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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경운과 경운에서 콩 재배를 위한 녹비와 화학비료, 돈분액비의 생육특성 및수량비교

        유장환,정현진,정해룡,박형준,권수정,Swapan Kumar Roy,오은지,김숙진,정근욱,김홍식,우선희 한국작물학회 2017 한국작물학회지 Vol.62 No.4

        This study was conducted to establish the type and method of fertilization for no-tillage during the third year of No-tillage (NT) and Conventional-tillage (CT) practices, towards different kinds of fertilizers. In this experiment, the livestock manure showed higher in response to fertilizer effects of no-tillage. Comparing growth characteristics and yield in NT and CT. Regarding yield, there is no significant between livestock fertilizer and chemical fertilizer, but between livestock fertilizer and chemical fertilizer in conventional fertilization has significant differences. Based on the result, livestock fertilizer is effective way on the quantity of the crop. Nitrogen absorption of plant in livestock of no-tillage is more effective than conventional fertilization. In case of the phosphorus absorption and potassium absorption of plant, fertilizer effect has no significant. Nitrogen is highly absorbed in livestock fertilization of NT. Absorption of phosphorus and potassium are similar. 본 연구는 무경운 재배법을 확립하고자 비료종류와 시비방법에 따라 콩의 생육 및 수량을 조사하였으며,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경운과 무경운 처리구에서 풋거름, 돈분액비, 화학비료의 비료종류에 따라 콩의 생육이 각각 달랐다. 경운과 무경운 모두 화학비료처리구에서 콩의 생육이 높았으며, 경운유무에 따라서는 경운에서의 생육이 가장높았다. 2. 엽색도 조사에서는 비슷한 양상으로 증가하였는데 엽색도 함량이 최고에 달했을 때를 비교해보면 무경운- 화학비료처리구에서 가장 높았으며, 상대적으로 경운- 풋거름처리구에서 엽색도가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3. 콩 종실 1 g 및 0.5 g의 질소, 인, 칼륨의 성분량을 분석했을 때 인과 칼륨의 경우 경운과 무경운 모두 큰차이를 두지 않고 비슷한 함량을 나타내었으며, 질소는 이와 다르게 돈액비료처리구에서 질소의 함량이가장 높게 나왔다. 4. 콩 종실의 수량조사에서는 생육조사와는 다르게 무경운-돈분액비에서 수량이 가장 높았고, 상대적으로 무경운-관행처리구에서 수량이 가장 낮았다. 무처리구를제외하고 풋거름처리구의 경우 경운, 무경운 모두 생육양상이 저조함에 따라 콩의 수량도 낮았다.

      • 도덕과 성령

        유장환 목원대학교 신학연구소 2006 신학과 현장 Vol.16 No.-

        이제까지 우리는 도덕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신율적인 도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틸리히에 따르면 도덕과 성령은 동일한 실재가 아니다. 도덕은 도덕이고 성령은 성령이다. 하지만 도덕과 성령은 종교적인 경험이나 신학적인 진술에 있어서는 상호의존적이다. 도덕은 성령을 요청하고 성령은 도덕을 극복한다. 도덕은 희생이나 도덕법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모호성들 속에서 성령을 요청하고, 성령은 새로운 존재 의 힘 속에서 희생과 도덕법의 모호성들을 치유하고 극복한다. 말하자면, 실존과 본질의 분열 속에 있는 인간의 생명은 모호한 희생과 모호한 도덕법 속에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요청한다. 그리고 성령은 인격의 중심을 신적인 중심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이끌어감으로써 곧 인격의 자기초월 속에서 실존과 본질의 재결합을 창조함으로써 단편적으로나마 모호하지 않은 인격적인 자기통전을 구현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틸리히의 윤리학은 도덕과 종교적 실체의 통일 속에서 도덕의 물음을 극복한 신율적인 윤리학이며,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사랑 속에서 도덕의 물음을 극복한 아가페의 윤리학이며, 실존과 본질의 재결합 속에서 도덕의 물음을 극복한 은혜의 윤리학이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신율적인 윤리학은 무엇보다도 비신율적인 윤리학을 심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비신율적인 윤리학은 법의 윤리학이다. 법의 윤리학은 소외를 극복할 수 없고 오히려 법 자신에 대한 증오감만을 증대시키고 있다. 그 결과 비신율적인 윤리학은 동기유발의 힘과 구체적 상황에서의 선택의 원리와 도덕적 명령의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점에 의해서 스스로 심판 받고 있다. 따라서 틸리히는 도덕의 모호성은 오직 신율적인 윤리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틸리히는 생명의 자기통전의 모호성 곧 희생이나 도덕법의 모호성은 실존과 본질의 재결합이 주어질 때만 곧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사랑(아가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틸리히에게 있어서 사랑은 법이 아니고 현실이며 당위의 문제가 아니고 존재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인간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성령의 현존의 창조를 의미한다. “사랑은 성령의 현존의 창조이다. 사랑은 은혜이다.

      • 이성과 계시

        유장환 목원대학교 목원신학연구소 2005 신학과 현장 Vol.15 No.-

        우리는 계시이해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들이 대표적으로 논쟁되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첫째, 계시와 이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이성은 계시에 의해서 파괴되는가? 아니면 계시는 이성에 의해서 파괴되는가?1) 둘째, 계시는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것인가. 예를 들어, 계시는 객관적인 사실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체험인가?2) 셋째,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유일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계시는 배타적으로 유일한 것인가? 아니면 여러 계시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계시에 불과한 것인가?3) 이 같은 문제들은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끊임없이 논쟁되어 왔던 것들로서 현대의 조직신학들은 이 문제들에 대한 논쟁의 결과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특히 폴 틸리히(1986-1965)에게는 적합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틸리히는 계시 이해의 핵심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그의 계시론을 구상하였고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조직신학』 Ⅰ제 1부<이성과 계시>에서 그의 계시론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계시론의 주된 관심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신학이 어떻게 하면 계시에 의해서 이성이 파괴되는 초자연주의 신학과 이성에 의해서 계시가 파괴되는 자연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 둘째, 신학이 어떻게 하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는 객관주의 유형의 신학과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를 두는 주관주의 유형의 신학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셋째, 신학이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성만을 인정하는 배타주의 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성만을 인정하는 배타주의 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다원주의 신학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 틸리히는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이 사이의 갈등을 극복한 자기-초월적인 신학,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한 주-객 통일의 신학, 배타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한 포괄주의 신학을 주창했다. 따라서 본 논문은 계시 이해의 핵심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틸리히의 계시론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그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 생명과 치유

        유장환 목원대학교 신학연구소 2008 신학과 현장 Vol.18 No.-

        우리는 이제까지 생명신학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명’ 과 ‘치유’ 그 자체에 대한 틸리히의 이해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생명은 다차원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치유 또한 다차원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고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생명’ 과 ‘치유’ 에 대한 이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와 치유의다차원적인 통일성은 어떠한 의의가 있는 것인가? 첫째,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는 영의 차원을 생물학적인 또는 심리적인 차원으로 해소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현대의 많은 생물학과 심리학은 영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영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생물학이나 심리학의 차원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는 자연 생명은 그 모두가 단일한 진화의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뜻하는 진화 는 자체 작용, 자체 변용의 과정으로 그 과정을 통해서 보다 더 큰 다양성과 보다 높은 단계의 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연 생명의 진화는 비록 단일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세 가지 잠재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우주적 과정이고 둘째는 생물학적 과정이고 셋째는 사회심리학적 과정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의 차원은 심리학적인 차원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다 른 차원의 생명이다. 곧 영의 차원은 심리적인 차원으로부터의 도약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심리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일원론은 인간생명이해에 있어서 부적절한 것이다. 둘째, 생명에 대한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는 영을 육과 대립시켜 이원론적으로 파악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통적인 교리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특별한 행위 속에서 인간의 완전한 몸에 ‘불멸의영혼’ 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층’ 의 이원론에 근거한 것이며, 초자연주의적인 인간론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하나이다(Man is one). 영의 차원은 잠재적으로 모든 차원에 현재하며, 특히 영은 심리적인 재료를 포함하고 있다. 곧 영의 모든 행위는 주어진 심리적인 재료를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육 이원론은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을 파괴하며, 특히 심리적인 차원과 영의 차원의 통일성을 파괴하여 그 결과 인간의 인격의 생동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그릇된 초자연주의적인 신 학과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셋째,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은 치유의 다차원적인 통일성과상 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에 따르면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차원들은 서로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상대적인 독립성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곧 다양한 차원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독립성도 없고 절대적인 의존성도 없다. 따라서 가장 적절한 치료방법은 통일성과 독립성이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방법일지라도 일방적인 치료 방법은 강하게 거부되어야만 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다방면 의 치료 방법조차도 부적절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틸리히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령의 영향에 의한 치유는 생명의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방식을 대신해서는 안 되고 다른 차원의 치유 방법들 역시 성령의 치유하는 힘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이런 점에 서 심리치료와 종교는 상호 독립성 속에서 상호간에 협력해야만 한다. “심리치료와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심리치료는 누군가를 특별한 어려움으로부터 해방하는 반면에 종교는 이러한 해방은 이루어져 있지만 여전히 그의 실존의 의미와 목표에 대해서 결단해야만 하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길(final way)을 제시해 준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은 종교적인 치유와 심리치료사이의 독립성과 상호협력의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성령에 의한 생명의 치유인 건강과 성령에 의한 존재의 치유인 구원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중심의 통전(치유=구원)은 단지 그 중심이 신적인 중심으로 이끌릴 때에만 가능 한데 이것은 신적인 힘 곧 성령의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건강과 구원 모두 신적인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이끌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이런 경험 속에서 초월적인 통일성을 받 아들이는 기능이 ‘믿음’ 이고 그 통일성을 실현하는 기능이 ‘사랑’ 이다. 따라서 구원과 같은 의미로서의 건강은 신앙과 사랑안에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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