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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金泉學’의 성립을 위한 예비적 논의

        김창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2 민족문화논총 Vol.82 No.-

        이 글에서는 金泉學을 제안하는 목적에서 예비적 논의를 하였다. 먼저 지역학으로서 김천학의 개념을 설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김천학의 주요 내용을사례로 제시하고, 이어서 김천학의 연구 방향과 방법 등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김천학은 하나의 지역학이다. 그 대상은 김천의 지역문화이다. 김천 지역문화의 대상은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과거에 생활하였거나 김천에 연고를 가진 모든 김천인을 주체로 하면서. 공간적으로는 지금 김천시를주로 하면서, 때로는 과거에 김천인이 활동하였거나, 지금 김천인이 활동하는지역도 아우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김천의 지역문화는 이러한 시공간적 범주 안에서 김천인이 그들의 삶과 연계한, 즉 자연과 지리, 역사, 문화유산, 인물, 종교, 문화, 생활, 언어와 문학분야에서 이룬 모든 유형의 요소들의 총체이다. 결국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김천학이라고 설정하였다. 이와 더불어 김천학의 대표성을 갖는 주요 내용 사례로써 崔松雪堂 연구, 甘文國 연구, 社會主義運動 연구를 제시해 보았다. 한편 김천학의 방향과 방법으로는 김천지역이 지닌 올바른 정체성과 지역성의 확립, 분야 학문간의 통합성을 이루는 총체적인 연구의 추구, 실용성을가진 현지적 정책과 미래지향적 방향성의 제시,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연구, 다른 지역과의 비교 연구를 김천학의 주요 요소들과 연계하여 거론하였다. 결국 통시대와 전지역을 아우르는 김천 지역문화의 특성을 함유하는 김천학은 향후 이것이 실제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출되고 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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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姓貫制와 本貫 ‘慶州’ 姓氏

        김창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1 민족문화논총 Vol.79 No.-

        이 글에서는 한국의 성씨들 중에서, 특히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를 본관으로 표기하는 성씨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 성씨와 본관의 특징을 언급하고, 이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는 성씨들에 대해 검토하였다. 본관을 경주로 하는 성씨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전통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慶州府 本府의 성씨로는 신라 宗姓 三姓 및 六部姓과 回鶻系 偰氏가 있었다. 이 성씨의 후예들이 늘어나 인구수가 많아지고, 또 일부가 주거지를 옮겨 생활하면서, 서로간에 혈족의 계통을 구분하고 先代와 出自를 분명하게 할 필요에서 새로운 성을 칭하고 다른 지역명을 본관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성씨간에 혈통의 근원과 출자는 동일 하다고 하면서도 성과 본관을 달리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大姓名門 중심으로 성과 본관을 변경하는 추세가 있었는데, 여러 群小 성씨들은 신라 또는 경주와 연계성이 있는 본관과 성을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전통시대 뿐만 아니라 근현대에도 여전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성과 본관을 달리하면서도 그 출자와 연원은 신라 종성과 6부 의 성에서 유래하였고 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즉 ‘新羅出自說’ 을 자처하며 우월감과 자긍심을 갖는 가문과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의식은 한말에 신분제가 폐지되고, 더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법적으로 성과 본관의 개정과 창설이 가능해짐에, 이에 따라 옛 신라의 왕경이라는 역사문화적 특별성을 지닌 경주를 본관으로 표기하는 많은 성씨가 생겨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본관을 경주로 표기하는 성씨의 수는 물론 여기에 따른 총가구수와 인구수가 폭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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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唐 한국계 유이민 생활사 연구 총론

        김창겸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한국고대사탐구 Vol.35 No.-

        이 글에서는 중국 소재 묘지명을 통해 당 왕조에서 살았던 한국계 유이민의 생애와 활동사 연구에 대한 총괄적인 서술을 하였다. 이 기획연구과제를 수행한 연구팀에서는 중국에 소재하는 묘지명 분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접근으로 생활사를 재구성하고 이해하였다. 즉, 여기서는 당으로 이주하여 唐人으로 탈바꿈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출신인, 이른바 한국계 유이민들에 대한 활동을 조사해서 이들이 살아간 궤적과 모습을 복원해 보았다. 이 작업은 향후 발견될 묘지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연구방향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이 연구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오고 이와 관련한 후속 연구를 초래할 것으로 기대한다. 먼저 국내 소재 문헌자료와 더불어 고대 한국인의 생활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새로이 출토되고 있는 묘지명 자료에 대한 연구자의 관심과 활용의 필요성을 제고할 것이다. 결국 이 연구는 종전의 제한적이거나 부분적 연구방식에서 초월하여 보다 폭넓고 다양한 사실들을 수집 정리함으로써, 전문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제공하고 이해의 공감대를 형성함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This article is a overall description of the study on the life history of Korean displaced peoples lived in the Tang dynasty. The research team that carried out this project reconstructed and understood the life history through the analysis of epigraph-writings in China. Through the study of Koreans who moved to the party and transformed into people of the country, they restored their trajectory and vivid appearance. This work has prepared an important research guideline for the future to be discovered. This study will bring about a great deal of repercussions in the future, and will lead to follow-up studies. First, cultural restoration projects, social training, and interesting perceptions will be derived from citizens. On the other hand, it will help restore and reconstruct life history using literature data in Korea. And it will raise the necessity of interest and utilization of the researcher's new materials of Epitaph which are being excavated in China. In the end, this study is a collection of wider and diverse facts that transcend the previous limited or partial research methods, which will be provided to researchers and the general public, and will form a consensus on this field.

      • KCI등재

        신라 憲康王과 義明王后, 그리고 ‘野合’과 孝恭王-특히 신라말 ‘非眞骨王’의 등장과 관련하여-

        김창겸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2

        이 글은 신라 헌강왕과 그의 여인들, 그리고 효공왕의 즉위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전하는 자료에서 확인되는 헌강왕의 여인으로는 의명왕후, 수원 권씨, 요(효공왕)를 낳은 생모 김씨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효공왕의 생모는 왕족도 진골귀족도 아니었고, 게다가 헌강왕과 야합으로 아들 요를 낳았으나 궁궐 밖에서 키워야만 하였다. 또 효공왕은 즉위 후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 헌강왕의 정식 왕비인 의명왕후를 의명왕태후로 책봉하였다. 신라 골품제의 원리에서 진골이 아닌 생모가 낳은 효공왕도 진골이 아니었다. 효공왕이 즉위한 것은 골법의 특이성이라는 왕실 혈통, 즉 오로지 왕족이라는 신성성만을 내세워 비상조치로써 이루어진 왕위계승이었다. 이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오직 왕의 아들이라는 혈통의 신성성만 강조되고, 골품제 규정은 기능을 상실하고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헌강왕과 비진골 김씨녀의 야합으로 출생한 효공왕의 즉위는 신라 왕위계승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요인 중의 하나인 골품제 규정을 소멸시키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며, 이는 골품제의 바탕 위에 존립하였던 김씨 신라왕조의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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