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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라이프니츠와 유학(儒學)

        안종수(Ahn Jong-su) 대한철학회 2006 哲學硏究 Vol.97 No.-

        라이프니츠는 중국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여러 가지 자료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르몽에게 쓴 편지에서는 신유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편지는 라이프니츠가 중국철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상당히 많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라이프니츠 철학과 신유학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어서 여러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라이프니츠가 중국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상당히 일찍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과 그의 철학이 여러 면에서 신유학의 철학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학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라이프니츠가 중국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니담과 쳄프리너, 그리고 그런 의견에 반대하는 쿡과 로즈몬트의 견해를 살펴보고 그 주장들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니담은 중국의 유기체 철학이 라이프니츠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니담이 말하는 그런 유기체 철학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쳄프리너는 중국철학의 변증법이 라이프니츠의 변증법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지만 역시 근거가 약하다. 우선 라이프니츠가 중국철학의 변증법을 알았다는 증거가 없고, 또한 라이프니츠가 신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때는 이미 그의 철학이 완성되어서 영향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들과는 다르게 쿡과 로즈몬트는 라이프니츠가 중국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이들은 니담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는데, 핵심은 니담이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중국철학에 대해서 영향을 받을 정도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전체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대한 관심을 너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에 한정시킴으로써 그의 중국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과소평가한 면이 있다.

      • KCI등재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성리학

        박제철(Bak, Jechul)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16 철학탐구 Vol.43 No.-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가끔 흔들린다. 어떤 경우 그는 모나드(엔텔레키+일차물질)만을 실체로 인정하기도 하며, 다른 경우에는 모나드뿐만 아니라 물체적 실체(지배모나드+몸)도 실체로 인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을 해석함에 있어 혼란을 준다. 어떤 것이 진짜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일까? 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돕기 위해 중국의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핵심은 성리학에서의 여러 개념들, 즉, 氣, 理, ⼼ 같은 개념들이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이다. 라이프니츠의 결론은 성리학의 여러 개념들이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론을 내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성리학을 연구할 때 역시, 앞에서와 비슷한 혼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라이프니츠는 어떤 경우 ⼼을 “엔텔레키-일차물질” 구도 하에서의 엔텔레키, 즉 모나드의 한 요소로 이해하기도 하며, 다른 경우에는 ⼼을 모나드 자체, 즉 (엔텔레키+일차물질)로 이해하기도 한다. ⼼은 엔텔레키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엔텔레키와 일차물질의 통합체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본 논문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이 왜 흔들리는지,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이중적으로 자신의 존재론을 펼칠 때, 그러한 그의 주장을 일관되게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라이프니츠의 존재론 구조가 성리학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성리학에서의 ⼼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가장 적절하게 해석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일관되게 읽힐 수 있으며,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구도는 성리학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다만 ⼼을 모나드의 한 요소인 엔텔레키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모나드 그 자체, 즉 (엔텔레키+일차물질)로 해석하는 것만이 옳은 해석이다. 이렇게 교정되어 이해된다면,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성리학을 서양 철학적으로 해석함에 있어 매우 탁월하며 정교한 존재론임이 밝혀질 것이다. This paper has two purposes. One is to look if there is a way we can present a consistent reading of Leibniz’s dual ontology. The other is saying that the ontological structure of the Leibniz can properly be applied to Neo-Confucianism. That is supplying the proper interpretation of Neo-Confucian concept “⼼.” Conclusions are as follows. Ontology of Leibniz can be read consistently, and Leibniz"s ontological composition can be appropriately applied to Neo-Confucian concept “⼼.” If “⼼” to be interpreted as Monad itself, that is the right interpretation(Entelechie+primary matter). If this understanding is correct, Leibniz"s ontology is very prominent one as the Western philosophical interpretation of Neo-Confucianism and will be found to be a sophisticated ontology.

      • KCI등재

        라이프니츠와 중국철학

        안종수(Ahn, Jong-Su) 새한철학회 2013 哲學論叢 Vol.73 No.3

        라이프니츠는 평생 동안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면에 관해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중국의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자 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몇몇 학자들은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중국철학 사이에 신기하게도 닮은 이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라이히바인, 휴즈, 주겸지, 니덤 등의 학자들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중국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것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어떤 점이 중국철학과 유사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거론된 유사점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첫째는 라이프니츠의 힘이라는 개념과 중국의 기(氣) 사이에 보이는 유사성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실체의 본질을 힘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정신과 물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정신과 물체를 나누지 않는 사상을 우리는 중국의 기 개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이미 니덤이 주장하였듯이 유기체 철학이 라이프니츠 철학과 중국철학에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가 살아있는 생명체들로 충만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철학에서도 관찰이 된다. 고대부터 중국인들은 이 세계 자체를 거대한 생명체처럼 생각하였다. 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사물들이 우주전체를 반영한다는 이론이 라이프니츠철학과 중국철학에서 모두 나타난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그의 ?모나드론?에서 모나드는 살아있는 우주의 거울이라는 비유적인 말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주희가 만물들은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내용과 서로 닮았다.

      • KCI등재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정론적 성격

        박제철(Bak, Je-Chul)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인문과학연구 Vol.0 No.42

        필자는 이전의 논문에서 라이프니츠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입장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인 바 있다. 그 논문에서 필자는 라이프니츠가 구문론적인 방식으로(P → □P), 그리고 의미론적인 방식으로(개체의 통세계적 동일성 부정) 결정론에 개입하고 있음을 보였다. 일군의 주석가들은 필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가 결정론에 빠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일군의 주석가들은 라이프니츠를 결정론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본 논문은 라이프니츠를 결정론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고 보는 이러한 해석적 입장들을 고찰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찰을 통해 본 논문은 이러한 해석적 입장들이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핵심은 명제 필연과 사물 필연의 구분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해석함에 있어 이 두 개념은 조심스럽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개념이 구분될 때,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결정론에 개입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 철학을 해석하는 모든 주석가들이 이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그들은 라이프니츠를 결정론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이 두 개념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석가들이 어떤 지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KCI우수등재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시간론

        박제철(Jechul Bak) 한국철학회 2011 철학 Vol.0 No.109

        본 논문은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시간론을 고찰하고, 이러한 시간론이 뉴턴의 절대적 시간론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더 단순하며, 또 이론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시간을 둘러싸고 벌어진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을 검토한다. 뉴턴을 따라 클라크는 시간이 사물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절대적 시간론을 펼친다. 이에 반해 라이프니츠는 사물들만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이란 이러한 사물들이 맺는 특정 관계일 뿐이라는 관계적 시간론을 펼친다.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충분이유율에 근거해 클라크의 시간론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시간론이 더 우월한 시간론임을 보이고자 한다. 충분이유율이 옳다면 클라크의 시간론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결과 라이프니츠의 시간론이 옳은 이론임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충분이유율이 옳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충분이유율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라이프니츠의 시간론이 옳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시간이 정의되고 있는 ?새로운 시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의 한 구절에 의존해 라이프니츠의 시간론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이고자 한다. 첫째,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시간론은 이론적으로 잘 정당화될 수 있으며, 둘째, 이 이론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론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단순하다는 장점을 가지며, 셋째, 이 이론은 모든 시간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 In this paper, I consider Leibniz"s relational theory of time, and try to show that his theory is metaphysically more simple and superior than Newton"s absolute theory of time. For this purpose, I examine the controversy between Leibniz and Clarke. Clarke holds absolute theory of time which takes the time prior to things. Contrary to this position, Leibniz holds relational theory of time which takes things prior to time. Defending his position, Leibniz critiques Clarke"s theory of time on the ground of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Some may doubt this principle, so it is necessary to defend Leibniz"s theory of time without this principle. For this purpose, I takes one passage from “New essays on the human understanding” in which time is defined in Leibnizian manner, and try to defend Leibnizian theory of time. After these examinations, I tried to show the following facts: (i) Leibniz"s theory of time can be well justified; (ii) this theory have theoretical virtue, that is, ontologically more simple and prior than Newton"s theory of time; (iii) This theory can explain all the phenomenon of time.

      • KCI등재후보

        들뢰즈의 라이프니츠 읽기: 실체화 관계와 새로운 가능성

        경혜영 ( Hye Young Kyung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3 인문학연구 Vol.0 No.23

        본 논문은 들뢰즈의 후기 철학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의 중요성을 짚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1988년 출간된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의 탄생 배경으로, 프랑스에서 1981년 번역 출판된 라이프니츠의 『데 보스(Des Bosses)에게 보내는 편지』 서른일곱 편에 나타나는 ``실체화 관계(vinculum substantiale)``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 개념은 예정조화설에 입각한 라이프니츠의 ``닫힌`` 모나드론을 뒤집고, ``(반쯤)열린`` 모나드론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며, 영혼과 몸의 실제적 결합을 위해 라이프니츠가 마지막으로 발견해낸 개념이다. 들뢰즈는 ``실체화 관계``, 간단히 줄여 ``빈쿨룸`` 개념을 후설의 소유 이론과 접목시키며, 이 개념이 지배하는 모나드와 지배받는 모나드들 사이의 힘 관계, 즉 포획과 예속의 관계를 설명하는 열쇠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또한 예정조화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천 개의 고원 에서 다루어졌던 노마돌로지와 결부시켜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빈쿨룸이 있는`` 모나드론을 ≪노마돌로지의 모나돌로지≫라 명명한다. 본 고에서는 라이프니츠에게서의 ``실체화 관계`` 개념의 탄생 배경 및 의미와 함께 들뢰즈가 이 개념을 사용하여 라이프니츠의 영혼과 몸의 실제적 결합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정리하고, 그 의의를 『천 개의 고원』에서 이미 다루었던 몇몇 개념들과 더불어 찾아보고자 한다. 들뢰즈의 『주름』은 ``주름``이라는 테마로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시대의 과학, 철학, 예술에 공통인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importance of Leibniz`` philosophy in Deleuze``s works published after A Thousand Plateaus. It is focused particularly on the publication of thirty seven letters in Letters of Leibniz to Des Bosses translated from Latin to French in 1981, and on the concept of the ≪substantial bond (vinculum substantiale)≫ created in these correspondences which might have given Deleuze a certain motive for a part of his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in 1988. This concept reverses the Leibniz`` ``closed`` Monadology based on the theory of pre-established harmony and makes possible a ``(half) open`` one. Helped by the Husserl``s theory of belonging (to Ego), Deleuze pays attention to the relation of forces between the dominant monad and the dominated monads and the concept of substantial bond as the key to explain its relation of capture and possession. At the same time, he also pays attention to the possibility of escaping from that relation and the pre-established harmony. Associating it with nomadology studied in A Thousand Plateaus, Deleuze calls this new monadology vinculum, ≪Monadology of nomadology≫. This papers also studies the philosophical context for Leibniz to introduce the concept of substantial bond, explaining Deleuze``s specific questions as to the union of the soul and body with vinculum in the letters of Leibniz. Some other concepts studied in A Thousand Plateaus are compatible with Deleuze``s way of explanation of that question in The Fold. The theme of ``fold`` shows us a new possibility, which is common to Leibniz and to the Baroque philosophy, science and art.

      • KCI등재

        라이프니츠와 『易經』

        안종수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05 철학논집 Vol.10 No.-

        라이프니츠는 『주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주역』의 철학적 의미보다는 수학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졌다. 『주역』의 수학적 의미란 다른 것이 아니라 64괘가 이진법의 숫자라는 것이다. 원래 『주역』의 64괘들과 이진법의 숫자들을 연관시켜서 본 사람은 중국에 있던 프랑스의 선교사 부베(Joachim Bouvet, 1656-1732)였다. 물론 부베가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연구한 이진법을 상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편지를 읽고서 『주역』에 나오는 64괘들은 바로 이진법에서의 숫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자신의 발견을 그는 다시 편지로 라이프니츠에게 알려주었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4000년 전에 중국에서는 복희가 이진법을 발견했다고 믿고 놀라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옛날의 중국인들이 현대의 중국인들보다 더 뛰어났었다는 사실이 바로 『주역』의 64괘들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복희는 64괘들을 이진법의 숫자로 처음 만들었고 또 그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것을 이해했으나 현대의 중국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아주 옛날에 이미 이진법을 알았다는 사실은 라이프니츠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에게 이진법은 단순한 산술(算術)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진법이 창조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을 고대 중국인들이 알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주역』의 이진법은 고대 중국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 KCI등재

        라이프니츠와 회의주의

        황설중 ( Sul Joong Hwang ) 한국헤겔학회 2016 헤겔연구 Vol.0 No.39

        라이프니츠는 그의 생애 말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한 반박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 짧은 비평은 오랜 세월 동안 발견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라이프니츠와 회의주의에 대한 주제도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이 논문의 목표는 최근에 발견된 이 짧은 비평을 기초로 해서 회의주의를 반박하고 극복하려는 라이프니츠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 라이프니츠는 회의주의의 철학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어디까지나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적 도구에 불과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라이프니츠는 여겼다. 그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전개한 회의적 논변의 핵심 개념들을 하나하나 반박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조차 파괴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신하였다. 그것은 모순율이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진리 이론은 곧장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쟁에 헤겔은 기꺼이 개입하여 라이프니츠뿐만 아니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도 지양하고자 할 것이다. 모순율은 라이프니츠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헤겔이 함께 얽혀 들어가는 또 다른 논쟁의 장(場)을 예고한다. Leibniz wrote a rebuttal article on Sextus Empiricus at the end of his life. But this short review was not discovered for a long time and the subject "Leibniz and skepticism" was not discussed for a long time either.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lluminate the project of Leibniz, that is, "how is Leibniz to refute and overcome scepticism?" more clearly on the basis of the his critical comments. Leibniz was aware of the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skepticism. But he regarded skepticism as just a methodological tool for reaching the permanent truth. While retorting the core concepts of sceptical theory, he himself laid a solid foundation of knowledge that could not be destroyed by any sceptics including Sextus Empiricus. He had great confidence in the law of contradiction. But this solution of Leibniz would directly lead to the opposition of Sextus Empiricus. Obviously Hegel would be willing to intervene in their debate and to sublate both. The law of contradiction is to provide the three philosophers with a place where they must meet and dispute each other.

      • KCI등재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정론적 성격

        박제철(Je-Chul Bak) 한국철학회 2009 철학 Vol.0 No.98

        본 논문의 목적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많은 라이프니츠 철학 주석가들은 라이프니츠가 결정론에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라이프니츠 스스로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 대한 면밀한 연구는 라이프니츠가 실제로 결정론에 빠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보이기 위해 본 논문은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구문론적 접근법으로, ‘필연적으로’라는 양상 단어가 문장 내에서 잘못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라이프니츠가 결정론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미론적 접근법으로, 개체의 통세계적 동일성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입장이 어떤 식으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이 두 접근법을 통해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결정론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lucidates how the Leibnizian philosophy came to have deterministic character. Many commentators of Leibnizian philosophy defend the position that Leibniz doesn't fall into determinism, and this position is the one which Leibniz himself defends. Nevertheless, careful study of his philosophy show us that he really falls into the determinism. To show this fact, this paper takes two sorts of approach. First, as a syntactical approach, it shows how modal word 'necessarily' slips, and by this fact how Leibniz goes into determinism. Second, as a semantical approach, it shows how the Leibniz's intuition of the transworld Identity of individual makes him go into determinism. By these two sorts of approach, we can see that Leibniz is a determinist.

      • KCI등재

        라이프니츠, 삼각형, 삼변형―개념의 일치와 동일―

        김준영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22 철학탐구 Vol.68 No.-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진리치 변화 없는 대체(salva veritate substitution) 원리에 따르면, 서로 동일한 혹은 일치하는 것들은 진리치의 변화 없이 서로 대체될 수 있다. 이 원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라이프니츠는 삼각형 개념과 삼변형 개념을 예로 든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명제에서 삼각형 개념을 삼변형 개념으로 대체해도 이 문장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에 대해서 몇몇 라이프니츠 연구자들은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라이프니츠에게 삼각형 개념과 삼변형 개념은 같은 개념인가, 아니면 다른 개념인가? 라이프니츠가 명시적으로 이 둘이 다른 개념이라고 말한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들은 라이프니츠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삼각형 개념과 삼변형 개념이 동일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인다. 라이프니츠에게 삼각형 개념과 삼변형 개념은 일치coincident할 뿐, 동일identical하지는 않다. 즉, 라이프니츠는 이 두 개념이 일치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개념으로 일관적이고 정합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련의 논의를 통해서 나는 또한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개념의 일치함과 동일함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며, 이는 또한 그의 진리치 변화 없는 대체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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