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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アイゼンハワーの米韓相互防衛条約への承認過程と反共捕虜の釈放

          방준영 한일군사문화학회 2015 한일군사문화연구 Vol.20 No.-

          本稿は、米韓相互防衛条約の締結の必要性を一貫して否定してきた米国政府が、正式の政策方針として同条約を推進することにした経緯を明らかにしたものである。朝鮮半島からの中国軍の撤退、反共捕虜の処遇をめぐる諸問題、それから政治会議のあり方を中心とした休戦条件と並行して、米韓相互防衛条約の締結を主張していた韓国に対して、米国政府は、韓国が同条約の締結を切実に願っていると判断し、1953年6月7日に休戦協力への見返りとして同条約の締結に向けた交渉を開始する意向があることを李承晩に伝えた。ところが、李承晩としては、米国との相互防衛条約の締結だけでなく、他の休戦協力への条件も譲れないものであって、米国から同条約に向けた交渉開始の提案がなされた際も、その強硬な姿勢を一向も軟化させようとしなかった。 一方、板門店においては、李承晩のからの強い反対にも関わらず、大詰めの協議が行われていた。会談の進展振りに危機感を覚えた李承晩は、1953年6月18日夜明け、北朝鮮軍の反共捕虜を電撃的に釈放するに至った。韓国軍の国連軍司令部の指揮からの離脱を最も警戒していた米国にとって、これは同司令部の権威に挑戦するかのような単独行動にほかならなかった。ただ、李承晩は、反共捕虜の釈放以降、追加的な大規模の釈放に踏み切ることなく、自らの単独行動によって悪化した状況の沈静化を図ろうとする一方で、「休戦に関わることなく休戦を支援できる」と韓国の休戦協力への可能性を初めて表明した。李承晩による反共捕虜の釈放は、従来の休戦反対の姿勢から本格的な米国との交渉に応じる姿勢への転換を予告するものであったと言えよう。これ以降、休戦協力への条件と米韓相互防衛条約の条項をめぐる米韓間の協議が本格化するのである。

        • KCI등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정과 `일본` 요소

          방준영,김회동 한일군사문화학회 2016 한일군사문화연구 Vol.22 No.-

          본고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지는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미국이 동시기에 체결한 상호방위조약 및 안전보장조약간의 비교 관점과 더불어, 동 조약의 세부조항을 둘러싼 한미간의 협의과정을 살펴보았다. 로버트슨과 덜레스의 연이은 방한을 통한 한미간의 논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그 자체가 독립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휴전협력을 위한 조건들, 즉 반공포로 송환문제, 정치회담의 개최기한과 동 회담이 실패로 끝났을 경우에 미국이 취해야 할 행동, 그리고 적절한 규모의 대한 경제 및 군사지원문제들과 연계되어 논의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체결한 다른 조약들과 달리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 절차를 거치게 된 배경에는, 유력 상원의원의 한국동행 좌절로 정식 조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미 의회가 조약을 비준할 것이라는 보증을 바라고 있던 이승만을 회유하고, 동시에 쟁점이 된 조약 `조항`의 내용을 미국측 초안대로 합의하는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덜레스의 협상전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동 조약을 둘러싼 미국과의 논의과정에서 이승만이 `일본`이라는 요소를 항시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산측으로부터의 침략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로버트슨에게 주장한 것처럼, 덜레스에게도 “한국은 어떠한 침략, 즉 공산측의 침략으로부터도 일본에 의한 침략으로부터도 보호된다는 미국의 보증을 원하고 있다”고 말해 동 조약이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한대응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미군주둔을 규정한 미일안보조약을 언급하면서 이승만은,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한 조항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이를 미국측이 받아들임으로써, “미합중국의 육군, 공군 및 해군을 상호 합의된 바에 의해 대한민국의 영역과 그 주변에 배치할 권리를, 대한민국이 허여하고 미합중국이 이를 수락한다”(제4조)고 하여, 미일안보조약 제1조의 미군주둔에 관한 조항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조약의 유효기간에 관해서도 이승만의 주장이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미국이 주장하는 “어느 일방의 통고로부터 1년 후에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미일안보조약 제4조와 마찬가지로, 체약국간의 합의에 의해 조약의 효력이 상실되는쪽을 원했다. 특히 이 사항은, 정치회담 개최에 대한 그의 강한 불신, 한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지휘권문제와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효를 연기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本稿では米韓相互防衛條約の特殊性を理解するため、米國が同じ時期に他の國?と締結した相互防衛條約及び日米安全保障條約らとの比較觀点から、同條約の條項をめぐる米韓間の協議過程を考察した。ロバ一トソンとダレスの相繼ぐ訪韓による米韓間の議論を通じて、米韓相互防衛條約は休戰協定調印の前からそれ自體が別途の事案としてではなく休戰協力のための條件、つまり反共捕虜の送還問題、政治會議の開催期限と同會議が失敗に終わった場合に米國の取るべき行動、そして適切な規模の對韓經濟及び軍事支援問題らと連動して議論されてきた。この過程において、他の條約とは違って米韓相互防衛條約が「反調印」の手續きを經るようになった背景には、米上院議員の韓國同行が挫折し、正式な調印が難しくなった狀況のなか、米議會による同條約の批准への保證を望んでいた李承晩を懷柔すると同時に米國側の條約草案通りに合意するための有利な狀況を作ろうとしたダレスの戰略があった。それと共にもう一つ看過できないのは、同條約の條項をめぐる米韓協議において、李承晩が「日本」というファクタ一を常に意識していた点である。彼は、米韓相互防衛條約が、共産側からの侵略だけでなく、日本からの侵略に對しても適用されるべきだと主張し、日本からの侵略に對する警戒心を明確にした。また、米軍の駐留を規定した日米安全保障條約にも觸れ、李承晩は、在韓米軍の駐留に關する條項を米韓相互防衛條約に設けるよう要請した。これを米國側が受け入れ、第4條には「アメリカ合衆國の陸軍、空軍及び海軍を、相互の合意により定めるところに從って、大韓民國の領域內及びその附近に配備する權利を、大韓民國は許與し、アメリカ合衆國は、これを受諾する」とされ、日米安全保障條約の第1條の中の米軍配備に關する文言がそのまま盛り迂まれた。さらに、條約の有效期限について李承晩は、米國の主張する「いずれかの一方による通告から一年後に終了する」のではなく、日米安全保障條約の第4條と同樣、締約國間の合意によって效力が失われることを望んだのである。この事項こそ、政治會議への彼の不信、國連軍による韓國軍への指揮權問題と共に米韓相互防衛條約の發效を遲らせる直接的な要因として動い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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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승인과정과 반공포로 석방

          방준영 한일군사문화학회 2015 한일군사문화연구 Vol.20 No.-

          본고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부정해 오던 미국정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정책방침으로서 동 조약의 체결을 추진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중국군 철수, 반공포로의 송환, 그리고 정치회담의 개최를 둘러싼 문제 등 휴전조건과 더불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주장하는 한국에 대해, 미국정부는, 한국이 동 조약의 체결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판단, 1953년 6월 7일에 휴전협력에 대한 대상(代償)으로 조약체결을 위한 교섭을 개시할 의향이 있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이승만으로서는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뿐 만 아니라, 휴전협력을 위한 다른 조건들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 같은 미국정부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입장에서 한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한편, 판문점에서는 이승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정의 성립을 위한 막바지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담이 진척되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북한군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이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로부터 이탈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반공포로의 석방이 유엔군사령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추어졌다. 다만,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시킨 이후, 추가적인 대규모 석방을 단행하는 일 없이, 자신의 단독행동으로 악화된 상황을 수습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휴전협정에 관계하는 일 없이 휴전을 지원할 수 있다”고한국정부의 휴전협력 가능성을 처음으로 표명했다. 이승만에 의한 반공포로 석방은, 이후 휴전협력의 조건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항을 둘러싼 한미간의 협의가 본격화 됨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종래의 휴전반대 입장으로부터 미국과의 교섭에 응하겠다는 자세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本稿は、米韓相互防衛條約の締結の必要性を一貫して否定してきた米國政府が、正式の政策方針として同條約を推進することにした經緯を明らかにしたものである。朝鮮半島からの中國軍の撤退、反共捕虜の處遇をめぐる諸問題、それから政治會議のあり方を中心とした休戰條件と幷行して、米韓相互防衛條約の締結を主張していた韓國に對して、米國政府は、韓國が同條約の締結を切實に願っていると判斷し、1953年6月7日に休戰協力への見返りとして同條約の締結に向けた交涉を開始する意向があることを李承晩に傳えた。 ところが、李承晩としては、米國との相互防衛條約の締結だけでなく、他の休戰協力への條件も樣れないものであって、米國から同條約に向けた交涉開始の提案がなされた際も、その强硬な姿勢を一向も軟化させようとしなかった。 一方、板門店においては、李承晩のからの强い反對にも關わらず、大詰めの協議が行われていた。會談の進展振りに危機感を覺えた李承晩は、1953年6月18日夜明け、北朝鮮軍の反共捕虜を電擊的に釋放するに至った。韓國軍の國連軍司令部の指揮からの離脫を最も警戒していた米國にとって、これは同司令部の權威に挑戰するかのような團獨行動にほかならなかった。ただ、李承晩は、反共捕虜の釋放以降、追加的な大規模の釋放に踏み切ることなく、自らの團獨行動によって惡化した狀況の沈靜化を圖ろうとする一方で、「休戰に關わることなく休戰を支援できる」と韓國の休戰協力への可能性を初めて表明した。李承晩による反共捕虜の釋放は、從來の休戰反對の姿勢から本格的な米國との交涉に應じる姿勢への傳換を予告するものであったと言えよう。 これ以降、休戰協力への條件と米韓相互防衛條約の條項をめぐる米韓間の協議が本格化す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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