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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손승철(Son, Seung-cheul) 한일관계사학회 2011 한일관계사연구 Vol.39 No.-

        울릉도와 독도 근해는 신라시대부터 우산국으로 기술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영토로 인식되었고, 1141년부터는 명주도의 관리구역이었다. 『高麗史』에 의하면 東界 울진현의 행정구역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50년대에 왜구의 침입하면서, 울릉도는 동해안 지역을 약탈하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은 계속되자, 울릉도가 왜구침탈의 중간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조처로 "居民刷出"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居民刷出"이 일인사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해양정책으로 규정되어 "空島政策"이란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대마도에서는 일본인의 울릉도 이주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일본인의 울릉도거주를 허용하는 것은 越境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일본인의 이주를 청한 것이나, 越境이어서 안된다고 한 것은 일본이나 조선의 울릉도에 대한 경계인식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울릉도 관리를 위해 "武陵等處按撫使"와 "武陵島巡審敬差官"을 파견하였고, 17세기 말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搜討制가 제도화되어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공도정책"이란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민쇄출"도 울릉도를 경영하는 하나의 시책이었다. "居民刷出"을 시행하면서 조선에서는 按撫使 - 敬差官 - 搜討官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판한 도서경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한편 于山國이 于山과 武陵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우산과 무릉이 一島인가, 二島인가 하는 문제이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에는 우산과 무릉이 두 섬으로 기술되었는데, 『신증여지승람』에는 한 섬으로 되어있다. 이 사료는 조선왕조가 동해의 도서에 대해 어떠한 영토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一島說"과 "二島說"의 혼란은 『동국문헌비고』에 의해 완전히 "二島說"로 정리된다. 이는 1696년 안용복 도일사건이후 벌어진 조일간의 "울릉도쟁계"의 결과 나타난 영토인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于山國은 于山과 武陵이며, 두 섬으로 되어있고, 于山은 독도, 武陵은 울릉도"라는 사실이 모두 증명된다.

      • KCI등재

        寒洲 李震相의 生涯와 學問世界

        이명식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논총 Vol.43 No.-

        . 이 글은 조선 말 대표적인 유학자(儒學者)인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의 생애와 그의 학문세계를 다룬 것이다. 한주는 목판 문집 42권 22책을 포함하여 89책에 달하는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학계는 그를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근세유학 3대가로 일컫거나,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임성주(任聖周)·기정진과 더불어 이학(理學) 6대가로 부른다. 그럼에도 한주의 사상이나 학문적 업적을 구체적으로 구명하려는 노력은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한주 이진상의 업적을 주제로 학위 논문이 발표되고, 학계의 중견 연구자들에 의해서 다각도의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주는 退溪(퇴계)의 이(理) 중시적 성리설(性理說)을 체계화해 ‘이발일도설(理發一途說)’로 발전시켰다. 그의 글은 전국의 유림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자신이 확립한 주리사상에 의거하여, 기존의 주류인 다산의 자득적 경학(自得的經學)과 다른 고유한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동안 그의 입장은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분석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앞으로 학계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묘충록(畝忠錄)』을 통해 당시 정치제도와 교육제도, 군정제도 등을 개혁하고자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 실천적 선비였다. 한주는 전국을 유람하며 530여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그의 문학사상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이기 심성론(理氣心性論)을 탐구하여 자연과 인간을 해명하려고 한, 수간(竪看)과 순추(順推)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주학(寒洲學)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학계는 『한주전서(寒洲全書)』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인 『심즉리설(心卽理說)』, 『묘충록(畝忠錄)』, 『이학종요(理學綜要)』, 『사례집요(四禮輯要)』 등의 번역본, 530여 수의 시 등을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겠다.

      • 牛溪 成渾의 生涯에 관한 연구

        成校珍 우계문화재단 2021 牛溪學報 Vol.40 No.-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은 우리나라 동방십팔현(東方十八賢)의 한 분으로서 자(字)는 호원(浩源)이요 호(號)는 우계(牛溪)이다.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이다. 1572년(선조5년)부터 38세에 이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놓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문답(問答)을 하기 시작 하면서, 1년 간 아홉 차례의 왕복서가 오고 갔다. 이 때에 율곡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었고, 우계는 퇴계의 이기호발상승설(理氣互發相乘說)과의 중간 입장에서 주리주기이기일발일도설(主里主氣纔發一途說)을 가지고 줄기차게 물으면서 주리주기재발일도설(主里主氣纔發一途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었으니 이발(理發)을 단호히 부정하였다. 이(理)의 발동(發動)을 부정 하는 율곡은 확고하였으니, 퇴계와는 사상(思想)의 견지(見地)가 확실히 달랐 다.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에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여 준 우계(牛溪)야 말로 한국성리학사상에 큰 전환점을 갖게 하여 주었으니, 우계 성혼의 질문서가 크게 이바지 한 셈이다. 우계가 질문한 요지는 이발기발인심도심(理發氣發人心道心)이었다. 율곡은 시종일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인심도심종실설(人心道心終始說)이 었다. 우계는 주리주기재발일도설(主里主氣纔發一途說)이었고, 인심도심소장설(人心道心消長說)이었다. 우계의 문하에는 김집(金集)과 조헌(趙憲)과 황신(黃愼)과 같은 명현달사(名賢達士)가 128인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우계의 인심도심소장설(인심도심소장설)에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Ugye Seong-hon(1535-1598) was one of the Eastern Eighties in Korea. His adult name is Howon, and his nickname is Ugye. His place of origin is Changnyeong. At the age of 17, he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he gave up on the national examinations because he could not take Boksi. So, he entered the school of Baek In-geol and devoted himself to study Confucian classics. In 1580, the King showed him courtesy by sending a horse for him to ride to Han-yang when he refused the position of Jang-ryeong (Deputy director). In 1592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Imjin, the Crown Prince appointed him as Woo Cham Chan(Minister), and then he worked as Jwa Cham Chan (Minister) in 1594. Since 1572 (the 5th year of King Seonjo), at the age of 38, he began to exchange question-and-answer letters with Yi Yulgok(1536-1584) over the eekihobalseul of Lee Toegye. While there were nine letters exchanged in a year, the third, seventh, eight, and ninth letters were lost and could not be handed down. Therefore, I examined the five remaining letters for my doctoral degree. Yulgok emphasized the gibalisengildoseul while Toegye maintained the eekihobalsangsengseul. Ugye kept inquiring over the julijugieeklilbalildoseul as positioning in the middle of Yulgok and Toegye and then he developed the concept of julijugijaebalildoseul. Yulgok strongly denied eebal because he supported the gibalisengildoseul. Toegye had obviously different thoughts and perspectives from Yulgok who resolutely refused the ee’s function as energy. Ugye Seong-hon provided a great turning point in Korean Neo Confucianism because his questions contributed to the considerable strengthening of Yulgok’s thought of eeki. The gist of Ugye’s questions was eebalkibalinsimdosim. Yulgok always stressed the gibalisengildoseul and the insimdosimjongsiseul. Ugye believed in the julijugijaebalildoseul(主里主氣纔發一途說) and the insimdosimsojangseul(人心道心消長說). There were 128 wise men, such as Kim Jip, Jo Heon, and Hwang Shin, under the Ugye’s school. In conclusion, I strongly support Yulgok's gibalisengildoseul and Ugye's insimdosimsojang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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