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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3년 癸未通信使 使行文學의 서술방식 비교연구 : 崔天宗 被殺事件을 중심으로

        이현주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5 국내석사

        RANK : 248703

        본 논문은 1763년(영조 39) 癸未使行 가운데 발생했던 崔天宗 被殺事件을 형상화하고 있는 사행문학 작품의 서술방식을 살펴 신분 및 직위가 반영된 문학적 특성을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건에 대한 기록의 서술양상은 兩國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조선통신사 사행원 간에도 동일한 인식과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최천종 피살사건은 신분 및 직위에 따라 서술 내용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서술 내용의 차이는 사행록 전체를 서술하는 방식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제2장에서는 최천종 피살사건 관련 자료를 정리하였다. 조선의 자료는 당대자료와 후대자료로 구분하고 일본의 자료는 공문서와 민간 기록으로 구분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최천종 피살사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데 창작된 사실을 객관적 사실로 인용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제3장에서는 신분과 직위에 따라 실제 사행경험인 최천종 피살사건을 어떻게 보았고, 그 시각이 서술방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비교하여 보았다. 이를 위하여 신분과 직위에 따라 최천종 피살사건을 기록한 사행문학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류는 士大夫의 사행일기에 해당하는 正使 趙?의 『海?日記』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庶孼의 사행일기와 사행가사에 해당하는 製述官 南玉의 『日觀記』, 正使書記 成大中의 『日本錄』, 副使書記 元重擧의 『乘?錄』, 從事官書記 金仁謙의 『日東壯遊歌』와 ?退石金仁謙所著東?錄所載崔天宗事?이었다. 그 중 최천종 피살사건을 가장 상세하게 서술한 元重擧의 『乘?錄』이 대표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여 그를 위주로 살펴보았다. 세 번째 부류는 技術職 中人의 사행일기에 해당하는 漢學譯官 吳大齡의 『溟?錄』이었다. 신분과 직위의 특수성은 일본이 밝힌 살해동기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최천종 피살사건을 통하여 조선통신사가 유사시에도 직위에 따라 효율적으로 정보 수집을 분담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자의 신분은 최천종 피살사건에서 특정 부류의 功過에 대한 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正使 趙?은 최천종 피살사건의 해결에 首譯의 功이 크다고 보았다. 반면 製述官과 書記는 首譯이 대마도인과 영합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최천종 피살사건에서도 首譯의 過가 크다고 보았다. 漢學譯官 吳大齡은 이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보류하였다. 여기에는 조선통신사 사행원 간 계급인식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얼 文士와 譯官의 계급적 마찰은 이 시기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분 인식의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행록의 저술 목적에도 신분과 직위의 특수성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최천종 피살사건 형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먼저 趙?의 『海?日記』는 개인적인 술회를 서술하는 것 외에도 공식적인 외교업무일지로서 저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는 『海?日記』에 기술한 것을 狀啓에 거의 그대로 활용한 데서 드러난다. 다음으로, 元重擧의 『乘?錄』은 개인적인 술회의 서술 외에 후대 사행에 전범이 되고자 하는 저술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저술 목적은 최천종 피살사건과 유사한 사건을 함께 기록하고 정치역학 관계 속에서 최천종 피살사건을 분석한 것으로 이어졌다. 현장감 있는 묘사 역시 특징적이다. 마지막으로, 吳大齡의 『溟?錄』은 개인적인 술회의 서술, 그 중에서도 일본 문화 체험 서술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성은 그가 논란이 될 만한 정치?외교적 사안에 대한 기술을 삼가는 서술방식으로 표출되었다. 吳大齡의 『溟?錄』은 연행 경험이 풍부한 漢學譯官의 조선통신사 사행문학 서술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상에서 최천종 피살사건 형상화를 중심으로 癸未通信使 使行文學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18세기 신분 인식의 단초를 조금이나마 확인하고 특정 작품에 집중되었던 조선통신사 사행문학 연구사를 일단이나마 보완하고자 한다.

      • 趙泰億의 使行文學 연구 : 對日觀을 중심으로

        조영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48702

        본 논문에서는 1711년 신묘사행의 정사 趙泰億(1675∼1728)의 사행문학을 통해 그의 대일관을 연구하였다. 1711년 신묘사행은 임란 이후 시작된 조선후기 통신사행에 있어서 시기적으로 중간에 놓인 사행이며, 회차로는 여덟 번째 사행이다. 조태억은 정사로 일본을 사행하며 그 체험을 개인문집인 『謙齋集』6, 7, 8권에「東?錄」으로 남겼다. 그러나 『겸재집』이 미간행 문집인데다가 「동사록」이 『海行摠載』에 실리지 못해 접근성이 떨어져 사행문학 연구에 있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의 사행문학이 여항 문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정사로서 일본을 사행한 조태억 연구는 사행문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조태억 개인을 조망한 연구는 없었으며, 대체로 막부의 집정관으로 통신사 접대를 담당한 新井白石와 관련된 연구에서 조태억이 거론되었다. 신묘사행은 이전 회차인 1682년 임술사행부터 조일 양국 간에 늘어나기 시작한 문화적 교류의 분위기를 타고 많은 교류의 흔적을 남긴 사행이다. 조태억도 이러한 문화 교류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었다. 제술관 1인, 서기 3인이라는 사문사 체제가 정립된 이 시기, 조태억은 정사였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시문 교류에 의무가 없었지만 그의 「동사록」에는 일본인들과 교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이 시들 중 일부는 일본에서 간행된 필담창화집 23종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서 일본인에게 보낸 서문과 贊, 銘이 『겸재집』내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에는 일본인과의 교류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태억의 선험적 인식과 일본 각 지역에서의 견문 및 술회가 드러나 있어 조태억의 대일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었다.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과 주변인들의 ?章을 통해 사행에 임하는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 사행을 새로운 유람으로 생각하고 기대했으며 주변인들도 일본의 자연 경관을 즐기고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두 번째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0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일본이 임진왜란의 주범국이라는 것에 적개심을 지니고 사행에 임했다. 일본이 전쟁의 원흉이라는 사실은 주변인들도 잊지 못하는 터였지만, 일본에 대해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과거보다 현재의 교린 상태를 중요시하여 和로써 대할 것을 당부하는 인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태억은 존화주의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하며 사행에 임했다. 조태억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지녔다. 기본적으로 조선을 오랑캐인 일본보다 우위에 두는 입장에서, 회유와 유화책으로 일본인을 대할 것을 당부하거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은 같은 것이라는 이해 아래 대등하게 대해야 함을 강조했다. 실제 일본을 체험하며 선험적 인식과 태도는 유지되거나 변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체험을 통한 조태억의 대일관이 형성되었다. 본고에서는 조태억의 대일관을 일본의 자연, 일본의 문물, 일본인에 대한 것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의 자연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기행시와 창화시를 막론하고 일본의 승경을 찬미하였으며, 자연을 우열논쟁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일본의 것이더라도 좋으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로 일본 문물의 장점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豊臣 가문을 무너트린 德川 가문의 위업을 높이는 것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해소한 후 일본의 번화와 좋은 점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일본의 우수한 풍속을 기록했으며 중국의 제도와 비교해 우월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서 교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新井白石을 만나 소통하면서 武國으로 인식했던 일본이 文을 향해 변화해가는 분위기를 느꼈고 중화로의 교화를 유도했다. 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도 시문을 보내어 文을 통해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은 당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이면서도 조태억이 속한 소론계의 일본 인식과 맥을 나란히 하는 것으로, 적개심과 이적관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태억이 실제 체험한 일본은 훌륭한 자연 경관을 지녔고 앞선 제도 등 좋은 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文에도 관심을 보이는 나라였다. 이에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던 조태억은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인정의 범위를 넓히고 그들에게 한 발짝 나아가 포용하려는 대일관을 보였다. 비록 중화주의나 화이관에서 탈피하거나 실학적 태도로 일본을 배우는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 대한 열린 자세는 선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대체로 위항 문사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정사였던 조태억도 문화교류의 일면을 차지했으며 대일관에 있어서도 상당히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태억 개인에게 있어서는 사대부로서 경직되지 않은 대일관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에 그의 사행문학 연구에 의의가 있다. 한편으로 사행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홍세태·신유한 및 여항의 문인들과 함께 사행문학이 심화를 이루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것에 조태억 사행문학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洪世泰의 使行文學 연구

        장진엽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48702

        본 연구의 목적은 洪世泰(1653-1725) 使行文學의 특징과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신분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여 홍세태 사행문학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통신사 문학의 흐름 속에서 그의 사행문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홍세태는 1682년 임술사행에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통신사 사행문학에 대한 종래의 연구에서는 홍세태를 역관 시인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가 역과에 합격한 중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세태는 이 시기에 역관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역관으로 활동한 적이 없다. 그는 일본에서 제술관 및 서기와 함께 學士로 인식되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따라서 그의 사행문학은 역관 문학이 아니라 제술관 및 서기 문학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임술사행은 안정된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朝日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광범위한 儒者 층이 형성되어 조선 문사들과의 필담창화에 대한 요구가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증가하였다. 이때 홍세태는 특별한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에 참가했지만 제술관과 함께 시문창화를 전담하는 후대의 서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비록 중인이었지만 후대의 서얼들이 주로 맡았던 서기라는 직책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홍세태는 아무런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에 참가한 것이므로 사행을 개인적 차원의 遠遊로 바라보는 태도가 있었다. 이는 홍세태 사행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특성이다. 작품의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풍광 묘사를 통해 기대와 포부를 표출하고 있다. 둘째, 일본의 자연과 풍속을 묘사할 때 평가를 배제하고 대상이 주는 흥취에 주목하고 있다. 셋째,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로 일본 문사들과 교유함으로써 양국 문사 간 교유의 이상적인 상을 형성하고 있다. 넷째, 그 시기에 이루어진 일본 한문학의 발전상을 포착하고 일본인의 한문학적 소양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임술사행은 양국 간 필담창화가 증대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하는 제술관 및 서기 문학의 성격이 확립된 시기이다. 홍세태의 사행문학은 임술사행 시기 통신사 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술관 및 서기 문학의 초기 형태를 제시한다는 의의가 있다.

      • 雨念齋 李鳳煥의 使行文學硏究 : 戊辰使行을 중심으로

        차홍석 성균관대학교 2015 국내석사

        RANK : 248685

        우념재 이봉환은 18세기 조선의 대표적 서얼 문인으로 무진 통신사행에 참여함으로써 당시 일본의 모습을 目前에서 체험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총 12차례의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통신사의 주체나 문화 교류의 내용 등 색채가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 18세기에 파견된 네 차례의 통신사행은 새로운 學知와 지식·정보의 유통, 인적·물적 교류를 바탕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새로운 소통을 만들어 낸 것으로 주목받는다. 18세기의 통신사행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것은 서얼이나 중인과 같은 중간계층으로, 특히 서얼 문인들은 통신사행에서 축적된 정보와 지식을 계승하며, 전문적인 위치를 점했다. 이 같은 배경 아래 이봉환은 뛰어난 文才와 동류 문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무진사행의 정사 서기로 참여할 수 있었고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정사 서기로 참여한 이봉환은 三使와 달리 외교일정이나 공식일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봉환이 남긴 시문수창의 주제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봉환은 무진통신사행의 기록들을 통해 당시 조선과 일본이 갖고 있었던 學知의 단상을 담아내고 있다. 예로부터 일본에 주자학을 중심으로 선진 문화를 시혜해왔다는 조선 문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이봉환으로 하여금 일본의 학술문화를 주자성리학의 틀에서 재단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일본 내부에서 발현되고 있었던 다양성과 고유성에 대한 고찰을 방해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荻生?徠에 의한 古文辭學이 번성하고 있었는데, 이봉환은 程朱學을 중심으로 배타적 입장을 견지한다, 일본에서 더 이상 조선의 程朱學이 존숭되고 있지 않음을 파악했던 이봉환은 복명 후에 이를 전달함으로써 조선에서 일본의 古學에 대한 심층적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程朱學을 바탕으로 한 이봉환의 자중심적 시각은 학술적 측면에서 강하게 드러내지만 일본의 예악과 문물, 복식 등과 관련한 교류에서는 일본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객관적이고 상대적으로 파악하려는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의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일본을 파악하려 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 문인들에게서도 조선의 문화를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고유의 문화에서 우수성을 찾으려했던 면들이 보이며, 조선과 일본 양측의 교류는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施惠와 受惠의 구도를 벗어난다. 이봉환에게 있어 통신사행이란 신분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文才와 文名을 떨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공간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새롭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봉환은 조선의 문인들에게 椒林體란 참신한 시체의 창시자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일찍이 일본 문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이었다. 또한 이봉환은 상승감과 이국에 대한 부러움, 자긍심,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다양한 감정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봉환은 무진통신사행을 통해 18세기 변모해갔던 조선과 일본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유로이 文才와 文名을 떨칠 수 있었던 기회를 통해 그간 억눌려왔던 서얼 문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내었다.

      • 海月軒 黃汝一의 銀槎錄 硏究

        권희선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8588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haracter of Haewolheon(海月軒), Hwan gyeo-il(黃汝一)‘s Eunsarok(銀槎錄). The record of envoy's travel is a literature on it that the envoy left after travel to Beijing. The institution of envoy's travel is operated basically by means of a document transfer, moreover an each envoy left various records according to their seeing and hearing in the foreign country. Eunsarok is the records of envoy's travel which Hwan gyeo-il wrote after visiting Ming Dynasty with aims on the dealing with an affair of false accusation. Since the envoy's travel was completed during the war time Eunsarok contains not only the resolution for fulfilment of their mission but sympathy for people and patriotic sentiments. Also, while Hwan gyeo-il visits Ming's historic sites, he expresses admiration for Mying Dynasty and a negative view of the history. Eunsarok, written at a transition period in which a poetical style was replaced with a diary stly, is composed of a mixed form of Chinese poem and a diary. The method of expression of Eunsarok as a form of diary style describes events in consecutive order. Meanwhile it also depicts things centered around the events in a logical order as well. Therefore it conveys authenticity and progress concerning the events more vividly. It might be said that Eunsarok's such an organizing way compared to the previous one has its high completeness in the form and content. The fact that the new method of organizing of Eunsarok is evaluated as a pioneer work at a later date in the records of envoy's travel is of great literary significance. Also, it can be a significant source of the decisive factors which brought about important changes in the relationship with Mying.

      • 조선후기 사행가사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

        김윤희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국내박사

        RANK : 232318

        본고는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연구함에 있어 내재적 분석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관점을 지양하고 동아시아 관계사에 기반한 입체적 접근과 한문기록과의 상관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개별 작품들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을 보다 선명하게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전망적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도록 하겠다. 사행가사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의 외교적 체험이 소재가 되어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창작&#8228;향유된 일련의 작품군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작품론으로는 해명되지 않았던 인식의 지층과 문학적 특질의 제양상은 통시적 고찰의 시야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인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작품들에 발현된 중화주의나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의 기제가 전제된 관념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그 현상적 변모보다는 작품이나 시기에 따라 斷續的으로 발현된 양상에 주목해 보았다. 또한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작품들의 창작 원리를 논증함으로써 자신의 사행록이나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사행가사의 문학적 관습과 그 지속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17세기 사행가사의 전반적 특징은 중화주의와 관련하여 형성된 화자의 인식이 서정적 층위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인데 중국과 일본에 따라 그 발현 양상과 문학적 질감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17세기 중반의 작품인 <장유가B>는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 실제적 공간 인식에 투사되어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감정적 진폭이 확인되는 작품이다. 중화의 공간을 夷狄(淸)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심정적 고뇌가 탄식과 회고의 정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남용익은 자신이 연행 도중 창작한 한시의 주요 구절들을 차용하며 체험의 서정적 결을 보완&#8228;심화해 나갔다. 반면 <장유가A>에서 일본은 중화의 주변국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화이관이 부분적으로 발견될 뿐 대체로 경험론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견문의 교술적 나열을 지양하고 초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창작함으로써 가사문학으로서의 심미적 특질이 구현되고 있었다. <장유가B>와 마찬가지로 남용익은 자신의 한시 작품들 중 환상적 미감이 발견되는 구절들을 참조&#8228;재배열함으로써 사적인 향유에서의 정서적 몰입과 효용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선 집권층은 ‘중화계승’의식을 통해 자국 인식을 강화하게 되며 이러한 대외 인식의 변모가 17세기 후반의 사행가사인 <서정별곡>, <연행별곡>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장유가B>에 비해 자국의 공간을 인식하고 표상하는 비중이 강화되었으며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탄식과 회고 의식은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청을 비난하며 중화의 회복을 염원하는 구절도 확인되지만 <장유가B>에 비하면 부분적이며 청나라 문물을 가시적으로 인지&#8228;표상하거나 개별적 시각에서 풍경을 포착하여 감흥을 표현하는 등의 변모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후기 대청 인식의 구도와 사행가사의 문학적 표상이 상응하며 변모한 현상을 확인케 하는 일차적 사례인 것이다. 또한 <연행별곡>은 자신의 <연행일기>를 토대로 창작된 정황이 확인되는 바 일기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선별되어 가사문학의 서사 내에 속도감 있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행가사 작품들은 일기나 한시 등을 토대로 서사적 축을 설정하고 주요 감흥을 보완함으로써 문학적 미감을 생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안정된 율격과 분량을 유지하며 가창 및 음영되었던 이 시기 가사문학의 존재 기반과 유사하지만 그 창작 원리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18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주요 특징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방됨에 따라 對他的 자국 인식도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초는 대청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조선의 외교 구도도 실질적인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북벌론이 주장될 만큼 중화 회복의식과 명분론에 집착했던 17세기 중&#8228;후반의 서인 집권층은 점차 청나라의 현실적 위력을 감지하게 되며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정치&#8228;문화적 안정으로 인해 연행사들은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인식&#8228;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존주론과 정통론이 강화되며 명나라 역사서가 본격적으로 저술되는 등 중화 계승국으로서의 자존적 의식을 강화한다. 기자의 계보를 추적하고 마한정통론이 대두되는 것은 물론 이 시기 연행을 다녀온 이들의 작품 속에 북방고대사 회복에 대한 소재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17세기 후반의 <연행별곡>과 <서정별곡>에서도 확인되었으며 18세기 전반의 <임자연행별곡>도 유사항 양상을 보인다. <임자연행별곡>의 내용을 보면 북방 영토에 대한 회고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명분론의 관념성과 배타성은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경의 문화적 풍경에 대한 관심과 구체적 사물을 포착한 어휘의 특성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前兆的 표상으로서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대청 사행가사의 경우 북방 고토를 인지&#8228;회고하는 방식으로 중화계승의식이 발현되어 있었지만 18세기 중반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서는 자국의 문화적 우월감과 화이론적 관념이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화자가 일본의 물질적 번영을 찬탄하고 자국의 열세를 인정하는 등 이적국을 중화의 세계로 포섭&#8228;소유하고자 열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화이관의 수치적 변화나 동향을 파악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한 실제적 의식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일동장유가>의 창작 맥락을 살펴본 결과 전대의 작품들처럼 &#985172;동사록&#985173;이라는 자신의 일기를 저본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자족적 향유의 차원을 넘어 가내 독자를 상정하여 창작된 작품인 만큼 과장이나 허구적 장면화로 자신의 능력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내용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식의 개방 및 전달 욕구가 강화되면서 김인겸은 자신의 일기를 가사 작품에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사행가사의 통시적 흐름에서 보면 이는 형식적 전변을 보이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일기를 국문가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대화체의 활용, 율격적 이완, 세밀한 묘사 등과 같이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문체 특질들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일동장유가>의 형식적 전변은 문학사적 연속성을 확인케 하는 지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세동점에 따른 근대화에 따라 사행가사에 투영된 세계 인식도 시기별, 국가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19세기 전반의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의 경우 청나라와 조선을 ‘大國-小國’의 구도 하에서 이해하며 긍정적 대청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세기 전반의 연행사들 기록에서 대체적으로 확인되는 논리이기도 하며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을 전후한 시기에 청은 엄격하게 정보 누설을 차단했기 때문에 조선 연행사들은 청의 약화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자서행록>의 화자는 자신을 ‘편방’에 위치한 ‘고루한 소국’의 ‘촌계’로 지칭하고 있어 <일동장유가>과 비교했을 때 관념적 인식 기제가 더욱 약화되고 대타적 자의식의 현실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나 중화계승적 자부심도 발견되지만 산문기록인 &#985172;부연일기&#985173;와 비교했을 때 문학적 상상이 투사된 논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면 의식이 지향하는 영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이러한 사행가사의 효용성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창작&#8231;향유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일부이며 <무자서행록>의 전반적 특성은 ‘遊覽誌’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흥미성과 전달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대의 <일동장유가>와 마찬가지로 가내 소통을 전제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전달의 효용성과 수용자의 흡인력을 제고할 수 있는 층위에서 연경에서의 체험 소재가 재조정되어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경우 일기의 서사를 유지하면서 매일의 경험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반면 <무자서행록>은 ‘遊覽’의 범주에서 소재가 선택되어 집중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고 靜態的 대상들은 사실적 정보들이 나열되면서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측면이 부각되는 부분에서는 산문기록의 서사가 파열되는 양상이 발견될 만큼 ‘遊覽’ 의식이 강화되어 이국 체험의 재현에 대한 강렬한 문학적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독자들이 <무자서행록>을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萬物圖’로 이해&#8228;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창작 의식 때문인 것이며 이는 산문기록이나 한시와 다른 층위에서 체험을 구성하고자 한 사행가사의 차별적 영역을 선명하게 확인케 하는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무자서행록>의 이러한 특징은 이후 <병인연행가>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존에는 두 작품의 차별적 영역이 고찰되지 않아 <병인연행가>의 대청관도 대체로 긍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병인연행가>의 창작 맥락과 동아사아 관계사를 고려한 결과 <병인연행가>에는 오히려 부정적 대청관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순학은 연행 도중 목도한 서양 세력에 대해 위협을 느낀 후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에 <무자서행록>에 비해 자국 인식의 측면이 강화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대명의리론이 강하게 발현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홍순학은 삼사 신분이었던 만큼 <병인연행가>에서는 대명의리론이 주된 의식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대의 <장유가>나 <임자연행별곡>과 같이 대타적 자국 인식이 강화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에 화자의 보수적 세계관이나 관습적 표현으로 간주되면서 그 의미 실질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였다. <병인연행가>를 살펴보면 <무자서행록>처럼 연경에 대한 ‘유람지’로서의 특질을 보이고 있고 그 비중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 지점들에서 화자의 주된 세계 인식을 추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들에서 <병인연행가>와 <무자서행록>의 상호텍스트성이 발견되고 있는 문학적 현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병인연행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외교적 주체로서의 체험이 반영된 부분은 산문기록을 저본으로 삼고 흥미로운 소재나 장면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무자서행록>을 참고한 정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군집화된 소재별 분류와 확장적 첨가의 방식 등을 통해 <병인연행가>는 보다 진전된 문학적 구성의 전략과 형상화의 특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시각적 재현과 관련된 장면이 독립적인 층위에서 이해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자서행록>과의 상호텍스트성이 확인되는 지점들은 <병인연행가>의 화자가 실제로 목도하거나 경험한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찰자의 시각적 체험이 <병인연행가>&#61778; 세밀한 묘사를 가능케 했다는 기존의 전제적 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으며 경험 세계에 가치 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셔유견문록>을 보면 근대화된 문물을 경탄의 층위에서 묘사함으로써 경험 세계에 압도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전단계적 현상을 <무자서행록>과 <병인연행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인연행가>와 동일한 연행 체험을 토대로 창작된 <북행가>는 문학적 소재 및 질감에서 상당한 이질성이 발견되어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국 인식’이나 ‘연경의 문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시선에서 소재를 선별&#8228;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사행가사의 소재적 ‘변이’로 인식되었던 기존의 시각을 본고에서는 소재의 ‘확장’으로 규정하여 그 문학적 특질과 의의를 해명해 보았다. 그 결과 <북행가>는 여행의 여정과 화홍과의 애정을 교차되면서 문학적 흡인력이 생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사행이라는 공식적 목적을 소거했을 때 남는 여행의 설렘과 아쉬움이 기녀와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감정적 동요의 체험과 교묘히 결합되면서 사행가사가 표상할 수 있는 문학적 특질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대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도 ‘기녀’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관찰자적 시선에 포착된 부수적 인물형들인 경우가 많았지만 <북행가>에서는 서사 과정의 중요한 축에 기녀들이 배치되면서 그들과의 관계나 감정선이 중시되고 있다. 이념에 종속된 시선이나 외국 문물의 재현이라는 층위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인간의 감정에 주목함으로써 이를 극적 장면화의 수법과 서사적 연속성의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흡인력으로 인해 <북행가>는 경북 상주의 규방 문화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소통&#8228;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본격화된 서세동점으로 인해 청 문물에 대한 적극적 호기심은 많이 감소하게 되며 사행기록도 관습적으로 반복되거나 퇴행되는 양상을 보이는 만큼<북행가> 이후 새로운 대청 사행가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인연행가>는 여러 이본들이 확인되고 <무자서행록>의 필사년도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만큼 새로운 연행가사가 창작되지 않더라도 독자층의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세계로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목도하게 된 일본과 서구 체험의 경우 각각 한 편씩의 사행가사가 발견되고 있다. <유일록>과 <셔유견문록>은 ‘중화’에서 ‘근대’로 세계 인식이 전변되는 양상을 확인케 하는 사행가사 작품들인 것이다. 사행 도중 을미사변, 아관파천, 단발령 등과 같은 격변적 사건들을 접하게 된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화된 일본의 위력과 상대적인 조선의 약세를 완전하게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일본의 기계 문명이나 군사, 세금제도 등을 긍정하고 있으며 교육과 일부 제도는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까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부정적 대일관은 대체로 ‘풍속’의 범주에 한정되어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에 <유일록>의 주된 대일 인식으로 부각되었던 화이관은 근대성 이외의 논리에서 부분적으로 발현되는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일동장유가>의 경우 발현된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과 상응하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유일록>에서의 적절한 대응 논리를 형성할 만큼의 의미 실질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중화주의를 구심점으로 동아시아와 일본을 인식했던 <일동장유가>의 경우와는 달리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성에 경도됨으로써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수용하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 <병인연행가>와 비교해 보더라도 ‘유람지’의 성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지만 <유일록>의 경우 ‘근대적 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심화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풍속의 범주를 넘어 자료에서 추출된 지식적 층위의 담론들까지 확인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선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985172;범사록&#985173;과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그 창작 원리를 규명해본 별과 대체로 한문일기의 서사를 수용하되 전달 및 기록의 욕구가 발현되는 부분에서는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무자서행록>이나 <병자연행가>와 문학적 특질의 유사성이 확인되는 바 창작 원리를 고려함으로써 그 동인을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전변의 지점들을 세밀하게 살펴본 결과 장면의 유기적 연속&#8228;확장을 위해 다른 날짜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분산&#8228;재배치되는 현상과 장면 단위 내에서도 소재들이 재배열되어 체계적 구성이 강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장면의 실제성과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연한 구조 내에 세밀한 묘사를 보완하는 등 <유일록>도 &#985172;범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문학적 특질을 확보하게 된 사행가사임을 알 수 있었다. <일동장유가>도 &#985172;동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었지만 자신의 체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층위에서 과장 및 허구의 논리가 적용된 양상을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일록>은 이미 자국의 열세를 인지한 상황이므로 근대적 문물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내용이 보완&#8228;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행가사에 투영된 대외 인식의 주된 관념이 중화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이러한 양상은 동시기 대영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에서 더욱 명확하게 발견된다. 특히 잔존하는 중화적 사고로 일본에 대한 이적관이 부분적으로나마 확인되는 <유일록>과 달리 영국의 경우 근대화의 구심점으로 설정되어 찬탄의 시선만이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대와 달리 동아시아를 벗어난 외교 체험이 소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중화주의가 근대적 세계관으로 교체되는 轉變 양상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일록>에도 근대적 문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전제되어 있지만 중화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해 발현된 이적관과 자국의 열세에 대한 한탄도 대타적 자의식의 기제로 표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셔유견문록>에서 확인되는 자국 인식의 구심점은 ‘근대성’이며 영국을 ‘제나라’로 환치하여 이해할 만큼 근대적 세계에 대한 맹목적 동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패도적 국제 관계를 분쟁&#8228;종식케 하는 권력의 주재자로 영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구원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당시 지식인의 내적 반응이 투사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2년은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의 대영 체험과 그 인식 속에는 자국의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셔유견문록>도 &#985172;서사록&#985173;을 저본으로 삼되 근대적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감흥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985172;서사록&#985173;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허구적 요소를 첨가하여 조선과 영국의 친밀한 관계를 상정하는 등 인간적 내면이 형상화된 문학적 공간을 발견할 수 있는 가사작품으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품의 주된 표현 특질을 보면 관념적 인식이 거의 작동하지 않아 역동적인 문체로 근대적 세계가 감각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상적 장면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서사가 파열된 지점은 물론 감각적 재현을 위해 율격이 이완되어 있는 사례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회정 과정에서 화자는 시&#8228;공간을 압축한 듯한 자신의 체험을 속도감 있는 문체로 표현하는 등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확연하게 변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현전하는 마지막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은 전대의 작품들과 유사한 문학적 창작 원리를 보이지만 세계관적 전환이 여실히 확인되고 그 과정에서 변화된 문학적 특질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에 있어 동아시아 관계사와 중화&#8228;화이관에 내재한 대타적 자국 인식의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단편적 작품 분석이나 평면적 비교의 한계적 시각이 극복될 수 있었다. 또한 개별 작품들의 창작 원리가 해명되어 사행가사 작품들이 문학적 특질과 그 의의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 전근대 지식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차원이 가장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는 것은 자국의 경계 밖에서 사유하게 된 계기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리고 낯선 공간의 이동에 따른 다양한 체험들은 시적 주체의 시선이 유연해짐에 따라 상당히 넓은 편폭으로 수렴되어 국내 기행가사가 담당할 수 없는 층위의 경험과 어휘들로 구현된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단일성은 물론 서사적 인과성도 유지되지 않으며 인식과 구조의 이러한 이완 양상은 작품의 장편화는 물론 문체 특질의 변화와 직접적 상관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행가사의 특질이 변모하게 되는 동력 내지는 주요 표지로서 사행가사의 변모 양상은 큰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행가사의 창작 및 향유와 관련된 기록들을 고찰함으로써 작품들의 실질적 창작 동인과 수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나 창작 주체에 따라 정서적 환기, 기억과 재현의 매개체, 향유층의 추체험, 의식적 열망의 대체물 등 다양한 문학적 기능이 발현되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 문학’의 시각과도 조응되며 낯선 세계에서 촉발된 자아의 내면이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하며 국문시가와 접속했음이 사행가사를 통해 확인된다. 기존에 사행가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이러한 시각은 내재적 분석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들이 실질적으로 내포했던 당대의 사회&#8228;문화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본고의 논의는 조선시대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 기행을 소재로 창작된 국문시가 작품들과의 비교&#8228;분석도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학 양식은 일정한 역사성 위에서 형성&#8228;변모하는 ‘세계 인식의 질서’이며 새로운 시대에 따라 경험의 표현도 변화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 매체나 새로운 형식과 관련된 단절이나 연속의 지점들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단절적 지층이 반성적으로 조망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행을 소재로 한 국문시조 및 국문 사행록, 기행가사 등을 통해 공시적인 층위에서의 심화된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이본들이 발견되는 작품들의 경우 면밀한 고증을 통해 필사 및 향유의 실태를 규명해 보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작품들을 새롭게 분석할 수 있는 의미망이 생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전시가는 민족의 언어로 당대인들의 절실한 내면이 형상화되어 있고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울림에 공감하고 향유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름답다. 본고의 논의를 토대로 고전시가의 미학적, 성찰적, 현재적 의의를 더욱 선명하게 규명하기 위한 확장적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 三灘 李承召의 漢詩 硏究

        이정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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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인 三灘 李承召(1422~1484)의 한시를 분석하여 그의 시세계를 집중 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한시사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해 보았다.Ⅱ장에서는 삼탄의 생애ㆍ교유 관계ㆍ시풍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았다. 사행시를 대상으로 이국의 문물을 보는 시각이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뉘는 것, 역사 유적지를 지나며 과거에 대한 회고의 정을 읊거나 혹은 이를 통해 현재를 감계하는 시들, 여행 과정에서 느끼는 객수와 향수를 형상화 한 시들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시들은 사행시기에 지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遠遊에 대한 기대감이 짙게 드러나기도 하고, 이국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황제의 덕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특히 1차 사행에서는 중국으로의 유람에 대한 기대감이 시의 큰 축을 형성하며 詩想을 지배하는 반면, 2차 사행에서는 身病ㆍ歎老ㆍ客愁 등의 정서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2절에서는 교유시 가운데 轉送詩를 중심으로 삼탄의 시대 인식과 그가 지향한 官人의 形象을 고찰하였다. 삼탄은 백성의 삶이 오직 관리의 다스림에 달려있다는 의식 하에 당대에 필요한 관리유형의 하나로 循吏型 官人을 제시하였다. 또한 백성을 교화할 책임이 지방관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厚德과 寬仁한 敎化의 담당자로서의 官人型을 제시하였으며, 부임하는 지역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상이하긴 하지만 역시 藻鑑과 담판의 능력을 지닌 실무자로서의 관인형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는 민생의 문제에 대한 삼탄의 고민과 함께 그가 정치 현실에서 느끼는 인재의 필요와 새롭게 요구되는 이상적인 관인상에 대한 고민이 맞물려 이루어낸 이상적인 관인형상이라고 하겠다. 3절에서는 삼탄의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귀거래 의식을 고찰하였다. 삼탄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理想的인 精神境界를 드러내기도 하고 자연을 物外閑適의 空間이나 明哲保身의 空間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삼탄은 환로에서 느끼는 피로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명의식과 속진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청정한 자연 속에서 조화와 합일의 삶으로 해소해 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관료로서의 귀거래 의지는 致仕하고 歸田園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정신적인 지향은 하나의 관념으로 다만 의식 속에 머물 뿐, 실제로 삼탄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환로에 있으면서 동시에 시의 곳곳에서 귀거래를 염원하였다. 4절에서는 삼탄의 제화시를 대상으로 형상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삼탄은 서화의 감상에서 오는 예술적 흥취를 현실 생활에 속박된 자신의 긴장된 정신을 이완&#8228;융해할 수 있는 원천으로 보고, 그림을 감상하고 여기에 시를 붙이며 향유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 삼탄이 그림을 제할 때 화의에 집중한 시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관습적으로 해석했는지, 주관적으로 해석했는지 나누어 분석하였다. 특히 화의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시들에서는 삼탄만의 기발한 상상력과 점화적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시들에서는 삼탄 제화시의 개성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시인이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형상화되어 있는 시들은 그림의 가상성을 인식하고 이를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돌려 이것을 주제화한 것으로 15세기 제화시의 경향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Ⅳ장에서는 삼탄 시의 형식미와 시사적 위상을 고찰하였다. 삼탄은 다양한 시체를 구사하여 성현에게서 ‘중류를 모아 집대성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가운데 칠언율시와 장편고시가 두드러지는데, 칠언율시에서는 첩자와 대장의 공교로운 운용을 통해 정제미를 더하였고, 장편고시에서는 시상의 연결을 염두에 두며 단락의 절주와 연결의 안배를 적절하게 하여 유창하고 우렁찬 기세 높은 시격을 이루었다. 삼탄의 시를 평한 ‘無斧鑿痕’은 點化가 잘된 경우를 평하는 용어로, &#985172;용재총화&#985173;와 &#985172;해동잡록&#985173;에서도 ‘도끼로 찍고 끌로 찍은 흔적이 없다’고 하여, 삼탄이 시에서 점화적 작법을 매우 잘 사용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세속의 명리에서 벗어나 자연과 전원을 동경하는 마음을 담거나 또 거기서 한적한 시간을 누리는 내용의 시들은 담박하고 평이한 시어로 자신의 내면의 정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기에 ‘平澹’한 풍격을 이루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칠언율시의 정제미와 여운미를 적극 활용하여 함축과 여운의 심미성이 돋보이는 시적 경계를 일구어 냈기에 ‘&#37278;藉’ 풍격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 강우식 시(詩) 문학 연구

        김선희 경기대학교 2006 국내석사

        RANK : 199519

        문학에서의 성(性)이라는 소재는 비단 우리나라 뿐 만이 아니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심리적 측면에서 성(性)과 관련된 표현과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들만의 작품을 창조해 내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도 에로티즘의 형상화는 인간 생명에 내재된 원초적인 본연의 속성을 내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성(性)을 다룬 시인들이 더러 존재하지만, 강우식은 60년대에 등단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꽃’을 비롯한 자연물을 소재로 에로티즘적 생명성을 내면화시키고 있다. 강우식 시인은 일찍이 우리 시단(詩壇)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성(性)을 소재로 한 다소 파격적인 표현을 사용한 내용면과, 사행시(四行詩)라는 형식을 고집한 형식면이 그의 시(詩) 작품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강우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전반적인 한국의 현대시를 연구하며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 검토하여 제시한 연구는 존재한다. 하지만 강우식 시인과 그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구체화시킨 연구는 많지 않다. 이에 본 논문은 강우식의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의 분석을 통하여 그의 시(詩)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시인이 추구하고자한 문학적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주제론적 분석을 통해 살펴보고, 아울러 사행시(四行詩)와 시극(詩劇) 등의 형식을 통해 시인이 구현하고자 했던 방법의 실체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강우식의 시(詩)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 내용상의 특징과 형식상의 특징의 탐색과 파악을 위해 강우식의 시(詩) 세계의 시적 원리와 특성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았다. 강우식 시(詩)의 내용적 특징은 성(性)을 소재로 한 시(詩), 그가 추구하는 사랑 시(詩), 자연과 함께하는 시(詩), 역사 시(詩) 등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성(性)을 소재로 한 강우식의 작품들은 성(性)을 소재로 한 시(詩)는 쓸 수가 없다는 생각과 아름다운 단어들로만 시(詩)를 써야 한다는 시(詩)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깨뜨려 주었다. 이러한 성(性)에 관한 시편들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 수 있는 한 방법을 실험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우식 시인이 자신의 시(詩)에서 추구하는 것이 육체적인 사랑만을 위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행시집인 『설연집(雪戀集)』을 통해서 자신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또한 강우식은 시(詩)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을 염두에 두고 줄곧 작품을 써왔으며, 그의 작품은 인위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自然)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한편, 강우식은 역사를 소재로 하여서도 작품을 썼는데 그의 두 번째 시집인 『고려(高麗)의 눈보라』라는 작품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의식은 이 민족의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중 강인한 역사의식과 민중의 한을 담은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식면에 있어서는 그의 대표적인 특징인 사행시(四行詩)를 비롯하여 연작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산문시, 시극(詩劇) 등의 분류를 통해 분석하였는데 강우식 시(詩)의 가장 큰 특징인 사행시(四行詩)는 고전시가와의 연계로 삼행의 시조 전통을 수용하여 사행으로 변모·창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시인이 시(詩) 장르에서부터 우리의 전통에 그 인식을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형태의 연작시, 즉 장시(長詩)의 작품들도 다수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한두 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십 편이나 되는 연작을 형성했다는 점에서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아울러 강우식의 두 번째 시집인 『고려(高麗)의 눈보라』에서는 시행을 나누지 않고 서정적으로 시화하여 묘사하는 산문시를 보여주었다. 문학이나 시(詩)를 쓰는 일차적(一次的)인 이유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강우식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리라고 본다.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강우식 시(詩)의 시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내용상의 시사에서는 강우식 시(詩)의 대표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성(性)적 관심을 중심으로 하여 에로티즘적 생명성 추구, 생명 원리에 내재된 자유의지의 발현, 그리고 생명 존재의 실체에 관한 소통적 질서 구축 등의 세부 내용을 통하여 강우식 시(詩)가 갖는 시사적 특징을 제시하였고, 형식상의 시사에서는 그의 시(詩)에 드러나 있는 사행시(四行詩)의 특징을 통해서 시사점을 고찰하였다. 본 논문을 통해 강우식 시(詩) 자체의 특성은 물론 시(詩)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며 한국 현대 시사에서 독자적인 시(詩)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강우식 시(詩)의 특징과 그의 시(詩) 세계를 알아보는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한 우리는 강우식이라는 시인의 작품과 그의 인생을 통해서 시(詩)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와 형식 및 작품을 통해 시대적·사회적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인생관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및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 연구가 강우식의 시(詩)를 분석하고 제시하는 기초 자료로 끝나는 연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강우식의 시(詩)에서 나타내고 있는 여러 접근 방법과 해석 방식, 그리고 다양한 분석 방법을 비단 강우식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시인에게도 적용시켜, 학생들에게 시(詩)문학이 지니고 있는 다양성과 장점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이 논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Sexuality in literary works is a critical subject matter not only in current Korean literature but also in all times and countries, which especially relates psychological aspects with its literary expressions and ideas in writing. The representation of eroticism in modern Korean poetry is viewed as an internalization of the basic nature and instinct inherent in human life. Once in a while there were found some Korean poets dealing with sexuality, and Woo-Sik Kang is a representative figure of 1960s who internalizes erotic vitality of human nature by adopting such natural objects as flowers. The poet gave the Korean poetical circles a literary shock and had their attention during the times. It is his feature that he adopted unconventional expressions relating to sexuality and willingly wrote his works in the form of quatrain. Existing researches have been done to evaluate and review Woo-Sik Kang's works because he held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poetry. Concrete research and exploration focused upon the poet and his works, however, are still rare. Thus, this paper deals with his perspectives towards poetry by analysing his collection of poems. First of all, thematic approach seeks to answer what he pursued as a literary orientation. And the meaning and substance of his preferred writing method such as a poetical drama and quatrain as a matter of form are inquired. The research outcomes are summarized as follows: The question of how his poetic views, principles, and characteristics are visualized and represented is studied in order to understand the conceptual and format features, which contribute to his poetic works. It is necessary to explore the thematic, conceptual traits of his poems relating respectively to sexuality, love, nature, and history. The pursuit of sexuality in his poems broke a stereotype idea that sexuality-related poems are not allowed to write during the times when poems were thought to be written only with charming words and expressions. His works were, in this sense, so experimental that poetic works involved with sexuality likely played a role to lead our society in a more fruitful and healthier way. It was not that only bodily love emotions were pursued in his poems. He showed readers that he was eager to sing pure, beautiful love in such his collection as Snow's Love, which is a quatrain collection. Since he began writing poems, his interest in nature was not disregarded all the time. He aimed at seeking what being natural is, not by creating something superficial but by habituating in nature. He wrote, in addition, about history. What is consistently told in Snowstorm in Goryeo, his second poetic collection, is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that the people had in mind. Hence, it is certain to conclude that one of his sense of values was his strong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at he wrote about the grudge and heartburning of the people in the works. Another representative feature of his poetic style is summarized and classified as quatrain, sequence, and prose poem based on experiences. Quatrain, which is most critical in explaining his style, was developed and created into four-line format by adopting the features of three-line Korean verse. This shows that the poet willingly cared about our poetic tradition even in terms of the genre. And he used the format of sequence or a long series of poems in many of his writings. It is meaningful that his works in this format of sequence were not rare but shaped a series, which is about 30 pieces in number. Prose poems are also a meaning finding. In his second collection Snowstorm in Goryeo, he showed us the poem which does not divide lines and describes and lyrically poetizes his ideas and impressions. The primary concern to write poems is said to console and comfort the poet himself, and he is shown to satisfy his objectives by his writing in this sense. The implications of Woo-Sik Kang's poems are studied as above, based upon the research results. In terms of content or subject matter, his poems were focused on his interest in sexuality, his erotical pursuit of human vitality, manifestation and revelation of free will inherent in life principles, and construction of the communicative order regarding the substances of human existence, and these provide the evidence that he actively took part in forming current social issues. And the implications of his quatrain as well are explored in terms of format of his poems. The paper offers an opportunity to fully, by and large, understand his views on what poetry is as well as an insight regarding the poet's poems and the features. The study in the sense is quite meaningful because the poet is evaluated as an independent, experimental figure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poetry. And also the readers will be able to gain diverse connecting links which are social and historic, by studying his works, his life story, and many aspects such as meaning and format witnessed in poems. Ultimately, it is also beneficial that we obtain educational effects through the lessons about our modern society by reading his life viewed in the works. It is not to be thought that the research analyzes his poems and offers basic materials to think about. Furthermore, the paper offers an analytical framework, method of approach and ways of interpretation which are applicable not only to Woo-Sik Kang's poems but also to other poets as well. The paper eventually seeks to inform students of the diversity and merits that poetry has as a literary genre.

      • 馮至 문학의 실존론적 회귀의식 연구

        김미영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석사

        RANK : 183103

        펑즈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0년대 문화계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1940년대 대표 작가군에 포함된다. 펑즈는 당시 주류적인 방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목소리로 시대의 고통을 은유적으로 노래했다. 펑즈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인간 고독에 대한 원초적인 접근, 개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 본원적 진실에 대한 갈망 등은 항전 의지를 고취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중일전쟁 시기 여느 항전 작품들과는 다른 풍격의 문학을 만들었다. 그가 집중했던 것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실존이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시기로 접어들면서 중국 문단에서 ‘개인’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급격히 줄어든 반면, 펑즈 작품에 드러나는 개인의 실존의식은 더욱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 아이칭(艾靑) · 허치팡(何其芳) 등 모더니즘을 부르짖던 동시대 다른 시인들은 중일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현실 참여형으로 창작 풍격을 바꾸며 주류 문단으로 흡수되었다. 그에 비해 펑즈는 오히려 중일전쟁이 있었던 7년 남짓의 시간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실존의식을 더욱 체계화하며 왕성하게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시집 ≪십사행집 十四行集≫, 중편소설 ≪오자서 伍子胥≫, 산문집 ≪산수 山水≫등의 작품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펑즈는 “작가에게 중심 사상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중심사상은 바로 인간이었다. 즉 시대가 모두 전체를 외쳤던 때에, 펑즈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을 노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시작(詩作)에서 이미 개인의 고독에 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던 펑즈는 1931년 독일 유학길에서 릴케와 실존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실존’으로서의 고유한 운명을 지니고 있고 외로운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독자적인 결단의 주체라는 사실을 익히게 된다. 학습을 통해 이해한 실존의식을 그저 머릿속의 개념으로만 그치게 하지 않고 몸소 체득하게 한 사건이 바로 중일전쟁이었다. 펑즈는 전쟁 중에 타인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고통의 근원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는 시대 속에서도 불변하는 근원적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그가 꾸준히 가지고 있던 실존 문제가 더욱 체계화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펑즈의 사상 전반을 지배하던 릴케와 괴테, 또한 학문적 양분으로 받아들인 실존철학을 이어주는 열쇠말은 실존의식이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펑즈에게 실존의식이 머릿속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십 여 년의 창작 공백을 깨고 문학의 언어로 활동하고, 실존이 거주할 공간으로 회귀하게 한 것은 중일전쟁 시기 쿤밍과의 만남이었다. 때문에 펑즈의 작품이 개인의 내면적 노래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노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펑즈가 그 시대의 주선율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스스로의 화음을 만들어나갔는지를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실존론적 회귀의식을 바탕으로 살펴보려 한다. 중일전쟁 기간에 쓰인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주류의 방식과는 달리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는 펑즈만의 사유 방식을 연구하는 것은 펑즈라는 인물의 문학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중일전쟁이 있던 7년의 세월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두어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중일전쟁 기간의 창작 중에서도 그의 사유가 변화하는 흐름의 지점을 찾아나가는 것 역시 연구 과정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중일전쟁 시기 펑즈가 가지고 있던 실존론적 회귀의식이 그의 작품 속에서 의지적인 삶을 보여주었고, 자연과 하나 되게 만들었으며, 타인과 소통하며 타인의 고통까지 어루만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의식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또한 신중국 성립 이후에 발표한 신정권에 흡수되어버린 듯한 일련의 글들 사이에서 중일전쟁 시기 창작이 전쟁 이후 시기의 사유와 충돌 없이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원인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궁극적으로 1940년대에 문학적으로 독특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1940년대 중국문학사를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점을 궁극적인 연구의 목표로 삼는다.

      • 使行歌辭 硏究 : <日東壯遊歌>와 <丙寅燕行歌>를 중심으로

        송미숙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183087

        This thesis is a study on Sahaeng-Kasa, a travel account of governmental delegation in the form of kasa. This thesis tried to study of Ildongjanyuka, Byunginyeunhaengka mainly, which have been said to be most famous works of Sahaeng-Kasa. The followings are the synopsis of the results of the study. Kim In-Kyun, the author of Ildongjanyuka, came out of the nobility strain. The very fact, however, that he was an illegitimate unabled him to enjoy promotion, in spite of his outstanding literary talent. He was a very strict person enough to make direct appeal to his superior in the face of unjustice. On the other hand, he was a man of humanity and had a great love for the nation as well. Ildongjanyuka such personal characteristics can be found in many places easily. Hong Soon-Hack, the author of Byunginyeunhaenga, was not impaired by his social status like Kim In-Kyum, even though he wasn't out of the nobility stock. He was as brigh as to pass the state-run exam, Byunggwa, for civil servants at the age of 16. He advanced further in government hierarchy to be one of the three enboys at the age of 25 when he was appointed as a mentor of the delegation to China. His work, Byunginyeunhaenga shows his youhtful vitality and his enotional thouch also. In describing the foreign natural feature, Kim In-Kyum resorted to some ideal and abstract style. On the contrary, Hong Soon-Hack gave it a menute amount using descriptive and realistic words. Especially, both authors' attention was largely drawn to the people and their cultures. That is belibed to be most important part of Sahaeng-Kasa to attract reader's interst. Even in this matter, they presented a streicking contrast. While Kim In-Kyum experssed his strong subjectivity in his work, Hong Soon-Hack introduced the people and their culture as they were, upon the destination, the purpose, and each person's position. Especially, all member of delegation to Japan had to keep Korean's dignity. Among them, the secretary was so demending that he was supposed to write many poens everday throughout the delegation's trip. Therefore, we can emagine that Ildongjanyuka was under such influence of circumstances. By contrast, Hong's duty in the delegation to Ching wasn't so demanding one as that of Kim. Without feeling any pressure fron his daily duty he was able to make his work a detailed accoung of delegation's trip from the landscape to the culture. Sahaeng-Kasa is a part of trabel sketch in the form of Kasa which has various characteristics. Like in Ildongjanyuka Byunginyeunhaenka, the style of Sahaeng-Kasa was largely dependent upon the writer's character and also upon barious conditions in terms of its quality and quantity. From this standpoint, Sahaeng-Kasa should be understood as an important part of Koeran Literature of later Yi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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