideas of geomungo. Traces of famous geum players left in classical literatures were reborn as geomungo ideas of Korean classical scholars. Musical and literary ideas from surfaces or belows of masters and famous songs of famous geums and words and phrases showing other aesthetic senses were used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 physically or chemically. Joseon scholars considered geomungo as the tool of manners and cultures. Therefore, it can be deducted that they would have possessed one essentially and that there would have been many players. The instruments played by Mulgyeja and Master Baekgyeol seemed to be a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 not geomungo or gayageum considering their living periods. Also, geum in the story about Sameumgap recoreded in Samgukyusa is sure a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 not geomungo considering the times of introductions of geomungo and gayageum. Because musical ideas of geum, seul and geomungo were mixedly used in such literatures, accurate names of geum, seul and geomungo became confused. Also, because geomungo was used as the collective name for string instruments, western string instruments were interpreted as geomungo, and even traditional string instruments before introductions of geomungo and gayageum are all interpreted as geomungo.

        • KCI등재

          정치적 현실과 시의 대응양식 : 설정식의 시세계

          김은철(Kim Eun-Cheol) 우리문학회 2010 우리文學硏究 Vol.0 No.31

          설정식은 해방 공간에서 ‘문제적 개인’으로 산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하여 해방공간을 거치며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북에서 사형을 당한 그의 삶 자체가 우리의 왜곡된 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한문학과 유교적 가풍, 기독교와 영문학, 중국과 미국유학, 미군정청과 조선문학가동맹, 보도연맹과 인민군 입대, 휴전협정시 북측 통역원 장교였다가 스파이혐의로 사형당하는 점 등은 파란만장한 우리의 비극적인 산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서 세계관으로 자리 잡은 양가적 가치관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정국을 헤쳐 나온 우리들의 비극적 세계관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광주학생운동과 만보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민족주의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어서 구체성은 결여되었고 따라서 시기별로 현실적 대응에는 현실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행로는 세계정세와 민족에 대한 구체적 인식, 확고한 현실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유일한 기간인 해방공간에서 몇 번에 걸친 그의 정치적 변신은 그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던 셈이다. 습작기에 그는 카프의 영향으로 현실인식이 강한 작품들을 썼는가 하면 유년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주제로 한 서정적 작품들도 써서 시적세계관이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유학 후에 쓴 시집 종에는 해방의 환희와 열정, 환상에 젖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미군정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서부터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러한 비관적 목소리는 결국 조국의 현실이 일제 식민지시대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결국 남로당의 정책 노선이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는 새나라 건설이라는 명제를 앞세우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목적시를 쓰게 된다.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미국유학을 거쳤다는 자만감, 자부심, 현학적인 태도는 정치적 현실의 좌절을 맞으면서 민족의 미래를 예언하는 신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데 제신의 분노는 바로 그의 삶과 세계관의 최종 결정판인 셈이다. 제신의 분노 이후 작품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고 정치적 전향을 거듭하던 그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정치세력에 의해서 41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세계 질서의 재편이라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지 못 한 채, 미시적인 시야로 해방정국을 맞이한 결과로 그는 정치적 변신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이데올로기와 민족이라는 관념에만 충실했던 탓에 시의 의장은 무시되었으며 그 결과로 오히려 그의 문학은 인민대중과는 더욱 멀어져 갔다. 정치적 격동기에 정치적 삶을 산 시인과 정치에 예속된 문학의 모습을 설정식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Seol Jung-Sik was a problem poet in the liberation period of Korea. He was a person engaged in the political and literary activities during the three years. The South Korea area was in the acutely political situation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wings. He experienced selectionly the two wings during the period, and finally went to the North Korea after the Korean War. But he was the poet living tragic life in the North Korea to the death penalty. This essay was forcused on the change of consciousness and the style of poetry. His earier poems was expressed the two features, such as lyricism based on nostalgia and criticism of real situation. So in this period his consciousness was not fixed to the one side. In the liberation period, he wrote phantastic poems on the future of Korean nation, because he did not understand the state of the domestic situation. After studying in the U.S. he published the 『Jong(Bell)』 in Apr. 1947, he expressed the impression on the liberation and the enthusiasm for the future through sunflower, on the other hand, he expressed the criticism and fury to the American military administration. By his Christian outlook on the world, self-conciet on the studying in the America, and his pedantic attitude, he selfstyled prophet that foretell the future of the people. The 『Grape』, 『Fury of Gods』 are the final best works of his life and outlook on the world. After the 『Fury of Gods』, his work was stopped, and he repeated political transformation several times. After all he was put to death in the North Korea that he finally choosed. He is showing to us a person who lived a political life in the period of political ferment, and showing the literary figure which is subejected to the politics.

        • KCI등재

          『노동의 새벽』에 내재화된 노동의 기호론적 의미

          정유화(Jeong, Yu-Hwa) 우리문학회 2014 우리文學硏究 Vol.0 No.44

          본고에서는 기호론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노동의 새벽』을 중심으로 그 시적 코드와 의미작용을 분석했다. 예의 박노해는 삶과 죽음의 대립적 코드로써 노동의 의미를 산출해내고 있다. 그 대립적 코드는 노동자의 몸을 물질화하기도 하고, 노동자를 삶과 죽음 사이에 감금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의 코드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개별자인 ‘나’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우리’이다. 그래서 박노해는 ‘우리’로의 전환을 위해 감정적 기표인 ‘소주(술)’를 그 매개체로 사용한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음에서 삶’으로, ‘물질에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노동의 햇새벽을 맞는다. 하지만 그 노동의 햇새벽은 오래가지 못하고 만다. 감정적 기표인 소주의 기운이 소진되면 다시 ‘우리’에서 ‘나’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노해는 〈노동의 새벽〉과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에 있는 작품을 통하여 비로소 이성적 차원의 견고한 ‘우리’를 창조해내게 된다. 그러한 ‘우리’ 코드는 ‘삶과 죽음의 모순된 결합구조’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적 모순을 상생의 관계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박노해 시인이 창조한 노동의 기호론적인 새로운 의미이다. The present study analyzesDawn of Labor in terms of its poetic code and signification by using the semioticmethodology. As usual, No-hae Park produces themeaning of labor as a conflict between life and death. The conflict sometimes materializes the body of the laborer but at other times it locks up the laborer between life and death. This inconsistency is fixed by collective “we” not by individual “I” in the poem. In this vein, No-hae Park uses liquor as amediumof turning the individual “I” into the collective “we”. As a result, we come to greet the fresh dawn of labor that transforms death into life and material into life. However, the fresh dawn of labor does not last long.When the emotion signifier, “Soju (liquor)”, runs out, the collective “we” returns to the individual “I”. Thus, No-hae Park creates the solid “we” at a reasonable level by using literary works that are intertextually related toDawn of Labor. That “we” loosens the bonding structure of life and death and goes as far as to integrate the inconsistency between “laborer” and “employer”, which is mutually beneficial in the end. That is the new semiotic meaning of labor that No-hae Park creates in his poem.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