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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紅葉』과 일본인들의 한국문화 인식과정 검토

            車順喆(Cha Soon-Chul)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2 한국고대사탐구 Vol.11 No.-

            『한홍엽』은 세키노 타다시를 비롯하여 당시 한국고적조사를 담당했던 야쓰이 세이이치, 쿠리야마 이치 등이 한국의 문화유적을 조사하고 느낀 여러 가지 생각을 강연한 내용을 활자화한 것으로,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생각이 들어나 있다. 세키노 타다시는 『한홍엽』에서 한국미술사의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서 한국 문화가 역동적이기보다는 타율성에 지배를 받았고, 한국 고유문화의 빈곤함을 바로 쇠락한 문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결국, 이 책을 통해서 일본 연구자들이 고적조사를 진행하면서 가졌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역사관을 고착화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노가 한국 문화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중국의 여러 왕조와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영향관계를 살핀 모습은 결국 중국미술과의 교류관계를 중심에 둔 채, 동아시아 문화사를 바라보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결국 『한홍엽』에 나타난 세키노의 인식은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을 중국보다는 일본과 연계시키면서 그 동질성을 찾은 데에서 그 의미가 있으며, 이후 한국 미술사에서 통일신라미술을 황금기로 강조하던 모습의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Hanhongyeop” is the printed version of lectures given to the general public by three people: Sekino Tadashi, Yaiichi Seiichi, and Kuriyama Shunichi on what they felt during the survey of historical remains of Korea. This book contains 3 pieces of writings that show the thoughts of Japanese researchers about Korean cultural assets. Sekino Tadashi attempted to divide Korean art history into different periods through “Hanhongyeop”. He saw Korean culture as the culture dominated by heteronomy rather than as a dynamic culture and saw the lack of unique Korean culture as the symbol of decaying civilization. Japanese researchers ultimately attempted to perpetuate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upon Korean people based on imperialism through this book. Sekino Tadashi divided the history of Korean culture into prehistorical era and historial era and examined the influence of various dynasties of China in each period. He found Korean and Japanese cultures through the exchange with China, and this indicates the view of the researchers that studied East Asian culture then. Eventually, Sekino Tadashi's idea that appears in “Hanhongyeop” finds homogeneity by associating the origin of ancient Korean culture with Japan rather than China and this is the reason he emphasized the art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as the golden age in the Korean art history.

          • KCI등재
          • 관학파가 만든 '민족사'에서 우리를 만든 '한국사'로

            李鍾旭(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한국고대사탐구 Vol.1 No.-

            우리들이 한국고대사탐구학회를 만들어 학술발표회를 갖고 『한국고대사탐구』라는 학술지를 발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제시대 관학파 사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을 계승한 후식민사학자들은 해방 후 '민족'과 '실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단군을 정통으로 하는 '민족사'를 발명해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의 상당 부분을 말살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단군조선을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규정한 손진태는 고구려의 역사를 민족사의 영광으로 칭송하였고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를 민족사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민족사 서술 경향은 별다른 비판 없이 현행 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관학파 후식민사학자들이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의도적으로 조작해낸 민족사는 '한국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한국사는 민족사와는 별개로 인식되어야 한다. 관학파가 말하는 민족이란 '민족공조'와는 무관하며 사실상 '種族'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들은 nation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 우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종족을 민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현대의 한국인이 자신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성씨와 문회유산을 물려준 역사 속 국가들을 추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사는 마땅히 조선→고려→대신라→삼국시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시작한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ㆍ한국인의 오리진은 한국사와 단절된 고조선ㆍ고구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가 철저히 침묵시켜왔던 내물왕 이전의 신라사에 있다. 이제부터 민족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삼국사기』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인정하고 재구성하려는 〈모델 3〉의 세상을 활짝 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There is a reason that we founded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Korean History, publishing our academic journal. Following the methodology of national school historians (Gwanhakpa)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ost-colonization historians invented "the national history" arguing for the legitimacy of Tan-gun, based on nationalism and positivism, since the Liberation of 1945. Furthermore, they completely denied the initial records of Samguksagi,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erasing the substantial portion of Korean history. In particular, Son Jin-tae, who describes Tan-gun Chosun as the beginning of the national history, praised the history of Goguryo with the glory of the national history, denouncing the history of Shilla which unified the Korean peninsula in alliance with T'ang as the disgrace of the national history. This kind of historiography based on Korean nationalism has long been continued without any criticism, and even the Korean official textbook has followed this tendency. The 'national history' fabricated by the post-colonization historians in the name of positivism, however, is totally different from Korean history. In Gwanhakpa's explanation, 'Minjok' does not mean a nation, but rather a 'race' - they fell into an error to categorize all races which have existed in Korean history as 'Korean nation.' If a Korean wants to trace his/her origin, he/she should chase the history of countries which have left the largest number of Korean family names and cultural heritages to the Korean society. In this context, we can find the beginning of Korean history from the Shilla at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We should trace the origin of Korea and Korean people, therefore, in the history of Shilla ascending to the reign of King Naemul, which has been forced to remain silent by the national history, not in the history of the Kochosun - Goguryo separated from the Korean history. Now we propose a brand new research model, "Model 3": we aim to reconstruct the early part of Samguksagi arguing for its authenticity, beyond the scope of the national history.

          • KCI등재

            혁거세신화를 통해 본 서라벌소국의 형성

            이종욱(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6 한국고대사탐구 Vol.24 No.-

            현재 박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많다는 사실로 보아 결국은 혁거세(赫居世)를 시조로 하는 씨족(氏族)이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될 정도로 번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현재 한국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 정체성의 원점에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6촌장을 시조로 하는 씨족과 탈해를 시보로 하는 씨족, 알지를 시조로 하는 씨족 등이 있다. 이들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칭하던 명칭이 있다.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씨족은 후대에 종성(宗姓) 또는 천강성(天降姓)이라 불렀다. 그런가 하면 혁거세를 추대했다고 하는 서라벌6촌장을 시조로 하는 씨족이 가졌던 성을 육부성(六部姓) 또는 토성(土姓)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근현대 한국사학은 종성과 육부성 중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족 만이 아니라, 다른 씨족들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인 정체성의 원점을 은폐해 온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인들이 아니라 신라인들을 시조로 하는 성이나 본관을 가진 한국인이 많다는 사실은 신라가 한국인의 오리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중에서도 신라 건국신화를 포함해 신라 초기 역사가 바로 한국인 정체성의 원점이 된다. 이 같이 신라 오리진의 한국인을 만든 출발점은 혁거세가 건국한 신라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현대 한국사학은 혁거세를 푸대접해왔다. 현대 한국사학은 혁거세 그리고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 성을 가진 씨족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쓰다 소키치에서 시작했고 이병도 선생이 이어받은 이 같은 주장은 본질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근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것과 다른 것이었다. 신라의 모체가 된 서라벌소국을 세운 혁거세를 신라인들은 처음부터 기억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신라의 왕들도 건국신화나 시조에 대한 설화를 통해 정통성을 얻고, 계보파악을 통해 왕의 지위의 정당성을 얻었고, 시조묘나 신궁의 제사를 통해 왕의 권위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혁거세의 후손들은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 제사와 혁거세왕릉의 존재를 통해 그들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혁거세는 신라 초기부터 신라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신성한 존재였다. 이병도 선생이 신라 왕의 세계(世系)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 자체가 신라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제국 일본의 한국인 폐멸정책을 위해 희생된 한국사, 상처받은 신라의 역사, 그렇게 지워진 혁거세를 살려내고 한국인 정체성의 원점을 되찾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본고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It could be inferred the clan, which progenitor was Hyeok'geo'se, has flourished in Korea, since there are many Koreans who has family name ‘Park'. Therefore, this article will be a starting point to understand present of Korea. The origin of Korean identities are not only consisted with clan which progenitor was Hyeok'geo'se. According to Silla National Origin Myth, there are clans which progenitor were Six Chonjang, Talhae and Alji. There were titles about these family clans that later generation had designated. The clan that produced King of Silla was called Jongseong or Chungangseong by later generation. The clans, which progenitors were Seorabol Six Chonjang and whom appointed Hyeok'geo'se as their leader, called their family name as Youkbuseong or Toseong. However,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had not focused on Jongseong and Youkbuseong which progenitor was Hyeok'geo'se as well as the presence of other clans. This research tendency means to conceal Korean identity. There are many Korean family names or family clans which progenitor was from Silla, not from Koguryo or Baekje, and it could be inferred that Korean origins are related with Silla. Above all, Early Silla History including Silla National Origin Myth contains starting point of Korean origins. As it was inferred in previous paragraph, Silla origins which indicated starting point of Korean is related with Silla founded by Hyeok'geo'se. However, Contemporary Korean History neglects Hyeok'geo'se. Contemporary Korean History does not acknowledge Hyeok'geo'se and his clan with family name Park. This trend of argument, which had started by Professor Tsuda Sōkichi and was inherited to Professor Lee Byung-Do, contains critical problems. Real Korean History is different with what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has created. Silla people remembered Hyeok'geo'se who had founded Seorabol community that were developed into Silla. Similar with other countries, Kings of Silla secured their legitimacy by Silla National Origin Myth or tales of progenitors, gained authority as king by tracing genealogy, and assure their power or dignity by tomb of their progenitor or ancestrial rites in palace. The descendent of Hyeok'geo'se had secured their authority by ancestrial rites on their progenitor, Hyeok'geo'se, and existence of Royal Tomb of Hyeok'geo'se. Therefore, existence of Hyeok'geo'se was sacred to Silla people from Early Silla History. Professor Lee Byung-Do's question related to existence of the Silla Kings genealogy proves that he did not understand history of Silla. Victimized Korean history by Korean Ethnic Extermination Policy during Imperial Japan, scarred history of Silla, and erased Hyeok'geo'se should be restored, and Korean origin research should be restarted. This article will be the starting point.

          • 북한의 고대사 연구 동향

            이영화(Lee Young-Hwa)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한국고대사탐구 Vol.3 No.-

            본고는 북한에서 발간된 각종 학술지에 실린 고대사 논문을 추출하여 해방 후 60여 년 동안 북한 고대사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 역사학 내에서의 고대사 편제 방식과 각 학술지의 간행 연혁과 현황을 북한의 정치 변동과 관련하여 살펴본 후, 1,354편의 고대사 논문을 시대별ㆍ국가별로 분류하여 전체적 경향성을 분석하였다. 북한의 역사 논문 중 고대사 논문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북한 역사학이 가장 주력한 분야가 고대사이고, 고대사 논문 중에서는 고고학 논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북한의 고대사 연구가 문헌보다는 유물ㆍ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별로는 고대사 논문 편수가 高句麗, 古朝鮮, 渤海의 순으로 나타났고, 시기로는 1980년대 후반 이후에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의 계승 체계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권력 변동에 따라 몇 차례 파동을 겪었다. 1950년대 후반의 반종파투쟁, 1960년대 후반의 5.25교시, 1990년대의 檀君陵 발굴 등은 그때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 방향을 변화시켰다. 정권 초기에는 唯物史觀에 입각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는 진통을 겪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주체사상'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거쳤고, 1990년대 이래는 ‘民族主義'로 고대사 체계를 재편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단군릉 발굴 이후 ‘大同江文化論'을 주장하고 결국 ‘김일성 민족론'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북한 고대사가 유물사관을 넘어 민족주의 일변도로 재구성되는 과정이었다. This research is analysis of papers of North Korea s ancient history published after liberation 1945. To this end, composition of the University, laboratory organization, and the Institute's organization in North Korea are analyzed. Especially noteworthy, research trends of North Korea's ancient history has closely associated with political change of North Korea. The study most focused on North Korea is ancient history. In addition, the center of North Korea's ancient history is an archaeologist. Research of the artifacts remains is even more important than literary research. Looking at the statistics of papers of ancient history, Goguryeo was the most research, the next Gojoseon, followed by the Bolhae was studied. The direction of study of ancient history has changed several times becau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Juche idea. Initially, the materialism to clean up the ancient history had experienced pain, since the late 1950s, the Juche idea was to reconstruct ancient history. Dangunneng case of 1993 shows the process of ancient history to be composed of nationalism. After Dangunneng excavation, Taedonggang area was extensively excavated, and argued Taedonggangmunhwalon. So-called Taedonggangmunhwalon, Taedonggang area is the cradle of civilization and the oldest civilization.

          • KCI등재

            『通典』의 한국고대사 인식과 杜佑의 중화사상

            송영대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한국고대사탐구 Vol.35 No.-

            China insisted a theory of Four Commanderies recovery since Shu(隋) dynasty. It became the main reason for the expedition to Goguryeo(高句麗). They claimed that Lelang(樂浪) and Xuantu(玄菟) which originally belonged to Han(漢) should be restored. This perception later became a framework to look at the entire ancient Korean nations. What had been previously mentioned in discussion among the ruler and officials reached the level of being systematically organized in ≪Tongdian(通典)≫ written in the middle of Tang(唐) period. This study explores ≪Tongdian≫ to examine how China's perception of ancient Korean nations emerged. The external conception and political climate of that time are also considered. <Province and district Section(州郡門)> in ≪Tongdian≫ deals with China's territorial change. In the context, Lelang and Xuantu are treated as their own territory. Duyou(杜佑) considered the territories of the Former and Later Han(後漢) as Tang's domain. Then, he states that it became the land of Dong-yi(東夷) at the time of writing. On the one hand, <Frontier Defense Section(邊防門)> addresses several countries ranging from Gojoseon(古朝鮮) to Three Kingdoms(三國). In particular, Goguryeo and Silla(新羅) are stated in relation to Lelang or Xuantu. Emphasizing a connection with China, it delivered a message to form a perception that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originated from the Chinese territory, by extension, established by Chinese. Traditionally, China had the external conception based on Sinocentrism. In this context, barbarians are needed to be ruled or edified by them. However, Tang became unable to dominate surroundings due to "Anlushan Rebellion(安史之亂)". Moreover, Tang was losing ground. Duyou sought to diverge from the existing hegemony and continue the glory of China by emphasizing their cultural superiority. In this process, a future plan to claim the right for territory of Dong-yi after restoration of national power was formed and it was presented in ≪Tongdian≫. The book became a must-read for the officials afterwards. Furthermore, its perception of ancient Korean nations formed a framework for ancient Korean history which influences later generations. 중국에서는 隋代부터 漢四郡의 영역을 회복해야 한다는 郡縣回復論이 제창되었다. 이는 漢代의 樂浪과 玄菟가 본래 중국의 땅이었으니 회복해야한다는 주장으로, 고구려 원정의 주요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한국 고대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틀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존에는 君臣의 논의에서 거론되었던 것이, 唐代 중반에 작성된 『通典』에서는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논문에서는 『通典』의 내용 분석을 통하여 중국의 한국 고대 국가 인식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당대의 현실 및 對外觀과도 연계하여 고찰하는 작업을 하였다. 『通典』의 「州郡門」은 중국의 역대 疆域 변천을 다룬 것으로, 여기에서 낙랑과 현도는 중국의 고유 영토인 것처럼 다뤄진다. 특히 杜佑는 前漢과 後漢의 영토를 唐의 영토 기준으로 삼으면서, 서술 당시 시점에는 東夷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다. 「邊防門」에서는 고조선부터 삼국에 이르는 국가들을 다루었으며, 이 중에서 고구려와 신라 등에 대한 기록에서 낙랑이나 현도와의 연관성을 거론하였다. 두우는 중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고대 국가들이 본래 중국의 영역 혹은 중국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대외관을 가져, 주변의 夷狄을 힘으로 복속시키거나 敎化시켜야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당은 安史의 亂을 계기로 주변 지역 제압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도리어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두우는 기존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서,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중화의 영광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후 국력 회복 이후 동이 지역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관념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通典』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후 『通典』은 역대 관리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通典』의 한국 고대 국가에 대한 인식은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틀이 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KCI등재

            부정을 부정한다 -신라사를 다시 쓰기 위한 기초작업-

            이종욱(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한국고대사탐구 Vol.32 No.-

            이 글은 『삼국사기』「신라본기」와 『화랑세기』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신라본기」와 『화랑세기』를 자료로 삼아 신라 건국 전후 시기부터 681년까지 역사를 제로베이스에서 전면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같은 작업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을 찾아야 한다. 현재 한국인 중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씨족의 시조는 한국 사학이 지난 100년 동안 부정해온『삼국사기』「신라본기」의 건국신화를 비롯한 초기기록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을 찾는 작업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잘못 만들어진 신라사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전개되고 있는 세 가지 부정을 부정하였다. 첫째, 지난 100년 동안 전개된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왕(재위 356~402) 전후까지 기록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였다. 이는 1919년 일본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시작했고, 이후 연구자들도 이어받아 지금까지 한국사의 공식(통설)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삼국사기』「신라본기」 내물왕 전후까지 기록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여 그 시기 신라 역사와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도 찾고자 하였다. 둘째, 1980년대 말부터 그들 중 3~4세대 연구자와 그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소위 부체제설을 부정하였다. 부체제설은 내물왕부터 시작되어 530년대에 해체되었다는 시기 신라의 왕들이 왕경 6部중 한 부의 部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왕 이전 기록을 부정하였기에 나온 것이 부체제설이다. 혁거세가 서라벌6촌을 통합하여 서라벌 소국을 형성했을 때부터 신라의 왕을 배출한 宗姓세력은 신라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이지, 6부의 세력인 적이 없었다. 신라 六部姓을 가진 세력이 왕경 6부의 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이에 부체제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난『화랑세기』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였다.『화랑세기』는 540년에서 681년까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삼국유사』 같은 책으로 만들어낸 신라사의 골격이 갖는 한계를 보충해 주는 자료이다. 따라서『화랑세기』를 부정하게 버려둠으로써 540년에서 681년까지 신라의 역사, 특히 신라의 다양한 면에 대한 역사가 은폐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한국사학은 1919년부터 이어져 온 『삼국사기』「신라본기」부정을 부정하고, 『화랑세기』에 대한 부정도 부정하여 신라사의 뼈와 살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지난 100년 동안 날조되고 은폐되고 왜곡된 신라사를 청산하고 제로베이스에서 중 · 고등학교 교과서의 신라사 부분까지도 다시 써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우리가 신라사에 대해 올바른 역사지식을 알게 되고,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제대로 된 역사의식도 갖게 되기를 바란다.

          • KCI등재

            해방 직후 한국사 교과서 발행과 삼국 통일에 관한 서술 검토

            김상훈(Kim, Sang-hoo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한국고대사탐구 Vol.29 No.-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에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동시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남한에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정은 역사·지리·공민을 통합한 사회생활과를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하였고, 교육을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교육과정에서 과목 명칭만 사회생활과로 바뀌었을 뿐 역사·지리·공민은 여전히 분리되어 운영되었고, 한국사·동양사·서양사 교과서는 각각 편찬되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발행된 한국사 교재와 교과서는 대부분 민족을 주체로 민족의 영광과 발전에 대해 서술하였다. 즉, 외형적 측면에서 한국사를 사회생활과에 포함시키는 것은 성공하였지만, 사회생활과를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인들이 한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삼국 통일에 대한 인식은 삼국 통일에 대한 교과서 서술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 교과서의 삼국 통일에 대한 서술이 해방 직후 발행된 한국사 교과서에서 대부분 등장하고 있다. 즉, 해방 이후 지금까지 삼국 통일에 대한 평가가 거의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 통일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때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대전제에서 벗어나 삼국을 각각 독립된 국가로 인식해야한다. 만들어진 민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던 고대국가로 삼국을 바라볼 때, 신라의 삼국 통일도 그에 부합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there was the social demand for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nation state in the Korean peninsula. At the same time, U.S. Military Government in South Korea had the intention of preventing the spread of communism and establishing an American democratic nation in South Korea.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troduced Social Studies into which History, Geography, and Kongmin were incorporated to elementary and secondary school curriculum, and tried to employ education as an important means to establish an American democratic nation in South Korea. However, although the subject name changed to Social Studies, History, Geography, and Kongmin were still taught separately and Korean History, East-Asian History, and World History textbooks were published individually. As a whole, textbooks and teaching materials published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described the nation"s glory and prosperity. focusing on nation as a subject matter. That is, on the formal aspect, it was successful to the extent that Korean History was included in Social Studies, but the educational polic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to build an American democratic nation in South Korea was not realized. Korean History textbooks are important norms for Koreans to observe and understand their history. Consequently, it is no doubt that the description of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should have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perception of Koreans. The description of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in current Korean History textbooks can be seen in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published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hat means the historical evaluation about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has been rarely changed since the Liberation of Korea up until now. Now is the time to see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in a new light with new perspectives and interpretations. Departing from the premise that Goguryeo, Baekje, and Silla are the same nations, the Three Kingdoms should be recognized as individual independent countries. When Three Kingdoms are seen not from the perspective of "manufactured" concept of nations, but from the perspective of ancient countries which existed as a historical fact, the Silla"s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has its own significance according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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