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김귀한(Kim, Kwihan) 호서사학회 2021 역사와 담론 Vol.- No.98
고려 말∼조선 초 자기 수취 구조는 한국도자사 연구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고려 말 조준의 상소문에 보이는 ‘거안직납(據案直納)’의 실현 여부와 조선 초 자기를 공납하는 데 사옹방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에 집중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준이 제안한 ‘거안직납’이 곧 시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조준은 상소문에서 사옹을 비롯한 애마(愛馬)가 각도(各道)에 사람을 파견, 내용(內用)을 빙자하여 물품을 사취(私取)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 고려 말 사옹은 정식 관청인 사선서(司膳署)를 대신하여 어선(御膳)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사옹은 내용자기(內用磁器)를 징수할 수 있었다. 이성계 등 고려 말의 개혁 세력은 정권을 장악한 후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측근세력인 애마를 개혁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조준은 애마가 자금과 물품을 확보하는 루트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품의 수취 과정에서 애마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성계 등이 정권을 잡은 후 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고려할 때 조준이 주장한 자기 공납제는 그대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초 자기 공납 과정에서 사옹방의 역할을 파악하는 데는 1417년 호조에서 기명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올린 사의(事宜)에 있는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 문장이 고려말 사옹에 의한 자기 수취 구조가 1417년까지 유지되었다는 견해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納’을 ‘받아들이다’로 보고 사옹방이 지방에서 도성으로 운송한 공납자기의 봉퇴(捧退)를 담당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당시 사옹방에서 어선(御膳)에 관한 물선(物膳)을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한 일반적인 상황과도 부합된다. One of the interesting controversial issues among the porcelain history of the early Joseon Dynasty is regarding when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Opinions of the scholars regarding this issue are divided into two. Some see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begun immediately by the suggestion in the letter of Jo Joon to the king around December 1389. Others insist that porcelains were collected in person by Saongbang for tributes through dispatching people to each province until 1417. The faction of Yi Seong-gye took the power since Wihwado Retreat. The direction of the reform that they pursued was described in detail in the letter of Jo Joon. Jo Joon pointed out the corruption of Saong and Aema that defrauded items from people by dispatching officials to each province. To solve such problems, Jo Joon insisted to make Aema supply things for the king through tributes. He aimed to recover the dominance system centering around noblemen, including reforming Aema that seized were the power closely associated with the king. In order to reform Aema, Jo Joon tried to block their routes that had secured funds and things from the people. Such attempt was specified by expanding the tribute system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It is suspected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after Jo Joon"s submission of his letter to the kind around December 1389. In figuring out the roles of Saongbang(司饔房) under the tribute system at the early Joseon Dynasty, interpretation of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which were recorded by Hojo (Ministry of Finance in Joseon Dynasty) in 1417 in order to solve the evil effects of registered tributes. Depending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it might think that Saong"s way to receive porcelains in person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sustained in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interpreted ‘納’ as "to accept" and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porcelain tributes delivered to the capital city from each province. It coincides with the general circumstances at that time under which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royal presents.
김귀한 ( Kim¸ Kwihan ) 단국사학회 2020 史學志 Vol.60 No.-
이 글은 조선 세종대 이후 백자의 소비가 확대되는 배경을 백자의 위상 강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 말∼조선 초 자기의 중심은 청자였다. 백자는 청자에 비해 품질이 낮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1410∼1420년대 청자는 그릇의 전면에 문양을 빽빽하게 시문하는 등 장식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백자는 백토(白土)가 매장된 일부 지역에서만 제작되었다. 고려 말과 비교하여 품질 또한 개선되지 못하였다. 조선 초 조정은 명에 진공(進貢)하는 금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명으로부터 금은을 면공(免貢)받고자 조선에서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행히 1429년 조선의 의도대로 금은은 면공되었다. 이후 세종은 명 사신에게 금은기를 소비하지 않음을 선전(宣傳)해야 했다. 물론 조선 왕실은 계속 금은기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금은기의 대체재(代替財)를 마련할 필요성 또한 절감하였다. 금은기는 당시 소비되던 기명 가운데 가장 위계(位階)가 가장 높았다. 따라서 금은기의 대체재는 금은과 동등하거나 금은 다음으로 위계가 높은 재질로 제작된 그릇이 선택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세종대는 명 선덕제가 청화백자를 사여하는 등 중국 백자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명과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선덕제의 반사품(頒賜品)은 왕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다. 세종에게 있어 선덕제의 하사품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면서도 명과의 외교 관계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의도로 백자를 어기(御器)로 선택하였다. 세종이 백자를 어기로 채택한 후 백자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은 변화되었다. 백자의 위상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최고 권력자와 동일한 재질의 그릇을 소비하려는 욕구로 인해 백자의 수요는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430년대부터 경질백자(硬質白磁)가 제작되었고, 1440년대는 비교적 뛰어난 품질의 백자가 생산될 수 있었다. This paper describes the increase in consumption of white porcelain based on the elevation of its status from the late Goryeo to the early Joseon period. Celadon was the most important type of porcelain from the late Goryeo to early Joseon era. In comparison, white porcelain, which registered lower qualities than celadon, failed to draw consumers' attention. In the 1410s and 1420s, celadon became increasingly more decorated, sometimes with patterns that covered the ware’s entire surface. White porcelain was usually produced in small volumes in areas storing white clay (白土). Moreover, its quality had not improved from the late Goryeo period. In the early Joseon era, the kingdom continuously strived to secure gold and silver to give as tributes (進貢) to the Ming Empire. To exempt itself from having to give away gold and silver (免貢), the Joseon kingdom stressed that these metals were not produced in Joseon. Fortunately, gold and silver were delisted, after which King Sejong had to reassure (宣傳) the Ming diplomats that his country was no longer consuming the material, even though the Joseon court continued their usage. At the same time, there was keen awareness of the need to find substitutes (代替財) for gold and silver ware as they were the topmost in the contemporary hierarchy (位階) of precious metals. Hence, a substitute had to be made of material of equal status as gold and silver or immediately below them. The King Sejong era saw an increase in imports of Chinese white porcelain, including the blue and white porcelain given by the Xuande Emperor (宣德帝) of Ming. Give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Joseon and Ming dynasties, the gifts (頒賜品) from the Xuande Emperor were likely to symbolize the king's authority. To King Sejong, the gifts from the Xuande Emperor not only symbolized his authority but also served as a practical means to profit from th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Ming. Thus King Sejong chose white porcelain as royal ware (御器). King Sejong’s choice of white porcelain as royal ware changed the ruling class's perception of it, boosting its status. Demand for white porcelain increased as people wanted ware made of the same material used by the monarch. In line with these developments, hard white porcelain (硬質白磁) began to be produced in the 1430s, and eventually white porcelain of excellent quality was produced in the 1440s.
김귀한(Kim Kwihan)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19
독산성은 15∼16세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물질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독산성에관한 기존의 연구는 사료가 풍부한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 경향으로인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성격 변화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글은 독산성에서출토된 백자를 통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독산성에서 수습된 백자는 대부분 18∼19세기에 제작되었다. 17세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유물도 확인되었다. 이에 비해 15∼16세기에 생산된 자기(磁器)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은 백자의 출토현황은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된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15∼16세기 독산성은 수원부의 입보용(入保用) 산성(山城)이었다. 조선 초 산성은 전쟁 등비상시에만 활용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세종대 산성에서 읍성(邑城) 중심의 방어체제로전환되면서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힘든 독산성이 정비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독산성은임진왜란 당시에도 ‘고성(古城)’이라는 이미지(image)가 강하였다. 임진왜란 중 독산성은 수축(修築)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다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는 비상시적인 입보성의 일반적인 한계였다. 17세기 이후 독산성은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상시적인 군사적 공간이자, 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 양호(兩湖)의 도적이 증가하자 독산성에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치안(治安) 기능을 부여하였다. 성내에 우물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식량을 확보하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하였다. 독산성은 백성과 군인 등이 항시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독산성 내에 사람이 생활하게 되면서 백자의 수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독산성에서 이 시기 백자가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독산성의 성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독산성에서 출토된 백자는 독산성이 15∼16세기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17세기이후 상시적인 공간으로 변모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질자료(物質資料)이다. 아울러 문헌을 통해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는 조선시대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유물과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검토하였다는 데에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There is a lack of literature on Doksanseong, a fortress near Suwon, that describes the situation of the fortress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s a result, study of this fortress has concentrated on the period of the post-Japanese Invasions of Korea, which offers a relative wealth of material for study. However, for these reasons,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transformation of Doksanseong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ructurally explain the process of Doksanseong’s transformation in th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white porcelain fragments excavated from the fortress site. Most of the white porcelain fragments recovered from the site were create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addition, relics estimated to have been made in the 17th century have also been recovered. Only a few porcelains were mad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The periodical distribution of such relics is proof that the character of Doksanseong changed around the 17th century. During the 15th and 16th centuries, Doksanseong was a mountain fortress that was built to protect people in the Suwon are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ountain fortresses were treated as places for emergency use only, such as war. With the transition from a mountain fortress to an “Eupseong” town wall-centered defense system during King Sejong s time, it was unlikely that Doksanseong would be rebuilt, as it no longer played the role of defending Suwon. Doksanseong had a strong image of an “ancient fortress” eve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it was renovated. However, when the war ended, it was no longer maintained. This was a common limitation of fortresses that were made to protect people for emergency use. During the early 17th century, Doksanseong was transformed into a permanent military space and a living space for citizens from a protective area for emergency use. The court of the Joseon Dynasty added security functionality for Doksanseong to protect the capital city as the number of bandits increas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ended. They also built wells within the fortress and cultivated farms to secure food. Military training was also conducted. Doksanseong was now used as a place of residence where common citizens and soldiers stayed. It is likely that the demand for white porcelain increased as people started to actually settle down in the fortress. The vast quantity of white porcelain at the time found in Doksanseong is believed to be closely related to the change in its functional characteris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