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17~18세기 대청 사행의 중계무역과 償債廳

        김영록(Kim, Young-Rok)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7 한국민족문화 Vol.63 No.-

        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청의 白絲와 일본의 銀을 교환하는 방식의 중계무역은 조선 대외무역의 한 축이었다. 중계무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譯官을 비롯한 대청 사행원이었으며, 이들은 각 국가기관에서 官銀을 대출 받아 무역 자본을 확보하였다. 국가기관 또한 官銀을 대출해주면서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재원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은 대출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대청 사행원과 중앙의 관청은 무역자본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부는 외교 비용의 원활한 확보를 위해 公用銀 마련을 위한 官銀의 대출을 공인하였다. 이는 대청 사행원의 경제적 기반을 보호해 주는 것과 동시에 각 국가기관의 무분별한 관은 대출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72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청 사행원의 官銀 부채가 증가하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행원의 관은 미상환은 몇몇 위정자들에게 사행원의 도덕적 문제로 인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청․일간 중계무역의 구조적 문제에 비롯한 것이었다. 일본의 은 통제정책으로 인한 倭銀의 수입량 감소와 지급 지체, 백사의 수입량 감소와 가격 상승 등 국제무역의 조건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며, 私商과의 경쟁 및 국내 판로의 침체 등 국내유통의 조건 또한 대청 사행원의 무역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안정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청 사행의 주요 구성원인 역관층을 보호해야 했다. 이에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던 부채 문제와 무분별한 관청의 빚 독촉을 해결하고, 각 관청의 재정을 보전하기 위해 1726년(영조 2) 중앙 償債廳이 설치, 운영되었다. 부채자가 총 부채액의 1/10을 납부하고, 그것을 자본금으로 삼아 기존의 백사-은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실현하여 빚을 갚는 방식이었다. 운영 초기에는 원활한 빚의 상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730년대 이후 백사-은의 중계무역이 점차 쇠퇴하면서 은의 상환이 점차 더뎌졌고, 결국 1743년(영조 19) 상채청은 혁파되었다. 상채청의 혁파는 백사-은 중계무역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의미했으며, 정부는 대청 외교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외교 비용의 마련과 사행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그 결과, 官帽制가 시행되면서 대청 사행 무역은 남북으로 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의 형태에서 국내 유통 판로를 이용한 형태로 이행되었으며, 외부에서 은이 유입되지 않음에 따라 국내의 은화가 소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Intermediate trade between white threads of Qing and Japanese silver was one of two pillars supporting foreign trade in mid-17th and mid-18th centuries Joseon. Envoys to Qing, included many official interpreters, played a key role in the course of trade. On the one hand, they raised the capital by getting loans from the government’s silver holdings to carry out trade and, on the other hand, the government could secure finances from the profits from trade. However, by the earlier years of 18th century, the government faced a financial crisis due to the increased and unpaid debts of the envoys. In fact, the crisis was caused by a structural problem of trade between Qing and Japan: while the Japanese government started to limit amount of exporting silver, the imports of white threads had fallen off and the price was increasing. In addition to this, the internal condition for distribution negatively affected trade movement of envoys. The government had to protect the official interpreters in order to maintain stabilized diplomatic relations. Therefore, Sanchechong(償債廳; debt management office) was installed in 1726 and operated on the purpose of controlling debts problem. However, since the white threads-silver trade went to decay after 1730 and the repayment of silver became slowed down, Sangchecheong had to be abolished in 1743. This means that the white threads-silver trade was no longer sustainable. Now the government should find a new trade system in order to secure the diplomatic balance. As a result, the government directly took part in importing winter caps from Qing by silver payment(官帽制), which menas that the foreign trade structure of Joseon was changed from the intermediate trade connecting Qing and Japan to domestic market development consuming remaing silver in Joseon.

      • KCI등재

        仁祖代 전반 問慰行 연구

        李尙奎(Lee, Sang-Gyu) 한일관계사학회 2010 한일관계사연구 Vol.35 No.-

        問慰行은 162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260년 이상 지속해온 조일간 외교사절이었다. 역관이 정사가 되어 상?중?하관을 인솔하여 대마도주가 에도에서 還島한 것을 위로하고 關白의 경조사를 축하?조위하는 목적으로 대마도로 파견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 木綿 紛爭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야나가와(柳川) 사건을 정탐하는 일로서,硫黃貿易에 답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글은 17세기 왜학역관의 활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문위행으로 분야를 넓혀서 서술된 것이다. 17세기 문위행의 활동 중에서 인조 초반기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에는 공목분쟁이 격화되면서 동래부 훈도?별차가 담당한 공목 회계가 제대로 인수인계되지 않거나 대마측에 未收公木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문위행이 파견되었다. 제도면에서 고찰한다면 문위행은 1606년에 全繼信 등이 회답겸쇄환사 파견 전에 對馬의 실정을 파악하고 돌아온 것을 선행적 형태로 잡기도 한다. 武人 출신으로서 일본 사정에 밝은 전계신은 1617년 회답겸쇄환사의 파견을 앞두고 대마의 실정을 탐문하는 사자로 지명되었다. 조선은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일본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광해군대에 명나라 사자를 응대하기 위해 倭館의 은을 차용한 일이 있었고 회답겸쇄환사가 받아온 答禮銀을 宮闕營建 비용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李造의 선봉군을 막지 못하여 왜관에 무장력을 요청할 것을 검토하였고, 정묘호란을 당한 후 성능 좋은 일본산 鳥敍을 사기 위해 對馬島로 譯官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였다. 역관사행으로서 문위행은 조선이 대일관계에서 공무역품의 결제 수단으로 쓴 목면을 미지급하는 사태가 심해져서 인조대 이후 대마측이 공목 분쟁을 제기할 때에 나타난다. 1629년 대마 사자인 겐포(玄方)가 上京했을 때 정묘호란 후 조선의 실정을 탐색할 목적도 있었지만,光海君代에 받지 못한 목면을 일괄하여 받아가려고도 하였다. 이 때 미지급된 목면 600同이나 드러나서, 인조 정부는 역관 등의 사절을 보내 대마측의 불만을 무마하려고 나섰다. 1629년 문위행 邪?吉? 崔義吉 등은 6개월 전에 겐포가 요구한 600동을 지급유예하기 위해 대마로 갔다. 도주가 에도에서 還島한 것을 위로할 목적도 있었다. 1631년 문위행은 2년 전에 약속한 목면 600동을 지급할 수 없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1614년 공목을 유예하기 위해 대마로 파견되었다. 당시 島主와 야나가와씨 간 분쟁이 생겨서 출발이 지연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1632년 문위행은 도주가 귀환한 것을 위로하고 쇼군의 喪에 조위하고 야나가와 사건의 탐색하기 위한 목적을 띠었다. 이 때는 목화 흉작이 겹쳐서 당년 목면 지급분도 주지 못할 정도가 되어 대마측에 미수공목을 무마하기가 더욱 곤란해졌다. 1635년 문위행은 역관 洪喜男과 馬上才를 에도로 보내서 야나가와 세력에 고립되어 곤궁해진 도주를 변호하였다. 홍희남은 쇼군이 여러 가지로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시종일관 도주의 처지를 옹호하였다. 1636년 문위행은 1년 전 사행에 이어져서 도주가 야나가와 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특히 1635년에는 홍희남 일행이 귀로인 대마도에서 대마 무역선의 渡海 횟수를 감소하는 협상 兼帶制를 타결시킨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야나가와 사건은 1636년 통신사 외교로서 종료되지만 목면 분쟁은 심각도가 날로 더해져갔다. 동래부의 역관들이 목면을 지급하는 회계를 하지 않고 이임하거나 파직?처벌당하여 목면 분쟁의 파고는 갈수록 높아졌다.

      • KCI등재

        譯官, 士와 商의 경계에 서다-조선 후기 역관과 士商(儒商) 사이의 개연성을 중심으로-

        김영죽 한국언어문화학회 2022 한국언어문화 Vol.- No.79

        조선의 중간계층은 조선 사회 士계층의 소비 혹은 사치 현상, 고급문화 창출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또한 그것이 조선 사회 내에서 그들의 生業과 순조롭게 조화 되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언하기 힘들다. 이는 중간계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봉착하는 난제가 되어 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中人’ 혹은 ‘中間階層’으로 범범하게 규정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망으로 얽혀 있는 이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역관에게서 더욱 포착된다. 이들은 儒者로서의 士와 商 경계에 위치해 있다. 조선 역관은 사대부에 버금가는 교양 지식과 실무를 겸한 기능적 지식인을 대표하며, 使行에 참여하여 사적・공적 무역의 권한을 부여받아 경제적 부를 이룬 이들이다. 따라서, 정체성은 士(儒)에 기반하였으며, 생업으로서의 삶은 상행위에 놓여있어 ‘士商(儒商)相混’이라 칭할 만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본고는 士와 商을 넘나들며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한 역관, 이들의 존재를 어떠한 기제 속에서 설명해야 하는가, 그 고민해서 출발해 보고자 한다.

      • KCI등재

        기획논문 : 조선전기의 외교 실무자 통사(通事)

        서인범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통사는 赴京使行이 왕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명조 관료의 말을 적확하게 듣고 이해한 후 三使에 전달해야 했다. 동시에 사행의 建言도 명쾌하게 명조 관료에게 전달하여 외교활동에 차질을 빚지 않아야 했다. 특히 조선내부의 기밀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은 탕사에게 명조 측에서 묻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천문과 같은 비밀에 관계되는 사항은 사행의 事目에 기재하지 않고 별도로 한 통에 적어 路中에서 와우게한 뒤 의주에 도착하면 두고 가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변방 방어에 관한 일은 통사 자신들이 미천한 신분이라 알지 못한다고 답변해야 했다. 통사가 길을 떠나기 전 명조의 관료들의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일러주었을 정도로 통사의 입을 단속시켰다. 부경사행에 참여하는 통사는 조선 초기에는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이 숫자는 점점 증가하였고, 세종 말에는 부경통사의 선빌 기준을 북경에 다녀 온 기간의 長短에서 輪次로 보내도록 정했다. 종종연간이 되면 이 규정도 무너져 통사의 숫자는 무려 12명에 달했고, 임란을 전후해서는 그 수가 자그마치 20여 명까지 대폭으로 증가하였다. 통사는 다양한 직책을 띠고 요동도사를 거쳐 북경에 들어가 다양한 인적 네트어크, 즉 조선 출신의 태감, 조선에 들어왔던 明使, 조선과 관련을 맺고 있던 통사나 序班을 유효하게 활용하여 왕명을 완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통시는 명 환관들의 심한 감시를 무릅쓰고 황제의 詔書·勅書나 관료들이 열람하는 朝報·邱報, 그리고 변경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한 塘報들을 등사해 왔다. 通事肩負着赴京使行之王命, 正確聆은幷理解明朝官員的言敎在轉述給三使.同時也確保使行的建言能順利的傳達給明朝的官員, 保證外交活動不出什요差錯. 特別是有關朝鮮內部的机密事項謹防隨意泄露, 還要注意不能向明政府提問的事宜要謹言. 涉及天文等机密事宜幷不紀錄在出使事由中, 而是單獨書寫在路中背誦到達義州后留存而已. 再者涉及邊境防御等事宜, 同事則要說因爲自己官職微賤不得而知來作答. 對通事的行動制約是, 在通事出發前要預先思考明朝官員的提問及如何應付. 朝鮮初期參加赴京使行的通事不過一、二人, 隨着時間推移人數慢慢多了起來. 到了世宗默念選拔赴京通事的標准定爲以奔赴北京時間的長短爲基准而輪流派遣. 中宗年間這一標准不再使用, 通事的人數已經增加到十二名,壬亂時期之后其人數最少說也有二十中. 通事肩負衆多職責, 經由遼東都司前往北京, 通過各種人脈關系網爲完成王命而盡心盡力. 通事還有冒着被明朝宦官監視的危險閱覽皇帝的詔書·勅書或者官員們看的朝報·邱報,幷抄寫有關邊境事務的塘報等.

      • KCI등재

        永湖 趙曮의 通信使 使行文學 硏究 — 二元的 文學世界 分析을 中心으로 —

        이성형 한국한문고전학회 2017 漢文古典硏究 Vol.35 No.1

        In this study, dualistic literature world for envoy travelogue of Youngho(永湖) Cho-Eom(趙曮) (1719-1777) was analyzed and its detailed contents were considered. As cherished thought for envoy mission as a leader of envoy, first, re-recognition for diplomatic protocol and an effort of establishing national dignity were observed. Youngho(永湖) recorded even minor diplomatic protocol in detail based on a value of 'preventing an act of insult against oneself' and 'establishing national dignity', changed diplomatic protocol for banquet of Japan so that drinking prohibition order(禁酒令) of Choseon(朝鮮) would be observed and emphasized rationale for criticism and change of credential delivery ceremony(傳命儀式). As a next step, Youngho(永湖) considered diplomatic response to be proper by recollecting 'old incident of war breakout by mulberry leaf dispute(爭桑의 故事)' right after the case. Resultantly, right from occurrence of the case to execution of Tsuzuki Denjo[鈴木傳藏], the criminal, the case was resolved relatively quickly but it did not spread to diplomatic problem between Choseon(朝鮮) and Japan. Finally, when observing the contents of emphasizing role and importance of interpreter by Youngho(永湖), Youngho(永湖) reconfirmed role and importance of an interpreter in a diplomacy through resolution process of Choi, Cheon-Jong(崔天宗) murder case, expressed concern over decline of Japanese interpreter and Japanology and suggested an alternative for solving such problem. As a cherished thought for envoy travel experience as an intellectual traveller, recognition and criticism of Japan by Youngho(永湖) based on Choseon Zhonghua Ideology(朝鮮中華主義) were observed. It seems that Youngho(永湖) exposed critical perspective by regulating Japanese custom, religion and study as uncivilized custom or heresy based on a viewpoint of Choseon Zhonghua Ideology(朝鮮中華主義) but he also read unnatural recognition of Japan against Choseon(朝鮮). As a next step, in acceptance will and objective recognition for Japanese culture, Youngho(永湖) showed positive concern and introduction will for new Japanese culture that may be helpful to the people of Choseon(朝鮮) by sticking to public welfare oriented merciful policy and this effect was confirmed by acceptance will of sweet potato propagation, water mill(水車), 'Jookbuin shaped tool(竹夫人樣子)'. In addition, he also showed a viewpoint of an objective and positive observer for bustling, well-arranged Japanese cities. Finally, in contents of exposing lyrical aesthetic sense while travelling magnificent Japanese scenery, Youngho(永湖) depicted such sense in detail and aroused excitement of Jangyu(壯遊) through positive exchange with colleagues. In addition, Youngho(永湖) exposed nostalgia by comparing landscape excellence of Japan with that of Choseon(朝鮮) as well. 본고 永湖 趙曮(1719~1777)의 통신사 사행문학에 대한 이원적 문학세계에 대하여 관련된 선행연구를 분석하고 세부 내용을 고찰해 보았다. 通信使의 正使로서 使命 遂行에 대한 所懷로 먼저 永湖가 外交儀典에 대한 再認識과 國格의 正立을 위한 노력과 소회를 살펴보았다. 永湖는 외교의전에 대해서 ‘自侮의 방지’와 ‘國格의 정립’이라는 가치를 근간으로 사소한 외교의전도 자세히 기록했고, 조선의 禁酒令을 준수하도록 일본의 宴享儀典을 변경했으며, 傳命儀式에 대한 비판과 변경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永湖가 崔天宗 피살사건에 대한 대처와 외교적 해결 과정에서 永湖는 崔天宗 피살사건의 발생 직후부터 ‘爭桑의 고사’를 상기하고, 외교적 대응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발생 직후부터 범인인 鈴木傳藏의 처형까지 비교적 신속하게 해결되었으면서도, 朝日 間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永湖가 역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을 살펴보면, 영호는 최천종 피살사건의 해결과정을 통해서 외교에서 역관의 역할과 중요성을 재확인했고, 倭譯과 倭學의 쇠퇴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知識人 旅行者로서 使行 體驗에 대한 所懷로 먼저 永湖가 朝鮮中華主意에 근거한 일본 인식과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永湖는 지식인 여행자로서 조선중화주의적 시각으로 일본의 종교, 학문, 典章 등에 대해서 夷狄의 풍속으로 규정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노정하였다. 다만 일본의 조선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인식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永湖가 日本 文物에 대한 受容 意志와 客觀的 認識에서 永湖는 民生中心 愛民觀을 견지해서 조선의 백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과 도입의지를 보였고, 이는 고구마의 전파, 水車, 竹夫人樣子 등에 대한 수용 의지로 확인된다. 또한 일본의 번화한 도시나 정돈된 시가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관찰자의 시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永湖가 일본의 風光을 遊覽하면서 抒情的 美感을 노정한 내용에서 永湖는 일본의 절경을 만나면 그 서정적 미감을 자세히 서술하기도 하였고, 동료들과 적극적인 酬唱을 통해 壯遊의 興趣를 제고하였다. 또한 永湖는 일본과 조선의 산수의 우열을 비교하기도 했다.

      • KCI등재

        조선전기의 외교 실무자 通事

        서인범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2 동국사학 Vol.53 No.-

        통사는 赴京使行이 왕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명조 관료의 말을 적확하게 듣고 이해한 후 三使에 전달해야 했다. 동시에 사행의 建言도 명쾌하게 명조 관료에게 전달하여 외교활동에 차질을 빚지 않아야 했다. 특히 조선 내부의 기밀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은 통사에게 명조 측에서 묻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천문과 같은 비밀에 관계되는 사항은 사행의 事目에 기재하지 않고 별도로 한 통에 적어 路中에서 외우게 한 뒤 의주에 도착하면 두고 가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변방 방어에 관한 일은 통사 자신들이 미천한 신분이라 알지 못한다고 답변해야 했다. 통사가 길을 떠나기 전 명조의 관료들의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일러주었을 정도로 통사의 입을 단속시켰다. 부경사행에 참여하는 통사는 조선 초기에는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 수록 이 숫자는 점점 증가하였고, 세종 말에는 부경통사의 선발 기준을 북경에 다녀 온 기간의 長短에서 輪次로 보내도록 정했다. 중종연간이 되면 이 규정도 무너져 통사의 숫자는 무려 12명에 달했고, 임란을 전후해서는 그 수가 자그마치 20여 명까지 대폭으로 증가하였다. 통사는 다양한 직책을 띠고 요동도사를 거쳐 북경에 들어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 즉 조선 출신의 태감, 조선에 들어왔던 明使, 조선과 관련을 맺고 있던 통사나 序班을 유효하게 활용하여 왕명을 완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통사는 명 환관들의 심한 감시를 무릅쓰고 황제의 詔書․勅書나 관료들이 열람하는 朝報․邸報, 그리고 변경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한 塘報 등을 등사해 왔다.

      • KCI등재후보

        조선후기의 敎誨譯官 -『敎誨廳先生案』의 분석을 중심으로-

        김양수 조선시대사학회 2003 朝鮮時代史學報 Vol.24 No.-

        The foreign language teachers among the official interpreters were composed of kyosu(敎授: 從6品) and hundo(訓導: 從9品). They were also called kyohoe(敎誨) in Chosǒn dynasty. The rule of the government guaranteed them long-term service for more than 30 months, while most members of the official interpreters could serve only temporily. After that term the kyohoe could have a chance to transfer to civil officials if they hope. As a result, the member of the kyohoewho have possessed siljik(實職) formed the leading group in the field of official interpreters. We can find out 442 members of them in the Gyohoechung- sunsaengan(敎誨聽先生案: Teacher's List of Official Interpreter Training Institute) that was collected by the Kyujanggak(奎章閣) Library. Most of the kyohoesucceeded in the examination of the yokkwa(譯科). The average succeeded percentage of yokkwa was 84.4% among gyohoe. The average age of them was 19.9. And the average age of promotion to kyohoe was 34.6. Almost of them majored in the Chinese language. The clans of the kyohoe was distributed to 97 famillies. The great 10 clans of them was ① Yi from Kǔmsan(金山李氏), ② Kim from Ubong(牛峰金氏), Yi from Wansan(完山李氏), ④ Pyǒn from Miryang(密陽卞氏), ⑤ Hong from Namyang(南陽洪氏), ⑥ Han from Ch'ǒngju(淸州韓氏), ⑦ Hyǒn from Ch'ǒnnyǒng(川寧玄氏), ⑧ Yi from Kangǔm(江陰李氏), ⑨ Kim from Kyǒngju(慶州金氏), ⑩ Kim from Chǒnju(全州金氏). They were accounted for 43% of the kyohoe. If we find out great 20 clans, they would occupied 58.5% among all the kyohoe. In the course of time, excellent famillies monopolied the kyohoe gradually. If we investigate the bureaucratic grade of the kyohoe, the members, who had ranked to Chǒung(正) in Sayǒkwon(司譯院) counted 117 persons, ranked to T'ongjǒng-daebu(通政大夫) counted 52, and Sungrok-daebu(崇祿大夫) counted 45. We can regard them as a leading status among the official interpreters. And if we classify them by the bureaucratic rank, there were officials of Tangsangkwan(堂上官) occupying 54.7%, Ch'amsangkwan(參上官) occupying 40.3%, and Ch'amhakwan(參下官) occupying 3.2%. According to the statistics, who had the bureaucratic grade was 98.2%. Among the late period of Chosǒn bureaucratic rank of them reached to the highest position in the 18th century. From the Kyohoechǒng-sǒnsaengan(敎誨聽先生案) we can also sort out the special positions among the kyohoe totalled 214 persons. They held 19 positions of Suyǒk (首譯: chief official interpreter in mission), 60 Haengsu(行首: chief official of a bureau), and 204 Hunsang(訓上: selected Tangsanggwan among kyohoe). If we classify them by clan, the order of them is same as No. 1 to No. 7 with the kyohoe interpreters and some of whom concurrent positions. In the special official post members of Gyohoe, the percentage who came from great 10 famillies is 51.9%. And if we enlarge the range to great 20 famillies, they occupied 70.1%. One of the most famous person among them is YI Su(李洙) whose ancestral home was Kǔmsan(金山). He insisted the import of coins from Ch'ing(淸) for the means of official interpreter's living in the 18th century. The Leaders among official interpreters could be promoted to higher bureaucratic rank by their distinguished services in diplomacy, or by writting the books about diplomacy and textbooks for learning foreign language. The training group among the official interpreters contributed to their country by training the capable interpreters and maintaining peaceful relations with neighbor countries by intermediary trade. Also they tried to exchange culture. However, it was a pending problem that kyohoe(敎誨) interpreter positions were monopolied to some famillies.

      • KCI등재
      • KCI등재

        역관 변원규(卞元圭)의 생애와 중국사행 시의 교유

        김홍매 국문학회 2017 국문학연구 Vol.0 No.36

        Byeon WonGyu(卞元圭, 1837-1896)was a famous translator and literati in late Joseon. There are many research for his diplomatic and enhance military contribution in the academic circles now. But the research about his descent and the life is seldom. Based on this point, I will do some research for his career and some relative communication activities according to his genealogy and historical documents of late Joseon on this paper. Byeon WonGyu's six generation was Byeon SeungEop(卞承業, 1623-1709) who was a translator between Korean and Japanese. His family began to developed after Byeon SeungEop. When Byeon WonGyu was 19 years old, he got the first in the imperial examination by the department of translation. After then, he served as the director of the Translation Bureau, OhWijang(五衛將) and other positions. And later he was promoted to a third grade civil servant as a interpreter. In 1880, Byeon WonGyu went to Tian Jin to meet Li HongZhang(李鴻章) in the identity as a special officer was in charge of report and advisory. In this meeting they talked about the constitution of senting the students from Joseon to Qing to study weapon manufacturing technology and military training knowledge. For he got a great achievement in this meeting, he was appointed county magistrate of JeokSeong(積城縣監) and magistrate of GaPyeong(加平郡守). Thereafter he occupied municipal official of PyeongSan(平山府使) and the chief local official of HanSeong(漢城府判尹). And also he continu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iplomacy. From the existing historical document, Byeon WonGyu went to Qing for 10 times at least. In the process of the visit in 1880, he made a deep friendship with Kim YunSik(金允植, 1835-1922)who was the leader of the Joseon envoys. When he made a friendship with the officers as Yun TaeJun(尹泰駿, 1839-1884), Baek NakYun(白樂倫) and so on, he also communicated with literati of Qing Dynasty, just like You ZhiKai(游智開, 1816-1899), Kong XianYi(孔憲彛), Dong WenHuan(董文渙). Then Byeon WonGyu brought the poetry anthology “CangYuan ShiChao”(藏園詩鈔) to Joseon which was written by You ZhiKai and print it for publication. Although the communication was the regular course of official duties, but they indeed carried out a cultural exchanges. For there was a two way communication between them, so the significance is undeniable. 변원규(卞元圭, 1837~1896)는 19세기 유명한 역관 문인이다. 그간 변원규의 외교와 무비 강화 등 방면에서의 공로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있었지만 정작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본고는 『밀양변씨효량공파보』와 조선시기 문헌 자료들을 토대로 변원규의 생애를 복원하고 중국 사행 시의 일부 교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변원규의 6대조는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왜학 역관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이다. 변원규는 19세에 역과 식년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역원 정, 오위장 등 벼슬을 하였고 정3품 당상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1880년에 재자관의 신분으로 천진에 가 이홍장(李鴻章)과 회담하고 무기 제조술과 군사 훈련을 배우는 장정(章程)을 상의한 공로를 인정받아 적성 현감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가평 군수의 관직을 받았다. 그 이후 또 평산부사(平山府使),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에 임명되었고 외교에서도 계속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기록으로 보아 변원규는 중국에 적어도 10회 이상 갔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881년의 사행 중에 영선사(領選史)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깊은 인연을 맺었을 뿐 아니라 종사관 윤태준(尹泰駿, 1839~1884), 백낙륜(白樂倫)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또 중국인 유지개(游智開, 1816~1899), 공헌이(孔憲彛, 1808~1863), 동문환(董文渙, 1833~1877) 등과도 교유하였고 유지개의 문집인 『장원시초(藏園詩鈔)』를 조선에 가져와 간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들과의 교유는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지만 문화적 교류를 수반하였고 또 이런 문화적 교류가 쌍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