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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조선 초 자기 수취와 사옹방의 역할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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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4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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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고려 말∼조선 초 자기 수취 구조는 한국도자사 연구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고려 말 조준의 상소문에 보이는 ‘거안직납(據案直納)’의 실현 여부와 조선 초 자기를 공납하는 데 사옹방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에 집중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준이 제안한 ‘거안직납’이 곧 시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조준은 상소문에서 사옹을 비롯한 애마(愛馬)가 각도(各道)에 사람을 파견, 내용(內用)을 빙자하여 물품을 사취(私取)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 고려 말 사옹은 정식 관청인 사선서(司膳署)를 대신하여 어선(御膳)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사옹은 내용자기(內用磁器)를 징수할 수 있었다. 이성계 등 고려 말의 개혁 세력은 정권을 장악한 후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측근세력인 애마를 개혁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조준은 애마가 자금과 물품을 확보하는 루트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품의 수취 과정에서 애마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성계 등이 정권을 잡은 후 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고려할 때 조준이 주장한 자기 공납제는 그대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초 자기 공납 과정에서 사옹방의 역할을 파악하는 데는 1417년 호조에서 기명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올린 사의(事宜)에 있는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 문장이 고려말 사옹에 의한 자기 수취 구조가 1417년까지 유지되었다는 견해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納’을 ‘받아들이다’로 보고 사옹방이 지방에서 도성으로 운송한 공납자기의 봉퇴(捧退)를 담당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당시 사옹방에서 어선(御膳)에 관한 물선(物膳)을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한 일반적인 상황과도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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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조선 초 자기 수취 구조는 한국도자사 연구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고려 말 조준의 상소문에 보이는 ‘거안직납(據案直納)’의 실현 여...

      고려 말∼조선 초 자기 수취 구조는 한국도자사 연구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고려 말 조준의 상소문에 보이는 ‘거안직납(據案直納)’의 실현 여부와 조선 초 자기를 공납하는 데 사옹방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에 집중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준이 제안한 ‘거안직납’이 곧 시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조준은 상소문에서 사옹을 비롯한 애마(愛馬)가 각도(各道)에 사람을 파견, 내용(內用)을 빙자하여 물품을 사취(私取)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 고려 말 사옹은 정식 관청인 사선서(司膳署)를 대신하여 어선(御膳)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사옹은 내용자기(內用磁器)를 징수할 수 있었다. 이성계 등 고려 말의 개혁 세력은 정권을 장악한 후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측근세력인 애마를 개혁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조준은 애마가 자금과 물품을 확보하는 루트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품의 수취 과정에서 애마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성계 등이 정권을 잡은 후 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고려할 때 조준이 주장한 자기 공납제는 그대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초 자기 공납 과정에서 사옹방의 역할을 파악하는 데는 1417년 호조에서 기명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올린 사의(事宜)에 있는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 문장이 고려말 사옹에 의한 자기 수취 구조가 1417년까지 유지되었다는 견해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納’을 ‘받아들이다’로 보고 사옹방이 지방에서 도성으로 운송한 공납자기의 봉퇴(捧退)를 담당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당시 사옹방에서 어선(御膳)에 관한 물선(物膳)을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한 일반적인 상황과도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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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One of the interesting controversial issues among the porcelain history of the early Joseon Dynasty is regarding when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Opinions of the scholars regarding this issue are divided into two. Some see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begun immediately by the suggestion in the letter of Jo Joon to the king around December 1389. Others insist that porcelains were collected in person by Saongbang for tributes through dispatching people to each province until 1417. The faction of Yi Seong-gye took the power since Wihwado Retreat. The direction of the reform that they pursued was described in detail in the letter of Jo Joon. Jo Joon pointed out the corruption of Saong and Aema that defrauded items from people by dispatching officials to each province. To solve such problems, Jo Joon insisted to make Aema supply things for the king through tributes. He aimed to recover the dominance system centering around noblemen, including reforming Aema that seized were the power closely associated with the king. In order to reform Aema, Jo Joon tried to block their routes that had secured funds and things from the people. Such attempt was specified by expanding the tribute system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It is suspected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after Jo Joon"s submission of his letter to the kind around December 1389.
      In figuring out the roles of Saongbang(司饔房) under the tribute system at the early Joseon Dynasty, interpretation of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which were recorded by Hojo (Ministry of Finance in Joseon Dynasty) in 1417 in order to solve the evil effects of registered tributes. Depending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it might think that Saong"s way to receive porcelains in person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sustained in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interpreted ‘納’ as "to accept" and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porcelain tributes delivered to the capital city from each province. It coincides with the general circumstances at that time under which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royal pres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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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e of the interesting controversial issues among the porcelain history of the early Joseon Dynasty is regarding when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Opinions of the scholars regarding this issue are divided into two. Some see that the p...

      One of the interesting controversial issues among the porcelain history of the early Joseon Dynasty is regarding when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Opinions of the scholars regarding this issue are divided into two. Some see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begun immediately by the suggestion in the letter of Jo Joon to the king around December 1389. Others insist that porcelains were collected in person by Saongbang for tributes through dispatching people to each province until 1417. The faction of Yi Seong-gye took the power since Wihwado Retreat. The direction of the reform that they pursued was described in detail in the letter of Jo Joon. Jo Joon pointed out the corruption of Saong and Aema that defrauded items from people by dispatching officials to each province. To solve such problems, Jo Joon insisted to make Aema supply things for the king through tributes. He aimed to recover the dominance system centering around noblemen, including reforming Aema that seized were the power closely associated with the king. In order to reform Aema, Jo Joon tried to block their routes that had secured funds and things from the people. Such attempt was specified by expanding the tribute system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It is suspected that the porcelain tribute system was implemented after Jo Joon"s submission of his letter to the kind around December 1389.
      In figuring out the roles of Saongbang(司饔房) under the tribute system at the early Joseon Dynasty, interpretation of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which were recorded by Hojo (Ministry of Finance in Joseon Dynasty) in 1417 in order to solve the evil effects of registered tributes. Depending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it might think that Saong"s way to receive porcelains in person at the end of the Goryo Dynasty sustained in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interpreted ‘納’ as "to accept" and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porcelain tributes delivered to the capital city from each province. It coincides with the general circumstances at that time under which Saongbang was in charge of acceptance and refusal of royal pres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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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 초록
      • Ⅰ. 머리말
      • Ⅱ. 고려 말 사옹의 內用磁器 수취와 변동
      • Ⅲ. 조선 초 磁器貢納과 사옹방의 역할
      • Ⅳ. 맺음말
      • 국문 초록
      • Ⅰ. 머리말
      • Ⅱ. 고려 말 사옹의 內用磁器 수취와 변동
      • Ⅲ. 조선 초 磁器貢納과 사옹방의 역할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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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朴天植,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2003

      2 李貞熙,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2003

      3 남아름, "조선후기 봉황문(鳳凰紋) 청화백자를 통해 본 분원(分院)의 청화백자 제작과 화본(畫本)" 한국미술사학회 308 (308): 105-143, 2020

      4 朴亨順, "조선초기 司饔房과 貢納磁器 연구" 충북대학교 2019

      5 구유리, "조선전기 인화상감자기(印花象嵌瓷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2016

      6 尹傚靖,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2020

      7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8 김귀한, "조선시대 官窯의 명칭과 성격 재검토" 한국미술사학회 308 (308): 145-171, 2020

      9 박경자, "조선 초 인화기법 분청사기의 계통과 의의"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7 : 73-98, 2013

      10 박경자, "조선 초 ‘司膳’명자기의 성격" 28 : 2019

      1 朴天植,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2003

      2 李貞熙,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2003

      3 남아름, "조선후기 봉황문(鳳凰紋) 청화백자를 통해 본 분원(分院)의 청화백자 제작과 화본(畫本)" 한국미술사학회 308 (308): 105-143, 2020

      4 朴亨順, "조선초기 司饔房과 貢納磁器 연구" 충북대학교 2019

      5 구유리, "조선전기 인화상감자기(印花象嵌瓷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2016

      6 尹傚靖,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2020

      7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8 김귀한, "조선시대 官窯의 명칭과 성격 재검토" 한국미술사학회 308 (308): 145-171, 2020

      9 박경자, "조선 초 인화기법 분청사기의 계통과 의의"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7 : 73-98, 2013

      10 박경자, "조선 초 ‘司膳’명자기의 성격" 28 : 2019

      11 박경자, "조선 15세기 자기공납에 관한 연구" 충북대학교 대학원 2009

      12 성현주, "상주 상판리유적의 도자사적 의의" 상주박물관 2017

      13 박경자, "분청사기 명문(粉靑沙器 銘文) 연구"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5) : 261-292, 2005

      14 박종진,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5 김윤정, "고려말․조선초 供上用 銘文靑瓷의 이행 과정과 제작 배경" 석당학술원 (55) : 147-185, 2013

      16 김윤정, "고려말·조선초 명문청자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1

      17 金昌賢, "고려말 조선초 정치체제 개편의 방향과 그 의미" 47 : 1998

      18 임형수, "고려 케시크(怯薛)의 기능과 개혁 방향" 민족문화연구원 (60) : 217-256, 2013

      19 金昌賢, "고려 공민왕∼우왕 때 정치·사회의 변동" 34 : 2003

      20 박희현, "각궁과 화살의 제작" 10 (10): 1977

      21 김윤정, "高麗末․朝鮮初 司饔의 성격과 역할" 한국학연구소 (45) : 159-182, 2013

      22 김윤정, "高麗末·朝鮮初 王室用 磁器의 제작 체계 연구" 한국미술사학회 260 (260): 35-66, 2008

      23 "高麗史節要"

      24 "高麗史"

      25 "朝鮮王朝實錄"

      26 宋洙煥, "朝鮮前期 王室財政 硏究" 집문당 2000

      27 "新增東國輿地勝覽"

      28 전승창, "京畿道 廣州 官窯의 設置時期와 燔造官" 미술사연구회 (22) : 199-218, 2008

      29 "三峯集"

      30 오영인, "15세기 초반 경상도 상주목 일대 화기(花器)의 감조(監造) 배경과 견양(見樣)으로서의 의미" 국립문화재연구소 52 (52): 112-129, 2019

      31 박경자, "15세기 貢物의 운송방법과 분청사기 銘文의 지역별 특징" 호서사학회 (47) : 215-254, 2007

      32 田勝昌, "15世紀 磁器所 考察(Ⅰ)" 1 : 1996

      33 朴敬子, "14세기 康津 磁器所의 해체와 窯業 체제의 二元化" 238·239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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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12-06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호서사학 -> 역사와 담론
      외국어명 : HO-SUH SAHAK -> HISTORY AND DISCOURSE(Journal of Historycal Review)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9-29 학술지등록 한글명 : 호서사학
      외국어명 : HO-SUH SAHAK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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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6 0.56 0.4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6 0.46 0.953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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