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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頭山(長白山)和中,韓(朝鮮) 國境線 問題

        량대언 택민국학연구원 2011 국학연구론총 Vol.0 No.8

        白頭山은 우리 韓民族에게는 영원한 고향과 같은 민족의 發祥地이며 국가의 始原으로, 생명력을 지닌 민족의 聖山으로 崇仰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이후 夫餘, 高句麗, 渤海등의 나라들이 백두산을 근거로 하여 발전의 동력을 삼았고 민족 기상의 發揚의 근본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한편 이 백두산 주변 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肅愼,靺鞨, 女眞, 滿洲族등도 그네들의 發祥地내지 根據地라 여겨왔고, 심지어 신격화 전설화 등 그들의 나름대로 崇仰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백두산은 풍수지리상 지세를 사람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氣가 뭉쳐진 머리로 하여 韓半島가 형성되고 그 氣의 흐름이 낭림산맥-태백산맥-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 이어져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 의 역할을 하는 “白頭大幹” 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기원926년에 契丹族에 의하여 발해가 멸망됨으로서 우리민족의 영역에서 벗어나 우리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 후로 부터는 故土回復의 전진 기지, 혹은 최전방 에 보이는 탈환의 고지 진지로 되어, 오랜 세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만 간직된 잃어버린 터전에서, 되찾아야 될 옛 고향 땅이 되고 말았다. 한편 만주족의 淸도 이곳을 민족의 發祥地로 , 국가번영의 터전으로 하여 벼슬을 내리고 이름 마져 泰山,長白山이라 하면서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영원토록 번영의 길로 갈수 있다고 여겨 왔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민족뿐 만 아니라 북방에서 明滅하던 東夷諸國의 정신적 고향 땅으로 활동의 주 무대가 되어, 이곳에 대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이후 이 지역을 자신들의 근거지라 하여 타 민족의 접근조차 금하는 封禁政策을 실시하여 200여 년 간 어느 누구도 출입을 하지 못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7세기후반 18세기 초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 두만강 을 넘어와 백두산인근 지역과 두만강 북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 하자 청은 그 당시국경도 확정 되지 못했던 백두산을 그들의 영역으로 귀속 시키려 했다. 1712년 白頭山定界碑를 세워 백두산에 관한 언급 없이 천지를 포함하는 넓은 산지를 자기들의 영토로 삼았고, 심지어 土門江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국경분쟁의 산물인 間島問題가 야기되었다. 그 이후日帝의 强占으로 우리의 국권이 상실된 시기에 독립운동의 據點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국권이 회복된 후에도 우리민족의 분단과 조선(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조,중 변계조약에 의하여 백두산이 반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두산의 역사와 명칭문제를 보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이 중국의 전국시대인 BC475년~AD 221년 사이에 쓰여진 지리지(山海經) 이다. 여기에 不咸山으로 등장한 이래 漢代單單大嶺으로, 남북조 시대 北魏에서는 개마대산, 당의 시대는 太白山이라 불렸고 , 고구려 시대 白山여진족의 금나라 시대인 1115년경부터 장백산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삼국유사>에 처음 그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31대왕인 신문왕(681-692)시기에 白頭山이란 기록이 처음등장 했고 ,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조 4대왕 세종시기에 압록강 두만강을 회복 하면서 백두산을 다시 거론 했다. 근세에 와서는 중국의 청조 시기인 1712년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문서와 중화민국, 만주국, 중화인민공화국초창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白頭山으로 표기되었고, 특히 1962년 조, 중 변계조약 및 1964년의 조,중변계조약 의정서에서도 백두산으로 표기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1983년8월 덩샤오핑(鄧小平) 최고 지도자가 백두산을 등정 하고난 후 長白山이란 명칭과 天池라는 휘호를 쓰고 찬사를 남긴 이후 장백산으로 호칭 하게 되었고 공식문서에서도 장백산으로 표기되면서 실질적으로 백두산을 각각 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우리와 중국에서는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고, 심지어 중국은 이 백두산을 세계의 명산으로 유네스코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서둘고 있다. 이 백두산의 관할문제를 보면 백두산의 주봉을 우리는 병사봉 이라 하고 그 높이를 2,744m 로 알고 있으며 조선(북한) 에서는 주봉을 將軍峰이라하고 높이를 2,750m, 심지어 중국에서는 주봉을 白頭峰, 그높이를 2,749.6m 이라고 파악하고 있으며 이웃일본은 우리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산은 해발 2,155m 에는 9.15평방키로 미터에 이르는 天池가 있다. 이 천지는 조선(북한) 이 51%인 4.67평방키로 미터를, 중국이 49%인 4.48평키로 미터를 각각 소유하고 있다. 이 천지 주변에는 천지를 둘려 싸고 있는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가 22개가 파악되고 있는데 그중 최고봉 병사봉(백두봉)을 비릇한 6개 가 조선(북한) 영역이고 중국측 최고봉인 백운봉을 비릇한 11개 가 중국의 영역이며 나머지 5개의 봉우리가 국경선 상에 있어 공동 영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 백두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대대적인 개발과 아울러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동안 우리가 거론한 “소위 백두산 공정” 등의 시비를 비껴 가기위한 대응책으로 장백산의 최고봉을 백운봉(중국영역11개중 최고 봉)(2,691m)이라고 하면서 백두산과 마치 별개의 산인양 명칭에 거리를 두고 있다. 특히 요즘에 와서 백두산 대폭발의 임박설 등으로 인하여 더욱 관심이 고조 되고 있는 백두산 문제는 우리 의 관심이 아닐 수 없고 영토문제 등 어려운 난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白頭山於我等韓民族而言猶如永遠的故鄕,以其民族之發祥地、國家之起源、富於生命力的民族之聖山而備受崇拜與景仰。從歷史的觀點來看,古朝鮮以後,先後有扶余、高句麗、渤海等國將白頭山視作發展的原動力與發揚民族氣節的根本源泉。曾以白頭山周邊地區爲生存根據地的肅愼、靺鞨、女眞、滿族等也將其視爲他們的發祥地乃至根據地,甚至將白頭山進行神化,抑或傳說化。由此可見,他們也曾崇拜與景仰過白頭山亦是無可爭辯的事實。白頭山因其風水地理上的地勢獨特,常被比作人體來理解。白頭山是凝聚氣場的頭部,由此而延伸形成了韓半島。其氣場的流動走向爲狼林山脈→太白山脈→小白山脈→蘆嶺山脈相連,傳承著白頭山的氣場。因此被稱爲具有脊梁作用的“白頭大幹”。然而,白頭山於公元926年,隨著被契丹族所滅的渤海國的消失,白頭山從此脫離我們的民族所轄領域而漸行漸遠。正因如此,白頭山成爲了我們韓半島民族心中的隱痛。然而,這也只是在悠久的歷史長河中作爲曾經的故土留在了我們的民族心裏。曾幾何時,滿淸政府也曾將白頭山視作滿族的發祥地,國家繁榮的根基而派遣過戍邊大吏。甚至還稱其爲泰山、長白山。認爲擁有長白山的精、氣、神就能永遠繁榮而不衰。這樣的歷史也是曾經的事實。白頭山,不僅是我們的民族,在北方,時値明朝滅亡時,作爲東夷諸國精神上的故鄕,成了東夷諸國活動的主要舞臺。於是便産生了這壹地區的國界問題。十七世紀,淸政府把首都移至北京以後,認爲這壹地區是他們的根據地,實施了不許其□民族接近的“封禁政策”。200多年來,不許任何人進入白頭山。但是,到了十七世紀後期至十八世紀初,隨著朝鮮人跨過鴨綠江和圖們江,移居白頭山附近區域,開墾了圖們江北岸。於是,淸政府欲將還未確定國界的白頭山劃歸自己的領地,1712年立了白頭山定界碑。還未言及白頭山,就把白頭山包括天池在內的大片山地劃歸自己的領土。以至於因針對圖們江的解釋存有異議,造成了國境爭議,産生了間島問題。後來,由於日本帝國主義的强行占領,我國喪失國家主權時期,以白頭山爲獨立運動的據點。隨著第二次世界大戰的結束,卽使我國的主權得到了恢復,但是由於韓半島民族的分裂狀態,朝鮮(北韓)和中國於1962年簽訂了朝、中邊界條約,致使白頭山被劃爲如今的壹分爲二。從白頭山的歷史以及名稱演變上來看,最初記載的文獻是中國的戰國時期,卽BC475年~AD221年間撰寫的地理誌《山海經》。《山海經》裏把白頭山記載爲“不鹹山”、漢代爲“單單大嶺”、南北朝時期的北魏爲“蓋馬大山”、唐代爲“太白山”、高句麗時代爲“白山”、女眞族的金國時代,卽1115年前後才開始稱爲“長白山”。在我國文獻《三國遺事》中首次出現了相關記載。新羅第三十壹代王,卽神文王(681~692)時期,第壹次以“白頭山”名稱記載下來。此後,歷經高麗王朝和朝鮮四代王世宗時期恢復鴨綠江及豆滿江以來,又提到了白頭山。到了近代,自中國的淸朝時期1712年立下“白頭山定界碑”以來,中華民國、滿洲國、中華人民共和國初期直至1980年代初,在有關文書上依然記載爲“白頭山”。尤其是在1962年,朝中邊界條約以及1964年的《朝中邊界議定書》上也都以“白頭山”記載。1983年8月鄧小平攀登長白山以後,題寫“長白山、天池”以來,中國才開始使用“長白山”名稱,公文也正式采用了該名稱。由此白頭山實質上被各分壹半了。關於白頭山的主峰,我們稱之爲兵士峰,其高度爲2,744米;朝鮮稱其爲將軍峰,其高度爲2,750米。然而在中國則稱其爲白頭峰,其高度爲2749.6米。而日本則對此持有與我國相似的見解。白頭山頂上存在著海拔爲2,155米,面積爲9.15平方公裏的天池。該天池,朝鮮占51%,達4.67平方公裏;中國占49%,達4.48平方公裏。圍繞天池周圍聳立著海拔2,500米以上的22座山峰。其中,最高峰兵士峰(白頭峰)爲代表的6座山峰屬於朝鮮領土;中國壹側的最高峰白雲峰爲主的11座山峰爲中國領土。其余5座山峰處於國界上,屬於共同管轄。眼下,中國人對白頭山□關心,□以長白山的名義進行大量開發,也不惜大筆投資熱衷於對外廣告。中國方面爲了應對我們曾經關註過的所謂“白頭山工程”,將白頭山的最高峰稱爲白雲峰(屬於中國領土的11座山峰中的最高峰,2,691米),似乎與白頭山毫無關系似的,名稱上保持了壹定的距離。特別是到了最近,隨著白頭山火山大爆發的臨近說,對白頭山問題的關註達到了高潮。這無疑也是我們的重大關切。有關領土方面的問題更顯錯綜復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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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地籍學 側面에서 본 白頭山定界碑의 役割 硏究

        조병현(Cho Byung Hyun),이범관(Lee Beom Gwan),홍영희(Hong Young Hee) 한국지적학회 2007 한국지적학회지 Vol.23 No.1

        ??본 연구의 목적은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역할을 지적학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공간적 범위는 백두산을 둘러싼 지역으로 한정하여,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실시하고,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실태 분석을 통하여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범위에 대한 조사는 문헌조사법과 인터넷조사법을 병행하였다. ??연구 결과, 백두산정계비는 단순히 국경을 나타내는 비석이 아니라, 지적학 측면에서 국경에 대한 합의사항을 등록·공시한 지적공부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은 첫째, 인위적으로 설치한 국경선 둘째, 국가간의 경계를 획정한 경계점표지 셋째, 구두합의에 의한 국제조약 내용을 기록한 지적도면의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The objectives of this study are to set up research objective to revaluate Baekdusan National Boundary Monument in terms of cadastre. In order to achieve research objectives, the spatial limitation was defined to area surrounding Mt. Baekdu. A literature review was carried out on the Baekdusan National Boundary Monument. Through the analysis the actual condition, the role of Baekdusan National Boundary Monument was presented. A literature review and internet search method were mainly applied. ??The Baekdusan monument purposed not only to show the national boundary but also to play the role of cadastral records which registered and publicly noticed international agreements on the national boundary according to the findings of this research. Therefore, the roles of the monument were, firstly, an artificially established national boundary, secondly, a boundary mark between the nations concerned and lastly a cadastral map which registered the content of the international treaty by an oral agre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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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료의 백두산 여행과 간도 인식 : 『백두산유람록』을 중심으로

        정욱재(Jung Uk-jae)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장서각 Vol.0 No.24

        이 논문은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의 행적과 그가 남긴 『백두산유람록』을 검토한 것이다. 군인 출신의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삶을 일제의 철저한 협력자로 일관한 인물이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이후 군에서 전역하고 친일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는 상당한 한학 실력을 소유하였고 일본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의 저서도 남겼는데, 『백두산유람록』이 그 중의 하나이다. 1921년에 간행된 『백두산유람록』은 박영철이 1919년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총 19일이 소요되었던 백두산 여행의 전말을 한문으로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박영철은 백두산을 여행하는 여정에서 관찰하고 들었던 내용, 주변의 자연환경, 지리적 특성, 감상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박영철의 백두산 여행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보다 官의 힘을 들수 있다. 당시 웬만한 인물들도 쉽게 할 수 없었던 백두산 여행을 그는 당시 현직 함경북도 참여관의 신분 때문에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백두산에서 가는 곳마다 관의 협조를 최대한 받았다. 헌병주재소에서 점심을 먹거나 숙박을 했으며, 백두산 관광의 안전을 위하여 헌병이 백두산 관광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박영철은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며, 백두산정계비 비문의 내용을 토대로 지형을 살펴서 토문강 이북 북간도는 모두 우리 영토이며 두만강이 한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박영철 자신은 일제의 철저한 협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1909년 청국과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 전 지역이 청국의 영토로 들어간 것을 한탄하였다. 간도를 청국에 넘긴 일제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간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다. 박영철이 이런 인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당시 간도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간도는 우리 영토라는 관념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This article reviewed life of Park Young-chul(朴榮喆, 1879~1939), and his journal Baekdusan yuramrok. Park, a former officer, solely cooperated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hroughout his life as a Pro-Japanese bureaucrat since 1910, when the Daehan Empire was occupied by Japan Empire. He had rich educational background of Chinese literature, and excellent command of Japanese. He also wrote several books and journals, including Baekdusan yuramrok. Baekdusan yuramrok, published in 1921, was written in detailed Chinese, after Park made a trip to Baekdusan(Mt. Baekdu) from July 28th to August 15th 1919. Park made fine notes about what he heard and saw during the trip, natural surroundings and geographic characters, and his musings about them. What made Park ’s trip outstanding was, though, the power of the Government(官). When not everyone could make the trip possible, even the illustrious, he made it possible using his title as the Jurat of Hamgyeongbuk-do. He had full cooperation from the governmental offices wherever he went, had lunch or stayed at the police stations, and even let some police officers join in the trip. Park recognized historical facts regarding the border dispute held between the Kingdom of Chosun(later Daehan Empire) and Ching Empire quite accurately, and contended that the territory of Chosun should include the Bukgan-do, north of Tomun river, and cannot be limited to the Duman River, based on the inscription of Baekdusan jeonggyebi; and even lamented that the entire Gando area was incorporated to the Ching Empire by the Gando Agreement in 1909, even he himself was a Japanese cooperator. He couldn’t criticize the decision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ment that gave Gando to the Ching, but opinionated clearly that the area was territory of Chosun. His understanding about Gando proves that informations about the land was culminated through time, and that many Koreans recognized the area as the territory of Chosun.

      • KCI등재후보

        白頭山(長白山)和 中.韓(朝鮮) 國境線 問題

        양대언 택민국학연구원 2011 국학연구론총 Vol.0 No.8

        白頭山은 우리 韓民族에게는 영원한 고향과 같은 민족의 發祥地 이며 국가의 始原으로, 생명력을 지닌 민족의 聖山으로 崇仰 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이후 夫餘, 高句麗, 渤海 등의 나라들이백두산을 근거로 하여 발전의 동력을 삼았고 민족 기상의 發揚의 근본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한편 이 백두산 주변 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肅愼 ,靺鞨, 女眞, 滿洲族 등도 그네들의 發祥地 내지 根據地라 여겨왔고, 심지어 신격화 전설화 등 그들의 나름대로 崇仰 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백두산은 풍수지리상 지세를 사람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氣가 뭉쳐진 머리로 하여 韓半島가 형성되고 그 氣의 흐름이 낭림산맥-태백산맥-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 이어져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 의 역할을 하는 “白頭大幹” 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기원926년에 契丹族에 의하여 발해가 멸망됨으로서 우리민족의 영역에서 벗어나 우리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 후로 부터는 故土回復의 전진 기지, 혹은 최전방 에 보이는 탈환의 고지 진지로 되어, 오랜 세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만 간직된 잃어버린 터전에서, 되찾아야 될 옛 고향 땅이 되고 말았다. 한편 만주족의 淸도 이곳을 민족의 發祥地로 , 국가번영의 터전으로 하여 벼슬을 내리고 이름 마져 泰山,長白山이라 하면서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영원토록 번영의 길로 갈수 있다고 여겨 왔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민족뿐 만 아니라 북방에서 明滅하던 東夷 諸國의 정신적 고향 땅으로 활동의 주 무대가 되어, 이곳에 대한 국경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이후 이 지역을 자신들의 근거지라 하여 타 민족의 접근조차 금하는 封禁政策을 실시하여 200여 년 간 어느 누구도 출입을 하지 못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7세기후반 18세기 초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 두만강 을 넘어와 백두산 인근 지역과 두만강 북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 하자 청은 그 당시 국경도 확정 되지 못했던 백두산을 그들의 영역으로 귀속 시키려 했다. 1712년 白頭山 定界碑를 세워 백두산에 관한 언급 없이 천지를 포함하는 넓은 산지를 자기들의 영토로 삼았고, 심지어 土門江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국경분쟁의 산물인 間島問題가 야기되었다. 그 이후 日帝의 强占으로 우리의 국권이 상실된 시기에 독립운동의 據點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국권이 회복된 후에도 우리민족의 분단과 조선(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조,중 변계조약에 의하여 백두산이 반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두산의 역사와 명칭문제를 보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이 중국의 전국시대인 BC475년~AD 221년 사이에 쓰여진 지리지(山海經) 이다. 여기에 不咸山으로 등장한 이래 漢代 單單大嶺으로, 남북조 시대 北魏에서는 개마대산, 당의 시대는 太白山이라 불렸고 , 고구려 시대 白山 여진족의 금나라 시대인 1115년경부터 장백산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삼국유사>에 처음 그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31대왕인 신문왕(681-692)시기에 白頭山이란 기록이 처음등장 했고 ,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조 4대왕 세종시기에 압록강 두만강을 회복 하면서 백두산을 다시 거론 했다. 근세에 와서는 중국의 청조 시기인 1712년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문서와 중화민국, 만주국, 중화인민공화국 초창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白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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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頭山定界碑와 接伴使 朴權에 관한 일고찰

        李源明(Lee, Won-Myung),(토)김우준 백산학회 2008 白山學報 Vol.- No.80

        This article studies the Paekdusan Chonggyeby(白頭山定界碑: Demarcation stone erected Mt. Paekdu setting the boundary between Chosun and Oing dynasty in 1712) and Jubbansa-Park kwon(接伴使 朴權 : King Sookjong appointed as the king’s delegate to protect Chosun territory). The present writer took a new look of a rule of 朴權. Take care of this, First of all, studied 〈Change of perception about the Northern territory〉 in during Koryo era - the Early Chosun and the late Chosun. Second of all, difficulty of strategy and limitation of the Court was true to nature in the 〈Correspondence about connection of 白頭山定界碑 of the King Sookjong’ court〉. And 〈接伴使 朴權 as the king’s delegate〉 was tried to realize revaluation of his life and activity. A through these, the present writer cannot agree to negative estimation of 接伴使 朴權 as before. Accordingly 接伴使 朴權 didn’t neglect his duty, the truth of his activity at the time was conformed in accordance with strategy of the Court. Moreover the historical materials of newly excavation and meaning of its looked around connected with 白頭山定界碑. The problems, change of perception about the Northern territory during early and latter of the Chosun and limitation of correspondence strategy of the Court, A trick Qing dynasty and Japanese is conformed a problem at the time, upright estimation of 接伴使 朴權 is possible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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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頭山定界碑의 役割과 再評價에 關한 硏究(上)

        이범관(Lee, Beom Gwan),홍영희(Hong, Young Hee),조병현(Cho, Byung Hyun),김종남(Kim, Jong Nam),김홍택(Kim, Hong Teak),김봉준(Kim, Bong Joon),김상민(Kim, Sang Min) 한국지적학회 2009 한국지적학회지 Vol.25 No.2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reinvestigation and truth perversion of Chung during and after the erection of Mt. Baikdu Demarcation stone. Based on the finding, this study will revaluate the overall role of the stone by discussing settlement of Gando sovereignty between Korea and China in the future. The target of this study was limited to Mt. Baikdu Demarcation Stone. The scope of the study was from the erection to Gando convention, whereas, the geological scope was from Mt. Baikdu Demarcation Stone to Gando located in the southern area of the Tomun river. The scope of the content was limited to understanding and revaluating the roles of Mt. Baikdu Demarcation Stone. As for the research method, historical approach, literature research and descriptive analysis were used. As a result of the study, the legal aspect of Gando sovereignty issue concludes that it is still in dispute. Joseon and Chung had different opinions on the interpretation of inscription on Mt. Baikdu Demarcation Stone. However, the two countries were bound by a valid border treaty of international law. And by erecting the demarcation stone on the watershed of the Ap-lok and Tomun rivers, the stone is serving as both a demarcation and a border line mark between the two countries. 본 연구의 목적은 백두산정계비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 처의 재조사와 사실왜곡에 대하여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백두산정계비의 역할과 후일 한·중간 간도영유권 확정을 위한 새로운 논의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역할을 종합적으로 재평가해 보고자 하는 데 있다. 연구대상을 백두산정계비로 한정하였고, 연구범위로서 시대적 한계는 백두산정계비 건립에서 간도협약까지로, 지리적 범위는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이남의 간도를 포함한 영역으로, 내용적 범위는 백두산정계비의 역할과 재평가를 해 보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연구방법으로서 접근방법은 역사적 접근방법을, 조사방법은 문헌조사법을, 분석방법은 기술적(記述的) 분석방법을 사용하였다. 연구 결과, 오늘날의 간도영유권 문제는 적어도 분쟁상태에 있다는 것이 그 법적 측면의 판단이다. 또한, 백두산정계비는 조·청간 비문 해석상에 이견이 있었지만, 국제법상 유효한 국경조약으로 조·청 양국을 구속하고, 압록·토문강의 분수령상에 정계비를 건립함으로서 양국간의 국경획정과 국경선으로서의 표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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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頭山定界碑 設置의 숨겨진 實相

        이일걸(Lee Eel gul) 백산학회 2016 白山學報 Vol.- No.105

        The boundary monument at Mount Baekdu, which was erected by Mok Kuk Dong(穆克登) under the edict of the Kangxi Emperor in 1712, failed to serve as a border. Rather, as many Koreans immigrated to areas near the Amnok and Duman Rivers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dispatched its officials, Sang-mu Seo and Beom-yun Lee, in order to protect Korean immigrants. Further, Jean-Baptiste Régis, a French missionary, said in his memoir, … to the East of this City [Fong hoang tching] is the Western Boundary of Corea under the now reigning Family. This border line is called Regis’s Line, to the north of which is situatedthe uninhabited region, the neutral area between the Qing dynasty and the Joseon dynasty. The Mount Baekdu surveys of the Qing dynasty started from Huanren(桓仁) and Tonghua(通化) regions in the first place by the end of the 17th century. The mountain Manchurians called Mount Changbai, or Jangbaek, is referred to as Jilin Hada Ridge in the upper area of Huifa He(輝勃河). This is evidenced by western ancient maps where Huifa He is written as Tumen He. The Tongga River, or the Hon River, which is the main stream of the Amnok River, flows across the Huanren region and beyond mountains Huifa He joinsthe Songhua River. Therefore, Manchurians forcedand intimidated the then representatives of the Joseon dynasty, Gown Park and Seon-bu Lee, into building the boundary monument at Mount Baekdu, although it was supposed to be erected in Jilin HadaRidge, andfurther started to call Wudaobai He(五道白河) the Tomun River. In western ancient maps, the border line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Qing dynasty is not the Amnok and Duman Rivers line, but other three lines, i.e. Regis’s Line D’Anville’s Line and Bonne’s Line. Eventually, Manchurians, who became fully acquainted with the geographical features of Mount Baekdu and the Huanren and Tonghua regions after several rounds of surveys, deceived Joseon officials with no geographical knowledge of such areas into agreeing with the erection of the boundary monument at Mount Baekdu. During the Japanese rule, Imperial Japan and Qing China executed the Gando Convention in 1909, which determined that the Korea-China border line was the Amnok and Duman Rivers line. Since the Gando Convention is an invalid treaty by international laws, that decision is wrongful and ineffective. Nevertheless, the Korean government has not claimed the non-effectiveness of the Gando Convention. As a result, even as more than 70 years has passed after the independence from the Japanese colonialism, China still illegally occupies the Gando area, the territory of Korea, due to the incompetence of Korean government officials. 1712년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국경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이주한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서상무, 이범윤을 관리사를 파견하였다. 심지어 레지(Regis)의 비망록에도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선이 있다”고 하였다. 17세기 말에 시작한 청의 백두산 일대 탐사는 처음부터 삼도구 지역인 환인~통화 일대에서 시작하였다. 청인들이 장백산이라는 부르는 산은 휘발하 상류의 계림합달령이다. 왜냐하면 휘발하를 서양 고지도에 ‘토문하’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인에는 압록강의 주류인 동가강이, 산 너며 휘발하는 송화강으로 흐른다. 따라서 그들은 계림합달령에 세워야 할 비를 조선의 대표인 박권·이선부를 강박하여 계림합달령과 비슷한 백두산에 세우고,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개칭하였다. 서양 고지도에는 조선의 국경선을 레지선, 당빌선, 본느선으로 세 종류로 구분하여 그려져 있다. 결국 당시 백두산과 삼도구 일대의 수차례 답사를 통해 지세를 익힌 그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지리정보에 어두운 조선의 관리들을 속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미 청의 강희제는 정계비 설치를 위해 성경지도 등을 변조하였으며, 심지어 서양신부들이 측량하여 만든 황여전람도마저 변조하였다. 결국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인해 한 중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선으로 결정되어 지금까지 표기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 결과 광복 후 70년이 지나도록 중국이 간도지역을 불법점유한 상태다. 이는 우리 정부의 역대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해 초래한 결과이지만 애초 강희제의 영토 확장 전략으로 세운 백두산정계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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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청 국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 : 이화자, 『한중국경사 연구』(혜안, 2011)에 대한 서평

        강석화 ( Kang Seok Hwa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6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잇는 선이었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를 확인하고 백두산 일대의 지형을 조사하여 정확한 경계선을 정하려 했던 1712년(숙종 38, 청 강희 51)의 백두산 정계 이후 조선에는 새로운 변경의식이 대두하여 조선과 청의 현실적 국경과 이상적 혹은 역사적 강역을 구별하여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李花子 교수의 『한중국경사 연구』(2011, 혜안)는 백두산 정계와 그 이후 설책 공사의 실상, 조선과 청의 실제 국경과 국경인식, 이른바 분계강 인식의 유래, 1880년대 이후 조선과 청 양측의 사정 변화와 인식의 변화, 대한제국기의 간도 정책 등에 대해 자세히 정리한 연구 업적이다. 백두산 정계당시의 사정은 물론 1880년대의 조ㆍ청 공동감계, 청의 백두산 지역 조사와 지리지에 실린 백두산 및 수계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백두산정계 후 조선 측에서 진행한 설책 공사의 내용에 대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백두산 정계 직후 조선 측 공사담당자들이 정계비에서 두만강의 발원지인 홍토산수까지 토퇴와 석퇴, 목책을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정계 당시 두 나라 관원들은 두만강 수원을 찾으려 하였고 목극 등이 송화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원을 잘못 지적하였으나 공사담당자들이 올바른 두만강의 수원까지 공사를 진행하였으므로 문제가 없었으나, 후대에 이 사실을 잘 모르고 두만강, 토문강, 분계강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조선과 청의 감계회담 때 확인된 토퇴의 흔적은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황화송구자와 연결되어 있으며 두만강과 이어지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실제간도문제가 나타났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감계회담과 대한제국의 간도정책, 당시 국제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의 출발점으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 Although the borderline between Choson and Qing was the Yalu River-Mt.Paektu-the Tumen River, some scholars of Choson thought that the line was not the original and historical Sino-Korean frontier. Such idea had spreaded widely after the demarcation in 1712. A Study on the History of Sino-Korean Frontier―Professor Lee Hwa Ja(Li, hua zi)'s new book―is the important work about the demarcation in 1712, the construction of border fences nearby the demarcation stone and the riverhead of the Sungjanghe River, the origin of the thinking about the Bungyegang(it means the demarcation river), the change of thinking about the Sino-Korean border in Choson and Qing from the 1880s and the Gando(Jiandiao)Policy of the Korean Empire in the early 1900s. This book especially shows the new idea about the fence construction by Choson after the demarcation in 1712. The author asserts that the workers who had constructed the heaps of earth, piles of stones and wooden fences to make clear the Sino-Choson border line after the demarcation in 1712 had made wooden fence from the Hwanghwasongguja which flow in the Sungjanghe River to the Hongtosansu, the riverhead of the Tumen River. But the ruins of the plies of stones which had been found on 1880s just connected to the Hwanghwasongguja not to the Hongtosansu. Despite of the some mis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s and old maps, this book can be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of studies about the Sino-Choson border negotiations in 1880s, the Gando Policy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early 19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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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백두산 기행문을 시각화하여 재해석한 백두산 경관

        문상명 열상고전연구회 2023 열상고전연구 Vol.80 No.-

        조선 후기 선비들이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는 목적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백두산 등정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멀고 험준하여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 특별한 목적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크게 중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국경조사, 북방 국경지역 시찰, 유람 등을 이유로 백두산에 올랐다. 다양한 이유였지만,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중국과의 국경문제, 북방 국경지역 경계와 국방, 지역민의 경제활동 등을 기술하였다. 백두산 기행문에 백두산 공간의 인문 경관을 고스란히 담기도 했다. 뒤에 백두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여행안내서 역할도 했다. 무엇보다도 여행기답게 백두산으로 향하는 자세한 노정과 길에서 마주하는 자연 경관 묘사는 당시 백두산 자연 경관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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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중국경조약체제에 관한 국제법적 고찰

        李鉉祚(Hyun-Jo Lee) 대한국제법학회 2007 國際法學會論叢 Vol.52 No.3

        조중국경조약체제는 기본조약인 1962년 국경조약과 조약초안작성 등을 규정하고 있는 1962년 국경합의서와 1962년 국경조약을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1964년 국경의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1962년 국경조약과 1964년 국경의정서에 따라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이 압록강-백두산 천지-홍토수(두만강 최상류 지류)-두만강으로 확정되었다. 조중국경조약체제의 특징은 1909년 간도협약과 1712년 백두산정계비와 비교할 때 다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1962년 국경조약 제1조는 백두산 천지를 북한 54.5%, 중국 45.5%로 분할하고 천지 서북부는 중국에 동남부는 북한에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둘째, 1962년 국경조약은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규정된 토문강(土門江) 대신 백두산으로 뻗어 있는 도문강(두만강의 중국명칭)의 4개의 지류(支流) 중최상류에 있는 홍토수(紅土水)를 조중국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신법우선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1962년 국경조약 제5조 제3문에 따라 1909년 간도협약과 1712년 백두산정계비는 정식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어 간도지역이 중국에 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러한 국경조약을 체결할 조약체결능력 즉 국제법주체성이 인정되는가? 현재 북한은 북핵위기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주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냉전체제 종식이후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및 남북기본합의서와 각종 합의서 체결과 발효로 인하여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국제법적 지위를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과 중국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조중국경조약체제에 대해 한국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별도로 하고 국경조약 체제 자체를 부인할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 통일한국의 조중국경조약체제의 승계문제에 관하여 독일통일 사례를 통일한국에 적용하면 선행국인 북한이 중국과 체결한 조중국경조약체제에 대해 관련국인 통일한국이 중국과 협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중국경조약체제는 국경조약의 국가승계에 관한 국제법상 국제관습법적 효력을 갖는 국경조약의 계속성 원칙 또는 자동승계원칙이 관련국인 중국과의 국제적 안정성 유지를 위해 통일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concluded by North Korea and China consists of secret treaties concerning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Border in the northern Korean Peninsula. It is composed of basic National Border Treaty in 1962 and Agreed Minutes on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National Border in 1962 which provides for a guide to drafting agreement, and Protocol on the Demarcation of the Korean-Chinese National Border in 1964 in which The National Border Treaty is stipulated in detail. According to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the national border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 has been settled on Yalu River-Chonji, Mountain Baekdu-Hongto River(Hongtosu)-Tumen River.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has three characteristics as follows; First, in accordance with the provisions of Article 1 of the National Border Treaty, Chonji is divided into two and northwestern districts of it(45.5%) belongs to China, and southeastern parts of Chonji(54.5%) belongs to North Korea. Second, the National Border Treaty provides that instead of Tomoon River described in the Demarcating Stone Monument, Hongto River(Hongtosu), which is upriver of four branches of Tumen River, was a border line. Third, it is laid down in provisions of article 5 in the National Border Treaty that after entry into force of the Protocol and the Treaty in 1964, all documents regarding bilateral national border agreement are invalidated except the Agreed Minutes in 1962. As a result, Gando Convention of 1909 and the Demarcating Stone Monument of 1712 are invalidated officially, in turn Gando area belong to China finally. Finally, the future Unified Korea should take a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matter of succession of the National Border Treaty Regime because the rule of continuity(or automatic succession) to boundary treaties exists firmly in the customary international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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