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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학파가 만든 '민족사'에서 우리를 만든 '한국사'로

          李鍾旭(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한국고대사탐구 Vol.1 No.-

          우리들이 한국고대사탐구학회를 만들어 학술발표회를 갖고 『한국고대사탐구』라는 학술지를 발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제시대 관학파 사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을 계승한 후식민사학자들은 해방 후 '민족'과 '실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단군을 정통으로 하는 '민족사'를 발명해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의 상당 부분을 말살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단군조선을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규정한 손진태는 고구려의 역사를 민족사의 영광으로 칭송하였고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를 민족사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민족사 서술 경향은 별다른 비판 없이 현행 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관학파 후식민사학자들이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의도적으로 조작해낸 민족사는 '한국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한국사는 민족사와는 별개로 인식되어야 한다. 관학파가 말하는 민족이란 '민족공조'와는 무관하며 사실상 '種族'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들은 nation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 우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종족을 민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현대의 한국인이 자신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성씨와 문회유산을 물려준 역사 속 국가들을 추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사는 마땅히 조선→고려→대신라→삼국시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시작한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ㆍ한국인의 오리진은 한국사와 단절된 고조선ㆍ고구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가 철저히 침묵시켜왔던 내물왕 이전의 신라사에 있다. 이제부터 민족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삼국사기』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인정하고 재구성하려는 〈모델 3〉의 세상을 활짝 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There is a reason that we founded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Korean History, publishing our academic journal. Following the methodology of national school historians (Gwanhakpa)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ost-colonization historians invented "the national history" arguing for the legitimacy of Tan-gun, based on nationalism and positivism, since the Liberation of 1945. Furthermore, they completely denied the initial records of Samguksagi,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erasing the substantial portion of Korean history. In particular, Son Jin-tae, who describes Tan-gun Chosun as the beginning of the national history, praised the history of Goguryo with the glory of the national history, denouncing the history of Shilla which unified the Korean peninsula in alliance with T'ang as the disgrace of the national history. This kind of historiography based on Korean nationalism has long been continued without any criticism, and even the Korean official textbook has followed this tendency. The 'national history' fabricated by the post-colonization historians in the name of positivism, however, is totally different from Korean history. In Gwanhakpa's explanation, 'Minjok' does not mean a nation, but rather a 'race' - they fell into an error to categorize all races which have existed in Korean history as 'Korean nation.' If a Korean wants to trace his/her origin, he/she should chase the history of countries which have left the largest number of Korean family names and cultural heritages to the Korean society. In this context, we can find the beginning of Korean history from the Shilla at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We should trace the origin of Korea and Korean people, therefore, in the history of Shilla ascending to the reign of King Naemul, which has been forced to remain silent by the national history, not in the history of the Kochosun - Goguryo separated from the Korean history. Now we propose a brand new research model, "Model 3": we aim to reconstruct the early part of Samguksagi arguing for its authenticity, beyond the scope of the national history.

        • KCI등재

          이기백의 한국사상사연구와 왕권

          김수태(Kim, Soo-tae)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7 한국고대사탐구 Vol.27 No.-

          한국의 현대사학에서 이기백은 이병도와 손진태가 관심을 가졌던 사상사연구의 장점을 통합하면서, 그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까지 발전시킨 역사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사 관련 저술들이나, 그가 모색한 사상사연구방법론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기백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상사의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도 관련을 지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그는 그러한 현실적 관심을 학문적 관심으로 승화시켜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한국 고대의 불교사만이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유교사 및 도교사로까지도 그의 관심을 넓혀나갔다. 더 나아가 원시신앙으로, 풍수지리설 등으로까지 크게 확대시켰다. 이제 그는 원시사회부터 고려 초까지의 한국사상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기백은 사상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주장하였다. 즉 그는 사상을 인간과 시대와 사회와 연결시켜서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단순히 어떤 사상의 교리적 측면을 다루는 것을 사상사연구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신라사상사연구』를 중심으로 이기백의 사상사연구와 왕권의 상호관련성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사연구에서 왕권은 사상과 인간의 관련성에서나, 개별 사상의 사회적 성격이나, 사상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관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상사를 서술하는데 왕권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이기백의 한국사상사연구를 바라본다는 것은 한국 고대사상사의 연구사에 새로운 도움을 주는 시도로 생각한다. In Korean contemporary history, Lee Ki-baek can be said to be a historian who integrated strengths of Lee Byeong-do and Son Jin-tae’s study on history of thought and took it to higher level. Lee’s voluminous work and his efforts in finding adequate methodology about history of thought prove this well. Through grasping the flow of history of Korean thought from ancient times to modern era, Lee Ki-baek tried to associate this with problems that our people are currently facing. Thereupon, he strived to sublimate such practical concerns into a scholarly interest. In this, he did not limit his attention to history of ancient Korean Buddhism. He broadened his interest to history of Confucianism and Taoism. Furthermore, he enlarged his research objects to encompass primitive beliefs and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Through this, he was able to systematically organize the flow of history of Korean thought from primitive society to early Goryeo dynasty. Moreover, Lee made clear arguments about how methodology of study on history of thought should be. That is, he argued that thought should be understood in the historical context that connects human, era and society altogether. In other words, he believed that only dealing with doctrinal perspective of certain thought can not be said to be a sincere method of study on history of thought. This paper analyzes correlation of Lee Ki-baek’s study on history of thought and royal authority in 『Study on history of Silla thought』. In his study on history of thought, concept of royal authority works as a useful perspective in understanding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human, social nature of individual thoughts and the flow of history of thought. Above all, the term royal authority can be frequently found in narrating history of thought. Therefore, looking at Lee Ki-baek’s study on history of Korean thought from this perspective can be a useful attempt to study on history of ancient Korean thought.

        • KCI등재

          『魏略』 韓傳의 특징과 『三國志』·『三國史記』와의 관계

          김남중(Kim, Nam-Jung)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한국고대사탐구 Vol.28 No.-

          『한원』 삼한전의 注文에는 독특한 특징이 보이는데, 진한에 대한 내용은 주로 『위략』을 인용하고 있지만 마한에 대한 내용은 『후한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략』 한전이 진한에 많은 비중을 두어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략』 한전은 진한 위주로 기술되었다. 『삼국지』 한전은 『위략』의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진한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묘사하고 있다. 『위략』에서는 진한을 중국과 이질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삼국지』에서는 진한이 秦人・낙랑과 관련이 있으며 예의가 있는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지』가 기술되기 훨씬 이전에 낙랑 지역 주민의 진한으로의 이주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위략』 한전에 인용된 진한 기사의 채록 시기를 다루었다. 『위략』에는 진한인 염사착이 地皇연간(기원후 20~22)에 낙랑군과 교섭한 내용이 실려 있다. 『위략』 한전은 진한인 염사착을 통해 얻은 자료가 기초가 된 것으로, 1세기 초를 배경으로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위략』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을 비교해보면 내용상 별 차이가 없다. 즉 두 사서에 나타난 진한(신라)수장의 대외적 위상은 다르지 않았다. 또한 『위략』에서 진한의 왕이 마한인이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마한과 관련 있는 고조선 세력이 진한(신라)의 왕이 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14년(기원후 37)에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국 주민 5천 명이 신라로 망명해 왔음을 전하는데, 이것은 『위략』의 삼한에 대한 원 자료와 『삼국지』 기사 사이의 변화를 설명해 준다. 이상의 내용은 1세기 이전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가 중국 사서의 기록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박씨왕 초기 기록부터 어느 정도 신뢰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The annotation of Hanwon Samhan-Jeon has something unique, it is that the contents for Jinhan mainly are cited in Yilyag, but the contents for Mahan are quoted in Huhanseo. This is because Yilyag Han-Jeon has been described with much emphasis on Jinhan. In other words, Yilyag Han-Jeon was mainly written about Jinhan. Samgugji Han-Jeon contains many contents of Yilyag, but description of Jinhan is the opposite. In Yilyag, Jinhan is described as a heterogeneous society with china, while in Samgugji, Jinhan people are associated with Qin people & Nakrang, and portray Jinhan as a country that knows courtesy. This means that the local residents of Nakrang area migrated to Jinhan long before Samgugji was written. Next, I dealt with the selecting time of the Jinhan records cited in Yilyag Han-Jeon. Yilyag contains records that Jinhan people yeomsachag had negotiated with Lelang county at Dihuang time(A.D. 20~22). Yilyag Han-Jeon is written on the basis of data obtained through yeomsachag, it can be said to be based on the beginning of the first century. Comparing Yilyag with Samgugsagi Silla-Bongi, which contains the events at the first century, there is no difference in content. In other words, the external status of Jinhan(Silla)’s king which appeared in the two texts was not different. The Yilyag also says that the king of Jinhan was a Mahan person, which seems to reflect the fact that a person from Old Joseon related to Mahan became Jinhan(Silla)’s king. Samgugsagi tells us that 5,000 Nakrang state residents who lost their country due to the invasion of Gogulyeo in the 14th year of Yuli-Isageum(A.D. 37) had been exiled to Silla, this explains the change between Yilyag’s original source for Samhan and the Samgugji article. These conclusions imply that the records of Samgugsagi Silla-Bongi before the first century are not far from the records of the chinese history books. This means that Samgugsagi Silla-Bongi records from initial period of kings with Park(朴)’s family name are can be trusted somewhat.

        • KCI등재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중·고등학생들의 의식과『국사』교과서의 관계

          金相勳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0 한국고대사탐구 Vol.5 No.-

          본고는 서강대 대학원에서 “한국·한국인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수업에서 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재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이고, 한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고대 국가는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2009년 3월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였다. 설문 결과 학생들 중 78%가 한국인의 조상은 단군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고대 국가는 고구려라고 생각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왜 학생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초·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검토해봄으로써 밝혀보고자 하였다. 검토 결과,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모두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며 단군신화를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로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서술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단군을 시조로 생각하고,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고대 국가는 고구려라고 답한 이유 중 하나는 ??국사?? 교과서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한국에는 단군을 시조로 한 성씨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도 극히 드물다. 반면 넓게 보아 신라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성씨가 전체 인구의 57.8% 정도이다. 결국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학생들의 의식은 그들 자신의 성씨 기원과는 달리 초·중·고등학교에서 역사 교과서 학습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설문 결과를 통해 국정교과서 ??국사??를 통해 만들어진 학생들의 한국인에 대한 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study started from a class in Sogang University graduate school and its topic is about “the origin of Korea/Korean”. In this class I came up with an idea of what the Korean high school students think of who is the ancestor of the Korean and which ancient kingdom has the most important influence on the present Korea. To survey this, I gave them some questionnaire which is targeting the first and second graders in high school during March 2009. After survey, I found out that 78% of the students consider the ancestor of the Korean as DanGun and also regard Goguryeo as the most influential ancient kingdom. Through this survey and the results, I tried to get the reasons why high school students think like that by reviewing the government-published textbooks ??National history: GugSa(國史)?? used in the elementary, middle and high schools. Having reviewing them, I finally found out that all those textbooks have it that the progenitor of the Korean is DanGun, the first nation in the Korean history is Gojoseon, and the myth of DanGun is the birth myth of a nation of the Korean. Also the textbooks describe that Gojoseon is succeeded by Goguryeo, Balhae and Goryeo. Therethrough, it is strongly assumed that the main reason the students answered like that is the textbook ??National history: GugSa(國史)??. In contrary to the students’ consciousness about the origin of the Korean, however, it is well known that there isn’t any surname originating from DanGun or starting from Goguryeo while 57.8% of the surnames of Koreans is from those originating from Silla dynasty. In result, it is assumed that the students’ consciousness about the origin of the Korean is not related to their own surname’s origin but has been formed by the textbooks they have been studying. Above all, through this survey, it can be pointed that the consciousness of the students formed by the textbook ??National history: GugSa(國史)?? will not be changed easily even in the future.

        • 佛敎經典의 사상이 한국 傳統信仰에 끼친 영향

          金德原(Kim, Deok-wo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2 한국고대사탐구 Vol.12 No.-

          천신(태양)사상, 산신사상, 수신(용)사상은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숭배되어 오던 것과 불교가 발생한 이후에는 불교에 수용되면서 변화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인도 고대사회의 전통신앙과 불교와의 習合過程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원시종교인 전통신앙이 불교라는 고등종교에 의해서 수용되었지만, 불교경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전부터 신앙되었던 전통신앙의 遺俗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한국 고대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 고대사회에서도 천신(태양)사상, 산신사상, 수신(용)사상이 존재하였으며, 이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신앙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상호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천신은 불교의 帝釋天으로, 산신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 안의 山神閣 등으로 나타나고, 수신 즉 農業神의 성격을 갖고 있는 용은 護法龍·護國龍으로 변화하였다. Thoughts of Heavenly God(Sun), Mountain God, Water God(Dragon) have been changed as they were accepted to what had been worshiped since pre-historic age before the rise of Buddhism and Buddhism when Buddhism came into existence. This can be said to be the combination of India’s ancient traditional faith and Buddhism, and ancient religion, traditional faith was accepted to a high class religion called Buddhism, but that the traces are left at the Buddhist scripture can be said to the result of hereditary customs which have been faith before. In Korea’s ancient society before Buddhism was introduced, Thoughts of Heavenly God(Sun), Mountain God, Water God(Dragon) existed, which were closely connected and become faith. However, it changed through a combination process as Buddhism was handed down. In other words, Heavenly God(Sun) changed to Sakra dev?n?m Indra(Sans). in Buddhism, Mountain God changed to mountain god tower in a temple with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and Water God(Dragon), that is a dragon as a farming god changed as that for the defense of a nation and a religion. But what matters was that traditional faith was not unilaterally accepted the process of traditional faith was combined with shaman and Buddhism, but naturalized forming a close relation in the process of compromise and co-existence. This fact can be properly said to be a universal phase common in other regions and other religions as well as Korea’s ancient society.

        • 『韓紅葉』과 일본인들의 한국문화 인식과정 검토

          車順喆(Cha Soon-Chul)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2 한국고대사탐구 Vol.11 No.-

          『한홍엽』은 세키노 타다시를 비롯하여 당시 한국고적조사를 담당했던 야쓰이 세이이치, 쿠리야마 이치 등이 한국의 문화유적을 조사하고 느낀 여러 가지 생각을 강연한 내용을 활자화한 것으로,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생각이 들어나 있다. 세키노 타다시는 『한홍엽』에서 한국미술사의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서 한국 문화가 역동적이기보다는 타율성에 지배를 받았고, 한국 고유문화의 빈곤함을 바로 쇠락한 문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결국, 이 책을 통해서 일본 연구자들이 고적조사를 진행하면서 가졌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역사관을 고착화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노가 한국 문화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중국의 여러 왕조와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영향관계를 살핀 모습은 결국 중국미술과의 교류관계를 중심에 둔 채, 동아시아 문화사를 바라보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결국 『한홍엽』에 나타난 세키노의 인식은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을 중국보다는 일본과 연계시키면서 그 동질성을 찾은 데에서 그 의미가 있으며, 이후 한국 미술사에서 통일신라미술을 황금기로 강조하던 모습의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Hanhongyeop” is the printed version of lectures given to the general public by three people: Sekino Tadashi, Yaiichi Seiichi, and Kuriyama Shunichi on what they felt during the survey of historical remains of Korea. This book contains 3 pieces of writings that show the thoughts of Japanese researchers about Korean cultural assets. Sekino Tadashi attempted to divide Korean art history into different periods through “Hanhongyeop”. He saw Korean culture as the culture dominated by heteronomy rather than as a dynamic culture and saw the lack of unique Korean culture as the symbol of decaying civilization. Japanese researchers ultimately attempted to perpetuate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upon Korean people based on imperialism through this book. Sekino Tadashi divided the history of Korean culture into prehistorical era and historial era and examined the influence of various dynasties of China in each period. He found Korean and Japanese cultures through the exchange with China, and this indicates the view of the researchers that studied East Asian culture then. Eventually, Sekino Tadashi’s idea that appears in “Hanhongyeop” finds homogeneity by associating the origin of ancient Korean culture with Japan rather than China and this is the reason he emphasized the art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as the golden age in the Kore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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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典』의 한국고대사 인식과 杜佑의 중화사상

          송영대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한국고대사탐구 Vol.35 No.-

          China insisted a theory of Four Commanderies recovery since Shu(隋) dynasty. It became the main reason for the expedition to Goguryeo(高句麗). They claimed that Lelang(樂浪) and Xuantu(玄菟) which originally belonged to Han(漢) should be restored. This perception later became a framework to look at the entire ancient Korean nations. What had been previously mentioned in discussion among the ruler and officials reached the level of being systematically organized in ≪Tongdian(通典)≫ written in the middle of Tang(唐) period. This study explores ≪Tongdian≫ to examine how China's perception of ancient Korean nations emerged. The external conception and political climate of that time are also considered. <Province and district Section(州郡門)> in ≪Tongdian≫ deals with China's territorial change. In the context, Lelang and Xuantu are treated as their own territory. Duyou(杜佑) considered the territories of the Former and Later Han(後漢) as Tang's domain. Then, he states that it became the land of Dong-yi(東夷) at the time of writing. On the one hand, <Frontier Defense Section(邊防門)> addresses several countries ranging from Gojoseon(古朝鮮) to Three Kingdoms(三國). In particular, Goguryeo and Silla(新羅) are stated in relation to Lelang or Xuantu. Emphasizing a connection with China, it delivered a message to form a perception that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originated from the Chinese territory, by extension, established by Chinese. Traditionally, China had the external conception based on Sinocentrism. In this context, barbarians are needed to be ruled or edified by them. However, Tang became unable to dominate surroundings due to "Anlushan Rebellion(安史之亂)". Moreover, Tang was losing ground. Duyou sought to diverge from the existing hegemony and continue the glory of China by emphasizing their cultural superiority. In this process, a future plan to claim the right for territory of Dong-yi after restoration of national power was formed and it was presented in ≪Tongdian≫. The book became a must-read for the officials afterwards. Furthermore, its perception of ancient Korean nations formed a framework for ancient Korean history which influences later generations. 중국에서는 隋代부터 漢四郡의 영역을 회복해야 한다는 郡縣回復論이 제창되었다. 이는 漢代의 樂浪과 玄菟가 본래 중국의 땅이었으니 회복해야한다는 주장으로, 고구려 원정의 주요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한국 고대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틀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존에는 君臣의 논의에서 거론되었던 것이, 唐代 중반에 작성된 『通典』에서는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논문에서는 『通典』의 내용 분석을 통하여 중국의 한국 고대 국가 인식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당대의 현실 및 對外觀과도 연계하여 고찰하는 작업을 하였다. 『通典』의 「州郡門」은 중국의 역대 疆域 변천을 다룬 것으로, 여기에서 낙랑과 현도는 중국의 고유 영토인 것처럼 다뤄진다. 특히 杜佑는 前漢과 後漢의 영토를 唐의 영토 기준으로 삼으면서, 서술 당시 시점에는 東夷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다. 「邊防門」에서는 고조선부터 삼국에 이르는 국가들을 다루었으며, 이 중에서 고구려와 신라 등에 대한 기록에서 낙랑이나 현도와의 연관성을 거론하였다. 두우는 중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고대 국가들이 본래 중국의 영역 혹은 중국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대외관을 가져, 주변의 夷狄을 힘으로 복속시키거나 敎化시켜야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당은 安史의 亂을 계기로 주변 지역 제압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도리어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두우는 기존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서,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중화의 영광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후 국력 회복 이후 동이 지역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관념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通典』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후 『通典』은 역대 관리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通典』의 한국 고대 국가에 대한 인식은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틀이 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KCI등재

          부정을 부정한다 -신라사를 다시 쓰기 위한 기초작업-

          이종욱(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한국고대사탐구 Vol.32 No.-

          이 글은 『삼국사기』「신라본기」와 『화랑세기』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신라본기」와 『화랑세기』를 자료로 삼아 신라 건국 전후 시기부터 681년까지 역사를 제로베이스에서 전면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같은 작업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을 찾아야 한다. 현재 한국인 중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씨족의 시조는 한국 사학이 지난 100년 동안 부정해온『삼국사기』「신라본기」의 건국신화를 비롯한 초기기록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을 찾는 작업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잘못 만들어진 신라사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전개되고 있는 세 가지 부정을 부정하였다. 첫째, 지난 100년 동안 전개된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왕(재위 356~402) 전후까지 기록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였다. 이는 1919년 일본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시작했고, 이후 연구자들도 이어받아 지금까지 한국사의 공식(통설)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삼국사기』「신라본기」 내물왕 전후까지 기록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여 그 시기 신라 역사와 한국인의 정체성의 원점도 찾고자 하였다. 둘째, 1980년대 말부터 그들 중 3~4세대 연구자와 그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소위 부체제설을 부정하였다. 부체제설은 내물왕부터 시작되어 530년대에 해체되었다는 시기 신라의 왕들이 왕경 6部중 한 부의 部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왕 이전 기록을 부정하였기에 나온 것이 부체제설이다. 혁거세가 서라벌6촌을 통합하여 서라벌 소국을 형성했을 때부터 신라의 왕을 배출한 宗姓세력은 신라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이지, 6부의 세력인 적이 없었다. 신라 六部姓을 가진 세력이 왕경 6부의 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이에 부체제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난『화랑세기』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였다.『화랑세기』는 540년에서 681년까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삼국유사』 같은 책으로 만들어낸 신라사의 골격이 갖는 한계를 보충해 주는 자료이다. 따라서『화랑세기』를 부정하게 버려둠으로써 540년에서 681년까지 신라의 역사, 특히 신라의 다양한 면에 대한 역사가 은폐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한국사학은 1919년부터 이어져 온 『삼국사기』「신라본기」부정을 부정하고, 『화랑세기』에 대한 부정도 부정하여 신라사의 뼈와 살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지난 100년 동안 날조되고 은폐되고 왜곡된 신라사를 청산하고 제로베이스에서 중 · 고등학교 교과서의 신라사 부분까지도 다시 써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우리가 신라사에 대해 올바른 역사지식을 알게 되고,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제대로 된 역사의식도 갖게 되기를 바란다.

        • 북한의 고대사 연구 동향

          이영화(Lee Young-Hwa)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한국고대사탐구 Vol.3 No.-

          본고는 북한에서 발간된 각종 학술지에 실린 고대사 논문을 추출하여 해방 후 60여 년 동안 북한 고대사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 역사학 내에서의 고대사 편제 방식과 각 학술지의 간행 연혁과 현황을 북한의 정치 변동과 관련하여 살펴본 후, 1,354편의 고대사 논문을 시대별ㆍ국가별로 분류하여 전체적 경향성을 분석하였다. 북한의 역사 논문 중 고대사 논문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북한 역사학이 가장 주력한 분야가 고대사이고, 고대사 논문 중에서는 고고학 논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북한의 고대사 연구가 문헌보다는 유물ㆍ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별로는 고대사 논문 편수가 高句麗, 古朝鮮, 渤海의 순으로 나타났고, 시기로는 1980년대 후반 이후에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의 계승 체계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권력 변동에 따라 몇 차례 파동을 겪었다. 1950년대 후반의 반종파투쟁, 1960년대 후반의 5.25교시, 1990년대의 檀君陵 발굴 등은 그때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 방향을 변화시켰다. 정권 초기에는 唯物史觀에 입각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는 진통을 겪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주체사상’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거쳤고, 1990년대 이래는 ‘民族主義’로 고대사 체계를 재편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단군릉 발굴 이후 ‘大同江文化論’을 주장하고 결국 ‘김일성 민족론’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북한 고대사가 유물사관을 넘어 민족주의 일변도로 재구성되는 과정이었다. This research is analysis of papers of North Korea s ancient history published after liberation 1945. To this end, composition of the University, laboratory organization, and the Institute's organization in North Korea are analyzed. Especially noteworthy, research trends of North Korea's ancient history has closely associated with political change of North Korea. The study most focused on North Korea is ancient history. In addition, the center of North Korea's ancient history is an archaeologist. Research of the artifacts remains is even more important than literary research. Looking at the statistics of papers of ancient history, Goguryeo was the most research, the next Gojoseon, followed by the Bolhae was studied. The direction of study of ancient history has changed several times becau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Juche idea. Initially, the materialism to clean up the ancient history had experienced pain, since the late 1950s, the Juche idea was to reconstruct ancient history. Dangunneng case of 1993 shows the process of ancient history to be composed of nationalism. After Dangunneng excavation, Taedonggang area was extensively excavated, and argued Taedonggangmunhwalon. So-called Taedonggangmunhwalon, Taedonggang area is the cradle of civilization and the oldest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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