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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지기 재조일본인의 장학단체의 설립과 운영 - 아사노 다사부로(淺野太三郞)의 천야육영회(淺野育英會)를 중심으로

        자중(Kim Jajoong, 金慈中) 한국일본교육학회 2019 한국일본교육학연구 Vol.24 No.2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재조일본인의 장학단체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그 성격을 아사노 다사부로의 천야육영회를 사례로 하여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천야육영회는 아사노의 동정이라는 개인적 배경과 조선총독부의 지원이라는 사회적 배경 간의 결합에 의해 설립됐다. 그리고 양자의 연결고리는 “아래로부터의 침략”, “풀뿌리 침략”이라는 재조일본인의 존재양태와 ‘내선융화’라는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 즉 기본적으로 아사노는 조선총독부와 유착관계에 있었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천야육영회가 ‘내선융화’라는 문맥 하에서 운영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아사노도 특별히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 아사노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 없이 선발한다는 방침을 표방함으로써 ‘내선융화’에 호응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일제 식민지기에 천야육영회는 경제적 하위계층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이와 함께 ‘내선융화’에 부응하는 부정적인 역할도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야육영회는 ‘내선융화’의 미담으로서 식민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이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천야육영회의 성격은 이후 기타 재조일본인의 장학단체를 고찰하는 데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ained to analyz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scholarship foundations established by Japanese settler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and to find out the implications through the case of Asano Tasaburo’s Cheon-Ya Scholarship Foundation. The results were as follows. Cheon-Ya Scholarship Foundation was established by a combination of Asano’s sympathy and support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In other words, Asano and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were in a close relationship, and in such a situation,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supported the establishment of Cheon-Ya Scholarship Foundation. This shows that Cheon-Ya Scholarship Foundation played a positive role in providing educational opportunities to the lower classe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but also played a negative role in responding to ‘Reconcili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 KCI등재

        전시체제기(1937-1945)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의 성격 규명

        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19 敎育問題硏究 Vol.32 No.3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junior college policies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GGk) during the wartime period.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ly, the GGK reformed junior college system in Korea for training professional manpower of natural sciences during the wartime period. In the period before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GGK established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Mines and Busan Junior College of Fisheries. After Pacific War, the GGK established Pyongyang Junior College of Technology and Daegu Junior College of Agriculture, changed from Yeonhui Junior College and Boseong Junior College to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Technology and Business and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Colonization and Economics, closed Hyehwa Junior College and Myeongnyun Junior College, changed from Ewha Women’s Junior College and Sookmyung Women’s Junior College to schools for the training of female teachers or instructors. Secondly, the GGK strengthened intervention and control of junior colleges’ educational management during the wartime period. The GGK reduced the years required for graduation from the junior college by three months in 1941, and by six months since 1942, attached active army officers to private junior colleges as well as governmental junior colleges and increased in military training instructional time per week, organized junior college students into the School Labor Patriotism Corps and mobilized them to work. 본 연구는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시체제기에 조선총독부는 이과계 전문인력의 양성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체제를 전시전문학교체제로의 개편했다. 즉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부산고등수산학교를 신설했다. 이어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평양고등공업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를 신설했으며 문과계 전문학교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각각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라는 이과계 전문학교로 전환, 혜화전문학교와 명륜전문학교를 폐교,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통합,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조선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양성기관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동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 재학자를 동원하기 위해 학사운영에 대한 간섭과 통제도 강화했다. 먼저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의 수업연한을 1941년에 3개월, 1942년부터는 6개월 단축했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는 관립전문학교뿐만 아니라 사립전문학교에도 육군현역장교의 배속에 의한 교련교육을 실시하고 매주 교련교수시수를 확대했으며 이후 1943년에 ‘학도지원병제도’, 1944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전문학교 재학자를 병력자원으로 동원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 재학자를 학교근로보국대 등으로 조직하여 각종 근로에 동원했으며 연간 근로일수도 최초 10일에서 30일, 60일, 4개월로 점차 확대하고 전시체제기 말기에는 통년동원까지 실시했다. 결론적으로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은 조선인의 교육을 파행화(跛行化)했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

        일제 식민지기 전문학교입학자검정제도에 관한 시론

        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19 敎育問題硏究 Vol.32 No.2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전문학교입학자검정제도’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그 교육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전검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3.1운동 이후 안정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실시한 ‘문화정치’라는 정책 기조 하에서 당시 일본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었던 ‘전검제도’를 식민지 조선에도 실시함으로써 차별적 제도를 완화하고 전문학교 입학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와 함께 식민지 조선사회를 회유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둘째 1925년 4월 20일에 「전문학교입학자검정규정」의 전면개정을 기점으로 시험검정은 제도화됐다. 즉 이때부터 시험검정은 조선총독부 주관, 정기적 실시와 『조선총독부관보』에 출원기한・시험시행의 기일・장소의 고시, ‘학과목합격제도’와 ‘학과목면제제도’의 도입, 7월 공고-10월 실시-11월 합격자 발표라는 형태를 갖추게 됐다. 기타 시험장소는 1927년부터 1곳에서 1939년부터 5곳으로, 시험횟수는 1926년부터 연 1회에서 1942년부터 연 2회로 확대됐다. 셋째 시험검정 지원자는 1920년대 초반에는 주로 전문학교의 ‘구령에 의한 재학자’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들과 4년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점차 감소하고 그 자리를 각종학교 출신과 독학자가 대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오랜 기간 시험검정의 시험장을 1곳, 시험횟수를 연 1회로 제한했던 탓에 전검합격자 수는 저조했다. 넷째 그럼에도 ‘전검제도’가 교육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첫째 ‘전검제도’가 5년제 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부여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그들 중 일부가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전검제도’가 독학의 계기로서 작용하여 이를 통해 독학자 간에 고등보통교육이 보급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This study aimed to consider the Qualification Exam for JeonMunHakKyo(專門學校) Entrance(QEJE)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rule.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l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GGk) introduced the QEJE to provided for people who couldn't enter five-year-course middle school with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But also It was system for conciliating the minds of the Koreans who got the educational fever and required education opportunities including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Secondly, the GGk reformed the QEJE in 1925. As a result, the GGk administered the QEJE regularly, announced the deadline for application, exam date and site in the official gazette, introduced the splitting exams and the exemption system, increased exam site after 1939 and the annual number of exam after 1942. Also, people who passed the QEJE could be employed government officials or teachers. Thirdly, in early 1920s the applicants were people who were entered JeonMunHakKyo by old regulation, but after the mid 1920s the applicants were the Miscellaneous School graduates and the self studied men. But the number of people who passed the QEJE were very small because the GGk limited site and the annual number of exam for a long time, and also the rate of passing applicants were very small because the applicants weren’t people who received formal school education after the mid 1920s. Nevertheless, the QEJE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rule ha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Because it provided people who couldn't enter five-year-course middle school with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and let them started self study, as a result spread middle school leveled common knowledge among the Koreans during the Japanese rule.

      • KCI등재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경성치과의학교의 전문학교 승격과정에 관한 연구

        자중 한국교육사학회 2022 한국교육사학 Vol.44 No.3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경성치과의학교의 전문학교 승격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중 ‘일본인 설립자 학교’의 존재 양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경성치과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한 데에는 그 내부의 노력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단계적인 승격계획과 식민교육의 철저였다. 즉 경성치과의학교는 설립 직후인 1920년대 초반부터 전문학교 승격의 전제로서, 또한 적어도 1925년까지는 지정을 받아 그해 배출되는 제1회 졸업자부터 무시험 조선총독부 치과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지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경성치과의학교는 1925년 2월 28일에 지정을 받았다. 이어 1926년에 경성치과의학교는 본격적인 승격운동에 착수하여 승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치과의사양성기관의 충실과 조선인 중등학교 졸업자의 상급학교 진학기회라는 논리를 제시했으며, 정원 확대에 수반하여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교수입을 토대로 전임교원을 대거 확충하는 것에 방점을 둔 전문학교 설립계획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이와 함께 경성치과의학교는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학칙 중 생도심득에 학생들의 일어 사용과 집회 등의 허가제를 규정했으며, 또한 칙어등본을 교부받고 승마부를 설치하거나 육군현역장교의 배속에 의한 교련교육을 실시했다. 결국 경성치과의학교는 1929년 2월 5일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경성치과의학교의 이와 같은 노력은 식민지 조선의 독특한 사립전문학교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하자면 ‘반관반민형 사립전문학교’라고 할 수 있는 경성치과의전을 출현시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반관반민’은 경성치과의전이 사립전문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는 점, 또한 그 운영방침이 관립전문학교와 닮아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 KCI등재

        일제 식민지기 예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시론 - 고등교육기관 입학시험 준비교육을 중심으로

        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20 敎育問題硏究 Vol.33 No.1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preparatory school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ly, preparatory schools in japan influenced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preparatory school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Second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educational enthusiasm of Koreans and fierce competition to enter university and junior colleges influenced the establishment of preparatory schools. Thirdly, There were at least 15 preparatory schools in colonial Korea. eleven of them was established by Korean, three of them was established by Japanese. The founders and teachers of the former were mostly from private schools. Fourthly, preparatory schools had one year or less diploma course, taught English and mathematics, selected secondary schools students and graduates. Some preparatory schools charged high school fees, carried out Mock tests, held summer or winter courses, published textbooks. And most preparatory schools had various courses, but did not last long. Fifthly, supplementary courses absorbed the demand for preparatory schools. This shows that supplementary courses was in competition with the preparatory schools.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예비학교의 설립 배경과 현황, 운영상의 특징을 분석하고 고등보통학교⋅중학교 보습과와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예비학교의 교육사적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예비교는 식민지 조선의 예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예비학교의 설립은 3.1운동 이후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수의 증가와 조선총독부의 관립전문학교증설억제정책에 의해 초래된 고등교육기관의 입학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정규의 학교제도’ 밖에서의 ‘준비교육’에 대한 수요 증가라는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일제 식민지에는 적어도 15교의 예비학교가 설립됐다. 설립자별로 보면 사실상 조선인 설립의 예비학교 11교, 일본인 설립의 예비학교 3교, 미상 1교였다. 이중 조선인 설립의 예비학교는 설립자나 강사가 대체로 사립의 고등보통학교, 각종학교, 사설학술강습소 관계자 출신이었으나 일본인 설립의 예비학교는 설립자나 강사가 중등학교 교원와 함께 일부 고등교육기관 교원도 참여하고 있었다. 넷째 예비학교는 다음과 같은 운영상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수업연한은 대체로 1년 이하였으며 교육과정은 영어⋅수학 중심이었다. 재학자는 재수생과 함께 고등보통학교와 ‘지정학교’ 재학자 등을 아울렀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예비학교는 모의시험을 실시하거나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재를 저술⋅출판했으며 수업료가 고등보통학교 본과의 수업료보다 고액이었다. 대부분의 예비학교는 존속기간이 짧았으며 ‘준비교육’ 이외의 다양한 과정을 설치했다. 다섯째 1934년에 보습과의 출현은 예비교에 대한 수요를 일정 정도 흡수했다. 동년에 경성고등예비학교의 입학지원자 수는 급감했다. 이는 보습과가 경성고등예비학교와 경합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일제 식민지기에 예비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의 입학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준비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재수생’, 고등보통학교와 ‘지정학교’ 재학자, ‘전검’ 합격자 등에게 ‘준비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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