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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元帝國 末期 政局과 고려 충혜왕의 즉위, 복위, 폐위

        권용철(KwonYong-Cheol) 고려사학회 2014 한국사학보 Vol.- No.56

        본고에서는 대원제국 말기의 복잡한 정국 속에서 이루어진 고려 충혜왕의 두 번의 즉위와 두 번의 폐위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고려국왕에 대한 실질적 임면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대원제국의 내부에서 권력 구조의 변동이 발생하면 이것이 고려국왕의 지위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은 충혜왕 시기 이전부터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그런데 대원제국 말기에 이르게 되면,복잡해진 제위계승분쟁과 그로 인한 權臣의 출현 및 교체로 인해 내부 정치의 혼란이 이전보다 더욱 격렬해졌고, 이것이 충혜왕의 고려국왕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대원제국에 숙위로 들어간 충혜왕은 쿠데타를 통해 대도 궁정을 장악하고 내전에서 승리했던 권신 엘테무르(El-Temur)의 총애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결국 엘테무르의 지원 아래에서 충혜왕은 그리 어렵지 않게 고려국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제국의 제위계승분쟁에 연루되어 대청도로 유배를 왔던 토곤테무르(Toγon-Temur)와 연루된 무고로 인해 충혜왕은 갑작스럽게 폐위를 당하고 대원제국으로 소환되었다. 하지만, 엘테무르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충혜왕은 소환된 이후에도 숙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그 2년 후에 바얀(Bayan)이 엘테무르 가문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충혜왕은 대원제국에서의 후견인을 잃게 되었다. 바얀은 충혜왕을 고려로 돌려보냈고, 충혜왕의 거취는 불투명해졌다. 父王충숙왕이 사망하면서 충혜왕을 다음 고려국왕으로 지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얀은 자신의 권위를 통해 충혜왕의 복위를 끝까지 막았다. 심지어 충혜왕을 압송하고 가두어 심문을 하고자 했다. 때마침 바얀이 조카 톡토(Toγto)에 의해 축출되면서 충혜왕은 겨우 고려국왕으로 복위할 수 있었다. 엘테무르-바얀-톡토로 이어지는 대원제국말기 권신의 교체는 충혜왕의 즉위와 복위를 결정하는 주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얀의 축출 이후에 새롭게 부상한 제2황후 기황후의 세력은 대원제국과 고려정치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했고 이는 충혜왕 복위 시기의 동향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충혜왕은 복위한 이후 4년 만에 두 번째로 대원제국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기황후 세력의 정변이 발생하여 충혜왕을 중죄인 취급하며 대원제국으로 압송했던 것이다. 즉, 충혜왕과 기씨 가문 사이에서 발생했던 갈등은 해소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충혜왕은 모진 고초를 겪은 끝에 유배를 가던 도중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충혜왕의 두 번째 폐위와 유배, 사망은 대원제국과 고려 관계에서 가장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 고려에 있던 고려국왕을 대원제국에서 임의로 폐위시키고 駙馬의 위상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태에서 죽게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혜왕이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한 탓에 그의 후손들은 나이가 너무 어렸고, 그래서 부마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기황후 세력의 지속적인 성장은 대원제국 황실 가문, 고려 왕실 가문이 아닌 제3의 세력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여건을 조성했다. 즉, 충혜왕의 행적은 1320년대 후반부터 1340년대 전반까지의 대원제국과 고려 사이의 뒤틀어진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 KCI우수등재

        李穀의 『稼亭集』에 수록된 大元帝國 역사 관련 기록 분석

        권용철 역사학회 2018 역사학보 Vol.0 No.237

        This paper examines the major political events of the Yuan Empire mentioned in Lee Gok(李穀)’s Gajeongjip(稼亭集, the Literary Collections of Lee Gok). It also explores in depth figures of the Yuan Empire who have hitherto remained uninvestigated in prior studies. Lee Gok wrote about these people as well as about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Yuan Empire, a fact suggesting that there were Goryeo people involved in major events that occurred in the Yuan Empire and who were firsthand witnesses of events happening in the country. In literary works included in Gajeongjip, Lee Gok also mentions the names of several writers whom he was acquainted with as well as prominent figures in the history of the Yuan Empire. The late Goryeo dynasty saw ceaseless tension between those wishing to maintain Goryeo’s social conventions and those hoping to introduce the laws of the Yuan Empire into Goryeo. This tension represents an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the late Goryeo dynasty. Gajeongjip includes not only various political events and figures in Goryeo and the Yuan Empire but also Lee Gok’s careful contemplation of political systems of the time. In other words, Gajeongjip covers a wide range of subjects, from important figures and events in the two countries to diverse issues related to Goryeo-Yuan relations, meaning that this book is a valuable historical source for the study of the late-Yuan and late-Goryeo period. 본고에서는 이곡의 『稼亭集』에서 언급되고 있는 대원제국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기존 연구에서는 상세히 언급하지 않은 대원제국 측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로 원으로 진출한 고려인들의 사정에 밝았던 이곡은 그들과 관련된 문장을 남기면서 대원제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이를 통해 보면, 대원제국에서 벌어진 주요한 국면에 고려 출신 인물들도 참여하여 그 광경을 목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곡과 교유하면서 『稼亭集』의 詩文을 통해 출현하고 있는 여러 문인들 이외에도 대원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의 행적이 『稼亭集』에 기록되었음을 확인했다. 특히 고려 후기에 고려의 습속을 유지하려는 경향과 대원제국의 법제를 적용하려는 움직임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났고, 이는 고려 후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稼亭集』 속에는 본론에서 분석한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 이외에도 당시의 정치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저자 이곡의 인식까지 담겨있는 것이다. 즉, 『稼亭集』은 고려 및 대원제국에서 활약한 여러 인물, 사건들은 물론이고 고려-대원제국 관계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내용을 담고 있어 고려 후기는 물론 대원제국 후기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대원제국사 연구에서 이러한 내용들이 조금 더 주목을 받았으면 하고, 차후 더 나아간 분석을 위한 소중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高麗人 宦官 高龍普와 大元帝國 徽政院使 투멘데르(禿滿迭兒)의 관계에 대한 小考

        권용철(Kwon Yong-Cheol) 한국사학회 2015 史學硏究 Vol.- No.117

        본고에서는 대원제국과 고려 말기에 두 국가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고려인 환관 高龍普와 대원제국의 徽政院使투멘데르(禿滿迭兒, Tumender)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환관 고룡보가 곧 휘정원사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이고 고룡보의 몽골 이름이 투멘데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떠한 뚜렷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추정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元史』에는 휘정원사 高龍卜이라 기록된 곳이 한군데 있지만 그 신빙성이 불투명하다. 또한, 이 기록으로도 고룡보와 투멘데르가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본고는 고룡보와 투멘데르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위해 우선 고룡보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사실, 대원제국과 고려 양국에서 뚜렷한 활약을 한 것 치고는 고룡보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高麗史』에는 고룡보의 열전이 있지만, 그마저도 고룡보의 출생이나 그가 대원제국으로 들어가게 된 배경 등에 대한 설명은 없다. 『高麗史』 이외의 자료들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散見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을 상세하게 복원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 중에서 고룡보의 몽골식 이름이 투멘데르였다는 기록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고, 고룡보가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게 만드는 기록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아예 고룡보가 아닌 다른 인물에 주목하였다. 『稼亭集』에 나오는 禿滿達이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가정집의 저자 李穀의 기록은 독만달이 1300년에 대원제국에 들어온 이후 至正5년(1345)까지 고위 관료로서 은총을 받는 혜택을 누렸고, 이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사당을 짓기 위해 이곡에게 부탁하여 지어진 것이다. 독만달은 대원제국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이곡은 굳이 그를 徽政公이라고 불렀다. 휘정공은 휘정원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독만달의 대표 관직이 휘정원사였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독만달이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어서 투멘데르가 고려인 환관이라고 서술했던 『庚申外史』의 내용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독만달이 휘정원사에 있을 때 賢能한 자를 추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는 내용은 기황후를 궁녀로 추천한 투멘데르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의 자료에 기록된 禿滿達과 『元史』의 禿滿迭兒가 과연 같은 人名에 대한 다른 표기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고려의 자료에서 몽골인 인명을 쓰는데 활용한 達의 또 다른 용례를 살펴보면서 우리말의 達이 중국어와는 달리 ‘da’와 ‘r’ 발음을 한꺼번에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하여 禿滿達과 禿滿迭兒는 같은 인명에 대한 다른 표기임을 주장하였다. 아마 고려 측의 자료와 중국 측의 자료에 대한 비교 작업을 계속 수행하게 되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또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대원제국-고려 관계의 구체적인 역사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두 국가의 자료에서 발견되는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 방식을 추적하고 이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대원제국 시기의 자료에는 같은 인물을 다른 한자로 표기한 사례 혹은 동명이인이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대원제국과 고려의 관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분별하는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이에 본고는 추후에 이루어질 상세한 연구들을 위한 試論으로서 우선 투멘데르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어 고룡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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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색의 『목은문고』에 수록된 대원제국 역사 관련 기록 분석

        권용철 한국중세사학회 2022 한국중세사연구 Vol.- No.71

        In this paper, the contents related to the Yuan Empire recorded in the Mokeunmoongo(牧隱文藁) were extracted and analyzed. Lee Saek passed the Yuan empire’s civil examination and was able to interact with the officials of the Yuan empire early on due to his father Lee Gok. So, he also passed the Yuan empire’s civil examination like his father. After passing the examination, Lee Saek did not serve as an official of the empire for a long time and returned to Goryeo immediately, but he knew the situation of the empire better than anyone else in that era. Therefore, his records have historical value not only in the history of the late Goryeo dynasty but also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the Yuan empire. Mokeunmoongo records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Yuan empire and the aspects of various bureaucrats. Although the contents do not mention every detail of the situation, there are many clues that are not confirmed in the Chinese materials. Since this can be said to be an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 necessary for studying the history of the late Goryeo dynasty and the Yuan empire, the historical value of the Mokeunmoongo increases further as a new perspective is secured. Therefore, it is natural that it is necessary to steadily discover the materials that can be used in Mokeunmoongo from various perspectives and topics in the future. 본고에서는 이색의 『목은문고』에 기록되어 있는 대원제국과 관련된 내용들을 추출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색은 대원제국의 과거에 합격하여 제국의 사정에 밝았던 부친 이곡으로 인해 제국의 관료들과 일찍부터 교류할 수 있었고, 이색 본인도 대원제국의 국자감에 입학한 후 부친처럼 대원제국의 과거에 합격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색은 과거에 합격한 후, 제국의 관직을 오랫동안 역임하지 않고 곧바로 고려로 돌아와서 활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다른 누구보다 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은 고려 후기의 역사는 물론이고 대원제국의 역사 연구에서도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내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목은문고』의 곳곳에는 대원제국의 정치적 상황 및 여러 관료들의 동향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중국 측의 기록처럼 상세한 행적까지 일일이 다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측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단서를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는 고려 후기와 대원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목은문고』의 사료적 가치는 새로운 관점의 확보에 따라서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양한 시각과 관점 및 주제에 따라 『목은문고』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다양한 시선에서 검토하여 꾸준히 발굴해야 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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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元帝國 말기 奇皇后의 內禪시도

        윤은숙 한국몽골학회 2016 몽골학 Vol.0 No.47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background why Empress Gi’s attempted to be abdicated although Ayuširidara was installed as the crown prince and the results of her attempt of abdication. Ayuširidara was born in 1339, and his birth was such a prelude of political revolution in the late Yuan Empire. His birth became a driving force for Togon Temür, who was merely a puppet emperor at that time, to deprive bayan and Botashiri of their power and manage political affairs directly. Even though Ayuširidara was installed as the crown prince in 1353 and rapidly rose as the heir to the throne, his ascending the throne was not assured. It was because the court of Yuan Empire had been dominated by queens from Qonggirat and their children since Qubilai. Therefore, Empress Gi attempted to make a frontal breakthrough by being directly abdicated from Togon Temür and making Ayuširidara ascend the throne. Particularly, she made such a great attempt of abdication twice during the reign of Togon Temür. As there were more conflicting interests entangled between Empress Gi’s attempt of abdication and Togon Temür’s countermeasures and even between powerful courtiers working for Emperor Party and Crown Prince Party respectively, state affairs became more confusing in the late Yuan Empire. 이 연구의 목적은 奇올제이 쿠투(Ölǰei Qütu, 이하 奇皇后)를 중심으로 한 대원제국 말기의 권력쟁탈 분쟁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1353년(至正 13)에 아유시리다라(Ayuširidara)가 황태자로 책봉된 이래 기황후는 토곤 테무르카안의 재위기간 동안 양위를 받아 아유시리다라를 즉위시키려 했다. 이런 기황후의 내선 요구에 대해 토곤 테무르 카안이 적극적으로 應戰하는 과정에서 제국말기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야기되었다. 토곤 테무르 카안 시기 황태자로서 가장 유력한 차기 계승권자인 아유시리다라의 내선요구를 단지 기황후의 성품이나 권력욕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대원제국말기의 복잡한 내부문제와 관련해 볼 때 지나치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1) 권력계승의 역학구도는 어느 한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잡하고 다층적 요소들을충족시켜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기황후는 高麗 내정에 간섭해 혼란을 야기 시켰을 뿐만 아니라 資政院에 집결된 고려출신 환관들과 결탁해 아유시라다라를 즉위시키려 했기에 대원제국을 멸망시킨 주범이었다고 평가한다.2) 이와 관련해 李龍範, 趙永春ㆍ蘭婷과 韓志遠 등은 기황후의 내선시도가 원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 물론 기황후가 元末 정치적 혼란에 일조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국멸망의 주범이라는 해석은 논리적으로 비약된 부분이 적지 않다. 오히려 원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가장 극심했던때는 토곤 테무르 등극 이전의 30여년의 기간으로, 대칸과 正后에 대한 독살과 피살이 반복되며 대칸의 평균 재위기간이 3년 정도에 불과했던 시기이다. 본래 몽골제국의 대칸 계승에서는 母親의 출신성분이 즉위에 미치는 영향이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대원제국에서는 더욱 심화되어, 쿠빌라이카안 이래 콩기라트(Qonggirat)部 알치노얀(Alchi Noyan: 按陳)의 후손들이 交換 婚을 통해 정후와 황위를 거의 독점하였다. 따라서 高麗 貢女출신이라는 기황후의 배경은 아유시리다라의 즉위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고, 이를 극복하기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내선시도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아유시리다라의 출생이 제국 말기에 끼친 변화 및 기황후의 내선시도의 배경을 면밀히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황후의 내선시도를 단순히 그녀의 권력욕만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지양하고 제국의 황위계승과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이해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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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세기 元 皇室 書畵收藏의 전개와 大汗의 역할

        황정연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2 인문과학연구 Vol.- No.34

        This paper examines that the origin, formation process, and activities of major figures in the Mongolian imperial family functioned as a governing means to converge a multinational society. Although the Yuan Imperial Family's art collection originated from the Mongol Empire established by Genghis Khan 元 太祖, ch. 忽必然, in the distance, it was formed and developed with a direct origin from Kublai Khan 元 世祖, who founded the Yuan Empire. It can be said that the head system of the Yuan imperial family was systematically implemented from the beginning of its foundation, and a calligraphy research organization, 秘書監 biseo-gam, Official Branch of the Yuan Court Documents, was established to investigate the collections of the former dynasties, and clearly recognized as the head of the imperial family. In addition, this series of activities by Kublai Khan, who invited calligraphers and scholars from Han Chinese 漢族 with artistic perspectives to read and write books, became the cornerstone of leading beauty in the 13th~14th centuries when his close descendant - Princess Sangge Ragi 魯國大長公主 祥哥剌吉 and Emperor Wenjong 文宗皇帝 - served as leading sponsors for the artists both of Chinese and Mongolian. This is not a passive fairy tale about Chinese clan 韓族 but a legacy left by Kublai Khan, who tried to achieve national unification while maintaining his identity as a Mongolian. Despite the chaos of the dynastic replacement period, the system of the Yuan Dynasty court collection systematically organized works scattered by successive wars and invaders, which has the art historical significance of in that it developed art criticism and authenticity at the time. Furthermore, considering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the Yuan and Goryeo, the court collection system of the Imperial Yuan occupies an important place because it caused the royal collecting of Koryeo Dynasty developed systematically. This topic will be dealt with as the future study. 본 논문은 元 13-14세기를 중심으로, 大汗 쿠빌라이 칸(元 世祖)을 비롯한 황실 주요 인사들이다민족 사회를 융합하려는 방편으로써 書畵收藏이라는 행위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 것이다. 원 황실 서화수장은 大元帝國을 건설한 元 世祖로부터 직접적인 기원을 두고 형성・발전하였다. 원 황실의 수장제도는 건국 초창기부터 나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서화전문 연구기구인 秘書監을 두어 前 왕조의 수집품을 조사하였고, 收藏印을 찍어 황실 소장임을명확하게 표시하였다. 또한 예술적 안목이 있는 한족 출신 서화가, 학자들을 宮으로 불러 수장품을열람하고 서발문을 쓰게 한 세조 연간의 이러한 수장활동은 그의 직계 후손들인 魯國大長公主 祥 哥剌吉과 그녀의 친인척인 仁宗, 文宗 등이 수장가이자 후원자로 활동하면서 원대 宮廷美術을 이끈 초석이 되었다고 보는데, 특히 황실 수장품에 신하가 발문을 쓴 행위는 군-신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복속시키는 상징적인 통치효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원 황실이 몽골인사들이 중국문화에 수동적으로 동화된 것이 아닌, 몽골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민족융합을 이루고자 했던 世祖가 남긴 유산을 실천한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 서화수장사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았을 때 원대 서화수장은 민간에서 보다 황실이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물론 이 시대가 陰・陽地에서 활동한私人 수장가들이 점점 부상한 전환기이기는 하나, 왕조 교체기에 황실이 주도적으로 前代 황실의 흩어진 수장품을 모으고 관료들로 하여금 감평을 하도록 한 행위는 국가경영의 정통성을 표방하고중국인들을 지배하에 두려는 간접적인 통치술로 평가되는 한편, 결과적으로 황실이 당대 서화비평을 진작시킨 예술 後援者로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 대원제국의 위상을 재평가해야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원 황실은 왕조 교체기라는 혼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전쟁과 왕조의 명말 등으로 흩어진 작품들을 다시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편, 秘書監, 奎章閣 등 전문적인 관리처를 마련해국가적 차원에서 수장제도를 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곧 역대 서화에 대한 비평과감식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되며, 그 이면에는 맹목적인 漢化를 지향하지 않고 개방적・실리적인 입장을 견지한 元 世祖의 역할이 컸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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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제국 말기 재상 톡토의 至正 9년(1349) 再執權에 대한 검토

        권용철 대구사학회 2018 대구사학 Vol.130 No.-

        This article examines the specific process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eturn of Toγto, who was one of the ministers of the late Yuan Empire. Toγto had been involved in conflicts in the imperial court since his departure in 1344, and finally he was forced to leave Dadu(大都), but in 1348 he was able to step back on his way through the call of Huizong(惠宗). Berke-Buqa, who was in the center of the contest at the time, was constantly impeached and did not have a strong faith in Huizong. Empress Ki, who was gradually expanding her power, had more trust in Toγto, who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her. Based on this background, it was not difficult to get to the top again. Before Toγto was re-elected as Chancellor of the Right(右丞相) in 1349, there was already a political framework for Toγto. As a result, Toγto became able to control all of the representative offices of the Yuan Empire. In addition to this, for the education of Ayushiridara the Heir Apparent’s Study(端本堂) was established and Toγto became the jurisdiction of the Heir Apparent’s Study. So, the relationship with Ayushiridara became more intimate. In addition, the person who defended the Toγto was appointed to the Bureau for the Empress’s Estates(資政院) which was the foundation of Empress Ki. This political landscape served as a background in which Toγto operated considerably arbitrarily in the 1350s. 본고에서는 대원제국 말기의 재상 중 한 사람이었던 톡토가 우승상의 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하는 구체적인 과정과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톡토는 1344년에 병으로 사임한 이후부터 제국 궁정에서 벌어진 정쟁에 휘말리며 결국 쫓겨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1348년에 혜종의 부름을 받아 서서히 복귀의 길을 밟아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정쟁의 중심에 있었던 베르케부카는 지속적으로 탄핵을 당하면서 혜종의 굳건한 믿음을 얻지 못했고, 점점 권력을 확대하고 있던 기황후는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톡토를 더욱 신뢰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톡토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다시 우승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349년 톡토가 우승상으로 재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미 톡토를 위한 정국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톡토는 대원제국의 대표적 최고 官府인 중서성-추밀원-어사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태자 아유시리다라의 교육을 위한 단본당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황태자 교육이 시작되는데, 이를 역시 톡토가 관할하게 되면서 태자와의 관계 역시 더욱 밀접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기황후의 세력 기반이었던 자정원에도 톡토를 비호했던 인물이 임명되면서 톡토는 황제와 황후 및 태자의 지원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정치 구도는 톡토가 1350년대에 상당히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 중, 소형시설물 지진피해평가·관리시스템 개발

        이경석 ( Lee Kyeong-seok ),서영득 ( Seo Young-deuk ),최형석 ( Choi Hyoung-suk )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2021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25 No.1

        지진이 발생하면 시설물의 관리자는 구조물의 피해발생 여부를 조사하고 긴급복구를 실시하는 등 대응을 수행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교량 및 건축물과 같은 대형의 사회기반시설에 대해서 지진발생 후 소수의 관리인원이 제한된 시간 내에 다수구조물의 지진피해를 확인하고 안전성을 평가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국내에서는 지진재해대응시스템이 개발되어 있으나 확률론적 안전성 평가방법을 적용하고 있어 개별 시설물에 대한 피해 정도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중, 소형시설물의 지진피해평가·관리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지진재해 발생 후 관리자에게 구조물의 피해발생 여부, 긴급점검 등 유지관리활동의 필요유무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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