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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초연정의 문화사적 의의 고찰

        김현진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21 南道文化硏究 Vol.- No.43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cultural historic meaning of Choyeonjeong in Sunchon. Choyeonjeong is at the current Wangdae Village of Samchong-ri, Songgwang-myeon, Sunchon-si which is at the east of Mohu Mountain(母后山) rises at the boundary of Sunchon and Hwasun in Jeollanam-do Province. The whole area of Samchongdong(三淸洞), Mohu Mountain is a scenic beauty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called the ‘Garden of Choyeonjeong in Sunchon’. Choyeonjeong(趙濟亨)is a nu-jung built by Jin-choong Cho(趙鎭忠) in 1836 for the living in retirement and ancestral rites of Je-hyong Cho who lived five generations ago. The name, Choyeonjeong, was given by Yeonjae Byung-seon Song at the winter of 1890 by the arrangement of Jun-seop Cho who is a great-grandson of Jin-choong Cho. After that, Choyeonjeong becomes the place for academic lecturing admiring the ancestors by the future generations of Jin-choong Cho, and it also became the place to play together and for lecturing, and it had gugok culture by naming gugok in Samchongdong and creating gugok song. There is no other case of nu-jung in Sunchon area same as Choyeonjeong having cultural history. So, the three cultural historic meanings of Choyeonjeong are as follows. Firstly, memorizing the place of Okcheon Cho Clan. At first, the building of Cho-jung by Jin-choong Cho was originated by the practice of preserving and memorizing to perform ancestral rites for ancestor, Je-hyeong Cho. The descendants of Jin-choong Cho took the name of the pavilion and repaired to inherit the filial love and unfinished work of ancestor and also assured to inherit the virtue of the ancestor through the composed poem under a given theme or spoke the memorizing affection wishing the protection and infinity of the pavilion and traceable autographs of a departed wise people after repairing. However, Gyo-moon Lee evaluated that the descendants of Jin-choong Cho have the sincerity treating the devoted son as living. Secondly, it is playing together and lecturing at the Yeonjae school. Playing together and lecturing at Choyeonjeong in 1898 was not included in the annual report of 『Yeonjae collection』 and records of a deceased people's life, however, it was clearly a place of harmony that 70 writers of Yeonjae school at Bosung and Hwasoon centering Sunchon gathered. They planned the union of school, assured the way of gracious one strengthening 『Lesser Learning』, and intended to follow the way to go forward to the learning of Chu Hsi. It became the activity on Yeonjae school at Honam area in the latter part of the 19th century. Thirdly, it is the forming of gugok culture in Samchongdong. Joon-seop Cho, Jong-deok Cho, Joong-seop Cho, Tae-seung Cho, Chang-what Ahn, etc., formed Samchongdong gugok and wrote 6 poems of gugok song borrowing the rhyme of 「Muidoga」 and gugok name of Hwayanggugok to stand respecting China and Western barbarians consciousness under Japanese colonial era situation revealing a sense of respect to Chu Hsi and Wooam at the astounding Choyeonjeong. This artwork reveals landscape pleasure to speak the separation between reality and value orientation through heaven pursuing virtuous aspect or virtuous academic color such as cultivating the heart reminded by Cheolli Chechil or scriptures and natural scenery of the season. It is able to say that it is a place opening the page of gugok culture in Honam area. 이 논문은 순천 초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고찰한 것이다. 超然亭은 전라남도 순천과화순의 경계에 솟은 母后山 동쪽 현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왕대마을에 있다. 모후산삼청동 일대는 산수가 수려하여 ‘순천 초연정 원림’이라 일컫는 문화재청 명승이다. 초연정은 趙鎭忠이 1836년 은거와 5대조 趙濟亨 제사를 위해 지은 누정이다. 초연정이라는 이름은 조진충의 증손 趙俊燮의 주선으로 1890년 겨울 연재 송병선이 지었다. 이후 초연정은 조진충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며 학문을 강론하는 곳이 되었고, 연재학파의 동유와 강회처가 되기도 하였다. 또 근대기에 모후산 三淸洞 九曲 명명과 九曲歌가창작되는 등 구곡문화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초연정과 같은 문화사를 갖춘 경우는 순천 지역 여타 누정에는 없다. 이에 본고는 초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세 가지로 고찰하였다. 첫째, 옥천조씨 가문의 追遠之所이다. 애초 趙鎭忠의 초정 건립은 5대조 趙濟亨을 제사지내기 위한 報本追遠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 조진충의 후손들은 선조의 효성과 유업을 계승하고자 정자 이름을 구하고 중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영시를 통해 先德 계승을 다짐하거나 정자와 군자들의 자취가 서린 유묵에 대한 수호와 무궁함을 염원하는 追遠之情을 술회하였다. 이에 대해 보성 출신 항일의병장 이교문은 조진충의 후손들이 如在之誠을 지녔다고 평가하였다. 둘째, 연재학파의 同遊와 講學이다. 1898년 초연정 동유와 강회는 『연재집』연보와 행장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순천을 중심으로 보성과 화순 등지의 연재학파 문인들 70명이 대거 모인 회합의 장이었다. 그들은 학파의 결속을 도모하고, 『소학』을 강조하며 군자의 길을 지향하리라 다짐하였고, 주자의 進學之道를 본받으려 하였다. 이는 19세기 후반 호남지역 연재학파 활동의 일면이 된다. 셋째, 三淸洞 九曲文化의 형성이다. 초연정에서 조준섭, 조종덕, 조중섭, 조태승, 안창환 등이 모후산 승경이 뛰어난 곳에 주자와 우암에 대한 존모의식을 발현하면서 일제강점기 상황에 존화양이 의식을 견지하고자 「무이도가」 압운과 화양구곡 구곡명을 차용하여 三淸洞 九曲을 형성하고 九曲歌 6편을 지었다. 작품은 선계지향의 도가적 면모나 天理體察이나 敬을 통한 心 수양 상기 등의 도학적 색채 및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과 지조있는 삶 간의 괴리감 술회의 산수적 흥취를 드러낸다. 호남지역 구곡문화의 한 장을 펼친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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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연구의 동향과 과제 -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의 성과를 중심으로

        강정화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6 南道文化硏究 Vol.0 No.31

        본고는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이 지난 9년여 동안 수행한 지리산 관련 연구 성과를 개략 적으로 정리하고 향후 추진해야 할 과제를 살펴본 것이다.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2007 년에 문학ㆍ역사ㆍ철학ㆍ지리ㆍ생태 등 여러 분과의 박사급 연구자 10여 명이 지리산 연구를 위해 결성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산악문화 연구단이다. 지리산권문화연구단에서는 그동안 지리산 관련 인문분야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 하여, 대략 연구논문 300편, 자료총서 33권, 연구총서 11권, 번역총서 8권, 교양총서 7권, 마을총서 1권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산출하다. 지리산은 역사적으로 국내 여느 산에 비해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계된 공간이다. 따라서 지리산권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지적 활동과 관련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예컨대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람록이나 기행시, 지리산권역 ㆍ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南冥學派와 蘆沙學派, 근ㆍ현대의 東學과 빨치산의 활동 등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 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산 연구에 있어 인문분야 연구자가 없던 국내 학계에 ‘산의 인문학’ 또는 ‘산학(山學) 연구’의 학술적 토대를 구축하고, 나아가 국내 여타 산 문화 연구로의 관심을 촉진시키고 확산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다. 그리고 향후 이의 지속적 연구를 위한 과제도 점검하다. 무엇보다 연구자가 이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하고, 나아가 지리산 연구를 수행할 새로 운 연구자를 폭넓게 확보해야 한다. 또한 지리산을 넘어 국내외 명산과의 비교 연구로까 지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분야별 심화 연구 및 분과 간 공동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This study set out to roughly sort the findings of Mt. Jiri research conducted by the Jirisan Region Cultural Research Institute (hereinafter “the Institute”) for the last nine years and propose its future tasks. The Institute is the nation’s first and only research institute (about mountain culture) that was formed by ten doctoral researchers from various fields: literature, history, philosophy, geography, and ecology. The Institute was formed to conduct research on Mt. Jiri in 2007. The Institute has carried out ongoing research on humanities related to Mt. Jiri. It has achieved eye-opening results including approximately 300 research papers, 33 collections of data, 11 collections of research, eight collections of translations, seven collections of liberal arts, and one collection of villages. Mt. Jiri’s culture is more closely related to human life than any other mountain in the nation’s history. These studies preserve a rich repository of materials related to the intellectual activities of intellectuals that were active around the region of the mountain during the Joseon period. There has been, for instance, active research conducted across various fields: travel journals and poems after a trip to Mt. Jiri, the Nammyeong School and the Nosa School that were active around Yeongnam and Honam within the perimeter of Mt. Jiri, and the activities of Donghak and North Korean partisans in modern and contemporary times. They established an academic foundation for “humanities of the mountains” or “research on mountain studies” in the academic circles of South Korea, where there had been no research in humanities on the mountain. This made a huge contribution to the facilitation and spread of interest in research about other mountain cultures in the nation. The present study also reviewed tasks for ongoing research for the future. It is most important that there should be conditions arranged for researchers to conduct ongoing studies. It is also critical to secure a broader scope of new researchers to conduct research on Mt. Jiri. Those efforts should extend to comparative studies between Mt. Jiri and other celebrated mountains home and abroad. This desperately calls for in-depth research in each field and joint research between different discip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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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안 竹防簾 어업과 물질·물건의 전통지식

        박경용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3 南道文化硏究 Vol.0 No.25

        죽방렴은 참나무 말목을 바다에 박고 발처럼 엮어 만든 대나무 어살을 둘러쳐서 멸치를 주 어종으로 포획해온 원시어법이다. 죽방렴 어업은 남해군 지족해협처럼 조수 흐름이 빠를 뿐만 아니라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특 수한 지형 여건 및 멸치와 같은 특정 어류의 반복적 회유 등과 같은 복합 환경적 배경 속에서 발달한다. 어류 의 습성 및 조수 흐름, 물때 등을 이용한 어구 설치와 어획방식 등은 죽방렴 어업의 자연과 우주에 대한 전통 지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죽방렴어구의 재료 조달과 설치 및 어획과 가공, 유지 보수 등 이른바 죽방렴 어업의 재생산을 위한 다양한 도구나 시설물에 대한 인식과 운용지식은 죽방렴 어업의 물질과 물건에 대한 전통지식 을 함의한다. 죽방렴 어업의 물질·물건 전통지식은 어획 성과와 가공품의 품질을 제고하고 어구의 내구성, 경제성 및 어로 작업의 효율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죽방렴 어업의 지속적 발전과 재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사안이다. 동시에 ‘죽방렴 복합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남해안 지방에서 특수하게 전승되어온 어로문화의 일면을 세밀하게 엿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최근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죽방렴 어구와 어획과정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도록 함 으로써 관광 및 교육자원화도 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의의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남해안 죽방렴 어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존과정에 어려움 이 제기되고 있어 보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 첫째, 해양환경 오염과 수온 변화, 어류 남획 등으로 죽방렴 어획량이 급격하게 감소됨으로써 유지, 존속을 위 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획량의 감소는 채산성 악화로 인해 죽방렴 어업의 유지를 위한 시설 투자를 꺼리게 됨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이를 운영해나갈 인력을 확보할 수 없게 만든다. 현재에도 지족해협일대의 23개 죽방 렴 어업자들은 60대, 70대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족해협근역의 공단이나 취락지구 로부터 바다로 유입되는 오폐수의 관리를 철저히 함과 동시에 해양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마구잡이식의 어로행 위도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죽방렴은 그 모양이나 자연 및 우주 원리에 의해 어획하는 방식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지만, 죽방 렴 어구의 재료나 유지, 관리방식 및 어획과 가공작업 등에서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전래의 죽방 렴 어업이 지닌 문화요소들이 상당히 변질, 훼손, 왜곡되고 있다. 근년에 ‘명승’ 문화재로까지 지정된 마당에서 이와 같은 문화요소의 심각한 변화는 죽방렴 어업의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저하시킨다. 이에 대한 대안으 로 뭍에 근접해 있는 1개의 죽방렴에 대해서는 예산 지원을 통해 참나무 말목과 대발을 설치하는 등 본래의 형 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어 다행이다. 죽방렴 자체는 이렇게라도 해서 원형성을 보존하지만, 이의 유지 및 보존을 비롯하여 어획과 가공, 포장, 판매 등 죽방렴 어업의 재생산을 위한 부수적인 관련 문화적 사 상(cultural things)의 보존방책은 전혀 강구되지 않고 있다. 셋째, 위 두 번째 사안과 관련하여 ‘죽방렴 문화복합’의 전통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시설이나 도구를 비롯하여 관 련 서사나 민요, 공동체 생활상(놀이·연희·울력), 물증(사진·장부·문서) 등의 자료들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 는 타 생활부문과 마찬가지로 사회변화와 더불어 기능 면에서 현실적 적합성이 떨어지는 물건이나 시설, 기억 , 물증 등이 자연적으로 도태, 인멸되어온 결과이다. 죽방렴 어업의 경우 플라스틱제품이 보급되기 전만 하더 라도 대나무로 제작된 산대미나 발 등을 비롯하여 참나무 말목을 박는 박말과 박메, 쇠두겁등이 일상적으로 활용되었었다. 죽방렴 어업의 지원시설인 발막만 하더라도 통풍을 고려하여 대나무로 벽면을 세웠으며, 내부 에는 멸치 건조용의 간대를 설치하였다. 많이 늦긴 했을지라도, 각 업주들이 보존하고 있는 과거의 도구들이 나 물증을 비롯하여 죽방렴 운영과정에서 생산되거나 전승되어온 기억이나 서사자료까지 수집할 필요가 있다 . 물건의 경우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원로 어업자들의 기억을 되살려 원형에 가깝게 제작하면 될 것이다. 그리 하여 죽방렴 문화복합을 재현해서 전시물로 남기고 후세에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른바 ‘죽방렴역사관 ’ 혹은 ‘죽방렴박물관’, ‘죽방렴문화전승관’ 등의 이름으로 죽방렴 어구의 원형 및 관련물건과 물증, 어로작업 모습, 어획원리, 생활상, 생태조건 등 관련되는 유·무형의 문화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겠다. 지족 해협의 죽방렴은 인근 사천시 삼천포해협과 더불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존, 전승되므로 관련 문화전승 공간 의 구축은 꼭 필요하다.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traditional knowledge of materials and things on the Juk-bang-ryeom[ 竹防簾], handed down at the JiJok Strait[知足海峽] in the southern sea, Korea. The Juk-bang-ryeom is one of the oldest and the primitive fishery tools in korea, operating by a fast stream from a wide gap of the ebb and the flow of the tide. It needs various traditional knowledge of nature and space, concerning of the geographical features above and below the sea, the tide, the dept of the sea, tide time and the habits of fishes etcs.. It have been made of bamboo, oak tree and other several materials. The perceptions and concerning skills about establishing of fishery tools, catching and manufacturing of anchovy(Maelchi) are traditional knowledge of materials and things on the Juk-bang-ryeom. Traditional knowledge of materials and things are scientific and indigenous one based on folk fishery and local ecological conditions. It is very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handed down by our ancestors. Therefore we should research traditional knowledge of materials and things and plan the way for maintenance and conservation and usage of the Juk-bang-ryeom. The establishment of the Juk-bang-ryeom museum is one way for conservation and transmission of the concerning culture complex.

      • KCI등재후보

        순천시 문화의 거리 이용행태 및 이미지 특성 분석

        이정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3 南道文化硏究 Vol.0 No.25

        문화의 거리란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등을 주제로 조성된 거리[길]를 뜻하며, 일부 자생적인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990년대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거리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지역의 전통과 특색을 살린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여 문화예술축제와 문화 활동의 중심공간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축제와 이벤트를 제공하여 지역민을 하나의 공통체로 통합시킬 수 있는 도구이자 도시의 이 미지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는 장소 마케팅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활성화 되어 왔다. 순천시 원도심에 위치한 문화의 거리는 조선시대에는 순천읍성일곽으로 약 700년의 역사를 지닌 중심시가지 로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에도 순천의 상징적 장소이자 역사,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지닌 곳이다. 본 연구에서는 순천시 문화의 거리에 대한 방문자의 이용행태 및 이미지특성을 파악하여 향후 문화의 거리의 계획 및 관리방안을 제공하였다. The Suncheon Culture Street was the Suncheon Eup-Sung when the distance in the Joseon Dynasty with a history of about 700 years in central city area after the Japanese occupation and its symbolic place in Suncheon-city and history, with the central role of culture as a destina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sis on the user's behavior and image characteristics of Suncheon Culture Street. The research data were collected from visitors in Suncheon Culture Street and the main results of the analysis summarized was as follows:The visit purpose of the Culture Street were found 'food establishments use(26.2%)' showed the highest 'appointment/meeting(16.0%)', 'Culture Street atmosphere(11.7%)', 'learning objectives, such as 'cultural heritage(7.4%)'. The motivated to choose of the Culture Street were found 'good atmosphere of the street(26.4%)'and 'famous(13.9%)', as shown, The time to reach 30 to 1 hour (89.1%) can be reached in the use of short- range, respectively. While the positive attitudes for the image of the Culture Street were 'unique atmosphere(subject)(3.61)', 'easy to walk(3.61)' and 'landmark(3.30)', the negative attitudes were 'night drive safety/security(2.03)', facilities(2.84)', and 'weak of cultural events(2.85)'. Total satisfactory level of the culture street image was estimated to be 3.51The psychological factors related to the satisfaction of the Culture Street were composed of four characters such as identity, tradition, culture and service. The estimation formula for the satisfaction was:Suncheon Culture Street Satisfaction=3.508 + 0.214 (identity) + 0.196(tradition)+0.367(culture)+0.066(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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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판소리의 전승실상과 특징

        표인주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4 南道文化硏究 Vol.0 No.27

        순천 판소리의 역사문화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순천 판소리의 전승실상을 파악해보고, 그것을 토대로 전승적인 특징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순천 판소리의 형성과 발전에는 ①순천은 15세기 초에 순천도호부로서 정치군사적 중심지이었다는 점, ② 순천은 장시가 발전한 경제적인 유통공간이었다는 점, ③순천에서 활동한 신청과 권번이라는 민속예술적인 배 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 ④순천이 전남 동부지역의 교육적 중심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점 등 역사문화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토대로 순천 판소리의 전승 실상을 ①순천 판소리 초창기의 오끗준과 김질엽, ②순천 판소리 형성에서 송만갑의 역할, ③박봉술과 소리선생, ④순천 판소리 계승자로서 소리꾼으로 나눌 수 있다. 순천 초창기의 판소리를 오끗준과 김질엽을 중심으로 보면 동편제 소리로서 <춘향가>와 <수궁가>가 널리 불리 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소리를 계승하는 제자들이 불분명하여 그 음악적인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 기 어렵다. 그래서 순천 판소리의 면모는 송만갑의 역할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송만갑은 많을 제자를 배출했지만, 순천과 인연을 맺고 있는 명창으로 가야금병창 오태석을 비롯해 박초월ㆍ김 연수ㆍ박봉술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송만갑을 중심으로 송문 일가의 판소리를 계승하고 있다. 오태석은 20세 무렵 1918년부터 1921년경에 낙안에 머물렀던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익혔고, 박초월은 <춘향가>ㆍ<흥보가>ㆍ< 심청가>를, 김연수는 <흥보가>와 <심청가> 전편을 송만갑에게 배웠다. 특히 김연수는 순천에서 동편제를 익혔 고, 박봉술과 창극단활동을 하면서 순천 판소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송만갑 못지않게 순천 판소리 발전에 기여한 소리꾼으로 박봉술인데, 순천에 정착한 것은 해방 후로 알려져 있 고,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순천국악원의 소리선생으로 있으면서 성창열ㆍ선동옥ㆍ박정례 등을 배출했으며, 순 천지역을 중심으로 순흥극단을 조직하여 주광덕ㆍ공기남ㆍ배금찬ㆍ박정례ㆍ선농월ㆍ박향ㆍ성창렬ㆍ성옥란 등 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박봉술은 박정례를 중심으로 성창렬ㆍ선동옥ㆍ선농월 등의 제자들을 배출하여 순천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순천 판소리는 송흥록ㆍ송만갑ㆍ박봉술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있지만, 서편제와 보성제의 소리가 혼합되어 계승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동편제 소리의 계승은 송순섭ㆍ김향순ㆍ주순자ㆍ성판수ㆍ박미홍ㆍ김영애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동편제와 보성제가 혼합된 판소리는 전옥순ㆍ염금향ㆍ황철환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보성소 리는 김몽석과 주순자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천 출신으로 보성 소리를 계승하고 있는 소리꾼으로 주소연과 박지윤을 들 수 있다. 순천 판소리의 특징을 창자와 유파, 그리고 텍스트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먼저 판소리 창자 및 유파에 따른 특징으로, 동편제는 송흥록-박만순-오끗준의 계열과 송흥록-송광록-송우룡의 계열이 있고, 송 우룡 계열은 다시 송우룡-송만갑 계열과 송우룡-유성준의 계열로 나누어진다. 보성제는 정응민-성우향의 계열 이 있지만, 순천 지역 출신의 명창들은 거의 대부분 동편제 창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순천에 는 동편제가 중심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보성제의 전승도 확대되고 있는데, 본격적인 전승은 염금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순천 판소리의 특징을 텍스트 계승에 나타난 것을 토대로 파악할 수 있는데, 순천 판소리는 동편제 소 리로서 송만갑의 <춘향가>ㆍ<적벽가>와 유성준의 <수궁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순천에서 송만갑과 유성준 의 소리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명창이 박봉술이기 때문에 <적벽가>가 대표작인 그를 순천을 대표할 수 있는 소 리꾼이라 할 수 있다. It is the truth that the background of folk arts in Suncheon and the fact that Suncheon was the center of politics, the military, economic distribution and education had a huge effect on the advent and development of the Suncheon Pansori. The transmission state of Suncheon Pansori is divided into four parts: O Kkeut Jun and Kim Jil Ueop were prelavent in the early Suncheon Pansori; the role of Song Man Gab in the advent of Suncheon Pansori; and Park Bong Sul and Sori-Sunsaeng and singer as successor of Suncheon Pansori. Suncheon Pansori was succeeded mainly by Song Heung Rok, Song Man Gab and Park Bong Sul but also by a combination of Sopyonje and Boseongje. One of the characteristics is that Dongpyonje has two lines of Song Heung Rok - Park Man Sun-O Kkeut Jun and Song Heung Rok. The Song Gwang Rok-Song Woo Ryong and Song Woo Ryong line is separated into the Song Woo Ryong- Song Man Gab line and the Song Woo Ryong-U Seong Jun line. It is the characteristic that Boseongje has the Jeong Eung Min-Seong Woo Hyang line but almost all master singers from Suncheon follow the singing style of Dongpyonje. Suncheon Pansori is Sori of Dongpyonje and the representative songs are <Chunhyangga> and < Jeokbyeokga > by Song Man Gab and < Sugungga> by U Seong Jun. It is possible to say that Park Bong Sul is the representative Master singer of Pansori in Suncheon because he accepts both the Sori of Song Man Gab and U Seong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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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국가정원과 남도문예르네상스

        강성호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7 南道文化硏究 Vol.0 No.32

        이 논문은 순천시의 『2016년 주요업무보고서』와 2016년 7월에 수립되어 현재 진행 되고 있는 전남도청의 『남도문예르네상스』 사업들을 중심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 토에 근거하여 이 논문은 순천만국가정원의 지속적 발전방안을 세 가지로 제안하였다. 첫째, 시작단계에 놓인 순천만국가정원의 중장기적인 체계적인 전망과 운영방안을 지역 시민사회와 공유하면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둘째, 순천 원도심 ‘역사타운’이 담고 있는 전통문화자원과 기독교근대유산 등을 순천만국가정원과 유기적 결합시켜 상호 시너지를 높여나가야 한다. 셋째, 전남도청이 진행하는 ‘남도문예르네상스’의 전남전통정원 사업 과 순천만국가정원을 연결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하여, 전남지역에서 순천 만국가정원이 차지하는 위상을 높여나가야 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current state of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the planning work related to the garden of Suncheon City in 2016, and the problem of the ‘Namdo Literary Renaissance’ of Jeonnam Province. Through this study, we were able to identify some tasks to be considered for the continuous development of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First,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is in its infancy. It is necessary to develop the mid-to-long-term systematic view and management plan of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by sharing it with the local civil society. Second, it is necessary to enhance synergy by organically combining traditional cultural resources and modern Christian heritage of Suncheon city with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Third, it is necessary to increase the status of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in the Jeonnam area. This can be done by looking for specific ways to link the Jeonnam traditional garden project of the ‘Namdo Literary Renaissance’ conducted by Jeonnam province to Suncheon Bay National Garden.

      • KCI등재

        일제강점기 경남의 권역별 한적 간행의 양상과 특징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8 南道文化硏究 Vol.0 No.34

        이 논문은 우리나라의 출판인쇄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제로, 일제강점기에한적 간행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했다. 연구 대상의 시기는 일제가 강압에 의해 합병을 한 1910년부터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로 하였다. 공간적 범위는 경상남도로 한정하되 서술의 편의를 위해 지형적 위치에 따라 중부, 북서부, 남동부 등 3개 권역으로 나누었다. 중부 권역에서는 진주와 함안이 동일하게 35건이 간행되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다. 진주는 함안처럼 전통문화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많았지만, 그런 가운데 새로운 변화를추구하려는 움직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북서부 권역에서는 南冥 曺植과 관련된 지역인 산청과 합천에서 한적 간행이 높은수치를 보인다. 두 지역 모두 문집 및 족보의 간행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것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지역의 전형적인 출판 경향이다. 함양은 산청과 합천에 비해간행수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1920년대에 새로운 모임과 사상운동이 전개되어이채로운 성격의 서적이 출간되었다. 남동부 권역은 해안가에 속한 지역으로, 자연적 조건과 문화적 여건으로 본래 유학자들이 거주한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적의 간행수도 내륙 지역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권역에서는 목활자의 활용이 높은 반면, 남동부 권역에서는 신활자가 목활자보다 많거나 비슷한 수치를 보인다. 일제강점기 경남의 한적 간행 양상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선조의 선양과가문의 유지를 위해 한적 간행에 힘썼다. 둘째, 한적 간행이 매우 활발한 시기는 1930년대이다. 셋째, 간행 방법은 목활자의 사용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930년대에 한적 간행이 매우 활발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1910년대에는 한적간행의 활동이 저조하다가 193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유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전통문화의 말살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가문의 명맥이 끊어질 수 있다는위기의식이 최고의 정점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자신이 생존해있는 동안 조상의 문집과 집안의 족보를 간행하여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물적·인적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목판보다 전통 양식의 품위를 가지면서도 비용은 훨씬 적게 드는 목활자의 활용이 선호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다는 사실에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This thesis deals with a task to understand Korea’s history of publication and printing cultu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aspects of publishing Chinese book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meanings of it. The period studied here is from 1910, the year of Japanese forcible annexation of Korea up to 1945, the year of the emancipation. The space is limited to Gyeongsangnam-do, and for convenience in description, this author topographically divides it into the central area, northwestern area, and southeastern area. In the central sphere, Jinju and Haman identically indicated the highest value by publishing 35 cases. But while Jinju strongly tended to maintain traditional culture just like Haman, it also had a movement to pursue changes as well. In the northwestern sphere, Sancheong and Hapcheon, the areas associated with Nammyeong Jo Sik, show high values in publishing Chinese books. In both regions, publishing collections of works and genealogies is found overwhelmingly frequently. This is the typical tendency of publication found in the region strongly intending to preserve traditional culture. Contrary to that, Hamyang indicates half the publication of Sancheong and Hapcheon; however, in the 1920’s, new gatherings and ideological movements developed, and books equipped with diverse characteristics came to be published. The southeastern sphere is the coastal area. Due to the natural conditions and cultural situations, originally, there were not many Confucian scholars residing in it. That is why the number of Chinese books published there is very lower than in the interior. In other spheres, the wood type is found often, but in the southeastern sphere, the new type is found more than the wood type or similarly. The aspects of publishing Chinese books in Gyeongna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can be summed up in three points. First, they tried to publish Chinese books in order to heighten their ancestors and maintain their family. Second, publishing Chinese books was very actively done in the 1930’s. Third, about the mode of publication, the wood type is found overwhelmingly often. Why was publishing Chinese books very active in the 1930’s? Publishing Chinese books was not very active in the 1910’s, but it increased explosively in the 1930’s. It should be because within the changes of the time full of the Japanese Empire’s annihilation of our traditional culture and modernization through suppression, their consciousness of crisis about the discontinuance in their family’s existence reached the peak then. They also intended to carry out their mission to publish their ancestors’ collections of works and their own genealogy and hand them down to their descendants while they were living. Therefore, we can clearly assume that they preferred using the wood type that was much cheaper but equipped with the class as a traditional style to using the woodblock printing needing much more materials and manpower. This kind of tendency is more noticeably shown in the region more strongly intending to preserve traditional culture, and based on this fact, we can again be sure of that.

      • KCI등재

        순천만 국가정원의 역사와 의의

        김준선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6 南道文化硏究 Vol.0 No.31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세계 5대 연안습지의 하나인 순천만의 자연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계획된 생태문화박람회로서 성공적으로 마감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박람회장을 순천만 정원으로 명명하였으며 2015년 9월 5일 국가정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국가정원으로서 순천만 정원의 역사와 의의를 조명하였다. 정원의 도시 순천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도시, 즉 시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를추구하는 것으로 순천만 정원의 시작은 순천만 보전과 함께 순천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견인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정원박람회의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각계각층의 시민과 공공이 이룬 협력의 성과이다. 국가정원으로 지정된 순천만 정원은 지역을 넘어 국가와 세계로 정원문화와 정원산업을 융성케 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안고 있다. 그러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은 창조의 즐거움이며 정원문화의 확산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초석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The 2013 Suncheon-Bay Garden Expo, Korea, was successfully held from Apr. 20th, to Oct. 20th 2013. With approval from AIPH and the Korean government the Garden Expo. showcased 83 gardens from 23 countries over 6 months. These gardens provided beauty and various opportunities to develop industries related to the garden. The Garden Expo. was successful as a place that increased lifestyles. This converged with industry including: exhibition, culture, healing, beautiful flowers and trees, garden articles, and garden facilities. The area was eventually named the Suncheon-bay Garden and was designated National Garden No. 1. The history and meaning of Suncheon-bay Garden are outlined here: 1. Suncheon-bay Garden is the new paradigm that contributes to the sustainable development of Suncheon with the preservation of Suncheon Bay 2. The Success of the Suncheon-bay Garden Expo. was not a coincidence. It was the result of the cooperation of all the citizens and public offices. 3. Suncheon Bay Garden, as National Garden No. 1, has a difficult mission that should develop garden culture and garden industries in Korea, Asia and the world. 4. Designing gardens and gardening give the pleasure of creation. Spreading a garden culture is the foundation of creating a healthy urb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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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태산과 여산의 유교문화

        김지영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4 南道文化硏究 Vol.0 No.27

        중국 태산과 여산은 각각 장강(長江) 이북(以北)과 장강 이남에 위치하면서 장강 이남 이북의 문화와 역사를 대 표하는 명산이다. 태산은 역대 황제들이 직접 찾아와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황제의 산”으로 불리었다. 또한 국가적으로 중요 한 다섯 산을 지정하였던 “오악(五嶽)” 중 으뜸으로 존숭되었으며, “오악독존(五嶽獨尊)”으로 불리었다. 태산은 불교, 도교, 유교와 지방 민간 종교가 공존하는 곳으로 은사(隱士), 왕공 대신, 철학가, 시인, 화가들의 영감(靈感 )적 원천이었다. 태산은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천인합일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공자는 태산의 지맥에 속하는 곡부 창평향에서 태어나, 중국인의 정신 가운데 또 하나의 태산으로 자리하고 있 다. 태산을 중심으로 한 산동지역은 유학의 근원지로써 곳곳에 공자와 관련된 고사 및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태산의 동쪽 등산로에는 공자와 관련된 흔적과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등산객들은 태산을 오르면서 공자와 함께 등산을 하는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후세 사람들은 태산을 공자처럼, 혹은 공자를 태산처럼 여겼기 때문 에 항상 태산을 찾으려는 염원을 가졌다. 여산은 예로부터 “기이하고 수려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큰 산, 큰 강, 큰 호수가 하나로 어 우러져 험준함과 온유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산은 불교, 도교, 기독교, 천주교, 동정교, 이슬람교 등의 6교가 공존하는 다원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문화명산 , 종교명산, 교육명산, 정치명산이라 불린다. 1920년대 지어진 교회와 학교들이 30여 개 남아 있고, 18개 국가 건 축양식의 별장이 600여 동 남아 있다. 근현대적으로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주요 남부 거점지이자, 주요 회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여산은 송대 유학 교육의 발원지로서, 중국 유교사상의 제2 전성기를 이끈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백록동서원은 유교문화 전파의 선봉 역할을 하면서 동아시아권의 유교 교육과 인재 양성에 크게 공헌하였 다. 태산과 여산은 중국 명산 관련 유교문화의 두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자와 주자라는 유교인물이 명산과 연 관되어 유적지를 남기고, 학파를 형성하며 서원을 설립하면서 독특한 명산의 유교문화를 형성하였다. Thai Shan and Lushan are mountains that are located along the northern Yangtze river and the southern Yangtze river, respectively. These two mountains represent cultures and histories of each region. Tai Shan mountain (or Mount Tai) used to be called the "Emperor's Mountain", where China's Emperors visited to perform ancestral rites. Further, the mountain used to be called 五岳獨尊 (The first of China's five best mountains). Thai Shan is a place where many kinds of religions - Buddhism, Taoism, Confucianism and folk religions have developed. Also the area is an inspiration to Buddhist monks who practice ascetism, to ministers, philosophers and artists. Thai Shan’s natural environment and cultural landscape reflects a 天人合一 thought (a theory that man is an integral part of nature). Confucius (Chinese name: Kong Zi) was born in the Qufu Changping district located on Thai Shan. Confucius is regarded as another religious leader from Thai Shan which means that Confucius is an important part of the Chinese spirit. The place surrounding Thai Shan is the center of Chinese Confucianism, and is famous for its old temples and historic sites that are related to Confucius. The main mountain trail of Thai Shan still holds legends of Confucius’ remains and actions. Mountain climbers, therefore, can feel as if they were climbing with Confucius. The Chinese posterity thinks of Thai Shan as Confucius and thinks of Confucius as Thai Shan; thus they always have a desire to visit Thai 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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